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세겜 집회와 그 결과(르호보암, 남1, 922-915년)
다윗 때에는 다윗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이스라엘 장로들이 헤브론으로 다윗을 찾아갔다(삼하 5:1-3). 그러나 르호보암은 왕권 문제를 타결하기 위하여 북부 세겜으로 갔다. 이것은 아마도 북부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1. 세겜 집회의 구성원
서로 다른 두 집단을 대표하는 목소리들의 “현안에 대응하기 위한” 모임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의 통치 하에 들어가서 솔로몬 때까지 계속해서 통치되었던 므깃도, 디르사, 세겜 등과 같은 오래된 성읍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특히 세겜은 유서 깊은 전통과 대단한 긍지를 지닌 중요한 성읍이었다(삿 8:30-35; 수 24장
왕정시대 이전에 이스라엘이 세겜에서 제의 활동을 함). 또한 북부 구릉지대의 씨족들, 지파들, 작은 촌락들인 옛 에브라임/이스라엘 지파의 구성원들이 르호보암을 만났을 것으로 추정됨. 즉 옛 에브라임/이스라엘은 세겜 같은 큰 성읍들과 연합함으로써 르호보암에게 저항하였다. 이 외에 다른 여러 집단의 대표자들이 널리 참여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2. 북부의 탈퇴
세겜 집회에 모인 자들은 솔로몬의 가혹한 정책들을 바꾸어 달라고 요구했으나 르호보암은 거절하였다.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왕상 12:14). 그리하여 이들은 반역의 목청을 다시 드높였다.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왕상 12:16/ 삼하 20:1 참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르호보암은 아도람(다윗 시대에 강제노역을 담당하던 책임자[?])을 파견했으나 돌로 쳐 죽였고, 르호보암은 병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다(왕상 12:17-18).
3. 베냐민 지파의 역할
예루살렘 북쪽의 구릉지대에 거주하였던 베냐민 사람들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중간에 끼이게 되었다. 왕상 12:21에 의하면 적어도 일부 베냐민 사람들은 르호보암에게 계속해서 충성을 바쳤다. 북이스라엘이 쳐들어 올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피해를 입었다.
4. 반란에 가담한 여로보암(북1, 922-901년; 왕상 11:26-12:33)
1) 히브리 판본
여로보암은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는 솔로몬 관리-왕을 대적함-그 후 아히야를 만나 그 자신이 왕이 될 것을 예언 받음(아히야는 여로보암 옷을 찢어 12조각 중 10조각을 주는 상징적 행동을 하면서 예언)-솔로몬이 죽이려 하자 이집트의 왕 시삭에게 피신함-솔로몬이 죽자 돌아와 세겜 집회에 참석.
2) 헬라어 판본
히브리 판본을 되풀이 한 후 다음을 추가함: 여로보암은 ‘사리라’라는 창녀의 아들이며
요셉 족속의 노역부대를 감독하는 솔로몬의 “채찍을 든 관장”이었던 그는 사리라(=스레다) 성을 건축함
300이 병거 소유하고 예루살렘의 지하수로를 축조하고
이집트 왕 시삭에게 도망함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사촌 누이와 결혼하여 아비아(아비야)라는 아들을 낳음
솔로몬이 죽자 사리라로 돌아와 그 것을 요새화함
그의 아들이 병이 들자, 여로보암의 아내는 실로의 선지자 아히야를 찾았는데 그 때 아히야가 여로보암 가문의 운명을 알려줌
세겜에 지파를 소집한 것은 여로보암이었음
세겜 집회에서 르호보암과 협상이 시작되기 전 선지자 스마야(아히야가 아님)가 새 옷을 12조각으로 찢어 그 중 10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줌.
IV. 두 왕국의 차이
1. 영토의 크기 및 국력
열왕기상하와 역대기하를 평범하게 읽어보면, 우리는 두 왕국은 크기와 국력이 비슷하고, 남 유다가 강국이었으며 북 이스라엘은 단지 떨어져나간 조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정반대였다.
1) 영토에 있어서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샤론 평지, 이스르엘 평지, 갈릴리, 북부 트랜스요르단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중해와 바로 통할 수 있었고, 페니키아 및 다메섹과 긴밀하게 교통할 수 있었으며, 트랜스 요르단을 통과하는 남북으로 난 교역로를 관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교통의 관문들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국제무역으로부터 유다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얻어낼 수 있었다. 따라서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있었으므로, 북왕국에는 꽤 큰 규모의 성읍들이 더 많이 있었다.
2) 군사력에 있어서 북왕국이 떨어져 나가자 남왕국의 르호보암이 북부 영토를 되찾으려는 즉각적인 조치를 섣불리 취할 수 없었는데 이것은 그 둘의 군사력을 짐작케 한다.
2. 북왕국의 불안정한 정세
북왕국 이스라엘은 격동의 정치사를 보여준다. 왕들 중 7명이 암살되었고(왕을 참칭한 시므리까지 합하면 8명), 왕이 암살될 때마다 매번 왕조가 바뀌었다.
이유
1) 여러 다양한 종족들이 북 왕국을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 보다 잡다한 종족들, 그들 각자의 고유한 제의 장소들, 이해관계, 자부심을 지닌 이러한 성읍들은 구릉지대, 트랜스요르단, 갈릴리의 작은 촌락들과 나란히 공존하고 있었다.
2) 북 이스라엘은 시리아-팔레스타인의 주 교역로에 있었기 때문에 교역로를 장악하고자 하는 다른 나라들로부터의 군사적 압력을 비롯하여 외부의 영향에 쉽게 노출되어 있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강대국들이 충돌하게 되면 유다보다도 북 이스라엘이 국제정치의 소용돌이에 속에 더 휘말려 들어갔다.
3) 왕조신학이 존재하지 않았다. 즉 여로보암을 필두로 각 왕가는 그 선대의 왕들의 왕조에 근거한 권리 주장을 거부함으로써 집권하였기 때문에 왕조신학을 형성하지 못했다.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왕조 사상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왕조 원칙 또는 적어도 어느 특정 왕조에 대한 강력한 충성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4) 선지자들의 활발한 정치참여: 선지자들은 북 왕국 역사에서 “왕을 실각시키는 자”와 “왕을 만드는 자”로서의 독특한 역할을 했고 이러한 역할은 결국 왕조를 전복시키는 끊임없는 원천이 되었다.
V. 두 왕국간의 40년에 걸친 적대관계
분열 왕국 시대의 처음 40년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서로를 적대하던 시기였다. 이 적대감은 주로 베냐민 영토에서 벌어진 여러 차례의 국경 분쟁으로 나타났다. 이 동안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주변 나라들에게 영토를 빼앗겼다.
1. 유다왕(르호보암, 아비얌, 아사)
1) 르호보암(남1, 922-915년): 41세에 왕이 됨
▶암몬 여인 나아마의 아들
▶17년 통치(왕상 14:21)
▶이집트의 시삭이 침공
▶여로보암과의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음
▶역대기는 다음의 기사를 더함-르호보암이 15곳의 “방비하는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함(대하 11:5-12)
▶르호보암이 지은 “방비를 위한 성읍들”은 왕국의 접경지대가 아니라 남부 구릉지대 전체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기에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지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줌
▶르호보암이 “그의 모든 아들을 유다와 베냐민의 온 땅 모든 견고한 성읍들에 흩어 살게 하고 양식을 후히 주고 아내를 많이 구하여 주었다”(대하 11:23). 이것은 북부의 반란과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남부 구릉지대에 대한 다윗-예루살렘 진영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자 한 르호보암의 조치였을 것이다.
2) 아비얌(남2, 915-913년; 역대기에서는 아비야/왕상 15:1-8; 대하 13:1-21))
▶열왕기상의 기록: 3년을 통치함
▶어머니는 마아가(아비살롬의 딸)
▶역대하의 기록: 어머니는 미가야(기브아 사람 우리엘의 딸)
▶여로보암 군대 80만 명중 50만 명을 죽임
▶벧엘, 여사나, 에브론을 빼앗음
▶14명의 아내와, 22명의 아들과 6명의 딸을 낳음.
3) 아사(남 3): 41년 통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행함(왕상 15:11-15; 대하 14;2)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그녀에게서 대비의 지휘를 폐함
▶종교개혁을 단행함: 성전의 창기를 없앰, 선왕이 만든 온갖 우상을 제거함그러나 지방의 산당들을 폐하지 않음(왕상 15:14a)
▶노년에 아사는 발에 병이 들어 죽음
▶역대기사가의 기록: 35년간 아사는 종교 개혁자로 묘사됨(대하 14-15장)
▶마지막 6년 동안 아사는 악한 왕이 되었고 그의 통치는 부패해졌다. 전환점은 재위 제36년에 아사가 이스라엘(바아사)을 치기 위하여 시리아의 벤하닷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건이었다(왕상 15:16-22; 대하 16:1-10)
▶연대기적 문제: 왕상 16장 8절에 보면 유다의 아사 왕 제26년에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디르사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즉 바아사는 아사 왕 제 26년에 죽었다. 그런데 역대하 16장 1절에 보면 “아사 왕 제36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 두 구절은 연대상의 문제가 있다.
***결국 역대기사가가 아사 시대의 모든 부정적인 측면들을 그의 재위 말기에 배치함으로써 이 모든 일들이 오랜 성공적인 치세 후에 왕이 노년에 야훼에게 신실치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이스라엘 왕(여로보암, 나답, 바아사, 엘라)
역대기 사가는 남왕국의 왕과 관련된 경우 외에는 4명의 왕을 언급하지 않음
신명기 사가는 부정적으로 4명의 왕을 언급함.
1) 여로보암(북1, 922-901년)의 제의 개혁
▶벧엘과 단에 송아지 상을 세움
▶몇몇 북부 성소에 새로운 제사장들을 임명함
▶종교력을 수정함
▶“레위인”이 아닌 제사장들을 임명함(왕상 12:31)-친 다윗 성향의 제사장들을 몰아냄을 의미.
여로보암과 아론의 유사성(출 32장; 레 10장; 왕상 12장)
1) 둘 다 황금 송아지를 세움.
2) 자기들이 예배하는 신이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으로부터 이끌어낸 분이라고 선포3) 아들들의 이름들이 비슷-나답, 아비후(아론의 아들)/ 나답, 아비야(여로보암의 아들)
***이렇게 부정적으로 그들을 묘사한 이유는 아마도 사독과 레위 제사장 계열의 이익을 대변하는 남부 예루살렘의 제의 진영에서 저술했기 때문이다.
2) 이스라엘의 정치 생활: 여로보암-나답
바아사-엘라: 여로보암은 세겜에 거하였다가 후에 거기로부터 나와 브누엘을 건설하였다(왕상 12:25). 그러나 디르사가 실질적인 도읍지였다(왕상 14:17). 여로보암(북1; 22년 통치)과 바아사(북3; 24년 통치)는 왕위를 찬탈한 자들이고, 그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북2)과 그리고 바아사의 아들 엘라(북4)는 왕위 세습을 통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곧 암살되었고 그들의 가족들도 몰살당하였다.
여로보암은 실로의 아히야에 의해 왕으로 지명되었다가 나중에는 그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바아사도 처음에는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의 지지를 받았다가 나중에는 그에게 탄핵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3) 시삭의 침공(왕상 14:25-28; 대하 12:1-12): 르호보암(남1)과 여로보암(북1)의 재위 제5년에 이집트의 제22왕조 파라오 시삭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했다. 성경 기사에 따르면, 르호보암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것 같다.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성전의 보물과 왕국의 보물을 모두 다 빼앗고 또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를 다 빼앗은지라.”(왕상 14:25-26). 사실 역대기사가는 시삭의 침공을 르호보암의 배교에 대한 징벌로 보았고 스마야 선지자는 르호보암에게 항복하라고 권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삭의 침공은 자신의 위업을 세우고 전리품을 획득하며 아라비아 교역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단행된 전쟁이었던 듯하다.
4) 두 왕국간의 적대행위들: “르호보암(남1)과 여로보암(북1)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왕상 14:30)는 것은 두 왕국 간에 변경 지역-벧엘과 예루살렘 사이의 애매하게 정해진 지역-에서 국지전들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비얌(남2)과 여로보암(북1) 사이에 전쟁-유다의 압도적인 승리(대하 13장). 아사(남3)와 바아사(북3) 사이의 전쟁-다메섹 왕 벤하닷의 가세: 바아사가 전쟁을 일으키고서는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라마(오늘날의 er-Ram)를 요새화하였다.
그러자 아사는 벤하닷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에 압박을 가해달라고 요청하자 벤하닷은 이를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아사는 그들을 물리치고 라마의 건축자재들을 철거하여 미스바와 게바를 요새화하였다.
다윗과 솔로몬의 그늘 아래에서 계속해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던 블레셋은 이제 끊임없는 위협세력으로 재등장한다. 성경의 본문 두 곳에서는 블레셋 접경지대의 깁브돈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에 전쟁들이 있었다고 말한다(왕상 15:27; 16:5).
*나답(북2): 2년 통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함/ 깁브돈에서 바아사에게 살해됨/ 온 집이 멸망당함.
*바아사(북3): 디르사에서 왕이 됨/ 24년 통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함/ 예후가 온 집이 멸망당할 것을 예언함.
*살룸(북4): 2년 통치/ 왕궁 맡은 자 아르사의 집에서 마시고 취할 때에 시므리에게 살해당함/ 온 집이 멸망당함.
*시므리(북5): 7일 동안 통치함/ 깁브돈에서 전쟁하던 군인들이 시므리가 왕이 되었음을 듣고 오므리를 왕으로 삼음/ 오므리가 시므리가 있는 디르사를 에워쌈/ 성읍이 함락되자 왕궁에 불을 지르고 자살함/ 여로보암의 길로 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