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정궁(都正宮) 터
◇ 도정궁(都正宮) 터 : 종로구 사직동 262번지
- 선조(宣祖)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사저이자 선조의 잠저
도정궁(都正宮)은 선조(宣祖)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사저(私邸)이자 선조의 잠저(潛邸)이다. 도정궁은 조선 중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왕실의 본궁(本宮)으로 사직단 옆에 위치하였다.
제13대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덕흥대원군의 3남 하성군(河城君)이 국왕으로 즉위하자 선조는 1569년(선조 2)에 아버지 덕흥군과 모친을 각각 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숭하고, 잠저 후원에 가묘(家廟)를 건립하게 하였다.
1588년(선조 21) 도정궁이 화재로 소실되자 선조의 명으로 5개월 만에 옛 모습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그 후 덕흥대원군의 자손들은 대대로 당상관인 정3품 돈녕부 도정(都正) 벼슬을 받고 이 집에거주했다.
조선말 1862년(철종 13)에는 도정(都正) 이하전(李夏詮)이 이곳에 거주하다가 안동김씨 척족세력에 의해 김순성(金順性), 이긍선(李兢善) 등이 이하전을 국왕에 추대하려는 모역(謀逆) 혐의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기도 하였다.
도정궁은 세월이 지나면서 퇴락하자 1865년(고종 2)에 익종비인 신정익황후 조씨가 말하기를
“도정궁의 사손이 영체(零替)됨으로 인하여 무너지는 대로 보수를 하지 못해서 장차 허물어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옛날을 돌이켜 생각할 때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이 집의 소중함이 다른 곳과는 아주 다르니, 수리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호조(戶曹)의 경비가 아직도 구차한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단지 어갑주전(御甲胄錢) 5,000 냥을 특별히 획하(劃下)하여 호조에서 속히 수리하라.”
라며 도정궁의 개수 명령을 내렸다.
그 후 일제 때인 1913년 12월에는 화재로 150칸의 도정궁이 20~30칸만 남고, 소실되었다. 그 뒤 이 집은 1920년대에 복원되어 도정궁(都正宮)으로 널리 유명하였다.
그러나 이 집은 1979년에 「성산대로」개통에 따라 헐리게 되어 이 곳에서 건국대학교 내로 이건되었다. 현재 도정궁 건물은 1908년(융희 2년)에 이하전이 경원군(慶原君)으로 추봉 받았기 때문에 건국대학교에서 경원당(慶原堂)으로 불리며, 문화재로 지정(서울시 민속자료 제9호), 보호되고 있다.
◇ 서울사직단(社稷壇) : 종로구 사직동 1번지 28호(사적 제121호)
- 국토를 지키는 신인 ‘사(社)’와 오곡(五穀)의 신인 ‘직(稷)’을 제사지내는 제단
서울사직단은 종묘와 함께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궁궐에서 왼쪽은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을 배치하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종묘는 경복궁 동쪽의 현재 훈정동,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쪽인 현재 위치에 건립하였다.
현재 사직공원을 들어서면 사각으로 둘러싸인 두 겹의 담 안에 사직단이 있다. 담의 동서남북 네 곳에는 홍살문(紅箭門)이 세워져 있으며, 이것을 통과하면 출입하는 유문(壝門)이 각각 나 있다. 이 유문을 열고 내부에 들어가면 1미터 높이로 쌓아진 직사각형의 두 개의 단이 동서로 자리 잡고 있다.
사직(社稷)은 국토를 지키는 신(神)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일컫는 말이다. 사직은 종묘(宗廟)와 함께 국가를 의미하므로 ‘종사(宗社)’라고 표현하는데 국가의 존망을 흔히 “사직이 평안하다”라든가 “사직이 위태롭다”라고 하며, 국가의 중요한 대신을 ‘사직지신’이라고 표현하였다.
우리나라는 3국시대부터 국토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므로 국가에서 국토의 신을 모시는 사단(社壇)을 동쪽, 오곡의 신을 모시는 직단(稷壇)을 서쪽에 설치하고, 국왕이 제사를 지냈다. 신위(神位)는 모두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모셨는데 사신(社神) 옆에는 토지를 잘 관리하는 후토신(后土神), 직신(稷神) 옆에는 농사를 잘 가르쳐 준 후직신(后稷神)을 배향하고, 매년 정월·2월·8월 세 차례씩 제사를 지냈으며,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
1394년(태조 3) 11월 29일, 한양에 천도한 후 태조의 명에 따라 경복궁과 종묘, 사직을 짓는 기공식은 했지만, 건축자재가 미처 준비되지 않아 그 해 음력 12월 3일부터 승려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어서 각 지방의 장정들은 이듬해 1월부터 2월까지 동원했다가 농사철이 다가오자 장정들은 일단 귀향시켰다.
하지만 승려들만으로 궁궐을 완공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이 해 8월에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1만 5천명의 장정을 다시 동원해 공사를 마무리 지음으로써 새 궁궐은 9월 25일에 준공되고, 종묘와 사직도 거의 완공을 앞두었다. 드디어 10월 5일, 새 궁궐과 종묘, 사직단이 완공되자 태조 이성계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백관들을 거느리고 종묘로 향하였다.
조선 초부터 사직단의 제사와 유지 관리를 위해서 사직서(社稷署)를 두고 사직단 서쪽에 건물을 건립하였다. 예로부터 이 관아에는 구리로 만든 시루가 있어 정월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낼 때 제삿밥을 지었다. 그런데 밥을 지을 때 시루가 뇌성(雷聲)소리를 내어 크게 울리면 그 해에는 반드시 풍년이 든다고 전해 왔다. 조선 후기 숙종 때부터는 안향청(安香廳)이라 칭하였으며, 신실(神室)을 수리할 때에는 신위를 일시 이곳에 옮겨 모시기도 하였다. 현재 이 건물은 공원관리사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사직단 남서쪽 모서리에는 사직의 신위를 모시는 신실(神室)을 지어 놓았고, 북쪽 유문 쪽에는 국왕이나 영의정이 제사를 지낼 때 서 있는 판위(版位)가 있었으며, 그리고 서쪽 유문 옆에는 악기고(樂器庫)와 제기고(祭器庫)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종묘와 사직의 신위를 모시고 개성으로 옮겼다가 황해도 해주에 임시 봉안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황해도 수안으로 옮겼는데 사직서와 신실, 부속건물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사직 신위를 모시고 강화도로 옮겼다.
임진왜란 전인 1575년(선조 8) 가을에 사직 제사를 지낼 때 직신(稷神)의 신위가 분실된 사건이 발생되었다. 그래서 제관(祭官)을 비롯하여, 사직서 전 관원들은 신위를 찾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신위는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정해진 제사 일시를 변경할 수가 없어 새로 신위를 만들지 않고 그 자리를 비워 둔 채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낸 후 곧 재수색을 한 결과 사직서의 한 관원을 모함하기 위해 저질러진 일이었음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주모자는 처형되고 그 가족도 연좌되어 형벌을 받았다.
사직단 제사는 조선말인 1909년 3월에 사직 전사(典祀)를 임명한 이후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경술국치 이후에는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 때인 1922년 10월에 경성부는 사직단 일원을 공원으로 조성하고, 1932년에는 북쪽의 500평을 매동초등학교에 분할하였다.
사직단 정문(보물 제177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이다. 삼문은 평삼간(平三間)으로 중앙은 좌우보다 넓은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그 이후에 재건한 것이다. 사직단 정문은 1962년 도시계획에 의하여 14m 정도 뒤로 물러났다.
서울사직단
◇ 필운대(弼雲臺) : 종로구 필운동 9번지(문화재자료 제9호)
- 권율장군과 백사 이항복이 살던 바위에 새긴 글씨가 있는 명소
배화여자중고등학교 서북쪽 바위벽에는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씨와 ‘필운대 시(弼雲臺詩)’가 새겨져 있다. ‘필운대’ 글씨는 임진왜란을 수습하는데 공을 세운 백사 이항복(李恒福)이 이곳에 살면서 새겨 놓은 것이고, ‘필운대 시’는 조선 말에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이 그의 선조 이항복이 이곳에 거처했다는 내용의 글을 지어 새겨 놓은 것이다.
인왕산 밑의 필운대는 조선시대부터 인가가 밀집하여 다투어 화초를 심었으므로 살구꽃이 유명하여 성북동의 복사꽃, 동대문 밖의 버드나무, 천연동의 연꽃, 세검정의 수석(水石)과 함께 서울의 5대 명소로 꼽았다. 이곳은 각종 꽃과 아름드리나무가 우거지고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있는데다가 봄철에는 살구꽃과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들로 장관을 이루었다.
‘필운대’가 새겨진 곳에는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권율장군이 살았고, 담장을 이웃한 집에는 백사 이항복이 살았다. 그런데 권율장군은 이항복의 재치와 기지가 어릴 때부터 뛰어남을 특별히 사랑하여 훗날 맏사위로 삼은 뒤 한 집에서 살다가 사직터널 위에 은행나무 고목이 있는 종로구 행촌동 1번지로 이사하였다.
서울 장안이 한 눈에 조망(眺望)되는 이 집에 살던 이항복은 자연의 풍취(風趣)를 마음껏 누리면서 자필로 바위벽에 ‘필운대’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훗날 이항복은 호동(壺洞 : 종로구 원남동 로터리 부근)으로 이사하였다.
◇ 배화여고 생활관 : 종로구 필운동 12-3번지 외 1필지(등록문화재 제93호)
- 1916년에 배화여자고등학교 선교사 주택으로 세운 건물
배화여고 생활관은 근대 건축물로 배화학원 소유이며, 배화여자고등학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1916년에 배화여자고등학교 선교사 주택으로 건립한 이 건물은 기와를 얹은 2층의 붉은색 벽돌집이다.
배화여자고등학교는 1898년, 종로구 내자동에 ‘캐롤라이나 학당’이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뒤 1916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이때 지은 이 건물은 1971년부터 동창회관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생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면 중앙의 현관 바로 위에 2층의 베란다가 돌출되어 있으며, 지붕 양쪽 끝으로 굴뚝이 하나씩 세워져 있고,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을 이룬다. 당시 선교사 주택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첫댓글 교수님 정말 알토란같은 우리의역사 정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