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 감사절의 유래.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청교도에서 비롯된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국왕 제임스 1세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자 종교의 자유를 찾아 새로운 곳으로 가고자 했다.
이때 그들은 추방되어 1607년 8월 화란(네델란드) 암스텔담과 라이덴으로 망명하였고 이곳에서도 탄압을 받자 새로운 곳으로 가기로 하고 그 준비를 위해 3년의 기간을 보내고 배를 구입하기 위해 런던의 버지니아 회사의 사원들이 되어 7년 동안 일해서 메이플라워호를 구입하였다.
1620년 9월 16일에 180톤의 작은 배에 102명이 타고 65일간 항해한 끝에 12월 21일 푸리무스(미국)에 도착하였다. 풍랑과 식량난으로 많은 고생을 한 이들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고, 그곳에서 그들은 땅을 개간하고 나무를 베어 교회부터 짖고 1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었으며 그간 약 반수인 44명이 사망하였는데도 장례식도 제대로 못 치른 때가 많았다고 한다. 이유는 인디언에게 사람 수가 적어지는 것이 알려지면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왐파노그아 인디언과 화친을 맺으면서 옥수수를 심는 법을 배웠고 그해 가을 즉 1621년 10월에 거두어들인 곡식을 11월까지 추수를 끝내고 3일동안 축제로 감사제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이다.
이 때에 왐파노그아 인디언도 초청된 이날 총을 들고 새를 잡으려던 사냥꾼이 부근에서 칠면조를 잡게 되어 이 고기를 먹었다. 이후 칠면조 요리가 추수감사절 유래이자 시작인 메뉴로 거듭났기 때문에 터키 데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칠면조 고기를 먹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이 되면 4천만마리의 칠면조가 희생되지만 미국 백악관에서는 한 마리의 칠면조를 풀어주는 관습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전례가 되어 1789년에는 죠오지 워싱턴 미국 대통령이 순례자들이 지킨 첫 감사절을 기념하여 나라 전체에다가 공식적으로 추수감사절 날을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추수감사절이란 왕정시대의 한 관행(잉글랜드의 관습)이라 하여 중단시켰다. 이리하여 그 후에는 몇 개의 주에서만 독자적으로 감사절을 지켰고 날짜도 자기들의 생각대로 마구 정했다.
그후 1828년 ‘Godeys Ladys Book’이란 잡지의 편집인이요 시인이었던 헤일 부인이 감사절을 국경일로 지킬 것을 호소하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국의 독립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서한을 내고 대통령으로부터 다시 명령이 떨어지게 하려고 각방으로 애썼다. 그녀는 수없이 매정하게 딱지를 맞았다. 때로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든가 쓸데없는 짓이란 말도 들었고 ‘이건 당신이 할 일이 아니오’라고 호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마침내 1863년 링컨 대통령이 그녀의 호소를 진지하게 듣게 되었다. 그녀는 ‘추수감사절 날에는 남과 북이 적개심을 버리고 투쟁을 중지합시다’라고 호소했던 것이다.
그후 1941년 이 날은 다시 미합중국 국회에서 최종적 비준을 받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무반응 속에서 해마다 꾸준히 호소해오던 헤일 부인의 호소를 링컨 대통령이 응답하여 1863년 국경일로 정하고 당시 남북 전쟁이던 남군과 북군도 이날 하루만은 전쟁을 중지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링컨 대통령은 11월 넷째 목요일을 국가적 감사절 날로 공식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후로부터 미국에서는 해마다 11월 넷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켜오고 있으며 온 가족이 모여서 풍성한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지나간 한해동안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시고 축복해 주신데 감사하는 날로 지킨다.
한국교회가 추수 감사절로 정한 시기는 1908년 예수교 장로회 제2회 대한노회에서 양력 11월 목요일을 감사절로 정하였었다.
그 후에 1912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1회 총회에서 감사일을 11월 셋째주일 후 수요일로 정하였었는데 이는, 선교사가 처음으로 한국에 온 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로 매년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