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천인문학기행 2 속리산 이야기 1
정이품송을 만나고 속리산을 만나고
달천인문학기행 두 번째 행사다. 주제는 달천의 발원지 속리산 기행이다. 지난 첫 번째 행사를 달천의 최하류 탄금대에서 했다면, 이번에는 달천의 최상류 속리산을 찾아간다. 달천의 발원지인 상고암까지 물길을 탐사해보려고 한다. 16㎞를 걷는 쉽지 않은 탐사가 될 것이다. 그것은 상고암이 해발 900m나 되는 높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중간지점인 복천암까지는 23명이 모두 올라갔지만, 최종 목적지 상고암까지는 9명이 올라갔다. 나머지 14명은 상고암 대신 장안면 개안리에 있는 우당(愚堂)고택을 다녀왔다.
충주댐 벚꽃은 이미 졌고, 수안보 벚꽃은 4월 5일에 절정이었다. 그렇다면 속리산 벚꽃은 어떨까? 달천을 따라 괴산을 지나 청천 쪽으로 접어드니 도로와 강변의 벚꽃이 한창이다. 날씨마저 좋아 벚꽃에서 빛이 난다. 버스는 10시경 속리산면 소재지인 상판리로 들어선다. 상판리에는 주민자치센터, 폐교된 법주초등학교와 속리중학교, 농협 등이 있다. 이들 초등과 중등학교는 속리산이 충북 제일의 관광지이던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번성했는데, 이제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먼저 상판리 17-3번지에 있는 정이품송 앞에서 차를 내린다. 정이품송은 천연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조 10년(1464)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가마가 나무 아래로 잘 지나갈 수 있도록 가지를 들어 올렸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므로 수령이 600년도 훨씬 넘었다는 얘기다. 1993년 태풍으로 인해 서쪽 가지가 부러져 대칭과 비례의 아름다움을 일부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리산 입구의 상징물로 우리를 맞이한다.
더욱이 주변에 벚꽃이 활짝 피어서 초록과 흰색이 멋진 대비를 이룬다. 나무 앞쪽으로는 진달래꽃이 피어 붉은색과도 잘 어울린다. 우리는 정품송을 한 바퀴 돌며 자태를 감상한다.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왼쪽 1/4 정도가 부러져 나갔다.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바라보면 부러진 부분이 보이지 않지만 원뿔 형태가 아름답질 않다. 북쪽에서 남쪽 방향을 보면 전체의 1/3 정도가 훼손된 느낌이다. 그러므로 정이품송은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바라보는 게 제일 낫다.
정이품송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은 우리는 법주사를 향해 올라간다. 주차장에 차를 내린 다음 달천의 최상류 하천을 건너 매표소로 간다. 하천 양쪽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매표소 옆에 월영루(月暎樓)라는 전통한옥이 있다. 달천에 달이 비치는 것을 보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매표소를 지나면 호서제일가람이란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만난다. 충청도에서 제일가는 가람이라면 충북에서는 속리산(俗離山) 법주사고, 충남에서는 덕숭산(德崇山) 수덕사다.
여기서 속리라는 이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속리산을 그대로 옮기면 세속을 떠난 산이 된다. 그렇지만 그 근원을 알게 되면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속리산을 노래한 시구로 ‘도불원인인원도 산비이속속리산(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이 있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 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려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떠나려 하네.”이다. 사람과 도의 관계를 산과 속세의 관계에 비유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14권 「문장부(文章部)」 ‘시예(詩藝)’에 따르면,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가 속리산에 들어와 중용을 800번이나 읽고 이 시구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백호의 문집인 『임백호집(林白湖集)』는 이 시가 없다. 그렇다면 누가 쓴 걸까? 최치원이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건 더 더욱 불가능하다. 신라말에 속리산이라는 지명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백호가 중용을 읽은 다음 썼다는 가정 하에 시를 다음과 같이 완성하면 어떨까?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 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려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떠나려 하네.
사람의 본성이 천명을 따르려 하지만 마음이 따르지 않고
성실함이 밝음에 이르려 하지만 도를 갈고 닦기 어렵네.
수정교 앞에서 만난 비석들
법주사 입구에는 세 기의 비석이 있다. 비각 안에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가 있고, 노천에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와 봉교비(奉敎碑)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그냥 지나쳐 간다. 이들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속리산과 법주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속리산사실기비는 조선 전기의 역사를 담고 있다. 벽암대사비는 벽암각성(覺性: 1575-1660)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있다. 봉교비는 순조태실이 속리산에 만들어진 후 산속에서 노는 행위를 금하는 일종의 금표(禁標)다.
속리산사실비는 조선 현종 7년(1666)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 비문은 앞부분에서 조선 초 속리산을 찾은 사람들 이야기를 적고 있다. 세조가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속리산에 왔고, 성운(成運)이 속리산에 은거하며 많은 시를 지었다. 비문의 뒷부분에서는 속리산 수정봉 위에 있는 거북바위(龜石)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거북바위의 목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어 중국의 재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사신이 이를 알고 거북의 목을 베고, 그 위에 10층의 부도(浮屠)를 세우도록 했다. 그 후 각성선사가 목을 이어 붙였고, 충청도병마절도사 민진익(閔震益)에 의해 다시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리와 부도를 통해 불교를 신비화하고 사설(邪說)을 퍼뜨린다고 적고 있다. 불교에 비판적인 비석이다.
벽암각성은 보은 사람으로 14세에 출가하여 부휴(浮休)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당해 의승(義僧)을 이끌고 나라를 위해 싸웠다. 그러한 연유로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벽암대사는 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에 임명되어 1624년부터 3년 동안 남한산성을 쌓았다.
그리고 1626년(인조 4년)부터 불에 탄 법주사를 중창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630년에 쓰여진 ‘법주사 사적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전 법주사는 건물 60여 동, 석조물 10여 점, 암자 70여 개로 이루어진 대찰이었다. 대표적인 건물이 대웅대광명전(2층 28칸). 산호보광명전(2층 35칸), 팔상오층전(36칸), 비로전(17칸), 극락전 (6칸), 원통전 (6칸)이다. 전쟁으로 소실된 이들 건물 중 대웅전과 팔상전이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도 의승 삼천을 거느리고 청나라 군대와 싸웠다. 1660년 입적했고, 1664년 비석을 세웠다. 전법제자인 처능(處能)대사가 명(銘)을 청함으로 승정원 동부승지 정두경(鄭斗卿) 비문을 지었다. 낭선군(郞善君) 이우(李俁)가 글씨를 쓰고 전(篆)은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이 썼다. 비문은 다음과 같은 명(銘)으로 끝을 맺고 있다.
괴로움의 바다에 배를 띄워 중생을 구제하였고 作舟苦海以濟羣蒙
그 본원을 본받으니 실로 임제의 정종이로다. 規厥本源實惟臨濟之正宗
높디높은 속리산은 선사가 머문 곳이니 俗離嵓嵓惟師所宮
돌에 새겨 그 시작과 끝을 기록하노라. 刻之于石以記始終
봉교비는 1851년(咸豐 元年) 임금(哲宗)의 뜻을 받들어 비변사에서 세웠다. 내용은 “노는 사람을 금하고 잡역을 면제한다(禁遊客除雜役)”고 되어 있다. 임금의 태가 묻혀있는 신성한 장소이니 노는 사람을 금하고, 승려의 잡역을 면제한다는 표석이다. 순조태실은 세심정 지나 비로산장과 상환암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오른쪽 태봉에 위치한다.
벚꽃 찬란한 법주사
수정교를 건너 법주사로 들어가면 금강문이 나온다. 그곳에는 금강역사가 문 양쪽을 지키고, 사자와 코끼리를 탄 문수와 보현보살이 대중을 맞는다. 금강문 다음에는 천왕문이 있어 사천왕이 일종의 검문을 한다. 천왕문을 지나면 팔상전이 정면에 나타난다. 팔상전은 목탑으로 법주사의 남북 중심선에 위치한다. 전각 안 사방 네 벽에 두 폭씩 팔상도가 걸려 있어 팔상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팔상도 앞에는 불상과 나한이 모셔져 있다.
팔상전을 지나면 쌍사자석등이 나온다. 국보 제5호인 쌍사자석등은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높이 10척의 8각 석등으로 두 마리 사자가 화사석을 받드는 형상을 하고 있다. 쌍자자의 윗부분에는 상대석으로 앙련이, 아래부분에는 하대석으로 복련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 석등 중에는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쌍사자석등 양쪽에는 약사전과 원통보전이 있고 그 앞쪽으로 사천왕석등이 있다.
사실 동일선상에 두 개의 석등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신라시대 전형적인 8각 석등으로 높이가 3.9m나 된다. 화사석의 화창을 제외한 사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사천왕석등으로 불린다. 사천왕상 앞으로는 현재 법주사의 중심전각 대웅보전이 있다. 높이 20m, 120칸에 이르는 큰 건축물로 1624년 벽암대사에 의해 중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당 안에는 소조삼신불이 모셔져 있다. 가운데가 법신 비로자나불, 좌측이 보신 노사나불, 우측이 화신 석가모니불이다.
대웅보전 서쪽으로는 진영각, 명부전, 삼성각이 있다. 우리는 진영각으로 들어가 법주사 출신의 큰스님(大師)들을 만나본다. 가운데 법주사 창건주 의신(義信)조사가 있다. 좌우에 진표(眞表)율사와 태고(太古)화상 보우가 있다. 진표는 중창주고, 태고는 조계종의 중시조다. 그리고 벽암대사 영정도 보인다. 또 근대인물로 금오(金烏)대종사 태전의 진영도 보인다. 진표와 금오의 영정는 진영(眞影)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그렇지만 정확히 진짜 모습은 근현대 인물 초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의신조사의 법주사 창건 이야기는 전설 수준이다. 불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에 유학한 의신조사가 신라 진흥왕 14년(553)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속리산으로 들어온다. 현재 법주사 터에 이르자 노새가 걸음을 멈추고 울부짖었다. 조사는 사방을 둘러보고는 이곳이 절터로 명당이라 생각하고 절을 짓기 시작한다. 그 후 절에 불법이 머물게 되어 법주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법주사가 현재와 같은 미륵도량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진표율사에 의해서다. 진표는 김제 미륵도량인 금산사 출신으로, 776년 꿈에 미륵보살로부터 ‘속리산으로 가 미륵불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는다. 그는 제자 영심(永深)으로 하여금 미륵불을 조성케 하고 법주사를 미륵도량으로 만든다. 그 후 미륵불은 법주사의 상징이 된다. 법주사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은 고려 후기다. 그 전에는 길상사(吉祥寺), 속리사(俗離寺)로 불렸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사』 『동문선』을 통해 확인된다.
다음은 법주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금동미륵불을 찾아간다. 금동미륵불은 진표율사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해체와 중건을 거듭한다. 1872년 용화보전과 함께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1939년에 이르러서 주지 장석상(張石箱)스님의 발원으로 미륵불 조성이 시작되었다. 80척으로 계획하고 조각가 김복진(金復鎭)에게 제작을 의뢰했다. 그러나 1940년 김복진이 세상을 떠나면서 사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미륵불이 완성된 것은 1964년 주지 박추담(朴秋潭)스님에 의해서다. 문제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미륵불이 청동미륵불로 다시 태어난 것은 1990년 월탄(月誕) 주지스님 때다. 미륵불 아래에는 성보전시관으로 사용되는 용화보전이 마련되었다. 2002년에는 청동미륵불이 개금불사를 통해 금동미륵불로 변화되었다. 금동미륵불은 수정봉을 배경으로 동쪽을 쳐다보고 있다. 높이가 33m 무게는 160t에 이른다고 한다. 2018년에는 ‘한국의 산지승원, 산사’ 7개 절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는데, 법주사도 그 중 하나다.
법주사는 현재 벚꽃이 한창이다. 4월 중순경 벚꽃이 절정을 이루는데 올해는 봄 기온이 높아 일주일 정도 빨리 피었다. 정이품송 주변에서부터 달천을 따라 벚꽃이 심어졌고, 법주사 경내에도 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쌍사자석등 쪽에서 남쪽 팔상전을 바라보면 양쪽으로 벚꽃이 화사하다. 사월 초․중순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우리는 이제 법주사 동쪽 달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 세조길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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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심고을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동해의 푸른 이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