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 바가지 김규련
박완서 작가는 1985년에 이 작품을 썼다.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감정표현과 진실하고 솔직한 글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이제부터 이 작품의 스토리를 읽고 나의 독후감을 써본다.
친구 'K' 의 며느리가 손녀딸을 연거푸 두 명을 나아서 속이 상 하다는 이야기로 단편소설은 시작된다. 손자를 못 낳아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대가 끊기게 생겼다고 이제 막 해산 한 며느리 앞에서 같이 간 친구 ‘S’한테 흉을 본다.
지금은 딸을 선호하는 세상인데 세대 차이가 나는 작품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친구는 자기들의 마음을 스스럼없이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는 양 떠들고 있다.
친구 ‘S’은 네 명의 딸을 줄줄이 낳았어도, 천금 같은 손녀라고 귀하게 여기던 시어머니가 있어서 잘 길러 주었다. 그러던 시어머니가 치매가 와서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게 된다. 아들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모실 곳을 찾아 나선다. 노인들의 천국이라는 양로원을 소문만 듣고 포장도로도 안 된 길을 따라 암자가 있는 장소를 물색하러 헤맨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시골길을 부부는 타박타박 진땀이 날 정도로 걸었다. 찾으려던 양로원은 찾지도 못했다. 돌고 돌다가 어느 초가지붕 위에 널려있는 풍만하고 잘 생긴 바가지를 보고 옛날 해산할 때마다 그 바가지로 정성껏 간호해 주던 시어머니가 생각났다. 지금은 환자기 된 시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생기며 옛날 일이 주마등 같이 스쳐 지나간다.
30년 전 친구 S’은 신랑 될 사람이 과부의 외아들이었다. 친정에서는 전형적인 과부 외아들의 며느리들이 겪는 걱정으로 반대도 많았다. 그러나 과부 시어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어수룩한 모습이 싫지 않았다. 꼬치꼬치 따지는 친정어머니하고는 달랐다. 그녀는 한글도 완전히 해독하지 못했고, 겨우 언문만 깨쳤으나, 쓸 일이 자주 없어서 그나마 잊어버렸다. 거기다 지적인 호기심마저 없다보니, 유식하지도 않았다. 허지만 사랑 하나만은 확신 한 분이었다.
며느리가 2살 터울로 아이들을 다섯 명이나 나아도 소중한 내 손자라고 딸 아들 구별 없이 예뻐해 주고, 매일 밤 시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잤다. 밤이면 옆방에서 나지막하고, 그윽한 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자장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 금자동아, 은자동아, 금을 주면 너를 사랴, 은을 주면 너를 사랴, 자장자장 우리 아기 잘도잔다’
그 노랫소리가 얼마나 구수한지 옆방에서 듣고 있던 며느리도 잠이 오곤 했다.‘
세월이 흘러 손주를 다 기르고 시어머니가 일흔 고개를 넘으면서 고혈압에 걸리고 행동을 해괴망측하게 하였지만 아무도 의심을 않헀다. 또 갑자기 심장마비에 걸려서 병원에 갔다. 다행히도 생각보다 신속하게 회복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의 기억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달라진 시어머니는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럴 때마다 며느리는 진저리를 치면서 달아나기 일 수였다. 같은 말을 되풀이 하면서 따라다녔다. ‘
‘쌀 씻어 놓았냐? 저녁때가 다 되었다’
며느리는 또 다시 짜증이 나기 시작 했다. 곱게 난 망령이었지만 듣는 사람은 신경이 피로 했다. 사태는 점점 나빠졌다. 그럴 때는 며느리가 배은망덕하게 뒤에서 입술을 삐적 거렸었다.
어느 날 밤 옆방에서 자던 시어머니는 방문에 구멍을 뚫고 빤짝이는 눈으로 옆방을 보았다. 그 모습이 소름 끼치게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섬찟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아닌 밤중에 몇 년 동안 안 쓰고 마루 밑에 감추어 두었던 놋쇠 요강을 반짝반짝 닦아다 안방에 놓아 주었다. 밤에 멀리 있는 화장실에 나가기 싫어지면 아들은 그곳에 방뇨를 했다. 어머니는 그 일로 자기 아니면 안 되는 독재자처럼 잔인한 소망을 매일 밤 살찌워 갔다. 아범 옆에서 자겠다고 하며 새록새록 구실을 만들고, 망령 노릇도 새로워졌다. 내복을 바꾸어 입히려면 동네가 떠들썩하게 실갱이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본 파출부는 며느리를 무던한 효부라고 칭찬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파출부 아줌마랑 시어머니의 목욕을 시켰다. 그녀는 참았던 증오로 거칠게 함부로 다뤘다. 시어머니는 갓난아이처럼 울었다. 그럴수록 며느리는 모질게 때를 밀었다. 마치 바람 넣어 팽팽한 고무풍선을 터트릴 것 같이 말이다. 며느리도 정신과 치료가 필요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몸져누웠다. 보다 못한 남편이 어머니의 양로원을 찾아 나섰다가 해산 바가지를 본 순간 시어머니 에 대한 섭섭한 기분은 사라졌다. 며느리가 넷째도 딸을 낳고 병원서 울었을 때 어머니는 첫째 딸이나 넷째 딸이나 똑같이 사랑 해주고, 해산 간호를 해주었다. 생명에 대한 귀함을 의식 하고 사랑 해주던 어머니의 정성에 며느리는 죄책감을 느끼고, 어머니를 경건하게 간호 할 것을 마음먹는다.
이 글은 요즘 젊은이에게 경종이 되는 글이면 좋겠다. 시집이면 시금치도 먹기 싫어 한다는 개인주의적 와이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다, 샌드위치 세대에 태어난 우리는 밑에 사람으로 부터도 존경 받지 못 하는 ‘낀’세대로 황당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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