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목사님
나훔서 1장 15절 합독하시겠습니다.
(나 1: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다 하시니라 아멘
원어중심 성경강의 나훔 23번째, ‘절기를 지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제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번 주는 15절 전부를 하지는 않고요, ‘절기를 지키고까지’만, 원래는 다 하려고 했었는데 좀 너무 긴 것 같아서 잘랐어요. 그래서 오늘은 조금 짧은 느낌이 드실 수가 있고요, 자 보겠습니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라고 해요. 이게 지금 니느웨에 대한 심판과 멸망을 선언하는 14절에 이어서 15절은 남유다를 향해서 해방을 지금 말씀하고 계신 거죠. 근데 다른 성경에서는 이 15절이, 1장 15절이, 2장으로 넘어가기도 해요, 2장 1절이 되기도 해요, 이유는 ‘볼지어다’라는 구절 때문에 그래요.
‘볼지어다’라는 말이 ‘힌네’라고 하는데, 힌네라는 말이 나올 때는 뭔가 새로운 내용이 시작되는그런 때가 많거든요. 그래서 이게 2절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그렇게 보면서 2장 1절로 이렇게 쓰는 그런 성경도 있습니다. 내용상으로도 니느웨가 완전히 멸망되기도 하지만, 물론 지금까지 이중 대조 예언이라고 해서 두 번에 걸쳐서 니느웨의 멸망과 유다의 해방, 그게 반복되니까 15절이 1장에 있는 것도 맞죠, 그것도 맞고 우리 성경도 일리가 있는 거고요, 근데 다른 어떤 성경들에 보면은 힌네라는 구절 때문에 2장 1절로 넘어가기도 한다는 거 말씀드리고요.
그 ‘힌네’라는 말, ‘볼지어다’ 이렇게 번역되고 있는 이 힌네라는 말은 보통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 신탁, 신탁의 전형적인 서두가 되죠.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다’라고 해요.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라고 할 때,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는 한 글자예요. 우리 한글 성경으로는 낱말이 3개가 나오지만, 히브리어로는 ‘바사르’라고 합니다. ‘소식을 가져오다, 전하다’ 이런 뜻이죠, 바사르. 요게 근데 우리가 잘 아는 ‘육체’를 뜻하는 ‘바사르’랑 글자가 같죠, 발음과 글자가 같아요. 스트롱 코드를 보면은 1319, 1320번으로 이렇게 연결돼 있어요.
근데 성경 자체는 모음이 없으니까 구별하기가 어려울 것 같지만, 이게 ‘소식을 가져오다’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항상 이 원형으로 쓰인 적이 없고, 전부 피엘형이나 히트파엘형으로 쓰여요, 그래서 변형이 되죠. 변형이 되니까 이게 구분이 거의 잘 되는 편이죠.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같은 경우에는 이게 분사예요.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오는 자, 알리는 자’라는 뜻이에요. 피엘분사형이에요, 그래서 ‘메바세르’가 되죠, 메바세르 이게 분사형이에요. 그래서 ‘아름다운 소식을 반드시 가져오는 자’라는 그런 의미죠.
그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라고 해요. 화평, ‘화평’은 ‘샬롬’이죠, 샬롬을 전하는 자, 그리고 ‘샤마’ 샤마 동사의 분사형이에요, 히필 분사형이어서 ‘마쉬미아’라고 해요, 마쉬미아. 그러니까 히필형이니까 ‘듣게 하는 자’라는 뜻이 되는 거죠, 듣게 하니까 ‘전하는 자’라고 번역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듣게 한다의 의미 속에는 또, 우리에게 전해서 듣게 하지만은 어떤 자기 생각을 전하는 게 아니라, ‘전하라고 하는 분의 뜻을 들어서 전한다’라는 의미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샤마라는 단어를 쓴 거죠.
그리고 ‘산 위에 있도다’. 요거는 ‘알하르’라고 해요, 알하르. ‘발이 산 위에 있다’라고 하니까 ‘알하르 레겔’ 이렇게 돼 있어요. ‘알’은 ‘~ 위에’죠, 위에 또는 ‘~에 대하여’ 이런 뜻이죠. 그리고 ‘하르, 산’이에요, 산은 복수고 ‘하림’이라고 하고요, 여기 관사가 붙었어요, 그래서 하하림이라고 해요.그러니까 그 산들 위에, 그리고 ‘레겔’, 레겔은 ‘발, 발들’. 발은 둘이니까 복수죠, ‘발이 산 위에 있다’라고 하는 거, 이 구절은 이사야서에서 나오는 구절하고 비슷하죠. 이사야서 40장 9잘 합독하시겠습니다.
(사 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이런 구절과 비슷하고요, 또 이사야서 52장 7절과도 아주 흡사하죠, 전반부하고. 합독하시겠습니다.
(사 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내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거의 똑같죠?
제가 나훔서와 이사야서를 지금 비교를 해놨어요, 나훔 1장 15절하고 이사야서 52장 7절.
그래서 나훔 같은 경우에는 ‘힌네, 볼지어다’가 먼저 나오죠? 근데 이사야서는 ‘마나아’라는 의문문이 먼저 나와요. ‘어찌 그리 아름다운 가’죠. 그리고 나서 나오는 거는 똑같아요. ‘알하르’가 나오고 그리고 ‘레겔’이 나오고, 그리고 ‘바사르’ 분사형이죠, 피엘 분사형 똑같아요. 그리고 ‘샤마’가 나와요, 이것도 히필 분사형 똑같아요. 그리고 샬롬, ‘샬롬’도 이것도 똑같아요. 지금 여기까지는 똑같고, 물론 이사야서가 좀 더 길어요. 근데 다 안 적고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까지만 적은 거예요.
그리고 그 발, 전부 발을 수식하는 거예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 평화를 공포하는 자의 발,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이사야서는 그 사이에 조금 더 추가돼 있지만 그걸 빼면 나훔서와 똑같아요.
근데 이 문장 구조로 보면 ‘볼찌어다’가 먼저 나온다고 했죠? ‘힌네’. ‘볼찌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다’라고 하는 거고, 이사야서는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하고,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 똑같단 말이에요. 이게 ‘알하르’고 그리고 ‘알하하림’이죠, 그 ‘산들 위’, 위라고 한다 하면서, ‘알’이라는 전치사 자체는 ‘against’의 의미가 있다고 했죠, ‘대적한다’의 의미, 그러니까 산, 산이란 말이에요. 산은 성전을 뜻하죠. 그러니까 성전들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들 위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들 위에 있으면서, 우리들을 대적하는 그런 의미도 있는 거죠. 그러니까 ‘위에 있다’라고 하는 거니까 제압한 그런 의미가 있는 거죠.
그것들이 전부 레겔에 걸리는 거예요. 그 산이란 말이에요. 근데 이렇게 똑같다고 하는 거는, 그런 생각이 들죠, 누군가가 이거를 먼저 썼을 거고 나중에 쓴 사람이 있을 거고, 그래서 누군가가 그거를 차용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해 볼 수가 있죠. 나훔은 주전 7세기 경에 예루살렘에서 이걸 썼다고 추정을 하고 있고요, 이사야서는 주전 8세기 경에 활동한 그런 선지자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사야서를 나훔이 차용한 게 거의 확실하죠. 이사야서를 살펴보게 되면 나훔서 요 앞부분도 같이 공부하는 게 되겠죠. 이사야서 52장 7절을 보겠습니다.
이사야서 52장 7절이 앞부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가 먼저 나온다고 했죠? ‘마나아’라고요. 나훔서에서는 ‘힌네’에 해당하는 그런 구절이죠. ‘나아’라는 말은 ‘아름답다, 어울리다, 닮았다’ 피엘형이에요. 그래서 ‘매우 아름답다’ 이렇게 강조형이 되는 거죠. 마나아니까 ‘What a beautiful’ 이렇게 되는 거죠.
‘좋은 소식을 전한다’ ‘바사르’라고 했습니다, 바사르의 분사형. 그러니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죠. 그리고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샬롬을 ‘샤마’ 듣게 하는 자, 히필 분사형이고요. 그리고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라고 하는데 이거는 ‘바사르 토브’라고 해요, 바사르 토브. 바사르가 분사형이죠, 역시. 소식을 가져오는 자가 되는 거죠. 근데 토브는 소식을 수식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 성경을 보면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 이렇게 들리니까 ‘소식이 좋다, 복되다’ 이렇게 들린단 말이에요.
근데 소식 자체는 좋아요, 좋은데 이 토브라는 단어가 수식하는 거는 바사르란 말이에요. ‘바사르’는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자’예요, 지금. 그러니까 토브가 수식하는 건 그 사람을 수식하는 거란 말이에요.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자, 그러니까 ‘복음의 전달자가 선하다’는 뜻이에요. ‘그 선한 복음 전달자’ 이런 의미라고 보시면 되고요.
그리고 ‘구원을 공포하며’ 구원을 공포하는 자죠. ‘예슈아’를 공포한다는 말도 ‘샤마’의 히필 분사형이에요. 그러니까 ‘구원을 듣게 하는 자’가 되는 거죠. 그리고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말은 ‘말라크’예요. 말라크가 ‘왕이 되다, 여왕이 되다’ 또 ‘통치하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너희 하나님이 왕이 되셨다’라고 하는 거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진짜 왕이 되셨다, 진정한 왕이 되셨다. 그러니까 그게 통치하시는 거죠.
그걸 ‘말하는 자’, ‘아마르’, 아마르의 분사형이에요, 말하는 자니까 아마르의 분사형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오메르’라고 하는데, 말하는 자의 ‘발’, 그리고 그의 또 산을 넘는 발, 이거 역시 그의 발이에요. 지금 ‘알하르 레겔’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발에 모든 게 수식이 됐어요. 그들의 발, 여러 명은 아니에요. 그의 발이 알하르 산 위에 있다. 이렇게 봐요. 그러니까 ‘알하르’는 ‘산을 넘는다’라고 이사야서에서는 번역하고 있지만 나훔서에서 ‘산 위에 있다’라고 했죠, 그게 좀 더 가까운 거예요, 원문에 좀 더 가까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산을 넘는 발’ 이러니까 마치 전도자가 열심히 산 넘고 물 건너서 막 이렇게 전도하러 다니는, 그런 뭔가 힘들게 수고하는 그런 느낌이 든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의 발이 우리 위에 있다’라고 하는 거예요. 산을 넘는 게 아니라 위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위니까 우리를 장악한다는 거예요, 정복하고, 장악한다는. 그러면 이 좋은 소식을 전하고 평화를 공포하고 복된 소식을 가져오고 구원을 공포하고 시온을 향하여 내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아마르, 진리로 말씀하시는’ 그는 누구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이시겠죠. 사무엘하 18절 22절 합독 하시겠습니다.
(삼하 18:22-23) 22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데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23 그가 한사코 달려가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이르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
사독의 아들이라고 해요, 사독. ‘사독’은 ‘차도크’라고 하는데 이게 ‘의로운’이라는 뜻이에요, 의롭다는 뜻이에요. ‘차티크’라는 말과 글자가 같죠, 자음이 같아요. ‘의로운’ 그러니까 ‘의의 아들’인 거예요. 의로운 아들, ‘의’의 아들 ‘디카이오쉬네’의 아들인 거죠.
‘아히마아스’라고요, ‘아히마아스’ 이거는 ‘나의 형제는 좋은 자다’라는 그런 뜻이에요. 나의 형제는 좋은 자다, 그러니까 내 형제가 보혜사라는 뜻이죠. 보혜사가 도와주는 자잖아요, 돕는 분. 그러니까 보혜사인의 형제가 ‘달려요’, ‘루츠’라고 해요. 달려서 이렇게 오게 되는 거예요. 근데 간다고 하니까 요압이 가지 말라고 하죠, 달려가겠다라고 하는데 요압이 가지 말라고 해요. ‘요압’ 요압은 ‘예호와’란 말과 ‘아브’라는 말이 합쳐진 거예요. 그래서 요압이에요. 그러니까 ‘여호와는 아버지시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의미예요. 그 여호와 아버지라는 분이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라고 하는 거예요. 물론 ‘왜 달려가려 하느냐’라고 묻지는 않았어요, ‘마’라는 의문부사가 나온단 말이에요. ‘마’라는 말은 ‘무엇이냐’라는 의미라고 했죠. 그러니까 이게 원문을 보면 ‘달려가는 네가 무엇이냐’ 이런 의미예요, 원문을 직역하면. 좋은 소식을 가지고 복음을 가지고 서둘러서 그 산, 그 산으로 오려고 하는 이에 대해서 네가 무엇이냐라고 묻는 거고, 그 물음에 대해서 독자가 이분이 어떤 분인가를 생각할 수가 있겠죠.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라고 하는데 ‘소식’은 ‘베소라’라고 해요. 이게 베소라, 이거는 ‘바사르’ 아까 ‘소식을 전하다’ 그 동사의 명사예요, 베소라가. 이 소식으로는 상을 받지 못한다. 이거는 상하고는 관계없는 사실은 말이에요.
‘마차’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러니까 찾는 그 베소라, 그 소식은 ‘아인’, ‘없다’ 라고 하는 거예요. ‘너를 찾는 소식은 없다’, 이게 직역하면 이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원하고 그걸 막 기대하고 이러면서 처음부터 하나님께 매달리고, 우리가 간청하고 이러지 않잖아요. 우리가 먼저 찾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분이 우리를 찾아주시는 거죠. 그래서 상하고는 관계가 없는 말이고, ‘찾는다’라고 하는데 ‘마차’라는 말이 그게 분사형으로 나와요. ‘찾는 그 소식’, ‘소식은 없다’라고 하는 거죠.
‘그가 한사코 달려가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이르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 여호와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의 아들인 그 내 형제 보혜사가 달려가겠다라고 하죠. 그래서 그 여호와 아버지가 허락하고 그리고, 그 의 아들이 들길로 달음질한단 말이에요.
‘들길’ ‘데레크 킥카르’라고 해요. ‘데레크’, ‘길’, 길이에요. 킥카르, ‘하 킥카르’ 관사가 있어요. 그러니까 ‘킥카르’는 ‘원형 지대’를 뜻하면서 ‘지역, 들’ 이런 뜻이 있어요. 그 지역의 길, 그 들의 길이라는 거죠. 길, 길은 항상 주님이 길이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시는 그 길인 거죠. 그 지역, 나를 뜻하는 거죠 , 내 안. 내 안을 달려오시는 거죠. 그렇게 달려온단 말이에요. 근데 출애굽기에서도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급하게 먹으라’고 하잖아요, 급하게. 그러니까 주님이 시급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급히 달려오시는 그런 의미인 거예요.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다름질해서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 간다’는 ‘구스’, 구스는 ‘검다’라는 뜻이죠. 검다, 검은 것은 죄고 율법이라고 말이에요. 그를 앞질러 간다는 말은 ‘아바르’ 공부했죠, 우리가. 아바르는 ‘건너가다’, 그 율법의 강을 건너가는 거죠. 요단을 건너가고 그 죄, 율법을 건너가는 거예요, 그 의의 아들이. 이 복음을 가지고 기쁜 소식, 복음을 가지고 주님이 달려가시지만, 이렇게 율법을 건너가는 거, 이게 구원의 복된 소식인 거죠, 율법을 건너가는 거.
구스 사람과 아히마아스는 그러니까 소식을 둘 다 전하는 자죠. 그리고 이게 짝인 거예요. 예수와 그리스도, 율법과 진리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결국 그들이 함께 소식을 전하죠. 누구에게 전해요? 왕에게 전하죠, 세상 왕인 우리이기도 하고, 다윗에게 그 소식을 전하죠. 근데 그 소식의 내용이 뭐예요? 그들이 전하는 소식의 내용이. 하나님이 그 왕의 대적을 물리쳤다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 물리침으로 해서 다윗에게는 무슨 일이 생겨요? 아들이 죽는 거죠. 대적이 아들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압살롬, 샬롬의 아브, 아비란 말이에요. 평강의 아버지, 평강의 주, 예수란 말이죠. 그 아들의 그 죽음, 아들이 죽는 게 그게 복된 소식이에요. 복음이란 말이죠. 아들이 죽음으로써 그 죽은 아들이 영으로 우리 안에 다시 온단 말이죠. 육으로는 올 수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도 오셨는데 그 육신이 제해져야만, 말씀이 온전히 우리 안에 오는 거고 깨달아지는 거죠. 그래서 그 아들이 죽는 거고,
그렇지만 그 죽음이 다윗이 굉장히 슬퍼하죠, 압살롬아 압살롬아 이러면서. 그러니까 단순히 무슨 프로그래밍 된 것처럼 신이니까 고통도 없고, 십자가에서 죽는 게 별일 아닌 것처럼 느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잠깐 엿볼 수가 있는 거예요.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하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때 그 하나님의 마음도 어느 정도 엿볼 수가 있는 거죠. 그렇지만은 그 아들의 죽음이 좋은 소식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지금 좋은 소식을 전해요, 전하는 자예요. 평화를 공포하시는 분이고,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시고, 구원을 공포하시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말하시는 분인데, 근데 그 주님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기쁜 소식은, 결국은 자기의 죽음이란 말이에요.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그분이, 그 몸이 죽으면 영으로 우리 안에 오시는 거고, 그 우리라는 산, 성전된 우리를 밟고 서서, 우리의 머리가 되어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로 만들어 주신 거죠. 이게 아버지가 아들로 하여금 이루게 하신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상천하지에 이거보다 사실은 기쁜 소식이 없는 거란 말이죠.
이사야서에서 나훔서도 마찬가지고, ;이걸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라고 했죠. 그 나훔서나 이사야서나 공히 ‘발’을 강조하고 있는 거죠. 이 발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보기로 하고요, 본문으로 돌아가서요.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소원을 갚을지어다’라고 해요. 절기, ‘절기’라는 말은 ‘하그’라고 합니다, 하그. 그리고 ‘지키다’라는 말은 ‘하가그’라고 해요. 하가그가 ‘절기를 지키다, 춤추다, 흔들거리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절기를 지키는데 그게 어떤 축제의 양상인 거죠, 잔치란 말이에요. 그래서 춤추다라는 뜻도 있는데요. 그러니까 절기를 지키다라고 하는, 절기는 이스라엘의 주요 절기가 3개가 있죠?
첫 번째가 유월절 그리고 초막절, 그리고 예 초막절이 수장절하고 같은 거죠, 같은 의미고, 수장절 이전에 무교절은 유월절하고 같이 묶이는 명절이죠. 그러니까 그 가운데 수장절이라는 것 자체가, 곡식을 창고에 들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곡식을 거두는 때가 있겠죠, 맥추절, 초실절, 맥추절 같은 절기고요. 그러니까 유월절, 무교절 같은 절기인데, 그게 어린 양의 은혜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그런 절기고요,
그리고 두 번째 절기가 맥추절, 또는 초실절이라고 하죠. 첫 열매를 거두는 맥추절. 초실절이 다른 말로, 예 칠칠절인데, 칠칠절이니까 오순절, 예 칠칠절이니까 바로 다음이 50이 되는 거죠, 오순절. 그러니까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는 거죠. 그러니까 맥추절 초실절 이 오순절이 성령이 임하시는 열매를 거둔다는 것 자체가 성령의 열매란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의 열매인 거죠.
세 번째가 곡식을 다 거두고 나서 저장할 때 수장절이고, 그걸 초막절이라고도 한다고 했죠. 그게 초막절이라고 할 때는 광야 생활할 때 광야에서 초막 짓고 살았던 그걸 기억하는 기념하는 그런 절기인 거죠. 흔히 절기라고 하면 이러한 내용으로 이해를 하는 거죠. 그걸 이스라엘에서도 그렇고 또 교회에서도 그렇고 이런 것들을 특별히 큰 기념일로 삼아서 절기를 지키듯이 예배를 드리기도 하죠.
(출 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모든 절기의 시작이에요, 유월절. 유월절에 대해서 먹는 방법에 대해서 지금 설명을 하고 계시죠. ‘허리에 띠를 띠고 먹어라’라고 해요. 허리에 띠를 띤다라고 하는 거는 허리에 띠, 띠는 진리, 그러니까 진리로 먹으라는 거예요. 허리에 띠를 띠고 먹으라는 거는 진리로 먹어라. 유월절 어린 양을 지금 잡아서 먹는데, 그 양을 보이는 대로 보면, 그러면 율법이 되는 거죠, 보이는 대로.
우리가 먹는다라고 하는데 그거는 말씀을 깨닫는 거예요. 진리로 먹으라고 하는 거는 유월절 어린 양, 말씀이란 말이에요. 말씀이 육신에 오셨잖아요. 어린 양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거란 말이죠. 우리에게 오시는 말씀을, 그 어린 양을 보이는 대로 보면 이건 맛있는 고기야 이러면서 그냥 먹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일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이걸 뭘로 보느냐는 거예요. 그걸 보이는 대로 보면 그냥 맛있는 고기, 이걸로 내가 즐겁고 내가 유익하고 내가 기쁘고 때로는 슬프고 이러면서, 그게 아니라 진리로 먹으라는 거죠.
그 다음에 ‘발에 신을 신고’ 신, 신은 평안의 복음의 신이죠. 평안, 샬롬의 복음의 신, 샬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여기는 거룩한 곳이니 내 신을 벗어라'라고 하잖아요. 율법의 신을 벗어야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을 수가 있는 거죠. 내 신을 벗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생각, 나의 율법, 나의 두 마음을 벗는 거죠. 벗는다라고 하는데, 평안, 샬롬이란 말이에요. 샬롬이 내 안에 임하려면 그거는 어떤 상태예요? 죽은 상태. 그러니까 십자가 죽음, 내가 죽어야 내가 십자가 죽음을 죽어야 그 두 마음이 없어져야 삭제돼야 이때 평강이 임하는 거죠. 그러니까 십자가에 죽음을 죽는 그 진리, 그 진리의 신인 거죠.
그리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먹으라라고 하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손, 손은 능력을 뜻해요, 능력을 뜻하는데 우리가 손에 지팡이를 잡는 거죠. 그러니까 내 손이에요, 내 손인데 그러니까 내 능력이죠, 내 손은. 근데 내 능력이라는 거는, 율법의 능력이란 말이에요. 내가 그걸로 뭔가를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거, 이스라엘이 내내 했던 거 그 율법적인 행위, 이걸로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 이룰 수 있다라고 하는 거. 그리고 내 천국 내가 이룰 수 있다라고 하는.
우리가 일상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말씀을 나의 그 두 마음으로 판단하면서 이걸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라고 계속 내가 하나님처럼 됐잖아요. 두 마음으로 판단한 것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거고 그게 내가 능력이 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나의 능력이에요.
그 능력, 그 능력의 손에 뭘 잡아요? 지팡이 잡아라. 지팡이는 십자가, 십자가 잡아라, 십자가 붙잡아라 라는 거예요, 의지해라. 언뜻 보기에는 미련해 보이지만 그 십자가가 진짜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능력인 그 십자가 의지해라’라고 하는, 십자가 의지하라는 건, 결국은 또 죽어라. 성경은 계속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진리라고 하는 거예요. 죽으라는 게 육을 벗으라는 거예요. 두 마음은 버리면 성령께서 참된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거죠. 그러면 그 나라 그 천국이 내 안에 이루어지는 거죠. 그걸 급히 먹어라, 빨리 천국 되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빨리 죽어라라고, 하나님의 뜻은 계속 죽어라, 죽어라 빨리 죽어라.
(출 12: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또 이제 고기 먹는 방법도 알려주시죠. 구워 먹어라. 구워 먹으라는 거는 뭔 말이에요? 날 것으로 먹지 말고, 날 것으로 먹는다는 건 보이는 말씀 그대로 또 받는 거죠. 우리 맨날 날것으로 먹잖아요. 날거 좋아하는 거죠. 그래서 보이는 말씀 주시는 말씀 보이는 대로 보고 이게 중요한 거야, 내 눈에 보이는 그 사건 사고들 관계 그리고 자연 만물들 현상들 모든 것들 보이는 대로 보면서 이게 중요하고, 그 파님들 하나님이 뭔가 알라고 교육의 재료로 주신 것들 그걸 가지고 이게 중요하고 이게 잘 돼야 내가 잘 되는 거지, 이게 잘 돼야 이 세상 사는 보람이고 업적이 되는 거지. 그거 어떻게 해서든지 뭔가 더 많이 쌓고 그걸로 내 자랑 삼고... 이게 날 것으로 먹는 거예요.
그거 하지 말고 구워 먹어라. 불에 성령의 진리로 먹으라는 거예요. 그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그 예수 그 말씀을 그 육 그대로 먹지 말고 보이는 걸 보이는 대로 보면서 이희일비하지 말고 두 마음의 탐심 선악의 두 마음, 뭐는 좋고 뭐는 싫고, 그 두 마음으로 먹지 말고 진리의 말씀으로 먹어라. 진리의 말씀 십자가 죽으라는 거죠. 그 모든 게 죽이기 위한 말씀이란 말이에요.
죽인다는 거는 새롭게 하는 말씀이고 영으로 새롭게 나의 두 마음 탐심을 제거해 주시고 영으로 새롭게 해주시는 말씀인 거죠. 새 사람 만들고 새 성전 만들어 주시는 말씀인 거죠. 보이는 모든 것들은 허상이고 배우라고 주신 것들 너무 실제 같아서 버릴 수가 없는 거죠. 놓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진짜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을 불에 구워서 그 전부 진리로 먹어야 된다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나를 그 십자가의 죽음을 죽게 하는 그 구원의 말씀으로 은혜의 말씀으로 깨달아라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일들 관계들 그게 전부 나를 죽이기 위해서 주신다는 걸 이해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왜 나를 기분 나쁘게 괴롭게 해, 세상이 왜 이래 이런 차원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항상 거기에서 눈을 떼게 해주시는 거라니까요. 그 의미를 알아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걸로 기뻐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죽는 거예요.
죽는 게 괴로운 게 아니라 죽음이라는 게 우리에게는 육을 입고 있는 자들에게는 가장 큰 고통의 의미로 다가오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죽어라 죽어라 십자가까지 시청각적으로 막 보여주잖아요. 영화에서도 보여주고 채찍 맞고 십자가에 달리고 너무 아픈 거죠, 괴로운 거죠.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거는 아파요, 괴로워요, 가장 큰 고난이기도 해요. 육을 입고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이렇게 그 동안에 평생 동안 나의 두 마음으로 내가 왕 노릇하면서 살았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하나님 아니고 나의 모든 두 마음의 판단을 내려놓고 모든 걸 하나님의 선하신 뜻 나를 죽여서 성전 만드시는 뜻으로 깨닫는다고 하는 거는 하나님이 빛을 주시고 눈을 열어주시기 전까지는 절대로 깨달을 수가 없는 거죠. 죽을 만큼 괴로운 거예요. 그 모든 말씀을 바로 그걸 위한 새 성전 만들기 위한 그 은혜의 말씀으로 깨달아라. 이게 고기 구워 먹으라라는 말씀의 진의인 거죠.
그렇게 먹는데, 그 유월절이란 말이 유월절에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는 그러한 재앙이 있었죠? 근데 인간들이 보기에는 재앙이에요. 그렇지만 애굽과 이스라엘은 전부 나란 말이죠. 내 안에서 애굽이 죽는 거예요. 애굽은 죽고 이스라엘은 살죠.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산다는 거예요. 그거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삼상 1:3)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비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예 ‘홉니와 비느하스’가 나와요,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두 아들이란 말이에요. 두 아들은 뭐라고 했어요? 두 아들은 짝이잖아요.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처럼 두 아들이에요. 예수와 그리스도, 율법과 진리를 가르쳐주는 그러한 인물인 거죠.
‘홈니’라고 하는데 홈니는 이게 ‘호펜’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호펜. 호펜이 ‘손바닥’을 얘기해요. ‘한 줌, 한 움큼’ 그러니까 주먹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손바닥 또는 주먹. 그래서 홈니라고 하면 사전에는 ‘복서’라고 나와요, 권트 선수. 옛날에도 권트 선수가 있었으니까, 주먹으로 싸우는 자. 그래서 손으로 싸우는 자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손’이란 말이에요, 손. 손은 ‘힘, 능력’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자기 힘 자기 능력. 자기 능력이라는 건 결국 선악이에요. 선악의 두 마음 그 판단 그 율법으로 다투는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비느하스, ‘비느하스’는 글자를 자세히 보시면 뒤에 세 글자가 ‘나하쉬’에요, 뱀이에요. ‘뱀, 나하시’. 그리고 ‘앞에’가 ‘페’ 페라는 글자와 같죠. ‘페’는 ‘입’. 그러니까 ‘뱀의 입’이에요. 심상치 않은 의미가 나오죠? 뱀의 입. ‘주님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라고 했죠? 그러니까 지혜로운 뱀이란 말이에요. 뱀의 입이니까 지혜로운 말이 되는 거예요. 입은 말이니까.
그러니까 지혜는 그리스도잖아요. 뱀의 지혜라는 건 무슨 지혜예요? ‘뱀같이 지혜로워라’라고 하셨는데 뱀의 지혜라는 거는, 뱀은 이제 언뜻 생각하면 굉장히 징그럽고 간교하고 그렇게 보지만 성경에는 ‘아롬’이라고 하죠. 그래서 ‘지혜롭다’라고 하는데, 성경은 계속 뱀을 지혜롭다라고 해요. 왜 지혜롭다고 할까요? 뱀은 장대에 달려서 죽는 뱀이란 말이죠. 장대에 높이 달려 죽는 뱀 십자가에 죽는 뱀이란 말이에요. 그게 지혜다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에 죽는 게 지혜다. 그러니까 비느하스는 그리스도를 가르쳐주는 그러한 형제인 거죠.
그들이 날것 먹다가 죽는 일이 있죠? 그러니까 죄가 뭔지를 가르쳐주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에게 그러한 형제가 나오는 거 그래서 날거 먹지 말라고 하고 그 영으로 진리의 말씀, 성경은 항상 참된 깨끗한 진리의 말씀으로 치환하자고 했잖아요. 진리의 말씀으로 먹어야 된다라는 걸 성경은 계속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출 23:14)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절기는 세 번. 아까 나온 유월절 흔히 무교절이라고 해요. 무교절 안에 유월절이 들어가 있어요. 그리고 맥추절
오순절이라고 하는 맥추절 그리고 수장절이죠. 초막절이라고도 하는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켜라’ 그래서 열심히 절기를 지킨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근데 세번이라는 말이 ‘살로쉬 레겔’이라고요.
’레겔’ 레겔이 뭐였죠? ‘발’ 발이에요.
세 발, 세 발을 지키라. 세 발을 하가그 하라, 절기를 지키다라고 하는 거예요. 좀 원문의 사용이 특이하죠? 세 발, 왜 발이라는 말이 나올까? 이 발, 발이라는 말을 바꿔서 이야기하면 걸음이 되겠죠, 걸음. 그러니까 '세 걸음의 절기를 지켜라'라고 하는 거죠. 걸음이라는 거는 걸어간다는 거죠. 걷는 건데 뭘 걸어요? 길을 가죠. 길을 걷는데 주님의 길을 걷는 거죠. 그래서 나만 길이라고 하시는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의 광야길, 광야길 그걸 세 걸음이라고 하는 거란 말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삼일길이 되는 거죠.
(눅 13: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이게 이제 삼일길의 내용이죠.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오늘과 내일 귀신을 쫓아낸대요. 귀신은 내 안에 있잖아요. 내 안에 있는 율법이잖아요. 그 내 안에 있는 그 ‘푸뉴마 아카달토스’ ‘더러운 영’ 그 더러운 귀신 더러운 영, 푸뉴마, 영은 말씀이니까 말씀으로 치안했으니까 더러운 말, 율법 그거 쫓아내는 거. 그리고 병을 고치는 것도 마찬가지죠. 병도 진리를 모르면 그게 병이잖아요. 예 그 역시 율법의 상태란 말이에요. 율법을 고쳐주시고, 우리의 말을 고쳐주시고 그리고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제삼일은 3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뜻, 하늘을 이루는 수죠. 그 날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날이란 말이에요. 하나님 뜻은 뭐예요? 하나님 뜻은 항상 새 성전이잖아요, 새 성전 만드는 거. 그러니까 새 성전으로 완전해지는 거란 말이에요. ‘아포텔레오, 성취되다, 행하다’ 이런 뜻인데 ‘아포’와 ‘텔레오’란 말이에요, 텔레오. ‘테텔레스 타이’. 그러니까 십자가의 육이 죽고 영으로 거듭나는 거. 테텔레스 타이로 죽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거, 성취하는 거, 행하는 거, 그걸로 완성하는 걸 완전해진다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새 걸음, 삼일 길 이거는 40년 광야길의 의미란 말이에요. 주님이 지금 말씀하신 귀신을 쫓아내고 완전, 삼일에 완전해지는 거, 이게 삼일 길이에요, 삼일길의 내용이에요. 근데 삼일 길이라는 게 삼일 광야를 가는 길인데, 그 광야가 내 안에 있단 말이에요. 성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삼일길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40년 광야 가는 일 자체가, 그 이유 자체가 내 안에 그 율법 쫓아내고 내가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되고 하나님 나라로 지어지는 거 이거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걸 뭘로 알려주는 거예요? 절기로. 절기는 그 얘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절기는 우리 안에서 우리 안에 그 광야에서 40년 광야 그 성전을 완성하는 그 방법 그리고 순서 차서 그게 이렇게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거 가르쳐주는 게 유월절 칠칠절 그리고 수장절 그게 그 내용이란 말이죠.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 구원의 서정이 되는 거죠, 그전체가. 그러니까 이 절기는 열심히 지키라고 주신 게 아니란 말이에요. 알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를 알아서 그 의미를 알아서 깨달아서 십자가 진리로 완성돼라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 진리로 십자가 죽음 죽어라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의 두 마음 탐심을 제거해라.
물론 제거가 우리가 한다고 될 일은 아니죠.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걸 다 이루어 주시는데, 주님께서 내 안에서 다 이루어 주시는데 그게 뭔지 알라고 하는 거예요. 왜 이런 일을 주시는지 알라는 거예요. 내 일상에 이런 일들이 뜻밖의 이런 일들 이상한 일 같이 여기지 말라라고 하죠. 우리는 나그네란 말이죠. 근데 그 나그네 인생에 이상한 일 같은 것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거 놀라지 말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놀라지 말라 담대하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거 하나님 나라 이루는 일이다라고 하시는 거죠. 그 의미를 알아라. 그 절기 속에 그거 가르쳐주시는 거죠. 그 진리 절기의 참 뜻 알고 그 내용 결국 내용은 십자가 죽음이란 말이죠. 그 십자가 죽음을 죽으면 새 걸음으로 절기를 지키라라고 하신 그 계명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죠. 히브리서 10장 1절 합독하시겠습니다.
(히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율법의 의미가 맨날 드리는 그 열심히 지키라고 준 그 의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절기를 주신 게 아니기 때문에 그걸로는 할 수가 없고 그 의미를 알아야 되는 거고 그 뜻이 내 안에서 깨달아지고 내 안에서 그 나라가 이루어져야 되는 거죠.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라고 해요. 율법은 하나님의 참 뜻이 아닌 내 뜻으로 보는 거 사람의 뜻이 들어간 거잖아요. 내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그게 율법 되는 거란 말이에요. 내 뜻, 내 뜻은 항상 선악의 두 마음이고 그리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걸로 항상 보잖아요. 이게 삼일 길 동안에 해결할 일이기도 해요.
‘장차 올’ 장차 온다는 건 ‘멜로’라고 해요. 장차는 먼 훗날에 육신이 죽어서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멜로’ 지금 하려고 하는 거 곧 지금 내 안에 바로 이루어지는 그 좋은 일. ‘좋은 일’은 ‘아가토스’ 성전 만들어지는 선. 그거의 그림자다라고 하는 거. 율법은 그거의 그림자고 참 형상이 아니니까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그 의미 모르고 맨날 드리기만 하고 있으면 열심히 행하기만 하고 있으면, 예 제사, ‘제사’는 ‘뒤시아’예요. 희생 제사란 말이에요.
열심히 예수 죽이고 있으면, 그러니까 지금 이게 무슨 이스라엘이나 유대인들이 드리는 제사나 또는 교회에서 드리는 그런 뭐 기념일이나 이런 거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것도 아닌 게 아니지만, 내 안에서 내가 그렇게 보고 있잖아요. 내가 그걸 보이는 대로 보고 열심히 이렇게 하면은 기뻐하시겠지, 기뻐하는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내 탐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열심히 나를 위한 그걸로 드리고만 있잖아요. 그러면 그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고 우리가 온전하게 될 수도 없는 그러한 일인 거죠.
’온전하게 한다’는 말도 ‘텔레이오오’ ‘텔레오’와 같은 말이에요. ‘완성하다, 수행하다, 이루다, 끝내다, 완전케 하다’ 완성되는 거란 말이에요. ‘테텔레스 타이’로 완성되는 거. 그러니까 그걸로는, 율법적인 행위로는 절대로 그 십자가 죽음 이를 수 없다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죽음으로 죽어야 완성인데, 성전은 그걸로 지어지는 건데, 그거 아니면 그거는 전부 율법 지킴밖에 안 되잖아요, 그죠? 하나님의 뜻이 진리고 사람 생각이 율법이란 말이에요.
사람의 생각은 항상 선악의 두 마음이 섞인단 말이 그게 누룩이 섞인 거죠. 누룩이 섞이면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 사흘길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오래된 삼일길로 되어버리는 거죠. 그것만 열심히 챙기고 있는 거예요, 인생 동안에. 보이는 대로 보게 되면 진리는 십자가 진리란 말이죠. 십자가의 진리는 육적인 모든 것,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완전히 삭제가 되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의 죽음이란 말이죠. 그래서 그 십자가 죽음을 진리로 깨닫고 이게 나 죽여주시는 말씀 맞죠? 그래서 그걸로 감사하게 되는 거예요.
모든 거는 십자가 진리니까 십자가 진리를 담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 진리로 모든 걸 지으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능력과 신성이 이 모든 것에 담겨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 보이는 것들 나타난 것들 그 파님들 그 재료들은 전부 십자가 진리를 담고 있어요. 십자가 진리를 담고 있다는 거는 전부 나 죽이려고 달려든다는 거예요. 그것들을 통해서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면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죽여서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가시는구나 그걸 깨닫고 기뻐하게 된다니까요. 감사하게 된단 말이죠. 성도는 그리로 가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그걸로 깨달아서 온전하게 되는 거란 말이지요.
온전이라는 거는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써봐야 온전해질 수가 없고 하나만 어겨도 모든 것을 어긴 게 되는 건데 그걸로 될 수가 없고 십자가 죽으면 죽는 거 이게 온전이란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성전으로 하나님 나라로 이루어지는 거란 말이에요. 출애굽기 23장 15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출 23:15)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중요한 말씀 나왔죠? 예 무교병의 절기가 곧 유월절이죠. 유월절이 곧 무교절인 거예요. 누가복음 22장 7절에 보면
(눅 22:7)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유월절이 곧 무교절인 거예요, 같이 붙어 있는 거예요. '잡는다'는 유월절 양을 잡는다, 이건 죽인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역사내내 성전에서 이거 했단 말이에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지금 유월절 양을 계속 잡고 있는 거예요. 무교절을 맞아야 되는데,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되는데, 예수 죽이면서 누룩만 잔뜩 먹고 있는 거예요. 이걸로 기뻐하고 그러면서 우리가 가고 있단 말이죠.
하나님의 뜻, 뜻은 항상 십자가 진리란 말이에요. 내가 죽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그 십자가의 은혜를 배워야 하는데 그걸 우리가 이제 일상에서 이루어 가야 되는 거예요. '날마다 광야의 모든 길을 기억하라'고 하셨잖아요.
모든 길이란 말이에요. 어떤 건 기억하고 어떤 건 기억하지 않고가 아니라 모든 일이 다 능력과 신성이라니까요.
하나님이 어느 하나에는 이건 좀 내 뜻 좀 덜 담고, 뭐 이런 게 있겠어요? 양의 어느 부분도 다 양이란 말이에요.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 그건 전부 말씀인데, 말씀은 어린 양이란 말이에요. 그 말씀을 진리로 구워서 먹느냐 아니면 날것으로 먹느냐 그게 이제 우리에게 계속 주시는 그 일이란 말이죠.
이스라엘이 역사 내내 성전에서 양만 죽이고 있었는데, 내가 인생 동안 내내 양만 죽이고 있었는데, 두 마음의 탐심으로 열심히 그 말씀을 보이는대로 보면서 그러고 있었는데,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열심히 유월절 양만 잡고 있었는데, 그걸 우리가 일상에서 했었는데, 그게 뭔지 의미를 알아서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죽어서 하나가 돼야 되는구나를 아는 거란 말이죠. 그게 십자가 은혜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그걸 깨닫게 해주시고 잠잠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내가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것, 이게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깨달을수도 없고 될 수도 없는 일인 거죠.
자, 그 두 마음의 탐심으로 예수 죽이던 그 일상에서 우리가 이제 떠나는 거죠, 나가는 거죠. 우리가 일상에서 주시는 그 하나님 말씀 그걸 깨닫지 못할 때 그게 '에피뒤미아, 탐심'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탐심으로 우리가 받을 때 하나님 말씀을 나의 두 마음으로 받는 거, 그게 '뒤모스' 그게 '분 내는 거'란 말이에요. '에피티미아' '뒤미아'가 '뒤모스'에서 온 말이란 말이에요. 그게 뒤모스가 분을 내는 거예요. 그때 '뒤오오, 희생 제사'를 지내는 거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어린 양 그 말씀을 희생 제물로 도살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계속 일상에서 날마다 예수를 죽이고 있단 말이죠, 어린 양을.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나를 죽여서 살리는 그 사랑을 담고 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나라로 지어가라고 하시는 그 사랑, 사랑 하나로 모든 것들이 다 담겨 있는 거고, 근데 우리는 그 의미를 몰라서 그 말씀의 참 뜻을 몰라서 열심히 희생 제사만 드리는 그게 살인의 의미라고 했잖아요. 가인이 아벨 죽인 일이 그거죠. 하나님이 오셔서 '네 형제 아벨이, 네 형제 예수가 네 안에 있느냐'라고 묻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안에 그 하나님 나라 그 성전이 서고 있느냐라는 걸 지금 하나님이 물으시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의 일상에 주시는 모든 말씀이 그거 담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이제 선악의 두 마음 탐심이 여전히 내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 요거를 따지고 있는 거죠. 이익이 되면 기뻐하고 손해가 되면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분내고 미워하고 원망 불평하고, 사실은 일상이에요, 기분 나빠하고 이런 거. 그렇지만 모든 것들은 우리를 성전 만들려고 주시는 선하신 선물이다. 이걸 알게 되는 거죠. 성도는 이게 전부 하나님의 은혜인 거죠. 주님이 자기의 그 육을 죽이고 우리 안에 오신 은혜, 먼저 죽어주신 은혜인 거죠. 요게 주님이 나라는 성전, 그 산을 밟고 서신 일이 되는 거란 말이죠.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어라'. '그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다'라고 하죠. 그래서 '빈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라'라고 하죠. '아빕월', 아빕월이라는 말은 '아비브'라고 해요, 아비브. 아비브가 '곡식, 이삭'을 이야기해요.
그리고 월, 월은 '호데쉬'라고 해요. '달', 달인데 요게 '하다쉬'라는 말에서 왔어요. '하다쉬'라는 말은 '새롭게 하다'라는 뜻이 있어요. 매달 바뀌죠, 달이 바뀌는 게 그게 새롭게 되는 거예요. 자 그러니까 아빕월이라는 말은 바꿔서 이야기하면 새로운 이삭이라는 뜻이죠.
(창 41:7) 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
그러니까 먼저 나온 일곱 이삭을 나중 나온 일곱의 그 새 이삭이 삼켜버리죠. 일곱은 언약이니까 옛 언약을 새 언약이 먹어버리는 거예요. 새 이삭은 새 언약인 거고 새 언약은 새 영 그리스도인 거죠.
(막 2: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주님이 안식일에 그밀밭 사이로 갈 때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서 먹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죠. 그게 새 이삭의 옛 이삭을 삼키는 일을 가르쳐주는 거란 말이에요. 새롭게 된 그 아들들이 먹고 있는 거예요, 옛 이삭을. 창세기에 그 내용을 다시 보여준 그 아빕월의 정한 때, 정한 때는 '모에드'라고, '모에드, 정한 때, 장소, 모임' 이런 뜻인데
(출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라고 하죠.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거기, 샴'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만난다'는 말이 '야아드'예요. 야드 뜻인데 그러니까 야아드 하는 것 또는 하는 곳이 '모에드'예요. 야아드가 동사고 명사가 모에드예요. 앞에 '맴'이 붙어서 명사 된 거예요. 야아드 하는 거, 모이는 것, 모이는 곳, 요게 모예드.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곳과 때, 요걸 모에드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만나는 때 만나는 곳.
그러니까 '새 언약의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어라'라고 했죠? 그러니까 정한 때니까 새 언약의 때에 무교병을 먹어라. 말씀을 율법이 아니라 진리로 먹어라라고 하는 거죠. 새 언약이란 말이에요. 하나님과 만나서 하나 되는 거, 만나고 하나 되는 그 일인 거죠. 그러니까 모든 게 말씀이란 말이에요. 우리 일상에 주신 모든 것들 그걸 진리로 먹는 것, 그거 자체. 그게 출애굽인 거고 그게 새 언약의 성취고 구원인 거죠.
'이는 그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라고 했어요. 자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는데, 내 앞에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는 건 무슨 말이냐면... '네가 애굽에서 나왔다'라고 하잖아요. 바로 앞에서 애굽에서 뭘 가지고 나왔죠? 뭘 가지고 나왔어요? 은금 패물 의복. 은, 속전 그리고 금, 성령. '패물, 케리'라고 했잖아요. 성전에서 쓰는 그 용기와 기구 그리고 의복 '시믈라, 외투, 겉옷, 진리'. 그러니까 전부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 진리의 말씀을 네가 가지고 나왔잖아. 그러니까 빈손으로 안 나갈 수가 있는 거죠. 그거 가지고 나오라고 하는 거예요. 예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가지고 오라, 나와라라고 하는 거죠.
근데 이 구절은 사실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 이것도 사실 빈손이란 말도 없어요. 사실은 요게 '레캄'이라고 해요, 레캄. 손하고 관계가 없어요. '헛되이, 쓸데없이' 나오지 말라. 헛되이 나오지 말라. 그리스도로 나와라라고 하는 거죠. 헛되다라는 거는 텅 비었다라고, 혼돈과 공허잖아요. 여기 그걸로 나오지 말고 진리로 나와라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파님'이라는 말도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로 라아 파님 레캄'이라고 하는데, '레캄'이 '헛되고'.
파님이란 말이 나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로 라아' '보지마'라고 하는 거죠. '라아'가 '보다'라는 뜻이잖아요. '파님' '껍데기 보이는 대로 보는 거'. 그리고 이제 1인칭 소유격이 붙었어요. 그러니까 나의 파님, 나의 파님을 로 라아, 그러니까 보이는 대로 보지 말라라고 해요.
'빈손으로 아무것도 없이 나오지 말고', 뭘 들고 나와라. 이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말씀을 헛된 것 그 율법으로, 두 마음으로 보지 말고 그리스도로 은 금, 그리스도 십자가 진리, 구속의 은혜로 봐라. 진리를 알라라고 하는 거죠. 자 하나님이 정하시고 지키라고 명령하신 절기는 그러니까 40년 광야길 걸으면서 십자가 진리를 깨달아서 성전으로 지어지는 거 그걸 가르쳐 주시는 그 말씀인 거죠. 요한복음 7장 37절부터 합독하시겠습니다.
(요 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a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 성령 이야기하시는 거란 말이에요. 명절, 명절은 성령 받는 날인 거예요. 진리를 깨닫는 날이 명절인 거예요. 명절이 절기란 말이에요. 절기와 같은 말입니다. 이 명절은 유월절 명절을 얘기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절기, 명절, 그거는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고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요. 그건 뭔 얘기예요? 진리를 깨닫고 그걸로 산다는 거예요. 그게 끊임없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것들을 진리로 보게 되고 하나님의 뜻으로 보게 되고 나를 성전으로 지어주시고 하나님 나라로 지어주시는 그 은혜로 본다는 거예요. 감사합니다가 절로 나오는 거죠. 기뻐하는 거죠. 그러니까 명절은 잔칫날인 거예요. 그래서 춤을 추는 거란 말이에요. 춤춘다는 말이 나오는 게 그 뜻이란 말이죠, 잔칫날이기 때문에. 지금 성도의 40년 광야는 지금 진리를 깨달아서 성전으로 지어지고 있는 성도의 일상 속에 펼쳐지고 있단 말이에요. 성도는 그 길을 가고 있는 거예요. 성도는 일상에서 모든 말씀을 십자가 진리로 깨닫고 일상에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그게 절기 지키는 거예요. 그걸로 절기를 지키시는 거란 말이죠.
예, 절기를 지킨다는 것 자체가 진리를 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키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고 그래서 기뻐서 춤을 추는 거란 말이에요. 절로 춤이 나오고 찬송이 나오는 거란 말이죠. 그것만큼 즐거운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즐겁게 그 은혜에 찬송하는 거예요. 나를 털어가 주시고 나를 가난한 심령으로 만들어주시고 오직 하나님만 찾게 하고 그 진리에 착념하게 하고 그 진리를 묵상하게 하는 거,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걸로 희로애락의 감정에 휩싸이는 게 아니라 일희 일비하는 게 아니라, 속상해하는 게 아니라, 그걸 진리로 깨닫고 그 하나님이 나를 한시도 빠뜨리지 않고 놓치지 않고 성전 지어 가시려고 이렇게 애쓰시는구나를 깨닫고 감사하는 거라니까요. '하나님 왜 맨날 나만 이래' 이게 아니라 '한시도 나를 잊지 않고 계시구나' 그걸로 이해하는 거라니까요.
인생은 '공수래공수거'가 아니에요. 진리를 모르면 그 레캄, 헛되이 왔다가 헛되이 가는 거지만, 성도는 하늘 창고 그 '보물의 성전, 베타르오차르', 보물의 성전'이란 말이에요. 그거 내 안에 있는 거예요. 나라는 성전이 보물의 성전이에요. 그리스도라는 보물이 담기는 성전이란 말이죠. 그 은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가 잔뜩 담기는 크나 큰 하늘의 부자란 말이죠. 그걸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 하늘 부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한평생 쌓은 것 모은 것 다 털리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헛된 인생인 줄 알았는데 진리에 비춰주시고 더 없이 넉넉한 하늘 부자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그 모든 날이 성전으로 지어지는 큰 명절 되게 하시고 날마다 기뻐 춤추며 찬송하길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