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해수욕장[甑山海水浴場/증산해변];삼척시내에서 4km 가량의 근거리에 위치한 조용하고 아담한 곳으로 평균수심 1∼2m 정도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동해시 소재인 추암해변과 접경하여 추암 촛대바위 일출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어 이곳을 한 번 다녀간 사람은 꼭 다시 찾아온다는 정다운 곳으로서 가족단위 피서객에게 권할만 하다. 또 'Dragon Ball'조형을 시작으로 수로부인공원이 조성되고 있다.
[◈참고문헌▶▶『삼척문화관광』(http;//www.samcheok.go.kr/tour.web)]
♣추암해수욕장[楸岩海水浴場];강원도 동해시 북평동에 있는 해수욕장이다.백사장길이 150m의 작은 해수욕장으로, 마을 앞에 자리잡고 있다. 해안절벽과 동굴·칼바위·촛대바위 등 크고 작은 기암괴석의 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해금강해수욕장이라고도 한다. 수심이 얕고 조용해 가족 단위 피서지로 적합하다. 이곳 앞바다의 해돋이는 매우 아름다워 해금강이라고도 하며, 동해시와 삼척시와의 경계를 이루는 해안에 뾰족하게 솟아 있는 촛대바위는 조선 세조 때 한명회가 강원도 체찰사로 있으면서 촛대바위의 경승에 취해 능파대라고 일컬었다고 할 만큼 유명한데, 촛대바위로 올라가는 작은 동산에는 해암정이 있다.주변에 무릉계곡·두타산·청옥산·망상해수욕장·천곡동굴 등 관광지가 많고, 동해역이나 동해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삼척행 시내버스를 타면 해수욕장 입구에서 내릴 수 있다. 승용차로 갈 경우 7번 국도를 타고 효가 사거리에서 삼척 방향으로 직진해 4.8km를 지나 주유소를 끼고 좌회전해서 2.5km 더 들어가면 추암마을에 닿는다.
[◈출처▶▶『두산백과 doopedia』 (http;//www.doopedia.co.kr]
♣추암촛대바위;강원도 동해시 추암동 추암해수욕장 근처 해안에 있다. 바다에서 솟아 오른 형상의 기암괴석으로 그 모양이 촛대와 같아 촛대바위라 불린다. 전설에 따르면, 추암에 살던 한 남자가 소실을 얻은 뒤 본처와 소실 간의 투기가 심해지자 이에 하늘이 벼락을 내려 남자만 남겨놓았으며, 이때 혼자 남은 남자의 형상이 촛대바위라고 한다.촛대바위 주변에 솟아오른 약10여 척의 기암괴석은 동해바다와 어울려져 절경을 연출하며, 그 모양에 따라 거북바위, 두꺼비바위, 부부바위, 코끼리바위, 형제바위 등으로 불린다. 이곳의 바위군(群)은 동해시 남서부에 분포된 조선누층군의 석회암이 노출된 것이다. 석회암은 화학적 풍화작용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 일대의 석회암이 토양 밑에 있을 때 지하수의 작용으로 용해되어 독특한 모양을 이루었고, 이것이 바닷물에 의해 노출되어 지금과 같은 절경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시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있던 한명회(韓明澮)는 이곳의 바위군(群)이 만들어 내는 절경을 가리켜 '미인의 걸음걸이'를 뜻하는 '능파대(凌波臺)'라고도 하였다.예로부터 영동지방의 절경으로 손꼽혔으며 특히 해돋이 무렵, 태양이 촛대바위에 걸리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어 해돋이 명소로 각광받는다. 주변에 추암해수욕장, 해암정 등이 있다.
[◈출처▶▶『두산백과 doopedia』 (http;//www.doopedia.co.kr]
♣강릉호해정[江陵湖海亭];강원도 강릉시 저동에 있는 누정이다.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2호. 정면 2칸, 측면 2칸. 경포호의 북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서 1754년(영조 30)에 진사 신정복(辛正複)이 강릉시 죽헌동에 있던 자기 집 별당 안포당(案浦堂)을 헐어 옮겨 지은 것이다.이 자리는 원래 별검(別檢) 벼슬을 지낸 장호(張昊)가 자신의 아호를 따서 붙인 태허정(太虛亭)이 있던 곳이다. 장호는 이곳을 조카사위인 공조참의 김몽호(金夢虎)에게 물려주었고, 김몽호의 아들 득헌(得憲)은 다시 사위 신만(辛晩)에게 양도하였다. 신정복은 바로 신만의 증손이다.1894년(고종 31)에 이르러 김몽호의 후손들이 신씨로부터 영정을 이곳으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전면의 세 기둥만 둥근 기둥을 사용하여 익공(翼工)집의 형태를 보이고 있고, 나머지는 네모 기둥을 사용하였다.전면의 양칸에는 머름(미닫이 문지방 아래나 벽 아랫중방에 대는 널조각)을 설치하고, 중간에 문골(門骨)을 두 개 넣은 사분합(四分閤) 골판문(骨板門)을 달았다.왼쪽 벽의 우칸(右間)도 머름을 설치하고 사등분하여, 중간에만 쌍분합 띠살문을 달고 나머지는 골판벽으로 처리하여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좌칸(左間)에도 한 짝의 띠살문을 달았다. 지붕은 홑처마로서 이곳에는 이우(李瑀)와 김창흡(金昌翕)의 시(詩)가 있고, 민우수(閔遇洙) 등의 기문이 있으며, 현판은 신위(申緯)가 썼다.
[◈참고문헌▶▶『강원도문화재대관(江原道文化財大觀)』(강원도,1993)]
[◈참고문헌▶▶『임영문화대관(臨瀛文化大觀)』(강릉문화원,1982)]
♣유허비[遺墟碑];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유허란 유지(遺址)·유적(遺蹟)·구기(舊基)와 같이 ‘남긴 터(자취)’·‘옛터’의 뜻으로, 여기에서는 선현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殉節)하거나 귀양살이하였던 곳을 가리킨다.고려시대까지는 유허비라는 명칭의 비는 보이지 않으나, 조선시대에는 유허비를 비롯하여 유지비(遺址碑)·구기비(舊基碑)라는 명칭의 비가 적지 않게 조성된다. 경기도 개성에 ‘고려충신정몽주지비(高麗忠臣鄭夢周之閭)’라는 문구와 입비연대(1530년, 중종 25)만을 간단히 새긴 비는 유허비의 성격을 띤 초기의 예라고 하겠다.충청남도 홍성군·논산시의 성삼문유허비, 경상북도 경주시의 김유신유허비, 최치원 독서당(讀書堂)유허비, 신라효자 손순(孫順)유허비, 제주시의 송시열 적려(謫廬)유허비와 서귀포시의 정온(鄭蘊)유허비 등은 선현들의 출생지·성장지·적거지와 관계하여 세운 비들이다.또한, 부산의 정발전망유지비(鄭撥戰亡遺址碑), 전주의 오목대조선태조주필유지비(梧木臺朝鮮太祖駐蹕遺址碑) 등은 선현들이 사망하거나 잠시 머물렀던 곳에 세운 비들이다.한편, 구기비의 예도 적지 않은데, 황해도 해주의 조선인조탄강구기비, 평양의 기자궁구기비, 함경남도 영흥군의 조선태조탄생구기비, 함흥군의 양성(兩聖)탄강구기비와 조선태조독서당구기비, 안변군의 신의왕후(神懿王后)탄강구기비, 황해도 곡산군의 신덕왕후사제구기비(神德王后私第舊基碑) 등은 왕이나 왕후의 탄생지 등에 관련하여 세운 비이다.특히, 구기비라는 용어는 왕족들에게만 한정되어 사용되었던 점이 주목된다. 이와 같이, 유허비·유지비·구기비는 입비 장소가 중시된다는 점에서 지연적 성격이 강하지만, 이를 통하여 선현의 뜻을 기린다는 점에서 송덕의 성격도 강하다.따라서, 공덕비(功德碑)·의열비(義烈碑)·정려비(旌閭碑) 등과 내용상 크게 구별되지 않으며, 넓은 의미에서는 사실의 내력을 적어 길이 후세에 남긴다는 뜻에서 기적비(紀績碑·紀蹟碑) 또는 사적비(事蹟碑)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참고문헌▶▶『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下]
[◈참고문헌▶▶『한국금석문대계(韓國金石文大系)』1~5]
♣감추사[甘楸寺];강원도 동해시 송정동에 있는 사찰이다.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하는 사찰이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의 셋째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창건했다고 한다. 선화공주는 백제 무왕과 결혼한 뒤 백풍병(白風病)이라는 병에 걸렸다. 여러 약을 써보았으나 낫지 않자 전라북도 익산시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師子寺)에 머물던 법사 지명(知命)이 공주에게 동해안 감추(甘湫)로 가보라고 권하였다. 공주는 감추로 가서 자연동굴에 불상을 모시고 매일 낙산 용소(龍沼)에서 목욕재계를 하는 등 3년 동안 기도를 하였다. 공주가 마침내 병을 고치고 부처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 바로 감추사라는 것이다. 선화공주는 노후에 용왕에 대한 보은을 갚기 위해 이곳에 와서 동해를 바라보다 죽었으며, 묘를 이곳에 썼다고 한다. 오랫동안 폐사로 있던 것을 1902년 절을 세우고 신건암(新建庵) 또는 대은사분암(大恩寺分庵)이라고 하였다. 1959년 해일이 덮쳐 석실과 불상이 유실되었으며, 1965년 인학(仁學)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은 관음전과 삼성각·용왕각·요사채가 있다. 창건 당시의 절터는 찾을 수 없고 선화공주의 전설이 서린 석굴만 남아 있다. 절 입구에는 1979년 조성된 오층석탑이 있는데, 한 여신도가 죽을 때 자신의 아들 박복수(朴福壽)에게 유언을 남겨 만들었다고 전한다. 바닷가에 가까워 주변이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절 입구 샘물에서는 약수가 흘러넘쳐 늘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마을에서는 가뭄이 심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한다.
[◈출처▶▶『두산백과 doopedia』 (http;//www.doopedia.co.kr]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대간길도 수고하셨어요
@태풍(권영무) 대간보다 칼로리 소모는
더 많은거 같아요 ㅠㅠㅠ
@아침햇살 걷는속도가 종 빠르다보이 소모량이 많은듯 합니다
끝날때 다 안되가는교
ㅎ
시원한 바닷바람에
걸을만했겠네요
욕봤슴당
올해까지 끝나도록 진행한다고 합니다
오가는길이 점점 멀어지네요
@태풍(권영무) ㅋㅋㅋ 대간은 가까워져요 ㅋㅋ
뛰어다니시는건 아니죠?
9키로 나오길래 ㅎㅎ
수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방없이 가기에 걷는게 좀 빨라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