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문차숙의 시 세계
보편적 ‘삶’에서 인식하는 존재의 진실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시분과회장)
1. 그리운 ‘망각의 세월’과 ‘흔적’들
현대시의 위의(威儀)는 대체로 표현하는 언어에서나 주제의 설정 등에서 일상적으로 의식하면서 창조하는 자아(自我)에서 탐색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특징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정서의 발원(發源)은 그 시인의 주관(主觀-subject)이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심리현상을 살필 수가 있는데 이것은 창조의 주체인 시인의 자아나 시적 대상에 대해서 작용하는 내성적 내용 등을 말한다. 이처럼 모든 작품은 시인의 주관을 통해서 형상화한 것이어서 자아가 능동적이며 실천적인 의미의 주체(主體)와는 구분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 문차숙 시인의 제4시집 『별을 따다』를 일별하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주관이 강렬하게 그의 정서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서문’에서 ‘제3집에 이어 5년 동안의 삶을 묶는 셈이다 / 많은 말들을 눌러 참으면서, / 내 넋두리가 아니라 / ‘나’가 곧 ‘우리’임을 믿는다 / 그러면서 꽝, / 하늘에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심지를 박는다.’고 설파함으로써 그는 ‘나(혹은 ‘우리’)’의 ‘삶’을 통한 존재의 가치를 통해서 시적 진실을 탐구하는 그의 집념을 이해할 수 있다.
일찍이 영국의 비평가 리처즈(I.A. Ricards)가 말했듯이 우리들의 일상적, 현실적 정서생활과 시의 소재의 취택이나 주제의 투영은 차이가 없다고 했다. 이러한 생활의 언어적 표현은 시의 기교를 사용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임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현대시의 발원이나 착상의 근원은 현재의 보편적 체험에서 추출한 정서와 사유(思惟)가 직접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문차숙 시인은 다음 작품「욕심」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 이름을 / 잊을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 내가 디디며 가는 이 길, / 다른 누가 지나 간 길인 줄 알면서 / 새로이 길을 내고 있다’는 자신의 심경이 존재라는 거창한 인식 앞에서 어떤 갈등의 요소들을 상기하고 있다.
서걱이는 모래알,
파도가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겨울 해변에
콕,콕,콕 발자욱을 찍으면
누가 뒤에서
내 길을 밟으며 따라 온다.
바다는 하얗게 제 길을 지우며 가는데
나는 자꾸 길을 내며 가고,
물결이 밀려와 지워진 모래위에
또 쿡,쿡
내가 왔다간 흔적을 만들면서
사랑하는 이여
그대가
내 이름을 잊을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내가 디디며 가는 이 길,
다른 누가 지나 간 길인 줄 알면서
새로이 길을 내고 있다.
욕심!.
이처럼 그가 단정적으로 토로하는 언술은 하나의 ‘욕심’이라고 결론을 적시하고 있으나 ‘내가 왔다간 흔적’과 ‘나는 자꾸 길을 내’는 시적 정황(situation)이 '두려워 하‘는 대칭적 인식이 서로 교묘한 정감으로 변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다음 작품에서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종 종 잊혀질 때,
마음만 먹으면 두레박처럼 건져 올릴 수 있다고
망각의 세월을 그리워했었지.
그러나 너에게도 날개가 있어
잊혀지는 게 아니라
흔적 없이 새처럼 날아갔지.
--「가두지 않으면 사람도 날아간다」중에서
문차숙 시인은 이미 『사랑은 저지르는 자의 몫이다』『앞지르기』『빈 집에 돌아오다』등 세 권의 시집을 상재한 중견시인으로 그동안 창조적 이미지를 통해서 인생문제와 사랑문제에 이르기 까지 폭넓은 주제의 천착을 위해서 부단하게 인식의 중심축을 확대하고 있다.
그것이 그가 갈망하거나 갈등요소의 적절한 화해를 위한 해법 찾기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지금까지 경영해온 삶(인생)이 ‘망각의 세월’이며 ‘흔적 없이 새처럼 날아’가는 가치관으로 승화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될 때 그의 진실은 더욱 확고하게 빛을 발할 수 있으며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숭고한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 적나라(赤裸裸)한 표출을 접할 수 있다.
2. ‘나’를 향한 성찰의 절대적 함의(含意)
문차숙 시인은 다시 ‘나’라는 시적 화자(話者-persona)를 통해서 성찰이라는 새로운 인생관을 정립하려는 의식이 그의 내면에 집중되어 있다. ‘아, 나는 얼마나 뭇 사람을 사랑했는가’ 혹은 ‘지금 내 뒤에서 누가 손가락질하고 있는지(이상「뒤태」중에서)’라는 화자의 언술은 바로 자아에 대한 침착한 성찰의 일단이다.
그는 이러한 형상을 시간성과 결부해서 유추하는 정서의 지향점을 읽을 수 있는데 이는 계절적으로는 ‘가을’이나 ‘중년’이라는 성숙의 단계에서 창출하는 그의 관념적 이미지의 현현(顯現)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어조(語調)에서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대체 무어란 말인가
호들갑 떨기에도 멋쩍으며
날라리 춤추기에는 더 어설픈,
점잖하게 앉아 있으면
뒷방 늙은이 같고
이래저래 엉거주춤 서 있는
저 어중간한 신세대,
중년.
--「중년」전문
내 삶의 가을이
주렁주렁 익은 감나무라면
까치밥 하나만 남겨두고
다 주어야지.
엊저녁 굶은 미야할머니께 한 개,
재미삼아 놀아주는 옆집 할매께 한 개
그래도 남으면
동네꼬마 녀석들, 유물개로 하나씩...
--「내 삶의 가을」전문
그렇다. 문차숙 시인의 시적원류는 그가 숙명으로 살아온 서정성의 바탕위에서 절감한 인생의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그가 체험한 시간성과 합치될 때 무한한 주제의 창조가 가능하다는 결론이다. 그것이 진정한 존재의 인식이며 성찰이다.
대체로 시인들의 내면에는 작품의 발상이나 구상에 이르기까지 과거와 현재 또는 미래로 상관하는 시간적 체험이 많은 연상작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인들의 사유는 회상을 기점으로 해서 인식하고 인식하면서 파생하는 현존의 갈등과 고뇌 등이 차츰 성찰로 전환하는 심리적인 과정을 근간으로 기원의 의식으로 발전하는 상상력을 짐작하게 된다.
문차숙 시인이 이러한 어조를 통해서 감득하는 지적 정서의 축에는 무엇이 그를 지배하고 있을까. 그것은 ‘중년’과 ‘내 삶의 가을’의 이미지가 어떤 합일을 도출하기 위한 인생론적 묵시(黙示)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서는 시와 인생과 삶이라는 등식을 성립하면서 공존과 공감의 상념이 그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걸어 다니는 無人島
내 안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가두지 못하고
누가 와서 내게 머물지도 않는다
모두 스치고 지나갈 뿐,
내가 무인도라고 손들고 나설 때
화려한 저들도 다 따라 나섰지.
저들이 먼저 외롭다고 그랬지.
알고 보니 길거리에 둥둥 떠다니는 그들도
제 안에 사람하나
정착시키지 못하는 무인도였어.
아, 사람은 다 외로운 섬이다.
--「無人島」 전문
여기에서 ‘내 안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와 ‘사람은 다 외로운 섬’이라는 어조에서 알 수 있듯이 ‘무인도’의 절박성이 그의 심중과 일치할 때 그의 고뇌는 고차원의 고독한 사유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러한 사유의 정점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현현되고 있다. 한곳에서 일별해보면 그가 지향하는 사유의 정범이나 정서의 근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마음이 다하는 계절, / 그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등 뒤에서 줄긋고 있는 이, / 나 다.(「가을에는」중에서)
- 가만가만 배추를 뽑으면서 / 그 속에 든 시인을 본다 / 봄배추인데도 속부터 영글어 토실 토실하니 / 익은 가을배추 같다. / 이도 푹 절어서 아삭아삭 맛있으리라는 예감, / 사람 으로 일구는 것은 그 주인을 닮는다는 사실, / 나는 언제 내 밭에서 알토란, / 영근 배추 를 뽑아 올릴꼬.(「배추밭에서」중에서)
- 그도 뭇사람들처럼 나를 부담스러워할까? / 차 한 잔 정도는 내가 살 수 있는데도 / 백 수에게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자본주의 국민들, / 차 한 잔 속에도 시장 경제가 꿈틀댄다 는 걸 / 詩人만 모르지(「백수의 하루」중에서)
- 내 쉬어 갈 곳도 없네.(「가을산 2」중에서)
- 한낱 바람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에 / 목이 메이는 내가 / 저들을 밟고 가야 할 날이 오면 / 저린 가슴 어찌할꼬(「가을에는 눈물도 노랗다」중에서)
그래서 문차숙 시인은 ‘바람(「바람」중에서)’이었으며 ‘비에 젖(「이별」중에서)’고 있으며 ‘나는 굽 없는 신발이다(「나는 굽 없는 신발이다」중에서)’ 그리고 ‘나, 낯선 길에서 자꾸 믿고 싶다(「낯선 길」중에서)’라는 고뇌의 언어가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지만 다음 작품「파꽃」처럼 ‘한 생애’나 ‘인생’에 대한 결론을 단정하는 특성이 보인다.
파밭을 지나노라면
간댕간댕 매달린 주먹만한 파꽃,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간신히
어딘가에 매달려 가고 있는 한 생애.
파밭에서 졸고 있는
허연 파꽃을 보면서
‘인생도 그러하다‘ 고 말을 뱉는 사이
파꽃은 전잎이 나고
뿌리는 내 머리로 옮겨 붙는다.
파꽃의 일생도 짧구나.
3. 타자(他者)와 공감하는 인식의 축
문차숙 시인은 이와 같이 자아성찰에 관해서 심도있게 창조의 이미지를 조감했다면 이제는 ‘너’라는 화자를 통한 공감의 인식을 확산하는 경향이 돋보인다. 그는 타자를 통해서 자아를 역설적으로 반추하는 시법을 구사하고 있는데 이런 기법도 시의 효용가치와 시적 진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 유의하게 된다.
그는 우선 작품 「봄」에서 ‘봄비 / 너 때문에 울고 / 개나리, 살구꽃도 다 같이 / 울고픈 게 봄이여.’라거나 「가을비」에서는 ‘가을비 내리는 날 / 젖은 우산 속에서 누가 서성이네 / 보나마나 당신일거라고 단언하지만 / 오래토록 서 있는 저 사람은 타인이다.’라는 어조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그의 민감한 시간성은 다시 중요한 시적의미의 창출에 효과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현대시의 개념에서 보편적으로 명시하는 것에는 시간과 공간의 조화라고 한다. 이러한 개념은 시공(時空)이 동일한 한 개의 개념으로 현시한다면 그 이미지나 상징은 단조롭게 형상화할 것이지만, 다양한 시공의 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지가 우선이다.
이러한 견해는 가령 ‘달’이라는 사물을 보름달이라는 단일시점에서 보면 만월에 대한 풍요나 성취 등의 이미지에 한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달은 초승달, 반달, 보름달, 그믐달과 같은 시간성이 가미되고 공간에서도 산, 바다, 강, 들길, 옥상 등 장소는 어디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에 이미지와 상징의 도입은 다변적으로 현현할 수 있어서 작품의 주제에 다각적인 효과를 탐색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다시 문차숙 시인의 화자 ‘너’에 대한 탐구를 살펴보자. 그는 ‘너’를 내세워 일상뿐 만아니라, 시적 메시지로 연결하여 그의 진실을 창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칭 화자를 잘못 인용하면 시인 자신이 주체가 되는 관념적인 독백으로 변할 우려를 항상 유념해야 한다.
봄 꽃 만발한데
한줄기 비는 꽃잎을 떨구고
환하게 한 번 피려고 하면
바람이 훅,
날려 버린다.
세상일 다 그래.
피려다 만 것이 어디 너 뿐이겠는가.
이 작품은「봄꽃」전문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세상일 다 그래’이다. 그러나 ‘피려다 만 것이 어디 너 뿐이겠는가.’에서 알 수 있듯이 ‘너’로 우선 어필하는 것은 단순하게 다른 한 사람의 지칭이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이는 ‘나’가 아닌 ‘모두’일수도 있다는 사실에 정서의 축을 형성하게 되고 ‘바람이 훅,’하는 언술에서 또다른 이미지의 연관을 유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문차숙 시인은 시 문장에서 의문형 어미를 자주 구사하는 습관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의문형 문장이 주제를 더욱 생동감 있게 유료(流露)하는 특성도 있어서 어찌 보면 시적 언어의 묘미를 창출하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가을나무가 멀미를 하나
온종일 흔들흔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너만이 아냐
삶에도 어지럼증이 있어
똑바로 걸어가는데도
걸음은 자주 휘청거려.
삐뚤어질 때마다
너를 생각는다
곧 겨울이 오면
다 벗은 채 홀로
기다리던 너,
흔들거림은 한 때인걸.
--「가을나무」전문
문차숙 시인은 자신에게 묻는다. 자문(自問)의 시학이라고 할까. 스스로에게 묻고 자신이 답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너만이 아냐’고. 그러나 ‘삶에도 어지럼증이 있’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그래서 그는 ‘걸음은 자주 휘청거려. / 삐뚤어질 때마다 / 너를 생각는다’는 인식단정으로 ‘너’를 통해서 타자와 인식을 공감하는 정서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문장의 시법은 작품「봄」에서도 ‘목련도 매화도 흔들며 가는 봄에 / 누가 울며 따라가고 있네 / 꽃비이던가?’, 그리고 작품「들국화」에서 ‘예고 없이 부는 찬 서리에 / 너는 또 얼마나 몸부림쳐야만 하나 / 너에게 온갖 여린, 이쁜 이름 다 붙여도 / 그저 등 굽히면서 하얗게 피었다 / 소리 없이 지는 것이 소망이겄제.라고 의문형 어조로 마무리하고 있다. ’여기에서 화자는 ‘누가’ 또는 ‘너’라는 타자(혹은 타아(他我))가 ‘꽃비이던가?’하고 의문에 싸여 있다.
문차숙 시인의 이러한 타자성은 고 김준오 교수의 시론「非情的 他者性」에 따르면 자연의 인격화에는 동화(同化-assimlation)와 투사(投射-project)라는 두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동화는 시인이 모든 자연을 자신 속으로 끌어와서 그것을 내적 인격화하는 원리이며 투사는 시인이란 정체가 없기 때문에 그가 계속해서 어떤 다른 존재를 채우는 것 곧 자연 속에 자신을 상상적으로 투여하는 원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원리가 우리들 심리에서 작용하여 시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도출되는 시적 감동임은 주지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꽃비이던가’나 ‘소리 없이 지는 것이 소망이겄제’라는 어구는 분명히 동화와 투사의 원리를 잘 용해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4. ‘기도’를 통한 기원 그 시적 진실
이 시집에서 간과(看過)할 수 없는 부분이 문차숙 시인의 간절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기도’라 하면 종교시에 분류해서 일반 작품과 별개로 읽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러나 문차숙 시인이 갈구하는 ‘기도’는 인류의 사랑학과 연결되는 특징이 있다.
당신의 눈동자와 마주치고 싶어서
맞은편 응달, 긴 의자에 자리를 잡았지만
아무도 내 옆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 잠시에도 외로웠습니다.
사람들은 왜 멀어지는 걸까요?
주님
제게 온기가 없어서일까요?
비어 있는 긴 의자에 따로 주인이 있는 걸까요?
아님,
쓸쓸한 그늘진 곳이었기 때문일까요?
--「기도」중에서
여기에서 절대성을 지니는 ‘주님’에게로 지향하는 어조는 사뭇 비장하기도 하거니와 문 시인이 갈구하는 내면의 중심에는 ‘그 잠시에도 외로웠’다는 결론을 적시하고 이것이 현현하는 메시지는 독자의 몫인가. 아니면 문 시인이 존재문제와 신앙심이 동시에 해법을 찾아야 하는 대명제일수도 있다는 점이다.
주님은 어떻게
내 마음을 아는지
고분고분하지 않아도 사랑해 주시며
다 용서해 주시는지......
주님은 내 사랑.
--「주님은 내 사랑」중에서
여기
눈에 뵈는 것 모두 십자가인데
내가 가는 이 길이
당신이 불러서 가는 길,
십자가의 길이다.
--「내가 가는 길-성모당에서」중에서
여기에 명징(明澄)하게 표현된 ‘주님’과 ‘십자가’는 ‘내 사랑’이며 ‘내가 가는 이 길이’다. 이러한 기독교 정신을 원류로 해서 창조된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과 자연의 사랑을 동시에 실현하려는 박애(博愛)의 주제로 현현되어야 한다.
프랑스의 시인이며 사상가인 발레리(P.O. Valery)의 말을 빌리면 ‘종교는 인간 정신세계에서 가장 미묘하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풍요로운 문제를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와 같은 인간의 근원문제에 대해서 사랑이라는 촉매제를 가미하여 미묘하거나 풍요로운 문제를 조화시키는 노력이 바로 시로 승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 아웃사이더 / 님을 찾은 까닭을 기억만 하소서. / 레지오를 마치고 / 몰래하는 기도는 달콤하다.(「레지오를 마치고」중에서)’거나 ‘나, / 하느님이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실지 안다. / 기도하면서 잠든 아이가 / 잠속에서도 생긋이 웃었거든.(「기도-2」중에서)’ 등의 언술이 그의 애절한 소망이 기원의 의지로 적시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은「성지에서 드리는 기도」「나를 가두어 주십시오」「성모성당에서」「거룩한 식사」「내 고향 예배당」「뒷모습은 쓸쓸하다」는 등 많은 소재에서 그의 신앙이 투영되고 있어서 그의 시적 진실은 더욱 인간애, 자연애를 포괄하는 성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생에 대한 불타오르는 시인의 창조적 정신에서 결실되는 것이니 대상하는 인생을 보다 더 아름답게 영위하려고 의욕하고 그것을 추구 갈망하는 데서 제작된다면 그 시인의 한 분신(分身)이 아닐 수 없다는 신석정의「나는 시를 이렇게 생각한다」를 접목해보는 것이 현대시 읽기의 초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이왕 저를 부르셨다면
작은 뜰에 호미로 사용치 마시고
넓은 들판에 쟁기로 써 주십시오
주님의 도구로 쓰임이
소원입니다.
문차숙 시인이 갈구하면서 성취하고자 하는 그의 간절한 기원은 작품「기도-3」과 같이 ‘주님의 도구로 쓰임’에 대한 현세나 내세를 위한 영원한 ‘기도’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집『별을 따다』에서는 우리들이 일생을 통해서 염원하거나 지향하는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문차숙 시인의 지적 이미지를 용해시키는 순박한 정서가 내포(內包)하고 있음을 재발견할 수 있다는 정감이 안온하게 넘쳐나고 있다.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호라티우스의 시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는 보다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라는 점에는 공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이 지금 우리 시인들에게 짐지워진 이 시대의 대명제이니까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