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난세돌입(亂世突入)
석여령과 독고자강은 잠곡에 머물러 있었다.
그 날 비룡단에서의 일 이후로 두 사람은 내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슬그머니 잠룡단으로 합류를 해 버린 것이었다.
그에 대한 석여령의 변(變)은, 혹시 있을지 모를 비룡단이나 여타 이전(二殿)의 세력들과의 우발적인 재충돌을 막기 위한 안전판과 완충재로서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잠시간 머물다 어느 정도 상황이 안정되면 돌아간다는 전제가 있긴 하였다.
그들 두 사람의 입곡(入谷)에 대해 고대릉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허종 등 잠룡단의 사람들 역시도 모른 척하며 은근 슬쩍 그들 두 사람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사실 잠룡단의 입장에서는 석여령의 그 같은 뜻에 대해 감지덕지는 몰라도, 굳이 마다할 이유까지는 없기도 한 것이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환영의 뜻을 보인 것은 등평이었다.
등평은 좋은 위치의 석굴 두 개를 비우고 깨끗이 청소하여 두 사람에게 내 주었고, 또한 그들이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히 신경을 써 주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석여령과 독고자강을 대하는 등평의 얼굴에서는 꽤나 자주 싱글거리는 웃음기를 볼 수 있었다.
흑요는 며칠 동안이나 자신의 석굴에서 나오지를 않고 있었다.
그 날, 그녀가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그녀는 완전히 의식을 되찾기도 전에, 먼저 자신의 내부에서 벌어진 변화에 대해서부터 적응을 하여야만 했다.
그것은 엄청난 뇌기(雷氣)였다.
자신의 몸이 과연 이토록 엄청난 기운을 수용할 수 있을까 두려워 질 정도로 막대한 뇌기가 그녀의 전신 혈맥 속을 마치 장강(長江)의 격류처럼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아! 분뢰자전마공이다.'
경악 속에 흑요는 내심으로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지만, 그녀로서도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그 속에 깃 들어 있는 저주까지는 알지 못하였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에게 분뢰자전마공은 도저히 넘지 못할 벽이며, 또한 결코 이루지 못할 무공이었다.
다만 사부께서 마지막으로 남겨 주고 가신 정표로서의 상징적으로만 의미가 있던 무공이었다.
따라서 굳이 애써 익히려 하지 않았고, 또한 익히려 한다고 해도 실제적으로 익힐 방법도 없었던 무용지물의 무공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잠시 의식을 잃고 있던 동안에 믿을 수 없게도 그 무공의 성취가 저절로 극성의 경지에 근접해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십성의 화후는 넘어섰다.'
익히지는 못하였으되, 그 요결과 이치에 대해서는 이미 완숙하게 통해 있던 그녀였기에, 그녀는 대번에 자신의 성취정도를 그렇게 평가할 수 있었다.
'아아! 참으로 엄청나다. 사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분뢰자전마공의 성취가 극에 이른다면, 가히 여인천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리라 장담하시더니... 그 때는 다만 농으로만 듣고 넘겼더니, 과연 이 장대한 뇌기의 흐름은 가히 공포스러울 정도가 아닌가?'
흑요는 진정 두려운 마음으로 가만히 뇌기를 움직여 보았다.
순간 그녀의 몸속에서 은은한 뇌성이 일었다.
우르르!
비록 그녀는 느끼지 못하였지만, 그 뇌성은 그녀의 몸속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은은히 석굴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아아!"
마침내 흑요에게서 신음과도 같은 탄식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진한 두려움이 여지없이 배어있는 탄식성이었다.
그녀의 운기(運氣) 시도에 따라 뇌기는 다만 한 차례 미세하게 꿈틀하였을 뿐인데, 그녀는 순간 마치 자신의 몸이 금방이라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 듯, 혹은 단번에 한 줌 재로 변하고 말 듯한 공포를 느끼고 말았던 것이었다.
실로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뇌기였다.
그러나 그녀의 공포심은 단순한 공포심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표현조차 못할 극렬한 희열이었다.
그녀는 다시 운기를 시도하였다.
이번에는 마치 갓난아기를 다루듯 조심조심 기를 움직였다.
우르르르르!
순간 그녀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마치 기분 좋은 게으름과도 같이 뇌기가 움직이는 소리를.
이어 그녀는 몇 차례 더 뇌기를 혈맥으로 돌리다가, 이윽고는 몸 바깥으로 뿜어냈다.
우르르르릉!
귓전에 부딪쳐 오는 미약하지만 선명한 뇌음을 들으면서 그녀는 다시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된다.'
내보내고자 하니, 뇌기는 부드럽게 스며 나가듯이 전신모공을 통해 바깥으로 분출 되었다.
그리고 다시 거두어들이고자 하니, 뇌기는 산들거리는 미풍처럼 상쾌한 느낌으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기적과도 같이 놀라운 성취에 대해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전력으로 운용할 때에는 또 어떤 어려움과 난관에 부딪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일단 스스로의 의지대로 뇌기를 방출하고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이제 이후의 과제는 다만 익숙하도록 숙련시키는 과정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아!"
지극한 희열을 담은 탄성이 다시금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녀 또한 무공을 익힌 무인의 한 사람으로서 감히 바라보기조차 힘들었던 경지를 단번에 넘어선 데 대해, 순간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의 지극한 쾌감과 희열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감격도 잠시였다.
흑요는 문득 한 가지의 사실을 깨닫고는 이내 깊은 충격과 절망 속으로 빠져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분뢰자전마공의 놀라운 성취에 대한 희열과 감격에서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의 몸가짐과 주변환경에 대해 살펴보게 되었는데, 그녀가 맨 처음으로 선명하게 인식한 사실은, 자신의 몸이 나신이라는 사실이었다.
비록 두 벌의 장삼이 그녀의 몸을 덮고 있긴 했지만, 그 안으로는 자신의 몸을 가린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가슴을 동여매고 있던 천과 은밀한 부위를 가리고 있던 내의까지도.
그리고 황망한 중에도 흑요는 그 두 벌의 장삼 중 하나가 바로 고대릉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그녀가 늘 다루어 오던 옷이었기에.
"아!"
흑요의 입에서 절로 절망이 가득 담긴 탄식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충의 정황을 짐작하건대 아마도 자신을 구한 사람은 고대릉일 것이었다.
또한 고대릉의 구함을 받기 이전에 자신은 이미 어떤 치욕을 당했음이 분명했다.
그 치욕이란 곧 순결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조금 전의 운기 과정에서 그녀는 이미 자신의 몸을 살펴본 바 있기에, 자신이 처녀를 잃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의 순결이 어찌 처녀성에만 국한되랴.
그녀의 어렴풋한 기억 속으로 자신의 가슴과 회음부를 더듬던 손길 하나가 악몽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으드득!"
문득 떠오르는 기이한 눈빛 하나에 흑요는 자신도 모르게 세차게 이빨을 갈아 부치고 말았다.
부지불식간에 전신에 소름이 돋게 하던 처절한 살기와 적대감에 가득 찬 눈빛, 분명 상대의 존재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상대의 그 기이한 눈빛 외에 다른 것은 전혀 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흑요는 자신을 더럽힌 자가, 바로 그 기이한 눈빛과 변변히 저항해 볼 틈조차 주지 않고 단숨에 자신을 제압해버렸던 그 불가사의한 무공의 인물이라고 확신 하였다.
'놈! 반드시 네 놈을 찾아내어 천참만륙(千斬萬戮)을 내고야 말리라.'
그러나 그녀는 이내 처참한 심정에 빠져 들고 말았다.
'아아! 그러나 나는 이제 가주님의 얼굴을 어떻게 뵐 것인가?'
그러나 그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녀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그 손길의 주인이 바로 고대릉이었다는 것을.
그 때, 그녀가 잠깐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왔던 때는 바로 고대릉이 그녀의 가슴 한 가운데 단중혈과, 비처의 회음혈을 양손으로 누르고서 그녀 내부의 들끓는 기혈을 안돈시키는 중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고대릉을 바라볼 자격을 잃었다 여긴 흑요는 무한한 상심 속에서 며칠간이나 석굴 밖으로 나오지를 않고 있었다.
그 사이 등평과 고대릉이 두어 차례씩 그녀의 석굴을 찾았으나, 그녀는 누구와도 만나기를 거절하였다.
마침 그 때 그녀의 석굴을 찾아 온 것은 바로 석여령이었다.
사실 두 사람은 한때 언니 동생으로 지낼 만큼 친근한 사이였었는데, 고대릉이 석여령에 대해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면서부터 무영가의 예호원주로서 그의 분신과도 같은 흑요 또한 석여령과는 어색하고도 서먹한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자신을 찾아 준 석여령에 대해 흑요는 문득 착잡하고도 미묘한 심정을 느끼게 되었다.
흑요에게서 이전보다도 오히려 더욱 친밀한 감정을 느끼기는 석여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특이한 친밀감은 아마도 두 여인이 모두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는 터라, 누군가의 위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리고 과연 두 여인은 다만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위로를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그러한 위로가 무엇으로부터 기인되는 것인지는 두 여인 모두가 알지 못했지만.
다만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의 대상이 되는 묘하게 든든한 느낌과, 혹은 일종의 설명하기 어려운 의리를 느끼게 되는 그런 비슷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혹시 그녀들은 서로의 아픔이 무슨 사연에 의한 것인지 자세히 알지 못했으나, 같은 여인으로서, 여인의 직감으로서 서로가 비슷한 처지임을 짐작하고 동병상련의 정과 측은지심을 느끼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석여령은 흑요가 실종되었다가 비룡단의 지하석실에서 발견된 사연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여 같은 여인된 입장으로서 그녀의 심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석여령은 흑요의 마음의 상처가 단순히 순결을 손상당하고 안하고 하는 것을 넘어서, 일생의 염원이자 존재의 이유와도 같았던 고대릉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는 데까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석여령의 조심스럽고도 진심 어린 위로는 흑요에게 하나의 결심을 굳히게 해주었다.
그것은 바로 석여령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결심이었다.
흑요는 자신을 대신하여 석여령이 고대릉과 맺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 것이었다.
'그래! 나는 이제부터 무영가의 예호원주로서의 직무에만 충실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예호원주로서, 아니 그 전에 노가주님과 장백산의 마님께서 나를 가주님의 배필로 인정해 주셨던 만큼, 이제 내가 그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가주님께 새로운 인연을 이어 드릴 책임과 의무가 당연히 내게 있는 것이다.'
고대릉이 비록 지금은 애써 석여령에게서 멀어지고자 하고 있지만, 그래서 냉정한 무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 석여령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동경이 여전히 숨어 있다는 것을 흑요는 알고 있었다.
석여령 역시도 애써 내색하려 하지 않고 있지만, 고대릉의 무관심에 대해 깊은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흑요는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와 괴로움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석여령의 마음 속에서 고대릉이란 존재가 얼마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일 터였다.
비록 아직까지 석여령 스스로는 자신의 마음 속에 고대릉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깊게 각인이 되어 있는지에 대해 명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이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사실 그런 남녀 간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에 대해서는 비록 나이 어렸으나 석여령에 비해서는 흑요가 오히려 훨씬 더 성숙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흑요가 성장기에 접어들기 이전부터 그런 쪽의 교육을 받았으며, 또한 좋고 나쁜 쪽의 다양한 환경들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러한 배경에는 그녀를 완벽한 무영가의 안주인으로 키우려던 홍걸의 안배와 욕심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야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막상 한 여인으로서 그녀 스스로에 관해서는 흑요는 역시 아직까지 어쩔 수 없이 여리고 순진한 어린 소녀에 불과하였다.
다만 그녀는 이번에 겪었던 일을 계기로 고대릉과의 인연에 대해서 더 이상 당사자가 아닌 객관적인 입장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 바 있기에, 그리고 그녀가 고대릉을 향해 가지고 있던 열망을 포기하였기에, 대신 고대릉과 석여령이 맺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 생겼기에, 그녀는 석여령의 입장에 대해 보다 깊이, 그리고 따뜻하게 살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두 여인의 사이는 과거에 비할 수 없이 살뜰하고도 애틋하게 변하였다.
하긴 사람사이의 관계라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친밀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특히 여자들끼리의 관계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남녀간의 내밀한 정에 대해 서로 간에 따뜻한 교감을 나눌 수 있다면, 세상에서 그 보다 더 친밀한 사이가 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흑요와의 그러한 솔직하고도 따뜻한 관계가 상당부분 자신을 위주로 한 일방적인 관계라는 것에 대해 석여령은 미처 알지 못하였다.
다만 자신의 심중에 대해 그토록 따뜻하게, 또 진심 어린 마음으로 대해주는 흑요에 대해 석여령은 때때로 자신이 언니가 아니라, 흑요야말로 언니로 불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사고(思考)의 전반적 부분들에서 석여령은 흑요에 비해 좀 더 깊은 연륜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에 석여령 그녀가 안고 있는 마음의 상처는 너무나 크고 깊어서 그녀 혼자서는 쉬이 감싸 안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 마침 흑요의 진심 어린 배려에서 커다란 위로를 받을 수 있었기에, 그만큼 흑요의 존재가 커 보인 것이었다.
사실 흑요와 서로 마음을 나누고 위로하는 그런 과정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석여령은 자신의 마음속 상처에 대해 그 실체를 짐작하는 데만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석여령은 이제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왜 아픈지,
그리고 그 아픔을 치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지금에 와서야 홀연히 깨달은 바였지만, 그녀의 상처는 바로 그녀 자신의 문제로부터 기인한 상처였다.
'아아! 모든 것이 나의 이기주의와 철없는 오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 때의 나는 너무나 철이 없었다. 나는 그를 위한다고 하였지만, 기실 그것은 할아버지와 무황성, 그리고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하는 이기심이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그 철없는 생각들과 행동들은 그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겠는가? 아아! 참으로 원망스러운 것은 내가 처량한 처지가 된 지금에야 그러한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아픈 자책과 함께, 석여령은 지금의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새삼 처량해지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벌써 반 년 여가 넘도록 조부인 무황의 근황과 안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알아 볼 방법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무황성의 모든 것은 이전(二殿)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 당하고 있었고, 성의 수뇌부 중에서는 무황의 유일한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호천단주 경천일검(驚天一劍) 마초홍(馬草紅) 역시도 무황과 함께 종적이 묘연한 상태였다.
다만 그녀가 들을 수 있었던 말은 무황이 자신의 지하 연공실에서 기한을 정하지 않고 폐관수련에 들었으며, 스스로 폐관을 깨지 않는 이상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자신의 부재기간 중 성주의 권한을 창룡전주인 위지천에게 전적으로 위임했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막상 확인할 수 방법은 전혀 없었다.
연공실로의 접근은 철저히 차단되었고, 심지어는 내성 바깥으로의 출입도 통제와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사람들의 인심도 급변하였다.
독고자강 외에는 누구도 그녀에 대해 예전만큼의 성의를 가지고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이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그와 같이 각박한 세상의 인심에 대해 석여령은 원망스러운 마음을 아주 가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의 소외였고, 또한 무기력함이었다. 무엇인가 하기는 해야 하는데, 막상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는 그런 무기력함.
그러던 중에 며칠 전의 비룡단과 잠룡단의 충돌사태는 그녀에게 하나의 계기로 다가왔다.
그녀에게 있어 그것은 탈출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차단된 상태로 내성에 갇혀 있느니, 차라리 맨몸으로나마 바깥으로 나아가 좀 더 넓고 새로운 시각으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아야, 어떤 나아갈 방향이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여기에까지 와 있는 것이었다.
석여령은 문득 나지막한 한숨을 불어 내쉬었다.
'휴우!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오랜 세월이 걸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그를 지켜보며 기다리는 일뿐이다. 그가 나로 인해 아팠던 만큼, 나 또한 아픔을 당하고 겪으면서 기다릴 수밖에. 아아! 그래도 지금처럼 바로 곁에서 그를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다음날 아침 흑요는 석굴을 나섰다.
당당히 어깨를 편 그녀는 여걸다운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비해서 한결 성숙된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석여령이 서 있었다.
그런데 흑요의 당당함에 비교가 되어서 그런 것인지, 석여령에게서는 왠지 조심스럽고도 다소곳한 모습이 느껴졌다.
싱긋이 웃는 얼굴로 그들 두 여인을 보고 있던 등평은 문득 눈빛에 약간의 이채를 떠 올렸다.
흑요에게서 은연중에 나타나는,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석여령의 입장을 배려해주려는 기색이 자못 특이하게 느껴진 때문이었다.
독고자강은 고대릉이 자신과 마주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독고자강 역시도 고대릉에 대해 한 가닥 미안한 마음을 무거운 짐처럼 가슴 속에다 담아 두고 있는 터였다.
평소의 독고자강은 지나칠 정도로 직선적인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감정의 앙금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서 풀려고 시도를 할 만큼 원활한 성격은 결코 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만 언제나 그랬듯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음으로써, 언젠가 고대릉 쪽에서 자신에게로 다가와 주기를 바라는 쪽을 택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멀찍이 주변에서 고대릉을 지켜보던 중 어느 때부터인가 독고자강은 한 가지 묘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뭐랄까, 다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거리감이 느껴진 달까, 대하기 어려운 일종의 묘한 격(格)이 느껴진 달까.
여하간 그것은 이전의 고대릉에게서는 느껴 보지 못했던 어색하고도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고, 또한 면모였다.
고대릉이 주는 그러한 느낌과 면모는 독고자강에게 참으로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런 것들은 고대릉이 잠룡단의 단주라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지도 모른다고 독고자강은 생각했다.
고대릉에게 그토록 자연스러운 우두머리로서의 모습이 있으리라고는, 독고자강은 지금까지 상상에서라도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에 알았던 고대릉은 다만 순박하고 순후한 심성을 가진 어린 소년이었다.
물론 이후에 그는 무공에 대한 열정과 놀라운 성취를 보여 주었고, 또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자신의 주관을 뚜렷이 세워 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었다.
하지만 독고자강은 그러한 모습들에 대해 다만 고대릉이 소년에서 청년으로 커가는 과정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몇 달 안 본 사이에 고대릉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정말 믿을 수 없게도, 독고자강은 어느 순간 자신의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하나의 모호한 열망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스물일곱 평생 동안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하고 지내 왔던 그의 또 다른 내면세계에 꽁꽁 숨어 있던 열망이었다.
'아아! 그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해주고 싶다. 아니 그를 위해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라도 내게는 더할 수 없는 보람이 될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아직까지 무어라고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다만 모호하기 만한 열망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독고자강의 가슴 속은 이내 그 스스로도 이해 못할 순간의 격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를 위한 일이라면, 나는 어쩌면 내 목숨마저도 흔쾌히 바칠 수 있을 것만 같다.'
생각이 그러한 데까지 거침없이 치닫는 순간, 독고자강은 문득 미망에서 깨어나듯 흠칫 놀라고 말았다.
'왜...? 나는 왜 대릉 아우에 대해 이런 생각까지를 하게 된 것일까?'
물론 독고자강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이미 있기는 하였다.
바로 무황과 석여령이었다.
그들 두 사람이야말로 자신에게 평생 다 갚지 못할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이고, 또한 자신이 사내로서의 순정을 바친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스스로가 납득할만한 어떠한 충분한 이유나 명분도 없이 불현듯 고대릉을 위해서도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록 자신과 고대릉은 의형제를 맺은 사이이긴 하였으나, 다만 그 이유만으로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은, 아무래도 스스로를 납득시키기에는 뭔가 미진한 점이 있었다.
독고자강은 다시금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이미 자신의 의문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어렴풋한 답이라는 것은 가슴으로는 벌써부터 인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머리로는 여전히 그 답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독고자강에게 고대릉이라는 존재는 짧은 시간 동안 참으로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그 면모를 변화시켜 왔었다.
처음에 고대릉은 궁핍한 처지에 처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자(弱者)로서, 그리고 동정의 대상으로서 독고자강에게 다가왔었다.
그러나 이후에 점차 고대릉에 대해 알아 가게 되면서, 독고자강은 고대릉이 가진 순후한 심성과 무공에 대한 그 신비롭기까지 한 놀라운 가능성을 알게 되었고, 그 가능성을 살려 주고, 또한 이끌어 주고 싶은 동생으로서 고대릉을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고대릉이 마침내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빛을 내기 시작하는 어느 순간부터, 독고자강은 그를 자신과 같은 사내로서 인정하게 되었다.
그랬기에 그의 순정을 바쳤으나 감히 욕심의 대상으로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지고지순의 여인, 석여령의 가장 바람직한 배필로서 고대릉을 생각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고대릉은 또 다시 일변(一變)한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영웅의 모습이었다.
독고자강, 그가 한때 되기를 꿈꾸었으나 세상을 알면서부터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존재.
또한 스스로는 되지 못하더라도, 자신을 감복(感服)시킬 누군가가 동시대의 세상에 있어 주기를 바랐던 그런 존재.
그러나 그러면서도 자신의 거칠고도 투쟁적인 기도를 포용할 수 있는 그러한 인물은 천하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던 바로 그런 영웅의 모습이었다.
'그런 것이었나? 지금 릉제에게서 느껴지는 풍모는 바로 내가 꿈꾸던 영웅으로서의 풍모였던가? 그래서 내가 이처럼 그에게 이끌리고 있는 것인가?'
독고자강에게 그것은 일종의 각성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그는 이제야 자신에게 힘이 필요한 이유를 진정으로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이전까지의 단순히 강해져야겠다는 욕구와는 완연히 다른 것이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었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힘을 키우는 것이 시급히 우선되어야 한다는 절실함이었다.
그것이 독고자강을 무적제왕공(無敵帝王功)의 수련에 매진하도록 만드는 강한 계기가 되었다.
기실 독고자강은 제왕류의 무공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를 하고 있었고, 또한 가슴에 사무칠 정도의 애착을 가져온 바 있었다.
그러니 제왕류의 단점을 보완한 제왕무적공의 비결은 벌써부터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취에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절실함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동안에도 익혀야겠다는 마음만은 절실한 것이었으나, 그 절실함은 독고자강이 자신의 청년기 대부분을 바쳐서 익혀 온 중검(重劍) 요결을 비롯한 실전무공들에 대해 이미 본능처럼 익숙해 있는 그의 감각과 관능(官能)까지를 진실로 절실하게 만들지는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뜻밖의 계기를 맞아 진실로 강해져야 할 필요성과 새로운 목표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최고로 강해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제왕무적공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무엇보다도 절실한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로부터 독고자강의 열정은 온통 제왕무적공으로만 채워지게 되었다.
제왕무적공이 무황이 공언한 최고의 무학인 만큼, 또한 독고자강이 이미 머리로 이해하고 있는 만큼, 그리고 그가 이 시대 최고의 재질을 지닌 후기지수 중의 한 명인만큼, 굳이 어떤 정형화된 수련의 방식을 택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 그 어떤 시간에도 생활과 수련을 병행하면 되는 일이었다.
독고자강은 원래부터 말 수가 극히 작은 인물인데다,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제왕무적공의 수련에 심혈을 기울이느라, 더욱 더 말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내들 간의 소통이란 것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진심이 있다면 마음으로 통하는 수가 있기도 한 것이다.
독고자강의 성정이 원래 지극히 강하고 독립적이며, 또한 자신을 적대시하는 상대에게는 지독히도 도전적인 기질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성정은 사실 잠룡단 본래의 특성과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바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비록 서로가 무뚝뚝하고 굳이 어울리려는 노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서로의 기질에서 하나씩 통하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독고자강은 진정한 잠룡단의 일원으로서 서서히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좌룡 및 우룡과는 제법 나이차가 남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기질 이외에도 고수자들 간에 가지는 특별한 공감까지 이루어진 터라, 어느 순간부터는 마치 친구나 형제와도 같이 친근하게 어울리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사이라는 것은 바깥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주로 내면으로 흐르는 일종의 교감과도 같은 감정의 흐름이었다.
한편 석여령에 대해서 잠룡단의 사람들은 다소간의 경외감을 가지는 것 같았고, 한편으로 은연중에 보호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모습들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할아버지인 무황의 후광이 주는 일종의 경외감 때문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무림 최고의 재녀(才女) 일가인(一佳人)으로서 그녀 스스로가 가지는 기품에 대해, 잠룡단의 사내들이 가지는 일종의 경외와 흠모의 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석여령과 독고자강은 잠룡단의 일원으로서 자리매김을 해 가고 있었다.
잠룡단은 그들 특유의 전략전술과 전투력을 연마하는데 총력으로 박차를 가해가고 있었다.
그들은 훈련에 대해서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그야말로 실전보다도 더욱 독한 투지와 열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비룡단을 상대로 한번 실전을 겪어 본 결과, 그들이 훈련하고 있는 전투방법과 전술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위력적인 지를 실감해본 까닭이었고, 또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잠룡단의 그런 모습에 대해서는 석여령과 독고자강도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독고자강은 점차로 소속감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씩 인식을 가져가고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는 무황성이라는 큰 소속과, 호천단이라는 보다 직접적인 조직에 소속이 되어왔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지금 잠룡단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것과는 많이 다른 개념의 소속감이라고 해야 했다.
동료라는 느낌, 자신이 그 조직의 일원이라는 느낌,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마음 편하고 든든한 그 느낌들은, 독고자강으로서는 처음으로 느껴 보는 아주 기분 좋은 느낌들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발적인 소속감으로, 그가 스스로 원해서 소속되는 느낌이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누구도 굳이 일부러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누구라도 분명하게 그리고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잠룡단의 단주 고대릉이었다.
독고자강에게 고대릉은 사적(私的)으로는 의제였으나, 지금 잠룡단의 일원으로서는 엄연한 단주였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해 독고자강은 이미 그다지 어색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