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다드의 서, 제26장 포도제에서 미르다드가 순례자들에게 열변을 토하다.
미르다드가 말했다.
“미르다드를 보라. 그 누구도 아직 그의 경작물을 거두어들이지 않았고, 그 누구도 아직 그의 피를 마시지 않았다.
미르다드는 자신이 거두어들인 곡식이 무겁다. 아, 그러나 거두는 자들은 다른 포도원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다.
미르다드는 피가 넘쳐 숨이 막힐 정도다. 아, 그러나 잔을 가진 자들과 마시는 자들은 이미 다른 포도주를 고주망태가 될 만큼 마셨다.
호미와 곡괭이와 낫을 가진 사람들이여, 나는 그대들의 호미와 곡갱이와 낫을 축복한다.
그대들은 지금까지 무엇을 쟁기질하고, 무엇을 파내고, 무엇을 베어냈는가?
온갖 종류의 잡초가 무성하고, 무서운 짐승들과 소름끼치는 파충류가 번식하고 날뛰어 완전히 정글로 변해 버린 그대 영혼속의 황무지는 쟁기질했는가?
어둠 속에서 그대의 뿌리를 휘감아 질식시키고, 봉우리가 맺히는 것을 방해하는 해로운 뿌리를 파냈는가?
벌레들에게 갉아먹히고, 기생충의 맹습으로 시든 가지는 베어냈는가?
그대들은 지상의 포도원을 경작하고 파내고 베어내는 방법은 잘 배웠다. 그러나 지상에 없는 포도원, 즉 그대들 자신은 경작되지 못한 채 비참하게 황폐해졌다.
포도원을 신경쓰기 전에 포도원을 가꾸는 이에게 신경쓰지 않는 한, 모든 노동은 전혀 쓸데없는 것이다.
손에 못이 박인 사람들이여! 나는 못박인 그대들의 손을 축복한다.
먹줄과 자의 벗이여, 망치와 모루의 동행자여, 끌과 톱을 반려자로 삼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스스로 선택한 기술에 아주 능하다.
그대들은 사물의 높이나 깊이를 찾는 방법을 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높이나 깊이를 찾는 방법은 모른다. 그대들은 생철덩어리를 망치와 모루를 가지고 솜씨있게 다듬어 모양을 만든다. 그러나 ‘의지’의 망치와 ‘이해’의 모루가 어떻게 생짜 인간을 인간다운 모습으로 다듬는지는 모른다. 조금도 반발하지 못하게 ‘이해’의 모루로 두들기는 법. 값을 따질 수 없이 귀중한 이 방법은 배우지도 않는다.
그대들은 목재나 바위에 톱과 굴착기를 사용하는 데는 아주 뛰어나다. 그러나 꼴사납고 울퉁불퉁한 인간을 어떻게 단정히 다듬고 매끄럽게 하는지는 모른다.
기술자들에게 기술을 먼저 적용하지 않는 한, 모든 기술은 전혀 쓸데없는 것이다.
인간들은 어머니 대지가 준 것들과 동포들의 손으로 지은 생산물을 서로의 필요에 따라 사고 판다.
나는 대지가 준 것, 인간이 만든 물건을 축복하며, 사고파는 일도 축복한다. 하지만 수익 자체를 -사실은 손해이지만- 축복할 수는 없다.
불길한 밤의 정적 속에서 하루의 결산을 할 때, 그대는 무엇을 이익으로 삼고 무엇을 손실로 삼는가? 원가를 넘은 매상을 이익으로 삼는가? 그렇다면 돈을 위해 허비한 그날은, 벌어들인 금액이 아무리 크다 해도 실제로는 무가치하다. 그리고 그날의 조화, 평안, 빛의 무한한 풍요로움은 모두 그대에겐 손실이 된다. 그날의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호소 역시 손실이 된다. 선물로 받은 그날을 손에 얹어 그대에게 내민 사람들의 마음 역시 손실이 된다.
그대의 주된 관심사가 인간의 지갑에 있다면, 어떻게 인간의 마음에 이르는 길을 발견해 내겠는가?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 이르는 길을 발견치 못하면서 어떻게 신의 마음에 이르기를 바라는가?
그리고 신의 마음에 이르지 못하는 한, 어떠한 삶이 그대에게 있단 말인가?
만약 그대가 이익으로 평가하는 것이 손실이라면, 손실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그대들의 상행위는 진실로 헛되다. 그 이익으로 감정된 것이 ‘사랑’과 ‘이해’가 아닌 한은.
홀(笏)과 관(冠)을 가진 인간이여!
같은 홀이라도, 상처를 빨리 주면서 상처를 치유하는 연고는 너무 늦게 발라주는 손 안에 있으면 뱀이나 마찬가지다. ‘사랑’의 향유(香油)를 처방하는 손 안에 있으면 어둠과 숙명을 앞질러 기선을 제압하는 피뢰침과 같아진다.
자신의 손에 무엇이 있는지 잘 살펴보라.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가 박힌 황금의 관은 허영과 무지와 권력욕으로 가득한 머리에 꼴사납고 가련하고 불편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그렇다. 이렇게 헛된 왕좌에 바쳐진 왕관은 그 왕좌를 비웃는 가시와 다름없다. 반면 가장 희귀하고 귀중한 보석의 관은 ‘이해’와 ‘극복’의 광륜(廣輪)이 빛나는 머리 위에 앉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무가치하다며 부끄러워한다.
자신의 머리를 잘 살펴보라.
그대는 인간의 통치자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선 자신을 통치하는 법을 배우라. 지기 스스로를 잘 통치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잘 통치할 수 있는가? 바람에 희롱당하면서 물결치는 파도와 바다에 평안과 고요를 줄 수 있겠는가? 눈물 가득한 눈이 눈물 가득한 마음에 축복의 웃음을 지을 수 있겠는가? 두려움과 분노로 떨리는 손이 배를 수평으로 유지하겠는가?
인간들을 지배하는 자는 인간들에게 지배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소란, 무질서, 혼돈으로 가득차 있다. 바다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늘에서 부는 어떤 바람에도 휩쓸린다. 바다와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만조(滿潮)의 인력에 의해 때때로 해안을 타고 넘는다. 그러나 바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깊은 곳은 너무나 고요해 격렬하게 바람 부는 표면을 벗어나 있다.
만약 진정 인간을 통치하고 싶다면, 그 속 가장 깊숙한 곳으로 뛰어들라. 인간은 물결치는 파도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뛰어 들어야 한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손이 자유로워지도록 홀로 놓아 버리고, 머리가 장애물 없이 생각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관을 벗어야 한다.
그대들의 규칙은 모두 헛되다. 그대 안에서 홀과 관으로 장난치는 것을 취미로 삼는 골치아픈 존재를 통치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그대들의 법은 모두 무법(無法)이며 그대들의 질서는 모두 혼돈이다.
향로와 책을 가진 인간이여! 그대들은 향로로 무엇을 사르는가? 책으로 무엇을 읽는가? 어떤 식물의 향기로운 가슴에서 흘러나와 굳어지는 황갈색의 액체를 사르는가? 그러나 그런 것은 시장에서 사고팔고 있으며 단돈 몇 푼만 주고 사서 피워도 어떤 신이든 괴롭히기에 충분하다.
사른 향기로 증오, 질투, 탐욕의 악취를 없앤다고 생각하는가? 남의 결점만 들추어내는 눈, 거짓을 말하는 혀, 음란한 손의 악취를 없앤다고 생각하는가? 신앙으로 퍼레이드를 벌이는 불신앙이나, 축복에 가득 찬 낙원 따위로 자화자찬하는 지저분한 세속의 악취를 없앤다고 생각하는가?
신의 콧구멍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굶어 죽어 하나씩 하나씩 마음속에 화장되고, 그 재가 하늘에서 부는 바람에 날릴 때의 향기가 오히려 상쾌하다.
그대들은 향로로 무엇을 사르는가? 추종인가, 찬미인가, 애달픈 바람인가?
분노한 신은 분노로 가슴이 터지게 내버려 두라. 찬미에 굶주린 신은 찬미를 죽도록 갈망하도록 놔두라. 냉혹한 신은 자기 가슴의 냉혹함 때문에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
그러나 신은 분노하지 않는다. 찬미에 굶주리지도 않는다. 마음이 냉혹하지도 않다. 오히려 분노로 가득 차 있고 찬미에 굶주려 있고 마음이 냉혹한 것은 그대들이다.
신이 그대들을 태워 얻고 싶은 것은 향기가 아니라 분노와 자존심과 냉혹함이다. 신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들이 신처럼 자유롭고 전능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신은 그대들의 마음이 향로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대들은 책에서 무엇을 읽는가?
사원의 벽과 둥근 천장에 금문자(金文字)로 쓰여진 계율을 읽는가? 그와 함께 마음에 새겨진 생생한 진실을 읽는가?
연단에서 가르치고, 논리와 궤변으로 열렬히 보호받고, 필요에 따라 돈과 칼날로 방어하는 교의(敎義)를 읽는가? 아니면 가르치거나 방비해야 할 교의가 아니라 사원 속에서든 사원 밖에서든, 밤에든 낮에든, 낮은 곳에서든 높은 곳에서든 ‘자유’를 향한 의지를 갖고 걸어가야 하는 길인 ’생명‘을 읽는가? 그대들이 그 길을 걷지 않고 그 목적지를 확신하지 않는 한, 어떻게 감히 남을 그 길로 이끌겠는가?
혹 그대는 현세에서 얻은 것을 얼마큼 내놓으면 어느 정도의 천국을 살 수 있는지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도표, 지도, 가격표를 책에서 읽지는 않는가?
소돔의 광대이자 사자들이여! 그대들은 사람들에게 천국을 팔고, 그 대가로 그들이 가진 현세의 몫을 취하려 한다. 그대들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이 지옥이니 도피하라고 재촉하면서, 현세의 깊은 참호로 자신을 에워싼다. 어째서 그대들은 사람들에게 천국의 몫을 팔면서 현세의 몫을 얻게 하지는 않는가? 만약 자신의 책을 잘 읽기만 하면, 그대들은 어떻게 해야 세상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는지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을 것이다. 천국의 마음을 가진 자에겐 이 세상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한편 속세의 마음을 가진 자에겐 천국도 속세이다. 인간과 동포들을 떼어 놓는 울타리,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떼어 놓은 울타리, 인간과 신을 떼어 놓는 울타리를 모두 없애고, 인간의 마음에 천국이 나타나게 하라.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천국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천국은 사거나 빌릴 수 있는 꽃동산이 아니다. 천국은 이 지상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우주 어디에서도 도달할 수 있다. 어째서 고개를 쳐들고 하늘 저쪽만을 응시하는가?
지옥은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향을 많이 사른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들끓는 용광로가 아니다. 지옥은 이 지상과 마찬가지로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무한한 공간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자신의 마음에서 도피할 수 없는데, 마음을 연로로 하는 불꽃에서 어떻게 도피한단 말인가?
인간이 그림자에 소유되고 있는 한, 천국을 찾는 것도 헛되고 지옥에서 도피하는 것도 헛되다.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은 모두 ‘이원성’ 의 고유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하나되고, 마음이 하나되고, 몸이 하나되지 않는 한, 그리고 ‘의지’ 가 그림자 없이 하나 되지 않는 한, 인간은 늘 한쪽 발은 천국에 놓고 다른 한쪽 발은 지옥에 놓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짜 지옥이다.
그렇다, 빛의 날개를 갖고 있으면서 납으로 된 발을 갖는 것은 지옥보다 더한 지옥. 희망에 부풀면서 절망 때문에 가라앉는 것도 지옥보다 더한 지옥. 두려움 없는 신념으로 비상하면서 두려움 가득 찬 의심에 의해 위축되는 것도 지옥보다 더한 지옥.
남에게 지옥인 천국은 천국이 아니다. 남에게 천국인 지옥은 지옥이 아니다. 그리고 종종 어떤 자의 지옥이 다른 자의 천국이며, 어떤 자의 천국이 다른 자의 지옥이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은 영원히 대립하는 상태가 아니라 양쪽에서 ‘자유’로 향하는 긴 순례여행의 통과점이다.
성스러운 포도의 순례자들이여!
미르다드에게는 소위 정의롭다는 자들에게 팔 천국도 없으려니와 보증할 천국도 없다. 또 소위 악하다는 자들을 위협할 허수아비 같은 지옥도 없다.
그대들의 정의 그 자체가 천국이 되지 않는 한, 그 정의는 잠깐 피었다가 지고 만다.
그대들의 사악함 자체가 허수아비가 되지 않는 한, 사악함은 잠깐 잠들어 있다가 적당한 시기가 오면 다시 꽃피게 된다.
그대들에게 줄 어떠한 지옥도, 어떠한 천국도 미르다드는 갖고 있지 않다. 미르다드가 주는 것은 어떠한 지옥의 불꽃이나 천국도 사치도 초월해서 그대들을 고양시키는 ‘성스러운 이해’다. 손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 선물을 받으라. 이를 위해서는 이해하려는 욕구와 의지를 제외한 온갖 망상에서 나온 욕구나 의지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대들은 대지에게 낯선 손님이 아니다. 또 대지는 그대들의 의붓어미가 아니다. 대지의 중심 중의 중심, 골수 중의 골수에 그대들이 존재한다. 대지는 자신의 넓고 튼튼한 등으로 그대들을 껴안는 것이 기쁘다. 어째서 그대들은 보잘 것 없고 움푹 파인 자신의 가슴으로 대지를 껴안겠다고 우겨대다가 그 결과로 숨이 끊어질 듯 헐떡이는가?
대지의 얼굴은 맑고 단정하다. 어째서 그대들은 괴로운 불신과 공포에 얽매어 필요 이상을 가짐으로써 그 젖과 꿀을 괴롭히는가? 대지의 얼굴은 맑고 단정하다. 어째서 그대들은 괴로운 불신과 공포에 얽매어 그 얼굴에 상처와 주름을 만드는가? 대지는 솔직하고 걱정이 없다. 어째서 그대들은 그토록 걱정과 반항으로 가득 차 있는가?
그러나 그대들은 대지보다 더 오래 산다. 그대들은 태양이나 우주의 모든 별보다 더 오래 산다.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가지만, 그대들은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어째서 그대들은 바람 앞의 나뭇잎처럼 떠는가?
그대들이 우주와 하나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대지만은 그대들에게 그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대지 자체는 그대들의 그림자가 비치는 거울에 지나지 않는다. 거울이 ‘비치는 것’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인간이 던지는 그림자가 인간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는가?
눈을 뜨고 깨어나라. 그대들은 지구 이상의 것. 그대들의 운명은 삶과 죽음, 그리고 늘 굶주리고 있는 ‘죽음’ 에게 풍부한 식량을 제공하는 것 이상이다. 그대들의 운명은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천국과 지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이원성’ 위에서 서로 투쟁하는 모든 대립물로부터 해방되는 것. 영원히, 실로 풍부한 신의 포도원에서 실로 풍부한 포도가 되는 것.
싱싱한 포도가 달린 싱싱한 가지는 땅에 묻히면 뿌리를 내려 결국 어미와 똑같이 어엿한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지만, 어미와는 계속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포도의 싱싱한 가지인 인간은 자신의 거룩한 본질인 신성(神性)이라는 땅에 묻히면, 하나의 작은 신이 되면서 어머니 신과 영원히 한 몸을 유지한다.
그렇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렇다. 삶과 죽음이라는 이원성 속에 묻히지 않는 한, 그대들은 ‘존재’의 단일성을 깨닫지 못한다. 그대들이 ‘사랑’의 포도로 양육되지 못하는 한, ‘이해’의 포도주로 채워지지 못한다. 그리고 그대들이 ‘이해’의 포도주에 취하지 않는 한, 그대들은 ‘자유’의 입맞춤에 의해 곧바로 깨어나지 못한다.
지상의 포도열매를 먹을 때, 그대들이 먹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작은 배고픔을 치유하기 위해 그대들은 더 큰 배고픔을 먹는 것이다.
지상의 포도의 피를 마실 때, 그대들이 마시는 것은 ‘이해’가 아니다. 그대들이 마시는 것은 단 한 순간의 고통을 잊는 것이며, 그 효과가 떨어지면 고통의 쓰라림은 갑절로 늘어난다. 진절머리 나는 자신한테서 도망치려 해도 모퉁이를 돌면 다시 자신과 마주칠 뿐이다.
미르다드가 주는 포도는 부패로 얼룩진 포도가 아니다. 일단 한번 채워지면 영원히 가득 차는 포도다. 미르다드가 빚은 포도주는 불타기를 두려워하는 입술에는 너무 강하지만, 영원히 자기를 잊고 취하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활기를 준다.
그대들 중에서 내 포도가 탐나 견딜 수 없는 자가 있는가? 그런 자들은 바구니를 갖고 앞에 나오라. 나의 피를 갈망하는 자가 있는가? 있다면 잔을 갖고오라. 미르다드는 자기가 거둔 수확물이 무겁고, 피가 넘쳐 숨이 막힐 정도니까.
자기 망각을 축복하는 날이 ‘성스러운 포도제’ 였다. ‘사랑’ 의 포도주로 취하고, ‘이해’ 의 빛으로 몸을 적시는 날이 ‘성스로운 포도제’ 였다. ‘자유’의 날개가 율동적으로 고동치는 황홀한 날, 장벽이 없어지면서 모든 것 속의 하나, 하나 속의 모든 것으로 녹아드는 날이 ‘성스러운 포도제’ 였다. 그러나 보라, 이 축제는 오늘날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축제는 병적으로 자기를 과시하는 일주일이 되어 가고 있다. 걸신 들린 탐욕이 걸신 들린 탐욕과 상거래를 하는 일주일, 노예들이 노예들과 소란을 피우고 무지가 무지를 타락시키는 일주일이 되어 가고 있다.
방주 자체도 예전엔 ‘신념’ 과 ‘사랑’ 과 ‘자유’의 증류소였지만, 지금은 거대한 포도 짜는 기계가 되고 괴물 같은 시장이 되고 말았다. 현재의 방주는 그대들이 생산한 포도원의 수확물을 받아서, 그것을 도취의 포도주로 만들어 그대들에게 다시 판다. 그대들의 손이 하는 노동을 방주는 족쇄로 채운다. 이마의 땀을 이마의 낙인을 찍기 위해 태우는 탄불로 삼는다.
멀리, 너무도 멀리 방주는 정해진 진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지금 키는 바르게 잡혔다. 방주는 모든 죽은 돌을 없애고, 평온하고 안전하게 스스로의 진로로 나갈 것이다.
따라서 방주의 모든 공물은 그 공물을 바친 자에게 되돌려주고, 모든 부채는 면제된다. 방주는 신 이외에 주는 손을 알지 못하고, 신은 어떤 인간에게도 -신 자신에 대해서조차- 빚이 없기를 바라고 있다.
이렇게 나는 노아에게 가르쳤다.
이렇게 나는 그대들에게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