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舊正)
정의
양력설을 신정(新正)이라 부르는 것에 대비되어 생긴 설날의 이칭.
내용
음력설을 구정이라고 부르는 방식은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것으로 보이는데, 새로운 설이 아닌 오래된 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시간관념 아래, 새해는 음력에 근거하여 시작되었다. 음력에 기반한 전통적 시간체계는 1896년을 기하여 공식적으로는 양력을 따르게 되었다. 양력설이 한국인들의 일상 생활에 좀 더 체계적으로 도입된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자신들의 시간 체계에 맞는 양력설을 새롭고 진취적이라는 의미에서 신정으로 부르고, 피식민지인인 한국인들이 쇠는 음력설은 오래되어 폐지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구정으로 불렀다. 일제가 전통 설을 지칭한 구정이라는 명칭은 일제의 양력설 정책을 답습한 해방 후 한국 정부에 의해서도 사용되었고, 그 사용이 장려되기도 했다. 음력설은 해방된 뒤에도 공무원이나 일부 국민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새해를 맞고 차례를 모시는 날이었음에도 정부는 1985년에서야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음력설을 하루만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1989년에는 관공서의 ‘공휴일에관한규정’을 개정하여 음력설을 설날로 개칭하고 전후 하루씩을 포함하여 총 3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이로써 전통 설은 구정이라는 낙후된 이미지를 벗을 수 있었고 구정이라는 단어는 이제 일상적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韓國民俗學槪說 (李杜鉉 外, 民衆書館, 1974)
日正공휴일 公約채택 民政의원들 正式요청 (朝鮮日報, 1984年 12月 20日)
日正, 祖上의 날로 党政 公休日 합의 (朝鮮日報, 1984年 12月 23日)
韓國農耕歲時의 硏究 (金宅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5)
日正 公休日 의결 명칠 民俗의 날로 (朝鮮日報, 1985年 1月 19日)
日正은 [설날]로…連休 확정 올해는 日曜日겹쳐 (朝鮮日報, 1989年 1月 17日)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신문·잡지 편 1876~1945 (국립민속박물관, 2003)
정의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우평마을에서 400여 년 동안 연행되어 온 마을제사.
특징
우평마을은 도깨비설화를 모티프로 설촌(設村)되었고, 이를 전제로 한 당산제가 연행되어 왔다는 점에서 그 특성을 거론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당산제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것이긴 하지만 ‘여제(廬祭)’와의 상관성도 무시할 수 없다. 나아가 근자에는 영광 우도농악이 2006년부터 합세하면서 규모나 제차가 예능 중심으로 확장되었다. 물론 이것이 아니더라도 영광 우도농악의 모태격이라 할 수 있는 마을제사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런 점에서 마을제사의 의례형식보다는 거기서 파생된 예능화된 농악의 측면이 훨씬 더 강조되는 것으로 보인다.
우평마을은 본래 영광군 도내면에 속하였다. 우들, 우평, 도깨비둠벙 등으로 불렸다. 우평 또는 도깨비둠벙이 있으므로 ‘도깨비터’라고도 하였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우평리라 고쳐 부르고 영광면(읍)에 편입되었다. 우평1리, 우평2리 우평3리로 나뉜다. 우평1리가 본마을이고 2, 3리는 이후에 세워진 마을이다.
우평 본마을은 1500년대 말에 해주(海州) 오명렬(吳命烈)이라는 사람이 설촌하였다. 오씨 집성촌으로 마을이 번창해 오다가 김해 김씨(金海 金氏), 영성 정씨(靈城 丁氏) 등과 함께 살게 되었다.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와우형국(臥牛形局)이라 하여 우평(牛坪)이라 불린다고 한다. 당산제 때 올리는 제물 가운데 우족(牛足)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평마을당산제는 추수가 끝나는 10월쯤에 풍년․풍어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축제인 까닭에 정초에 치러지는 일반적인 마을제와는 구별된다. 당산제가 문화행사로 확대된 최근에 이르러서는 제의 일시가 10월에서 11월 첫째주 토요일로 바뀌었다. 나아가 2010년 현재 사회기업의 일환으로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에 연행하는 난장이 벌어지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당산제뿐만 아니라 마을제사, 풍물난장, 관광객들이 어울리는 우도농악 축제로 확산되어 문화체험 현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유래
우평마을 사람들에게 구전되어 오는 설화가 『영광군지』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것을 소개하기로 한다.
영광읍 우평마을은 500여 년 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도깨비들이 살던 터였다. 사람이 이 터에 들어와 살았는데 자꾸 도깨비들이 방해를 하였다. 밤마다 도깨비들이 나타나 집을 부수고 못살게 하였다. 마을 터를 놓고 도깨비와 사람 간에 시비가 생겼다. 그러나 사람이 도깨비를 이겨낼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사람들은 도깨비들과 협상을 하였다. 무슨 일을 해 주면 터를 물려주고 해코지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도깨비가 말하였다. “본 터의 중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다섯 그루의 나무를 심고, 음력 시월 열나흗날 도깨비들을 위하여 당산을 모시고 제사를 훌륭하게 모셔 달라. 제물의 음식은 도깨비가 가장 좋아하는 메밀묵과 우평을 올려 달라”고 하였다.
여기서의 우평은 마을 이름이기도 하지만 마을이 소의 형국을 지녔다 하여 붙여진 것으로 ‘우족’이라고도 한다. 반드시 소의 발목을 당산제의 제상에 놓아 달라는 부탁인 셈이다. 사람들은 도깨비가 요구한 대로 마을의 사방에 당산나무를 심고 제사를 지냈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정초에 제사를 지내는 도깨비둠벙을 포함해 오당산이 생겨나게 되었다. 마을의 경관 구조도 이를 근거로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이렇듯 도깨비와 사람간의 약속은 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지켜지고 있다.
내용
제의를 행하는 공간은 ‘오당산’이라고 호명되는 ‘우들’에 있는 느티나무 당산이 중심이다. 해마다 음력 시월 열나흗날 밤에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내다가 지금은 그 일시가 바뀌었다. 도깨비설촌설화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마을의 지명들도 도깨비와 관련되어 있다. 먼저 ‘도깨비둠벙’이다. 우평마을 앞쪽에 있는 둠벙으로, 처음 우평에 터를 잡을 때에는 자주 허물어졌다고 한다. 하루는 도깨비 꿈을 꾸고 그 지시대로 도깨비둠벙에 가서 메밀떡과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낸 뒤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에 따라 해마다 정월 첫 인일(寅日)에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의를 지내 왔다. ‘도깨비터’는 우평마을의 본래 이름이기도 하였다. ‘두깨비터’라고도 부른다.
우평마을은 이 오당산을 중심으로 시기를 달리하여 마을제사를 지냈다. 통상 이 제사를 당산제라고 부를 수 있다. 의례 절차는 매우 엄격하고, 궂은일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제관 선정에서 제외된다. 대개 ‘당주’로 호명되는 제사 책임자를 우평마을에서는 ‘하주’라고 부른다. 하주로 선정되면 부정한 일을 하거나 부정한 것을 최소한 봐서도 안 된다. 부정한 일로 인식되는 것은 부부동침, 대소변을 보는 일, 궂은 곳(상갓집 등) 출입, 궂은 음식을 먹는 행위 등 포괄적이다. 하주가 부정을 타게 되면 도깨비가 화를 내어 마을에 해코지를 한다고 여긴다. 실제로 마을 앞에서 교통사고가 자주 나던 해가 있었을 때 하주가 부정을 타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제사를 지낼 때 하주는 음력 시월 그믐날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맑은 찬물로 목욕재계한다. 화장실을 다녀오게 되어도 반드시 목욕을 다시 하여 몸의 부정을 씻었다. 당산제를 지내는 상달, 즉 음력 시월에 초상이 나거나 출산이 있는 경우에는 깨끗함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하여 동짓달의 좋은 날을 다시 택하여 마을제사를 지냈다.
마을 사람들은 당산제를 깨끗이 모시지 않은 경우 그해 운수가 불길하다고 여긴다. 이에 따라 손수 한 집도 빠짐없이 떡과 음식 등 제물을 만들어 방, 곳간, 샘, 철융(장독대) 등지에 차려 놓고 그해의 행운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족과 메밀묵이다. 이는 마을 이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족은 마을의 형세, 메밀묵은 설촌설화에 등장하는 도깨비와 각각 관련되어 있다.
제비(祭費)는 호구전 등으로 호명되는 인구당 갹출하여 충당한다.
제차(祭次)는 많은 변화를 거듭하여 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그 실상을 알기가 어렵다. 다만 현재 영광 우도농악보존회와 더불어 연행하는 절차들이 전통적 맥락을 잇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인용하기로 한다.
대개 마을제의 구성상 영광군의 여타 마을들과 큰 변별성은 없다는 점에서 현재 준수되고 있는 절차가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보인다. 다만 마을의 독특한 도깨비설화와 관련된 설촌, 이것을 뒷받침하는 마을제의라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도깨비 김서방을 불러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마을의 우물을 퍼내 새 물이 차도록 기다렸다가 그 물로 음식을 만든다. 현재는 금요일 저녁이 되면 물아래 와탄천 인근에서 도깨비 김서방을 불러내는 것으로 마을제를 시작한다. 흔히 ‘물아래 도깨비 김서방’으로 통칭되는 김서방 도깨비를 불러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다.
당산제의를 중심으로 마당밟이까지 당산제의 범주에 해당된다. 광의의 당산제의와 협의의 당산제의로 나눌 수 있다. 전자가 마당밟이를 포함한 제의 전반을 호명하는 것인 반면에 후자는 오당산 아래에서 행하는 의례만을 호명한다는 점이 다르다. 당산제는 이들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로 독해되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에서 이 마을에서 행해지는 마당밟이까지 포함해 소개한다.
1. 당산굿 : 현재의 제관은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등으로 유교제례화해 있다. 집사 두 명이 제의의 진행을 돕는다. 제물을 진설하고 축문을 독하고 징굿(진설, 강신)을 시작으로 인사굿-초헌-독축-아헌-종헌-소지-구정놀이-인사굿-음복-대동놀이 등의 형식으로 진행한다.
2. 샘굿 : 샘굿에서는 샘굿가락을 친다. 구음보로는 “솟아라 솟아라 푹푹 솟아라”라고 한다. 샘굿가락을 치고 나서 칠채가락(풍류가락)을 치면서 샘으로 들어간 역순으로 잡색부터 돌아나온다. 가락은 자진일채-음매깽깽-자진일채-음매깽깽-자진일채-샘굿가락-음매깽깽-자진일채 순서의 구성을 취한다.
3. 들당산굿 : 가가호호 마당밟이를 할 때 개별 집들에 당도하면서 치는 가락을 말한다. 대포수가 가장 앞줄에 선다. 잡색들이 그 뒤를 따른다. 나쁜 귀신은 당산굿에서 다 물리치고 좋은 귀신은 들당산굿에서 불러들인다고 한다. 일채질굿을 치다가 사이사이로 칠채가락(풍류가락)을 친다. 일채질굿에서 칠채가락, 다시 칠채가락에서 일채질굿으로 순환하는 구성을 취한다.
4. 문굿 및 마당굿 : 가가호호 대문 앞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치는 굿이 문굿이다. 구음보로는 “쥔쥔 문여소 문 안 열면 갈라요”라고 한다. 이때에는 이채가락으로 진행하고 잡색부터 거꾸로 들어간다. 마당굿은 일채, 이채, 삼채가락으로 진행한다. 구체적으로는 자진일채-늦은삼채-모는가락-안바탕(맺음-구정놀이가락-맺음가락) 등으로 구성된다. 또 한편으로는 자진일채-늦은삼채-제넘기기굿(시념)-팟싹굿 등의 구성을 취한다.
5. 성주굿 : 가가호호 집을 지키는 성주를 달래기 위한 굿에 해당된다. 마루에 쌀을 담은 소반을 놓고 그 위에 돈과 무명실을 올려 놓은 다음 촛불을 밝혀 두고 판을 벌인다.
6. 정지굿 : 일명 부엌굿이다. 솥뚜껑을 뒤집어서 엎어놓고 그 위에 촛불을 밝힌 다음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떠 놓는다. 이는 불을 관장하는 조왕신께 제를 올리는 것이다. 이어 쌀을 사방에 뿌린다. 잡귀를 몰아낸다는 뜻이다. 가락으로는 자진일채-음매깽깽-정지굿가락-음매깽깽-이채-음매깽깽-자진일채 순으로 구성한다.
7. 장광굿 : 일명 장독대굿이다. 대개는 장독대를 철륭이라고 하여 철륭굿을 치지만 여기서는 귀신이 놀라지 않게 한다는 뜻으로 주로 벙어리가락을 친다고 한다. 가락을 보면 장광을 들어가는 가락-넘어가는 가락-자진일채-음매깽깽-자진일채-인사굿 등으로 구성된다.
8. 철륭굿 : 철룡굿이라고도 한다. 영광에서의 철륭은 마을이나 집터를 지켜 주는 신으로 큰 바위나 움푹 파인 곳, 약간 높이 솟은 곳 등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한다. 주로 일채, 이채, 삼채 가락으로 구성한다.
9. 판굿 : 판굿은 당산제의 의례가락이 예능화되어 기량을 뽐내는 굿판에 해당된다. 모둠굿, 오채질굿, 오방진굿, 잡색탈놀이, 허허굿, 구정놀이, 인사굿 등으로 구성된다.
10. 날당산굿 : 당산제의를 모두 마치는 굿에 해당된다. 모든 굿을 마치고 마을을 빠져 나오면서 치는 굿이다. 상쇠의 부포짓에 따라 부쇠와 가락을 주고받는다. 또한 상쇠와 잡색들이 춤을 추는 등 다양한 부포짓과 진법을 펼쳐 보이기도 한다.
11. 잡색의 형성과 의미 : 잡색의 형성은 주로 농악에서 거론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도깨비설촌설화와 관련하여 잡색이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개 대포수, 양반, 할미, 창부, 조리승, 참봉, 비리쇠, 각시, 홍적삼, 큰애기 등으로 구성되어 갖가지 연극적인 형태와 퍼포먼스를 자랑한다.
제의의 목적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 축문이다. 현전하는 축문의 내용은 대개 초인적인 조화 능력을 지닌 신의 힘을 기원하는 내용, 각종 질병의 퇴치 및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 천재지변의 화를 면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내용, 많은 복이 내려 재수가 대통하기를 기원하는 내용, 만사형통하고 입신출세를 기원하는 내용, 조국의 자주민주통일을 기원하는 내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장소, 사안에 따라 축문의 내용이 바뀌기 때문에 일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여기에서는 영광문화원에서 발간한 향맥 제9호(1996)에 소개되어 있는 축문 가운데 ‘성황당(城隍堂)에 고하고 제사 지내는 여제(廬祭)축문을 소개하기로 한다. 여제가 바로 도깨비 신격에게 고하는 축문이라는 점에서 우평마을의 도깨비 당산제 및 네 개 방위로 구성된 마을의 구성 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제축문이라는 점에서 당산제축문과는 다소 다르긴 하지만 이것이 영광읍에서 진행하는 도깨비축문이라는 점에서 그 상관성을 시사할 수 있다.
“아, 너희들 제사를 못 받는 모든 귀신들아, 조용히 듣고 떠들지 마라. 너희가 당초 모습을 생각한다면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었으니 오행의 기운과 사대의 형체로 똑같이 태어났으니 의관을 갖추고 서로 만났으며 마을을 맞대고 살면서 무리를 지어 살았도다. 그때에는 어찌 피차간에 해를 끼쳤을 것인가. 그러다가 죽게 되자 행과 불행이 다르게 되었고 혹은 싸움터로 나가서 목숨을 바치기도 하였고 혹은 형벌을 받아 몸을 망치기도 하였고 혹은 싸우면서 치고 박고 하다가 죽기도 하고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무거운 것에 눌려서 죽기도 하고 혹은 목매어 죽기도 하고 굶주리거나 얼어서 죽기도 하고 그 밖에 좋게 죽지 못한 자들을 모두 다 들어서 말할 수가 없도다. 유유히 떠도는 외로운 혼은 쉴 곳조차 없어서 거친 산이나 시든 풀밭에서 원통하여 소리 내어 우는도다. 전왕(前王)은 이를 불쌍하게 생각하시어 단을 쌓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주게 하셨으니 가히 백골에 살을 붙여준 격이나 다름없고 죽은 잿더미에서 불을 일으켜 준 셈이라고 할 수 있도다. 어둡고 캄캄한 속에서 아마도 모두가 감사해 하리라. 하물며 지금은 성명(聖明)이 왕위에 계시어 천지가 제자리를 찾고 인신이 감화를 하며 육기가 언제나 봄기운이 도는 판국인데 너희는 어찌하여 방정을 떨고 성가시게 굴어 독을 퍼트리며 재앙을 일으켜 형세가 구름그물 안개그물 같고 기운이 얼어붙은 얼음이나 활활 타는 거센 불과 같아 부딪치는 자마다 죽어가며 백성들이 장차 모조리 없어지게 생겼으니 논밭은 경작되지 못하고 들판에는 시체가 구르는도다. 성상께서 밤중에도 몇 번씩을 일어나 일념으로 백성들을 근심하시어 크게 말씀을 내심으로써 모든 선비들이 제를 지내고 이곳으로 달려왔도다. 이에 날을 잡아 목욕재계하고 성황신을 청하여 윗자리에 임하게 하여 모든 귀신을 모조리 불러들여 단으로 와서 명령을 듣게 하는 바이다. 우리의 향기로운 밥을 배불리 먹고 우리의 맑은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바람을 따르고 비를 쫓아 맘대로 하늘 밖으로 바다 밖으로 사방으로 흩어져 가거라. 만약 그것이 안 된다면 단의 풀이 방석과도 같고 단의 나무가 일산과도 같으니 이곳에 편히 있고 영원히 단의 밖이나 문 밖으로 나오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이는 살아서 사람에게 죄를 짓고 죽어서 세상에 화를 끼치는 것이니 어찌 복숭아나무의 화살과 범의 부적뿐이겠는가. 내 장차 상제에게 조상을 갖추어 고하리라.”
참고문헌
향맥 9 (영광문화원, 1996)
영광읍지 상 (영광군, 1998)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구산리에서 마을의 화재를 예방할 목적으로 지내는 마을 제사. ‘화신제(火神祭)’ 또는 ‘물보기제’라고도 한다. 순천구산용수제는 1997년 5월 15일에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유래
용수제가 전승되고 있는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구산리는 본디 그 형국이 거북을 닮아 구산(龜山, 거그뫼)이라 했으나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구산(九山)으로 표기해 본 뜻이 바뀌었다. 이 마을은 순천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옥천 조씨(玉川 趙氏)의 본터로, 1400년대 중반에 정읍현감을 지낸 조지곤(趙智崑)이 입향했다고 전한다. 용수제의 기원은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조씨 성과 연관이 있다. 이 동네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면 오성산(五聖山, 606.2m)이 떠오르는 태양을 가리고 있다. 이는 화방 또는 화국(火局)이라 하여 목성(木性)인 조씨 터로는 목생화(木生火)로서 상생(相生)의 명당이다. 그러나 이곳이 화(火)가 직충(直衝)함인지 화재가 자주 일어났고, 이를 보고 사람들은 조씨가많은 구산마을이 불티나무를 자주 보고 있어 화재가 잦다고 판단하였다. 곧 마을에서는 화기(火氣)를 진압하고자 정월대보름날 해질녘에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용수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순천구산용수제는 1994년 제22회 남도문화제 최우수상, 1995년 제3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민속놀이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내용
화신제는 처음에는 화재를 막기 위하여 마을 주민들이 지혜를 모아 마을 어귀에 짐대를 세우고 그 끝에 오리 형상을 만들어 달아 “여기에는 오리가 사는 물이 있으니 화마는접근하지 마라”는 의미에서 정월대보름날 화신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1. 짐대 세우기 : 정월 열나흗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동네 앞에 모여 인근 산의 솔밭에 가서 가장 크고 긴 짐대를 메고 온다. 짐대를 내릴 때는 끌어당길 수 있도록 새끼로앞목을 묶고, 옆받침 기둥을 넣어서 어깨에 메며, 뒤편에서는 옆 기둥을 아래로 낮추어 손으로 잡고 내린다. 이때 굿(사물)을 치고 거의 외설에 가까운 선소리와 함께 흥겹게짐대를 내린다. 짐대를 내릴때 소리는 일정하지 않고 <어얼사 더리덜렁>, <얼널러 상사디야> 등을 불렀다.
앵무새 같은 시누 물에나 풍덩 빠져 죽지
얼널러 상사디야
낙자장사가 나를 홀려 낸다.
얼널러 상사디야
밤일 하는 데는 붕알이 날개다
얼널러 상사디야
구정물통에 호박씨 떴다.
얼널러 상사디야
과부 요강에는 똥이 동동 떴다.
얼널러 상사디야
이런 소리와 더불어 굿을 치고 내려와서는 짐대를 메고 마을을 돌아다닌 뒤 불의 방향인 동쪽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 6m 정도의 장대 위에 오리를 앉혀 동쪽을 향해 세워 놓고, 짐대와 제사터 주변에 황토를 깔고 금줄을 쳐서 깨끗하게 한다. 짐대를 세울 때(3년주기)는 <다구질 소리> 등의 짐대놀이가 연희(演戲)되기도 한다.
2. 화신제 준비 : 용수제의 주관은 동네 이장(지금은 보존회장)이 맡는다. 제의 준비는 짐대와 제터 주변에 황토를 깔고 금줄을 쳐서 정화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제물은돼지머리, 다섯 가지 과일, 포, 쌀 등을 장에서 구입하여 미리 정한 제관 집(지금은 보존회 총무 집)에서 조리를 한다. 비용은 지난해 용수제의 뒤풀이로 희망하는 집을 돌면서 마당밟이를 해 모은 돈으로 충당한다.
3. 화신제 절차 : 제사는 정월대보름날 오후 5시 석양 무렵 제사터에 제물을 차려 놓은 뒤 홀기에 따라 유교식으로 진행된다. 그 과정은 전남지방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동제(洞祭)와 비슷하다. 특이한 것은 제의에 앞서 옛날부터 땅속에 묻어 둔 항아리의물을 보고 점을 치는 ‘물보기’라는 예점(豫占)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곧 지난해 용수제 때 항아리에 채워 놓은 물의 양이 많이 줄어 있으면 그해 비가 잦고, 적게 줄어 있으면 가뭄이 들 것으로 여긴다. 용수제가 끝나면 곧바로 짐대가 있는 곳으로 옮겨 짐대제를 지낸다.
4. 화신제 뒤풀이 : 화신제와 짐대제가 끝나면 뒤풀이라 할 수 있는 달집태우기 놀이가 이어지고, 동네 마당밟이를 마지막으로 순천구산용수제는 끝이 난다.
의의
순천구산용수제는 마을의 풍수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거행되는 마을신앙으로, 풍수신앙으로 확대하여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민속신앙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용수제는 마을신앙인 동시에 공간민속이다.
참고문헌
승주향리지 (승주군, 1986)
순천시의 문화유적 (순천대학교박물관, 1992)
순천문화재이야기 (순천시, 2007)
정의
설의 이칭. 설, 음력설, 구정을 뜻함.
내용
민속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정도의 뜻을 가진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이 음력설에 대해 공적으로 사용된 것은 1986년부터 1988년까지의 3년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지속적으로 양력설[新正]에만 사흘씩 쉬어 오다가 1985년에 음력설을 처음으로 공휴일로 제정하고 하루를 쉬었는데, 이때 음력설에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설이라는 고유한 명칭을 두고 이렇게 어색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당시 정부에서 고집하던 이중과세 방지정책을 수정하지 않으면서 음력설을 공휴일로 제정하고자 하는 고육책에서 비롯되었다. 1989년부터 민속의 날을 ‘설날’로 개칭하고 사흘의 연휴 기간으로 늘려 양력설과 동등하게 대우하였다. 1991년부터는 신정 휴일을 사흘에서 이틀로, 1999년부터는 하루로 줄임으로써 음력설이 양력설과의 오랜 경쟁에서 우위를 지니게 되었다. 계몽주의적 입장에서 양력설을 공식적인 설로 제정해 두고, 음력설을 지내는 것을 이중과세라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반대하고 폐지하려고만 하던 정부가 일반 국민들의 전통 관습을 존중하게 되는 과정에서 민속의 날이 과도기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日正명칭 설날이 좋다 (朝鮮日報, 1985年 1月 16日)
日正 公休日 의결 명칠 民俗의 날로 (朝鮮日報, 1985年 1月 19日)
「민속의날」劇場街 (朝鮮日報, 1987年 1月 29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