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하순(11수)
하루시조 294
10 21
침향침 척촉장이
무명씨(無名氏) 지음
침향침(沈香枕) 척촉장(躑躅杖)이 늙은 후(後)에 유신(有信)ㅎ도다
누울 제 베고 눕고 일어날 제 짚고 서니
천년침(千年枕) 만년장(萬年杖)하여 널로 좇아 늙으리라
침향침(沈香枕) -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베개. 침향(沈香) - 팥꽃나뭇과의 상록 교목. 나뭇진은 향료로 쓴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널리 분포한다. 가라, 침향나무.
척촉장(躑躅杖) - 척촉나무로 만든 지팡이. 척촉(躑躅) - 진달랫과의 낙엽 활엽 관목. 관상용이고 한국, 일본, 만주 등지에 분포한다. 철쭉. 머뭇거릴 척, 머뭇거릴 촉.
유신(有信) - 신의가 있음.
늙마에 믿음이 가는 건 옆지기도 아니요, 자식들은 더욱 아니네요. 이 작품에서 말했듯이 베개와 지팡이입니다. 눕고 일어날 때 의지(依支)하라고 만들어진 소용품이니까요. 그런데 이 작품 속의 것들은 조금 운치가 있네요. 침향목으로 만들었고 척촉 가지로 만들었네요. 침향목의 향기로 쉽게 곤히 잠을 잘 것 같고, 척촉 지팡이는 왠지 조금 더 걸어도 될 것 같습니다. ‘개꽃’인 철쭉은 미록(麋鹿)이며 고양(羔羊)이 어찌 알고 꽃이며 잎을 따먹지 않고 머뭇거린다는군요. 늙어 죽을 때까지 오래도록 곁에 두겠다는 말을 천년 만년으로 은유한 종장이 재미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95
10 22
달이 낮 같이 밝은 밤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달이 낮 같이 밝은 밤에 섬거울손 기러기 소리
서리를 무릅쓰고 기룩두루룩 날아드니
소식(消息)을 물으려ㅎ더니 이미 벌써
섬거울손 – 놀라운 것은.
달밤에 기러기 울음소리에 놀라움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달이 휘영청 밝아서 낮 같다고 했군요. 서리를 무릅쓰고 날아온 철새 기러기이고 보니 때를 가릴 여지가 없을 것이고, 깃을 접는 소리가 요란해서 특별한 의성어로 적었는데, ‘기룩두루룩’ 작자의 귀에는 그리 들렸겠지요. 기러기의 장거리 비행과, 귀환(歸還) 본능 때문에 예전에는 소식을 전하는 새였는지라 종장이 자연스러운 시상 전개인데, 밤이라서인지 물어볼 형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종장 끝구는 시조 창법에 의한 생략인 바, ‘잠드네’ 정도가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96
10 23
호리눅어 괴오시든
무명씨(無名氏) 지음
호리눅어 괴오시든 어리눅어 좇니옵세
전차 전차에 벗님의 전차로서
설면자(雪綿子) 가시로운 듯이 벙그러져 노옵세
눅다 - 굳거나 뻣뻣하던 것이 무르거나 부드러워지다. 반죽 따위가 무르다. 열기나 습기가 스며 물렁하다. 목소리나 성질 따위가 너그럽다. 날씨가 푸근하다. 값이나 이자 따위가 싸다.
괴오시든 – 사랑해 주시거든.
좇니옵세 – 따라서 갑시다.
전차 – 지난번. 어떤 사연.
설면자(雪綿子) - 풀솜. 실을 켤 수 없는 허드레 고치를 삶아서 늘여 만든 솜. 빛깔이 하얗고 광택이 나며 가볍고 따뜻하다.
벙그러지다 – 벌어지다.
말이 어렵습니다. 우리말 어휘인데도 잘 쓰지 않은 탓에 의미 전달이 잘 안 됩니다. 그래도 거듭해서 읽다보니 남녀간의 사랑 애기란 걸 알겠습니다. ‘괴다’가 사랑하다는 뜻이고, ‘좇다’가 좇아가다는 뜻이니, 님이 사랑하는 방식에 맞춰 사랑놀음 하다보면 풀솜의 보드라움에 마음이며 몸 벌어져서 따라가며 놀겠다니 어질어질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97
10 24
흥흥 노래하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흥흥 노래하고 덩더꿍 북을 치고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를 맞추리경 하였더니
어기고 다 저어(齟齬)하니 허허 웃고 마노라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 동양 음악에서, 오음의 각 이름.
저어(齟齬)하다 - 염려하거나 두려워하다. 어긋나고 어긋나다.
흥흥, 덩더꿍, 허허 등 의성어가 곧바로 상황을 설명하니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초장에서는 북 단장에 맞춰 노래하려 했더니, 중장에서는 오음(五音) 곧 높낮이가 맞춰지지 않았네요. 종장에서는 어기고 또 어겨지는 가락과 장단인지라 그만 웃어넘길 수밖에 없답니다.
‘맞추리경 하였더니’의 ‘경’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적확할까요. 우선은 ‘맞추려고 서로 힘을 모아보았더니’로 해 둡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공화순
<경>은 경연의 "경"으로 보는 게 어떨지요?
"궁상각치우"를 맞추는 경연을 하였는데
다들 못 마추고 어려워하니 할 수 없게 된 상황을 시조로 나타낸 듯 보입니다. ^^
하루시조 298
10 25
희어 검을지라도
무명씨(無名氏) 지음
희어 검을지라도 희는 것이 설우려든
희어 못 검는데 남의 먼저 흴 줄 어이
희어서 못 검을 인생(人生)이니 그를 슬허 하노라
희어 검을지라도 – 희어져서 (조금 지나면 다시) 검어질지라도.
설우려든 – 서러울 것이거든.
슬허 – 슬퍼.
머리카락 세는 일을 가지고 인생을 논하는 중에 남보다 자기 것이 세어서 더욱 기가 막히다고 노래했습니다. 어법(語法)의 차이가 고시조를 읽는 어려움을 더해 주기는 한데, 거꾸로 그러기 때문에 옛사람의 어투(語套)를 흉내내며 즐겁기도 합니다.
구십(九十) 졸수(卒壽)를 당하신 노모의 뒷 머릿결이 사뭇 검어지더구요. 이 작품이 지어진 시기에는 칠십(七十)이 희수(稀壽)였으니 도로 검어지는 것을 모를 수도 있겠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99
10 26
흰 것을 검다하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흰 것을 검다하니 이로도 말려니와
그른 일을 옳다하니 긔 아니 애닯은가
세상(世上)에 아는 것이 있든지 없든지 나는 몰라 하노라
이로도 말려니와 – 이것도 하지는 말아야 하려니와.
아니 애닯은가 – 애달프지 않는가. 애닲다 - 마음이 안타깝거나 쓰라리다.
흑(黑)과 백(白), 흑백(黑白). 비단 바둑알만이 아니라 색을 확연히 구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럿 중에 어떤 성향(性向)을 구분하는 표현이 됩니다. 작자는 세상사 이런 흑백 구별은 아예 말아야 할 것이라고 전제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흑백 구분 짓기를 넘어 시비(是非)를 뒤바꾸는 일도 아주 쉽게 해댄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종장의 풀이가 좀 조심스러워야 할 것입니다. ‘아는 것이 있든지 없든지’는 ‘세상 사람들의 면면(面面)들이 지성(知性)이든 아니든’으로 풀고, ‘나는 몰라 하노라’는 하나같이 “나, 모르겠는데”하며 눈을 감고 말더라로 풀어야겠습니다.
흑백(黑白)과 시비(是非)를 뒤바꾸는 일은 절대 하지 말 일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00
10 27
구름아 너는 어이
무명씨(無名氏) 지음
구름아 너는 어이 햇빛을 감추는다
유연(油然) 작운(作雲)하면 대한(大旱)에 좋거니와
북풍(北風)에 쓰러져 불 제 볕뉘 몰라 하노라
유연(油然) - 기름 같이. 몽글몽글 만들어지는 모양.
작운(作雲) - 구름을 만들다.
대한(大旱) - 큰 가뭄.
쓰러져 불 제 – 마구 몰아쳐 뷸 때.
볕뉘 – 볕은 광명(光明)이요, 뉘는 누리이니 ‘밝은 세상’으로 풀어 봅니다.
또다른 풀이로는, 뉘가 쌀에 섞인 것으로 햇볕의 아주 작은 기운으로 보아도 되겠지요.
구름을 의인화하여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햇빛을 감추는 것은 나쁘고, 큰 가뭄에 비를 내리는 것은 좋은 점입니다. 너무 단순하고 자명한 일을 주제로 다루고 있기는 해도, 표현 언어가 단계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점에서 가작(佳作)이라고 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01
10 28
귀밑이 세었으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귀밑이 세었으니 남이 늙다 하려니와
내 마음 젊을 선정 남의 말 허물하랴
꽃과 술 좋이 여기기야 어떤 노소(老少) 있으리
귀밑 – 귀밑머리. 귀밑털.
세다 – 희어지다.
젊을 선정 – 젊을선정. 젊을지언정.
노소(老少) - 늙은이와 젊은이.
나이듦에 대한 당자(當者)로서의 마음가짐을 노래하였습니다. 남이 내 외양을 보고 늙었구나 하더라도 나는야 마음이 젊었으니 탓하지 않을 것이다. 술과 꽃을 좋이 여기는데야 영원히 젊은 것이리니.
종장의 ‘어떤 노소(老少)’를 주목해 봅니다. ‘노소의 어느 사람’으로 풀어 ‘누군들’로 읽습니다. 또 달리 ‘차이(差異)진’으로도 읽힙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02
10 29
천하 비수검을
무명씨(無名氏) 지음
천하(天下) 비수검(匕首劍)을 한데 모아 비를 매어
남만(南蠻) 북적(北狄)을 다 쓸어버린 후(後)에
그 쇠로 호미를 맹글어 강상전(江上田)을 매리라
비수검(匕首劍) - 잘 드는 칼.
남만(南蠻) 북적(北狄) - 오랑캐의 이름. 중국을 중심에 놓고 주변의 미개한 족속을 ‘오랑캐’라 칭했는데, 방위별로 그 표기가 달랐거늘, 동이(東夷)와 서융(西戎)이 여기에 포함된다.
강상전(江上田) - 강에 인접하여 수리시설의 덕을 보는 상전(上田).
호미와 칼의 근원은 쇠일진대 쓰임은 전혀 다릅니다. 평화시에는 호미가 으뜸이요, 전쟁시는 호미를 풀무질하여 검을 만들어야겠지요. 오랑캐의 등쌀을 대비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먼저 만들고 강상전을 매는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시절을 고대하는 내용입니다.
평생을 살아보니 지구촌 세상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자연재해에도 복구를 위한 쇠스랑은 필수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진행형 난세(亂世), 평화시는 희망일 뿐인가 싶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03
10 30
대추 볼 붉은 가지
무명씨(無名氏) 지음
대추 볼 붉은 가지 에후루혀 가려 따고
올밤 벙근 가지 휘두드려 가려 주워
벗 모아 초당(草堂)에 들어가니 술이 풍풍 있세라
에후루혀 – 둘러당겨. 휘어잡아.
벙근 – 벌어진.
휘두드려 – 세게 두들겨서.
초당(草堂) - 억새나 짚 따위로 지붕을 인 조그마한 집채. 흔히 집의 몸채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지었다.
풍풍(豊豊) - 풍성하게.
대추 따고 밤 줍고. 가을이 어디 쌀농사만 하는 것인가요 뭐. 온갖 것들 죄 그러모아 갈무리하고, 겨우내 걱정 없이 지내는 것이지요. 추수동장(秋收冬藏), 천자문에도 나오는 계절 풍광입니다. 대추는 익은 것부터, 잘 휘어지는 가지를 잡아 당겨 골라 따고, 밤은 번 것부터, 장대로 두드려 떨어뜨려 줍는군요. 농가의 세심한 가을걷이, 눈에 보일 듯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04
10 31
섬껍고 놀라울손
무명씨(無名氏) 지음
섬껍고 놀라울손 추천(秋天)에 기러기로다
너 날아 나올 제 임이 분명 알아마는
소식(消息)을 못 미처 맨지 울어 옐만 하나다
섬껍다 – 나약하다.
추천(秋天) - 가을 하늘. 추공(秋空).
알아마는 – 안다마는.
못 미처 맨지 – 미처 못 매었는지.
울어 옐만 – 울며 갈만.
하나다 – 하구나.
저 여린 몸으로 수 천리를 날아 생을 이어가는 철새 기러기를 바라보며, 떨어져 사는 임으로부터 소식이 없는 것은 미처 못 달아맨 탓이려니 여깁니다. 소식을 적은 편지를 매달아 보냈다는 이야기는 참 아름답습니다만, 요즘은 다리에 표식용 링을 끼워 이동경로를 파악한대지요. 끼룩끼룩 울면서 나는 이유가 편지를 못 가져와서 그렇다네요.
전령사로서의 기러기를 ‘너’라 칭하여 친근함을 드러내고, ‘못 미처’는 도치(倒置)의 강조라기보다는 옛말투이지 싶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죽어버린 것만 같은 전통 정형시 시조 살리기. 혼자 하는 운동 같지만 조력자도 있고 응원가도 들립니다. 이 자료가 그런 일의 기초가 된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