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김성일 - 개척자의 피 땀 눈물 - 5. 뜻 위한 집시의 행각
1 그 후 하동 지역장으로 발령이 나서 횡천교회에 있다가 하동읍에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마음먹고 송부웅씨 집에서 신세를 지며 생활했다. 며칠을 지나도 식구는 없고 교회는 세워야 할 텐데 외로움이 가득했다.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서 성지에 가서 하늘을 쳐다보며 기도했다. 늦가을 날씨는 쌀쌀했다.
2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던 것처럼 모래로 몸을 덮고 명상하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매월 지역장 회의 때면 하동에서 부산까지 450리를 자전거를 타고 갔다. 어떤 때는 진교에서 부산까지 420리를 16시간 만에 도착한 적도 있었다.
3 1962년에 72가정 약혼 수련이 열렸을 때 상경하여 수련을 받으면서도 나는 아무 정신이 없었다. 마음은 초조하기만 하였다. 선생님 말씀이 ‘검둥이도 좋으냐’라고 물으시던 생각을 하면 누구와 약혼한대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지만 마음은 갈팡질팡이었다.
4 드디어 나를 선생님께서 부르셔서 올라갔더니 앨범을 들추시면서 “이 여자 어떠냐?” 하고 물으시길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또 한 장을 들추셔서 “나하고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너 뜻대로 살겠다고 하더니……” 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뜻을 거스르고 나니 걱정이 되었다.
5 선생님께서 또 다른 여자의 사진을 보여 주시면서 “이 사람이 좋으냐?”라고 물으시길래 나는 “선생님이 보시기에 저에게 맞는 사람이라면 해주십시오” 하고 말씀드렸더니 옆에 계신 최원복 선생님도 동조하시는 말씀을 해주셨다. 선생님께서 웃으시면서 내려가 있으라 하셨다.
6 나는 틀림없이 먼저 사진에서 본 사람과 약혼하나 보다 생각하고 올라갔더니 유동희(柳東姬)씨가 먼저 올라와 있었다. 선생님이 웃으시며 “너 이 사람 어떠냐?” 하고 물으셔서 나는 “좋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동희씨도 좋다고 했다.
7 선생님은 동희씨에게 “너는 대학을 졸업했으니 중퇴한 성일이를 공부시켜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우리의 손을 잡게 하고 선생님의 손을 우리의 손 위에 얹으시고는 간곡한 축복기도를 해주셨다. 6월 4일에 우리는 합동결혼식에 참석하여 축복을 받고 난 후 나는 하동 지역장으로 동희씨는 사천 지역장으로 시무했다.
8 나는 사천에 가서 집회도 인도해 주고 먼 길을 같이 갈 때에는 뜻을 중심한 대화를 많이 했다. 그 후 나는 전남 곡성 지역장으로 발령을 받아 곡성에 갔는데 초가집 방 한 칸에 어린 식구 4명 정도가 있었다. 아내는 브로치 장사를 해서 경제를 맡았고 나는 전도활동에 집중했다.
9 어떤 때는 같이 순회 활동을 하다가 나물을 뜯어서 그것으로 밀가루 죽을 해서 먹기도 했다. 땔감이 없을 때는 지게를 빌려서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 어렵게 나무를 해와서 밥을 지어 먹을 때 살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면 우습기도 했다. 도무지 살림하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꼭 아기들 소꿉장난하는 기분이었다.
10 우리는 먼 목적지를 향해 여행하는 집시임에 틀림없었다. 우리는 조그만 조각배를 타고 파도를 헤치면서 여행하는 것이리라. 그 후 담양으로 발령이 나서 갔는데 거기도 초가집 방 한 칸이었고 식구는 대부분 어린 식구들이어서 교회 살림을 협조할 사람이 없었다.
11 생활이 어려워서 아내는 공의진료소에 다니게 되었다. 이곳에서 전국순회부흥회를 맞게 되었는데 우리 조(組)는 이정옥(辛貞玉) 선생과 한인수(轉仁法)씨와 나였다. 나는 이분들을 6개월간 모시고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12 지성미 있는 이정옥 선생과 뚜렷한 개성을 가진 한인수씨를 존경하면서 힘든 줄 모르고 기쁘게만 활동하였다. 6개월의 순회부흥회를 마치고 담양에 와서 ‘집 사기 운동’을 벌려 집을 마련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3년 만에 첫 생명을 탄생시켰다. 그래서 우리의 조각배는 1명을 더 싣고 항해를 시작하게 되었다.
13 그런데 뜻밖에 ‘부친 별세’라는 전보를 받고 춘천의 집에 가보니 부친은 사실대로 타계하셨던 것이다. 나는 부친에게 내 힘으로, 내 정성으로 한 번도 식사 대접도 못 해드렸다. 생각하면 불효한 자신이 기가 막혔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선생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14 누구보다 효성이 지극하신 분이 감옥에까지 찾아오신 모친을 돌려보내시고 홀로 남하하셔서 모진 고생을 하시면서도 뜻만을 위해 살아 나오신 것을 생각할 때 나는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나는 또 하나 자위할 것이 있었다.
15 그것은 부친께서도 뜻 위해 살아가는 나를 이해하셨을 것이라는 마음에서다. 부친은 일찍이 나를 전도하셨다. 나는 나의 부친의 신앙을 잘 알고 있다. 부친은 지금도 자신이 다 못하신 뜻을 내가 대신 이루어 주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계실 것이다.
16 나는 더욱 하늘 앞에 효성을 다하고 젊었을 때 승리의 기쁨을 아버님 앞에 돌려 드리자고 다짐했다. 그 후 6개월간 협회 학생과장 생활을 했는데 매일 출근하면 식구 통계, 그리고 문서 정리 등의 사무적인 일을 하게 되니 따분한 생각이 들었다.
17 생명은 생명끼리 부딪쳐야만 부활할 수 있으니 목회자의 생활이 얼마나 고귀한 직책인가를 느꼈다. 그래서 종로 지구장으로 갈 때는 알뜰한 목회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갖고 갔다. 여기서는 나이 많으신 어른을 모시고 어린 식구를 이끌고 상하좌우가 균형이 잡힌 목회생활을 했다. 1년 8개월이 지난 후 충북 순회사로 임명을 받았다.
18 순회 활동의 중점을 첫째 메시아 사상의 확립, 둘째 긍정적 신앙관 확립, 셋째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전달, 넷째 부흥회를 개최하여 식구로 만들어 교회장을 도와주자는 4가지의 목표를 세우고 활동했다.
20 순회하면서 2회의 부흥 강의를 했더니 가슴이 조여들어서 더 이상 강의를 할 수가 없었다. 누워서 땀을 흘리며 아픔을 참고 있는데 신옥순 순회사님이 자기도 목이 쉬고 피로한데도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희생적인 사랑에 감명을 받았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