전주 KCC 이지스
이충희·신선우·이상민·서장훈에 이어
최근 영입한 강병현까지.
KCC 이지스는 실업무대부터
수많은 슈퍼스타들을 보유하며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굉장히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는 팀이다.
성적 또한 꾸준히 유지하며 명문구단으로서 입지를 굳건히 하고 있는 KCC.
오늘은 이들의 스토리를 써내려가볼까 한다.
97시즌(7승 14패 정규리그 7위)
슈퍼스타의 부재
현대전자는 실업시절 뛰어난 성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프로로 무대를 옮긴 후 대전 현대 다이넷이란 이름 아래 치른 첫 시즌이었던
97시즌엔 그 영광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상민·조성원·김재훈 등 팀의 주축으로 활약해야 할 선수들이
아직 군복무중이어서 팀에 합류하지 못한채 시즌을 치뤄야 했던 것.
유도훈과 정진영이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등
팀의 주전으로 활약했지만 무게감은 떨어졌고
이지승 외엔 팀에 파이팅을 불어넣어 줄 선수도 없었다.
기대를 모았던 토드 버나드는 나홀로 플레이로 벤치의 신임을 잃었다.
플레이오프 커트라인과는 겨우 한경기차에 불과히지만,
설령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하더라도 합격점을 받긴 힘든 성적이었다.
97-98시즌(33승 12패 정규리그 우승/플레이오프 우승)
이조추 그리고 맥도웰
비록 원년시즌엔 부진을 겪었지만 현대의 차기시즌은 기대해 볼만 했다.
이상민과 조성원이 전역하여 팀에 합류하였고
1996년 입단 계약을 체결했던 추승균 역시 대학을 졸업하며 프로무대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게다가 19순위로 트라이아웃에선 비교적 관심을 받지 못했던 조니 맥도웰이 가세한 것은 화룡점정이었다.
103kg에 달하는 당당한 체구와 타고난 농구 센스로 KBL 무대를 호령했던 것.
이조추 라인의 위력은 전성기가 지난 기아(현모비스)의 허동만 라인을 능가했다.
이상민은 송곳 같은 패스와 게임 리딩으로 팀을 이끌었고
추승균과 조성원은 수비와 조직력, 외곽슛 등에서 팀의 뒤를 받쳐주었다.
시즌내내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준 현대는 신생 돌풍을 일으킨 LG를 따돌리고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상민과 맥도웰은 각각 정규리그 MVP와 용병MVP를 수상하며
현대의 전성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예고하였다.
2년 연속 4강 플레이오프에 올랐지만
에이스 전희철이 왼쪽 무릎 부상을 당한 동양(현오리온스)을 가볍게 3연승으로 밀어낸 현대는
원년시즌 통합 챔피언이었던 기아를 맞아 97-98시즌 통합 챔피언에 도전했다.
챔피언결정전에 오르기전까지 거침 없이 달려왔던 현대였지만
역시나 통합 챔피언으로 가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허재가 부상투혼을 발휘한 기아와 최종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던 것.
무서운 기세로 득점을 올려대던 허재의 활약에 우승컵을 내줄 뻔했던 현대는
그러나 7차전에서 잇따라 실책을 범한 클리프 리드를 맞아
맥도웰과 제이 웹이 활약하며 4승을 먼저 따내는 데에 성공하며
'무적함대'의 시작을 알렸다.
98-99시즌(33승 12패 정규리그 우승/플레이오프 우승)
천하무적
웹 대신 재키 존스가 남은 용병 한 자리를 채운 98-99시즌의 현대는 결론부터 말하면 천하무적이었다.
이조추와 맥도웰이 건재한 가운데 존스가 합류한 것은 신의 축복과도 같았다.
존스는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팀의 골밑을 책임지며 리바운드와 블록슛으로 상대를 주눅 들게 했고
팀에서 가장 많은 101개의 3점슛을 성공 시킬 정도로 놀라운 외곽슛 능력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존스가 위력을 발휘한 부분은 뭐니뭐니해도 속공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냈다는 부분이었다.
리바운드 후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쭉쭉 뻗어나가는 존스의 아웃렛 패스를 받아
이상민·조성원 등이 속공으로 마무리 하는 공격은 98-99시즌 현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상민과 맥도웰은 각각 2년 연속으로 MVP와 용병MVP를 수상하며 여전한 호흡을 과시했고
추승균은 존스와 함께 팀의 수비를 책임지며 수비상을 수상하였다.
흠잡을 곳 없는 시즌을 치른 현대는 플레이오프에서도 완벽했다.
플레이오프 4강에서는 나래(현동부)를 3경기만에 집으로 돌려보냈고
챔피언결정전에서 다시 만난 기아에게는 진통제를 맞고 출전한 김유택이 활약한 2차전만 내줬을 뿐
시리즈 내내 압도적인 기량을 과시하며 4승 1패를 기록,
2년연속 통합우승을 달성하였다.
이상민은 챔피언결정전 사상 최초로 트리플-더블(1차전 18득점 12리바운드 11어시스트)의 대기록을 세웠으며
조성원은 시리즈 내내 불붙은 3점포를 선보이며 이상민을 제치고 챔피언결정전 MVP로 선정되는 기쁨을 누렸다.
99-00시즌(33승 12패 정규리그 우승/플레이오프 준우승)
계속 된 변화
"변화 없이는 정상에 머무를 수 없다."
이것이 신선우 감독의 농구 철학이었다.
이러한 철학이 있었기에 현대는 준수한 활약을 펼치던 웹을 과감히 방출시킬 수 있었고
현대 농구에 색깔을 더해준 존스를 영입할 수 있었고 완벽한 2연패를 일궈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완벽한 우승을 뒤로 하고 신선우 감독은 또 한번의 변화를 단행했다.
존스를 과감히 트레이드 시키고 SK가 드래프트에서 지명한 로렌조 홀을 영입한 것.
'무리가 아니냐'는 지적 속에 팀명칭을 걸리버스로 변경하고 맞이한 99-00시즌.
정규시즌에 들어서자 개막전 고개를 들었던 지적과 비판들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팀의 2년 연속 통합우승의 주역들인 이상민·조성원·추승균·맥도웰이 변함 없는 활약을 펼쳤던 것.
비록 SK에 정규리그 우승을 위협받을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진 못했지만
챔피언의 저력을 앞세워 3년 연속 통합우승도 무리는 아니다라는 평을 들으며 4강 플레이오프에 직행한 현대.
그들은 김성철과 데니스 애드워즈를 앞세워 올라온 SBS의 돌풍을 또다시 3:0으로 잠재웠다.
3년연속으로 4강 플레이오프에서 3:0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가 챔피언결정전에서 맞붙은 상대는 정규리그 MVP 서장훈과 그들이 버린 존스가 버티고 있던 SK였다.
시리즈는 정규리그에서는 박빙의 승부를 펼쳤지만 2년 연속 통합우승으로 내공을 쌓은 현대의 우세가 점쳐졌다.
하지만 현대는 서장훈과 존스라는 트윈타워에 무너지고 말았다.
홀은 골밑에서의 무게감은 대단했지만 SK의 기동력을 따라잡지 못했고
기복 없는 활약을 펼치던 추승균은 로데릭 하니발의 수비에 막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자제력을 잃은 맥도웰의 이기적인 플레이가 더해져
언제까지고 지속 될 것만 같던 '현대 천하'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00-01시즌(20승 25패 정규리그 6위/플레이오프 6강)
시행착오
챔피언결정전에서 높이의 중요성을 절감한 현대는 엄청난 변화를 단행하였다.
팀과 영광을 함께 했던 조성원과 김재훈을 내보내고 양희승·정재근 등을 영입한 것.
거기에 잃어버린 기동력을 찾기 위해 홀과의 재계약을 포기하며 다시 한번 새로운 용병 수급에 나섰다.
하지만 맥도웰의 새로운 파트너로 낙점 받았던 에릭 던은 기량 미달로 시즌 개막에 앞서 퇴출되고
맥도웰과 이상민은 각각 종아리 근육 파열·발목 부상을 당하며 정상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했다.
1라운드를 4승 5패로 마감하는 등 시즌초 기대치를 밑도는 성적으로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던 현대는
대체용병 데이먼 플린트와 새로 팀에 합류한 양희승·정재근이 적응을 끝마치자
시즌초반의 부진을 만회하며 시즌 막판 선전,
6위로 플레이오프에 오르며 체면을 세우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1년전 챔피언결정전에서 만났던 SK와 6강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현대는 1년전보다 훨씬 무기력해졌다.
플린트가 있었어도 높이·기동력 모두에서 전력상 열세였던 현대는
대체용병으로 영입한 레지 타운젠드의 부진에 쓰린 가슴을 부여잡을 수 밖에 없었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 2연패로 허무하게 무너진 현대는
그렇게 현대라는 이름 아래 참여한 마지막 시즌을 접고 말았다.
01-02시즌(30승 24패 정규리그 3위/플레이오프 4강)
컴백! 재키 존스
현대전자가 금강고려화학에 인수되며 현대의 새로운 구단명은 자연스럽게 KCC로 변경되었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가 딸에게 선물한 방패의 이름인 '이지스'를 그대로 따와
팀명으로 확정한 KCC는 연고지도 전주로 옮기며 전주 KCC 이지스라는 이름으로 제2의 도약을 선언했다.
3년 연속으로 용병 MVP를 수상했던 맥도웰과의 재계약을 포기하는 등
기존의 시즌들과 마찬가지로 팀 전력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도 계속되었다.
맥도웰을 포기하며 KCC가 영입한 선수는 팀에 두번째 우승을 선사했던 재키 존스와 르나드 존스였다.
하지만 기량미달로 르나드 존스가 시즌 개막도 전 퇴출을 당해 시즌 개막도 전 미끄러졌던 KCC는
설상가상 믿는 구석이었던 재키 존스마저 부상으로 6주간의 결장이 불가피해졌다.
재키 존스가 자리를 비우고 대체용병 캔드릭 브룩스마저 한계를 드러내자
팀은 9위까지 떨어지며 위상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KCC는 재키 존스가 부상에서 복귀한 12월 25일부터 대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에 복귀한 재키 존스는 산타크로스가 선사한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았다.
재키 존스의 팀을 먼저 생각하는 플레이와 공수에서의 맹활약이 계속되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던 팀 전력도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추승균·양희승·정재근 등의 장신 라인업이 펼치는 토탈 농구는 내외곽을 막론하며 위력을 과시했고
99-00시즌 삼보에서 활약했던 제런 콥도 재키 존스의 부담을 덜어주며 선전했다.
재키 존스 합류후 10연승을 내달리는 등 시즌 마지막 17경기에서 14승 3패라는
호성적을 기록한 KCC는 3위까지 성적을 끌어올리며 정규시즌을 마감하였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도 신바람을 이어가며
오랜만에 4강 플레이오프에 오른 KCC의 상대는 3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서 맞닥 뜨린 SK.
SK를 상대로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여준 KCC는 최종 5차전에서
석주일에게 결승 3점슛을 얻어맞으며 더 높은 곳으로의 비상에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시즌초중반의 부진을 딛고 일궈낸 4강이라는 성적은 분명 만족스러운 성적이었다.
02-03시즌(20승 34패 정규리그 9위)
국가대표 라인업의 부조화
재키 존스가 마약 파문을 일으키며 한국을 떠났고 양희승이 FA자격을 얻어 이적했지만
02-03시즌 개막전 KCC는 당당히 우승후보로 꼽힐만한 전력을 구성했다.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이상민·추승균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건
'에어 본' 전희철을 영입하는데 성공한 것.
국가대표 콤비에 국가대표 한명이 더 합류하여 국가대표 트리오를 결성한 KCC를 향한 팬들의 기대는 대단했다.
2년동안 몸에 익힌 토털 바스켓이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가대표 라인업은 생각만큼 위력적이지 못했다.
추승균과 활동 반경이 겹친 전희철이 팀에 녹아들지 못하며 최악의 부진을 겪었고
새로운 용병 콤비인 드미트리우스 몽고메리와 벤 퍼킨스는 시즌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다.
설상가상 00-01시즌 신세기(현전자랜드)에서
17.6득점 13리바운드 2.3블록슛을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던
대체 용병 요나 에노사는 7.4득점 7.5리바운드라는 말도 안되는 기록을 보여주며
신선우 감독과 팬들의 얼굴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엄청난 기대를 받으며 시작했던 02-03시즌의 최종 성적은 20승 34패.
원년시즌 이후 가장 나쁜 성적이었다.
03-04시즌(39승 15패 정규리그 준우승/플레이오프 우승)
왕의 귀환
02-03시즌 최악의 부진을 겪었던 KCC였지만 이 부진 덕분에(?)
그들은 용병 드래프트에서 높은 지명권을 가져와
찰스 민렌드라는 새로운 한국형 용병을 지명하는데 성공하였다.
민렌드는 27.2득점(1위) 11.3리바운드(2위)로 팀의 기대대로 맹활약하며 팀을 이끌었다.
게다가 시즌 중반에는 조성원을 전희철과 맞트레이드 시키며 재영입,
부실한 외곽 라인을 강화하며 상위권을 계속해서 유지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주성·리온 데릭스의 철옹성 같은 TG삼보(현동부)의 골밑을 넘보기엔 무스타파 호프로는 부족했다.
결국 KCC는 큰 결단을 내리며 호프+204 신인드래프트 지명권↔R.F 바셋(모비스)이라는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KCC와 모비스를 향한 KBL 팬들의 비판은 거셌다.
같은 계열사의 구단을 밀어주며 시즌을 포기하느냐며 팬들의 항의를 받은 모비스,
눈앞의 성적 때문에 미래를 버리느냐는 질타를 받은 KCC 모두 팬들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하지만 KCC는 성적에 있어서만큼은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였다.
오랫만에 밟은 챔피언결정전에서 허재의 화려한 은퇴를 위해
투지를 불사른 김주성이 버티고 있던 TG삼보를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꺾고 통산 세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린 것.
이상민은 챔피언결정전 MVP에 선정되며 모처럼 밝은 미소를 보여주며 손가락 세개를 펼쳐보였고
조성원은 챔피언결정전 MVP를 수상하던 2연패의 순간에도 보이지 않던 눈물을 보이며 감격을 온 몸으로 표현해냈다.
04-05시즌(34승 20패 정규리그 준우승/플레이오프 준우승)
지켜내지 못한 우승컵
신선우 감독은 그간의 농구 철학을 거둬들이고 우승 멤버를 고스란히 끌어 안고 04-05시즌에 돌입했다.
사실 이는 굉장한 모험이었다.
용병 MVP 민렌드야 차치하더라도 자밀 왓킨스·크리스 랭 등
자유계약제를 통해 엄청난 네임벨류를 자랑하는 포스트맨들이 대거 한국무대를 밟았음에도
상대적으로 이름값이 떨어졌던 바셋까지 끌어안고 가는 건 위험 부담이 컸다.
이 위험 부담을 확인하는 데에는 시즌 개막 후 세 경기밖에 걸리지 않았다.
바셋은 높아진 포스트맨들을 상대로 03-04시즌과 같은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며 부진을 거듭, 퇴출되고 말았다.
바셋을 대신해 영입한 그레고리 스템핀은 바셋보다 6경기 더 뛰었을 뿐 기량은 대동소이했다.
스템핀을 대신해 영입한 선수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네이스미스상을 수상할 정도의 유망주로 꼽히던 제로드 워드였다.
하지만 워드도 17.4득점 7.7리바운드라는 스텟이 말해주듯,
KCC가 원하던 골밑에서의 우직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과거 현대 왕조때를 연상시킬 정도로 여전했던 이조추의 활약과
민렌드의 노련미가 더해져 골밑에서의 약세를 어느 정도 메꿀 수는 있었지만
저력을 발휘하며 통산 5번째로 밟은 챔피언결정전에서는 TG삼보의 높은 벽을 넘어서질 못했다.
TG삼보가 김주성·왓킨스에 아비 스토리까지 영입해 범접 할 수 없는 벽을 쌓은 것.
KCC는 챔피언결정전 역대 최다 3점슛(3차전 15개)을 쏟아붓는 등 TG삼보를 상대로 분전했지만
다시 한번 주인공이 되는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05-06시즌(29승 25패 정규리그 5위/플레이오프 4강)
농구 대통령의 전주 입성
최근 두 시즌간 호성적을 기록한 KCC는 오프시즌 엄청난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함께 할 것만 같았던 신선우 감독이 LG의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긴 것.
이후 팬들은 과거 KCC의 라이벌이었던 기아의 에이스 허재가 새로이 감독으로 자리에 앉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KBL 최초의 선수 출신 감독' 허재 감독 시대 아래 맞이한 첫번째 시즌인 05-06시즌.
민렌드와 또 한번의 재계약에 성공한 KCC의 새로운 민렌드 파트너는 쉐런 라이트였다.
1994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6순위로 필라델피아 세븐시틱서스에 지명 된 후 팀의 식스맨으로 활약,
루키 세컨드 팀에 선정 될 정도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왔던 라이트였지만 KBL에서는 그 영광을 이어가지 못했다.
골밑에서 안정감이 실리지 않은 KCC는 시즌내내 안정적인 전력을 자랑하지 못했다.
이상민(34)·조성원(35)·추승균(33)·민렌드(34)·라이트(32) 등 주전 모두 삼십줄을 넘어선 노장들이었기에
체력적인 점에서 문제를 드러냈고 표명일(31)·변청운(32) 등 주요 식스맨 역시 나이가 많았다.
아써 롱이 합류하고 허재 감독과 정재근 코치라는 초보 코칭스탭이 자리를 잡자
KCC는 시즌내내 안정적인 전력을 자랑하지 못한 대신
정규리그와 6강 플레이오프에서는 노련미로 저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4강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양동근·크리스 윌리엄스를 축으로 리빌딩에 성공한 모비스를 상대로는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1승 3패로 시리즈를 내주고 말았다.
06-07시즌(15승 39패 정규리그 10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마지막
이조추라인의 한 축이었던 조성원이 은퇴하며 전력에 큰 공백을 드러내며 맞이한 KCC의 06-07시즌.
찰스 민렌드와의 재계약을 포기하며 시즌에 임한 KCC의 06-07시즌은 암울했다.
마이클 라이트는 발목 부상을 당해 시즌 개막을 이틀 남겨둔 시기에 집으로 돌아갔고
과거 오리온스에서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지만
자유계약제 도입 이후 모비스에서 한계를 드러냈던 바비 레이저는 과연 몇 경기나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타이론 그랜트·마르코 킬링스워드 등 시즌 개막에 맞춰 준비했던 용병들 대신
다른 이름들이 KCC의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고 시즌내내 KCC는 이렇다할 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부진을 거듭하던 KCC는 결국 리그 최하위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는데
팬들은 이보다 더 큰 충격을 시즌 종료 후 두달여 뒤에 접하게 되었다.
이상민이 팀으로부터 버림을 받으며 유니폼을 갈아 입게 된 것이다.
07-08시즌(33승 21패 정규리그 준우승/플레이오프 4강)
줄무늬 유니폼을 입으며 다시 만난 서장훈 & 임재현
팀 창단 이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인 KCC는 대대적인 전력 보강을 선언했다.
그 타겟은 삼성과의 계약 기간이 종료되어 FA시장에 나온 서장훈이었다.
모비스·전자랜드와 함께 서장훈 영입전선에 뛰어든 KCC는 결국 서장훈의 마음을 사로 잡는데 성공하였다.
서장훈이 KCC로 마음을 굳힌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대학 선배 이상민과 다시 한번 함께 뛰며 말년을 마감하고 싶었기 때문.
하지만 서장훈의 이런 기대는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서장훈과 함께 SK에서 FA로 풀린 임재현을 추가로 영입한 KCC가
서장훈의 보상선수에 대한 보호선수로 서장훈·추승균·임재현을 지명하며
이상민이 말 그대로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슈퍼스타 이상민을 놓칠리 없었던 삼성은 결국 KCC가 보호선수 명단을 발표한 다음날 이상민을 보상선수로 지명하였다.
KCC는 현대맨 이미지가 강한 이상민을 삼성이 쉽게 지명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팬들을 상대하기 바빴다.
팀과 영욕을 함께한 이상민이 떠나고 SK에서 두 시즌간 함께 뛰었던 서장훈과 임재현이 재회한 KCC.
KCC는 용병드래프트에서 브랜든 크럼프·제이슨 로빈슨이라는 성공적인 라인업을 지명하는데 성공하였고
모처럼만에 용병 교체를 하지 않을 정도로 안정된 전력을 자랑하며 승수를 쌓아나갔다.
동부에 이어 2위에 랭크되며 4강 플레이오프에 직행한 KCC.
그들이 4강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상대는 운명의 장난과도 같이,
이상민의 새로운 팀 삼성이었다.
KCC는 높이의 우위를 앞세워 통산 여섯번째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노렸지만
친정팀을 상대로 한풀이에 나선 이상민이 맹활약한 삼성에 한번도 이기지 못하며 허무하게 3연패,
큰 꿈을 접고 시즌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KCC는 이후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하승진의 가세 이후 출전시간 배분 문제에서 서로 다른 답을 낸 허재 감독과 서장훈이 채 2년도 되지 않아 이별하게 된 것.
결과적으로 이상민을 내주며 데려온 꼴이 되었던 '서장훈 FA 영입'은 1년 6개월여만에 없던 일이 되버리고 말았다.
이지스에게 충성을 다짐했던 팬들도 구단의 운영방침에 뿔이 난 상태.
하지만 이내 전력을 추스리고 다시 한번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구단이 되길 기대해본다.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매시즌 어떤 이유로도 이상민선수의 이름이 거론 되네요.. 참 아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네요.. KCC도 올해 좋은 성적 거두길 바래요...
글을 다 쓰고 난뒤에 검토하는 걸 깜빡했어요ㅜ역시 오타가 상당히 많네요ㅠㅠ수정했습니다 ㅈㅅㅈㅅ
잘봤네요. 아 ㅠㅠ 지금 썬더스가 옛날의 KCC 농구스탈이랑 비슷하네요.(이상민 때문인가?) 옛날 KCC가 좋았는데
속공=KCC일때가 그립네요 ㅎㅎㅎ 속공할때 좌우코너에서 3점쏘던 조성원선수가 생각나는 ㅜ
지금의 kcc는 절대 속공이란 말이 전혀 안떠오르네요 이조추.맥도웰 민약사 다 그립네요 ㅎ
저떄 kcc는 후덜덜더러 ㅜㅜ
달리는 농구가 매력적이었는데요..
이상민 다시와야되 ㅜㅜ
요즘 속공도 잘하고있잖아요^^
KCC 팬으로서 정말 감사하다는.ㄴㄴ
kcc의역사를알게되감사합니다
옛날 이 그립네
예전 한참 잘나갈때 KBL 속공 1위팀은 김태환감독의 SK도 아니고 김승현의 오리온스도 아닌 KCC였죠..... 참 재밌었는데.... 그래도 요즘 그런 모습이 다시 살아나는것 같아서 농구 보는맛이 납니다....
네 맞아요 이상민의 환상같은 패스는 볼 수 없지만 리바운드 하자마자 가드에게 주고 달리는 모습은 다시 되돌아온 KCC를 보는거 같아요~ㅎㅎㅎ
이상민선수가 계속있엇더라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상민 없는 KCC는 상상할 수 없었는데..그래도 요즘의 KCC는 전성기 때 그 모습을 생각나게 하네요~
kcc 팸게에 퍼가겠습니다 ^^
옛날의 kcc로 돌아와라!!!
민랜드 진짜 잘했는데
역시 KCC하면 이상민이죠ㅜㅠ 그져 안타깝다는...
KBL최강은 역시 KCC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