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문학과 예술
조선조의 문학은 한문으로 쓰여진 한문학, 우리말로 쓰여진 국문학,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진 구비문학으로 가를 수 있다. 이 셋 가운데 지배계급에 속했던 사대부들의 가치관과 미학을 표현했던 한문학이 주류를 이루었고 국문문학과 구비문학이 기층문학으로서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한문학으로는 한시와 부, 한문소설, 야담 등이 있고 국문학으로는 악장, 가사, 시조, 고대소설, 민요, 전설, 민담, 무가, 판소리, 가면극, 탈춤, 인형극, 굿 등이 있다. 이 시대의 장성문학을 다룰 경우 국문문학이나 구비문학은 남겨진 자료나 기록이 미미하여 일반적인 추론에 그칠 수밖에 없고 개인문집으로 전해진 한문학을 중심으로 이 시기의 문학을 서술할 수밖에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전남의 북쪽 끝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장성은 전남문화의 중심지인 광주와 나주에 가까워 담양과 함께 전남문화의 중심권을 형성하였던 고장으로 이들 중심권과 교류가 매우 활발하였다. 무등산 자락을 중심으로 면앙정가단, 성산가단 등이 형성되어 호남가단의 중심을 이루었고 호남전역의 이름 높은 문인들이 모여들어 서로 사귀고 시를 화답하였다.
박상, 박우, 박순, 송흠과 송순, 양산보, 임억령, 임형수, 나세찬, 유성춘, 유희춘, 김인후, 기대승, 고경명, 김성원, 김윤제, 정철, 임제, 양팽손, 양응정, 최경창, 백광훈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교유하였고, 이들과 사제관계 또는 인척관계로 맺어진 문인들과 전국에서 이들을 찾아오는 문인들이 교유하였다.
이 문학권의 특색으로 정익섭 교수는 학연, 지연, 혈연으로 긴밀히 맺어져 있으며 학파와 당파로 볼 때 서인과의 친근성이 매우 두드러짐을 지적하였는데, 같은 도내이면서도 남인들과는 접촉이 소원했음은 당시 시대상의 반영으로 보인다. 조선조 말까지 장성은 대학자들을 배출한 고장이어서인지 두드러진 문학가들을 많이 배출하지 못한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현재 65개의 개인문집이 간행되었고, 발간되지 못한 문집이 10여집 있다. 장성문학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들 문집을 연구하여 그 문학적 가치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장성이 낳은 훌륭한 인물이나 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문학적 세계를 다루려고 한다. 이들은 당시에 문필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계층이며 문학 독자층을 형성할 수 있는 계층이기 때문이다.
(1) 장성문학의 선구자들
장성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인물로는 박희중(朴熙中), 심연(沈涓), 송흠(宋欽), 기건(奇虔), 이재인(李在仁), 김개(金漑), 김숭조(金崇祖), 이장영(李長榮), 이만영(李萬榮), 박수량(朴守良), 유성춘(柳成春)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오랜 관직생활을 했던 사람들과 연산군 중종 때 사화를 피하여 낙향했던 사림파 문학인들로 구분할 수 있다.
위남(葦南) 박희중은 진원출신으로 1401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직제학을 지낸 분인데 애석하게도 시문이 다 전하지 못하고 1920년에야 후손이 간행한 위남선생문집이 전한다.
김개(金漑)(1405~1484)는 본관이 영광으로 1458년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전하는 문집이 없다.
청파 기건(奇虔)(?~1460)은 1448년 전라도 관찰사, 1453년 대사헌이 된 인물로 장성에 이주하였다. 기대승의 아버지 기준과 함께 장성문학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점필재의 제자로 무오사화를 피하여 삼계 백산에 낙향하여 화초정(花草亭)을 짓고 은거한 이재인(李在仁)(1415~), 그의 아우 대사헌 이유인(李有仁), 사화로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한 이장영, 이만영 형제가 있으며 화초정․관개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종윤(李從允)(1431~1494)은 호는 송와(松窩), 본관은 경주, 사헌부 장령, 사간원 정언을 거쳐 시강원 보덕, 제주목사, 제주목사시 선정을 베푼 것으로 유명하다.
지지당(知止堂) 송흠(1459~1547)은 장성문학의 선구자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다. 세조4년 삼계에서 출생하여 1492년에 문과급제하였다. 김안국과 같이 공부한 그는 전주부윤 나주목사 전라도 관찰사로 호남의 목민관이 되었다. 고향에 관수정(觀水亭)을 짓고, 박우, 양팽손, 송순, 임억령, 오겸, 나세찬, 김인후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최산두, 윤구, 조광조 등 기묘명현들과 가까웠다. 특히 양팽손, 송순, 나세찬은 그의 제자들이며 양팽손의 아들인 송천 양응정도 그의 학맥과 이어지는 인물이다. 송흠은 시문에 뛰어나 많은 시가 전한다. 송흠은 물의 철인이요 물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원형이정의 사상을 물에 구현하여 철학화하고 문학화한 시인이다. 별시장원한 글에서는 목민관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물에 비유하여 여실히 나타냈고, 관수정을 짓고 이름 붙인 사유를 쓴 글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관수정운에서는 명경지수의 시심을 노래했다. 특히 그의 유고 중에 의정부 좌참찬의 명을 받고 고향에서 상경하여 돌아오기까지를 기록한 기행록(記行錄)은 당시의 풍습을 잘 담고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문집으로는 지지당유고(知止堂遺稿)가 전한다.
정혜공 박수량(貞惠公 朴守良)(1491~1554)의 호는 아곡(莪谷)이요 본관은 태인이다. 15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좌참찬 호조판서 지중추부사에 이르기까지 38년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오랜 관직생활에도 청렴, 결백, 강직하여 청백리로 여러 번 표창을 받았다. 그의 청렴에 감동한 명종(明宗)은 그의 집을 청백당(淸白堂)이라 이름짓고 죽었을 때에 서해 바다 돌을 골라 하사하면서 비문 없이 그대로 세우도록 했다. 박수량은 연산군 폭정에 저항했던 홍문관교리 김개에게 배웠다. 문장이 뛰어났으나 청백리라 공적을 남기는 일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그의 시문이 남겨지지 않았고 1945년에 후손이 간행한 아곡실기(莪谷實記)에 시 4수, 부 5수가 전할 뿐이어서 아쉽다.
나옹 유성춘(懶翁 柳成春)(1495~1522)은 본래 해남 사람으로 최부의 사위인 유계린(柳桂隣)의 아들이요 유희춘의 형이다. 1519년 기묘사화에 유배되었다가 장성 진원에 정착하였으며 동생 유희춘도 담양 창평에 이주하였다. 당시 최산두 윤구와 함께 호남의 삼걸(三傑)이라 칭송 받았고, 허균이 거론한 호남 16걸에 든 사람이나 애석하게도 그의 문집이 전하지 않는 듯하다.
서청헌 김숭조(西淸軒 金崇祖)(1465?~1519)는 1495년 문과급제하여 경기도사 사헌부지평에 이르고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김굉필의 제자로 시문이 뛰어났으나 전하지 않으며, 그의 아들 김기(金紀)(1500~1535?)는 자암 김구의 문하생으로 1519년 문과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부응교에 이르렀으나 병화와 화재로 시문이 유실되어 일기 1편이 전한다.
김경우(金景遇)는 호가 요월정(邀月亭)이요 김기의 아들로 1565년 공조좌랑을 그만두고 황룡에 요월정을 짓고 휴식하면서 음풍영월하였다. 수많은 시인들이 찾아들어 교유하였다. 성자경, 김인후, 기대승, 정철과 도의계(道義稧)를 하였다. 요월정에는 김인후, 기대승, 양응정, 김수항의 시가 현판되어 있다.
(2) 하서 김인후의 문학
거듭되는 사화와 정계의 파란으로 선비들이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는 한편 산수가 수려한 곳에 정자를 짓고 시를 화답함으로써 문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학문으로나 문학으로나 호남을 대표하는 인물이 하서 김인후이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는 황룡면 맥동에서 태어났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김안국과 최산두에게 수학하였으며 성균관에서 이황과 한 방에서 공부하였다. 인종(仁宗)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하서는 인종과 함께 삼대지치의 이상에 불탔으나 인종이 승하하자 낙향하여 시와 술로써 일생을 마쳤다. 면앙정 소쇄원을 비롯하여 호남의 명류들이 모이는 곳을 드나들며 시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정철, 조희문, 양자징, 기효간, 변성온, 최학령 등이 제자이다. 만년에 학문에 전념하여 기호학파의 중심에 우뚝 섰다.
김충렬 교수는 “학문적으로 하서는 이기(理氣)를 포괄․회통한 대심(大心)의 철학자다. 배타보다는 포용, 분석보다는 회통을 중시하였고, 모든 사물을 같은 생명 차원에서 교감했다.”고 결론지었다. 이와 같은 사상이 녹아있는 그의 시에는 자연과 사물을 생명 차원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교감한 시들이 많다. 도학사상을 시로 표현하면서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시정을 표현하여 도학시(道學詩)의 절정을 이루었다는 평을 들었다.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
竹外風淸耳 대숲 너머 부는 바람 귀를 맑게 하고
溪邊月照心 개울가 밝은 달은 가슴을 비추네
深林傳爽氣 깊은 숲은 서늘한 기운 보내주는데
喬木散輕陰 높은 나무는 엷은 그늘 드리우네
酒熟乘微醉 술이 익자 살포시 취기를 띄고
詩成費短吟 시를 짓자 조용히 읊조리네
數聲聞半夜 한밤중 들려오는 처량한 소리는
啼血有山禽 피를 토하며 우는 산새의 울음
잔잔한 서정 뒤에 격정을 토로하는 것이 하서 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인종을 잃은 한과 울분을 노래한 그의 시는 도학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격정이 표현되어 있다. 인종을 그리워하는 시로 유소사(有所思)가 유명하다. “상사일야매화발(想思一夜梅花發)이라는 옛 시를 시제로 지은 시를 들어본다.
美人不可見 어여쁜 임 그리워도 볼 수 없으니
一去何當廻 무엇이 돌아올 길 막사옵니까?
別來閱星霜 작별한 지 몇 세월이 흘러갔기에
鏡裏朱顔摧 거울 속엔 백발이 성성합니다.
姮娥盈又缺 밝은 달은 찼다가 다시 기우는데
寸恨終離裁 이 마음에 맺힌 한은 풀리질 않네.
壁間綠綺琴 벽에 걸린 이름난 녹기 거문고
絃索生塵埃 줄에는 먼지만 수북하다오.
極目望山河 눈을 돌려 임 찾아 갈 길 찾아보지만
氷雪空崔嵬 얼어붙은 빙설만이 기구합니다.
遙夜不成夢 깊은 밤 잠 못 이루어 뒤척이다
搔首起徘徊 머리 긁고 일어나 서성댑니다.
宛然巧笑瑳 방긋 웃는 임의 모습 완연하여서
忘却窓前梅 창 앞에 핀 매화인 줄 깜빡 잊었소
精神忽交通 정신이 홀연히 서로 통하니
靑眼爲君開 그대 위해 추파를 띄워 봅니다.
參橫月又落 샛별은 비끼고 달마저 지니
翠羽驚毰毸 취우새도 놀라서 푸덕입니다.
閒愁復撩亂 잠재웠던 근심 걱정 다시 일어나
茫然自生哀 속절없는 슬픔만 더해 옵니다.
且就此花下 말없이 꽃 아래 다가가 앉아
酌彼黃金罍 술잔을 기울이며 취해 봅니다.
하서는 우리말 시가에도 관심이 깊어 한시 백련초해(百聯抄解)를 언해했으며, 정미사화에 죽은 임형수(林亨秀)를 애도한 시조를 썼다. 하서의 문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자연가(절로가)를 들어본다.
靑山도 절로절로 綠水도 절로절로
山절로 水절로 山水間에 나도절로
그中에 절로ᄌᆞ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저서로는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과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가 있으나 전하지 않고 그의 도학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천명도(天命圖)만이 전한다. 하서집에는 1700여 수의 시가 전한다. 하서기념회에서 2년마다 학술발표회를 열어 대표적 논문을 정선하여 ‘하서 김인후의 사상과 문학’을 두 권 간행하였다.
(3) 임란을 전후한 장성문학
임란을 전후하여 장성문학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김인후의 문인들이 정철을 중심으로 활약하였고 기대승의 집안들이 광산 임곡 너부실과 장성에서 활약하였으며 변이중 집안들이 학문과 문학에 뛰어났고 정운룡, 김경수, 윤진 등이 활약하였다. 또한 서울에서 피난 와서 장성의 명문가와 혼인을 맺거나 정착한 권필, 조찬한과 그의 형 조위한, 양경우, 양형우, 정홍명 등 당대의 대문인들과의 교유가 이루어졌다.
고봉 기대승의 아들 기효증의 사위가 된 현주 조찬한, 그의 형 현곡 조위한, 그리고 그와 절친한 석주 권필이 장성 토천(지금 임곡 토말)에서 돌아가며 지은 토천연구(土泉聯句)는 유명하다. 권필은 해광 송제민의 사위요 의병장 윤진은 그의 매부이다. 또한 송제민은 광주목사 김응두(金應斗)의 아들 김대형(金大亨)의 사위이며 제봉 고경명은 김응두의 아들 김백균(金百勻)의 사위이다. 이들은 모두 송강 정철과 절친한 사이이니 당대의 대문인들이 장성과 인연을 맺고 활약하였던 것이다. 이 때의 문인들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기효간(奇孝諫)은 호가 금강(錦江)이요 본관은 행주이다. 기대유(奇大有)의 아들로 김인후와 일재 이항의 문인으로 평생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으며 추산서원에 제향한 서태수, 변성온, 변이평과 교유했다.
박상의(朴尙義)(1538~?)는 청계 박원순(朴元恂)의 제자로 천문지리에 통달했다. 명나라 장수 양원의 군사로써 공을 세웠다.
정운룡(鄭雲龍)(1542~1593) 호는 하곡(霞谷) 본관은 하동이다. 장성 북일면 사동 출생, 기대승의 문인으로 박순 고경명과 함께 공부하였다. 1589년 왕자사부가 되고 임란 때에 전사하였다. 황룡강 상류에 개천정사(介川精舍)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니 박순, 이정구, 고경명이 와서 시를 짓고 교유했다.
김경수(金景壽)(1543~1621) 호는 오천(鰲川) 본관은 울산, 기효간, 정운룡, 변이중과 교유했다. 기대승과 율곡 이이에 사사함. 1591년 송강의 천거로 예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송강이 유배됨으로써 물러났다. 남문창의 때 의병의 맹주로 크게 활약했다.
최학령(崔鶴鈴) 호는 율정(栗亭)이요 본관은 탐진이다. 김인후의 문인으로 1539년 정시문과에 장원했으나 홍패의 오자가 있어 받기를 거부하고 귀향하여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김백균(金百勻)(1525~1584) 본관은 울산. 광주목사 김응두의 아들로, 제봉 고경명의 장인이다. 1549년 문과급제 관직이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 평안감사에 이르렀으나 윤원형 이량의 다툼에 희생되었다.
변이중(邊以中)(1546~1611) 호는 망암(望菴) 본관은 황주. 율곡과 우계의 문하생이다. 1573년 문과급제. 1584년 황해도사 1592년 전라도소모어사가 되어 병마 군기를 수습하고 화차 300량을 제조하여 권율장군에게 보냄. 망암유고 1권을 1613년에 아들 변경윤이 편집하고 1958년에 간행함. 시 30편과 그 외 많은 글이 실려 있음.
윤진(尹軫)(1548~1597) 호는 율정(栗亭) 본관은 남원. 장성에 은거함. 권필의 매부로 정유재란 때 입암산성에서 전사함.
김성길(金成吉)(1562~1639) 호는 맥로(麥老) 본관은 울산. 이황 문하에 출입. 맥로유고에 시10여수와 그 외 글이 전함.
이희웅(李喜熊)(1562~1648) 호는 기천(杞泉) 본관은 전의. 삼서 태생. 송천 양응정의 문인으로 그의 손서가 되었다. 1624년에 62세로 문과에 급제. 1987년에 간행한 기천집에 시13편을 비롯한 여러 글이 전한다. 인조의 요구에 따라 헌치평16책소(獻治平16策疏)를 올렸고 임란직후 호남지방 사류의 동향과 지역사회 동향을 쓴 글과 양산룡 양산숙의 의병활동을 기록했다.
조찬한(趙纘韓)(1572~1631) 호는 현주(玄洲) 본관은 한양. 기효증의 사위가 되어 장성 토천에 정착함으로써 장성과 인연을 맺었으며 후손들이 장성에 살아 조비, 조휴, 조유상을 배출하였다. 유민탄(流民嘆)이란 가사와 소설 최척전(崔陟傳)을 쓴 현곡 조위한은 그의 형이다. 1606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낸 인물로 문장이 뛰어나고 시부에 능했으며 또한 명필이다. 조위한, 권필과 토천에서 토천연귀를 지었다. 당대 대문인으로 권필, 허균, 이안눌, 정철, 정홍명, 양경우 등과 교유했다. 문집으로는 현주집 15권이 전한다. 시조 두 수를 지었다.
貧賤을 ᄑᆞᆯ랴ᄒᆞ고 權門에 드러가니
침업슨 홍졍을 뉘 몬져 ᄒᆞ자ᄒᆞ리
江山과 風月을 달리ᄒᆞ니 그ᄂᆞᆫ 그리 못ᄒᆞ리.
天地 몃번째며 英雄은 누고누고
萬古興亡이 수후 ᄌᆞᆷ에 꿈이여ᄂᆞᆯ
어듸셔 망녕엣 거슨 노지 말라 ᄒᆞᆫᄂᆞ니.
변경윤(邊慶胤)(1574~1623) 호는 자하(紫霞) 본관은 황주. 장성읍 가곡리에서 변이중의 아들로 태어남. 하곡 정운룡에게 수학하고 우계 성혼과 사계 김장생에게서 수학, 1603년에 문과급제. 1617년에 광해군 폭정을 피해 백암산 자하동에 은거함. 정홍명, 김지남, 장경세, 성혼, 김상헌, 권필 등과 교유함. 그의 문집 자하집은 초간본 미상이고 1898년에 간행함. 부10, 사1, 시 수백편이 전함. 잡저로 치재총화(耻齋叢話)가 있음.
김우급(金友伋)(1574~1643) 호는 추담(秋潭) 본관은 광산. 광해군 폐모시에 진사로서 생어모자 불의응차(生於母者不宜鷹此)를 내걸고 귀향한 문학자로 모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으로 추담선생집이 전한다.
김여옥(金汝鈺)(1596~1662) 호는 미산(薇山) 본관 광산. 우급의 아들. 1624년 식년문과에 급제. 예조 병조좌랑, 지평 사간 등을 지내고 1649년 한성부윤이 되고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황해도, 충청도, 관찰사, 형조참판을 지냈다. 병화와 화재로 시문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4) 백양사와 불교문학
백양사는 내장사와 선운사 등 많은 사찰을 말사로 거느린 유명한 사찰이다. 따라서 승려들이 지은 게송, 선시, 종교적인 깨달음을 기록한 글, 큰 스님들의 일생과 일화를 기록한 글, 수많은 신도들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수많은 유학자들이 산사에서 공부하였고 전국의 유명한 문인들이 방문하여 시문을 남겼다. 스님과 유학자들이 주고받은 시문도 많았다. 현재 쌍계루에 유명한 시인들의 시가 걸려 있다. 이러한 백양사 문학권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앞으로 이에 대한 자료발굴과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김재수)
(장성군청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