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그가… 왔다
철륵도맹(哲勒圖盟).
신강(新疆)의 광활한 고원(高原)지역을 말한다.
삭풍(朔風)이 휘몰아치는 그 곳, 웅자(雄姿)를 과시하고 있는 하나의 정봉(頂峯)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아 있다.
오소특산(烏蘇特山).
거인(巨人)의 산이다. 명부(溟府)를 지배하는 십왕(十王)이 거기 머물러 있다는 전설이 있다.
산의 능선에는 만 년 내내 녹지 않았다는 빙하(氷河)가 펼쳐져 있다.
콰르르르릉-!
산의 능선에는 늘 뇌정(雷霆)의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가파른 산세는 비비의 등정도 허용하지 않을 듯 험준하다.
산상에서 흘러내리는 설하(雪河)는 거대한 계곡을 삽시간에 눈에 파묻어 버리기도 하였으며, 깊이를 알지 못할 골짜기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바람 소리는 귀곡성(鬼哭聲)을 방불케 한다.
눈(雪)과 바람(風), 그리고 인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웅휘로운 산세.
빙하지대로 들어서기 이전의 능선(陵線)은 갈대의 바다였다.
지극히 큰 키의 갈대들, 다른 곳의 갈대에 비해 빛이 붉으며 몹시 억센 줄기가 일자로 뻗어 나가고 있다.
과거 백만대군이 싸우다가 능선에서 전사하였으며, 그들의 시신에서 흘러 나온 선혈이 대지를 붉게 적시었기 때문에… 그 후, 그 곳에서 자라나는 갈대는 피에 찌든 듯 붉어졌다던가?
새벽이었다. 사방의 계곡에서 자욱한 안개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안개는 곧 무엇에 쫓기듯 서둘러 사라져 버린다.
우르르르릉-!
수천 마리 사자(獅子)가 동시에 울부짖고 있다.
아아, 그것은 바람 소리.
북서무림계의 청년들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기 위해 산에 와서 그 바람 소리를 듣곤 하였다.
보라! 두 개의 거벽이 십 장 사이를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것을.
두 개의 벽은 찰나적으로 허물어질 듯 위태스러워 보였다.
그 사이의 협도(狹道)는 짙은 안개에 젖어 있었다.
그 곳은 바로 새북의 전설이 시작된 곳이다.
삼백 년 이전, 한 명의 위대한 무사(武士)가 그 곳에서 태어났었다.
그는 무림제일인이 되는 것을 꿈꿨으며, 한 자루 검을 등에 떠멘 채 천하방랑의 길을 시작했다.
그는 열세 살 때 그 곳을 떠났다.
그는 오십다섯 살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되돌아왔는데, 그 사이 그는 이십구만 리(二十九萬里)를 종횡하면서 강호계의 무수한 강적들과 싸웠었다.
처음에는 이름 없는 소년낭인(少年浪人)으로, 청년시절에는 피끓는 투혼의 도전자로, 장년이 되어서는 무패(無敗)의 전사로서……!
싸우고, 또 싸우고…….
그는 반생(半生)을 혈로(血路)에서 지내 왔다.
그는 가전의 검법을 터득한 후 만천하의 강자들과 수십 년에 걸쳐 격돌하였으며… 그 사이 다리 하나와 팔 하나, 그리고 눈 하나를 잃게 되었다.
그는 이천여 번 싸웠으며, 천사백 번 지고 육백여 번 이겼다.
그러나 그가 겪은 패배는 대부분이 그의 소년, 청년시절에 경험한 것이며… 그의 나이 이십오 세가 되어서부터 그는 누구와 싸워도 꺾이지를 않았다.
잠룡추(潛龍鎚).
북서맹의 시조(始祖)이다.
그는 천하각지의 검도(劍道)를 모조리 격파하는 신화를 이룩하였으며, 새북무림계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새북무림을 이끌 무가(武家)를 이룩하였는 바, 사람들은 그 가문을 북천잠룡무가(北天潛龍武家)라고 추앙하기 주저하지 않았다.
절세검황(絶世劍皇) 잠룡추(潛龍鎚).
그는 삼백 년 전, 자신의 나이 육십 때에 돌연 봉검(封劍)을 선언하였으며… 각처에서 모인 제자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 검로무한(劍路無限)! 노부는 이제 노부의 검이 완벽(完璧)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검을 꺾는 것이다!
실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검신(劍神)의 경지에 돌입한 노검호(老劍豪)가 자신의 검이 부족하다며, 봉검을 선언하다니?
- 검의 길에는 끝이 없다. 그 말을 잊지 마라. 그 말을 잊고 발호한다면, 천추(千秋)에 한(恨)이 되리라.
그는 그러한 말을 남기고 은거했다.
그가 은거한 장소가 바로 잠룡곡(潛龍谷)이다.
깊이를 모르는 무저정(無底井)이 곳곳에 놓여 있으며, 원초(原初)의 늪지가 십 리 넘게 펼쳐져 있기에… 금수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곳이다.
절세검황 잠룡추는 자신의 가문에서 신으로 불리었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모든 것을 버리고 무림을 떠난 것이다.
결국 그는 그러한 일로 인해 진짜 신이 될 수 있었다.
후대인들은 그의 이름을 잊지 못했으며, 그의 자손들은 그의 후광 아래 대를 이어 새북무림을 지배할 수 있었다.
절세검황 잠룡추, 그가 은거한 장소는 이전부터 완전한 절지(絶地)였다.
그가 들어간 다음, 그 곳은 불회지처(不回之處)로 변모되었다.
후대사람 가운데 누구도 거기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곳에 간 자는 누구도 살아 나오지 못한다는 전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가 왜 은거해야만 했는지, 그리고 은거하며 어떠한 심득(心得)을 얻었는지는 세월의 숙제로 남아 있었다.
십이월의 새벽은 차가운 바람과 더불어 시작된다.
산은 높고, 하늘은 더 높은 곳에 푸른 유리벽으로 펼쳐져 있다.
잠룡곡 일대에는 벌써 여러 날째 삼엄한 진세가 펼쳐져 있었다.
곳곳에 기관이 설치되었고, 수백 명의 무사들이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하나씩의 단궁(短弓)을 지니고 있었으며, 화살 다섯 개가 꽂혀 있는 전통(箭筒)을 허리에 차고 있다.
무사들의 복장은 하나같이 일정했다. 검은 옷자락에 검은 편립(篇笠), 얼굴은 검은 수건으로 가리고 있다.
흑건(黑巾)에는 하나의 곤충이 그려져 있었다.
핏빛 날개를 가진 나비.
아아, 그것은 그들이 새북무림계에서 가장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무사라는 것을 입증하는 표식이 아니겠는가?
새북의 청년이라면 누구든 가입하고 싶어하는 집단이 있다.
하나 그 집단은 일천 명의 무사만 필요로 하는지라, 바란다고 해서 거기 가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북천잠룡무가(北天潛龍武家), 예하(隷下) 호접살각(蝴蝶殺閣).
죽음의 나비들이 머무는 곳이다.
가장 빠르고, 가장 강한 자들만이 거기 머물 수 있다.
새북무림계의 십삼 개 거대방파 사람들이 가장 무섭게 생각하는 대상이 바로 호접살각의 무사들이었다.
원한다면 어떠한 방파이든 하루 만에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세력, 호접살각.
그 곳은 한 명의 고독자(孤獨者)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백의(白衣), 밀납처럼 창백한 얼굴…….
느낌이 없는 눈빛을 가진 인물이 하나 있다.
그는 능선 쪽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수백 무사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대세의 판단에 뛰어난 사람이다. 그가 여기 올 확률은 거의 없다.'
대기가 차갑다.
황량하고 거친 광야와 능선.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살풍경에 불과할 것이나, 그 곳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정겨운 풍광(風光)이다.
'오면…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호접일랑 사몽, 그는 여러 날째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위대한 영웅. 그가 함정에 빠져 최후를 마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나도 무사(武士)이며, 그를 존경하기에…….'
사몽의 눈빛은 쓸쓸해졌다.
'맹주는 사이(邪異)한 무리에 뒤덮여 있다. 특히, 옥수위혼루주(玉手慰魂樓主)는 북서맹의 대권을 노리고 있는 자다. 한데, 맹주는 잠룡풍 선주(先主)의 복수에 눈이 멀어 판단을 그르치고 있는 것이다.'
사몽은 보름 전, 중원에서 돌아왔다.
그는 한 아이와 함께 왔으며, 그 아이는 현재 신전(神殿)이라 불리는 곳에 머물러 있다.
사몽은 아이를 그 곳에 맡긴 후 호접살각의 수하들과 더불어 잠룡곡으로 왔으며, 이제까지 잠룡곡 어귀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호접일랑 사몽, 그는 무공연마에 일생을 전념해 온 고독한 무사이다. 그의 무심안(無心眼)은 바로 그 완벽한 수업의 산물이다.
그는 오로지 무공 한 가지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그는 일생의 거의 대부분을 잠룡무가의 번영을 위해 헌신해 왔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고뇌 따위는 하지 않았었다. 한데, 그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중원에서 돌아온 다음, 그의 무심안에 금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왜일까? 무색의 인간 사몽이 인간적 번뇌의 빛을 띠는 까닭은?
그가 흐릿한 눈길을 능선 쪽으로 돌릴 때였다. 문득, 그의 시선 속으로 무엇인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
그는 그답지 않게 충격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가볍게 벌렸다.
저 먼 곳, 하나의 금빛 물체가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가공할 속도로 산음(山陰) 속으로 내려앉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그리고 한순간, 향전(響箭) 하나가 휘파람 소리를 끌며 허공으로 떠오른다.
피이이이잉-!
긴급신호.
누군가 나타났다는 신호이다.
그리고 또 한 발의 향전 소리가 긴박하게 울려 퍼진다.
피이이이잉-!
나타난 자는 일 리(一里)를 치달려 잠룡곡을 향해 오고 있었다.
일대에 숨어 있던 호접살각의 무사들은 잠입자가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향전을 화살에 매겨 쏘아 보내는 것이다.
피이이잉- 피이이잉-!
향전이 잇따라 쏘아졌다.
누군가 왔다.
사몽, 그의 어깨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다가서고 있다. 으으, 중원과 변황을 통틀어 이렇게 빠른 경공술을 지닌 사람은 하나에 불과하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다! 그가 왔다!'
그의 눈길은 잠룡곡으로 접어드는 통로 쪽으로 돌리어졌다.
스르릇-!
하나의 헌칠한 인영(人影)이 둥둥 떠서 미끄러지듯이 잠룡곡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이다.
심연처럼 가라앉은 눈빛, 무뚝뚝해 보이는 아래턱.
그는 팔짱을 낀 채 잠룡곡을 향해 직선을 그으며 다가섰다.
그는 사몽이 머물러 있는 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서고 있었다.
사몽이 그를 봤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이미 눈앞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기(氣), 실로 무서운 기운이 다가섰다.
태산이 이동하듯 거대한 기운이 사몽의 몸을 압박하기 시작하였으며, 사몽은 신음 소리를 흘리며 저도 모르게 네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역시… 그다.'
사몽의 얼굴이 조금 시꺼매졌다.
마음(心)이 없다고 알려진 무정객(無情客), 모든 종류의 고통을 이겨 낸다는 철의 정신력을 지닌 암살자이었으나… 지금 그를 덮쳐 오는 힘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주춤주춤거리다가 몸을 바로잡았다.
그 사이, 상대는 사몽으로부터 이 장 떨어진 곳까지 다가섰다.
사실, 사몽은 그에 비해 키가 한 치 더 크다.
전체적인 체격을 따진다면, 사몽이 보다 강인해 보이는 편이다.
하나, 사몽은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신비로운 기세에 휘말려 뒤쪽으로 주춤주춤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벽(巨壁)이다. 강철로 만들어진 만리장성과 같은…….'
사몽은 상대의 정신적인 위세에 휘말려 들고 말았다.
기실, 그가 상대를 거대하게 느끼는 것만 하더라도 그가 절대적인 고수라는 증거일 것이다.
용(龍)이어야 용을 알아본다.
사몽이기에 상대의 힘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상대에게서 어떠한 기세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천천히 다가선 자.
"……!"
힘이 있는 눈빛이면서도 매우 맑다.
그는 사몽을 천천히 바라보았으며, 입술을 가볍게 떼었다.
"귀하가 호접일랑 사몽이겠군?"
"그렇소!"
사몽은 저도 모르게 포권(抱拳)을 취했다.
잠룡세가의 직계자손에게만 포권을 취하는 오만한 무도인(武道人) 사몽. 하나, 그는 내심에서 우러난 포권지례를 취하고 마는 것이다.
"귀하가 나를 불렀는가?"
차분히 말하는 청년. 그의 눈을 정면으로 대하는 사람은 그의 깊이를 모를 눈빛에 영혼이 빨려들게 된 나머지, 주체하지 못할 망연함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그렇소이다."
사몽은 칼날을 디디고 선 듯한 긴박감에 사로잡혔다.
"소군(少君)은?"
"무사하오."
"좋아……."
고개를 끄덕이는 청년, 그는 단신으로 새북의 중심지로 날아든 풍운아였다.
바로 혜성옥수 낭옥비, 그가 단신으로 북서맹 안에 들어선 것이다.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지?"
낭옥비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사몽은 낭옥비의 위세에 휘말려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맹주는 총표파자가 올 경우, 이것을 전하라 하셨소!"
사몽은 허리를 숙였다가 품에서 배첩 한 장을 꺼냈다.
그는 그것을 감히 내던지지 못하고 낭옥비 쪽으로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낭옥비는 천천히 팔짱을 푼 다음, 오른손으로 배첩을 거머쥐었다.
배첩은 반 접힌 상태였다가 그의 긴 손가락에 의해 펼쳐졌다.
<너의 아이는 무사할 것이다. 권위를 걸고 보장하겠다.
철혈검후(鐵血劍侯), 그대는 나의 혈족을 쓰러뜨렸다.
대세에 따른 싸움 결과라 하나, 나는 용서할 수 없다.
잠룡곡의 저주로 그대를 심판하겠다!>
낭옥비가 글을 읽었을 때.
"맹주는 가법(家法)을 엄수하시는 분이시오. 가법에 따른다면, 정당한 싸움에 의한 죽음에는 복수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소."
"흠, 무가다운 가법이로군."
"그렇소이다."
"……."
"그러하기에, 이런 계획을 꾸민 것이오."
사몽은 천천히 무릎을 땅에 대었다.
그는 두 손바닥으로 흙은 거머쥐며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시기 바라오. 귀하가 바란다면, 지금 귀하 손에 죽겠소."
"천만에. 귀하는 한 가문의 충성스러운 가신(家臣)일 뿐이지. 귀하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아……!"
사몽의 입이 가볍게 벌어졌다.
그런데 진정 놀라운 말소리가 그의 영혼을 흔들었다.
"가서, 이화라는 여인에게 전해 주기 바라네."
"무엇을?"
"나를 기다리라고!"
"아……!"
"꼭 전하게. 내가 갈 테니, 기다리라고!"
낭옥비는 단호하게 말한 다음,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잠룡곡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그 곳에는 살인기관(殺人機關)이 무수히 배치되어 있다.
낭옥비는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곳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순간, 사몽은 고개를 번쩍 쳐들며 소리쳤다.
"들어가시면… 나오실 수 없소이다."
"글쎄……."
낭옥비는 보다 빠르게 움직였으며, 그의 뒷모습은 거의 찰나적으로 흑무에 감추어졌다.
사몽은 그 순간, 가슴이 텅 비는 듯한 허전함을 맛봤다.
그는 또다시 흙은 거머쥐며 중얼거렸다.
"그대가 죽는다면, 나는 대륙의 큰 죄인일 것이오. 그대는 악마의 파도를 막아 내는 마지막 방벽이었는데… 나로 인해 쓰러지게 되는 것이니!"
그는 몹시 고독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의 가슴 속에는 그가 아주 오래 전부터 결심하고 있는 하나의 맹세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바람이 차갑다. 그 바람에 사몽의 옷자락이 흩날렸다.
* * *
너무나도 화려한 신전(神殿)이다.
북극지존상(北極至尊像)이 안치되어 있으며, 아름드리 기둥 열여섯 개가 빙천장(氷天障)을 우람한 기세로 떠받치고 있다.
바닥도 얼음이며 벽도 얼음이다. 그리고 신전 내부의 집기는 얼음과 구분이 되지 않는 천년빙옥석(千年氷玉石)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 곳은 바로 북서맹주가 기거하는 곳이다.
한 여인, 그녀는 푹신한 태사의(太獅椅)에 몸을 파묻고 있다.
여우털 조끼를 걸치고 있으며, 그 아래 연분홍색 궁장을 걸치고 있다.
머리는 황홀하게 틀어 올리고 있으며 신비로운 보석이 머리카락을 장식하고 있다.
머리카락은 밝은 갈색이었으며, 눈빛에는 파란빛이 강하다.
피부빛은 유난히도 희어 눈과 비교해도 오히려 흴 정도였다.
지극히 냉요(冷妖)해 보이는 여인의 무릎 위에는 아이 하나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아이는 까만 옷을 걸치고 있으며, 몹시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드넓은 신전에 오직 두 사람이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러하기에, 신전은 지극히 넓고 고독한 장소로 여겨졌다.
하나, 보이지 않는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호흡 소리와 맥박 소리마저 감춘 채 은신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자객이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은신해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나타나 자객을 척살해 버릴 것이다.
'귀엽군. 내게 이런 아가가 있기를 소원했는데…….'
여인은 손가락으로 아이의 뺨을 매만졌다.
손길은 몹시 따사로웠다.
'정을 느끼어서는 아니 되는데, 이 아이에게 정을 느끼다니….'
이화(梨花), 바로 북서맹의 여신이다. 잠룡풍의 누이동생이며 북천잠룡무가 제일의 고수이다.
그녀는 북풍혈번(北風血幡)을 쳐들고 중원을 짓밟다가 혜성옥수의 철혈십구로에 분쇄된 가문의 원한을 풀기 위해 북서맹을 구축했다.
천하에서 가장 고독한 여인, 그녀의 인생 태반은 고독하고 차디찬 연공관(練功關) 안에서 이루어졌다.
남자도 모르며 가족의 따뜻한 정도 모른다. 한데, 그녀는 소군(少君)이라고 불리우는 아이에게 애틋한 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 아이를 이리도 훌륭하게 기른 사람은 위대한 정신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화의 눈빛은 아주 맑았다. 그녀를 가까이에서 섬기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뜻밖에도 잔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낭옥비, 그는 위대한 남자이다. 그와 적이 되었다는 것은 비극이다.'
이화의 생각이 거기에 이를 때.
슷-!
갑자기 하얀 그림자 하나가 신전 안으로 날아 내렸다.
그는 지극히 먼 거리에서 단 한 번에 몸을 날려 자신이 서야 할 위치에 정확하게 내려선 것이다.
그의 경공술은 이화를 능가하는 북설비행술(北雪飛行術).
먼 거리에서 날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호접일랑(蝴蝶一郞) 사몽(死夢).
감정의 변화를 타인에게 알려 주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이화의 증조부가 거둬들인 사람으로, 그 때부터 지금까지 북천잠룡무가를 보필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 날따라 상당히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잠룡곡 안으로 들어간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호접일랑은 장읍(長揖)한 채 말했다.
"으음, 단신으로 왔는가?"
이화의 눈빛이 흐트러졌다.
"그렇습니다. 그는 혼자 왔습니다. 예상보다 지극히 빨리 도착했습니다. 그는 거대한 쌍두룡(雙頭龍)을 타고 날아 내렸습니다."
"……."
"그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잠룡곡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 곳에 살인기관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곳으로 접어든 것입니다. 곧, 맹주를 찾겠다고 맹세하면서! 하나, 그는 죽었을 것입니다."
사몽은 그렇게 말하며 힐끗 고개를 쳐들었다.
순간, 이화는 사몽의 눈빛이 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몽은 노충신(老忠臣)으로, 어렸을 때부터 이화는 그에게 의지해 왔다.
그는 늘 이화를 위해 일하고 피를 흘렸으며, 이화에 대해 회의적인 표정을 지어 본 바가 없다.
그러나 지금 그가 짓는 표정은 조금 달랐다. 그는 이화에 대해 회의하는 눈빛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속하, 가주(家主)에게 한 가지 청을 드리고자 여기 왔습니다. 그것은 이제 속하가 속하를 어렸을 때부터 거두어 주셨던 북천잠룡무가에 맹세한 백년충성(百年忠誠)의 시간이 끝났기에, 가주의 증조부되시는 분이 제게 약속해 준 자유의 시간이 되었으니… 속하를 자유롭게 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알고 있소, 사몽. 그러나… 그대를 잃고 싶지 않소. 나흘 후, 북서십삼풍(北西十三風)의 대회합이 벌어질 것이오. 나는 그 자리에서 사몽을 부맹주(副盟主)로 선포할 예정이오."
북서십삼풍, 그들은 바로 북서맹의 주역들이다.
북풍마각(北風魔閣),
천마살혼각(天魔殺魂閣),
귀전추혼사(鬼箭追魂社),
옥수위혼루(玉手慰魂樓),
잠마사천(潛魔死天),
잔풍겁찰(殘風劫刹),
표풍진혼부(飄風鎭魂府),
백골마혼령(白骨魔魂令),
혈화수혼루(血花搜魂樓),
묵검철각(墨劍鐵閣),
사검야혼궁(死劍夜魂宮),
마검환환궁(魔劍幻幻宮),
금시벽천부(金翅劈天府).
이상의 십삼 개 세력을 일컬어 북서십삼풍이라 일컫는다.
이화는 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북서맹주로 정식 추대받은 다음, 중원침공을 선언할 예정이었다.
또한 그녀는 그 자리에서 가문의 백년충신인 호접일랑 사몽을 북서맹의 부맹주로 정식 선포할 예정이었다.
사실, 사몽은 이제 자유의 몸이다.
그는 잠룡무가에 백 년 충성하기로 맹세하였고, 백 년 간 충성했다. 이제는 자유롭게 떠나도 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떠나갈 곳이 없기에, 북서맹에 남도록 권유를 하는 것이다.
이화는 그가 떠나지 않는다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나흘 후의 회합은 새북(塞北) 사상 가장 위대한 회합일 것이오. 오랫동안 묻혀 지냈던 호접일랑은 그 자리에서 위대한 영웅으로 탄생하게 될 것이오."
이화가 맹주다운 어조로 말할 때, 호접일랑 사몽은 백 년 만에 처음으로 항명(抗命)의 말을 시작했다.
"결심은 굳어졌습니다."
"아……!"
"떠날 것입니다."
"어디로 간단 말이오, 호접일랑?"
"중원(中原)에 가겠습니다. 가서 할 일이 있습니다. 아마도… 저는 일을 하며 죽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이기에?"
"저는 누구도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 지금 제 가슴에는 한 명의 영웅(英雄)이 있습니다. 저는 그를 위해 일생을 바칠 작정입니다. 다시 말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끝마치는 것으로 일생을 마감할 작정입니다."
"그, 그가 누구이기에?"
이화의 눈썹이 찌푸려질 때.
"그는 저로 인해 죽게 된 혜성옥수(彗星玉手)입니다."
호접일랑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낭옥비를 죽게 한 장본인인데, 낭옥비의 뜻을 잇기 위해 중원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일단, 그의 유해를 수습할 생각입니다. 그 다음, 소군… 저 아이를 소주(少主)로 섬길 것이며, 소군을 안고 중원으로 갈 작정입니다."
"으음, 그럼… 북서맹과 싸울 것을 각오했단 말이오?"
이화의 눈에서 살광(殺光)이 뿜어져 나왔다.
"북서맹은 불의(不義)한 일을 하고자 합니다. 속하, 대세를 가름 짓지 못할 입장이 못 되는지라 드릴 말씀이 없으되… 개인적인 생각대로 할 경우, 혜성옥수의 뒤를 이어 척마멸사의 대업을 이행할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말이었다.
사몽은 북서맹과의 일전마저 서슴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화의 사지가 가늘게 떨렸으며, 근처에 매복해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살기를 일으켰다.
사몽은 살기가 자신을 향해 다가선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실, 그를 잡을 사람은 이 안에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바였다.
"저를 용서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제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 제가 백 년 간 보필하였던 가문과 싸우는 일이라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사몽은 천천히 절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 번에 걸쳐 절을 하였으며, 그 사이 이화의 손길은 천천히 쳐들렸다.
츠으으으-!
이화의 손에서 빙살강기(氷煞强氣)가 뿜어져 나와, 마치 얼음으로 깎은 검 한 자루가 손에 쥐어진 듯 보였다.
사몽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입술을 떼었다.
"지금 저를 죽이시겠다면… 저항하지 않고 죽겠습니다."
"사몽, 마음을 바꾸지 못하겠단 말인가?"
"무사는 자신의 신념(信念)에 따라 움직일 때, 가장 강해집니다. 속하를 이해해 주십시오."
사몽은 힐끗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빛은 무정안(無情眼)으로 정평이 난 눈이다. 하나, 지금 그의 눈빛은 다분히 인간적이었다.
어쩌면 그 눈빛은, 그가 백 년 간 잃어버리고 있던 그 자신의 눈빛일지도 모른다.
이화가 지금 그를 죽이려 한다면, 그는 저항 없이 죽을 것이다.
한데, 이화는 그를 향해 손을 후려치지 못하고 있었다.
파르르…….
희디흰 손길이 가늘게 떨리기만 할 뿐, 그녀의 손에서 살수가 펼쳐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눈길을 회피해 버리며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다시는 내 눈에 뜨이지 않기를 바란다."
"……!"
"다시 보게 되는 찰나, 내 손에 죽으리라."
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으며, 뒤돌아보지 않고 침소 쪽으로 걸어갔다.
사몽은 천천히 절을 마쳤으며, 순간 한 줄기 흰 연기로 화해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밖에는 폭설(暴雪)이 심하다. 사몽은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북서맹을 이탈한 것이다.
이화는 천천히 걸으며 소군을 꼬옥 안았다.
'사몽… 역시 용감한 사람이다. 그대는…….'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대를 존경한다. 하나의 무부(武夫)로서!'
그녀의 뒷모습은 몹시 고독하게 보였다.
이화의 눈길은 소군의 얼굴에 떨어져 내렸다.
'이 아이를 중원으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으음, 사몽은 어떻게든 이 아이를 훔쳐 갈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다!'
이화는 뺨을 내려 소군의 뺨에 부볐다.
지금 이화의 눈빛도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이 아이의 얼굴은 가가(哥哥)와 많이 닮았다. 그러하기에, 정이 더욱 간다!'
그녀는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부터인가 소군이라는 아이는 그녀에게 지극히 귀중한 존재로 화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