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徐居正)
본관은 대구(大丘) 달성(達城)으로, 자는 강중(剛仲)이며 옛 자는 자원(子元)이고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다. 세종 갑자년에 급제하고 세조 때에 또 중시(重試)ㆍ발영시(拔英試)ㆍ등준시(登俊試) 등 세 과에서 발탁되었다. 시문에 아주 민첩하였으며 저술이 많았다. 다섯 임금을 섬겼으며 28년 동안 대제학[文衡]을 맡았고, 경연에서 시종한 지 45년이었다. 중국 사신 기순(祈順)이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서거정이 원접사(遠接使)로 나갔는데 기순이 그의 재능에 탄복하고 칭찬하였다. 벼슬은 찬성사(賛成事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문집이 세상에 전하고 저서로는 《대동시화(大東詩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 있다. ○ 서거정은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생질(甥姪)로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나이 겨우 6세에 독서하고 글을 짓자, 온 문중이 기동(奇童)이라 하였다. 조금 커서는 성균관[學官]에서 시험[校藝]이 있을 때는 언제나 전열(前列)에 끼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양촌(권근)의 문장이 분명 그 생질에게 전해진 것이리라.” 하였다. 〈행장(行狀)〉 ○ 경태(景泰 명 나라 경종(景宗)의 연호) 경오년(1450)에 한림학사 예겸(倪謙)과 급사중(給事中) 사마순(司馬恂)이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서거정이 당시 수찬으로 있었는데, 두 사신이 그의 저작을 보고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병신년(1496)에 기순과 장근(張瑾)이 또 왔을 때, 공이 원접사(遠接使) 겸 관반(館伴)으로 나가 매번 화답할 때면 붓이 쉬지 않으므로 두 사신이 번번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정말 기이한 재주이다. 우리 따위는 밤새도록 구상하여 겨우 한두 편을 얻을 뿐인데, 공(公)은 서서히 말하는 사이에도 붓만 대면 모두 주옥(珠玉) 같은 글이 되니 천하에 횡행(橫行)할 만하다.” 하였다. 그 후부터 사신이 내왕할 때면 반드시 그의 안부를 물었다. 상동 ○ 사가정의 시는 한유(韓愈)ㆍ육방옹(陸放翁)의 체를 전적으로 모방하였으며, 손만 쓰면 시가 되어 아름답고 화려하여 적수가 없었다. 남이 혹 비문ㆍ기ㆍ서ㆍ시부ㆍ잡문을 요구하면 써주는 글이 유수(流水) 같아 파란(波瀾)이 넘치는 듯 신기한 글귀와 기이한 말들이 세상에 전송(傳誦)되었다. 상동 ○ 하늘과 땅이 빈 곳이 없으면 많은 형체들을 수용할 수 없으며, 강과 바다가 빈틈이 없으면 많은 시냇물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산과 수풀이 빈 곳이 없다면 뭇 나쁜 것들을 감출 수 없다. 만 가지 구멍[萬竅]이 지극히 비었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 소리를 내고, 만 가지 틈이 지극히 비었기 때문에 해와 달이 거기에 빛을 들이게 된다. 〈허곡기(虛谷記)〉 ○ 한 해 중에 큰 가뭄과 큰 비 큰 바람을 만나 재변(災變)이 중첩되자 시를 지어 기록하기를, 큰 비만은 그래도 괜찮으니 / 大雨尙可言 말랐던 것이 그 혜택을 입을 수 있고 / 燥者蒙其利 큰 가뭄만은 그래도 좀 나으니 / 大旱尙可言 습한 것이 그 혜택을 받고 / 濕者受其賜 큰 바람은 그래도 괜찮으니 / 大風尙可言 만물이 모두 시달리어 지칠 뿐이다 / 百物盡憔悴 어찌 한 해 중에 / 如何一年內 세 가지 재해가 겹쳐 오는가 / 三災同荐至 탄식하고 또 거듭 탄식하네 / 三嘆復三嘆 이것을 시로써 기록해 둔다 / 是用詩以誌 하였다. 본집(本集) ○ 사가(四佳)가 역대 연표를 편찬하였는데, 중국은 위로 제곡(帝嚳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제왕) 갑자년에서 아래로 명(明) 나라 성화 무술년(1478)까지이며, 우리 나라는 위로 단군(檀君) 무진년부터 아래로 조선까지 3천 8백 11년이니, 위에는 갑자를 적고 아래는 연대로 적었다. 상동 ○ 사가가 어떤 사람[一甲]이 자기 직분(職分)을 넘어서 남을 비평하고 탄핵하는 것을 분(憤)하게 생각하고 수직(守職)이라는 글을 짓기를, “사물은 각기 그 맡은 직분이 있으니 소가 맡은 일은 밭갈이 하는 것이 직분이요, 말이 맡은 일은 등에 싣는 것이 직분이요, 닭은 새벽을 맡아보고, 개는 밤을 맡아 지키는 것이 직분이다. 맡은 일을 충분히 다하는 것을 수직(守職)이라 한다. 맡은 일을 다하지 않고 남의 일을 대신하는 것을 월직(越職)이라 하니, 월직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요, 이치에 어긋나게 되면 해를 입게 마련이다.” 하였다. 상동 ○ 〈철장조(鐵腸調 곡명(曲名))〉를 짓기를, 하늘이 너에게 쇠창자를 만들어주니 / 作鉄腸調帝鑄汝以鉄腸 그 쇠 백 번을 단련하면 / 百鍊其鋼 굽지도 부러지지도 않을 것이니 / 剛不可屈亦不可折 신중히 갈고 닦아 / 愼爾自修 손가락에 감기는 듯 부드럽게 하지 말라 / 毋或爲繞指之柔也 하였다. 상동 ○ 사가(四佳) 〈동도십이영(東都十二詠)〉의 오산기승(鰲山奇勝)이란 시에, 바다 위 금오산은 전망이 좋고 좋아 / 海上金鰲眺望宜 풍속과 문물 이전 시대와 다르구나 / 風流文物異前時 깨어진 비에 김생의 글씨 있고 / 破碑或見金生字 오래된 절간에는 최치원의 시 남았구나 / 古寺曾留致遠詩 하였다. 상동 ○ 사가의 〈죽유도(竹狖圖 대와 검은 원숭이 그림을 읊은 시)〉에, 마디는 본시 맑고 고상한데 잎은 더욱 여위었구나 / 節本淸高葉更癯 열매 맺어져서 봉(鳳)이 와 새끼 치고 울기 바쁘게 기다리니 / 子成忙待鳳鳴雛 세상에 나쁜 무리 얼마나 많았으며 / 世間鼠輩知無數 화가는 누구던고 그림 잘못 그렸구나(봉을 그려야 옳은데 원숭이를 그렸다는 뜻) / 畫手何人枉作圖 하였다. 상동 ○ 서거정이 달성(達城) 뒷동산에다 못을 파고 연꽃을 심고 정자를 만들어 이름을 정정정(亭亭亭)이라 하였다.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정정정(亭亭亭)이 흰 마름의 섬을 누르고 / 亭亭亭壓白蘋洲 붉은 옷 다 떨어지고 잎만 우수수 / 落盡紅衣葉葉愁 하였다. 상동 ○ 고려 때의 옛 제도에 예문 응교(藝文應敎)라는 것이 있었다. 품계는 비록 낮았으나 반드시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으로 후일에 문단(文壇) 맹주(盟主)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뽑아 시키니 그 인선(人選)이 지극히 중요한 것이었다. 본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이것을 따랐다. 본집 ○ 일찍이 게으른 병의 시를 지어서 자신을 조소하기를, 한가하면 게을러지고, 게으르면 병이 된다 / 閑能成懶懶成癖 병들면 돌아가고 싶고 돌아가기란 역시 어려운 거다 / 病亦思歸歸亦難 문에 이끼 끼어 봄은 적적한데 / 門掩蒼苔春寂寂 책 베고 높이 누웠으니 해는 낚싯대 세 개 길이만큼 남았구나 / 枕書高臥日三竿 하였다. 정말 나태한 자의 고상한 풍치이다. 《시격(詩格)》 ○ 〈백염(白髥)〉이란 절구를 지어 문답형식으로 자신을 조소하기를, 작년에 눈 같은 흰 수염이 반만 붙었더니 / 去歲白髯雪半粘 올해는 수염들이 온통 희어졌다 / 今年髯上十分添 묻노니 수염아 어찌하여 그렇게 흰고 / 問髯何事白如許 말하기를, 시를 읊을 때 괴롭게 배배틀기 때문이오 / 曰坐吟詩苦撚髯 하였다. 상동 ○ 성화(成化) 임인년 윤 8월 혼자 앉아서 시를 짓기를, 큰 재목은 명당(정치하는 곳)의 기둥감이 합당한데 / 大材端合柱明堂 나와 같은 몹쓸 나무는 한 치의 장점도 못 지녔네 / 樗散如予乏寸長 스스로 비웃기를 평생에 쓰일 곳 없으니 / 自笑一生無適用 어쩌면 꼬불꼬불 하기 황양목(黃楊木) 같을꼬 / 如何縮閏似黃楊木 하였다. 상동 ○ 〈야독자신(夜讀自哂)〉이란 시에, 어릴 적엔 물고기같이 눈이 크고 밝았기에 / 少日如魚眼孔明 등잔 앞에서 작은 글을 소리 높여 읽었는데 / 燈前細字讀高聲 이젠 늙고 병들어서 무슨 일을 이룰 건고 / 如今老病成何事 담 모퉁이에 무심히도 짧은 등잔 팽개치네 / 墻角無心棄短檠 하였다. 상동 ○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가 삼휴(三休 송 나라 엄삼(嚴參)의 호)와 사휴(四休 송 나라 손방(孫昉)의 호)를 합쳐 스스로 호를 칠휴자(七休子)라 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마침내 대사헌을 파직당하였다. 서거정이 시로 희롱하기를, 쉬는 날에 쉬는 것은 쉬기도 좋지마는 / 可休休日休方好 쉬지 않는 날 쉬는 것은 쉬는 것도 부끄럽네 / 休不休時休亦羞 삼사휴 아울러서 칠휴가 된 나그네 / 三四休幷七休客 전에도 넉넉할손 더욱 넉넉하이 / 休休今復更休休 하였다. 상동 ○ 서강중(徐剛中)이 어려서 윤서(尹恕)와 같이 놀며 배웠는데 윤서가 늘 말하기를, “만일 급제하여 정언(正言)만 되면 그 뒤에는 반드시 벼슬을 그만두리라. 남자가 홍지(紅紙 급제에 합격한 증서) 위에 정언이라 쓰게 되면 만족한 것이다.” 하였다. 윤서는 서강중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7,8년 지나서야 비로소 정언이 되었다. 서강중이, “그만둘 것인가.” 하고 희롱하니, 윤서가 웃으며, “이 다음에 보라.” 하더니 얼마 안 되어서 병으로 죽고 말았다. 《필원잡기(筆苑雜記)》 ○ 국조(國朝)의 옛 제도에 이조 참의는 반드시 2품(品)을 임명하였다. 서거정이 이조 참의로서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오며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예조 참의로 옮겨 제수되어 즉석에서 금띠를 풀고 은띠를 매게 되자 술에 취하여 한 절구(絶句)를 짓기를, 유자가 회수를 건너 북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고 들었지만 / 曾聞橘渡淮爲枳 금이 물을 건너면 은이 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 / 未見金渡水爲銀 하였다. 상동 ○ 조정 관리 중에 오(吳)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장오죄(臟汚罪)로 형을 받게 되자 그 처가 묘한 꾀를 부려서 한 종에게 부인복을 입히고 모자를 씌워서 옥리(獄吏)에게 뇌물을 주고 말하기를, “죄인 오모(吳某)의 첩입니다. 들으니 낭군이 분명히 주륙당할 것이라고 하니, 원컨대, 한 번 만나 영결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옥리가 가엾게 여겨 허락하였더니, 한 빈터로 가서 부부가 영결하는 양 꾸몄다. 종이 미리 소매 속에 칼과 톱을 넣었다가 죄인에게 끼웠던 쇠사슬과 형틀을 끊어 자신이 이것을 둘러쓰고 죄인인 주인에게 부인복을 입혀서 문을 밀치고 옥문을 나와 미리 준비하여 두었던 준마(駿馬)를 타고 달아나게 하였다. 옥리가 들어가 보니 남아 있는 사람은 종이었다. 그래서 죄인을 추적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세종께서는 의리 있는 종이라 하여 용서하였다. 상동 ○ 국조(國朝)에 들어와서 문체(文體)는 평이했으나 한두 문인이 괴상하고 뻣뻣한 문장으로 과거에 으뜸으로 뽑히게 되어 5,6년 사이에 문체가 모두 변하여 서곤체(西崑體)가 되어버렸다. 지금에 와서 구양수(歐陽修)가 유기(劉幾)를 물리친 옛일을 들면서 심한 것을 배척하게 되어 문체가 겨우 복구되었으나 아직도 완전히 변하지 않았다. 상동 ○ 영의정 윤사분(尹士昐)은 뺨이 붉었다. 박원형(朴元亨)이, “윤사분은 시기심 많고 험하다.”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상동 ○ 영중추부사 이석형(李石亨)과 판서 김예몽(金禮蒙)은 한 마을에 살았다. 하루는 둘이서 장기를 두었는데 이석형은 양마(兩馬)가 있어 세력이 강했으며 김예몽은 차 하나밖에 없어 세력이 약하였다. 당시 중추부 재상에 이름이 마승(馬勝)이란 사람이 있고 조정 관리에 이름이 차유(車有)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석형이, “내가 마승(馬勝)이다.” 하니, 김예몽이 말을 받아, “나는 차유(車有 차가 있어 지지 않는다는 뜻)가 아닌가.” 하고, 서로 웃었다. 상동 ○ 문경(文景) 이종선(李種善)은 목은(牧隱 이색)의 아들이며, 총제(摠制) 권천(權踐)은 양촌(陽村)의 아들이다. 총제가 취하여 문경에게, “그대는 목은의 아들로 문장이 부족하고 나는 양촌의 아들로 문명(文名)이 없으니, 그대와 나 두 사람이 등하불명계(燈下不明契 등잔 밑이 어둡다는 계)를 맺자.” 하니, 듣는 사람이 모두 웃었다. 상동 ○ 국조(國朝)의 전례에 문과ㆍ무과의 방(榜)을 붙이는 날 홍패(紅牌)와 꽃 술을 하사하고, 일등(갑과) 세 사람은 모두 검은 일산(日傘)을 내렸으니 모두 한때의 영광이었다. 세조 때에는 무과는 기(旗)를 하사하였다. 상동 ○ 글짓기와 술마시는 모임[文酒會]은 유자(儒者)들의 오랜 풍속이다. 삼관(三館 홍문관ㆍ예문관ㆍ성균관)의 선비들이 큰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선생이라 호칭하였는데 고관에서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모인 사람은 모두 그러하였다. 그러나 비록 관직이 높은 귀인이라 할지라도 홍지(紅紙) 위에 이름을 적지(급제 출신을 말함) 않았으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대인(大人)’이라 부른다. 이 풍속은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다. 상동 ○ 《자치통감(資治通鑑)》〈후량기(後梁紀)〉에, “고려 애꾸눈 중 궁예(躬乂)가 군중을 모아 개주(開州)를 근거로 왕이라 칭호하며 태봉(太封)이란 연호를 쓰고,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쳐 왔다.” 하였는데, 궁예는 곧 궁예(弓裔)이며 개주는 곧 개성(開城)이고, 태봉(太封)은 태봉(泰封)이다. 상동 ○ 우리 나라 분야(우리 나라에 해당하는 성좌(星座))를 옛사람들은 연(燕) 나라와 같은 줄 알았다. 정통(正統) 연간에 혜성(彗星)이 연 나라 분야에 나타났다. 일관(日官 천문을 맡은 관리)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와 상관없습니다.” 하였다. 세종이 몹시 걱정하시고, “우리 나라가 연 나라 와 같은 분야이니 어찌 상관이 없겠는가?” 하더니, 기사년 가을에 중국황제(명 나라 6대 황제인 영종(英宗))가 오랑캐에게 붙들려 가고 세종도 승하하였다. 상동 ○ 희종(熙宗) 5년에 지제고(知製誥) 최보순(崔甫淳)이 금(金) 나라 황제가 등극한 것을 축하한 표(表)를 짓기를, “다섯 말[馬]이 강을 건너니 진(晉) 나라가 새로 황제가 됨을 나타내고 여섯 용이 극(極)에 오르니 복희(卜羲)의 주역(周易)에 대인(大人 왕자)을 본다는 말에 부합되었다.” 하였다. 당시 금 나라 군주는 형제가 다투고 있어서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고 있었기 때문에 조서를 내려, “진(晉) 나라 원제(元帝)의 고사를 인용한 것은 부당하다.” 하여, 최보순이 견책을 받았다. 상동 ○ 송(宋) 나라 인종황제(仁宗皇帝)가 붕어(崩御)하였을 때 요술(妖術)하는 자가 나타나, “죽은 사람을 도로 살리겠다.” 하였다. 영종(英宗)이, “시험해보라.” 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태종(太宗)이 인종(仁宗)과 연회를 베풀어서 백옥(白玉) 난간(闌干)에 기대어 모란(牧丹)을 완상하고 계셔서 인간으로 다시 돌아올 뜻이 없으십니다.” 하였다. 영종(英宗)이 허망된 소리인 줄 알았으나 죄를 주지 않았다. 우리 나라 세종의 초상(初喪)에 요사스러운 중이 와서 이 꾀를 올려, 다른 시체에 시험해 보았으나 효력 없는 쓸데없는 짓이었다. 문종(文宗) 역시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상동 ○ 장원(壯元)으로 정승이 된 사람으로 고려조에 정승 유양(柳亮)과 정승 맹사성(孟思誠)이 있고, 조선조에 하동(河東) 정인지(鄭麟趾)ㆍ길창(吉昌) 권람(權擥)ㆍ영성(寧城) 최항(崔恒)ㆍ남양(南陽) 홍응(洪應)이 있다. 조선조에 부자가 정승이 된 사람으로, 익성(翼成) 황희(黃喜)와 아들 열성공(烈成公) 수신(守身)ㆍ영의정 심온(沈溫)과 아들 좌의정 회(澮)가 있다. 상동 ○ 갑인년 별시에 최항이 장원이 되고 조석문(曹錫文)이 방안(榜眼)이 되고, 박원형(朴元亨)이 탐화(探花)가 되고, 구치관(具致寬)이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세조조에 4사람이 이어 정승이 되었는데 일방(一榜 과거에 함께 합격하는 것)에 네 사람이 정승이 되었으니 고금에 전례가 없었다. 상동 ○ 이사철(李思哲)은 신체가 뚱뚱하고 컸으며 음식도 남보다 많이 먹어, 매끼에 큰 밥그릇에 밥 한 사발과 삶은 닭 두 마리와 한 주전자의 술을 먹었다. 일찍이 등창을 앓아 죽게 되었을 때 의원이, “독한 술과 삶은 고기를 먹지 마십시오.” 하니, 공이, “먹지 않고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먹고 죽는 것이 낫다.” 하고 술 마시고 고기를 씹기를 평상시와 똑같이 하였으나 결국 병은 나았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부귀한 사람은 음식도 역시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하였다. 상동 ○ 신라(新羅)시대에 동쪽 해변가에 두 사람이 있었으니 남자는 영오랑(迎烏郞)이라 하고, 여자는 세오녀(細烏女)라 하였다. 하루는 영오랑이 해변에서 해초를 캐다가 물에 표류하여 일본(日本)에 가서 왕이 되었다. 세오녀는 그를 찾아 건너가 왕비가 되었다. 그때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리게 되자 천문을 관측하던 자가 아뢰기를, “영오랑과 세오녀는 해와 달의 정기(精氣)입니다. 지금 그들이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런 변고가 생겼습니다.” 하였다.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두 사람을 찾으니 영오랑이 세오녀가 짠 비단을 주어 보냈다. 그것으로 못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니 해와 달이 다시 빛났다. 그 못을 일월지(日月池)라 하고 현(縣)을 두어 영일(迎日)이라 이름 지었다. 상동 ○ 당(唐)ㆍ송(宋) 때에 임금에게 일을 아뢸 때는 모두 차자(箚子)를 썼다. 서거정(徐居正)이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처음으로 건의하여 차자의 법을 시행하였으니, 이는 언사(言辭)가 출입하는 동안에 유실(遺失)될 염려가 있고, 또 후세 근시(近侍)나 환관들이 일을 그르칠 징조를 방지하기 위하여 시행한 것이다. 법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사람들이 모두 만세에 시행할 좋은 법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근래에 대간으로 있는 사람들이 그 대의는 모르고 조금이라도 과실이 있으면 심각하게 법을 적용하여 얽어매어 입을 모아 헐뜯고 있으니 차자의 법은 사람을 해치는 데 적합할 따름이다. 천하에 법을 만들어 그 폐단이 없는 것이 없다. 상동 ○ 근래에 한 남자종이 꼭 여자같이 생겨서 어릴 때부터 여복을 입고 사대부의 집에 출입하다가 일이 탄로되자 대간에서 법대로 조치하도록 청하였다. 세조(世祖)가 일이 매우 애매하여 용서할까 하고, 서거정(徐居正)을 돌아보며 물었다. 서거정이 대답하기를, “신이 어려서 《강호기문(江湖記問)》을 보니 강호간에 한 비구니(比丘尼)가 자수(刺繡)를 잘 놓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양가집에서 딸을 보내어 이것을 배우도록 하였더니 문득 임신하였습니다. 그 집 부모가 꾸짖으니, 여자가, ‘비구니와 같이 자면서 마치 성교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더니 그만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여. 양가에서 관에 고소하여 비구니를 조사하니 음도(陰道)ㆍ양도(陽道)가 모두 없어 관(官)에서 용서하려 하니, 한 늙은 홀어미가, ‘소금물을 양근(陽根)에 적시고 누렁개로 핥게 하면 양도((陽道 : 음경)가 드러날 것입니다.’ 하여, 시험해 보니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관리가,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니니 인도(人道)의 올바름을 문란하게 할 것입니다.’ 하고 주살하였습니다.” 상동 ○ 서거정이 어려서 몇몇 사람과 함께 산사(山寺)에 놀러가서 그림 부처 하나를 보았는데, 그 위에 써 붙이기를, “공자(孔子)가 찬(讚)을 짓고 오도자(吳道子)가 그림을 그리고 소식(蘇軾)이 글씨를 썼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공자는 주(周) 나라 사람이고, 한(漢) 나라 명제(明帝) 때에 불교가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왔는데 공자가 부처를 찬미하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또 오도자(吳道子)는 당(唐) 나라 사람인데 어찌 오도자가 그린 부처를 공자가 찬(讚)을 지을 수 있으며, 소식은 그보다 천백 년 후에 출생한 사람인데 어찌 공자와 같은 시대이며 그의 찬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반드시 후세에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자가 한 짓일 것이다.” 하였다 . 상동 ○ 고려(高麗) 말엽에 술을 금한 적이 있었다. 그때 대관(臺官)은 술을 마시지 않고 간관은 여전히 술을 마셨다. 간관은 붉은 옷을 입은 하인을 앞세웠고 대관은 검은 옷을 입은 하인을 앞세웠는데, 일찍이 금주(禁酒)할 때에 붉은 옷을 입은 하인들이 크게 취하여 검은 옷을 입은 하인을 기롱하기를, “나는 날마다 심히 취하여 얼굴이 붉기 때문에 옷도 붉지마는, 너는 너희 대관이 그렇듯이 재미없이 술도 마시지 않아 얼굴이 항상 검어지기 때문에 옷 역시 검은 것이다.” 하니, 듣는 사람이 모두 웃었다. 상동 ○ 서사가(徐四佳)의 〈남해조강시(南海漕舡詩)〉에, 돛대는 빽빽히 차서 삼단을 모아 둔 듯 / 帆檣織織簇如麻 조세는 남쪽이라 전보다 훨씬 많다 / 租賦南方較舊多 다만 기쁜 것은 청산만은 실어 오지 못하여 / 獨喜靑山漕不得 해마다 길이길이 들에 사는 사람들 몫이 됨이네 / 年年長屬野人家 하였다. 본집(本集) ○ 경태(景泰) 계유년(1453)에 세조가 북경(北京)에 갈 때 서거정(徐居正)이 교리로서 수행하였다. 압록강에 이르러, 이날 저녁 모친의 부음이 전해 왔으나, 세조가 비밀에 부쳤다. 이날 밤 서거정이 이상한 꿈을 꾸고 놀라 일어나 눈물을 흘렸다. 같이 잔 사람이 까닭을 물으니, 서거정이, “꿈에 달이 이상하게 하늘에 걸려 있었다. 달은 어머니를 상징한다 하는데, 우리 어머님이 집에 계시는 데 꿈이 아주 불길하기 때문에 서러워한다.” 하였다, 이 말을 임금에게 알리는 사람이 있어서 세조가 감탄하기를, “거정의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을 감동시켰다.” 하고, 사실을 이야기하고 말았다. 세조가 항상 압록강의 꿈을 칭찬하면서, “내가 그대를 취하는 것은 그대의 재주만이 아닌 것이다.” 하였다. 상동 ○ 대제학을 22년 동안 맡아 과거로 선비를 뽑아 23번이나 방(榜)을 붙여 인재를 많이 얻었다. 학사 동월(董越)이 와서 우리 나라에 조서를 반포할 때 서거정을 보고 심히 존경하면서, “일찍이 학사 예겸(倪謙)의 〈요해편(遼海編)〉을 보고 또 호부(戶部) 기순(祁順)의 《황화집(皇華集)》을 보고 높은 풍도(風度)를 흠모한 지 오래되었다가, 이제 상면하니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하였다. 상동 ○ 어사(御史)라는 직분은 그 소임이 중하고 책임이 커서 군주에게 과실이 있으면 용린(龍鱗 용의 목 아래 거꾸로 난 비늘 이를 건드리면 그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을 거스르며 벽력(霹靂 임금의 벼락 같은 노여움이나 위엄)도 피하지 않고 부월(鈇鉞 혹독한 형벌)도 피하지 않아야 한다. 신하들에게 허물과 법을 위반한 일이 있으면 법조문에 비추어 바로잡아야 하며, 귀족과 근시에게 교만하고 못된 일이 있으면 이것을 탄핵하여야 하는 것이다. 〈헌부제기(憲府題記)〉 ○ 자동선(紫洞仙)이란 기생은 재주와 용모가 뛰어났다. 종실(宗室) 영천군(永川君)이 지극히 사랑하였다. 영천군은 전에 청교류(靑郊柳)를 사랑하다가 그 사랑을 자동선에게로 옮겨 온 것이다. 마침 송도(松都)에 갔었는데 그곳에 청교역(靑郊驛) 자하동(紫霞洞)이 있었다. 서거정이 시를 보내기를, 청교의 버들은 속상하게 푸르렀고 / 靑郊楊柳傷心碧 자동에 낀 연하는 뜻을 다해 짙었구나 / 紫洞煙霞盡意濃 하였더니, 영천군이 언제나 이 시를 외면서 스스로 과시하였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성화(成化) 연간에 병조(兵曹)에서 총을 만들어 쏘는 법식을 간행하여 연해(沿海) 각 관청에 분배하여 수시로 연습하자는 청이 있었다. 서거정이 불가하다고 생각하고 아뢰기를, “화약은 왜땅에서 나오는데 우리 국경과 저쪽이 매우 가깝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포(三浦)의 왜인(倭人)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과 섞여 살고 있어서 간교한 백성들이 몰래 통하여 저쪽 땅으로 흘러갈 수도 있으니, 국가를 위한 깊은 계획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에 그 폐단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패관》 ○ 공산(公山)에 백제(百濟) 때 만든 돌 항아리가 있었다. 서사가(徐四佳)의 공산십경(公山十景)에 〈석옹창포시(石壅菖蒲詩)〉에, 백제 고물(古物)인 돌항아리 / 百濟古物惟石甕 배만 턱없이 크니 엉성하여 어디에 쓸꼬 / 腹大濩落何所用 뉘가 알리, 창포가 천지의 정기(精氣)인 줄을 / 誰知昌陽天地精 돌을 깨고 구름 열어 이곳에 옮겨 심었네 / 斲石開雲此移種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평해군(平海郡)에 해당안(海棠岸)이 있다. 서사가가 시를 읊기를, 금자라가 머리에 인 산은 중첩하고 / 金鰲頭戴山重重 양쪽 절벽은 비좁은데 청룡(靑龍)이 서렸구나 / 兩崖夾走盤靑龍 한밤에 광풍이 불어 간들거리니 / 一夜光風吹嫋嫋 해당화 만발하여 누리에 붉은 송이송이 / 海棠開遍紅髮鬆 하였다. 상동 ○ 서달성(達城)의 〈동도십이영(東都十二詠)〉은 계림영이(鷄林靈異)ㆍ오산기승(鰲山奇勝)ㆍ포정감회(鮑亭感懷)ㆍ문천빙망(蚊川騁望)ㆍ반월고성(半月古城)ㆍ첨성노대(瞻星老臺)ㆍ분황폐사(芬皇廢寺)ㆍ영묘구찰(靈妙舊刹)ㆍ오릉비조(五陵悲弔)ㆍ남정청상(南亭淸賞)ㆍ문옥적성(聞玉篴聲)ㆍ과유신묘(過庾信墓)가 있다. 상동 ○ 당진(唐津) 하류에 세고탄(洗姑灘)이 있다. 서거정의 시에, 강변에 빨래하는 아낙네 얼굴은 꽃 같은데 / 江邊洗姑顔如花 어릴 적부터 빨래로 생애를 이어가네 / 小少洸澼爲生涯 아침에 발을 씻어 희기가 백설 같고 / 朝洗白足如雪色 저녁에 팔을 씻어 희기가 서리 같다 / 暮洗白腕如霜華 아침 저녁 씻고 씻어 / 朝朝暮暮洗復洗 몸은 깨끗하고 마음은 다정하여라 / 一身自潔心自多 희게 바래어서 물에 풀린 고치보다 더 희고 / 燥白白於水繭絲 밤이면 밤마다 달 보고 쓸쓸한 북 울리누나 / 夜夜向月嗚寒梭 ……하고 또, 갑자기 광풍 일어 천지가 캄캄하고 / 忽有狂風天地黑 티끌과 모래 날려 아득하여라 / 塵沙漠漠迷所之 종놈이 자빠지며 흙탕 속에 뒹굴어 / 蒼頭顚倒泥潦中 옥 같은 색이 엉망이 되어 옷이 검게 되었구나 / 玉色已誤衣復緇 작은 아기 문밖에서 시어머니 기다리니 / 小娘出門待姑歸 시어머니 빨래길이 어찌 이리 더디 올까 / 姑洗姑洗來何遲 …… 하였다. 상동 ○ 촌 사람들이 평야에 흙을 쌓아 높게 만들고 그 위에 그물과 주살을 설치하여 새를 잡는 것을 초둑[草纛]이라 한다. 한 관리가 지방 장관으로 나갔는데 관청 일에는 어두워서 종일 오뚝하게 앉아 있어 마치 인형(人形)과 같았다. 백성 가운데서 관아에 송사(訟事)를 제기하고 그 원한을 신설하지 못한 자는, “이 초둑 장관은 언제나 입을 열 것인가?” 하였다. 《골계전(滑稽傳)》 ○ 순흥군(順興郡)은 지방이 작고 기생들도 못생겼으며 반찬도 없는 곳이었다. 남지(南智)가 감사(監司)로 가고, 김문기(金文起)가 아사(亞使 부사(副使))로, 김호생(金虎生)이 군수로 갔다. 하루는 감사가 잔치를 베풀었는데, 관기(官妓)의 치마 빛깔은 담홍색이고 군수의 코는 아주 붉었다. 아사 김문기가 말하기를, “기생의 치마는 비록 엷지만, 주인의 코가 붉은 것이 첫째로 축하드릴 만하다.” 하였다. 주인이 술을 권하는데 큰 술잔을 잡으니 아사가 말하기를, “군(郡)은 작지만 술잔이 큰 것이 둘째로 축하할 일이다.” 하였다. 국과 밥이 들어오니 아사가 말하기를, “밥은 붉고 장은 흰 것이 셋째로 축하할 일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순흥(順興)의 세 가지 축하할 만한 것이다. 상동 ○ 계림(雞林 경주)에 한 아름다운 창녀(娼女)가 있었다. 장안의 어떤 소년이 무척 정이 쏠려 소중하게 여겼는데, 이별할 때 몹시 우는 것을 보고 소년이 행장에 있는 물건을 모두 주니 창녀가 사양하고 말하기를, “그대의 신체를 자른 것을 얻고 싶습니다.” 하니, 소년이 앞니를 분질러서 주었다. 서울에 돌아와서 창녀는 이별하자마자 곧 딴사람한테 갔다는 말을 듣고 종을 보내어 앞니를 받아오게 하였다. 창녀가 박장대소하며, “백정더러 살생(殺生)을 금하고, 창녀더러 예법을 지키라는 것은 어리석지 않으면 망령된 사람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기롱하기를, 이것더러 은정이 엷다하지 마오 / 莫言這物恩情薄 이는 빠지고 머리는 벗어졌으니 장수할 징조로다 / 齒豁頭童得壽徵 하였다. 상동 ○ 한 고관이 아직 출세하지 못하였을 때 언제나 소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남이 이것을 기롱하기를, “왜 말을 타지 않고 소를 타오?” 하니, 답하기를, “말이란 오(午 말 오)이다. 머리를 움츠러뜨리면 오(午) 자요. 머리를 쑥 뽑으면 우(牛 소 우) 자이니 이것은 내가 머리를 드러낼 상(像)인 것이다.”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생각하였더니 후일 과연 높은 벼슬에 올라 두각을 나타냈다. 상동 ○ 키 큰 사람이 키가 작은 사람을 희롱하여 시를 짓기를, 갓을 쓰니 갓끈이 땅에 질질 끌리고 / 着笠纓垂地 신 신으면 머리까지 파묻혀 들어가네 / 穿靴已沒頭 길가에 소발자국에 고인 물만 만나도 / 路逢牛跡水 건너가려고 지푸라기로 배를 삼나 / 欲渡芥爲舟 하니, 키 작은 사람이 그 시에 대구를 맞추기를, 이불을 덮으면 발이 나오고 / 蓋衾欲露脚 집에 들어가려면 머리 먼저 부딪히누나 / 入屋先打頭 다리를 잘라야 곽에 들어갈 수 있고 / 斬脚方入槨 발만 베어도 배를 받칠 수 있네 / 刖足可撑舟 하였다. ○ 어떤 호탕한 장군이 병이 위독하여 죽게 되자 의원을 청하여 진찰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왼쪽에는 미인들이요 바른쪽에는 거문고와 비파며 술과 고기가 앞에 널려 있었다. 의사가,“병을 고치려 하시면 먼저 이런 것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하였다. 호탕한 장군은, “내가 조금이라도 연명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들을 위한 것이니, 만약 이것들을 버리라 하면 백년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싫소.” 하니, 의사가 웃으며 물러갔다. ○ 문인(文人) 김(金)씨와 유(柳)씨가 같은 마을의 동쪽과 서쪽에 살았다. 유씨는 동쪽에 살고 김씨는 서쪽에 살았다. 유씨가 김씨를 기롱하기를, “서쪽 마음[西心]은 악(惡)이요, 서쪽의 입[西口]은 빙긋 웃는[哂] 것이다.” 하였다. ○ 어떤 고을 원이 성질이 청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근실하지도 못하면서 시 읊는 것을 좋아하였다. 한 깐깐한 선비[措大 뜻을 이루지 못한 가난한 선비를 이름]가, “이게 족족새[足足鳥]요. 옛사람의 시에, 족족하며 길게 우는 새는 / 足足長鳴鳥 어찌하여 길게 족족거리는고 / 如何長足足 세상 사람은 족을 모르기에 / 世人不知足 이 때문에 길게 족족하고 사노라네 / 是以長足足 하였소” 하니 이것은 청렴하지 못한 것을 기롱한 말이다. 고을 원이, “너는 이게 하하새[呵呵鳥]인 줄 모른다. 옛사람이 시를 지어, 하하 하하새야 / 呵呵呵呵鳥 어찌하여 하하만 되풀이하는가 / 呵呵復呵呵 옛사람이 너무 우스워서 / 昔人大可笑 그 때문에 길이 하하만 하노라 / 是以長呵呵 하였다.” 한다. ○ 한 수령이 손님을 접대하는데 반찬의 등분을 상ㆍ중ㆍ하 3가지로 나누고 언제나 담당 아전과 약속하기를 후하게 대접하여야 할 손님이면 이마를 만지고, 그보다 낮은 손님이면 코를 만지고 그 다음 손님은 턱을 어루만지기로 하였다. 풍성하고 검약하게 대접하는 것을 이것으로 신호를 삼고 있었다. 한 손님이 수령이 턱을 만지는 것을 지켜보고 자리를 피하면서, “일찍부터 친한 사이인데 이마를 만지기 원하오.” 하니, 수령이 얼굴을 붉히고 반찬도 풍성하였다. ○ 근세에 주(周)씨 성을 가진 한 아전이 풍채가 매우 좋았다. 하루는 어떤 마을에 투숙하니 마침 주인집에서 딸 시집보내는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주씨가 남은 술이나 얻어 목구멍을 적실까 하고 틈에 끼어 끝자리에 앉았다. 밤이 깊어 손님들은 모두 헤어지고 신랑은 술에 취해 있고, 주씨 혼자 손님 자리에 있으니 주인 집에서 신랑으로 잘못 알고 맞아들였다. 새벽에야 주인 영감이 이 일을 알고 쫓아버리려 하니 주씨가 나와 큰 절을 하며 말하기를, “여자의 도리란 한 번 같이하였으면 죽을 때까지 개가하지 않는 법이니 한 번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하찮은 선비도 남편되기 꺼리는 것이오. 절개를 온전히 한 저의 여인을 빼앗아, 절개를 잃은 저 사람의 부인을 만든다면 역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영감이 혀를 깨물며 오래 생각하다가, “어찌한단 말인가?” 하더니 그를 사위로 삼고 말았다. 후일 주씨는 문호(門戶)을 세우고 자손도 번성하였다. ○ 근래 학자로 김(金)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담소를 잘하였다. 한 번은 친구를 방문하였는데 친구가 술상을 차렸으나 안주가 채소뿐이었다. 그래서 먼저 사과하기를, “집이 빈한하고 저자도 머니 맛있는 음식이 없고 싱겁고 박한 것이 부끄럽다.” 하였다. 때마침 여러 닭들이 마당에서 모이를 쪼았다. 김(金)이 말하기를, “내 말을 잡자.” 하니, 주인이, “말을 잡으면 무엇을 타고 갈 건가?” 하니, 김이, “닭을 빌려 타고 돌아가지.” 하니, 주인이 웃으면서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 남쪽 고을의 한 태수가 탐심이 많고 검었다. 하루는 벌금형에 처해진 백성이 있었다. 관리가 그 집 송아지를 징발하여 왔다. 태수가 꾸짖어 물리치고, “베[布]를 징발해 오너라.” 하니, 백성이 통분하여 정원에 호소하기를, “원컨대, 한 마디만 말하고 죽겠습니다.” 하였다. 태수가, “너 하고 싶은 대로 말하라.” 하니, 백성이, “베는 다리가 없으니 사또댁에까지 갈지 모르겠습니다. 네 발이 있는 것이라야 댁에까지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태수가 대단히 부끄러워하였다. ○ 근세 진사 송극명(宋克明)이 코가 붉어 성균관에서 호를 송귤(宋橘)이라 하였다. 한 진사가 귤부(橘賦)를 짓기를, 하늘이 만든 귤이 있고 / 有天作之橘 사람이 만든 귤이 있으니 / 有人作之橘 동정호의 귤은 하늘이 만든 귤이요 / 洞庭之橘天作之橘也 극명의 귤은 사람이 만든 귤이로세 / 克明之橘人作之橘也 하였다. ○ 근위(近衛)의 군사 용순우(龍順雨)는 성질이 어리석고 정직한데 어릴 때 이름이 산호(珊瑚)였다. 정월 초하루 하례식에 백관이 줄을 섰는데 용순우 역시 창을 쥐고 마당에 섰었다. 통례관(通禮官)이, “산호(山呼 만세라는 뜻).” 하고 홀(笏)을 불렀다. 그러자 용순우가, “예.” 하고 답하였다. 통례관이 재창(再唱)으로, “산호(山呼).” 하니, 용순우가, “예예.” 하여 뜰에 가득 찬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산호(山呼)를 산호(珊瑚)로 오인하였던 것이다. ○ 진사 오척지(吳陟之)가 한 고을을 들렀는데 그때 훌륭한 손님들이 모두 모였다. 진사가 늦게 도착하여 말석에 앉아 있으니 행동거지가 쑥스러웠다. 주인이 귤을 쪼개어 껍질로 술잔을 만들어서 술잔이 오척지에게 돌아오자 술과 귤껍질 잔까지 먹어버리니, 온 좌석이 떠들썩하게 웃었다. ○ 유효관(柳孝寬)은 겁이 많았다. 일찍이 국자(國子)의 과시(課試) 때 북을 울리며 독촉하니 겁에 질려 초고(草稿)를 쥐고 허둥대다가 글자가 모두 찢어져 파리와 모기처럼 날아가 버려 한 자도 분별할 수 없었다. ○ 어떤 장님이 수십 명과 같이 금강산(金剛山)에 갔다가 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유점사(楡岾寺)의 기둥과 지붕 형태를 물으니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님이 말하기를, “불전(佛殿)의 기와 골이 1백 20이다.” 하여 그 까닭을 물으니, 장님이, “처음 갔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기와 골에서 떨어진 물이 땅을 파 오목하게 되었다. 내가 더듬어 그것을 세어보아 알게 되었다.” 하였다. ○ 어떤 선비 다섯 사람이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술 마시는 규칙을 정하기를, “한 글자에 세 가지 음이 있고, 의미(意味)가 훈훈(醺醺)하고 단 것을 말한 사람이 술을 마신다.” 하였다. 한 사람이, “행ㆍ항ㆍ행(行行行), 엿물에 사탕을 먹는다.” 하고 또 한 사람이, “설ㆍ열ㆍ세(說說說), 웅장(熊掌)에 벌꿀을 합했다.” 하고. 또 한사람이, “악ㆍ낙ㆍ요(樂樂樂), 순한 술에 우유를 섞는다.” 하고. 또 한 사람이, “중ㆍ중ㆍ중(重重重), 규수방에 운우(雲雨)가 무르녹다.” 하였다. 마지막 사람이 고심하더니, “이ㆍ기ㆍ사(已己巳), 흰 쌀을 가지고 시장에 간다.” 하였다. 넷째 사람이, “이ㆍ기ㆍ사는 한 글자가 아니고, 흰 쌀은 훈훈히 취하거나 단 것도 아니다.” 하니, 그 사람이, “석자는 획이 같고 흰쌀을 가지고 시장에 가면 사탕도 여기 있고 운우도 무르녹을 수 있으니 어찌 훈훈하고 달콤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 어떤 두 늙은 관리가 이웃에 살면서 상종하는데, 한 사람은 흰 털을 뽑아 칠(漆)과 같이 검었고, 한 사람은 뽑지 않아 희기가 눈 같았다. 털 뽑은 사람이 말하기를, “흰털을 뽑으면 다섯 가지 이익이 있으니, 첫째는 늙은 추태를 가릴 수 있고, 둘째 얼굴이 아름답고, 셋째 소년을 따를 수 있고, 넷째 처첩(妻妾)을 기쁘게 할 수 있고, 다섯째 벼슬을 그만두지 않아도 된다.” 하니, 머리가 흰 사람이, “수염은 형체가 있으니 혹 숨길 수 있으나 형체 없는 이는 결국 피할 수 없지 않나.” 하였다. ○ 한 선비가 성격이 치우치고 급하였다. 매번 외톨 마늘을 먹었는데 그것이 둥글고 작아서 젓가락으로 집다 집다 안 되니 벌떡 일어나 밟아버렸다. ○ 서생 윤발(尹發)은 겁이 많았다. 한 번은 시험장에서 답안지[名紙] 위에다 먹을 갈고 길게 탄식하기를, “누가 윤발이 겁이 많다 하는가?” 하여 성균관에서 호를 지어 윤겁(尹㥘)이라 하였다. ○ 문사 몇 사람이 서원(西原 청주) 명기(名妓) 하양대(下陽臺)와 함께 모여 문자회(文字會)를 열었다. 양대(陽臺)의 노래와 춤이 가는 구름을 막을 정도로 훌륭하였고, 무사는 말석에 있었는데 마침 새가 처마 끝에 드는 것을 보고 무사가 총을 쏘았는데 탄환이 처마에 맞고 퉁겨 돌아와 양대의 입에 들어가 앞니가 부러져 버렸다. 어떤 선비가 시를 지어 희롱하기를, 서원 기생 하양대는 / 西原佳妓下陽臺 노래와 춤이 뛰어나 홀로 재주를 휘두르는데 / 歌舞叢中獨擅才 가장 한되는 것은 당시 문자회에 / 最恨當年文字會 무인이 마침 어디서 쫓아왔던가 / 適從何處武人來 던진 금환(금으로 만든 탄환)이 퉁겨나와 풍류 입에 들어가서 / 金丸反入風流竅 옥 같은 이빨 구멍 하나 뚫었고녀 / 玉齒飜成脾睨開 이때부터 맑은 목청 도리어 거칠어지니 / 自從繞梁聲反澁 부질없이 좌석의 손님 한을 막기 어렵게 되었네 / 空敎座客恨難裁 하였다. 《한화(閑話)》 ○ 세종[英廟] 때에 과거를 일삼던 사람들이 변려문(騈儷文)만 힘쓰고 반 줄의 경서(經書)도 읽지 않았다. 경서를 강의하는 논의는 문종(文宗)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때 시작되었다. 문종이 친히 강을 묻는데, 한 서생은 《서경(書經)》을 강하면서 혁상(衋傷)이라는 혁(衋)을 진(盡) 자로 읽고, 한 서생은 《시경(詩經)》을 강하면서 전히(殿屎 대아(大雅)편에 있음)의 히(屎)를 미(尾)라 하고, 한 서생은 《예기(禮記)》를 강하면서 단궁(檀弓)을 단목(檀木)의 활[弓]이라 하고, 한 서생은 《춘추(春秋)》를 강의하면서 정돌(鄭突)의 돌(突)을 돌승(突升 갑자기 어른이 된다는 뜻)이라 하였다. 유생들이 모두 욕하면서, “혁(衋)과 히(屎)는 음이 변한 것이요, 궁(弓)과 돌(突)은 이름을 바꾼 것이니, 삼장(三場 과거의 과목 (詩)ㆍ부(賦)ㆍ의(疑)를 말함)은 되지만 오경(五經)은 어렵도다.” 하였다. 상동 ○ 근래 한 학장(學長)이 시를 깨끗하게 읊는 데는 상대가 없었다. 〈걸의시(乞衣詩)〉를 지어 고을 원에게 보내기를, 추우면 사체를 자라목처럼 감추고 / 寒藏四體藏頭鱉 차가우면 양미간(兩眉間)을 박쥐의 목 움츠리듯 움츠린다 / 冷縮雙眉縮頸蝙 하였다. 상동 ○ 진사 유효관(柳孝寬)은 겁이 많았다. 성균관에서 시험을 치는데 북을 울려 독촉하자 유효관이 얼굴을 푸르락붉으락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청겁(靑㥘)ㆍ홍겁(紅㥘)이라고 희롱하였다. 상동 ○ 이사철(李思哲)이 권기(權岐)ㆍ신평(申枰)과 함께 어려서 삼각산(三角山)에 놀러 가면서 각자 술을 한 병씩 찼으나 술잔이 없어서 권기가 신었던 말가죽 신에 한두 잔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이사철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것으로 마셨다. 다른 사람도 따라 마셨다. 후일 훌륭하게 되어서 권기에게, “오늘 이 금술잔의 술 맛이 그때 산에 갔을 때 가죽신의 술잔보다 훨씬 못하네.” 하였다. 상동 ○ 근세에 한 관리가 명을 받아 군(軍)의 정원을 책정하는 데 가혹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었다. 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면서, “오른쪽 다리가 병신이라 걸음을 걷지 못합니다.” 하니, 관리가 돌려보내니, 그 사람이 이번에는 왼발을 절면서 나갔다. 관리가 도로 잡아와, “들어올 때는 오른발을 절더니 나갈 때는 왜 왼발을 저는가?” 하니, 그 사람이 졸지에 대답하기를, “갑자기 오른쪽인 줄 잊어버리고 왼쪽을 절었습니다.” 하였다. 관리가, “너의 일이 정해졌으니 저는 것은 오른쪽을 절든지 왼쪽을 절든지 너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골계전(滑稽傳)》 ○ 근래 한 서생(書生)이 과거 날짜가 가까워지면 낙(落) 자를 쓰기 싫어서, 낙타(駱駝)는 타립(駝立)이라 하고, 바다에서 잡히는 낙지(落池)를 입지(立池)라 하며, 잘못 낙(落) 자를 범하게 되면 꾸짖었다. 마침내 시험장에 들어갈 때 여러 사람 가운데서 시험 답안지를 땅에 떨어뜨리고 가거늘 옆 사람이 뒤에서, “당신 시험지가 섰소.” 하니, 그 서생이 알아듣지 못하고 잃어버리고 말았다. 상동 ○ 근래 한 문사가 집례(執禮)가 되었다. 친구가 장난으로 식순(式順) 가운데 악작(樂作 주악(奏樂)하는 순서)이란 악자 위에 초두[艹]를 적어 넣었다. 그리고는 식이 시작되자 소리 지르기를 약작(藥作)하고는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시 소리 지르기를, “초두는 떼어버리고 악작(樂作).”이라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부르기를, “약작(藥作) 집례(執禮).”라 하였다. 상동 ○ 근래 삼관(三館)의 신진들이 홍군회(紅裙會 기생을 데리고 노는 모임)를 흉내내면서 서로 의논하기를, “풍류 있고 문장 있는 사람을 참가시키면 우리 일은 다 틀려버리니 얼굴 못생긴 사람을 좌객(坐客)으로 삼자.” 하여, 김안절(金安節)ㆍ윤통(尹統)ㆍ유순도(庾順道) 세 선생을 좌객으로 하였으니. 모두 얼굴이 못생겼다. 때문에 듣는 사람이 모두 웃었다. 이로 인하여 세상에 얼굴 못난 사람을 좌객(坐客)이라 하게 된 것이다. ○ 근래 진양 태수(晉陽太守)로 나간 사람이 백성한테서 거둬들이는 것이 법도가 없어서 산림(山林)에서 나는 채소와 과일이라도 이익이 있는 것은 하나도 남겨두지 않아, 절간의 중들까지도 그 피해를 입었다. 하루는 운문사(雲門寺) 중이 와서 태수를 배알하였다. 태수가, “너의 절 폭포(瀑布)가 올해 볼 만 하겠구나?” 하니, 중이 폭포가 어떤 물건인지 모르고 또 무엇을 징수하려는 것인가 하고 두려워서 답하기를, “폭포를 올해는 멧돼지가 다 먹어버렸습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조소하기를, 찬 소나무는 어느 날 호랑이가 물고 갈 것인가 / 寒松何日虎將去 폭포는 올해 멧돼지가 다 먹어버렸네 / 瀑布當年猪盡喫 하였으니, 이것은 강릉(江陵)의 한송정(寒松亭)이 있었는데 경치가 좋기로 관동(關東)에서 제일이었다. 사신(使臣)들과 손님의 내왕이 많아 수레가 몰려들었으며 그들의 접대비가 무척 많이 들어서 고을 사람들이 항상 불평하기를, “한송정은 호랑이가 어느 때 물어 갈꼬.” 하였다. ○ 한 낭관이 나이가 퍽 들어 수염이 반백이었다. 한 번은 예쁜 기생을 보고 기뻐서 희롱하였더니, 기생이, “슬프도다, 늙으셨습니다.” 하였다. 낭관이 집에 돌아와 부인더러 흰 수염을 다 뽑게 하였더니, 부인이 검은 수염을 모두 뽑아버리고 흰 것만 남겨두고, 그 후에 거짓말로 “요즈음 잘 가꾸시어 예전의 흰 수염을 한 노인이 아닙니다.” 하였다. 늙은 낭관이 대단히 기뻐하고 기생집에 가서 자랑하기를, “내 얼굴이 붉고 내 머리가 검지?” 하니, 기생이 빙그레 웃으며 거울을 병풍 사이에 놓았다. 낭관이 가까이 가 자기를 비쳐보니 하얗게 머리가 센 늙은이기에 부끄러워 돌아와 버렸다. ○ 어떤 대장(大將)은 지독한 공처가였다. 하루는 교외에다 붉은 기와 푸른 기를 세워놓고 명령하기를, “공처가는 붉은 기 쪽으로 가고 공처가 아닌 사람은 푸른 기 쪽으로 가라.” 하였다. 결국 모든 사람이 붉은 기 쪽으로 모이고 푸른 기 쪽은 한사람뿐이었다. 대장이 그 사람을 장하다 하면서, “내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적과 마주쳐서 적을 무찌르고 싸우며,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여도 한 번도 꺾어 본 적이 없지만, 일단 집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언제나 도리가 애정에 못 이겨 지고 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부인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니, 그 사람이, “처가 언제나 경계하기를, ‘세 남자가 모이면 반드시 여색을 이야기할 것이니 당신은 가지 말라.’ 하였습니다. 지금 붉은 깃발 아래는 사람이 많이 모였으니, 이 때문에 가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대장이 기뻐하며, “공처가가 이 늙은이뿐만이 아니구나.” 하였다. ○ 두 문사가 집을 나란히 하고 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털보요, 한 사람은 대머리여서 매번 서로 조롱하였다. 대머리가 털보를 조롱하기를, “우스워라, 털보 나그네야! 온몸이 털투성이, 양 볼은 어디 있는가, 코 하나만 높이 솟았네, 푸른 입술 움직이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때때로 흔들리는 흰 이만 보는구나.……” 하니, 털보가 대머리를 비웃기를, “대머리 늙은이는 무엇인가, 얼굴은 그 모양으로 밉게도 생겼구나. 처음 볼 적에는 추부(醜婦)인가 의심하였더니, 자세히 보아하니 흡사 요승(妖僧) 닮았구나. 내시[巷伯]와 똑같고 사당[優婆]과 적합한 벗일레라. 감로(甘露)의 변(變) 듣기라도 하게 되면, 너 따위가 제일 먼저 통렬하게 징계받지.” 하였다. ○ 세 유생이 모여 독서하는데, 어떤 사람이 쌀을 보내왔다. 한 사람은 술을 좋아하고, 한 사람은 밥을 좋아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떡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세 사람이 글을 지어 승부(勝負)를 가리기로 하였다. 떡을 좋아하는 사람이, “사온 술은 먹지 않고[沽酒不食], 제철에 나온 것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不時不食].” 하였다. 밥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은 위의(威儀)를 손상시키며, 떡은 배를 채울 수 없다.” 하였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린애는 떡을 달라 울고, 굶주린 사람이 밥을 찾는다. 옛날 요(堯)임금은 천 사발의 술을 마셨고, 순(舜)임금은 백잔을 마셨으며, 우(禹)임금은 마시고 달다 하였고, 고종(高宗)은 단술[醴]을 만들도록 명령하였으며, 강숙(康叔 주공(周公)의 동생))은 덕이 커서 취하지 않았다. 공자는 유주무량(有酒無量)이요, 진(晉) 나라 평공(平公)은 술잔을 날렸으며, 위(魏) 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는 벌주를 마셨으며, 백륜(伯倫 진(晉) 나라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유영(劉伶)의 자)은 〈주덕송(酒德頌)〉을 지었으며, 낙천(樂天 백거이(白居易))은 술의 공을 찬양하고, 초화(蕉華)는 주보(酒譜)를 지었으며, 서막(徐邈)은 성인(聖人 성(聖)은 청주 현(賢)은 탁주)을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는 주성(酒聖)이 있고 땅에는 주천(酒泉 지명)이 있으며, 고을에 주향(酒鄕)이 있고, 신선에 주선(酒仙)이 있으니 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두 술을 찬양하였지, 떡과 밥에 관한 말은 한 마디도 없다.” 하였다. 이래서 술을 사게 되어 좋아하니, 떡을 좋아하는 사람은 냄새만 맡고도 취하였으며, 밥을 좋아하는 사람은 잔을 잡더니 쓰러지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가득 찬 술을 잔을 당겨 술기운이 오르도록 마시며 즐거워하였던 것이다. ○ 근위병(近衛兵)인 용순우(龍順雨)는 성질이 어리석고 정직하였다. 한 번은 밤길을 가다가 순찰관(巡察官)을 만나자 다리 밑에 숨었다. 이날 밤 마침 용(龍)과 호(虎)가 암호였다. 순찰관이, “용가(龍哥).” 하고 암호를 말하였더니, 용순우가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급히 나와서, “내가 용가입니다.” 하니, 순찰관이 웃으면서 보내 주었다. 따라서 속언에 어리석은 사람을 용가(龍哥)라 부르게 되었다. ○ 한 선비가 성질이 몹시 편협하고 조급하였다. 채소국을 먹다가 입술을 데이게 되니, 벌떡 일어나 발로 걷어차니 국물이 부인의 머리와 얼굴에 뒤집히게 되어 부인이 소매로 털면서, “내 머리와 얼굴이 입과 배[腹]가 되어 뜨거운 국 한 그릇을 다 먹어버렸다.” 하였다. ○ 한 관리가 삼가현(三嘉縣)에 도착하니 고을 원님이 주연을 베풀며 묵은 술[陳色酒]을 내어놓았다. 빛과 맛이 아주 나쁜데 심히 권하였다. 관리가 술잔을 멈추고 얼굴을 찌푸리며, “붉은 말[騮馬]이 잘 무니 어찌 마실 수 있소.” 하니, 원님이, “무슨 말씀입니까?” 물으니, 답하기를, “술빛이 누르고 붉으니 마치 유마(騮馬) 같고 그 맛이 몹시 쓰고 시어 입이 물어뜯기는 것 같소.” 하여, 모두 크게 웃고 술좌석을 끝냈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희롱하기를, 태수가 유마주(騮馬酒)를 은근하게 권하네 / 太守慇懃騮馬酒 하였다. ○ 근세에 조정 선비에 함(咸)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권세 있는 귀족들을 가까이하지 않아 높은 관리가 되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서 속세에서, “얼음에 얼어 죽었다.” 하고 성이 김(金)가라는 사람은 권세 있는 사람 집을 분주히 다니며 좋은 관직을 얻어서 갑자기 죽으니, 사람들이, “열(熱)을 가까이하여 타서 죽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조소하기를, 불의 쥐와 얼음의 벌레 겸할 줄 모르니 / 火鼠冰虫不思兼 인간이 차고 뜨거운 것은 성질이 편벽되기 때문이네 / 人間寒熱性偏堪 염라대왕이 평화제를 만들어서 / 閻羅定作平和劑 뜨거운 김을 따가지고 찬 함가에게 보충하였네 / 殺却炎金補冷咸 하였다. ○ 서사가(徐四佳)의 〈야로송해시(野老送蟹詩 시골 늙은이가 게를 보내온 시)〉라는 절구에, 옥자라 쇠 갑옷인 내황후(게의 별명)는 맛은 / 玉鱉金甲內黃候風味 강호에서 제일류라 / 江湖第一流 창자 없이 엉금엉금 기어가니 애석하구나 / 可惜無腸空郭索 오정을 마다 않고 술자리를 가까이하였네 / 不辭五鼎近糟丘 하였다. ○ 근세에 한 높은 관리가 성질이 너무 느렸다. 한 번은 시장에서 비싼 값을 주고 말을 샀으나 3년 동안 암놈인 줄 몰랐다. 하루는 그 말을 타고 모임에 갔더니 암내를 맡고 달려드는 말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웃으며, “최 재상의 말입니다.” 하였다. 최 재상이 천천히 말하기를, “내 말이 암말이던가? 내가 처음에는 수말인 줄 알고 사두었는데, 그 도적놈이 나를 속였구나.” 하였다. ○ 세조가 등준시(登俊試)를 시행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이 장원이 되고, 강희맹(姜希孟)이 아원(亞元)이 되고, 서거정(徐居正)이 탐화(探花)로 합격하였다. 서거정이 강희맹에게 시를 보내기를, 탐화 3월은 좀 늦으며 / 探花三月差遲晩 가장 좋은 꽃향기는 2월이로세 / 最好芳菲二月天 하였다. 2월은 아원(亞元 2등으로 합격한 사람)이요, 3월은 탐화이다. 전시(殿試)에서 3등으로 합격한 사람이 탐화랑(探花郞)인 것이다. 《동인시화(東人詩話)》 ○ 일본을 칠 때 중국 사신이 여강(驪江) 청심정(淸心亭)에서 시를 짓기를, 강이 맑아서 물속의 물을 뚫어 보고 / 江淸徹見水中水 누각이 높아 산 너머 산을 볼 수 있다 / 樓逈可觀山外山 하였거늘, 달성(達城) 서거정이, “산 너머 산이란 뜻은 좋으나, 물 속의 물이란 앞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으니,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이다.” 하였다. ○ 대간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숲 사이 가물가물 얼마나 많은 집이며 / 林間出沒幾多屋 하늘 끝 아련하니 어디메 산이던가 / 天末有無何處山 하였고, 정승(政丞) 이혼(李混)의 시에, 높은 하늘에 가는 새는 어느 곳을 향하는고 / 長天去鳥欲何向 넓은 들에 봄바람 불어 쉬지 않네 / 大野東風吹不休 하였다. 상국(相國)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역졸의 손님 접대 언제나 끝날 것이며 / 郵吏送迎何日已 사신들의 내왕 잦아 어느 때 쉴 것인가 / 使華來往幾時休 하였으니, 세 사람의 구법(句法)이 비슷하나 이규보의 말은 중첩되어 원숙(圓熟)하지 못하니 당연히 이인로와 이혼에게 항복하여야 할 것이다. ○ 당(唐) 나라 시대에 신라 사신이 바다를 건너면서 시를 짓기를, 물새는 뜨다 또 가라앉고 / 水鳥浮還沒 산에 구름은 끊어졌다 또 잇는다 / 山雲斷復連 하였으며, 낭선(浪仙) 가도(賈島)가 사공을 두고 한 연(聯)을 짓기를, 돛대는 물결 아래 달을 뚫고 / 棹穿波底月 배는 물속 하늘을 누른다 / 船壓水中天 하니, 신라 사신이 감탄하고 글을 다시 계속하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사신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었다. ○ 송도(松都) 천수원(天水院) 벽에 낙화(洛花)를 읊은 시에, 비 맞아 무정하게 떨어져서 / 帶雨無情墮 바람 타고 뜻 있게 빙글 돌아가네 / 乘風作意回 시내를 비치는 천만 송이 꽃봉오리 / 映溪千萬朶 너무 활짝 핀 것이 한스럽다 / 却恨十分開 하였는데, 달성(達城) 서거정이 평하기를, “뜻은 깊지만 말이 막혀 좋지 못하다.” 하였으니,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분별해야 할 것이다. ○ 시라는 것은 말이 발로되는 것이며 기운이 충만하여야 한다. 옛날 사람들이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 설매(雪梅)는 이름난 기생으로 노래와 가사를 잘 불렀다. 조준(趙浚)이 처음 정승에 오르자, 나라의 노재상(老宰相)들이 서쪽 교외에서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었는데 술이 절정에 이르기 전에 나라에서 조준(趙浚)을 불러 대궐로 들어오라는 명이 있었다. 늙은 재상들이 모두 어울려서 술 한 잔을 올리고, 설매더러 노래를 부르도록 하니, 서쪽 동산에 꽃놀이 모임이 파하지 않았는데 / 西園未罷看花會 다시 불리어 상양궁(上陽宮)에 들어가네 / 又被宣招宴上陽 라는 시구를 노래하니, 온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그 뒤에 하륜(河崙)이 서변 순찰사(西邊巡察使)가 되어 성문 밖에 장막을 치고 전송하는 잔치를 하니 고관들이 가득 모였다. 설매가 또 노래 부르기를, 그대에게 권하노니 다시 한 잔 더하시오 / 勸君更進一杯酒 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친구라곤 없다오 / 西出陽關無故人 라는 시구를 노래하니 온 사람들이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 이규보(李奎報)의 동도(東都) 3백 운은 시(施) 자를 두 번, 지(祗)를 두 번 압운(押韻)하였으니, 어디에서 근본한 것입니까? 달성 서거정이 말하기를, “두보(杜甫)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면(眠) 자 둘, 전(前) 자 셋을 압운하였으니 옛날 사람도 이러하였거늘 어찌 이규보만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옛사람들이 시를 짓는 데는 한 구(句)도 내력이 없는 것이 없다. 정승 이혼(李混)의 상부벽루시(上浮碧樓詩)에, 영명사 안에 중은 보이지 않고 / 永明寺中僧不見 영명사 아래 강물만 흘러 흘러 / 永明寺下江自流 라는 시구는 이태백(李太白)의, 봉황대 위에 봉황새 놀더니 / 鳳凰臺上凰鳳游 봉새는 가버리고 대(臺)는 비었는데 강물만 흘러흘러 / 鳳去臺空江自流 에서 나온 것이며, 빈 산에 외로운 탑만 뜰가에 서 있고 / 山空孤塔立庭除 인적 끊어진 나루터에 빈 배만 비껴 있네 / 人斷小舟橫渡頭 라는 시구는 본래 소주(蘇州) 위응물(韋應物)의, 사람 없는 나루터에 배만 홀로 비껴 있다 / 野渡無人舟自橫 에서 나온 것이며, 하늘 높이 나는 새는 어디로 향하는고 / 長天去鳥欲何向 넓은 들에 봄바람 불어 그칠 줄 몰라라 / 大野東風吹不休 는 본래 후산(後山) 진사도(陳師道)의, 하늘 높이 나는 새는 어디로 가려는고 / 度鳥欲何向 떠가는 구름은 스스로 한가로워라 / 奔雲亦自閑 에서 온 것이며, 지난 일 아득하여 물어 볼 곳도 없으니 / 往事微茫問無處 놀에 지는 해는 사람의 수심 자아낸다 / 淡煙斜日使人愁 는 본래 이태백의, 뜬구름이 해를 가리어 / 摠爲浮雲能蔽日 장안(長安)이 안보이니 사람의 수심 자아낸다 / 長安不見使人愁 에서 나온 것이니, 시구마다 내력이 있으며, 따다 꾸민 것이 묘할 뿐더러 격조가 높다. ○ 옛사람이, “대(對)가 없는 구(句)는 없다.” 하였다. 사예(司藝) 설위(薛緯)가 집정관(執政官)에게 거슬리어 관직을 빼앗기고 시구를 짓기를, 갑한테 노하고는 을에게 옮기니 / 怒於甲者移於乙 써 주면 행하고 버리면 은둔하리 / 用則行之捨則藏 하였다. 달성 서거정은 당시 동궁(東宮)에서 연구(聯句)를 지어, 나라를 다스림은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 / 治國其猶指諸掌 하니, 문정(文靖) 최항(崔恒)이, 사람에게 눈동자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 存人者莫良於眸 라고 짝을 맞추었으니 진실로 천하에 대(對)가 없는 구(句)는 없다. ○ 이인로(李仁老)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이란 절구는 청신(淸新)하고 아름다우며 모사(模寫)가 아주 공교롭다. 진화(陳澕)의 칠언 장구(七言長句)는 호방하고 깨끗하고 건장하고 우뚝하며 기이한 체를 얻었으니 모두 고금의 절창(絶唱)으로 후일의 작자는 쉽게 따를 수 없다. ○ 옛날 시인들은 사물에 의탁하여 비유하였는데 말이 정밀하고 절실하였다. 황산곡(黃山谷)이 다미(茶糜)를 읊은 시에, 이슬이 젖었으니 하랑에게 탕병을 시험하고 / 露濕何郞試湯餠 햇볕에 말리니 순령이 화로에 향내를 내네 / 日烘荀令炷爐香 라 한 것은 장부를 꽃에 비유한 것이고, 문정(文靖) 최항(崔恒)이 검정콩을 읊은 시에, 흰 눈은 흡사 손님을 싫어하는 뜻이요 / 白眼似嫌憎客意 검은 몸둥이는 아직도 복수할 마음이 가득하구나 / 漆身還有報仇心 한 것은 문인(文人)과 열사(烈士)를 검정콩에 비유한 것으로 인용한 것이 특히 기이하다. ○ 최충헌(崔忠獻)이 문객 40여명을 모아 겨울 모란 완상하면서 이규보(李奎報)를 초청하여 여러 사람들이 성(姓) 자로 압운(押韻)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 옛사람들은 사람의 성 자를 따다 압운하여 지은 시가 없으니 이것은 다만 시가(詩家)들이 희롱한 것이지 시의 정체(正體)는 아니다. ○ 만취당(晩翠堂) 조선생(趙先生 조수(趙須)의 호)의 영추악시(詠秋嶽詩)에, 갈아놓은 낫이 흡사 새로 나온 달과 같다 / 磨鎌似新月 는 시구가 있는데, 달성 서거정을 보고하는 말이, “한퇴지(韓退之) 시에, 새로 나온 달이 흡사 갈아놓은 낫과 같다 / 新月似磨鎌 하였으니, 나는 이 말을 썼으나 뜻은 반대이다. 이것이 소위 번안법(翻案法)이다.” 하였다. ○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과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은 한때 시로 이름이 났다. 이숭인은 청신(淸新)하고 고상하였으나 웅장하지 못하였고, 정도전은 호탕하고 분방하였으나 단련이 적어 서로 장단점이 있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매번 시를 평하면서, “이숭인이 앞이요, 정도전이 뒤이다.” 하였다. ○ 사암(思菴) 유숙(柳淑)의 〈걸퇴시(乞退詩)〉에, 큰 이름 아래서 오래 있기 어렵다 / 大名之下久居難 하였더니, 참소하던 자가 신돈(辛旽)에게 고발하여 살해되었다. 정숙(貞肅) 박안신(朴安信)이 나라 일을 말한 죄로 주살 당하게 되자, 한 절구를 읊어, 군주가 간신을 죽였다는 이름을 얻을까 두렵네 / 君得殺諫臣名 하였더니, 태조가 듣고 노여움을 풀어 살려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시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하였다. ○ 신라(新羅) 학사 박인범(朴仁範)이 경주 용삭사(經州龍朔寺)에서 시를 지어, 등은 반딧불처럼 흔들리며 새 나는 길을 밝혀주고 / 燈撼螢光明鳥道 사닥다리는 무지개같이 둘리어 바위에 빗장같이 박혔다 / 梯回虹影落岩扃 라 한 것과, 고려(高麗) 참정(參政) 박인량(朴仁亮)이 사주 구산사(泗州龜山寺)에서 지은 시에, 탑 그림자는 거꾸로 강 물결 속에서 일렁이고 / 塔影倒江翻浪底 종소리는 달을 흔들어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 磬聲搖月落雲間 는 구절은 모두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시로 중국에 이름나게 된 것은 이 군자(君子)로부터 시작되었다. ○ 고려(高麗) 혁명 때 왕씨(王氏)들을 모두 해도(海道)로 몰아 보내었다. 한 중이 어떤 왕씨(王氏)와 사이가 좋았다. 해안까지 따라가 왕씨를 이별하려 하였는데 배가 이미 떠나는 중이었다. 중이 갓을 벗어 휘둘러 보이니, 왕씨가 옷의 소매를 잘라, 부드럽게 노젓는 소리 창파 밖으로 들리니 / 一聲柔櫓蒼茫外 묻노니, 산승아 너와의 정을 어이할꼬 / 且間山僧奈爾何 라는 혈서(血書)를 적어 해변으로 던졌다. 중이 헤엄쳐 주워와 통곡하며 돌아섰다. ○ 달성(達成) 서거정(徐居正)이 이르기를, “내가 이문순(李文順 이규보)의, 옷깃을 헤치니 북녘에서 시원한 바람 불어오고 / 披衿快得風從北 안석에 기대 앉았으니 마침내 해는 서쪽으로 기운다 / 隱几終敎日向西 라는 구절을 좋아하였는데 이는 말과 글자가 순하고 안온하여 좋은 댓구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한자창(韓子蒼)의 시를 보니, 아침에 기국을 떠나니 미풍이 북에서 불더니 / 朝辭杞國風微北 저녁에 영릉(하남성(河南省)의 지명)에 쉬게 되니 달이 정히 남쪽이라 / 夜泊寧陵月正南 한 구절이 있는데, 이문순의 글자를 사용하는 법이 한자창과 꼭 닮았으니 암암리에 서로 합치되었다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 천봉 상인(千峯上人)의 한 연구(聯句)에, 회나무는 늙어 천년 빛깔이요 / 檜老千年色 종소리 차가웁게 밤중에 들리누나 / 鍾寒半夜聲 하였는데,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홀로 좋아하며, “이것이 소위 ‘부처의 소리와 빛깔이 모두 공(空)이다’라는 말이다.” 하였다. ○ 서도(西都)에 금수산(錦繡山)이 있는데, 그 봉우리를 모란봉(牧丹峯)이라 한다. 고려 왕이 이곳에 행차하여 친히 구(句)를 지어 노래하기를, 북두칠성 삼사점이라 / 北斗七星四點 하니, 한 진사(進士)가 짝을 맞추기를, 남산처럼 만수하니 십천추라 / 南山萬壽十千秋 하였다. 왕이 탄복하며 제일로 삼았으니 삼사(三四)가 칠(七)이 되고 십천(十千)이 만(萬)이 된다. ○ 한 중국 사신이 태평관에다 고풍(古風) 한 편을 적고 스스로 비평하기를, “정심(精深)하고 온건(溫健)하다.” 하였다. 또, 방안마(放鞍馬)라는 시를 짓기를, 한 나라 문제는 이미 천리마를 가볍게 여기고 / 漢文旣是輕千里 조적(육조(六朝) 진(晉) 나라 장수)는 무심히 한 채찍 더하네 / 祖逖無心着一鞭 하고, 또 스스로 비평하기를, “익숙하고 건아(健雅)하다.” 하였으나, 신하 된 사람이 한(漢) 나라 문제(文帝)로 자신을 비유하였으니 식자들은 비웃었다. 《동인시화(東人詩話)》 ○ 서거정(徐居正)은 한 구안에 글자가 중첩되는 것을 애용하였다. 예를 들면, 눈 오는데 나가서 눈 오는 변두리를 가니 / 雲中出去雪邊行집 아래는 불어오고 집 위에는 평평하네 / 屋下吹來屋上平 겹겹이 쌓인 것이 몇 겹이며 / 積得重重那許重 조각조각 날아오니 또 얼마나 가벼운가 / 飛來片片又何輕 하는 따위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전서(典書) 노여(魚與)가 순흥루(順興樓)에 시를 적기를, 차가운 산기운을 밀치고 중은 빗장 채우는데 / 寒推岳色僧扃戶 찬 시내 소리 밟으며 나그네는 누각에 오르누나 / 冷踏溪聲客上樓 하였고, 평장사 허백(許伯)의 〈간성루(杆城褸)〉에, 오경의 새벽빛은 빈 누각에 먼저 들고 / 五更曉色先虛閣 한 잎의 가을 소리 작은 누대에 가득하네 / 一葉秋聲滿小樓 하였으니, 누가 나은가? 서달성이, “노여의 시는 너무 공교로워 오히려 졸렬하고, 허백의 시는 속된 것 같으면서도 대단히 기이하다.” 하였다. 《동인시화(東人詩話)》 ○ 우리 나라 사람들의 시에 자규(子規)를 읊은 것이 많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견간(李堅幹)의, 창너머 두견새 소리 밤을 새워 들려오니 / 隔窓杜宇終宵聽 하였고, 윤여형(尹汝衡)의, 두견이 울고 울어 피 쏟아 핀 두견화라 / 杜鵑啼血杜鵑花 하였고, 조계방(曹係芳)의, 달 밝은 밤에 자규 와서 우네 / 子規來叫月明時 라고 한 말은 모두 맑고 처절하다. 그 중에 이견간의 시가 더욱 좋다. 상동 ○ 시는 비평하지 않고서는 결점을 알 수 없으니 마치 의사는 처방을 버리고서는 병을 고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패설(稗說)》과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같은 책이 나옴으로부터, 우리 나라 시학(詩學)의 정수(精粹)를 비로소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인시화서(東人詩話序)〉 ○ 김부식(金富軾)과 정지상(鄭知常)은 시(詩)로 당대에 이름이 났다. 김부식의 시는 엄정하고 전실(典實)하여 정말 덕 있는 사람의 말 같고, 정지상의 시는 말과 운(韻)이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격조가 호탕하고 빼어나서 만당(晩唐)의 시체(詩體)를 깊이 터득하였으니 두 사람은 기상이 다르다. 《동인시화(東人詩話)》 ○ 강릉부(江陵府)에 운금루(雲錦樓)가 있다. 누대 남쪽에는 못이 있으며 연꽃을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으며, 섬 위에는 또 대나무를 심어 못물이 파랗게 넘치고 연꽃이 만발하여 붉은 향기에 푸른 그늘이 띠같이 둘렸는데, 떼지어 말쑥하게 서 있는 것과 깨끗하게 멀리 바라보이는 품은 기이한 자세와 독특한 기상이 서로 같지 않다. 〈서달성기(徐達城記)〉 ○ 그대에게 권하노니, 추부를 추하다 하지 말고 / 勸君勿醜婦醜醜 그대에게 권하노니, 박주를 맛없다 하지 마라 / 勸君勿薄酒薄薄 고래로 미주는 사람의 천성을 해치는 법이고 / 古來美酒伐人性 예쁜 계집은 나라를 망치지 않았던 일 없다 / 未有哲婦不亡國 사가의 〈후박박주(後薄薄酒)〉 ○ 금강(錦江) 아래 쪽에 정자(亭子) 하나가 있다. 옛날 한 안렴사(按廉使)가 정자에 올라 전망을 하다가 술이 취하여 자신도 모르게 춤을 추었다. 그래서 그 정자 이름을 안무정(按舞亭)이라 하였다. 그 후 그 고을 원이 정자를 중수하려 하였으나 감사가 못하게 하여 수리하지 못하였다. 어떤 시인(詩人)이 비웃기를, 옛날은 술 취하여 춤추던 안렴사요 / 昔有醉舞按廉 지금은 술깨어 시를 읊는 감사다 / 今有醒吟監司 하였는데, 서달성의 시에, 풍경을 죽이는 이 그 누구인가 / 殺此風景是何人 백발의 그 감사는 정말로 나쁜 손님이라 / 白頭監司眞惡客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공산십영(公山十詠)〉에, 금지함담(金池菡萏)이 있으니 서달성이 시에, 직녀가 비단을 짜서 / 天孫爲織雲錦機 푸른 것은 치마요 붉은 것은 저고리라 / 綠爲裳兮紅爲衣 바람에 좋고 비에 좋고 달빛에도 또한 좋아 / 宜風宜雨又宜月 가벼운 연기와 가는 안개에도 향기가 휘날리네 / 輕煙細霧香霏霏 하였다. 상동 ○ 수령이란 곧 옛날의 제후니 백성들에게는 부모의 도리가 있고, 관리들에게는 군신의 분의(分義)가 있다. 부모의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면 백성들이 기뻐할 것이요, 위엄과 복록의 자루를 쥐고 관리들을 부리면 관리들은 두려워할 것이다.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는 것은 가혹하게 정치를 잘못하기 때문이요, 관리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태만하여 정치를 잘못하기 때문이다. 《사가정집(四佳亭集)》 ○ 남곡(南谷) 이선생(李先生)의 두 손자가 있었는데, 큰 손자 종검(宗儉)과 막내 손자 종겸(宗謙)은 나이가 늙지도 않아서 모두 관직을 사직하고 집에 돌아와 정자를 짓고, 효우정(孝友亭)이라 하였다. 두 선생은 시골 복장을 하고, 흰 수염ㆍ붉은 얼굴로 날마다 그곳을 거닐며 시를 읊고 담소하니, 희희낙락하는 풍치가 고상하여 한 고을 사람들이 흠모하였다. 옛날에 찾아보면 한(漢) 나라 소광(疏廣)ㆍ소수(疏受)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다. 서달성의 〈동정기(同亭記)〉 ○ 동도(東都)에 한 창부(娼婦)가 홀로 살고 있었다. 하룻밤에 큰 벼락이 치더니 갑자기 그치고 마당에 한 물건이 떨어졌는데 광채가 찬란하였다. 가까이 가 보니 둥그레한 밝은 구슬이 계란 크기만 하였다. 주워다 방에 두니 저녁마다 등촉(燈燭)같이 밝아 가는 털도 보였다. 한 소년이 속여서 가지고 가면서 거짓말로, “관청(官廳)에 납부한다.” 하였다.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어 조사하였으나 결국 찾지 못하였다. 소년은 평소에 가난하더니 날로 부유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그 구슬 덕택이라고 의심하였다. 《필원잡기(筆苑雜記)》 ○ 우리 나라는 오행(五行)의 목(木)에 속하여 청색(靑色)을 숭상하여야 옳은데 백색(白色)을 숭상하고 있다. 이것은 백색은 금이기 때문에 금이 목(木)을 이기니 불가하지만 대개 양(陽) 안에 음이 있고 음(陰) 안에 양이 있으니, 청에 속하면서 백을 숭상하는 것은 음 가운데 양이 있는 때문이다. 상동 ○ 연안(延安)에는 붕어[鮒魚]가 많이 나는데 매우 살쪘다. 한 원님이 찐 붕어를 몹시 좋아하여 하루에도 3ㆍ4차례 올리면 그때마다 비었다. 고을 사람들이 비웃으며 청사(廳舍) 벽에다 크게 쓰기를, “6년 동안 무슨 사업하였는가, 한 못의 고기만 다 먹었네.” 하였고, 별호를 붕어 무덤[鮒魚塚]이라 하였다. 상동 ○ 제주(濟州) 땅에는 진기한 산물이 많이 난다. 귤ㆍ유자ㆍ큰 유자ㆍ감귤ㆍ아름다운 조개ㆍ곧은 노나무 등은 다른 고을에 없는 것들이다. 해물(海物)의 경우는 사람에게 자산이 되는 재화가 많다. 그래서 이익을 도모하는 상선의 왕래가 북채[梭] 드나들 듯한다. 《사가정집(四佳亭集)》 에서 나옴 ○ 천지에 가득 찬 물건이 만 가지로 많으며 모두 각각 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산은 산(山)대로의 본성이 있고, 물은 물대로의 본성이 있으니 우뚝 솟은 것을 누가 산인 줄 모르며, 줄줄 흘러가는 것을 누가 물인 줄 모르리오마는 거기에서 다른 것 같으면서 같은 것 이 있고, 같은 것 같으면서 다른 것이 있음은 변화가 일정함이 없는 묘리를 보여야 한다. 〈석가산기(石假山記)〉 ○ 산의 기세가 좌우로 계속 이어져 불쑥 솟아나면 봉우리가 되고, 밋밋하게 올라간 것은 영(嶺)이요, 그윽하게 들어간 것은 골짜기요, 초목이 무성하여 산록을 형성한다. 갑자기 내려갔다가 올라갔다 하여 푸른 것이 얽히고 흰 것이 둘려서 형상이 한결같지 않다. 상동 ○ 공산(公山)에 어떤 아전의 아들이 있었는데, 고을 원의 아들을 따라 독서하였다. 원의 아들은 웅장(熊掌)을 얻어 먹게 되자 아전 아들에게 물고기 대가리를 주면서, “왜 곰의 족발을 먹지 않나?” 하니, 아전 아들이, “대장부가 뜻을 세우는 것은 사람 위에 서기 위한 것이다. 물고기 머리는 먹을지언정 곰의 발은 먹지 않는다.” 하여, 세상 사람이 기이하게 생각하더니 후일 과연 높은 관리가 되었다. 《골계전(滑稽傳)》 ○ 서달성(徐達城)의 연꽃 못에 수놓은 오리[蓮塘繡鴨]라는 시에, 푸른 일산 붉은 단장에 그늘진 푸른 물결 / 翠蓋紅粧蔭碧漣 한 쌍의 꽃오리는 비단으로 장식하니 / 一雙花鴨錦成鈿 세상의 주살들이 무슨 상관 있겠는가 / 江湖矰繳何曾管 한가히 맑은 모래에 기대어 평온하게 잠자누나 / 閑倚晴沙穩作眠 하였다. 본집(本集) ○ 송경을 지나며 〈회고(懷古)〉라는 시를 지으니, 한 봉오리 송악이 높이 하늘로 들어가고 / 一朶松巒高入天 황성에 해 떨어지니 찬 연기만 잠겼구나 / 荒城落日鎖寒煙 마음 아프게 전조 일들 물으려 하니 / 傷心欲問前朝事 경물이 모두 전성시대와 다르구나 / 雲物渾非全盛年 하였다. 상동
[주-D001] 정정정(亭亭亭) : 송(宋) 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에, “꼿꼿하게 말끔히 서 있으니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 가지고 놀 수는 없다.” 하였다. 여기서는 정정(亭亭)이란 연꽃에 바르게 꼿꼿이 서 있는 뜻이다.[주-D002] 유자[橘]이 회수(淮水)를 …… 들었지만 : 《안자춘추 내편》에, “안자가 초(楚) 나라에 가니 초왕이 연회를 베풀었다. 거기에 관리가 도적 하나를 잡아왔는데 제(齊) 나라 사람이라 하였다. 초왕이 안자에게, ‘제(齊) 나라 사람은 도적질을 잘하는가’하고 물으니, 안자가 ‘귤(橘)은 회수(淮水) 남쪽에 나는 것인데 회수 북쪽에 오면 탱자가 됩니다. 이것은 풍토가 달라 그런 것입니다. 백성이 제 나라에서 자랄 때는 도적질을 하지 않다가 초 나라에 들어와 도적질을 한다 하니 초 나라의 풍토가 도적질하게끔 만든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한다.[주-D003] 서곤체(西崑體) : 시를 짓는 데 어려운 전고(典故)를 많이 써서 쉽게 알 수 없게 쓰는 문체로, 송 나라 양억(楊億)ㆍ유균(劉筠)ㆍ전유연(錢惟演) 등이 당 나라 이상은(李商隱) 등을 본 뜬 것이다.[주-D004] 윤사분은 시기심 많고 험하다 : 《논어 팔일(八侑)》에 ‘巧笑倩兮여 美目盼兮’라는 구절이 있는데, 윤사분의 이름자 중 분(昐)이 위 구절의 변(盼)자와 비슷하고 천(倩) 자가 시기한다는 시(猜) 자와 비슷하므로 농담을 한 것이다.[주-D005] 감로(甘露)의 변(變) : 당 나라 문종 태화(太和) 9년에 재상 이훈(李訓)과 왕애(王涯) 등이 환관들을 죽이려 모의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어 오히려 죽고 말았는데, 이 사건을 말한다.[주-D006] 이슬이 …… 시험하고 : 하랑(何郞)은 삼국시대 하안(何晏)으로 용모가 아름다웠는데 얼굴에 흰 분을 바르고는 얼굴에 손을 대지 않았다. 위 나라 명제(明帝)가 그를 시험하기 위해 무더운 여름철에 뜨거운 탕병(湯餠)을 먹게 하니 땀이 비오 듯하여 소매로 얼굴을 닦자 더욱 아름다웠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주-D007] 순령(荀令) : 순령은 후한 때에 사람인 순욱(筍彧)으로 조조에게 신임을 받았다. 어느 날 민가에 앉았는데 사흘 동안 향기가 사라지지 않으니 그를 순령향(荀令香)이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