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문학과사회 신인상 시부문 당선작] 구윤재
모래밭의 나쁜 아이에게
누가 이 모래밭의 나쁜 아이지?
내가 묻자 풀숲에서 은사시나무였던 은수가 걸어 나온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은수를 보는데 오랜만에 보는 은수는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은수, 어린 은수는 입술이 부르튼 은수. 땅에 오래 묻혀 있던 은수. 머리 사이사이에 어린잎이 자란 은수, 은수를 불러내기까지 내게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나는 이제 은수보다 세 마디 정도 높은 시선. 은수를 내려다보는 나. 나를 올려다보는 은수. 나는 훤히 내려다보이는 은수를 꼭 끌어안는다.
은수야 너한테서 짙은 흙냄새가 나. 할머니를 두꺼비집에 넣을 때 맡았던 냄새가 나. 세 마디나 더 자란 내게는 은수에게 말할 것이 세 마디만큼 쌓였는데 말할 것이 너무 많아서 이제 네게는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겠구나.
은수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은수라서
나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다. 은수야 너는 너무 작다. 품 안의 은수를 떼어내 내가 은수의 어깨를 잡고 은수를 본다. 작은 나무 같은 은수. 를 가만히 보면 나는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잊게 됩니다. 앞에 있는 공만
쫓아가게 됩니다. 속이 상한 내가 은수의 어깨에 배에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준다. 은수의 무릎에 시선을 두면서, 아직도 딱지가 앉지 않으면 어떻게 해. 나는 무릎을 꿇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 철봉 매달리기를 했던 날 생긴 피탁지를 떼어낸다. 자꾸만 잎이 떨어지는 너를 어떡하면 좋지. 내가 은수를 올려다본다. 멀리 내다보는 은수에게 은수야, 속으로 부르면 저 멀리서 가장 높은 철봉보다도 큰 은수가 지민아 지민아 울먹이면서 나를 찾아 헤매고 있다.
덜 자란 지민이가 풀숲에서 나와 두리번거리는 은수에게 간다.
캐치볼
은수와 지민이가 떠드는 걸 본 적이 있니 은수와 지민이는 떠든 다 매미가 앉은 자리마다 허물이 남듯이 은수와 지민이의 엉덩이가 왔다 간 자리는 쉽게 알아챌 수 있고
은수와 지민이는 여름을 먹고 자라나지 은수와 지민이는 터질 듯한 매미 울음 속에서 서로의 귀에 비밀을 속삭인다 이것 봐 네 얼굴이 빨간색 페인트를 뒤집어쓴 것 같아 떨어진 벌레를 나뭇가지로 헤집는 은수와 지민이는
음침하지 않아요 은수와 지민이는 놀이터에 떨어진 동전을 모아 뽑기 돌린다 색이 다른 공들이 하나씩 터져 나오는 동안 알 수 없 는 곳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동전을 넣으면 굴러가는 것이 세계의 법칙이라는 것을 은수와 지민이는 배우고 있다 탄생석을 기만하듯
매끈한 두 개의 공이 서로의 목덜미에 입술 자국을 남기는 동안 선명한 비행운을 남기는 비행기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로 떨어지고
서늘한 바람을 타고 간 은수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지민이는 알고 있다 공기가 희박한 여름의 공터에서 혼자서도 둘이 쥐듯 손잡는 법을 연습하는 지민이는
무작위로 주운 돌맹이를 주먹 속에 넣은 채
홀로 운동장에 서 있다
햇빛에 더럽혀진 공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는 수풀 밑에 잠들어 있다
접시 되살리기
1
접시 하나를 상상하자 아이들이 뛰어 들어온다 그러므로 이곳은 박물관인가? 뛰어온 아이가 너덧은 돼 보인다 산만하지만 예의 바른 아이들 큰 소리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나는 대답 대신 이름이 뭐니? 묻고 저는 승희요 저는 인주요 저는 은재요 저는 은수요 저는 성우요 이름을 다 듣고 나는 한 아이를 지긋이 쳐다보았는데 그건 아이의 이름 내 슬픔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방 어떤 아이가 어떤 이름이었는지 까먹는다 여름에 발그레한 볼을 가진 아이들은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그러니까 얘들아
너희 조심해야 한다 접시가 깨지지 않게 해야 한다 하는 순간 접시는 깨진다 희 접시 이 방 한가운데 놓인 접시 모든 조명을 한 몸에 받는 접시 우리 박물관의 유일무이한 접시 평평해서 주말 토스트를 올리기 적당하고 딸기잼 블루베리잼 필라델피아 크림치즈의 맛을 아는 접시 그러나 어떠한 용도로도 사용된 적 없는 흰 접시가
산산조각이 난다 이것 봐 내가 조심하랬지! 화를 내면 아이들은 벽과 구분되지 않는 흰 얼굴이 되네? 벽에 딱 붙게 되네? 아이들은 웅성인다 잘 들어보면 죄송하다는 말이다 쭈그려 앉아 깨진 접시 조각을 하나씩 줍는다 안녕 나의 흘러내리는 잼 안녕 나의 가능했던 주말 아침 안녕 나의 유일무이여...... 아이들은 어느새 접시 주변에 모여있다
2
빗자루가 필요한데 생각하니 창고가 있었다 빗자루를 들고 돌아오니 아이들은 정말 다섯이서 빼곡한 원이구나 위험해. 저리가, 말하면 아이들은 잠깐 깨졌다가 금방 모여든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유리 부스러기는 끝도 없이 나오네 저리 가 말하면 몰려드는 애들에게 그런데 너희
왜 전부 맨발이니?
한참을 이상하다 이상하다 중얼거리는데 한 아이가 저희가 물어드릴게요 말한다 무엇을? 말한 애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저 애의 얼굴은 대장 같네 방금 한 말로 인해 너는 이제 대장 같은 얼굴을 갖게 되엇구나 속으로 생각하면 아이는 먼저 가서 웃고 있다
3
대장의 구호 아래 아이들이 한 줄로 섰다
대장은 가운데 붉은 깃털이 박힌 유리구슬 두 개를 줄 테니 한 조각의 접시와 맞바꾸자고 했다 이건 작년 여름에 지구 반대편에서 가져온 인어의 눈물이에요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이름이 반쯤 지워진 축구공과
필통 깊숙한 곳에 숨겨둔 쪽지와
좋아하는 에니메이션이 방영되는 저녁 다섯 시를 내게 건네고
접시 조각을 얻은 아이들은 온전한 접시가 되어 박물관을 빠져나갔다 주머니 깊숙한 곳의 먼지를 뒤적이는 아이에게도 접시 한 조각을 주어야 하는데
너는 이름이 뭐니
성우요
성우는 뭘 들려줄 수 있니?
쟤네가 다 말해서 저는 드릴 게 없어요
난처해하면 성우는 어느새 아까보다 창백해진 얼굴로 그럼 저는 저기서 기다릴게요 말하고 성우가 가리킨 곳은 성우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기둥이다 상아색으로 페인트칠된 기둥은 빛이 잘 드는 곳에 있진 않지만 깨끗하고 보송한 느낌을 줘
성우는 종종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나를 훔쳐봤다
4
잊을 만하면 성우의 발밑에서 자꾸 유리 부스러기가 나왔다 여기는 정말 꿈에서 들른 모래사장 같아 나는 맨발의 성우가 다칠까봐 바닥을 쓸고 또 쓰는데 아무리 쓸어도 다 끌어안을 수 없어서
성우를 중앙으로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전시품이 없는 박물관에 서 있는 성우는 날이 갈수록 마르고 평평해지고 성우를 돌려보내려면 하나의 이야기가 꼭 필요했는데
덧붙일 조각이 없었다
진열된 시간이 길어질수록 파리해지는
성우의 두 발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빛의 모서리를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유리새
아이들은 공만 보고 달린다
끝에서 끝으로
아이가 던진 공이 날아갈 때
담장은 고요를 지금다
지금부터 아이들은 여름이 얼마나 조용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투명을 산산조각 낸
공을 쥐어본다
공은 더럽고
공은 따뜻하다
공을 담장 바깥으로 던지자
구름이 움직이고 장면이 재개된다
아이들의 이마로
땀이 반짝이고 있었다
슬픔처럼
햇빛이 남긴 무늬로
무릎을 접었다 펴면서
아이들은 미래에 가까워진다
자꾸 나와 눈이 마주치는 한 아이를
모두 곤란해한다
여름에 생긴 비밀을 감추며
아이들은 빈자리가 생긴 교실로 돌아간다
원목 연습
가장 완벽한 환영을 갖고 싶어
도끼 쥔 손으로 나무를 찍는 연습 했다
땀을 닦고 나면 내 손에는
원목 의자
원목 테이블
원목 찻잔
원목 티스푼
원목 티백
원목 물
원목 테이블에 앉아 원목 의자에 발을 올리고 원목 찻잔에 원목 물을 우리면 원목 티백이 되어 티스푼으로 그것을 저으면 생기는 원 목 시간 속에서
나무 찍는 연습을 했다
원목 골든리트리버
원목 고양이
원목 생쥐
원목 파란 코튼 소파
원목 애착 인형
원목 골든리트리버 바람 소리 짖고 원목 고양이 내 단단한 엉덩이에 딱 붙어 있네 원목 파란 코튼 소파 틈 사이 원목 애착 인형은 이럴 거면 왜 만들었느냐는 눈빛이네 공허한 눈빛 속에서 원목 생쥐는 존재를 까먹었네 밤이면 나는 외로웠다 쉬쉬 바람 부는 원목 골든리트리버 소리 아래서
원목 혼자 있는 방
원목 거실
원목 텔레비전
원목 엄마? 아빠?
기왕이면 원목 여동생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네 그래서 만들었네 원목 가정
원목 여동생은 타다 남은 나무라서 따뜻했네 원목 여동생의 훈기로 집 안이 따뜻했네 원목 엄마 아빠 여동생을 어여삐 여겼네 너도 여동생처럼 다정하라며 때때로 나를 타박했네 원목 설거지통 앞에서 나는 맥없이 웃었네 원목 여동생 너무 그러지 말라며 내 소매를 걷어줬네 원목 생쥐도 여동생 앞에서는 앞니를 숨겼네 모두 서로를 좋아했네 이렇게 끝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네 원목 강아지 스산한 소리를 냈네 우리 여동생 강아지 등을 쓰다듬었네 털이 생겨났네 하나씩 이름이 생겨나는 원목 가정 아래서 방심한 원목 생쥐를 원목 고양이가 죽였네 원목 강아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네 원목 혼자 있는 방에서 나는 원목 애착 인형을 강아지 줘버렸네 가만히 있어 티스푼을 돌리면 시간이 감겼네 어엿해졌네 다음 날 여동생은 딱딱하게 굳은 원목 생쥐를 쥐고 울고 있었네
다시 만들어 주려고 했네 여동생 나를 힐난했네 원목 애착 인형 원목 파란 코튼 소파에서 너덜거렸네 원목 엄마 아빠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네 나무가 다 되있네 우리 동생 경기를 일으켰네 다시 만들어 주려고 했네 죽어버리라고 했네 원목 고양이를 죽였네 내 동생 소파에 주저앉아 울었네 엉엉 울있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서 달래줄 수가 없었네 원목 곧 울다가 썩어버렸네 원목 텅 비어버렸네 이대로는 살고 싶지 않았네 아무것도 다시 할 수가 없었네 썩은 땔감 엮어 배틀 만들었네 노를 젖자 원목 물결 흔들렸네 원목 물결 치자 원목 파도 따라왔네 거센 파도 두 번으로 해변이 생겨났네 원목 흔들흔들 외딴 배 위에서
원목 혼자 있는 방
하얗게 바래가는 텔레비전으로
너를 빚는 연습했다
원목 도끼 쥔 손으로
구윤재_2000년 일산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