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공명(제갈량, 181년∼234년)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후(忠武侯)
책사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제갈량의 키가 당시 평균이나 평균보다 작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제갈량의 신장은 8척(한대 척으로 따지면 189.6cm)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한 척이 23.7cm으로 당시로서(물론 지금도) 큰 편이었다. 그러나 이는 중국사람들의 허풍을 좋아하는 습성으로 인해 모두 다 믿을 것은 아니고, 적어도 그 당시의 평균 키보다는 컸었다는 것은 확실한 듯 하다.
또한 제갈량의 외모가 매우 뛰어났다고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진수는 제갈량전에서 "제갈량은 어려서 빼어난 재주와 영웅의 그릇이었고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뛰어나 그 당시 사람들이 뛰어난 인물로 여겼습니다."라고 서술한 바가 있다.
지혜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그의 이름은 보통명사화 되어 불린다.
그의 원래 고향은 서주에 있는 낭야라는 곳인데 동오의 서성도 이곳 출신이다. 조조의 서주대학살 즈음에 형주로 이사를 해서 서주대학살 때문에 해를 입은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존재한다.사서에 따르면 한 사예교위 제갈풍의 후예다. 부친은 제갈규로 한나라 말 연주 태산군 군승을 지냈는데 제갈량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이에 숙부인 제갈현이 제갈량 형제들을 수습하여 키웠는데 그런데 제갈현이 예장태수로 부임하게 되어 같이 따라갔지만 제갈현이 예장에서 부득이하게 쫓겨나 유표에게 의탁하게 되자 형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에 제갈량은 형주의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갈고 닦았다. 한편 형인 제갈근은 제갈현을 따르지 않고 양주로 이주하여 양주를 다스리던 손씨 가문의 신하가 되었다.
207년 유표의 객장으로 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고 있었던 유비는 사관을 요청한 서서를 만나보고 중하게 기용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서서가 제갈량을 와룡이라며 추천한 것을 듣게 되었다. 유비는 서서에게 제갈량을 데리고 와 달라고 요청했지만 서서는 유비 본인이 스스로 몸을 낮추어 만나야만 한다고 간언했다. 이에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를 세번 방문하여 마침내 제갈량을 만나 한실부흥의 계책을 듣고 등용하니 이를 후세에 삼고초려라고 한다. 정사에서는 단순이 세번만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묘사하면 소설로서는 재미가 없으므로 연의에선 이 삼고초려 에피소드가 각색된다. 어쨌든 추처낭중의 꼴로 제갈량은 유비와 인연을 맺게 되고, 정식으로 등용되어 유비의 든든한 심복 중 하나가 된다
유비와 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깊어져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원컨대, 제군들은 이에 관해 다시 말하지 말라.”라고 다독이자 불평을 멈췄다. 이것이 고사성어 수어지교의 유래다. 비록 불평을 멈췄다고는 하나 불만은 그대로 내재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 유비와 관우·장비의 사이는 일반적인 군신관계를 넘어선 것이었고 이러한 끈끈한 커넥션에 아무런 실적 없이 쑥 밀고 들어온 제갈량에 대한 관·장의 감정은 한바탕 웃음으로 날려버릴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고 보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인지 제갈량이 이들을 교류할 때 조심했다는 흔적이 보이는데 마초가 어떤 사람인지 묻는 관우의 서신에 '마초는 관공만 못하다'라고 답신을 한다던지 황충을 사방장군으로 삼을 때 마초, 장비는 공을 봤지만 관우는 보지 못했으니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언하기도 한다. 장비는 본디 사대부를 공경했으므로 제갈량의 뛰어난 책략을 보면서 제갈량에 대한 불만은 금방 풀렸을 것으로 보이지만 관우는 성정이 그렇지 않았으므로 제갈량이 특별히 신경 썼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단 관우에 경우 제갈량의 서신을 받자 아이처럼 매우 좋아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서신을 보여주며 기뻐한 걸로 보아 제갈량을 내심 인정했던 걸로 보인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아들뻘되는 사람이 칭찬한다고 기뻐할 정도로 관우가 줏대없는 인물도 아닐것이다.
양양기에 따르면 수경선생 사마휘는 유비를 만난 자리에서 유비가 그에게 현 정세에 대해 질문하자 "이를 아는 건 시무를 아는 준걸 뿐이며 와룡(=복룡)과 봉추인 제갈량과 방통이 바로 그들이다."라고 대답하며 은근히 제갈량과 방통을 높인다.
남만왕 맹획과 관련되어 내려오는 유명한 칠종칠금의 고사만 보더라도 이민족에게 강경책과 회유책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굴복시키고, 이 후 교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정사 배송지 주(한진춘추)에도 이름이 기록된 맹획은 정3품 어사중승으로 이는 감찰직 중 가장 높은 자리이며, 맹획의 일가붙이 쯤으로 추정되는 맹염은 호보감(금군 보병사령관,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경호실 차장 격)이 되어 5차 북벌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당시 삼국 중에서도 제갈량의 이민족 정책은 가장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받는다. 제갈량은 인사를 배치할 때 지방 관리는 익주파를 기용했는데, 비슷하게 남중 일대에도 관리는 이회, 맹획과 같이 그 지역에 영향력 있는 사람을 기용해서 불만을 최소한으로 줄인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남중의 경우, 완전한 이민족이라고 보긴 어렵다. 애시당초 이 일대는 전-후한시대부터 제국의 화폐를 조달하는 광산이 위치해 있었고, 철과 소금, 비단 산업으로 중원의 부자들조차 버로우할 만큼 갑부들이 창궐했던 곳이다. 한 말엽에 무정부 상태가 몇십 년 이어지면서 엉망이 된 거지, 무슨 연의 묘사처럼 미개척 밀림지대에 우가우가 이민족들이 뛰노는 이런 곳은 아니었다는 것. 당장 이민족이라고 말 나오는 남쪽 인물들은 고정과 유주 정도다. 제갈량 본인도 당시 기준으로는 깨어있는 사람에 해당되며(물론 기본적으로 당시 사람의 사고방식을 지금 기준으로 판단할 순 없는 일이다.), 남만의 이민족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는 마속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남정 이후에도 반란은 일어났는데, 제갈량은 남정에서 다시 반촉 운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한 게 아니라 대규모의 반촉 무력시위를 억제하는 게 목적이라고 보여진다. 이릉대전에서 패배하고 유비가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대규모의 무력 항쟁이 있었다. 그리고 제갈량의 기대대로 그가 살아있는 동안 대규모의 반촉 움직임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갈량이 남중이 평정되자 모든 곳에 현지 군장들을 임용하고 군사를 물렸을 때,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지금 나는 군사를 남기지 않아 운량할 필요를 없애고, 기강을 대략적으로만 정해 이인과 한인들이 대체로 편안케 하려 하오'라고 말했는데 제갈량은 복종시키거나 회유한 이민족들의 마음을 얻고 촉한의 행정력, 영향력을 넓혀 이를 통해 남만의 풍부한 물자를 얻어 촉한과 남만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정책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이 엄격한 통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원망한 백성들은 없었으며 오히려 제갈량이 사망했을 때는 백성들이 사당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유선이 듣질 않자 길거리에서 제사를 올리고 융이(즉, 주변 부족들)마저 들판에서 제사를 올려 결국 제갈량의 사당을 짓게 했다는 구절이 양양기에 기록되어있다. 거기다가 남만에도 제갈량을 기린 장소가 많으며 심지어 제갈량이 물을 떴다는 우물도 존재한다.
정사에는 엄정한 정치가의 면모가 주로 부각되지만 연의에서는 천재 군략가의 면모가 주로 부각된다. 정사의 제갈량이 원칙에 충실한 청렴한 정치가라면 연의의 제갈량은 남보다 우월한 두뇌로 상대를 농락하는 천재형. 다만 그 때문에 야전 사령관으로 나가서 계략을 사용해 승리를 이끄는 모습에만 편중되어 제갈량의 매우 뛰어났던 정치수완 등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 연의에서 제갈량 북벌 이야기는 많지만 제갈량이 내정에 힘쓴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읍참마속은 원칙을 위하여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버린다는 뜻이다. 북벌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격전지였던 가정에서 마속이 부장이었던 왕평의 말을 무시하고 산 봉우리 정상에 진채를 세웠다가 대패하여 촉군이 또다시 북벌을 포기하게 된다. 후에 제갈량이 군율을 위해 마속을 참하였다. 이것이 바로 읍참마속의 유래다. 과거에 유비가 제갈량에게 마속을 중하게 쓰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기도 하였다.
제갈량이 죽자, 제갈량의 장성이 떨어치고 이를 보고 제갈량의 사망을 눈치챈 사마의는 바로 추격해오지만, 제갈량이 미리 만들어놓은 목상을 세우고 강유가 공세로 나오자 사마의는 공명이 주술을 써서 별을 떨궈 자기를 나오게 한 줄 알고 그대로 도주, 몇 십리 동안 겁먹은 채로 도망간다.여기서 나온 말이 사공명주생중달,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도망치게 하다'이다.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마의는 탄식하고 다시 추격해보지만 이미 촉군은 멀리 퇴각한 상태. 이후 사마의는 돌아오며 제갈량의 진채를 보며 "공명은 참으로 기재였다"라는 말을 한다.
충심과 뛰어난 능력으로 이상적인 신하의 대명사로서 항상 인기인이였으며 그로인해 이미 오래전부터 제갈량에 대한 평가는 매우 높았다. 물론 제갈량에 대한 비판 역시 없진 않았으나 고금의 쟁쟁한 인사들이 높게 평가하고 있다.
제갈량은 촉에 웅거했으되, 그의 큰 뜻은 장안까지 덮었구나.물고기와 물이 세번 만나 합치니 사해(四海)에 풍운이 이는구나!당나라 시인 이백(李白)
군사를 잘 통솔할 수 없을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통솔했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이를 다스렸다. 정치가 편안하지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편안케 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풍족하게 했다.
청나라 철학자 왕부지(王夫之)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예법 규칙을 나타냈으며, 관직을 간략하게 하고 권부의 제도를 느슨하게 하였으며 성실한 마음을 열고 공정한 정치를 실행했다. 충의를 다하고 시대에 이익을 준 자에게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범하고 태만한 자에게는 비록 가벼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에게는 무서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석방했으며, 진실을 말하지 않고 말을 교묘하게 꾸미는 자에게는 비록 가벼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선행을 하면 작은 일이라도 상을 주지 않은 적이 없으며, 사악한 행동을 하면 섬세한 것이라도 처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각종 사무에 정통하였고, 사물은 그 근원을 이해하였으며, 사람의 말에 근거하여 그의 행위를 관찰하고 허위로 가득한 사람과는 함께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촉나라 경내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아꼈으며, 형법과 정치가 비록 엄격하였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마음을 공평하게 쓰고 상주고 벌주는 것을 분명하게 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걸출한 인재로서 관중, 소하와 비교할만하다 할 수 있다.항상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견했으니 절반은 성공한셈
진수, 정사 삼국지 中
만약 중화(中華)를 거닐며 그 뛰어난 재주을 펼쳤다면, 중화에 선비가 많다고 하여 어찌 가리고 막혔겠는가! 위나라에 몸을 맡겨 그 기량과 재능을 펼쳤다면 실로 진장문(진군)이나 사마중달(사마의)도 능히 서로 대등하게 겨루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 나머지 무리들이겠는가!
배송지, 제갈량전 中, 최주평에게 제갈량이 위나라엔 뛰어난 선비가 많으니 가지말라고 말한 부분에 주석을 달며 천하의 기재로다!사마의, 제갈량전 中
조씨와 천하를 다투지 못하고, 형주를 버리고 물러나 파촉에 들어가서 유장을 유탈하고 손씨와 거짓으로 맺어 험한 땅에 몰려, 근처의 이족에게 참람하게 고하였다. 이에 책략을 내려 조타와 짝을 이루었으니, 관소(관중과 소하)의 아필이란 말은 또한 지나치지 않았는가.
북위의 재상 최호, 『 위서 』 모수지전 中당태종: 위징과 제갈량 중 누가 더 훌륭하다 보오?잠문본: 제갈량의 재주는 재상과 장수를 겸하니 위징이 견줄 수 있는바가 아닙니다.당태종: 위징이 인의를 이행해 짐을 보필하여 요순에 이르도록 하고자 했으니 비록 제갈량이라고 할 지라도 대등하지 못할 것이오.당태종 이세민과 잠문본의 대화, 신당서 中
이윤과 여상(태공망)에 백중하고 천하가 그 지휘에 따른다면 소하나 조참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당나라 시인 두보
제갈량은 촉나라를 10년간 다스리면서 사면하는 일이 없었으나 촉나라는 잘 다스려졌소. 양무제는 해마다 여러 차례 대사면을 단행하였지만, 결국 나라는 멸망했소. 작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큰 덕을 상하게 하오.제갈량은 본 받을만 하오, 나도 역대 제왕을 본 받으려 하고 있소, 그대들도 옛 재상들을 본 받으시오.당태종 이세민, 정관정요 中
파촉에서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통치를 연모하고 그리워했다. 사후, 묘의 건립을 요구하는 소리가 곳곳에 울려 특별히 의논하여 면양에 세워졌다.습착치, 양양기 中
무후(공명)가 죽은지 거의 500년이 된다고 하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양한(梁漢, 촉)의 백성들은 그 공적을 노래하며, 사당에 모시는 자가 있다. 그 백성들에게 사랑받음이 이 같이 오래였다.손초, 각무후비음(刻武侯碑陰) 中
제갈량이 이르기를,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에 이바지하되 죽은 뒤에 그친다.’고 하였으니, 인신(人臣)이 된 자는 오직 제갈량과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강희제
촉한의 선주(先主)는 한나라의 후손으로, 공명 같은 왕좌지재를 만나 군사를 출동하여 역적을 토벌하되 삼대처럼 군사를 동원함에 있어 도(道)가 있어 거의 한나라 왕실을 회복할 듯 하였다. 비록 하늘이 돌보지 않아 선주가 죽고 무후도 죽어 비록 공업은 끝을 맺지 못하였으나, 그 성취한 바는 참으로 컸었다.정도전
제갈공명은 남양 땅에서 용처럼 누웠다가, 선주의 삼고를 기다린 후에 일어났으니, 이는 곧 이윤(伊尹)이 밭이랑에서 갑자기 깨달은 것과 같다. 두 차례의 출사표는 의론이 정대하여 이훈(伊訓)·열명(說命)과 함께 참고하여 볼 것이다. 그러므로 나아가고 처하는 큰 절개와 충성·대의가 삼대(三代) 이후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그 성심을 열어 공도(公道)를 편 것은 실로 재상의 법이 될 만하였다. 비록 운수가 옮겨가 몸이 죽어서 공업을 이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렇다고 어찌 이것 때문에 저것을 버리겠는가.권근
불 꺼질 듯 한나라 지킬 수 없었는데위기에 직면하여 명 받들어 자기 한 몸 잊었네사람을 논함에 꼭 성패를 따질 것이 아니노라천고에 아직도 팔진도가 전해지고 있으니 신숙주
위와 촉 사이의 얽히고 설킨 험준한 길, 그 길을 통해 제갈량은 때때로 많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강적에 대항했다. 그 빛남이 마치 새벽녘의 샛별과 같으니, 오직 제갈량만이 촉을 밝게 비추었구나.송나라 왕안석(王安石)
진린: 내 지난번 천문을 보니 대장별이 떨어지던데, 공이 이를 모르지 않을것인즉, 어찌 무후의 기도법을 쓰지 않는 것이오?이순신: 내 충성이 무후만 못하고, 내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내 재주가 무후만 못하여 세 가지 다 무후만 못하매 무후의 기도법을 쓴다고 해도 하늘이 능히 들어주시겠소?이충무공전서 中, 진린과의 대화에서
그러나 와룡을 위해서는 언젠가 한번 변무(辨誣)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문로(門路)와 연원(淵源)은 비록 우리 유학의 정통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백세를 두고 사표가 될 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상에서 그를 논하는 이들이 허다히 근본은 버리고 지말(枝末)만 따지고 정상적인 것은 소홀히 봐 버리고 괴이한 것만 믿는 통에, 그의 정대광명한 사업이 결국 풍운이나 일으키고 팔진도나 쳤던 일에 가리워져 버리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통한스러운 일입니까. 그의 계자서(戒子書) 한 편과 출사표(出師表) 두 편만 보더라도 그의 심학(心學)의 올바름과 조수(操守)의 신밀(愼密)함, 그리고 충직한 절의와 식견의 고상함이 과연 어떠합니까. 노재(魯齋)는 공명의 초려 장소(草廬長嘯)를 칭찬했는데, 담박(澹泊)과 영정(寧靜)의 교훈은 빠뜨려 버리고 도리어 이것만을 취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안정복
공명은 파촉에서 일어나 하나의 주(州)를 차지하고 위라는 엄청난 대국과 겨루었는데 군사와 백성들이라곤 위나라의 1/9밖에 되지 않았다. 공명은 농업과 군사 일, 그리고 형법 등을 잘 정비했기 때문에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파죽지세로 기산까지 쳐 들어가 황하와 낙수의 물로 말의 목을 축일 뜻을 품을 수 있었다. 중달은 10배나 되는 땅과 거기 있는 수많은 군졸을 기반으로 견고한 성지와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자기 자신의 보전에만 급급할 뿐 적을 깨뜨리지 못하고 제갈량이 제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 두었다.오나라 장엄(張儼), 묵기 술좌편(黙記 述佐篇) 中
제갈공명의 학문은 그 궁극에 이른 경지를 고찰할 수 없지만 행동으로 드러난 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계로의 용맹과 염구의 재예와 자공의 변설, 중궁의 천자가 될 만한 덕을 참으로 이미 겸했다. 지금 공자의 사당(문묘)에 배향 되는 사람 중 산동의 얼치기 학자나 문사나 일삼는 소인은 모두 들어갔는데도 제갈공명의 경우에는 거론하는 이가 있는 것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서포 김만중
특히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제갈량에게 군의 통솔과 전쟁 준비에는 능했으나 기책이 부족하여 이기지 못했다라는 평을 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진무제에게 올린 표문에서는 '이 때문에 용병을 멈추지 않고 여러 차례 그의 무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재능은 군대를 통치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기책은 (그보다) 떨어졌으며, 백성들을 다스리는 재간이 장군으로서의 재략보다 뛰어났습니다.'라고 했고 제갈량 전 말미에서는 '해마다 군사를 움직여 나갔으나 끝내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의 장략은 다스리는 재주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 같다.'고 했다.
제갈량의 '군사적 무능력'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그가 '임기응변', 즉, 모략에 능숙하지 못했다는 점을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거시적 계획을 수립하는 전략이나 각개 부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 전술의 측면에서는 당대에 이미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장 제갈량전의 평가만 해도 "진영이 잘 정돈되고 상벌이 분명하고 호령이 엄숙하다." 되어 있고 진양추(晉陽秋)에 "제갈량은 군사를 교묘하게 통솔하였고, 군령도 엄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설신어에는 "제갈량이 위수(渭水) 변경에 진을 치자 관중(關中)이 발칵 뒤집혔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제갈량이 임기응변의 책략에 능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양한 반론이 있다. 일단 당대 제갈량을 가까이서 본 사람들은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한 듯 하다. 특히 적장이던 사마의가 공명 사후 그가 죽은 오장원(의 곽씨오)의 진지를 둘러보고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 원자에는 제갈량의 군대가 무장과 무기를 최고상태로 유지했으며 군대에서 쓰이는 물건들 모두 멋있고 정교하게 꾸몄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부대관리를 잘했고 군대에서 쓰이는 물건들을 통해 부대의 사기진작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제갈량은 연의에서 보여준것과 같은 화공계나 반간계 같은것은 정사에서 잘 쓰지 않았지만 부대 기동을 통한 기만이나 기습, 복병을 이용한 매복전술을 상당히 잘 사용하였다. 1차북벌, 3차북벌은 기습이었고 1,5차 북벌에서도 위나라의 허를 짜르는 기만전술을 사용하였다. 분명 부대운영과 정공법에도 능한 인물이었으나 이런 전략적인 면을 보건대 책략를 쓰는것에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 당시 위나라 제일의 전략가인 사마의가 4차 북벌 시 노성 전투에서 패한 이후 촉군에 대한 전략을 견벽거수(見辟擧守: 벽을 맞대고 수비만 함)로 수정했다는 점을 보면 제갈량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사실 제갈량은 유인책과 기만책으로 자신이 먼저 선공을 걸고 상대가 그 전투에 마지못해 응하는 상황을 만들면 거기서 승리를 거두는데 능했다. 즉, 자신이 원하는 전장을 만들고 거기에서의 승리와 대전략이 뛰어났다는 뜻이다. 또 전장에서 퇴각할때는 질서 정연하고 오히려 추격한 대상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4차북벌에서 명장 장합을 전사시킨것이 대표적인 일례다.
제갈량은 권력욕이 많은 인물이라고 평가도 있다. 우선 소설 삼국지 속 제갈량은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 '불타는 적벽' 화용도 이야기에서 작가 설명에서도 제갈량이 권력욕심이 있다고 주장하였고, 김경한 작가가 쓴 평설 인물 삼국지에서도 제갈량이 관우와 유봉을 죽게 놔둘 정도로 소극적이며 유비 사후 제갈량이 권력은 이미 2대 황제인 후주인 유선보다 높다고 하였다. 하지만, 화용도의 전개는 삼국지연의에 나온 픽션이고, 유봉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사실과 부합하지만 관우를 죽게 내버려뒀다는 것은 고우영 삼국지에서 나온 픽션이다. 따라서 이것은 '픽션의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정작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확실히" 권력욕을 가졌다는 기록이 제대로 없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제갈량이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이엄의 실각을 자행했다고 하는데, 이엄은 촉한 대부분의 대신들의 탄핵연명장을 올리고, 이것을 통해 실각하게 된 거라서, 제갈량이 권력욕 때문에 이엄을 실각시켰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서진의 시조인 사마염이 제갈량 같은 인재를 갈망했을 정도고, 당시 사마염이 제갈량을 높이 평가했던 점을 보면, 당대에는 권신의 이미지가 그다지 짙지는 않은 듯하다. 동진의 재상 사안 역시 어린황제를 잘 보필하여 끝까지 충심을 다한 인물로 제갈무후, 즉 제갈량을 평했다.
또 유비가 관, 장이 죽고 나서 유비가 제갈량에 내린 벼슬을 보면 놀라울 점이 많다. 황제가 된 뒤, 승상, 녹상서사, 가절에 임명하고 장비가 죽은 뒤에는 사례교위까지 겸임하고 유언으로는 상국의 지위를 내리기까지 한다. 권력을 장악한 신하는 예로부터 많았지만 창업자가 이로록 신하에게 권력을 몰아준 적은 드물다. 그리고 그 후대에도 그것을 인정한 경우는 더 드물고, 그 권력을 받은 자가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고 함부로 쓰지 않은 경우는 더더욱 없다. 확실히 유비,유선 - 제갈량의 관계는 단순한 군주와 신하와의 관계는 아니었다. 유비가 죽으면서 했다는 유언도 단순히 제갈량을 시험하려 했던 것도 아니라 유선이 부족할 경우 황제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는 명분 or 이렇게 많은 권한을 받은 제갈량이 반란으로 몰릴 위험을 제거해 놓았다는 관측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제갈량 역시 충심을 다해서 유선을 보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