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대전(토마스 아퀴나스) 권위에 의지해 논증하는 것은 이 가르침의 가장 전형적인 방식이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의 원리 자체가 계시를 통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며, 또 우리는 이렇게 계시를 받은 사람들의 권위를 믿어야 한다. 그렇다고 이 가르침의 품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이성에 근거한 권위를 끌어대는 것은 가장 조잡한 것이지만 신적 계시에 근거한 논증은 아주 고결하고 설득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트교의 가르침은 인간 이성을 사용한다. 물론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공로가 상실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 안에 전해지고 있는 진리를 명백하게 하기 위해 이성이 사용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자연을 파기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기 때문에 자연 이성은 신앙에 협력해야 한다. 이성은 신앙에 도움이 되고, 자연에 대한 사랑은 크리스트교적 사랑과 서로 통한다. … 크리스트교 신학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책을 어떤 논쟁의 외부적 증거 자료로 이용한다. 거기에서는 어떤 논쟁에서 판결을 내려야 할 때 성서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이 적절하고 필요불가결한 일로 여겨진다. 교부(敎父)들의 저작도 적당한 근거 자료이긴 하지만 그들의 권위는 최종적인 것이 못 된다. 신앙은 구약 성서의 선지자와 예수의 12사도를 통해 드러나고 성서에 기록된 신의 계시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지, 결코 다른 성자들에게 나타난 계시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철학은 신학의 하녀 거룩한 가르침은 철학적 학문들에서 어떤 것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필연성에서 철학적 학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가르침이 전달하는 것들을 더 명백히 드러내기 위해서다. … 거룩한 가르침은 다른 학문들을 자기보다 더 위의 것으로 하여 그것에서 자기 원리를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문들을 더 아래 것으로, 또 하녀로 사용한다. |
유럽의 발달은 크리스트교의 발달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노르만족의 이동 시기. 국가라는 개념이 없다고 볼 수 있는 상황에서. 교회(교황)이 이들을 막아내는 역할을 했으며, 국가의 역할을 대신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러한 유럽의 발달 과정에서 고대 로마에서도 '삼위일체'에 관한 논쟁이 있었던 것처럼. 다른 논쟁이 또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보편논쟁'이라는 것과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관한 논쟁입니다. 어쩌면 종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소박하거나 수준이 낮지만 한 번 정도는 친구들과 해보았을 법한 내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논쟁이 중세에 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논쟁을 종결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이고. 이 인물에 의해 '신앙과 이성의 조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안셀모는 이성보다 신앙이 앞선다고 하였고, 이어 아벨라르는 '긍정과 부정'을 통해 보편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개별적인 것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아주 절묘한(저의 개인적인 표현입니다)' 표현을 하죠. 저는 항상 아벨라르의 이 표현은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표현이며,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엄청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아벨라르의 논리 속에서 변증법적 방법도 볼 수 있는데, 이 변증법적 방법을 통해 이성의 진리와 신앙의 진리는 별개로 존재한다고 하는 논리를 전개하며,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꾀한 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역시 깊은 고민은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깊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 쉽게 반박하기 힘든 사상이 제시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