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나라가 자녀 교육에 대한 공포에 젖어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 걱정을 합니다. 그런데, 그 밑바탕에는 경쟁에 대한 ‘두려움’의 정서가 깔려 있습니다. 아이들도 두려워하고, 학부모는 더더욱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약육강식의 동물적 생존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가족 단위로 비장하게 전투를 치르고 있습니다.
저는 현장에서 교육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의 왜곡된 교육열과 공포감에 대해 어떤 해석과 대안을 제시해야 할 지 막막합니다. 극도의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져 있습니다. 교육 문제에 관한 한 어떤 이성적인 분석도 우리 사회에서는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교육 문제에 이르면 모든 이성적인 논의는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대학입시는 우리 사회의 건전한 상식을 몽땅 빨아들이는 캄캄한 블랙홀입니다. 자녀 교육 문제에 관한 한 모두가 정신적 공황 -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것도 같습니다. 어찌 보면 집단적 광기 같기도 하고요.
신라 시대 서라벌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수천 마리의 들쥐들이 떼를 지어 강물로 투신을 했답니다.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떼 지어 달리는 들쥐들. 자신들의 종의 숫자가 너무 많을 때 심한 스트레스를 느끼며 이러한 집단적 투신 행위를 통해 역설적으로 종을 보존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질주와 투신은 오히려 생존 본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쥐가 달려가니까 자신도 살아야겠다고 달려갑니다. 모두 달려가는데 자신만 서 있거나 처지면 무서운 겁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강물에 빠져 죽고 마는 것이지요.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대학 입시를 향해 떼 지어 질주하는 우리나라의 학생과 부모들을 떠올립니다. 우리 사회의 교육 문제는 어쩌면 합리적 이성보다는 생존을 위한 동물적 본능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몹시도 모욕적이고 불쾌한 비유를 들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와 다른 이야기 하나가 또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선생님이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토끼는 한참을 뛰어 가다가 거북이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앞서 나가게 되자 방심하여 그만 낮잠을 잤지요. 거북이는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쉬지 않고 기어가 잠자고 있는 토끼를 추월하여 먼저 골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실의 덕목을 강조했던 이야기였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한 아이가 엉뚱한 질문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선생님. 토끼하고 거북이하고 바다에서 경주하면 누가 이겨요?”
이 아이의 엉뚱한 질문을 생각해 봅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는 누가 더 능력이 뛰어났고 누가 더 성실했느냐의 문제가 승패의 관건이 될 수 없습니다. 애초부터 이 경주는 불공정한 경쟁이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경쟁이었습니다. 토끼와 거북이는 산에서 경주를 하면 안 됩니다. 당연히 토끼가 이깁니다. 토끼가 낮잠을 자는 사이 거북이가 이겼다는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 허구의 신화에 불과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토끼와 거북이는 바다에서 경주를 해서도 안 됩니다. 거북이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거북이가 낮잠을 자더라도 토끼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아마 몇 미터 허우적거리다가 그냥 익사할 겁니다. 그러므로, 토끼는 토끼끼리 산에서 경주를 하고, 그러다 낮잠 자는 놈은 뒤처지고, 거북이는 거북이끼리 바다에서 경주를 하고, 그러다 성실히 헤엄친 놈은 승리한다는 게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교훈입니다.
우리 사회는 혹시 바다에서 헤엄쳐야 할 거북이에게 산에서 뜀박질하는 연습을 시키는 것은 아닌지. 거북이는 산에 오면 열등생이 됩니다. 제가 아무리 열심히 기어봐야 뒤처져서 열등감과 상처만 남게 됩니다. 대신 거북이가 바다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수많은 거북이들이 산에서 토끼들이랑 경주를 하려 하고 있습니다. 토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라에게 유혹당하여 바다(용궁)로 갔던 토생원, 죽을 뻔했습니다. 바다는 그가 살 곳이 절대 아니었지요.
학교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어른들이 모두들 거북이한테 토끼몰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토끼한테 용궁의 유혹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지금 학교에서는 ‘경쟁력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절대절명의 교육 목표가 되어 있습니다.말끝마다 효율성과 경쟁력을 강조합니다. 대통령은 빌 게이츠 같은 경쟁력 있는 인물을 학교에서 키워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역설합니다. 부모들도 덩달아 자녀들을 빌 게이츠를 만들기 위해 잠도 재우지 않고 닦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거북이들은 늦은 밤까지 학원에서, 도서실에서 빌 게이츠를 꿈꾸며 하루 18시간이라는 세계 최장시간 학습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 되세요’하는 새해 인사처럼, 빌게이츠처럼 돈 잘 버는 잘난 인간을 만들기 위해 온 사회가 맹목적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높이를 생각해 봅니다. 성한 양 아흔아홉 마리가 아니라 잃은 양 한 마리에 마음을 주었던 예수님. 샘물가로 먼저 달려 온 앉은뱅이에게 한없는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던 예수님.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는 주님. 예수님은 그들에게 왜 이렇게 뒤처져 있느냐고 채찍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빌 게이츠를 칭송할까요. 단언컨대, 예수께서 오늘 이 땅에 오신다면 우리의 책상을 뒤집어 엎을 것입니다. 저기 휴먼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에 나오는 별볼일없는, 그러나 가장 소박하고 착한 인간들에 눈을 둘 것입니다. 분명 ‘혼자 가는 백 걸음보다는 함께 가는 열 걸음’이 소중하다고 가르칠 것입니다.
교회가 산 속의 거북이, 바다의 토끼들의 쉼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북이들이 안식일에도 쉬지 못하고 토끼를 따라잡기 위해 헉헉대며 기어가는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의 경쟁에서 벗어나 참된 쉼과 안식을 얻는 날이 주일이고, 그 평화의 터가 교회라고 배웠으니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눈높이를 생각하면 우리 마음속의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가난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넉넉해도 교만하지 아니하며, 서로 섬기고 나누며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교회에서는 세상의 혹독한 경쟁과 그로 인한 공포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대서 퍼온글입니다 착각하지 마시오.
첫댓글 '혼자 가는 백 걸음보다는 함께 가는 열 걸음'이 소중하다.... 현재 내 아이들에게 토끼몰이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을 합니다. 아이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지혜로운 부모가 되었으면...
시간없어 찬찬히 읽지 못했음...따로 읽어볼께요...
언젠가 아들이 아빠에게 꾸중 듣다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아빠! 아빠한테 내가 '왜 돈 쬐금 벌어 오느냐' 고 하면 기분 좋겠어? " 그 뒤로 종종 자중하며 기도하는 장집사를 볼 수 있답니다. 내 자녀가 육지에서 경주하는 거북이인줄도 모르고 있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