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축미영에서 은혜의 나라로
1945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일본의 항복을 방송했다. 잡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그것이 일본의 패전을 알리는 방송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신문사 벽보에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고, 한민족의 독립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국은 해방의 감격에 흥분했고 환호했다. 오전까지만 해도 곳곳에서 보였던 국민복과 몸빼 차림은 자취를 감췄고, 흰 옷 입은 시민들만이 거리를 메웠다. 사람들은 일장기에 푸른색을 덧칠해 급조한 태극기를 들고 울며불며 뛰어다녔고, 하루 종일 전차에 매달려 만세를 불러댔다. 일제 통치는 이렇게 그 막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인은 해방 후에도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일장기가 휘날리는 총독부에서 일본군이 미군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서울에 입성한 미군은 9월 9일 일본 총독부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았다. 사실상 한국의 해방은 형식적인 해방일 뿐, 힘은 일본으로부터 미국으로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 일본은 절름발이 경제만을 이 땅에 남겨둔 채 이곳을 떠났지만, 우리에게 닥친 해방은 곧 분단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미군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9월 8일 J. R. 하지 중장 휘하의 미(美) 제24군단은 인천에 상륙, 서울에 도착해 9월 9일 포고령 제1호로 "38°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민에 대하여 미군이 군정을 펼 것"이라고 정식 포고하고, 9월 12일 A. V. 아널드 소장이 미군정장관에 취임함으로써 군정체제의 골격을 갖추었다. 미군정은 9월 14일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를 해임했으나 행정고문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이들을 남겨두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이용했다. 9월 18일 미군장교를 각 국장(局長)에 임명하고 19일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정식 명칭으로 통치체제를 완비했다. 미군정은 치안유지법·사상범예방구금법 등 일제강점기의 몇몇 악법들은 폐지했으나 신문지법·보안법 등은 존속시켜 통치에 활용했다. 미군정은 처음에 한국인 11명을 미군정장관 고문으로 임명했다가 뒤에 양(兩)국장제도를 채택해 한국인을 행정에 참여시키고, 1946년 9월 12일 19명의 한국인 부처장(部處長)에게 행정권을 이양했다.
미군정은 행정의 편의성이라는 미명하에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를 중용함과 동시에 ‘개신교 정치’를 시작했다. 미군정이 임명한 고위 관료들을 살펴보자.
조선 통치의 수장 역할을 할 군정장관으로는 미 육군 소장 아키발드 아놀드가 맡았고, 경찰책임자로는 헌병 사령관 육군준장 로렌섬, 육군소장 키량프가 서울시장에 임명되었다. 점령군의 행정요원은 행정경험이 거의 없는 하급 장교였다. 국장급으로 보직된 장교의 계급이 대위, 소령 정도였으며, 실무 책임자인 과장급은 중위였다. 조선총독 아베가 해임되었고 상층부만 좀 바뀌었을 뿐 미군정은 여전히 총독부 관료를 중용하였고 그들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일본인들은 약 350권의 비망록을 영어로 작성하여 미 군정청에 제출하였으며, 한인 관리들을 임명할 때에도 추천권을 행사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과 무엇이 달라졌는가? 최고 통치자만 일본천황, 수상, 총독에서 미국대통령, 맥아더, 하지로 바뀌었을 따름이었다. 미 군정청이 나름대로 한국인을 의식한다면서 내세운 인물들은 대부분 친일 경력이 있는 개신교인들이었다.
1945년 10월 5일 미군정이 임명한 11명의 행정고문 중에서 목사 3명을 포함한 6명(55%)이 개신교 신자였다. 1946년 12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군정청이 임명한 군정 각 부처 초대 한국인 국장 13명 가운데 7명이 개신교 신자였으며, 이들 전원이 미국 유학 출신자였다. 1946년 미군정 최고위직에 임명된 한국인 50명 가운데 35명이 개신교 신자였다. 이는 해방 당시 개신교 신자가 총 10만 명 정도로 인구 대비 비율이 0.5%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놀라운 수준의 비율이 아닐 수 없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귀축미영(鬼畜米英: 귀신과 짐승인 미국과 영국)을 박멸하자!”고 목이 터져라 외친, 가장 강력한 반미(反美)세력이었던 개신교가 이제는 미국이 가장 총애하는 집단으로 둔갑해 버린 아이러니가 이 시절 실제 상황이었다. 개신교계 대표적 지도자였던 어느 목사는 아예 창씨명이 ‘평강미주(平康美洲: 미국대륙을 평정한다)’였다. 그렇게 반미성전(反美聖戰)의 열렬한 전사 노릇을 했었기 때문에 해방 후엔 그걸 속죄하려고 친미 노선으로 돌아선 것이었을까? 개신교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의 군인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던 것일까?
1940년대 초, 이른바 ‘성전’(聖戰)이라고 하던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일제의 자원 수탈은 극에 달했다. 일제는 내선일체라는 그들의 통치전략에 따라 한국인 모두가 적성(赤誠)을 다하도록 국방헌금을 각계각층에 강요하였고, 각종 친일단체들이 등장하여 부역하였다.
귀족의 처와 중견 여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애국금차회(愛國金車會)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그들의 금비녀·금가락지 등을 국방비로 헌금하자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반 사회의 이러한 작태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하였을까? 특기할 점은 미국에 대한 비판에는 기독교 인사들이 대거 동원되었다는 사실이다.
윤치영은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誠)을 맹세하여 임전국책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고, 박희도는 그가 운영하는「동양지광(東洋之光)」을 통하여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간섭 행위"에 대한 일본의 "신성불가침의 자주권, 환언하면 국가 생존권에 관한 최후적 발단"이라고 일본의 행위를 옹호하였다. 개신교인 그리고 개신교 단체의 친일·부역 행위의 예는 한도 끝도 없지만 가장 백미는 조선 장로회에서 “조선장로호”(朝鮮長老號)라는 해군비행기를 헌납한 사건이다. 당시의 보도를 중심으로 개신교의 부역 양상을 살펴보자.
1942년(昭和 17年) 7월 1일 자 기독교신문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황군 환자용 자동차 2대를 헌납하였다고 보도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는 지나사변 이래 황군의 혁혁한 전과에 감격하여, 작년 8월부터 애국기 헌납 운동을 전조선적으로 일으켜 36만 교도가 총동원하여 육해군에 애국기 한 대씩과 고사기관총 7대의 자금으로 금(金)12만3백17원을 헌납하였고, 2천5백여 교회당의 종까지 헌납하여 총후(銃後)의 적성(赤誠)을 보여 왔는데, 이번 6월 19일에는 다시 총회장 철원지화(鐵原志和), 정인과, 백낙준, 이용설, 오문환 등 대표가 조선군사령부로 창무(創茂) 보도부장을 방문하고 육군 환자용 자동차 2대의 기금으로 2만3천2백21원28전을 헌납하였다.》
조선 장로교단에서 일본군에 헌납한 조선장로호 전투기
해군기 헌납에 이어 육군기 헌납도 하였는데, 1942년 11월 17일 용산 연병장에선 “조선장로호” 명명식이 일제의 신도의식으로 거행되었다. 아래는 12월 2일 자 기독교신문의 보도기사이다.
《36만 장로교도들의 애국정성을 실은 미영(米英) 격멸의 의미로 이미 육군에 헌납한 애국기 조선장로호의 명명식은…국민의례로 시작하여 제주(祭主) 조선신궁(朝鮮神宮) 죽도 권(竹島權) 궁사(宮司)에 의하여 신사(神社)가 있었고…》
일제의 수탈과 여기에 동조하는 기독교의 모습들이다. 마지막으로 1944년 2월 2일 자 기독교 신문의 사설을 소개한다.
《…기열(奇烈)한 중남태평양상공의 결전장에 하루라도 빨리 일기(一機)라도 더 많이 비행기를 보내어 제일선의 요청에 응하도록 일억 국민은 굳은 결의를 가지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될 오늘, 제국 내의 기독교가 일제히 보국기 헌납운동에 궐기하게 된 것은 종교보국정신의 발로로 믿고 감사감격하야 마지아니하는 바이다.…오늘 제국이 하늘을 대신하여 정의의 칼을 들고 저 미영(米英)을 토벌함도 혹시 저들이 독선배타(獨善排他), 사리옹호(私利擁護)를 위하여 동아의 십억을 갈취하는 것을 치척(痴斥)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부질없는 노파심이 남아 있음인지 아지 못하거니와 애국기 헌납운동이 애국의 적성에서 나오고 조금이라도 바리새인적 불순한 동기가 없기를 절망(切望)하는 바이다.…심각한 결전단계의 금일을 제하여 우리 교도들은 국가가 있고야 종교도 있고 재산도 있고 생명도 있음을 다시금 깨닫기 바란다. 종교를 신앙함도 충량한 국민이 되기 위함이요, 우리의 생명은 국가를 위하여 있는 것이어든 하물며 재산에랴?…》
이 사설은 친일부역논리의 대표적 표현이다. 자발적인 애국기 헌납운동을 노회 단위로 전개하였고, 여기에 호응하여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시키려는 이 신문의 활동은 당시 부역 세력들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력들이 미 군정 시절 친미·숭미 세력의 최 일선에 나선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가? 그리고 행정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목적 하에 이들을 최고위층에 포진한 미국의 정책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만 하는가?
미군정과 적산불하
2005년 2월 5일 CBS기독교방송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교회 120년을 대표하는 지도자로는 한경직 목사(37%), 주기철 목사(21.8%), 문익환 목사(5.6%), 손양원 목사(4.2%), 함석헌 선생(3.8%)의 순서로 되어 있다. 한경직 목사는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고의 명예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서울 저동에 있는 영락교회의 전경, 원래 천리교 본당 자리였다.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한경직 목사는 거의 무명 인사였다. 하지만 그는 월남을 계기로 화려한 변신을 하게 된다. 그러면 1945년 10월에 거의 빈손으로 서울에 도착한 한 목사는 어떻게 하여 영락교회라는 거대한 교회를 만들게 되었을까? 이는 전적으로 미군정의 종교정책 덕분이다.
미군정은 남한 진주와 함께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한 민족세력들이 세운 '인민 공화국'을 부정하고 친미적일 것으로 여긴 미국 유학파 중심(이승만, 이기붕, 조병옥, 장택상 등)의 친미 괴뢰정부와 사회단체를 구성하려 했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25일에 미군정법령 2호로 ‘패전국 소속 재산의 동결 및 이전 제한의 건’을 발표하여 조선에 있는 일본의 국·공유재산을 동결했다.그리고 이 재산은 1945년 말부터 친미 세력들에게 불하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때의 재산불하를 '적산 불하'라고 한다. 적산(敵産, 일제의 재산)은 당시 한국 경제 전체의 80%정도에 이르는 규모였다. 이 재산들은 특히 친미적인 이승만, 한민당, 기독교계 등에 집중적으로 불하(대부분 무상)되었다.
특히 그들은 노골적으로 한국을 '기독교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작심한 듯이 한국 기독교 세력에 대한 엄청난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여기에 프린스턴신학대 출신의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 등이 우선적으로 미 군정청의 눈에 들어왔다. 이들 기독교 측에 불하되었던 재산 중엔 일제 때의 종교단체재산이 있었는데, 대개 일본 신사, 천리교와 불교재산으로써 대부분 기독교완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재산이었다. 물론 일본인 개인 소유였던 병원, 농장, 임야, 가옥등도 무차별적으로 불하되었다. 이러한 엄청난 남의 재산을 불하받아서 치부한 한국 기독교는 급신장을 하게 되었고, 그 대가로 철저한 반공노선으로 미군정을 기쁘게 한 것은 물론이다. 미군정으로 부터 불하받은 엄청난 재산에 대한 그들의 기쁨을 스스로 표현한 대목을 한번 보자.
《해방 후 일본신사나 일본사원 자리가 예수교예배당 혹은 교회학교로 변모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인 동시에 기독교의 승리이며, 한국 교회의 광명이며 사교에 대한 역사의 한 단면인 것이다.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별관 자리에 대한예수교 장로회신학교와 기독교박물관이, 남산 북쪽기슭 경성신사자리에 숭의 여자중고등학교가, 또 그 아래 절간자리에는 창동교회 대한신학교가 점유하고 있으며, 더 그 아래 옛날 천리교 자리에는 한국제일의 근대식 건물을 자랑하고 있는 영락교회가 위치잡고 있는데…》
《천리교 재단을 문서로 접수하고 보니 그 분량이 거창하였다. 동자동 건물과 제동의 건물 외에도 신당동에도 북창동에도 삼각지에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북창동건물에는 김재준 목사가 조선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서 혁명운동으로 죽었다는 제자의 미망인 전효덕씨에게 시켜 가정여학교를 세우게 하였는데, 이 학교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당시 학생인 이일선이 맡아 지키면서 교회를 개척하게 하였다. 삼각지에 있던 건물은 상명여학교 측에서 무슨 사유를 붙여 점유하고 신학교와 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당시 적산처리의 최고 책임자인 남궁혁 박사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학교측에 유리하게 처리해 버렸다.…천리교 재산을 접수하는데 있어서는 상명여학교측과 경합하여 어렵게 재산을 교지로 인수받게 되었다.》
이 무렵은 한국 기독인들에게 축복의 나날이 계속된 시기였다. 적산 불하 이후 한국 기독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한경직 목사의 육성을 들어보자. 한 목사는 1992년 6월 18일 여의도 63빌딩에서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상 수상 축하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제로 나라가 분단되기 전, 서울에는 소수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때 서울 시내에는 약 30개 정도의 교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 분이 오늘의 현상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역사가 어떠했는지 참으로 놀라게 될 것입니다. 다음의 통계를 잠시 살펴보십시다. 1991년 말 현재로 서울의 교회당수는 7,477개이고, 목사안수는 18,903명이며 그리고 기독교인수는 4,383,422명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와 제일 큰 감리교회와 제일 큰 하나님의 성회와 제일 큰 성결교회가 모두 서울에 있다고들 합니다. 서울의 전체 인구 약 1,000만 명 중 43퍼센트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현재 남한에는 3만 4천 교회가 있습니다. 남한의 목사는 모두 5만 8천명쯤 되고, 교인 수는 1,200만 명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이 수는 남한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을 크게 축복하여 기독교의 성장을 이토록 이루어 주셨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연설한 상기 내용은 대부분 맞다. 해방 당시 대략 30개 정도의 교회만이 있던 서울풍경이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뜨이는 게 십자가인 도시로 변해버렸다. 그러면 적산불하의 주인공, 한경직 목사가 어떻게 활동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당시 서울시내에는 천리교 포교당이 40여개가 있었는데, 그 부속재산을 합치면 엄청난 액수의 가치였다. 하지만 일본인 천리교 신자들은 이미 모든 재산을 한국인들에게 양도하여 한국천리교회 재단 설립을 끝내고 법적등기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재단의 이름으로 학교인가까지 얻어 동자동 천리교본부에는 서울원예학교라는 간판까지 내걸고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 목사는 어떻게 천리교 재산을 습득할 수 있었을까? 《남한 내에 있던 기독교 계통과 신도 계통의 귀속 재산은 대부분 개신교 쪽으로 불하되었는데, 특히 김재준과 한경직은 서울 시내에만 40여개의 포교당이 있던 천리교를 접수하여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미 군정청의 도움으로 서울시와 임대차 계약을 맺고 당시 서울시 부시장 구스타프의 도움으로 천리교 재단을 접수하였다. 그 결과 천리교본부가 있던 동자동에는 조선신학교가 창설되어 김재준이 관리하고, 구내 교회는 성남교회가 설립되어 송창근 목사가 시무하게 되었다. 가장 큰 천리교회가 있던 저동에는 영락교회가 들어서게 되었다.》
광복 후 10여 년 동안 2천여 개의 개신교 교회가 신설되었는데, 대부분이 상기와 같은 경우였으므로 한경직 목사뿐 아니라 개신교 전체가 미 군정청의 정책 탓을 톡톡히 본 셈이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12월 귀속재산처리법, 1950년 3월에 동법시행령 그리고 같은 해 5월 동법 시행 규칙을 제정하여 미 군정청의 행위에 대하여 법적인 조처를 마련해주었으니, 혜택을 입은 당사자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아마 이 무렵부터 권력의 힘과 능력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였지 않았나하는 게 필자의 추측이다. 그 무렵부터 한경직 목사는 개신교뿐만 아니라 한국의 주요 유명인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승만의 종교정책을 논할 때, 헌법에는 정교분리를 명시했으나 실제로는 공인교제도를 취하여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음을 비판한다. 그 예로 크리스마스의 공휴일 제정, 국가배례를 주목례로 교체, 형목제도, 군목제도, 경찰전도 실시, YMCA등 종교단체 후원,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의 설립 등을 든다. 그러나 종교관련 적산을 대부분 개신교 측에 불하한 사실이 더욱 큰 문제라고 판단된다.
인구 대비 비율 0.5%에 지나지 않던 개신교가, 10년 만에 2,000개 가까운 교회가 설립될 수 있도록 혜택을 베푼 사실은 분명 권력의 횡포였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개신교 부흥의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는 뜻이다. 적산불하과정 특히 종교관련 재산의 처리과정에 있어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적어도 네 가지 이상의 위법행위를 했다.
첫째, 개신교에 특혜를 준 사실이다. 당시 개신교의 교세를 고려해 볼 때 종교적산의 대부분을 개신교에 불하한 것은 종교의 자유라는 면에서 그리고 국민 정서상으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자행했음이 분명하다.
둘째, 개신교와 관련 없는 종교재산을 개신교 측에게 불하한 사실이다. 귀속재산처리법 제15조에 의하면 “귀속재산은 합법적이고 사상이 온건하고 운영능력이 있는 선량한 연고자…” 등에게 매각하게 되어 있으며 “특히 국가에 유공한 무주택자…” 등에게 우선적으로 매각하게 되어 있다. 천리교재산, 신사관련부동산, 일본불교사찰이 개신교와 어떠한 연고가 있는 지 그리고 일본군기지, 병원, 농장, 주재소 등이 과연 개신교와 무슨 관련이 있는 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분명히 답해야만 한다.
셋째, 친분이 있던 자들에겐 거의 무상으로 제공한 사실이다. “종교적산들은 미군정에 의해 사안별로 처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미군정에 우호적이거나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무상으로 제공되었던 것이다.” 미국 유학파 출신인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 등이 천리교 적산을 불하받은 사실이 대표적 사례인데, 정부는 당시의 자료를 재검토하여 친분에 의해 불하받은 모든 적산을 재환수해야 할 것이다.
넷째, 종교단체법의 폐기에 따른 대체입법이 없었으므로 종교적산의 불하는 원천적으로 불법이며, 무효다. 미군정은 ‘패전국 소속재산의 동결 및 이전제한의 건(1945.9.25. 제정, 법령2호)’ ‘조선 내 일본인 재산의 권리귀속에 관한 건( 1945.12.6. 제정, 법령33호)’ 등에 의해 적산을 군정청에 귀속하였다. 그리고 미군정 당국은 1948년 9월 11일에 체결된 ,<한미 재정 및 재산에 관한 협정>에 따라 귀속재산을 한국정부에 이관하였다.
문제는 미군정의 법령이나 후일 한국정부가 제정한 <귀속재산처리법> 등 어떠한 법률에도 종교적산에 대한 명확한 정의나 규정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종교관련법도 마찬가지다. 당시 미군정청은 <신사법> <종교단체법> 등을 폐지하고 난 뒤 일본과 달리 대체입법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법보다는 친분 혹은 자의적 판단에 의해 종교적산의 처리가 만연하게 되었다. 귀속재산처리법에도 종교단체 혹은 종교관련 사항은 전혀 없는데, ‘공인된 교화’ 기관을 ‘종교단체’로 규정하는 임의 판단에 의거, 종교적산처리를 한 셈이다. 공인된 법에 의해 집행되지 않은 종교적산은 당연히 무효가 될 수밖에 없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면 해방당시 종교적산 불하문제는 반드시 재검토되어야만 할 것이다.
2009년 4월, 기독교대한감리회측이 ‘감리교망실재산 조사연구회 발기위원회’(위원장 조영준 원로목사)란 단체를 만들어 “적산으로 처리된 후 도로나 공공기관으로 편입돼 현재 감리교재산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는 토지들은 마땅히 돌려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가 정당화되려면 광화문에 있는 감리교 본부 건물을 비롯하여 미군정 시절 불하한 모든 적산 종교 재산에 대한 재검토가 선행되어야 하리라본다. 이 문제는 종교재산의 소유는 총유라는 개념과 더불어 향후 <종교법인법> 제정 시 필히 검토되어야할 사항이다.
장로대통령과 예수교 공화국
교계 지도자들의 권력지향성은 일제강점기 이래의 악습이었다. 신사참배로 이미 신앙의 순결성을 상실한 그들은 일제군국파시즘의 침략전쟁에 거침없이 앞장섰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일제의 승전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무운장구기도회’가 8천953회나 열렸다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부일배로서 그들의 경력은 해방 이후,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았다. 그들에겐 미국이란 은혜의 나라가 있었고, 그들을 필요로 하는 독재 권력이 있었다.
소위 교계의 거물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치면서 변함없이 권력에 굴종하거나 타협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 중심에는 한경직 목사가 늘 있었다. 박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기대어 그 세를 급격히 넓힌 교회는 1952년의 선거에 이승만을 “한국의 모세”라고 부르고 적극적으로 밀어주면서 그 이유로 ‘정치의 기독화’(기독교 의례의 국가적 수용) 이외에 군목 제도의 설립을 들었다. 즉, 동족상잔을 치르고 있던 한국군에 목사들이 파견되어 ‘공산 악마와의 성전’을 격려해주었던 것은, 교회로서는 ‘문제’라기보다는 ‘성취’였다. 이 제도의 신설을 이승만에게 요청했던 한경직 목사는, 전쟁 때에 “군대의 정신 무장이 기독교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해 ‘전군의 기독화’를 촉구하고, 1956년에 성경을 “애국애족의 교과서”라고 평가했다.》
3․15 부정선거 당시 개신교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을 위하여 적극 협력했다.
이승만을 한국의 모세라고 추켜세우던 한국교계는 한국의 모세 혹은 여호수아를 박정희로 그 다음에는 전두환으로 변경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권력에 면죄부를 발행해 주며 자신들의 권세를 계속 유지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한국에 기독교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시작은 이승만이다. 적어도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학살에 직간접으로 책임이 있는 이승만, 그가 꿈꾸는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과 평화를 교의로 삼고 있는 예수교국이었다. 1919년 3월 1일을 전후 하여 조선인이 살고 있는 세계 곳곳에서 70종이 넘는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을 즈음인 4월 8일, 이승만은 연합통신을 통하여 뜬금없이 예수교국 수립을 언급한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현금 만주에서 조직된 한국 임시정부 내각의 국무경으로 선택된 이승만 박사는 오늘 연합통신을 대하여 말하기를 이번 독립운동에 인도자들의 주의는 한국으로 동양의 처음 되는 예수교국을 건설하겠노라 하더라.》
한국독립운동보다 기독교 전파가 우선이라는 이승만의 생각은 그의 저서『한국교회핍박』에 잘 나타나있다. 이 책의 마지막 결론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우리는 진실로 일본과 권세를 다투려 한다든지 일본인을 배척하자는 것이 조금도 아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일본이 우리의 종교적 자유를 방해하지 말아서 조선 민족이 장래에 생존을 유지하며 자유 복락을 누릴 희망이 있도록 배려하면 우리는 일본인의 정치적 자유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고자 함이니 그렇게 된다면 어찌 피차에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승만의 논리에 의하면 일본이 한국교회를 탄압만 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식민지 통치를 계속해도 된다는 뜻이다. 이승만이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을 예수교국으로 만들 기회는 그의 나이 74세 때에 찾아왔다. 그런데 1948년 5월 31일, 역사적인 제헌국회 개회식에서 기상천외의 일이 발생한다. 소위 제헌의회 기도문으로 알려진 제헌국회 제1차 본 회의록에 기록된 내용 일부를 소개하겠다.
•임시의장(이승만)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회 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윤영 의원(일동기립)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올려 기도하나이다. 아멘”
제헌의회 의원 198명 중에는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도 다수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당시 감리교 서부 연회장이던 이윤영 목사에게 회순에도 없는 개회기도를 요청하였다. 이승만의 독선과 아집이 표출된 대표적인 예다. 같은 날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하나님과 애국선열과 삼천만 동포 앞에 바치는 맹세문’에 선서했으며, 이어서 국회개원식 축사에서는 ‘하나님과 삼천만 동포 앞에서’ 국가 발전을 위해 분투할 것을 맹서했다.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 그는 8월 15일 개최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하며 맹세한다.”라는 취임사를 낭독하였다.
신앙을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한 이승만의 비호 하에 성장한 개신교는 이제 천만 신도 운운 할 정도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종교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19년 ‘동양의 처음 되는 예수교국으로 건설하겠다.’는 이승만의 포부가 어느 정도 이루어 진 셈이다. 오늘 현재, 기독인들의 염원인 완전한 기독교 공화국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 등 세 명의 장로 대통령을 배출함으로써 그들의 소망은 일정 부분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장로 대통령 시절, 기독인의 염원과 달리 우리 국민들은 그리 행복한 기억을 갖지 못했다. 이승만 장로이후 대략 30년 만에 김영삼 장로가 들어서고 다시 10년 만에 이명박 장로가 들어서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대한민국 경제를 망친 주범들이고 대통령 스스로가 온갖 갈등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천재지변이상의 흔치않은 재앙이 이들 장로 대통령 시절에 일어났다. 1950년도의 한국전쟁과 1997년도의 IMF환란이다. 그리고 이명박 장로는 한국전쟁과 IMF환란 이상의 재앙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허용했고, 한미FTA협약을 비준했다.
하나님 축복받은 나라, 행복지수는 왜 낮나?
2011년 9월 IMF가 발표한 각 국가별 GDP전망 조사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2015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불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2011년 말 국민소득 추계가 23,749달러로 세계 31위라고 하니 IMF의 전망이 그리 터무니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흔히들 한 국가가 경제적으로 선진국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3만불로 보고 있으니 조만간 우리나라도 선진국 소리를 들 수 있는 모양이다.
2012년 11월 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2년 10월말 외환보유액'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3,234억 6천만 달러로 전월말 3,220억 1천만 달러 보다 14억 5천만 달러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2012년 9월말 기준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 규모는 중국, 일본, 러시아, 스위스, 대만, 브라질 다음인 세계 7위 수준이다.
2011년도의 수출은 5천160억 달러, 수입 4천850억 달러로 사상 최초로 무역 1조 달러 시대에 진입했다. 한국은 세계10위권의 무역대국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 지표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개신교 관련 통계다. 한밤의 불이 꺼지면 보이는 것은 붉은 네온사인 십자가뿐이다. 출석 교인 기준으로 뽑은 세계 50대 교회 리스트에 한국 교회가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는 통계도 있었다. 지난 자료이지만, 미국 종교전문 잡지인 크리스천 월드가 지난 1993년도에 발표한 세계 50대 교회를 보면 신자수가 10만 명이 넘는 교회는 1위인 여의도 순복음교회(60만)와 2위인 안양 남부 순복음 교회(10만5천) 두 곳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계 10대 교회 중 절반, 50대 교회 중 23개가 한국에 있다.
2005년 인구주택조사 인구부문 전수집계 결과 개신교인은 861만 명, 천주교인은 514만 명이다. 둘을 합치면 1375만 명으로 전체 인구 4700만 명 중 29.2%다. 불교(22.8%)를 넘는 수치다.
참고로, 미국의 전체 교회 수는 33만 개 정도다. 그 중 출석 교인이 만 명을 초과하는 곳은 레이크우드교회(조엘 오스틴, 4만 7천 명, 텍사스 소재) 윌로크릭커뮤니티교회(빌 하이벨스, 2만 3천 5백 명, 일리노이) 세컨뱁티스트교회(에드 영, 텍사스) 새들백교회(릭 워런, 캘리포니아) 라이프처치(크레이그 그로셀, 오클라호마) 등 5개 교회 정도다.
개신교에서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두 선교사가 입국한 1885년을 공식적으로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해로 삼는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는 1901년 5월 14일 오후 2시 서울 상동교회에서 집사목사(執事牧師)로 안수 받은 김창식(金昌植)과 김기범(金箕範)이다. 두 사람은 미감리회선교부로 부터 안수를 받았다.
장로교의 경우는 1907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노회(독노회)에서 그 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한석진, 서경조, 양전백, 길선주, 방기창, 이기풍, 송인서 등 7인이 처음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미국인 선교사의 한국 포교 127년 그리고 최초의 목사를 배출한 지 111년 만에 한국 교회는 170개국에 선교사 2만여 명을 파송하며 세계 2위의 선교대국이 됐다. 한국에 개신교를 수출한 나라인 미국에 오히려 역수출하겠다는 발상이 나올 법도 하다. 개신교인들이 한국을 축복의 나라라고 하는 주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더욱이 장로 대통령을 3명이나 배출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현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그리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그리고 지구촌 사람들로부터도 살만한 나라라고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이 현실이다.
그 원인은 OECD 통계연보를 보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1인당 근로시간이 가장 길고 자동차 사고율 1위이며 공교육비의 40%를 민간인 학부모가 부담하는 사교육비 비중도 세계 1위이지만 고용률은 OECD 평균치에도 못 미치고 있다. 보건비지출도 하위권이다. 어쩌면 우리는 전쟁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편, 한국의 40대 남성 사망률은 세계 최고이며 한국인의 스트레스 지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통계도 있다. 한국인의 자살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몇 가지 더 보면, 저출산률에서 한국은 이미 몇 해 전에 세계 1위의 기록 보유자이며, 이혼율 속도에 있어 세계1위를 차지했고 급기야 OECD 국가 중에서 이혼율과 자살률, 사교육비 1위인 나라가 되어 버렸다.
인용한 통계로 대한민국을 불행한 나라라고 단정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라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으리라 본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제공되는 행복지수라는 통계가 있다. 우리가 느끼는 행복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생활의 만족도와 풍요로움을 지표화한 통계가 바로 행복지수다. 이 행복지수는 국내총생산(GDP) 등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삶의 만족도, 미래에 대한 기대, 실업률, 자부심, 희망, 사랑 등 인간의 행복과 삶의 질을 포괄적으로 고려해 산출된 지표다. 주거환경, 소득, 일자리, 공동체 생활, 교육, 환경, 정치참여, 건강, 삶의 만족도, 치안, 일과 삶의 균형 등에 일정한 점수를 매겨 도출한 자료가 바로 행복지수 평가인데, 일부 국가에서는 '행복 지표’를 만들어 국민들이 더욱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정책을 마련하기도 할 정도라고 한다. 이 정도의 데이터로 산출한 지수라면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경제 재건을 위해 만들어진 국제기구 OECD의 발족으로 경제발전과 함께 회원국 국민들의 소득이 늘고, 질병도 점차 감소하는 등 회원국들은 점차 경제적 회복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와 함께 사람들의 마음의 병, 자살 등 사회문제 역시 심각해지면서 각국 정부에서는 자연스럽게 기존의 경제성장만을 추구해 온 기존 정책에 대해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국내총생산(GDP)만으로 측정할 수 없는 인간의 가치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하여 OECD의 행복지수 평가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개인의 부가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국가별 행복지수에서 드러나고 있다. 2012년 OECD의 국가별 행복지수 조사(OECD 36개 회원국 대상)에 따르면 호주, 노르웨이, 미국, 스웨덴, 덴마크, 캐나다, 스위스 등의 나라가 앞선 순위를 점하고 있다.
한국의 순위를 살펴보면 36국 중 24위다. 학력수준, 학업성취도 등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고용, 노동시간, 환경 등에서는 낮게 평가되었다. 경제활동인구의 63%만 일자리를 갖고 있고, 노동시간은 연간 2,193시간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수치로 나타났다.
행복지수의 순위를 살펴보면 경제력과 행복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력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대표적인 예로 OECD 회원국은 아니지만 국가의 경제력과 상관없이 거의 모든 국민들이 자신들은 행복하다고 느끼는 국가가 있다고 한다. 바로 ‘행복한 나라’로 대표되는 부탄이다.
히말라야 산맥의 기슭에 자리 잡은 인구 70만 명의 작은 나라 부탄. 부탄은 국민소득이 2,0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고, 1990년대 들어와서야 처음으로 TV가 보급됐을 정도로 문명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국가다. 하지만 국민의 97%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다.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행복을 만든다.’는 믿음을 없앤 대표적인 사례가 되면서, 자국을 보다 더 행복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나라들이 이 작은 나라 ‘부탄’을 롤모델로 삼고 있다.
부탄은 'GNH(Gross National Happiness)'를 기준으로 국가가 통치되고 있는데, GNH는 GDP(국내총생산)와는 다른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나타내는 용어로 건강과 시간 활용 방법, 생활수준, 공동체, 심리적 행복, 문화, 교육, 환경, 올바른 정치 등 9개 분야의 지표를 토대로 산출하는 것을 말한다. 전문 담당자가 1인당 5시간의 면담으로 약 8,000명을 대상으로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 국민들의 심리상태를 수치로 계산해 내는 방법을 활용하고 이를 통해 정책에 반영한다. 이 GNH는 지난 1974년부터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 국왕'에 의해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를 통한 정책이 이어져오고 있다.
이웃 국가들이 경제성장에 목을 맬 때도, 부탄은 건강과 생태계 보호 등 국민들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생태계 보존과 전통문화 교육을 가장 우선으로 삼는 부탄은 국토의 60% 이상을 산림으로 유지하도록 정하는가 하면, 국가가 국민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실시하여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부탄의 국민들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행복이 사람이 스스로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이라지만, GDP가 곧 행복이라는 틀을 깬 행복지수와 부탄의 사례를 보면 행복은 물질적 풍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신적인 풍요로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돈이 정신적인 안정감을 준다고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국민의 20% 정도가 개신교도, 세계 2위의 선교대국 그리고 세계 20대 대형 교회 중 10개가 있는 곳. 또한 대통령이 장로이며 국회의원 299명 중 113명이 개신교 신자고 상장기업 임원의 43%가 기독교인인 곳,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이 거대한 집단이 지금 현재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에 어떠한 공헌을 하고 있는가? 기독인들의 자부심이라고 칭해지고 있는 초대형 교회들의 목회자들은 과연 어떠한 일들을 하고 있는가? 이 거대 집단이 우리의 행복지수를 오히려 갉아먹고 있지 않은 지 냉정히 생각해야만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