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개론>
기원전 2세기 말부터 1세기 초에 원로원은 내외의 위기에 처하여 무능과 부패상을 드러냄으로써 일종의 정치적 공백상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새로이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이 군사령관출신의 장군들이었고, 그들의 출현은 공화정의 종말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
장군들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데는 군사면에서의 질적인 변화가 또한 크게 작용하였다. 자유농민의 몰락으로 종전의 시민군의 유지가 어렵게 되고, 로마군의 전력도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장군으로서 최초로 정치무대에 등장한 마리우스는 무직자나 무산자의 지원병으로서 직업적인 군대를 새로 편성한다는 군사개혁을 단행하였다. … 그리하여 … 장군에 대한 충성이 앞서고 장군의 사병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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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얼마 안가서 중부 및 남부 이탈리아의 동맹시들이 전부터 요구해 오던 ( 시민권 )획득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동맹시 전쟁 , 91~88 B.C.). 반란을 일으킨 동맹시가 따로 국가를 형성할 기세를 보이자 로마는 그들에게 ( 시민권 )을 부여함으로써(90 및 89 B.C.) 이를 진압하는데 성공하고, 로마시민권은 이제 전이탈리아에 확대되었다.
이렇게 로마가 내우외환으로 어지러운 틈을 타서 흑해쪽의 폰투스 왕 ( 미트리다테스 )가 소아시아쪽으로 그 세력을 뻗쳐 속주 내의 로마인 80,000명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88 B.C.). 이때 ( 미트리다테스 ) 토벌의 임무를 맡은 장군이 ( 술라 )였다. 벌족파인 ( 술라 )는 원로원의 반대로 제대병에 대한 토지분배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마리우스를 내세우려는 민중파를 먼저 숙청하고, 소아시아로 출병하였다. … <110쪽>
( 미트리다테스 )에 승리하여(84 B.C.) 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로마로 돌아온 술라는 마리우스보다 더 무자비하게 반대파를 살해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그 속에는 에퀴테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술라는 희생자의 노예를 해방시켜 10,000명의 친위대를 만들어 신변을 보호하고, 몰수한 재산은 추종자들에게 분배하는 한편, 12,000명의 노병에게 토지를 주어 정착시켰다. 이어 그는 공화정의 전통을 깨트리고 종신독재관에 취임하여 (82 B.C.) 평민회와 호민관의 권한을 최대한으로 축소시키면서 원로원 의원수는 600명으로 늘려 自派사람으로 충당했다. 로마공화정은 이제 소리내며 무너져가고 있었다.
술라가 죽은 후(79 B.C.) 두각을 나타낸 것은 그의 부하장군이었던 ( 폼페이우스 )였다. 그는 스파르타쿠스의 잔당을 토벌하여 그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
정복사업의 진행과 더불어 노예의 수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또한 이를 바탕으로 ( 라티푼디움 )이 널리 유행하게 되었으나, 한편 이를 계기로 노예의 반란도 빈번하였다. ‘스파르타쿠스의 난’도 바로 이러한 노예반란이었다. 기원전 73년 검노 중의 한 사람이 스파르타쿠스를 중심으로 캄파니아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의 토벌을 맡은 것은 술라 밑에서 정적의 몰수재산을 긁어모아 대부호가 된 크라수스였다. 스파르타쿠스의 전사(71 B.C)로 반란도 진압되고 포로 약 6,000명을 못박은 십자가가 아파아 가도에 즐비하게 세워졌다. 북쪽으로 도망가던 그 잔당이 폼페이우스에게 토벌된 것이다.
이렇게 두각을 나타낸 폼에이우스는 법정년령미달을 무릅쓰고 기원전 70년에 크라수스와 집정관이 되어 술라의 반동적인 국제를 원상으로 환원시켰다. … <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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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혁한 공을 세우고 귀국한 폼페이우스는 다른 뜻이 없음을 보이기 위하여 군대를 해산하고, 제대병에 대한 토지분배를 원로원에 요청했으나 원로원은 선뜻 승인하지 않았다. 이때 로마의 전통적인 귀족가문출신인 ( 카이사르 )가 실의에 젖어있던 ( 폼페이우스 )와 그의 동료인 ( 크라수스 )를 끌어들여 이른바 제1회 3頭政治를 성립시켰으며(60 B.C.), 이로써 로마의 공화정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이 되어 폼페이우스의 노병에 대한 토지분배를 실시하였다. 다음 해에 갈리아총독으로 임명된 카이사르는 8년간에 걸쳐(58~51 B.C.) 갈리아정복에 전념하게 되었다. … 갈리아정복은 카이사르 개인에게 있어서는 장차 로마의 정권을 장악하는 데 가장 큰 발판이 되었고, 고대사의 큰 흐름에서 본다면 지중해를 무대로 발전하였던 그리스 ‧ 로마문화가 비로소 유럽내륙에 이식되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카이사르는 장군으로서 보기 드문 탁월한 인물이었으나 정치가로서도 비상한 수완을 갖고 있었다. 그는 갈리아로 출발하기 전에 젊은 ( 클로디우스 )를 호민관으로 당선시켜 로마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 (클로디우스)는 마음에 맞지 않는 키케로와 小카토를 로마에서 추방하고, 가난한 시민에 대하여 ( 곡물의 무상배급)을 실시하였는데(57 B.C.) 그 수는 약 300,000에 달하였다고 한다. 로마사회의 심각하였던 사회적 갈등은 근본적인 해결 대신에 정복사업으로 획득한 토지와 돈으로 제대병에 대한 ( 토지분배 )로써 자유농민을 부분적으로 다시 창출하는 한편, 빈민에 대한 ( 곡물의 무상배급 )과 각종의 경기와 시합 등의 무료관람이라는 이른바 ‘빵과 서커스’ 정책으로 일단 해결을 보았다.
… 카이사르에 강한 반감을 가져왔던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인기상승을 질투하던 ( 폼페이우스 )를 단독 집정관이라는 전례없는 자리에 앉혀(52 B.C.) 카이사르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112-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