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회 생일 기념 시집을 꾸미면서 -- 전형진
친구들 하나씩 별세하고 나도 건강이 들쭉날쭉해서 응급실에 가기도 하고 폐렴을 앓아서 죽음 직전에 가기도 했다. 작년에 제일 친한 친구 C가 14년 동안 투석하며 버티다가 결국 별세했다. 아이처럼 목을 놓아 울었다. 그 울음에 들어있는 감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시어머니 죽음에 슬피 우는 며느리 울음보따리에는 자기 신세가 9할이 들어 있다고 하더니 내 울음보따리에도 내 신세타령이 9할일 것이다.
멀리 다니지 못하면서도 앉아서 글을 쓰는 일은 부담이 되지 않는다. 평생 하던 익숙한 일이라서인지 서재에서 보이는 계양산을 마주 하고 앉아서 시를 쓰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었다. 이렇게 모아진 시가 4시집으로 엮여져 나오게 되었다. 마침 80회 생일이 다가오는 터라 아내는 작년에 건강 때문에 팔순 잔치를 하지 않았는데 시집이 나오니까 마침 잘 되었다고 하며 출판기념회 겸 80잔치를 해서 지인들에게 점심 한 끼 대접하자고 했다.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날씨가 무척 더워 40도를 오르내리고 짜증이 나는 터에 부담을 주는 건 아닐까 싶었다. 아들 둘이 덩달아 나서서 고령에도 시집을 계속해서 낸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부추기더니, 장남이 식당 예약을 하여 일은 시작되고 말았다. 아내는 건강도 별로 좋지 않은데도 설레발을 쳤다. 자기가 35명에게 연락하고 나더러는 자기가 모르는 15명에게만 알리라고 했다. 나는 떠밀려가고 있는 처지이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내가 7년 동안 회장을 하고 있는 교회 방주회 친구들에게 알렸더니 쾌히 참석하겠다고 하였다. 예바우 회원 중에 자녀가 없는 사진예술가 L에게 이 모임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가족 행사와 예바우는 성격이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예바우는 [예술은 바로 우리가]의 준말이다. 이웃에 사는 분들 중에 사진, 서예, 문학, 분재, 도예에 전문적인 경지에 다다른 이들로 구성된 친목회로 1년에 4회 돌아가며 점심을 대접하는 모임이다. 아차! 싶어서 나는 명단을 다시 점검했다. 미나회도 그런 것이 아닌가? 아내가 [M 회원 아내 칠순 잔치]에도 다 갔었는데 당연히 알려야한다고 주장했다.
명단을 다시 일일이 꼽아보았다. 명단에는 영문학과에서 근무하던 동료도 없고, 40년 교육자로 지낸 터에 제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주소록을 뒤져서 이 빈틈을 메워 보려고 애를 썼다. 해마다 스승의 날에 난을 보내주는 속초 소재 경복대학교 소 교수와 나사렛대학교 이 교수가 떠올라서 문자로 초청의 글을 보내면서 참석하려고 무리하지는 말라고 단서를 달았다. 문자를 보내고 5초도 안 되어 전화가 걸려왔다. 내 제자 이 교수였다.
이: 제가 배울 때도 열정적이셨고 지금도 열정적이시고 대단하십니다. 존경합니다. 꼭 참석하겠습니다.
나: 오지 말라고 했는데......
이: 토요일이라서 바쁘지 않습니다.
속초 제자도 문자로 비슷한 답을 보내왔다.
오늘 아침에도 30분 동안 등산을 했다. 축 늘어지지 않도록 매일 짧은 등산을 하고 나서 샤워를 한다. 내가 시를 놓지 않게 되는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벌레에 물려서 종기가 나도 감수한다. 어려서 산속에 살았기에 익숙한 일이다.
걸으면서 사진작가의 말을 곰씹어보았다. 며칠 전에 내가 쓴 시를 암송하면서......
투명 가시///조잘대는 조무래기 노는 꼴이/가시다//무자식 칠순 노인 가슴을 /찌른다//
물론 예바우 회원들에겐 초청의 글을 보내지 않았다.
“가족 모임과 예바우는 성격이 다르다.”
이 따끔한 한 마디가 기준이 되어 효성 게이트볼 팀, 부평 그라운드골프 팀, 1년 전에 구성된 계양문학회, 옛 직장 모임 청산회, 동갑모임 38회, 고등학교 친구모임 삼토회, 재경 압량초교 모임에도 초청의 글을 보내지 않았다. 참 고마운 촌철살인 한 마디였다. 사진작가 L에게 고맙다는 글을 보냈다.
시집 뒤표지에 내 시 한 수를 싣고, 박 시인의 감상문을 달았다. 박 시인은 시교실 내 반창이다. 그 남편은 교장 출신 수필가이고 역시 내 반창이다. 유명한 안재찬 선생님과 백두산 문학기행을 함께 했던 처지다. 내 맘에 드는 시를 얻으면 박 시인에게 문자로 보내곤 했다. 박 시인은 섬세한 감상문을 보내주신다. 이번 잔치에 오셔서 시 한 수 낭송해주신다고 약속하셨고, 그 남편 임 작가도 시 한 수를 낭송하여 주시기로 약속해 주셨다. 수필가지만 시교실에서 시 낭송으로 손꼽히시는 어른이시다. 시 낭송법이 있고 시낭송대회도 있어서 싯줄이 바뀌면 2-3초 쉬고, 줄을 띄우면 5초 쉬고 하는 등 시낭송 규칙에 맞추어 낭송하는 재주가 뛰어나시다.
참석을 부탁하였을 때 두 분의 응답이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아있다.
“좋은 자리에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범한 것 같지만 이렇게 응답 주신 분은 많지 않다.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즐거움과 함께 번거로움도 있다. 일단 초청의 글을 보내고 나면, 달갑지 않는 초청을 보낸 건 아닌가 싶어서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받은 분 입장에서는 응하고 싶지 않아도 거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약속이 있어서 못 갑니다.”
이렇게 답하신 분도 있다. 초청자 입장에서는 섭섭하지만 이게 정답이다. 단호히 거부의사를 말해야 준비에 차질이 생기지 않으니까.
“축하 금품은 받지 않습니다.”
초청의 글에 이렇게 적혀 있어서 그야 말로 점심 한 끼 대접하는 행사다.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
3시집을 낼 때 아내가 뿔이 나서 한 달을 말도 안 했다. 나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다 써놓은 시라도 책으로 꾸미려면 두 달은 걸린다. 두 시집을 낼 때에는 장남이 하는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었다. 아들과 미리 약속했다.
“큰 서점에서 시집이 팔리도록 하면 계속 아들 출판사에 책을 맡기지만 그렇지 않으면 큰 출판사에다 책을 맡기겠다.”
아들 출판사는 규모가 너무 작아서 이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 3시집 출판을 비교적 크고 오래 된 [도서출판 한글]에 맡겼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아내는 이해하지 못했다. 장남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해서 오해가 풀리긴 했지만 참 어려운 시기였다. 79세에 몸도 성치 않은데다가 시집에 몰두하느라 힘이 몹시 드는데 아내까지 틀어져서 방해를 하고 있으니......
그럭저럭 책이 잘 나왔다. 큰 서점에서 많진 않지만 내 책이 팔리고 있었다. 핸드폰과 컴퓨터에서 내 이름을 찍으면 내 책이 사진으로 나오고 가격도 나왔다. 아내가 보고 비로소 내가 한 일을 인정했다. 4시집을 준비하면서 일부러 장남과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고 작업을 했다. 다 마치고나서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이제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사귈 친구는 많다. 4시집에서 한 수 꺼내 보자.
동무 삼기///풍뎅이하고 놀며/강아지하고 놀며/어릴 때 동무 했었는데//철들면서부터 은퇴할 때까지/거터보지도 않다가//콩나물을 시루에서 솎아내듯/하늘이 동갑네들 뽑아가는 지금//벌레도 친구/찔레나무도 친구/까치도 친구//산에 오르면/보이는 게 다 친구다//
아직 나는 내가 맡은 15명을 채우지 못했다. 8명이 아직 무응답이다.
“제발 응답 주시고 오셔서 [전형진 80회 생일 기념 시집] 한 권 받아 가시고,
맛있는 점심 드시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