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하루방은 어디서 왔을까
머나먼 이스터 섬의 석상과 돌하루방
한 무리의 폴리네시아인들이 쪽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아주 작
은 섬 하나를 발견하였다. 섬에 도착하였을 때, 숲이 우거진 섬은 문자 그대로
미지의 선경과 같았다. 그들은 섬에 거대한 석상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석상을 옮기기 위하여 통나무를 베어내면서 작은 섬의 숲은 고갈되었
다. 숲이 파괴되자 식량이 고갈되었고, 섬은 씨족간의 전쟁으로 '지옥' 처럼 변해
갔다. 1882년 네덜란드인 선장 로헤벤 제독이 섬에 이르렀을 때, 3,000여 명의
원주민들이 누추한 갈대 오두막이나 동굴에 살면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고 있
었고, 부족한 식량 때문에 식인 풍습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 섬을 발견한 '서양인 오랑캐' 들은 그들 멋대로 '부활절 일요일에 발견하였
다' 는 뜻으로 이스터 섬이란 이름표를 달아주고 세상에 알렸다.
우리나라 대중들은 우스꽝스럽게도 고고학적 자료가 아니라 양복광고에서 남
태평양 이스터 섬과 처음으로 만난다. 이스터 섬의 신비스러운 석상들 앞에 남
성모델을 내세운 광고주들은 이 어울리지 않는 대비를 통해 양복의 품격은 선전
했지만 막상 석상의 비밀에는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스터 섬의 석상은
오래 전부터 세계학게에 보고된 신비스런 영물의 하나였다.
어쩌면 대륙에서 가장 머나먼 섬 중의 하나인 이스터 섬. 지도에조차 잘 나타
나질 않는다. 가장 가까운 섬에만 약 2천km 떨어졌고, 남아메리카 서쪽에서는 4
천km쯤 떨어져 있다. 이스터 섬의 원주민 조상이 남아메리카에서 왔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어느 고고학자가 작은 배로 남아메리카에서 출항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따라서 섬 주민들은 태평양의 폴리네시아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
은 해안을 따라서, 혹은 황량한 화산 주변에 석상을 세웠다.
거대 석상을 무려 1,000여 개씩이나 세운 이유는 씨족간의 신앙물을 세우는
경쟁심리 때문이라고나 하나 정확한 것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녹색세계사>
를 쓴 클라이브 폰팅은 거대한 석상을 세우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작은 섬의 숲
을 망가뜨려 자멸을 재촉하였다고 밝혔다.
우리의 돌하루방을 생각하면서 엉뚱하게 이스터 섬을 떠올린 것은 나름의 이
유가 있다. 만약에 '서양인 오랑캐' 들이 우리의 제주도를 침탈했다면 그들은 세
계 학계에 돌하루방을 어떻게 보고했을까. 제주도가 초토화되어 백성들은 노예
로 팔려가고 돌하루방만 남았다면 훗날 학자들은 어떤 주장을 폈을까. 그러한
상상은 '가당치도 않다' 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나는 '이재수의 항쟁' 을 환기시키
고 싶다.
치외법권적으로 군림하던 성교꾼을 보호하기 위하여 불란서함대가 제주 근해
에서 위세를 떨 때, 민중들의 장두들이 관덕정 앞에서 피를 토하면서 죽어갔던
신축년이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년도 채 안 되는 1901년이 아니던가. 여건만 허
락했다면, 열강들은 능히 제주도를 '먹었을' 것이고, 돌하루방은 그들의 잣대로
재단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백합 모양의 고깔모자를 쓴 수녀님이 조랑말을 타면, 발 벗은 조선처녀들이
말고삐를 끌던 시절이었다. 신부님의 패스포트에 고종임금이 직접 직인을 찍어
주었다.
여아대 -- 나와 같이 대접하라
임금 자신과 같이 대접하라니 지방수령 주제에 꼼짝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가마 타고 다니는 양대인이란 말도 그때 나왔다. 우리가 지금껏 배워온 세계문
명사란 승리자의 전리품일 가능성이 높다. '세계 문화의 수수께끼' 란 것도 서구
인들이 바라본 수수께끼일 분이다. 서구인들에게는 수수께끼이지만, 당사자들에
게는 살아 있는 삶의 문화 그 자체이지 수수께끼일 수가 없다. 이스터 섬의 석
상들이 '서양 오랑캐' 의 손으로 재해석되고 있는데, 우리는 그래도 우리 손으로
온전하게돌하루방을 해석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럽다고나 할까.
제주도에 다녀온 사람치고 마스코트 돌하루방 한 쌍이라도 들고오지 않는 사
람은 드물 것이다. 하다 못 해 돌하루방 모양의 플라스틱 열쇠고리라도 몇 개쯤
사들고 온다. 홍보책자 겉옷도 으레 돌하루방이 점령하기 마련이다. 고르바초프
가 제주도에서 30억 달러 원조 약속을 거머쥐고 모스크바로 되돌아갈 때, 함께
비행기를 탄 주인공도 바로 돌하루방이었다. 이래저래 국제적인 명물이 되다 보
니 상표저작권을 둘러싼 소송까지 걸렸다고 한다. 제주도 꿀단지조차도 돌하루
방 모양새다.
그러나 정작 돌하루방의 기원을 묻는다면 아무도 시원스럽게 답하지 못한다.
설마 그럴까 싶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돌할아버지' 는 몽골 벌판의 훈촐로에서 왔다?
하루방은 할아버지라는 뜻. 따라서 돌하루방은 '돌할아버지' 다.
조선시대, 아니면 고려시대, 그것도 아니면 삼국시대에 만들어졌을까. 정답은
일반상식을 뒤엎는다. 돌하루방의 공식화는 불과 수십 년 안짝. 해방 이전만 해
도 돌하루방이란 말은 없었다고 한다. 제주도 민속학자 김영돈(문화재 전문위원)
의 증언을 들어보자.
본디 이 석상은 '돌하루방' 이라 부르지 않았다. 광복 전후쯤 해서 도민들 사
이에서 장난삼아 '돌하루방' 이라 부르기 시작하자, 누구나가 그 뜻을 쉽게 드러
내는 말이라 너도나도 애용함으로써 널리 번져갔다. 이 '돌하루방'이란 말이 상
당한 세력을 뻗치게 된 것은 1971년 8월 20일, 제주도 문화재위원회에서 민속자
료 제 2호로 지정할 때 '돌하루방' 을 갑론을박 끝에 문화재 공식 명칭으로 쓰면
서부터다. -- 한라일보, 1993년 2월 1일자
돌하루방이란 명칭 사용이 결코 오래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다행인 것은 근
래에 붙여졌으나, 듣기에도 친근하고 썩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돌
하루방이 상당히 소급되는 옛말인 것처럼 알려진 세간의 상식은 잘못되었다.
돌하루방의 기원 문제는 남방기원설, 몽골기원설, 제주자생설 등 아직은 백가
쟁명이다. chlorms에 몽골 학계 일각에서 제기된 몽골영향설은 반드시 검토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몽골 지배기에 몽골 석인상의 영향으로 돌하루방이 이루어
졌다는 견해다. 비교민속학적 차원에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기는 하나 워낙 반
론이 드센 형편이다.
울란바토르 대학 바이에르 교수의 <칭기즈 칸의 혈통을 이어받은 칸. 귀족들
의 돌초상 - 13. 14세기>에 의하면, 몽골 각지에 약 500여 기의 석인상이 흩어
져 있다고 한다. 훈촐로로 불리는 석인상은 고대 유목민족의 습관이나 신앙 및
사회제도 등을 밝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훈촐로에는 우리의 돌하루방
과 외형이 너무도 비슷한 것이 있고 한때 몽골의 지배기도 있어 몽골과 제주의
친연성이 그럴듯하게 제기된다. 몽골 벌판의 훈촐로가 탐라까지 왔다는 주장이
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몽골의 드넓은 초원은 '고요한 들판' 이 아니었다. 많은 세력들의 피어린 싸움
이 전개되었으니, 어느 시기에나 초원의 지배권을 놓고서 다투었다. 중앙아시아
의 중심무대로서 칭기즈 칸이 발흥한 곳이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석인상조차도
돌궐, 위구르, 몽골제국 등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세 종류의 석인상이 별도로
존재한다.
생김새에서 일부 친연성이 있다고 하여 몽골영향설을 주장하는 시각은 무리가
아닐는지. 바로 인근의 알타이 지방에는 전혀 다른 투르카이 양식의 석인상이
전해진다. 이처럼 중앙아시아 곳곳에 전해지는 석인상이 시기와 지역을 달리하
며 차이가 나타남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몽골 석인상과 제주의 돌하루방이 비슷한 모자를 쓰고 있는 데서 착안하여 공
통성을 주장하는데, 이것도 설득력이 없다. 우리나라 육지의 벅수도 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들 벅수도 몽골 모자의 영향 탓인가? 게다가 몽골의 석인상들은 대개
손에 식기 따위를 들고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다. 상호간에 교섭이 전혀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문명간에도 문화적 공통성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남해바다 건너온 벅수
돌하루방의 '출생내력' 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런데 단서 하나가 발
견되었다.
어느 날 남도의 벅수가 배를 타고서 남해바다를 건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
여, 제주도 돌챙이(석수쟁이) 한 명이 남도를 갔다가 잘생긴 조선 후기 돌벅수를
만났다. 돌챙이의 고향은 정의현, 지금의 성읍 민속망르이다. 돌챙이는 돌아와서
입상을 만들었다. 물론 그는 손에 익히고 있던 탐라식의 조각 형식을 기반으로
해서, 새롭게 들어온 양식을 결합하여 돌하루방을 창조하였다.
이렇게 추론하면, 돌하루방과 벅수 연관설이 분명해지는 듯하다. 그동안 육지
부의 석장승 및 벅수와 돌하루방을 관련짓는 이들이 의외로 드물었다. 정의 고
을에서는 돌하루방을 지금껏 '벅수머리' 로 불러왔단다. 육지부의 벅수와 상통하
는 말이 아닌가. 벅수가 전남. 경남 일대에 가장 많이 산재하므로 돌하루방도 남
해바다를 건너온 전승물이 아닐까. 물론 제주도 사람들의 남방전래설에 대한 반
론도 만만이 않다. 그러나 적어도 제주도의 엣 고을에서 지금껏 '벅수머리' 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무슨 근거로 에사로이 넘길 것인가.
문헌자료가 하나 있기는 하다. 제주 목사 이원진이 찬한 것을 신찬이 발문을
붙여 출간한 담수계편 <탐라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옹중석은 제주읍의 성 동서남 삼문 밖에 있었고, 영조 30년에 목사 김몽규가
창건하였으나, 삼문이 헐림으로 인하여, 2좌는 관덕정 앞에, 2좌는 삼성사 입구
로 옮겼다.
'옹중석' 이란 한문투는 탐라지에만 기로고디어 있을 뿐, 제주민들 누구도 쓰
지 않는 말이다. 18세기 중엽에 만들어졌다느 ㄴ것인데, 육지부의 벅수를 염두에
두고 수호신으로 세웠을 혐의가 짙다.
18세기 중엽이라! 한창 민중들의 의식이 성장하고, 당대 민중조각의 꽃이라고
도 할 만한 뛰어난 석상물들이 세워지던 때가 아닌가. 연대가 확실한 것만 꼽아
도, 나주 운흥사지 장승이 1719년, 남원 실상사 장승군이 각각 1725년, 1731년에
순차적으로 세워졌다. 기록상으로 같은 영조대의 실상사 것보다 23년 뒤에 돌하
루방이 세워졌다는 계산이 나온다. 현존 민간석상 중에서 가장 뛰어난 명품들이
대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니, 돌하루방과 육지부 벅수의 친연성은 그 생
김새에서도 쉽게 찾아진다.
석장승이 많기로 소문난 지리산 일대. 남원시에서 지리산 국립공원으로 들어
가는 길목의 주천면 호기리에 돌미륵 장승이 1기 서 있다. 1850년 마을민의 현
몽에 의해 논에 묻혀 있다가 발견되어 1987년도에 현 위치에 세워졌다. 첫눈에
누구나 돌하루방과 비슷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 돌미륵 장승을 보면 돌하루방과
흡사한 벙거지를 쓰고, 퉁방울눈에 주먹코다. 육지의 일반 장승과는 사뭇 다르
다. 돌하루방의 '친척' 을 뭍에서 찾아냈다고나 할까.
조선 후기 전국에 넓게 퍼진 석장승, 또는 벅수와 같은 민중 돌조각품과 돌하
루방의 조형적 상통점을 따져보자. 주먹코, 왕방울눈, 파격적인 해학성, 푸짐한
표정...... 서로 닮은 게 하나 둘이 아니다. 각각의 민중적 조형물들은 나름의 풍
토 속에서 자라나왔기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성격은 하나로 보인다. 소
박하고 질박한, 그러면서도 어디지 모르게 친근한 조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