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8-2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1. 저자 조사
김민섭
작가. 대학 공부가 사회와 자신을 연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대학을 박차고 나온 경험을 고백한 <나는 지방대 시간 강사다>를 펴내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리운전, 김민섭 씨 찾기 프로젝트, SF 작가 김동식 발굴을 통해 자신-타인-세상 사이의 접점을 찾고 사유한 일들로 주목을 받았다.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 플랫폼 ‘북크루’를 운영하고 있다.
#내게 다가온 저자, 김민섭
김민섭 작가를 만난 건 우연한 일이었다. 인큐에서 I프로젝트를 하며 만났던 아름이라는 친구가 이사를 한다며 책나눔을 했을 때 3~4권의 책을 골랐다. 그 중 한권이 바로 <나는 지방대 시간 강사다> 였다. 그 저자가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의 저자인지는 몰랐는데, 작가 소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우연’을 느끼자 괜히 반가움을 느낀다. 나는 ‘우연’을 좋아한다. 뭔가 ‘운명’이라는 단어와 자연스레 연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4년전 일이라 전에 읽었던 책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이번에 나온 신간인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도 마음이 참 따뜻한 사람이구나’ 싶다. 그리고 그런 저자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 더욱 좋았다. 세상에 ‘이런 따스함을 가진 사람이 존재합니다’를 사람들이 느끼지 않을까 싶어서. 뉴스를 틀면 세상에는 범죄자나 이기적인 사람들만 가득한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데, 현실엔 정말 좋은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앎’을 세상 사람들도 많이 알았으면 좋겠고, 실제로 작가와 같은 사람들과 인간적인 만남을 해보며 ‘따스함’이 퍼졌으면 좋겠다. 승-패의 사고방식이 주가 아닌 승-승의 사고방식이 주가 되는 세상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승-승’보다는 ‘따스함-따스함’이라는 표현이 더욱 잘 어울리는 작가. 김민섭.
2. 초서, 단상
[ 프롤로그 ]
5p 아주 어린 시절부터 착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요즘 언어로 다시 말하자면 선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선함에 대한 남다른 집착이 있었다. 경쟁에 참여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승리할까보다는 어떻게 져 주면 친구들이 기뻐할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일부러 져 주기도 했고, 지고 나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졌으니까 친구는 오늘 기분이 좋았겠지, 누군가를 기분 좋게 했다니 나도 좋다, 하고는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이다.
-> 작가처럼 누군가에게 일부러 져준 기억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고 싶다’는 마음은 어릴때부터 나도 가지고 자라왔다. 이제 막 책을 읽기 시작하는 첫 문장에서부터, 작가의 따뜻한 마음에 내 마음도 포근해진다.
7p “시합을 시작했으면 최선을 다해서 이기는 게 타인에 대한 예의지.” 라든가
“누구를 도와줄때는 이유가 있어야지,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하는, 역시 그럭저럭 평범한 어른이 되었다.
-> 평범한 어른.. 이 되었다고 말했지만, 작가는 결코 평범한 어른이 아닐 것이다. 저런 생각을 사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 아닐까? 나는 죽을때까지 ‘평범한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그냥 우주가 건강(행복)해지는데 쓰여지며 살아가고 싶다. 내 개인의 실속보단 공동체의 실속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싶다.
8p 나는 사실 모닥불과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여럿과 모닥불 앞에 둘러앉고 나면 내 곁에 앉았던 사람들은 나의 재미없음에 곧 자리를 옮기고 만다. 나는 타인에게 말을 거는 방법도, 친해지는 방법도 잘 모른다. 타인과 연결되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
-> 왜일까? 이 문장이 와닿는 이유는. 나는 내 스스로가 꽤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데 말이다.
9p 누군가는 “저는 이렇게 멋지고 좋은 사람입니다.” 하면서 크게 타오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멀리서도 알아볼만큼 큰 불꽃이 될 만한 자신이나 깜냥이 없다. 그러면 나는 곧 연소되어 재만 남고 말 것이다. 다만 나는 작고 온화하게 오래 타오르고 싶다. 될 수 있다면 누구도 상처 주지 않는, 무해한, 내 곁의 타인에게 작은 온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모닥불이 되고 싶다.
-> 아멘. 김민섭 작가의 소망이 실현되길 축복한다.
25p 민섭이는 헌혈을 다닐 시간이나 체력이 있나 봐, 그런 여유도 있고 부럽네, 대학원 공부가 할 만한 모양이야, 하는 것들이었다.
내가 개인으로서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일도 어느 한 집단에서 평가의 대상이 되고 나면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이기적인, 무가치한 일에 자신을 소진하는 구성원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26p 개인과 개인이 존재하는 모든 공간에는 서로가 만들어 낸 공기의 무게가 있다. 그것이 모두를 짓누르지만, 약한 사람에게는 조금 더 가혹하게 적용되는 듯하다.
-> 안타까움과 분노가 동시에 일어난다. 내가 가치를 느끼는 일에 시간을 쏟는 것이 왜 ‘살만한가 보지?’ 라는 비아냥거리는 피드백으로 돌아오는지 + 강자에게는 아무런 이야기도 못하면서 ‘약자’에게는 그렇게 함부로 하는지. 친절한 금자씨의 명 대사가 떠오른다.
“ 너 나 잘하세요. ”
26p 아버지가, 어머니가, 형이, 누나가, 다 너 잘되라고 이러는 거야 하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폭력일 것이다.
30p ‘잘’이라는 부사의 힘은 막대한 것이다. 나는 갑자기 날아온 그 말의 주먹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아, 아닙니다, 다시 잘 읽겠습니다, 하고 연구실에서 나왔다. 그래도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아 다시 그를 찾아갔던 날에도 “그래, 몇 번이나 읽었니?” 하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이번에는 그 말의 주먹을 간신히 피하고 “열 번 넘게 읽었습니다.” 하고 답했지만, “50번은 읽어야 하지 않겠니.” 하는 말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정신을 잃고 말았다’ 라는 표현이 너무나 웃겨서 빵 터졌다. 작가는 심각하고 진지하게 썼을 수도 있을텐데.. 뭔가 모르게 내 개그코드가 건드려졌다ㅋㅋㅋ
30p 그러나 결국 그의 조언이 답이 되어 계속 논물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학풍 안에서 사람이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법이다.
-> ‘결국 그의 조언이 답이 되어’ 라는 표현에 반전이 있구나.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라는 질문은 어찌 보면 결국 해내게 만드는 주문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다.
‘학비를 보태 준 걸그룹’
53p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진짜 이유는 자신의 내밀한 영역에만 간직해 두고 가짜 이유를 전한다. 나도 누군가가 헌혈의 이유를 물으면 아 뭐, 그냥 기념품이 좋더라고요, 습관이 돼서요, 제 취미입니다, 하고 답하곤 했다. 나에게 3,000원짜리 문화 상품권을 받기 위해서 왕복 교통비와 2시간을 투자해 헌혈하러 다녀오는 건 한심한 일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그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하라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 헌혈을 마치고 나온 나는 “헤헤, 기념품 너무 좋다, 빨리 순댓국 먹으러 가야지!” 하고 헤실거리는 철없는 대학원생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 진짜 이유를 혼자만 간직하고 가짜 이유를 전한다는 말이 공감된다. (아마 지금은 아닐 것 같지만) 내가 가진 속마음과 생각을 누군가에게 읽혀지는 것이 정말 싫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짜 이유’를 말할 때도 있었고, 내 행동이 유추되지 않도록 랜덤하게 행동했던 때도 있었다. 아마 이 과정에서 나도 누군가에게 헤실거리는 사람으로 보여지기도 했었을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그럴 수 있다. 일을 하지 않는 요즘, 내 주변에 ‘안녕하세요. 저는 와카남(와이프 카드 쓰는 남편)입니다~ㅎㅎ’ 라고 소개하기도 하기 때문에. 부디 멀지 않은 미래에 ‘와이프 카드 쓰는 남편’에서 ‘와일드 카드 같은 남편’이 되기를.
95p (2박 3일의 숙박비 30만원을 지원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사람)
대단히 다정하고 정중한 메시지였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때 우리는 쉽게 오만해진다. 거기에 뒀으니까 가져가세요, 싫으면 마시고요, 하고 자신도 모르는 갑질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흔쾌히 여행을 떠날 수 없을까 걱정이 된다고,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숙박비를 부담하고 싶다고, 그러면 여행을 떠나기 조금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한다고, 초면에 결례를 무릅쓰고 메시지를 드린다고, 아드님의 수술이 잘되기를 기도한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한 개인의 격이라는 것은 이처럼 받을 때가 아니라 줄 때 드러나는 법이다.
-> 마지막 문장이 내 마음에 와닿았다. “한 개인의 격이라는 것은 받을 때가 아니라 줄 때 드러나는 법이다.”
107p “저어, 그런데 저를 왜 도와주신 겁니까?”
놀랍게도 그들의 답은 거의 비슷했다.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면서도 그랬다.
그래서 나도 93년생 김민섭 씨에게 그 말을 돌려주기로 했다. 그에게 말했다.
“그냥, 당신이 잘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생략)
나는 나를 도왔던 사람들이 “당신이 잘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라고 했을 때,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93년생 김민섭 씨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했다.
-> 이 책의 제목이 여기에서 비롯되었구나. 참 감동적이고 멋진 경험을 읽어볼 수 있어서 좋다. 최근 참전용사분들을 찾아다니며 무료로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작가 분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뉴스만 틀면 90% 이상은 BAD NEWS인데, GOOD NEWS를 한가득 전하는 매체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이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다. 세상에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109p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것의 실체일 것이다.
우리가 도운 가장 연약했던 시절의 한 개인이 결국 우리의 연약한 세계를 구원해 낸다.
‘연결과 연대’
110p 그 순간 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특별할 것 없는 그를 도왔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는 가장 연약한 시절을 지나고 있었다. 졸업을 유예하고 일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가장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기도 했다. 많은 청년들이 입시를 위해, 졸업을 위해, 취업을 위해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 (생략)
내가 그랬듯, 93년생 김민섭 씨를 보면서 우리는 저마다의 연약했던 시절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나아가 연약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 그래서일까? 대국민 오디션을 보면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참가자들이 종종 있다. 슈퍼스타K 시즌2 때 허각을 모든 국민들이 응원했던 기억이 난다. 가수가 꿈이지만, 현실의 생계를 위해 (환풍기? 에어컨? 환풍구? 이건 잘모르겠다) 기사 일을 한다는 그에게 나 또한 마음이 ‘동’했다. 이처럼 누군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때가 있다. 그리고 궁금하다. 과연 나는 언제 사람들에게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동정을 받았었을지. (혹은 받고 있는지.)
112p 자선을 베푸는 일은 한 존재에게서 자신과의 닮음을 발견하는 데서 나온다.
113p ‘당신이 잘되면 좋겠다.’ 라는 평범한 감각이 어쩌면 우리 사회를 지탱시켜 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단단한 개인으로 살아가며 동시에 자신의 연약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타인을 구원해 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우리 스스로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김민섭 프로젝트 그 후‘
118p (72년생 김민섭 씨의 외국계 기업 탐방중. 편안한 옷차림의 회사 직원들로 인해)
같은 건물의 한국 회사로부터 항의가 들어온 일도 있다고 했다. 분위기를 흐리니까 정장은 아니더라도 옷을 좀 갖춰 입어 달라고. 그러나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 건물에는 금융 기업들이 많이 입주해 있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그들은 넥타이를 정갈하게 조여 매고 몸가짐에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 내가 최근 몇 년전부터 ‘피하고’ 싶은 분위기를 내는 일터가 정갈하게 정장을 입고 딱딱하게 있는 곳들이다. 주로 대기업들이 이에 해당된다. 사람사는 느낌이 아니라 ‘자본’이 사는 느낌이랄까? 회사를 다니며 ‘말끔한 외모와 출중한 능력의 비즈니스맨’을 꿈꾸었던 시기도 있었는데..ㅎㅎ 지금은 ‘자연스러움’이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렸다. (물론, 어쩌다 나가는 강의/컨설팅 날이면 어김없이 정장+구두를 입고 가지만 말이다. 멀지 않은 시기에 ‘ 옷 차림도 자유하게 입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교육을 나갈 수 있는 그런 날.
118p 72년생 김민섭 씨는 자신이 왜 한국 기업에서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했는지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나이가 마흔이 넘어가면 ‘관리직.사무직’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개발직.생산직’에 남아 있으면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그러나 외국계 기업의 경우는 그처럼 정해진 답을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관리직과 개발직은 선택할 수 있다. 그는 미국에서 예순 살이 다 된 개발자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본 순간, 이직을 결심했다고 했다. 더 공부하기 위해 미국 본사로 가고 싶다고도 했다.
몇 사람의 취향을 위한 채식에서부터 자유분방한 옷차림, 그리고 삶과 노동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비용의 차이가 아니라 아마도 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타인의 결을 인정하고 구조적으로 수용할 만한 그 여유가 부러웠다.
-> ‘정해진 답’에 잘 끼워 맞추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든다. A냐 B냐 하는 토론에서는 답이 없다. 각자 나름의 근거와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의 생각한 것을 선택하고 책임질 줄 아며, 그 과정에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이다.
얼마전 순수와 ‘단점은 보완할 필요가 있다’ vs ‘강점에 집중하며 살면 된다’ 토론한 적이 있다. 이 주제로 종종 이야기 할 때가 있다. 아마도 순수는 ‘단점이 치명적인 수준이 되지 않을 정도로는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의 대화를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그 말도 맞다. 하지만 결국 어떤 관점으로 내 삶을 살아갈 것인지... ‘선택+책임’지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A(약점보완)든, B(강점집중)든 상관없다. 둘다 맞다. 그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능력이 제일 중요+필요하다.
[ 나와 닮은 사람 지키기, 당신을 고소합니다 ]
‘교통사고’
128p 나의 아버지는 택시나 버스를 보면 무조건 양보하라고 했다. 운전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과 경쟁하면 안 된다고, 사람의 밥벌이라는 것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가 사회인이 되고 보니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나보다 더 간절한 사람을 배려해야 하고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을 존중해야 했다.
그래야 나도 내가 밥 먹고 사는 자리에서 배려와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참전하고 싶지 않은 어른의 싸움’
136p 내가 만약 30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나 노약자였다면 어땠을까.
그는 아마도 더욱 무례했을 것이고, 나도 그에게 보험 회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담담하게, 아니 담담한 척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나이, 세대, 성별, 이런 것을 무기 삼아 목소리를 높인다.
136p (큰 소리를 내고 나이를 들먹이며 무례한 사람... 같은 사람들이)
그러나 그들은 멸종한 것이 아니라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보통 사람처럼 살아가다가 자신보다 약한 사람이 보이면 곧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오늘의 그처럼. 그들은 그래도 된다고 믿는 존재에게는 여전히, 그리고 이전보다도 더 무례하다.
139p 아버지는 나를 훈계하려고 한 일이 없는 대신 종종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 왔다.
140p (사고를 낸 상대방 (택배 차량 기사)에게 괜찮으니 그냥 가보라고 말한 저자의 아버지)
지금에 와서 그때의 아버지를 돌이켜 보자면, 실로 대단한 것이다. 사고가 난 그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자신이 지켜 온 삶의 태도에 충실했다. 자신이 피해자인 것을 알면서도 타인의 태도와 처지와 입장을 살피고 그에 따라 그를 대했다.
140p 아버지는 어쩌면 그 청년에게서 젊은 날의 연약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 ~~~~(생략)
나의 할머니는 그가 (아버지) 대학에 붙었다고 좋아할 때 지정복(교복)을 사 줄 돈이 없어서 울고 있었다고,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아버지의 형이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더니 “이걸로 쟤 지정복 사 줘요,” 하고 돈을 내놓았다고도 말해 주었다. 아버지는 그 청년의 모습에서 자신뿐 아니라 자신을 버티게 해 준 누군가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타인의 처지에서 사유하는 일,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타인의 마음과 같게 만드는 일, 그 동정의 감각이 결국 우리를 연결해 낸다.
‘모욕의 증거를 수집하다’
147p (가족들을 태우고 운전하다 ‘가벼운’ 교통사고가 있었을 때)
“다음부터는 조심하자, 이제 아빠 보험도 못 들게 생겼다. 근데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야.” 라면서 웃어넘기고, 일부러 함께 맛있는 저녁 식사라도 했다면, 그 가족은 이전보다 더 단단해졌을 것이다.
사랑하거나 계속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럴 때일수록 서로에게 더욱 조심스럽고 살갑게 대해야 한다.
-> 내 삶의 ‘태도’로 꼭 가져가고 싶은 마인드와 행동. 사고가 일어났을 때 ‘자본의 건강’을 먼저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건강’을 먼저 챙기는 것. 그리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보는 것.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고 싶다. 아직 교통사고 (아주 경미해서 사고라고 하기엔 뭐 한 경우는 있지만 말이다.)를 경험해 보지 않아서 잘 하게 될 진 모르겠지만. 어쩌면 겪게 될 수도 있는 그 순간이 온다면 그 순간에도 ‘우리가 잘되면 좋겠습니다’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대처했으면 좋겠다. 부탁해 미래의 나야.
‘선생님, 아니 아저씨,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우리 사회의 평범이란 당신과 나의 평균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지 않아야 한다’
172p 자신의 정의로움을 내세우고 그에 경도되기는 쉽다. 타인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를 심판하려 하기도 쉽다. 그러나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사람만큼 위험한 사람도 별로 없다. 나는 이 고소를 진행하는 동안 가져야 할 나의 원칙을 정했다. 나를 끊임없이 의심하기로 한 것이다.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건 필요한 일이지만 그러다 보면 곧 괴물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고작 이만한 일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당위를 찾아내려 애쓰는 것을 보면, 나는 참 나약한 사람인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욕의 정의’
‘우리가 상처받지 않고 서로에게 다다를 수 있기를’
[ 느슨하게 당신과 만나기, 몰뛰작당 프로젝트 ]
‘헬스장에는 자신을 돌볼 여유가 좀 더 있는 사람들이 남았다’
209p 나에게 코로나는 헬스장에 나오지 않을 핑계이자 선택의 문제였지만, 누군가에게는 헬스장에 나올 수 없는 이유이자 생존의 문제였다.
209p 결국 코로나가 먼저 무너뜨리는 것은 약자들이다. 그들의 연약함은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을 돌보며 잘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고, 썩 괜찮은 것 같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자신도 잘 모르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간신히 버텨 온 사람들이 있다. 아슬아슬한 ~~~(생략)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버텨 온 연약한 사람들은 예고 없이 일상을 뒤흔드는 디스토피아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된다. 그들이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것은 스스로를 돌볼 여유다. 자신을 위해서 하던 작은 돌봄, 그러니까 취미 생활이나 운동이나 공부나 자신에게 소소한 행복과 만족을 주던 무엇과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헬스장에서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이캔, 보고 있나요 저는 저의 몸과 마음을 구할게요’
219P 나의 몸은 나만이 읽어 낼 수 있는 언어이고 판본이다. 그건 어떤 트레이너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저는 못 뛰어요. 조금만 뛰어도 힘들어요.” 하고 말 하지만, 누구에게나 알맞은 달리기 방식이 있다. 이 정도는 뛰어야지, 저 사람만큼은 뛰어야지, 하는 마음이 되어서는안 된다. 자신의 속도로 뛰는 사람의 모습은 느리거나 빠르거나 그 자체로 아름답다.
220P 아침마다 뛰는 약 20여 분은 사실 나를 알아 가고 돌보는 시간이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더 나를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됐다.
‘다시 한 번 김민섭 씨 찾기 프로젝트’
227p 글이 좋아요, 책이 재미있어요, 당신은 대단해요, 하는 것보다도 “당신의 글을 읽으면 저도 글이 쓰고 싶어져요.” 하는 반응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함께, 몰래, 각자의 자리에서 뛰어요’
232p 나와야 할 인원을 정해 두고 누가 언제 나올까 마음 졸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뛰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형편에 맞게 모여서 뛰고 헤어지기로 했다.
-> ‘느슨한 공동체’가 나도 편하고 좋다. 마치 ‘신뢰의 서클’과 비슷하다고도 생각이 되었다. 여러 회차의 교육을 할 때도 실천해보고 싶은 컨셉이다.
238p 누군가는 정의로움을 부르짖으면서,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으면서 캠프파이어의 불길처럼 크고 빠르게 타오른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너무나 뜨겁다.
나는 그렇게 화려하게 타오르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나는 차라리 잔잔하게 스스로를 밝히는 평범한 모닥불이고 싶다.
-> 지금의 나도 그렇다. 나중에는 ‘태양’같은 비범한 존재이고 싶지만, 지금은 집 안의 난로불? 같은 시즌을 보내고 싶다. 존재적으로도 그렇고.
‘이 떡을 드시면 모든 게 잘될 거에요’
240p 아아, 그만 아니었다면. 그러나 그도 지금 아침반의 그 회원 놈만 아니라면, 하고 울면서 운동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 트랙에서 누구도 홀로 뛰고 있지 않았다‘
256p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운동해야 하는 요즘. 코로나가 끝나고 마스크를 벗을 수 있다면)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도 이만큼이나 잘 뛰고 있는데 그때는 얼마나 더 잘 뛰게 될까.
이 높아진 경험치를 적용시키면서 이전보다 행복하게 무엇이든 잘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263p 나는 목요일 저녁마다 계속 어딘가에서 뛰고 있을 것이다. 어느 목요일에 당신이 잠깐이라도 뛰면서 함께 뛰고 있을 누군가를 감각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연결될 것 이다.
[ 에필로그 - 연약의 시절을 기억하는 당신에게 ]
265p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는 공정과 불평등이다. 전문가들은 젊은 세대가 공정에 매몰된 한편, 불평등한 구조는 심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가운데 ‘선함’을 꺼내는 건 듣기에만 좋은, 무책임한 태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MZ세대’라고 명명한 그들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본다.
그들은 그간의 어느 세대보다도 선함에 민감하다.
‘돈쭐을 내다’라는 신조어처럼, 그들은 자신이 잘되기를 바라는 선한 대상을 발견하면
기어코 잘되게 만들어 내고야 만다.
각자의 자리에서 선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외롭게 두지 않는다.
아낌없이 돈을 쓰고, 다시 그에 그치지 않고 ‘좌표’를 찍어 연결하고 확장해 낸다.
3.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독후
아름다운, 혹은 감성 충만한 책을 읽을 때 나는 BGM과 함께 독서를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qXCR0mgdy7Y
이번 책을 읽으면서도 BGM을 틀었다. 음악의 힘은 참 대단하다. 아무런 음악없이 이 책을 읽을 때와, 위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을 때의 느낌이 전혀 다르다. 저자의 따뜻함과 진심어린 마음이 내게 더욱 깊숙이 와 닿는 느낌이었다. 음악이 주는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에 감탄하며 독후를 시작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큰 지지가 되었고, 위로받는 느낌도 들었다. 다른 사람이 행복한 모습을 보면 자신도 행복하다는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특이한게 아니구나 싶었다. 자신이 승부에서 져서 상대방이 기분좋아진다면, 자신은 일부러라도 져주고 상대의 기쁜 모습을 보며 작가 자신도 기뻐했다는 이야기. 나도 그게 더 행복하고 기분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물론 내가 진심으로 임했던 ‘게임’에서는 자존심을 걸고 최선을 다해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 노력했었다..ㅎㅎ 아마도 ‘큰 의미(가치)를 두지 않았던 승부‘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내가 지더라도 행복해 하기 위한 조건으로 말이다.)
저자가 ‘작가’라는 직업으로 살아가는 게 참 다행이다 싶기도 했고, 좋기도 했다.1. 다행이라는 말은, ‘우리’같이 (마음 따뜻한 사람..ㅋㅋㅋㅋ) 선한 사람은 이 세상을 살면서 상처를 받기 쉽고, 인정(능력적인 + 경제적인)받고 대우받기가 쉽지 않다. (라고 나는 느끼고 있다.) 아마도 (아직까지는) 대한민국에서는 ‘호구’ 잡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김민섭 작가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엄청난 ‘희소성’을 가지고 있으며 (라고 생각되며) 이런 이들을 우리가 함께 ‘보호’ (더 나아가서는 동참) 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우리가 순수하고 선한 ‘어린아이’에게 엄청난 사랑을 느끼는 동시에 보호하고 싶은 마음을 느끼는 것처럼. 그래서 어쩌면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작가’라는 직업이 김민섭 작가를 ‘보호’할 수 있으며 ‘인정’받을 수 있는 정말 좋은 직업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좋았던 것은 작가가 가진 ‘선함’이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글’은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그런데 작가의 글은 사람의 마음을 충만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의 잘됨이 아니라, ‘당신’의 잘됨을 빌어주는 그 마음에서 독자들은 큰 위로와 희망, 용기를 얻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그리고 호구스럽게 살아온 독자라면 이렇게 사는게 나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연결’의 느낌도 받았을 것 같다. 나처럼. 15,000원으로 이어진 작가와의 ‘느슨한 연결’이 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거라는 생각에 김민섭 작가의 직업이 ‘작가’여서 좋았다.
독후를 쓰며 문득 드는 생각은, ‘선한 사람은 ’노출‘될 필요가 있다’라는 생각이다. 한 마디로 자신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은 선한 사람이 생존하기 위함이기도 하며, ‘세상을 건강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 논리는 위에 적은 1,2번과 동일하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레 나를 ‘노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번 더 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행복하면서도 세상이 건강해지는데 (자연스러워지는데 / 건강해지는데) 최고의/적합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지금은 방구석에서 꿈꾸고 있는 단계이지만, 점차 내공이 쌓이고 그릇이 넓어지며 마음이 단단해진다면 자연스럽게 내 삶을 ‘노출’하며 그로 인해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아갈 것 같다.
내가 부족할수록 하나님의(신의) 전지전능함이 더욱 드러난다는 말처럼, 내가 연약할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파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