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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돌아보기 : 헌인릉
- 헌릉/獻陵(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과
인릉/仁陵(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능) -
1. 헌인릉 가는 길
2003. 12. 21. 일요일 오후 가족모임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조선왕릉 돌아보기의 일환으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인릉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 동안 보지 못한 곳이다. 아이들은 학원을 가느라 빠지고 집사람은 집에 가는 길에 어쩔 수 없이 나와 묻어가게 되었으나, 나로부터 왕릉에 관한 엉터리 ‘생구라’를 들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헌인릉은 태종의 헌릉과 순조의 인릉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양재동에서 헌릉로를 따라 성남방향으로 가다보면 우측으로는 예비군훈련장이, 좌측으로 헌인릉 입구가 나타난다.
헌인릉 입구에서 100m 쯤 들어서면 주차장과 관리사무소가 나오고 낙엽수로 둘러싸인 헌인릉의 외곽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울이지만 대모산 자락에 한적하게 자리 잡고 있는 헌인릉은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화재청 헌인릉지구관리소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헌인릉 입장시간은 하절기(3월-10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동절기(11월-2월)에는 오전 9시부터 4시 30분까지이고(매주 월요일은 휴무), 입장료는 어른 500원이다(청소년 300원)[왕릉 관람료가 유홍준교수가 문화재청장으로 부임한 후 2005. 1. 1.부터 1,000원으로 100% 인상됨]. 일요일인데 불구하고 여기가 서울인가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다른 관람객들은 보이지 않는다. 관람소요시간은 1시간 정도.
헌인릉 조감도
2. 헌릉(獻陵) :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
매표소에서 들어가면 바로 인릉의 홍살문이 나온다. 인릉이 왼쪽에 있고 헌릉이 200여m 떨어져 오른쪽에 있으므로 들어가는 순서대로 인릉부터 보려고 하다가 나나 집사람이나 화장실이 급하여 헌릉으로 가는 길에 있는 화장실에 들렀다가 헌릉부터 보기로 하였다.
화장실은 매우 깨끗하고 전기 히터까지 설치되어 있어 훈기를 느낄 수 있다. 중국의 문화재를 관람하다가 제일 난감한 것이 화장실인데 우리의 화장실은 이제 세계 어디 내놓아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이 개선되었다. 중국을 여행하다가 보면 문이 없는 화장실에 앉아 볼 일을 보는 현지인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헌릉은 홍살문부터 바로 능 앞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지 않고 정자각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홍살문으로 가서 능으로 되돌아오는 식으로 되어 있어 어색하다. 홍살문 앞(밖)은 농사를 짓는 밭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헌릉을 제대로 관람하기 위해서는 홍살문 쪽 사유지까지 능원지구로 확보해야 할 것이다.
헌릉의 정자각
어쨌든 헌릉의 홍살문으로 가서 헌릉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니 참으로 기가 막히게 터를 잡았다. 헌릉의 태종과 원경왕후의 쌍릉은 대모산을 뒤로 업고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를 이루고 있고 홍살문에서 정자각과 산등성이와 능으로 이어진 일직선이 절묘한 구도를 이루고 있다.
홍살문에서 보는 헌릉의 정자각과 봉분
(좌청룡 우백호 기가 막히다. 정자각 우측 건물은 비각)
홍살문은 능 앞에 세워 신성한 장소임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는 문이고,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가는 댓돌(박석)로 참도(參道)가 놓여져 있다. 원래는 홍살문 밖에 禁川橋(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시내의 다리라는 뜻으로 금천교를 지나면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자리를 의미한다)가 있어야 하는데 헌릉의 경우 홍살문은 바로 사유지와 경계를 짓는 부근에 있어 금천교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다. 물이 흐르는 조그만 도랑은 있다.
홍살문 우측에 망료위(望燎位)가 있는데 이곳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능행한 왕이 홍살문 안으로 들어와 절을 하던 곳이다. 망료위에서 절을 한 왕은 참도를 따라 丁자 모양의 정자각으로 가는데 왕이 걸어가던 오른쪽 길을 御道, 왼쪽에 높게 만들어진 길을 神道(선왕의 혼령이 다니는 길)라 한다. 그런데 헌릉의 참도는 돌길의 높낮이가 분명하지 아니하여(가운데만 볼록하게 되어 있다) 어도와 신도의 구별이 어렵게 되어 있다. 인릉은 분명하게 어도와 신도가 구별되어 있다.
정자각은 제향을 하는 곳으로 정자각으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이 없고 동쪽으로 돌아가면 그쪽에 올라가는 계단 두개가 있다. 그 계단을 통하여 선왕의 혼령과 왕이 정자각으로 올라(왼쪽의 선왕의 혼령이 오르는 계단이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져 있다) 제향이 끝나면 선왕의 혼령은 능으로 올라가고 왕은 서쪽으로 난 계단(이쪽에는 계단이 하나밖에 없다)을 통하여 정자각을 내려와 나가게 되어 있다.
집사람이 동쪽의 계단으로 정자각에 올랐다가 내려가기 위하여 홍살문을 바라보는 앞쪽(남쪽)으로 내려오려고 하다가 그쪽에 계단이 없어 왜 계단을 동서로만 만들었냐고 물었을 때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였는데(구라를 풀다가 역시 무식이 탄로 나고 묵묵부답) 원래 정자각에는 ‘東入西出’이라 하여 동쪽으로 오르고 서쪽으로 내려오는 계단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정자각 안을 살펴보니(문은 잠겨 있음) 바닥은 맷돌로 되어있는 것 같고 빈 공간이다. 정자각 뒤 서쪽에는 제향 후에 축문을 태우는 ‘예감’이 있고, 동쪽에는 왕릉의 묘비가 세워져 있는 비각이 있다. 비각에는 신도비가 있다고 하는데 문이 잠겨있어 보지는 못하였다(물론 보더라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자각 뒤에 잔디밭 급경사 위에 능원이 펼쳐지는데 대개 상계와 하계로 나누어진다(초계, 중계, 하계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능원으로 올라가면서 제대로 능을 관찰하여야 할 것이지만 황색 울타리와 출입금지 줄이 쳐져 있어 체면도 있고 해서 그것을 넘지 못하고 왼쪽으로 나와 소나무가 우거진 숲 속의 나무계단을 통하여 오르면서 능원을 살펴보았다.
헌릉(좌측이 태종의 능, 오른쪽이 원경왕후 민씨의 능)
하계에는 좌우로 무관석인(무인석)이 각 한 쌍이 서있고(통상 좌우 한 쌍의 무인석이 서있는데 헌릉만은 두 쌍이다), 무인석 옆의 석마도 좌우 2마리씩 4마리다(통상 좌우 1마리다). 상계에는 가운데에 장명등 2개를 세우고 그 좌우에 문인석 두 쌍이 서 있다(석마 4마리). 무인석은 장군이 칼을 두 손으로 쥐고 있는 모습이고, 문인석은 도포 속에 손을 합장한 모습으로 이들은 언제든지 왕명을 받드는 자세로 서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라고 불리는 床石이 두개가 있는데 4개의 둥그런 돌(이를 鼓石이라고 한다)이 받치고 있다. 상석 좌우로 망주석이 서 있다. 상석은 선왕의 혼령이 쉬는 곳으로 정자각에서 제사를 올릴 때 혼령이 나와 앉아 제사를 받는 곳이다. 나는 집사람에게 통상의 묘에서처럼 상석에서 제수음식을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가 바로 또 무식이 들통 나고 말았다. 오늘따라 왜 이러나…
헌릉의 봉분은 두개인데 왼쪽은 태종의 능이고, 오른쪽은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다. ‘용의 눈물’의 유동근과 최명길의 봉분으로 동원이봉(同原異封)의 쌍릉이다. 봉분에는 밑으로 병풍석이 세워져 있고 난간석이 둘러쳐져 있다.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안으로 들어가 자세히 보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봉분 좌우로 石羊과 石虎 각 두 쌍이 밖을 향하여 왕릉을 호위하고 있다. 능침의 동, 서, 북 3면에 곡장(曲牆)이라고 하는 담장을 둘렀다.
이상이 조선왕능이 있는 능원의 대충의 구조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조선시대 왕릉이 설계되었는데 왕릉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앞으로 다니면서 확인하고 살펴볼 터이다.
원경왕후 민씨는 남편을 도와 태종이 정권을 장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태종이 왕이 된 후 후궁문제 등으로 남편과 불화를 일으키게 되고 태종은 외척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명목으로 처남들을 모두 죽이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태종은 정종이 개경으로 옮긴 수도를 한양으로 재천도하여 이후 한양이 조선의 중심을 잃지 않았다. 태종은 재위기간이 1400년 11월에서 1418년 8월까지 17년 10개월이고, 부인 12명에게서 12남 17녀의 자녀를 생산했다. 그 중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3남 충녕대군이 조선 제4대 왕 세종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태종은 장자인 양녕대군이 무절제한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단호하게 세자에서 폐하고 셋째인 충녕을 세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세종의 기반을 닦아주다가 승하한다. 내가 보기에는 양녕이 아버지인 태종의 눈치를 채고 스스로 세자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때 양녕이 큰 아들이라고 설쳤다가는 아버지 태종에게 작살이 났을 것이다. 양녕대군의 묘는 방배동 서종묘에 있다.
‘용의 눈물’에서 유동근과 최명길의 혼신의 연기로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모습은 생생하게 그려진바 있다. 나는 사극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그 긴긴 대사를 외우고 표독스러운 표정연기를 실감나게 하는 것을 보노라면 그 타고난 재능이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태종은 부인이 자신보다 먼저 죽자 대모산 자락에 부인의 묘를 만들었던 것을 2년 후에 태종이 죽자 세종이 어머니의 능 옆에 봉분을 따로 만들어 아버지를 모신 것으로 되어 있다.
3. 인릉(仁陵) :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능
헌릉을 보고 내려와 헌릉에서 동쪽으로 200여m 떨어진 인릉으로 올라가 본다. 헌인릉 지역은 공원같이 잘 조성되어 있고 호젓한 산책길로도 그만이다. 능의 오른쪽으로 나있는 나무계단을 따라 인릉으로 올라가 보니 헌릉과 달리 능의 모습이 매우 단출하다.
인릉(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
봉분은 하나로 조선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를 합장한 합장릉이나 단릉처럼 보인다. 봉분은 병풍석을 세우지 아니하고 난간석만 세워 헌릉과 달리 능의 높이가 낮은 모습이고, 상석(혼유석)과 장명등도 하나뿐이다. 문인석과 무인석도 좌우로 하나씩이고, 석양, 석호가 2쌍이다.
능원을 내려와 비각을 보았으나 문이 잠겨져 있고, 정자각의 모습은 헌릉과 비슷하다. 역시 문이 잠겨 있어 틈으로 안을 살펴보았으나 빈 공간이다. 다만 왕이 홍살문을 통하여 정자각으로 걸어가는 길인 참도의 모습은 어도와 신도가 분명히 구별되어 있다.
인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생모는 수빈 박씨이다. 정조의 원자 문효세자가 일찍 죽자 1800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그해 정조가 승하함에 따라 11세의 나이에 조선 제2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왕이 어리니 결국 대왕대비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이른바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진다.
정순왕후는 이른바 벽파정권을 수립하여 천주교를 박해하는 신유사옥 등을 일으켜 남인과 시파를 타도하게 된다. 정순왕후가 죽은 1804년 이후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나 이때부터 김조순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수많은 민란이 발생하고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것도 이때이다(1811년). 순조의 재위기간은 1800년 7월부터 1834년 11월까지 34년 4개월이고, 부인 2명에 1남5녀의 자녀를 두었다.
순원왕후 김씨는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로 1802년 왕비로 책봉된 후 첫째 아들 효명세자(익종)의 아들인 손자 헌종이 8세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였고, 철종때 다시 수렴청정을 한다. 순원왕후가 아들 효명세자를 낳은 것은 현종의 정비 명성왕후 김씨가 숙종을 낳은 이래 처음으로 정실부인이 아들을 낳은 것이다.
친정을 한 순조가 안동김가를 견제하기 위하여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기 시작했고, 효명세자는 외가인 풍양 조씨를 끌어들이나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3년 만인 1830년에 죽자 안동김가가 다시 반격을 시작했고, 순조가 1834년 11월 죽게 되면서 어린 손자 헌종이 즉위한다. 왕이 8세밖에 안되어 순조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첨정을 하는 것이다. 순원왕후는 2대에 걸쳐 수렴첨정을 하면서 전권을 휘둘렀다. 어쨌든 ‘얼아’ 들이 왕에 오르면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순원왕후는 헌종이 2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죽자 재빨리 강화도령 원범을 철종으로 즉위시키고 안동김씨 일문인 김문근의 딸을 철종비로 간택한다. 순원왕후는 안동김가를 권력의 핵심에 올려놓은 후 철종 8년에 69세의 나이로 죽는다. 안동김씨의 80년 세도정치는 철종이 죽고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효명세자의 부인)가 흥선대원군과 정치적으로 결탁함으로써 종말을 고한다.
순조가 1834년 죽자 인조의 능인 파주의 장릉(長陵)으로 모셨다가 능지가 불길하다고 하여 1856년(철종 7년) 이곳으로 이장하였고, 순원왕후 김씨가 1857년 죽자 순조와 같이 합장한 것이다. 순조는 재위기간 동안 별다른 업적은 없고 수렴첨정으로 업혀 다니거나 천주교박해, 안동김씨 세도정치, 홍경래의 난 등 어지러운 시대를 제대로 조정하지도 못하고 어영부영 왕 노릇을 한 왕이었고 백성은 이래저래 고통을 겪었다.
순조가 재위한 기간은 세계가 19세기를 맞아 근대화에 몸부림치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국운은 쇄한다는 사실은 명백해진다. 사실 조선은 정조시대를 기점으로 국운은 쇄하고 급속히 쇄락의 길을 걷는다. 순조 이후의 왕들이 제 역할을 못함으로써 조선은 나라다운 기운을 잃고 외부세계에 종속되는 비운을 맞는 것이다.
이것으로 오늘 헌인릉을 돌아보고 느낀 소회를 간단히 적어본다. 조선의 체제를 구축한 태종의 능인 헌릉과 조선의 쇄락을 노정한 순조의 능인 인릉이 한 구역에 조성되어 있는 아이러니를 본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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