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로 발가벋겨지다."
문제의 가족동의서. 가족이라야 집사람과 꼴랑 하나뿐인 아들이 전부다. 음! 그렿다면 아들의 동의서도 유효하다는 애기?
센타에 전화를 넣었다. " 왜 사모님은 안되나요? " "아니~ 상담사님의 남편이 장기기증한다고 하면 사인 하시겠읍니까? 숭고하고
장한 일 한다고. . . ." 마흔쯤으로 보였던 상담사에게 따지듯 물었다. " 그럼 아드님은 가능한가요?" " 아니 지금부터 해봐야죠. "
" 어차피 윤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야하니 우선 그렇게라도 해보세요. " 그렇다 일정을 소개할 때 서울대병원 윤리위원회에서
1차로 서로의 친분을 확인하는 서류심사. 2차로 6명의 면접관이 무작위로 질문을 던져 친분을 검증하는 단계를 거쳐 최종 국가장기이식센타의 최종결정을 받는다는 설명이 있었다. 장기매매를 방지하기 위한 절차이지만 "주는 것도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수밖에 . . . 대구 경북대를 나와 산림청에 근무하는 아들을 향해 고속버스에 올랐다. 머리를 굴려야했다. 어떻게 설득하지....?
처음으로 아들 눈치를 보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다. " 야! 저기말이야. 길동이 아버지 당장 손을 안쓰면 안되는 것같아. 순번은 아득하고. . ." " 그럼 애들이 나서야죠~ 아버지 살리는 일이고, 유전학적으로도 가장 안전하고. . . ." 할 말이 없는 정답이다. 휴!
두어시간 설득끝에 엄마에게는 당분간 비밀에 부치기로하고, 사실 집사람과는 졸혼의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암튼 이리하야 두사람의 혈액면역반응검사를 필두로 기나긴 신체검가가 시작되었다. 장기공여자가 장기를 떼었을 떄 최대한 건강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의사의 설명이니 감내할밖에.
토목이 전공이었던 나는 직원 5~6명의 쬐매한 토목회사를 한답시고 현장일로 한달에 한두번 집에 들르기 일쑤였고 경북대에
다니던 아들마져 대구에 기거하니 그야말로 집사람은 생과부가 따로 없었다. 참다못해 친정부근으로 가고싶다는 말을 안들어 줄 명분이 없었다. 마산댁인 집사람은 남양주 아파트를 정리하고 내려갔고, 이는 우리 졸혼의 시작이 되고말았다.
잊을만하면 한번씩 터지는 현장의 사고, 하청에 재하청 그리고 갑질, 하청사의 먹튀등 신물이 나서 2011년말 폐업하고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나 망해서 왔노라고 마누라한테 가는건 좀 아니고, 지금의 한갓진 시골에 방을 얻고 생계를 위해 일용직노동자라는 꼬리표를 달게되었다. 당연히 운동부선후배등 지인들과의 접촉은 끊기다싶이 했고, 76의 근황도 당연히 몰랐던 것이었다.
다시 본래의 애기로 돌아와서, " 다음 검사는 방광내시경입니다. 마취는 하지만 좀 아플겁니다. 목욕도 좀 하시고. . . ." ? ?
이발소의자에 하의가 발가벗겨진 채 발목이 묶이고, 그것도 여성간호사가 지켜보는데. . .끔직한 상황이다. 마취를 했다지만 오줌길을 따라 고통이 밀려왔다. 다행히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살집이 넉넉한 여간호사가 입회했다는 것은 병원의 배려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 고통의 후유증은 근 일주일을 지속되었다. 지금도 그 생각만하면 몸이 쪼그라든다.
얼마나 지났을까? 또다른 검사를 받기 위해 이른 아침 병원1층 로비에서 셋이서 커피를 나누던 중 느닷없이 76이 주둥이를 턴다. " 야! 너 종합검진 한번 제대로 받는다. " 순간 형수가 얼른 내눈치를 본다. " 이런 개자슥! 지금 그걸 말이라고 씨부리는거야!" 물론 내 혼잣말이다. 얼어붙은 나를 보며 형수가 지 서방한테 한마디한다. " 여보 그런 말이 어딨어? " 맞다 ! 농담이라도 해서는 안되는 말인 것이다. 이것이 망언1탄이었다. 후에도 망언은 이어진다. 아침 10시 검사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새벽에 일어나 내 일당도(당시 날라리 개목수였지만 일당 17만원짜리였다.) 포기하고 사비들여 3시간이상 걸려서 오는데. . . . 건강검진이라고라!!!
후배같았으면 한주먹 날렸으리라.
윤리위원회의 질문 " 직업이 뭡니까? 4편에서. . . .
첫댓글 내용은 점점 더 궁금해져만 가는군요
담편이 또 기달려지네요 ^^
스릴만점 서스펜스~~~옛 영화 광고 카피가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