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1
고추장에 새콤달콤하게 국수를 비벼서 점심이라고 먹고 있는데 아들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배 고플텐데... 간식 먹으라는 간섭을 하고는 다시 돌아와서 마저 먹으려니 식탁 위에 있던 그릇이 깜쪽같이 없어졌다. 내가 어디에다 갔다 놓았을까? 아들을 맞이한 후 다닌 발자국을 짚어봤다. 현관 앞을 둘러봐도 없고 소파 옆 테이블에도 없고 냉장고에 넣었나 뒤져봐도 없다. 입 속에는 아직도 달콤한 국수 맛이 남아 더 들어오라고 성화인데 도대체 내가 어디에다 두었을까. 할 수 없이 찾기를 포기했다. 손을 씻으려고 싱크대로 갔더니 국수 한 가락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운 그릇이 물 속에 담겨 있다.
건망증 II
쇠고기 국을 끓이면서 파를 가지러 차고에 있는 냉장고로 나갔다.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내가 뭘 가지러 나왔는지 생각이 안났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할 수없이 도로 나와 국냄비를 보니 파 생각이 났다. 다시 냉장고로 나가 파를 꺼내는데 윗칸에 낯선 비닐 보따리가 하나 있다. 만져보니 뭔가 물컹 잡히는게 음식 보따리 같다. 음식점에서 먹고 남은 걸 가져온 건가? 암만 생각해도 기억이 없다. 하여튼 뭔가 들여다보자 하고 부엌으로 갖고와서 펴보니, 며칠 전 넣어둔 한약 보따리다.
건망증 III
총각 김치가 맛있게 잘 익었다. 고슬고슬한 밥이랑 같이 먹으니 젓가락이 자꾸만 그곳으로 가는데. 같이 먹던 아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왜? 눈으로 물으니 엄마 옆에 있는 접시를 좀 보라고 한다. 내려다 보니 그 곳에는 한번씩 베어 먹히고 버림받은(?) 총각 김치 서너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본다.
건망증 IV
아이들을 태우고 맥도널드 햄버거를 사러 갔다. Drive Through 입구에서 주문을 하고 돈 내는 창구로 가서 돈을 내었다. 그러고는 음식 받는 창구를 쌩하고 지나쳤다. 집으로 향해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들리는 아이들의 급한 고함 소리. 고개를 돌렸더니 눈이 동그래진 두 아이가 손까지 마구 휘저으며 외쳤다. "엄마, 햄버거는? 엄마아아~~"
건망증 V
아침에 일어나서 음식을 하기 전 손을 씻고는 부엌 타올에 닦는데.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만지려고 하니 손을 씻었는지 생각이 안난다. 씻어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 타올을 만져보니 촉촉히 젖어있다. 방금 손을 닦았나 보다. 그러니까 손은? 씻은거지!
건망증 VI,
아들 고등 학교 PSAT(학부모, 학생, 교사 모임) 월간지 기획 기사로 새로 부임 하신 교장 선생님 인터뷰를 Dell하고 Cherie 한테 부탁했다. 그런데 Dell은 다른 원고도 하나 게재한터라, 몇 페이지 안되는 신문에 한 사람 이름이 많이 난다 싶었다. 인쇄 넘어가기 전에 Dell 이름을 지웠다. 신문이 나오기 하루 전, 갑자기 Dell 이름이 아니고 Cherie 이름을 지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큰일 났다' Cherie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Dell 이름을 지운다는게 너 이름을 지운 것 같으니 부디 내 실수를 양해해 달라고 울상을 지었다. CHerie는 별것도 아닌걸 갖고 걱정을 하냐고 도리어 나를 위로해주었다. 며칠 후 신문을 보니 거기에는 Cherie 이름만 나와있다. Cherie가 막 웃으면서 전화를 주었다. "제인, 너 비타민 C 좀 먹어봐. 비타민 C는 머리를 맑게 해준다더라."
건망증 VII
마켓을 다녀 와서 정리를 하다 보면 매번 빠진 게 한 두 개씩 나온다. 아차! 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던 남편이 할 일과 물건 살 명세서를 메모해서 다니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좋은 생각이다 싶어 메모는 하는데 막상 외출할 때는 또 메모지를 잊어버리고 그냥 나간다. 탁자 위에 두어도 보고, 차 열쇠 옆에 두어도 보았지만 번번히 열쇠만 들고 나온다. 잊어버리지 않고 들고 나갈 방법이 없을 까? 연구하다 보니 신발이 떠올랐다. 신발 속에 넣어두면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겠지.
오늘 외출 하려다 보니 신발 속에 웬 휴지 조각이 있다. 남의 신발 속에 누가 이렇게 휴지를? 집어서 휙 던져버리고 나왔다.
건망증 VIII
오랜만에 네 커플이 모여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재작년에 스키 여행 다녀온 후로 처음 만나는 모임이다. 모두들 게으른 탓에 연락도 없이 지내다가 애매한 나에게 주선하라고 성화를 해서 이리저리 전화를 해댔다. 한 집에 전화해서 적당한 시간 물어 또 다음 집에 전화하고. 모두들 무슨 약속이 그리도 많은지, 이 집이 오케이면 저 집이 노우. 며칠을 씨름해서 겨우 오늘(일요일) 오후 다섯 시에 모이기로 하고 다시 한번 확인 전화를 모두에게 해 주었다. 오늘, 교회에서 늦게까지 일하다가 보니 시계가 4시 50분. 남편은 아직도 맡은 재정부 일이 끝이 안 났다. 시간을 정확히 잘 지키는 사람들인데,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우리가 지각 할 수 없지 싶어 내가 선발대로 먼저 가겠다고 했더니 남편이 깜짝 놀란다. " 5시 30분 약속인데 벌써 가?" "무슨 소리? 5시 약속인데. 당신도 빨랑 끝내고 오소." 급히 달려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 커플이 와 있다. 세 사람이 앉아서 이런 저런 수다를 떨고 있는데 10분, 20분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곧 나 타나겠지 목을 빼고 기다리니 정확히 5시 30분에 한 커플이 나타났다. 자기들은 약속이 5시 30분인 줄 알았단다. 모두들 나를 보고 씨익 웃는다. 나도 나를 보고 웃었다. (50대쟎아. 이 정도야 보통이지.) 5분쯤 지나자 남편도 왔다. 그런데 제일 모범생 부부가 아직도 소식이 없다. 혹시나 하고 전화를 걸었더니 샤핑몰을 헤매고 있단다. 오늘 약속 연락을 못 받았단다. 정확한 시간 결정해서 다시 알려주겠다 해놓고는 전화가 없어서 안 모이는 줄 알았대나. 나는 분명히 연락을 했는데------ 40분이 지나 허겁지겁 달려온 친구. 나를 보고 눈을 흘기는데 억울하지만 연락했다고 빡빡 우길 자신이 없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한번 다시 짚어보았다. 8명이 모이는데, 3명은 5시에, 3명은 5시 30분에, 2명은 아예 약속도 안한 것으로. 도대체 어떻게 연락을 했길래 이런 결과가 나오는걸까? 그것도 우리 집은 부부가 다른 시각으로.
건망증 IX
A라는 친구에게 볼 일이 있어서 메시지를 남겼다. 그런데 암만 기다려도 연락이 없다. 다시 전화 걸어서 왜 연락이 없냐고 다그쳤다. 친구는 깜짝 놀라며 전화 받은 적이 없단다. 내가 메시지를 남겼다니까 전혀 메시지도 전화 번호도 없더라며 도로 나를 나무란다. 워낙 완강하니까 내가 전화를 걸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든다. 나의 착각으로 치부해버리긴 메세지 남긴 기억이 너무 선명하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 요즘은 빨리 꼬리를 내려야지. 저녁 무렵 B라는 친구 한테서 전화가 왔다. “와하하, 너 정말 웃긴다. 왜 A한테 하는 메시지를 우리 집에 남겼냐?”
건망증 X
세탁소에 남편 양복을 찾으러 갔는데 주인이 없다고 한다. 2 주일 전에 맡긴 양복이 없을리가 있냐며 잘 찾아보라고 다그쳤다. 내가 찾아간 것 아니냐며 주인은 도로 나보고 집에 가서 잘 찾아보란다. 집에 있는 양복을 내가 왜 찾으러 왔겠느냐며 내가 또 툴툴대며 한 마디 했다. 주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옷이 걸린 도르래를 돌린다. 그리고는 공장으로 전화를 하더니 내일 다시 한번 오란다. 자기가 공장에 직접 가서 찾아보겠다고. 다음 날 아침부터 찾아갔다. 양복이 세 벌이니 그것이 모두 없어지면 올 봄에는 남편이 뭘 입나 걱정이다. 세탁소 주인은 나를 보자마자 얼굴이 벌개지며 암만 찾아도 없더란다. 내가 분명히 찾아갔거나 맡기지 않은 것이란다. 늘 다니던 단골집이라 영수증을 챙기지 않은 게 내 실수다 싶어 더 따지지도 못하고 그냥 나왔다. 그래도 그렇지 미안하단 말 한마디 정도는 있어야지. 주인이 너무 당당한 게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다시는 이 집에 오지 않으리라 단단히 결심하고 돌아서 나왔다. 저녁에 아들이 새로 산 코트를 세탁소에서 고쳤다며 들고 들어왔다. 코트 고치는 값이 만만치 않을텐데 돈을 어떻게 지불했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나중에 지불하기로 하고 왔단다. 깜짝 놀라서 도로 물었다. “세탁소 주인이 너를 어떻게 알고 엄마가 나중에 올 때까지 기다려준대?” “엄마가 맡긴 아빠 양복이 세 벌이나 있던데? 그것 찾을 때 같이 돈 내라고---” “우잉?” 단골 세탁소 주인이 바뀐 이 후로 세탁물이 전처럼 깨끗하지가 않아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다 하고 기웃거리다가 한 블록 떨어져있는 가게에도 가끔 가곤 했는데. 잃어버렸던 남편의 양복은 그 집에 있었다. 단골 세탁소 주인 얼굴을 어찌 볼 까 걱정이다.
건망증 XI, XII ------ 셀 수도 없이 많은데.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건망증과 치매의 차이는, 뒤에 아하! 그랬지 하고 생각이 나면 건망증이고, 그런 기억조차 없다면 치매라고. 어떤 건 기억이 나고 어떤 건 기억이 안나니 나는 지금 어떤 수준인지 모르겠다. (2008년 글)
첫댓글 읽는 내내 재미있었어요. 누구나 한번쯤 겪는 일인데 선생님의 모습을 그려보니 더 재미가 쏠쏠했답니다.
새콤달콤한 국수를 찾는 모습, 한 입 베어물린 총각김치를 두고 또 집아든 총각김치,햄버거를 잊고 달리는 차 안의 모습이 제일
압권이었어요.아, 신발속의 휴지를 휙 던지는 선생님은 귀여웠구요. 서로 다른 시간에 모인 친구들.A에게 남길 메세지를 B에게 남긴 얘기,양복 세 벌의 헤프닝등 재미있게 읽었어요. 제가 진단하기로는 건망증이니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치매라뇨. 안되요. ㅎㅎㅎ
공감하며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어요. 정말로 위로가 됩니다.🤣👏제가 요즈음 치매에 관한 글을 아주 많이 읽고 있어요. 너무 의심스러울 때가 많아서 음식 신경쓰고, 잠도 열심히 자려고 애쓰고 있답니다. 그런데 운동은 아직도 시작이 안되네요. 운동 일기를 써야될까 봅니다😢
배를 잡고 웃으며 읽었어요. 공감 ! 또 공감 ! 근데 난 그 정도는 아니라고 시치미떼려고 했는데 잘 안 돼요. 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