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V. 니진스키

[mathmania]

다시금 제대로 만나는 천재 아웃사이더

내 손에 바슬라프 니진스키( Nijinsky. Vaslav)의 일기 한글판이 들려 있다. 니진스키가 天才라는 것, 기정사실화된 터에 그의 일기 한글판 완역본이라니 우선 각별해 보인다. 온 세상이 그를 우러러 본 적도 있다. 지난 반세기 니진스키의 춤 작품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일부 이견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그가 천재라고 입을 모았다. 니진스키를 수식하는 말로는 단연 천재가 으뜸이다.

니진스키가 천재인 줄 모르는 사람은 천재를 보는 안목도 없다고 업신여겨질 만큼 니진스키는 그렇게 각인되어 왔다. 때문에 니진스키의 역사적 위치에 대해 던져질 일말의 의구심조차 금기시하는 일종의 관행도 있었다. 니진스키는 정말 천재였고, 이 일기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을까. 그의 일기 전편에서 드러나는 정신질환을 과연 천재의 징후로 봐야 할지, 그런 징후가 있는 예술가는 과연 천재일지, 이 신물나는 물음에 확답키는 어렵지만 말이다.

과연 어떤 경지에 들어서야 천재라 불리는가? 그리고 천재를 판별하는 기준은? 좀 속되게 정의하자면, 개인의 사사로운 일기장마저 만인(萬人)이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은 일단 천재에 속한다고. 스타의 일기장도 호기심은 끌 듯하다. 다만 천재에 비해 스타는 무엇보다 자신을 적나라하게 담은 일기를 집필하지도 공개하지도 않을 거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을 사고 전개, 지적 성취도, 그리고 자신감에서의 차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20대말 춤의 절정기에 세상을 사로잡다가 니진스키는 무대를 홀연 그만두었고 그것도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이라는 피치 못할 사정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정신 질환은 도리어 세인들의 마음에 천재 이미지를 굳혔고 세상 사람들의 흠모로 생전의 니진스키는 천재 이상의 신화가 되었다. 니진스키가 종횡무진 누비던 1910년대는 발레의 격동기였다. 당시 고전발레에 대해 현대발레는 새 양식을 갖고 딴지를 걸던 참이었으며 동시에 현대무용이 싹을 피우고 있었다.

춤이 요동치던 그 시대, 현대발레와 현대무용은 두 개의 축을 형성하였다. 현대발레의 한복판에서 니진스키는 비범한 춤 실행 능력과 선구적인 안무 양식으로 온 유럽을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그래서 천재로 회자되었다. 오늘날 그는 모더니즘이 출현하던 때 피카소, 제임스 조이스, 쇤 베르크처럼 당대 타 분야의 모더니스트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극소수의 무용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흥행 감각이 탁월했던 공연기획자 디아길레프와의 색다른 갈등과 불화는 두 사람 모두를 스타로 만든 고급 스캔들로서 니진스키 신화를 널리 퍼뜨렸다.

지난 세모(歲暮)에 출간된 니진스키의 일기 『영혼의 절규(원제·The Diary of Vaslav Nijinsky』는 장정이 단아하고 수미일관해서 우선 정갈하다. 기분좋게 감성을 자극한다. 조신해 보이는 이 한글판은 그러나 알고 보면 무게가 꽤 나간다. 니진스키는 1889년 발레의 본고장에서 태어나 10살에 당대 세계 최고 콩세르바트와였던 러시아 황실 발레학교에 입학하였다. 곧 재학생으로서 주변의 질시 속에 주목을 끌고 나서 21살 때 디아길레프가 파리에서 결성한 현대발레단 발레 뤼스에 가담한다.

두어 해 동안 디아길레프와의 동성애 소문과 함께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안무로 창조한 몇 작품으로써 마치 장수 연속 드라마 속의 왕자처럼 군림해왔다. 니진스키의 이런 행적을 알고 있다면, 당연히 이 일기도 그러한 사실을 화려하게 증언하거나 회상해서 당대 무용사를 확인하고 평가해주겠거니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겠지만, 그래보았자 곧 헛수고가 된다. 『영혼의 절규』는 니진스키의 조리도 서지 않은 고백으로 도배되었고 어쩌면 지나쳐도 좋을 고백들이 대부분이니까.

또 간간이 언급되는 특정 무용사적 사건들은 그간에 잘 알려졌으므로 굳이 새로울 것도 없다. 이러저러한 터에, 이 완역본 일기는 20세기 춤 혁신기 한 주역의 진솔한 고백이 근 80년만에 완간됨으로써 그의 작품과 예술 행적을 재해석할 근거를 공식화하였다는 데서 무게가 나가며, 혹은 정신의학적 텍스트로서 쓰임새가 있어 보인다. 참고로 이 일기는 2001년도에 호주의 폴 콕스가 대본과 감독을 맡고 성우의 독백을 섞어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게다가 『영혼의 절규』가 출간되기까지 우여곡절의 산고는 완역본의 무게를 더한다. 이 일기는 1919년 1월부터 근 50일간 기술된 것이다. 일기라 해도 날짜별로 기술되진 않았다. 그 시기에 니진스키가 육필로 토로한 것을 정리한 일종의 告白錄이다. 그가 이 일기를 쓴 곳은 스위스 동남부 산간지대 생 모리츠이다. 두 번째 南美 순회 공연을 마치고 1917년 말 아내와 딸 등 그 일가족은 당분간 제1차대전을 피하고 장래 작품 구상도 할 겸해서 러시아와 비슷한 생 모리츠로 갔다. 일기는 니진스키의 정신분열증 발병 초기, 여기서 집필되었다.

원래 러시아어로 기술된 니진스키의 일기는 1936년 그의 아내 로몰라가 편집해서 출간했고(니진스키는 1950년에 타계했다), 국내에선 1975년 이덕희에 의해 영어판이 번역되었다. 그런데 1979년 로몰라가 타계하고 일기가 공매에 부쳐지면서 이전에 출간된 일기 가운데 무려 4할 정도가 원본을 삭제한 사실이 밝혀졌다. 원본 일기에는 입에 담지도 못할 정신나간 소리가 도처에 등장하므로 아내로서는 대대적으로 검열할 심정이지 않았을까. 그의 원본 일기는 지식인知識人의 고백록 가운데 가장 솔직 대담하다는 평가마저 듣는다.

이번의 일기 완역본은 가감 없이 모두 수록한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후 일기가 1995년의 불어판과 1999년의 영어판으로 완역 공개 출간되기 위해서는 판권 문제도 해결 과제였다. 이번 한글판은 영어판을 텍스트로 한 것이다. 덧붙여 횡설수설 같은 이 고백록을 쫓아가려면 배경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인 힘들다. 번역자 이덕희가 서두에 덧붙인 장문의 자상한 해설, 주석과 사진 자료는 니진스키의 춤 세계, 당시 러시아 발레의 동향, 니진스키와 인연을 맺은 무용가 및 여타 인물을 두루 망라하고 있어 일기 읽기에 큰 도움을 준다.

번역자 이덕희는 40여 년 전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에서 니진스키를 처음 만났고 그후 니진스키의 일기에서 일종의 전기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덕희는 1975년 이 일기를 번역하여 국내에 니진스키를 소개한 바 있다. 그후 니진스키의 부인과 여동생이 쓴 평전을 차례로 번역 소개했으므로 니진스키는 이덕희에게 꽤 빚지고 있는 셈이다. 이덕희가 러시아어를 익힌 것도 아마 니진스키와의 교감을 위해서였던 줄로 안다. 이번의 일기 완역 작업은 니진스키 전문가 이덕희로선 어깨의 짐을 내려놓는 것으로 표현되고 무용사적으로는 믿음직스런 사료를 구한 셈이 된다.

일기는 니진스키가 구분한 대로 제1부 삶, 제2부 죽음으로 구성된다. 제1부를 펼치는 그 순간 생소한 난수표를 푸는 기분이 된다. “점식식사는 아주 좋았다. … 콩을 먹었으니까. 나는 콩을 좋아하지만… 메마르다. 나는 마른 콩을 좋아하지 않는다…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병든 땅이다… 산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스위스 사람들은 메마르다…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내 하녀는 메마른 인간이다…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생각한다… 나는 취리히를 좋아하지 않는다… 메마른 도시이기 때문이다.” 메마른 인간, 메마른 도시가 싫고 동물, 즉 생명을 죽여야 하므로 자기는 육식을 하지 않는다.

일기 면면에서 금세 모순되거나 상충하는 표현들이 반복되며 횡설수설은 예사고 정상인이라면 어이없어 할 어린애 같은 고백도 숱하다. 정신분열증이 원래 집중력 저하로 사고 흐름이 지리멸렬하고 감정 표현이 부적절한 증세이므로 난수표 해독은 절차로서 불가피하다. 반면에 기획되지 않은 사고의 흐름을 파노라마 펼치듯 보여주기 때문에, 정신분열증이 도리어 해당 예술가의 창작 해석에서 참조될 만한 점들을 진솔하게 증언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정상적인 일기 내지 회고록은 정연한 반면 자기검열이 무시로 개입할 수 있어서 항상 증거 능력이 논란거리이다.

독자가 얼마간의 인내심을 갖고 이 난수표 해독을 수행하면 몇 가지 논점이 눈에 띌 것이고, 이들 논점은 일기 전체를 관통한다. 중언부언하고 럭비공처럼 튀는 비약이 가세하여 지겨움과 당혹스러움을 안겨줘서 그렇지, 이 일기를 쓸 당시의 초기 정신분열증 때문에 논점까지 분열된 것은 아니었다. 니진스키로선 일관성을 견지하고 병약을 무릅쓰고서 일기 쓰기에 마치 사력을 다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기의 면면에서 대충 니진스키가 긍정시하거나 선호하는 것은 신, 자연, 생명, 좋은 감정, 느낌, 사랑, 채식, 육필, 선인, 황소, 뿌리, 춤, 스위스, 영혼, 빛, 원형圓形, 아름다움, 민주주의, 우드로 윌슨, 클레망소, 톨스토이, 토스토예프스키 등이다. 반면에 그가 부정시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과학-원숭이, 이성, 인공, 돈, 증권거래소, 육식, 나쁜 감정, 이기심, 약품, 통조림, 전쟁, 악인, 기독교, 교회, 욕정, 부패, 생각, 정방형, 볼셰비키, 영국인, 로이드 조지(1차대전시 영국 수상으로서 공격적이었음), 스트라빈스키, 저승이다. 욕정欲情을 부정시했어도 자신의 매춘 경험담과 자위 행위가 간간이 등장한다. “나는 욕정이 두렵다… 욕정은 삶의 죽음이다. 욕정에 사로잡힌 남자는 짐승과 같다. 나는 짐승이 아니다.”

자신이 혜택을 입은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일시하는 긍정 심리가 완연하다. 영토를 확장하는 영국은 싫고, 미국을 위협하는 일본 함대는 싫고, 자기가 미국에서 돈을 벌었고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때문에 미국이 좋다. 이런 식의 이항대립적 사고를 뒷받침하는 논리가 표면적으로 매우 단순하게 펼쳐진 것은 정신분열증 초기에 일기가 집필된 정황을 고려하면 수긍이 간다. 따라서 그가 정상의 상태에서 일기를 집필했을 경우, 이항대립의 항목이 다소간 달라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으로서, 니진스키는 자신을 神과 동일시하였다. 그의 육성부터 들어보자.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신은 신을 이해한다. 인간은 신이다. 그러므로 신을 이해한다. 나는 신이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선善이고 짐승이 아니다. 나는 신이지 크리스천이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느꼈던 바로 그것이다. 나는 붓다이다. 나는 불교도이며 온갖 종류의 신이다… 나는 신이라 불리고 싶지 니진스키라 불리고 싶지 않다… 나는 신이지 크리스천이 아니다.” 더욱이 도처에서 기독교회를 비판한다. “신은 교회와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나는 교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신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과학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다. 교황은 과학이지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종교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따분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인간이 원숭이의 자손이라 한 진화론과 다윈을 부정시한다. “나는 인간의 자손이지 원숭이의 자손이 아니다. 육신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나는 신이다.” 그리고 신이 원하므로 일기를 집필해야 하고 신이 원하므로 오늘은 좀 쉬어야 한다는 식으로 신의 부름과 지시에 따라 자신의 모든 행동과 생각이 존재한다. “올바른 삶이란 신에게 순종하는 삶을 의미한다.” 때로 이 신은 자연이고 육신과 감정 속의 신으로 소개되는 것으로 봐서, 그가 범신론(汎神論)적 신 개념을 지녔던 것이 확실해 보이며 러시아적 신비주의가 감지된다. 급기야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는 이면에는 사람들에게서 이해받지 못하는 천재들에게서 흔한 자긍심이 자리잡은 것 같다. “나는 그들 모두가 생각하는 것 같은 니진스키가 아니다. 나는 인간 속의 신이다… 나는 신 안에 있소.”

그가 신으로 자처하는 논거의 타당성 여부는 그다지 중요치 않아 보인다. 이보다는 그가 신으로 자처하게 된 동기를 더 유추해볼 필요가 있다. 예술가로서 작품 내지 창작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 일기에서 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미약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 또는 아래에서 소개될 감정과 세계관에 대해 자신의 소견을 집요하게 쏟아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은 니진스키의 일기 집필 동기에 대한 물음으로 옮겨간다.

일기에서 니진스키가 가장 명료하게 밝힌 집필 동기는 자기가 긍정하는 좋은 감정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일기를 집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래에서 보듯 신, 감정, 아름다움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일기의 집필 동기는 결국 자기 예술의 근저를 이루는 이들 주제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히려는 것으로 압축된다. 이러한 동기를 실현하는 집필 과정에서 그가 신으로 자처한 이유는 앞서 본 범신론이나 신비주의 등에서 다양하게 유추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타인들을 아예 원천적으로 손쉽게 설득할 수 있는 우월한 위치(즉 絶對者로서의 위치?)에 서고 싶은 욕구, 그리고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제대로 이해 받지 못한 그리하여 자신의 창작 의지가 억눌렸던 데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한 때문은 아닌지 생각된다.

니진스키가 일기 집필을 시작한 날은 1919년 1월 19일이었으며, 그로선 좀 특별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기록에 의하면 그날 니진스키는 생 모리츠의 교외에 소재(所在)한 호텔에서 자기로선 마지막 발표회(독무 공연)를 가졌기 때문이다. 일기의 초두에도 그날의 공연 소감이 소개되어 있다. 이 공연 도중에 그는 더 춤추고 싶었지만 신이 자기에게 말했다. “됐어, 그만.” 그래서 춤을 멈추었고 관객들은 흩어졌다. 공연이 끝나고 그날 저녁 내내 니진스키는 神을 느꼈고 신이 자기를 사랑했으며 마침내 신과 자신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고 일기는 고백한다.

당시 정황은 아내 로몰라의 니진스키 전기에도 소개되었다. 로몰라는 니진스키가 그전부터 자신의 예술적 이념을 아내가 책으로 써줄 것을 요청했다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그가 근 1년 동안 춤추지 않고 은신하자 공연 흥행사들이 그를 상대로 공연을 기획하려고 뻔질나게 연락하였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이러던 차에 그는 생 모리츠에서 2백 명의 지인들을 위해 발표회를 가졌던 것이다.

니진스키는 피아노 곁으로 등장하여 의자를 하나 집어서 관객을 마주하고 앉아 그들을 30분 동안 응시하였다. 니진스키는 관객들을 차례로 읽어나갔고 관객들은 최면에 걸린 듯 꼼짝도 않고 있었다. 이렇게 초조한 상황에서 피아니스트가 ‘레 실피드’를 몇 소절 쳤고 로몰라가 그에게 다가가 ‘레 실피드’를 추라고 권하였다. 쇼팽의 곡에 맞춘 ‘레 실피드’는 미셀 포킨의 안무작으로 니진스키는 1909년에 출연한 바 있다. 니진스키는 자기는 기계가 아니므로 자기가 느낄 때 춤출 거라고 응수하였다.

로몰라가 발표회장을 들락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그는 흑백 벨벳 두루마리 몇 자락으로 십자가를 만들었고 양팔을 벌린 채 십자가 꼭대기에 서서 춤추기 시작하였다. “나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섬뜩한 춤을 추었다… 나는 신경과민이었고 그래서 이 같은 감정이 관객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흥겨운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로몰라는 그것을 죽음에 맞선 삶의 춤이라 묘사하면서 발표회장은 온통 공포에 질려 괴로워하는 인간성으로 가득 찼다고 하였다. 그날 피아니스트는 극도의 긴장으로 녹초가 되었다.

“나는 내가 느끼니까 춤추고 싶은 것이지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춤추고 싶진 않다… 나는 육체에 깃들인 감정이지 지성이 아니다.” 여기서 보듯 니진스키는 관객과 연기자 간의 감정 교류, 즉 공감共感을 매우 중시한다. 이 논리를 그는 인간들 간의 느낌, 인간 개개인의 자신에 대한 느낌을 절대시하는 차원으로 확대한다. 그의 논거로는 인간에게 느낌이 결여될 경우 원숭이와 다름없어지고, 반대로 느낌을 갖추면 신으로 격상된다. 니진스키에게서 느낌, 감정, 정서는 지성의 대척점에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지성의 상위 개념으로 사용된다. 즉 “나는 느끼기 때문에 지성적 인간이다. 나는 神을 느끼고 나를 느낀다.”

“나는 학구적인 아이들을 원치 않는다… 지성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생각은 죽음이다.” 여기서 보다시피 감성과 지성이 서로 미분화된 상태에서 감성이 지성인만큼, 이원론에서 흔한 대립적 발상은 그에게서 지양된다.니진스키가 일기를 집필할 동안 자신이 정상적인 사람과 다른 상태에 놓였음을 줄곧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나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 이 다른 상태를 두고 세인들이 당연히 병증이라 하였던 데 대해 그 자신은 오히려 세인들을 질책하였다.

즉 자신의 광증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발로일 뿐이라고, 그리고 세인들은 도저히 감정을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변호하였다. 그래서 니진스키는 일기를 쓰는 이유로서 감정이 무엇인지 설명해주고 싶기 때문이라 하였다. “나는 이 책을 감정이라 부르겠다… 나는 감정에 관한 방대한 저서를 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생각하지 않는 철학자, 감정을 지닌 철학자哲學者로 자처하였다. 세인들은 감정이 메마를 뿐더러 감정을 무시하므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결과 니진스키 자신도 이해 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고 믿은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는 구절도 자주 등장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바란다. 나는 울 수가 없다. 눈물이 노트 위에 떨어질까 봐 겁이 나기 때문이다. 나는 영혼 속에서 운다. 나는 슬프다. 나는 모든 이를 사랑한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만년필을 꾹꾹 눌러가며 일기장과 씨름하는 모습은 사뭇 처연하다. 아내 로몰라에 대한 원망 섞인 하소연도 대개는 자신에 대한 이해심 부족과 특히 로몰라의 감정 결핍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나는 지적인 로몰라를 좋아하지 않는다.” 로몰라에 대한 애정은 애정대로 인정하는 한편 그가 로몰라의 타산적인 행동, 지적인 행동을 못마땅해 한 데서는 대립적인 양면의 감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 와중에도 아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의 감정 인식은 다분히 낭만주의적이다. 낭만주의와 유사하게 그는 신, 아름다움, 이해 행위를 감정과 연결시켜 파악했고, 때로는 감정을 무아경(無我境)에서의 감정과 동일시하였다. 자기 눈에 비치기로, 생각하는 사람은 감정에 대해 헛소리만 늘어놓을 뿐이다. “신은 감정을 지닌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감정 속에 있다. 나는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내가 그걸 느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느끼기가 이해하기와 동의어이자 문맥에 따라서는 합일과 동일한 개념으로 쓰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인간들 간의 화목한 공동체, 즉 일기가 시사하다시피 서로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회가 아마 그가 생각한 유토피아였던 것 같다.

전반적으로 일기는 니진스키를 無당파주의자, 유토피아를 동경한 생태론자, 만민공동체주의자로 비춰낸다. “나는 정치와 거래할 수 없다… 민주주의 역시 하나의 당파이다. 나는 당파적 태도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 자체 개선되어 온 정당은 좋아한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를 갖기 때문에 완벽한 정당이다.” “나무들은 줄곧 잘라내면 안 된다… 사람들은 연료를 낭비한다.

사람들은… 더욱 많이 가질수록 한층 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더욱 적게 소유할수록 근심할 일이 적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한 행복을 바라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서로 가진 것을 공유한다는 것을 알 때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인민을 좋아하는 저널리스트들을 좋아한다.” 한편 자신을 곡해하는 세상을 향해 원망을 늘어놓긴 하면서도 자기를 “죽인 자의 죽음을 바라지 않고” 자기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토로한 대목에서도 그러한 세계관을 再확인할 수 있다.

당대 무용가로서 자신의 사회적 식견을 이렇게 분명하게 제시한 경우는 흔치 않다. 작품이 근본 과제이고 이데올로기의 천명이 협애(狹隘)한 논리의 한계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무용가뿐 아니라 예술인들이 굳이 사회적 식견을 표명하겠는가는 반문도 있다. 니진스키도 정신질환이 조성한 정신적 일탈에 고무되어 사회적 태도를 거침없이 토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대조적 태도들 사이의 다른 출발점은 논외로 치더라도, 그의 논점은 당대 무용가들에 비해 상당히 앞섰던 편에 속한다.

니진스키는 고전발레에서 출발하여 20대에 전위적인 발레로 방향을 틀었고 발레 분야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평가받는다. 그의 예술적 양식이 물론 시대 조류와 밀접하게 연관되었지만, 일기는 그가 발레에서 혁신을 모색하는 데 있어 그의 내적 성향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증언한다. 심지어 자기가 현대예술가로 입신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디아길레프의 온갖 위선僞善을 폭로하고선 그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동시에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을 향해 무료로 열리는 공연이나 원형극장에서 원형의 몸 움직임으로 진행되는 발레를 꿈꾼 것이 이러한 지적을 뒷받침한다.

니진스키 하면 디아길레프, 디아길레프 하면 니진스키, 자동적으로 그렇게들 연상한다. 두 사람의 작업이 동성애同性愛를 수반한 탓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이를 계기로 20세기 초두의 무용사에 획을 그었던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관심사가 된다. 그가 예술활동을 개시하고부터 몇 해 동안 디아길레프의 혁신적 기획력에 신세진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일기의 세 가지 주관심사로서 神, 감정, 그리고 디아길레프가 들어질 만큼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의 잠재의식이었다.

그러나 그가 일기에서 표현하는 디아길레프는 단적으로 사악한 인간이었으며, 그와 함께 지냈지만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디아길레프와 니진스키의 약 4년에 걸친 관계는 니진스키가 로몰라와 정상적인 결혼을 단행함으로써 청산되었다. 그후 다시 두어 차례 그가 발레 뤼스에 합류하고 작품 ‘틸 오일레슈피겔’을 창작하였어도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내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이었다.

디아길레프에 대한 기억은 상당히 신랄하다. “디아길레프는 자기가 예술의 신이라 생각한다. 나는 내가 신이라 생각한다. 나는 온 세상이 다 볼 수 있도록 디아길레프에게 결투를 제안하고 싶다. 나는 디아길레프의 모든 예술이 난센스라는 걸 입증하고 싶다… 나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니진스키가 보기에 디아길레프는 허위의식 그 자체였다.

여동생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오빠의 작품에 참가하면서 오빠에게서 안무를 습득했다)가 지은 니진스키 전기에 상술되어 있듯이, 니진스키가 안무한 ‘목신牧神의 오후’ ‘게임’ ‘봄의 제전’에 대해 디아길레프는 사실 창작 단계에서는 기대를 걸고 후원하였으나 막상 무대 위에 올려지고 나면 엄청난 불만들을 토로하였다. 그래서 둘 사이에 고성의 장광설이 오가기 일쑤였고, 디아길레프는 여동생에게 니진스키가 창작 경향을 바꾸도록 자주 중재를 부탁하였다. 심지어 그는 니진스키가 주로 고전발레에 무용수로 출연하는 방안도 제시하였다.

두 사람의 예술관이 일치할 수 없도록 만든 전제가 있었다. 그것은 디아길레프가 발레 뤼스의 재정과 당시 공연장들의 취향 때문에 관객의 호응이 높은 쪽으로 창작을 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니진스키는 타협 없는 혁신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니진스키는 “예술에 대한 디아길레프의 취향에 동의할 수 없었다...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가 모든 면에서 그의 생도라는 걸 보여주기를 좋아했다. 나 니진스키는 매사 그에게 동의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디아길레프는 나쁜 감정을 지녔고 나는 좋은 감정을 지녔다… 디아길레프 역시 흥행사이다.”

온갖 잡사를 늘어놓는 이 고백록에서 부모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어 뜻밖이다. 아마 청소년기에 아버지와 결별했고 자기들을 거둔 어머니가 산전수전을 다 겪어 그 시절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을지 모른다. 오히려 집필 과정에서의 손의 통증이나 집필에 필요한 공책, 만년필에 잉크를 주입하는 과정이 수시로 자세히 소개된다. 그러면서 당시 잉크의 품질이 조악하고 그 원인을 잉크에 물을 타는 기업가들의 양심 불량에서 찾는다. 바로 눈앞의 것에 대한 민감하고도 적절치 않은 집착이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의 특징일 테니까.

일기의 1부가 토로에 치중한 데 비해 2부에 들어가면 중언부언이 줄고 사고의 전개가 다소 정연해진다. 이러한 차이가 정신질환의 기복에서 기인했는지 여부가 관심을 끌 듯하다. 어휘가 다양해지고 더 많은 일들이 소개되며 논설투의 문장이 늘어난 2부는 특히 그의 정치적 식견과 문명관을 정리해 보인다. 1, 2부를 통틀어 봐서 논리적이지는 않아도 일기에서 우리는 한 무용가뿐만 아니라 사상가적 기질이 농후한 인간을 만나게 된다. 현장 예술가였던 데에다 필력도 겸비한 니진스키가 가령 온전한 정신으로 집필하고 계속 현장에서 실천했더라면 그의 위상에 비춰 당대 무용사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 완역본은 그가 모더니스트에 그치지 않고 급진적이며 생태론적 관점을 소유한 예술가였음을 확인시켜준다. 이러한 점은 그간에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으며, 천재 신화에 가리어져온 편이다. 따라서 니진스키를 곧장 천재 등식에 대입하고 마는 낭만주의식 접근법은 지양되어야 한다.

불세출(不世出)의 남성 무용가라면 흔히들 훤칠한 용모의 귀족을 연상할 것이다. 예상을 깨고 니진스키는 162센티미터의 단구(短軀)에다 머리가 작았으며, 어느 동료는 그를 공장 노동자 모습이었다고 회상하였다. 적절한 회상인 것 같다. 다리가 길고 근육질이던 그의 몸매에서는 열정적인 타타르족 용모가 지적되고 슬라브 기질이 거론된다. 특히 사진과 소묘가 보여주듯 유난히 발달한 허벅지 근육은 그로 하여금 무대 현장에서 사람들을 숨막히게 한 도약 연기를 다채롭게 안출하도록 하였다. 무대를 휘저은 것은 물론이고, 공중으로 솟구친 후 남달리 길었던 체공 시간은 마치 공중에 머문 듯하고 중력을 정복하여 마음먹은 대로 공중에 머물 수 있다는 착각을 준다는 극찬을 듣도록 하였다. 그의 움직임은 명료하였고 음악을 자유자재로 갖고 놀았다 한다.

19세기末 이래 유럽 예술은 원시주의나 이국주의에 경도되었다. 일기에서 감지되는 생태론적이며 脫문명적인 사고 방식은 당대의 흐름과 무관치 않다. 실제 무대에서 니진스키는 여기에다 美的 일탈을 덧붙였고, 이 모든 것은 원초적 또는 본능적 질감의 춤으로 귀결되었다. 누구의 지시나 지도에 기대지 않고 자력으로 이를 해결한 데서 그의 비범함이 발견된다. 일기에서 그는 “사람들이 무용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무용가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19세기 내내 무대 위에서 여성의 보조역으로 시종(侍從)하던 남성 무용가의 지위는 마침내 니진스키를 계기로 단숨에 급전(急轉)하여 예술가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그가 일기에서 새삼 꿈꾸기 시작한 것은 전혀 또다른 무용이었다. 러시아 황실 발레 학교를 졸업하고 무대에 나설 적부터 발레에서의 인습을 물리치고 줄기차게 다른 방향을 틀어간 그다운 꿈이었다. 이런 때문인지 일기 중간에 니진스키는 자기가 이해되기를 바란다면서 일기의 무료 출판을 기대하였다.

바슬라프 니진스키( Nijinsky. Vaslav)
폴란드계 러시아의 전설적인 무용가·안무가, 니진스키. 1889년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함께 춤을 춘, B. 니진스카의 오빠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실무용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졸업 후에는 마린스키 극장에 독무자로 입단했으며, 『아르미드 관』, 『지젤』을 비롯한 많은 작품에 출연해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미 학창 시절부터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리며 천재성을 인정받았다.1907년 페테르부르크의 황실(皇室)무용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파리에서 창단한 S. P. 디아길레프의 발레뤼스(러시아발레단)의 제1 남성무용수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서 『세헤라자데』 『장미의 정(精)』 『페트루슈카』 등, 개성과 천분을 주체로 한 작품으로 더욱 명성을 높여 당대 제일의 남성무용수라는 칭찬을 받았다. 1911년부터 안무가를 겸하여 『목신(牧神)의 오후』 『봄의 제전』 『유희』를 창작하였는데, 1912년에 자작자연(自作自演)한 『목신의 오후』는 고전무용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한 작풍으로 특히 문제를 불러일으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1913년 남아메리카 순회공연 중 무용수인, 헝가리 백작의 딸 로모라와 드 폴츠키와 결혼, 그것이 원인이 되어 애인이자 후원자였던 디아길레프와 헤어졌다. 디아길레프의 방해로 1914년 런던에서 자신의 발레단을 창설하려다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16년 복귀하여 미국에 건너갔고, 이듬해 남아메리카 순회 중 정신 이상 증세가 심해져서 요양차 스위스의 생모리츠에 정착했다. 1918∼1919년에 정신질환 증세가 심해졌는데, 바로 이 시기에 『일기』를 집필하였다. 그 뒤로 요양원을 전전하다 1950년 런던의 사설 진료소에서 신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광기(狂氣)와 천재 사이를 헤맨 불세출의 인물로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다. 아내 로모라가 쓴 『니진스키전(傳)』 『니진스키의 일기』 『니진스키의 만년』 등이 있다.

일간지 북리뷰 『한겨레』 2002년 12월 14일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푸른숲 刊. 바슬라프 니진스키著. 이덕희譯 

바슬라프 니진스키(1889∼1950)는 명성의 정점에서 홀연히 암흑 속으로 사라져버린 발레사의 전설이다. 20세기 초 그의 등장으로 발레의 역사는 현대발레와 고전발레로 나뉘었다. 그의 춤은 이제껏 여성 무용수(발레리나)의 보조자에 머물렀던 남성 무용수(발레리노)를 무대의 중심에 세웠다. 그의 뒤를 이어 루돌프 누레예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같은 발레 스타들이 솟아올랐지만, ‘발레의 신’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은 오직 니진스키에게만 주어졌다.

그는 정신의 붕괴를 겪기 시작하던 때에 ‘내면의 목소리’를 충실히 기록한 ‘일기’를 남겼는데, 1995년 니진스키의 딸이 원본을 공개함으로써 그 전모가 드러났다.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는 이 일기를 니진스키 전문가인 이덕희씨가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애초 러시아어로 쓰인 이 원본의 영어·프랑스어판을 그대로 옮기고 8통의 편지를 덧붙였다.

또 200자 원고지 300장에 이르는 상세한 옮긴이 해설은 니진스키에 관한 압축된 평전으로 보아도 무방할 내용이다. 이 일기는 그의 정신질환이 광증으로 떨어지기 직전인 1919년 6주 반 동안 쉼없이 써내려간 육필 기록이다. 영혼의 노란불이 깜박거리던 때의 내면을 그대로 글로 옮겨놓은 셈인데, 이 점에서 그의 일기는 분열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한 한 인간의 특이하고도 예외적인 정신분석학적 텍스트이기도 하다.

분열증 초기의 기록인 만큼 그의 글은 논리적 연관성이나 합리적 추론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에 “사념의 연상에 의해 지배되는 의식의 흐름”이 끝없이 이어진다. 가령, 그는 일기 전체에 걸쳐 ‘신의 문제’를 반복해서 이야기하는데, 앞부분에서 “신은 알고 있다.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인간이고 신이 아니니까”라고 했다가, 얼마 있지 않아 “나는 신의 명령을 완수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인간이다”라고 선언하고, 곧이어 “나는 신이다. 신은 내 안에 있다”라고 쓴다.

그가 일기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단어가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메마름’이다. 일기의 출발점에서 벌써 이렇게 말한다. “나는 콩을 좋아하지만, 그것들은 메마르다. …스위스 사람들은 메마르다. …나는 취리히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곳은 메마른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메마름’은 “생명이 없고” “느끼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감정’이란 말도 그에겐 아주 절실한 단어인데, 그것은 “직관적 통찰력, 곧 어떤 대상을 정서적으로 흡수함으로써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다. 감정의 서술은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은 감정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감정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싶기 때문에 이 책을 쓰고 싶은 것이다.”

니진스키는 러시아 황실발레학교에 다니던 10대 때 이미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라는 찬사를 얻은 발레의 신동이었다. 그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동성연인으로서, 그가 창단한 ‘발레 뤼스’를 따라 유럽을 순회하며 “중력의 법칙을 비웃듯” 무대 위를 날아다녔다. 관객은 그에게 열광했다.

그러나 자신의 후원자이자 지배자였던 디아길레프와 극심한 갈등을 겪고, 그의 간섭과 훼방으로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자 갇힌 새처럼 괴로워하다 “자기 내부로 은퇴”해 버렸다. “나는 그리스도처럼 고통받았다”라는 구절은 자기를 버린 세상, 특히 디아길레프에 대한 애증·두려움의 감정을 단말마처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