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시인의 에스프리
일상성에서 탐색하는 비평적 사유(思惟)
-- 나와 너의 章法 시인의 에스프리
* 소크라테스는 일상적인 자기와 다른 ‘진실한 자기’에 눈을 뜬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이스 델포이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라는 글이 적혀 있는데 이는 ‘네 분수를 알라’ 혹은 ‘자신이 죽을 곳을 알아라’는 뜻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거리나 체육장에서 아름다운 청소년들을 상대로, 또는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정의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들로 그 주제는 대부분 실천에 관한 해법을 찾는 것이지만 그는 항상 ‘나는 오직 내가 무지하다는 한 가지 일을 알고 있다’ 는 고백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통해서 오히려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무지를 자각하고 자신을 근원부터 질문당하는 곳에 놓아 두고 애지(愛知)의 심오한 철학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데스의 외침이 문득 뇌리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비로소 챙겨보는 자아의 인식- 존재는 무엇인가. 존재에서 성찰하고 각성(覺醒)하는 ‘나’는 지금쯤 어느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가. 나는 알지 못했다. 모질게도 인간 칠정(七情)의 고초(苦楚)를 모두 체험하면서도 아직도 나를 잘 알지 못한다. 잘못된 판단이나 그 모순을 깨우치고 옳은 길로 유도하는 인간 본연의 진실을 몰랐다.(「나와 너의 장법 . 서시」중에서)’는 자성(自省)이 절실하게 되었다.
* 너 자신을 알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관찰하라. 네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면 너 자신의 마음을 보라고 독일의 시인 실러(Schiller)가 말했다. 이는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타인을 세심하게 관찰해 보라는 말이다. 나와의 상관성에서 타인(너)에 대한 정확한 동향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평법한 말이지만, 그렇게 가볍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가 아니다. 반성하고 사고(思考)하고 노력하는 것이 참된 자기 자신인 것이다라고 영국의 시인 필(peele)도 한 말씀 거들고 있다.
그래서 ‘나’라는 실재(實在)의 나와 ‘너’라는 이상 속의 나를 시적 시츄에이션으로 설정하고 대화를 통해서 자아를 인식하거나 질책하는 시적전개를 시도하고 있다. 아마도 ‘너’는 ‘나’의 분신이거나 또는 그림자의 소임으로 동행하거나 밀착해서 사사건건 문제제기와 해법을 적시하기도 한다. ‘너는 나를 오늘도 미행하면서도 정도(正道)를 안내하려는 영원한 반려자인가. 생사고락을 함께 할 동반자인가. 이제는 우리 서로 밝혀두고 동행하면 어떠한가.(나와 너의 장법 . 1」중에서)’라고 그의 실체(實體) 구명(究明)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사상가 몽떼뉴(montaigne)는 그의 『수상록』에서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어떻게 하면 자기가 완전히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되느냐를 아는 것이다라는 말로 자아를 책(策)하고 있다. 나는 외친다. 문제는 내가 나를 사랑(자애(自愛)해야 한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가. 운명으로 점지된 빈곤과 무지의 동행은 자비나 박애는커녕 자신조차 사랑할 엄두가 없었네. 나의 불운을 극복해낼 뾰족한 방도가 없어서 그때부터 방황이 시작되었지. 그러나 ‘내 온 몸은 바로 기쁨이다. 노래다. 검(劍)이다. 불꽃이다’라고 노래한 하이네의 열창(熱唱)을 들으면 내가 나를 너무 무시하고 나를 등한시한 영육(靈肉)이 구겨진 채 팽개치지는 않았나 의구심이 들기도 했었다. 황폐해지는 현실을 탓하면서 자신을 학대하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우둔이 한 생애를 동행하게 되었지. 이 봐, 그대는 사유의 깊은 샘을 그냥 허공으로 증발하는 게으름이 잘못된 아집(我執)으로 변해서 이해나 타협을 이루지 못하는 졸장부가 되지 않았나 다시 한번 되짚어보게나. 먼저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자애(自愛)의 신념을 확고하게 정립하길 바라네.(「나와 너의 장법 . 54」 전문)‘
* 다음은 존재의 인식이다.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jaspers)는 인간은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은 자기를 의식하고서 자기의 세계를 탐구하고 계획을 세원서 그것을 바꾼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동일물(同一物)의 무의식적인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 자연의 성사(成事)로부터 얻어맞는다. 그러나 인간은 현존재라는 것만으로 완전히 인식이 끝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자기가 그 어떤 무엇인가를 더욱 자유롭게 결단한다. 인간은 정신이며 본래의 인간의 상황은 그 정신적 상황이라 하겠다는 논지로 존재를 첨삭(添削)하고 있다.
채근담에서도 ‘세상 사람들은 다만 <나>를 너무 참된 것으로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 기호와 번뇌가 있다. 옛 사람은 이르기를 <내가 있는 것도 알지 못하면서 어찌 물건 귀함을 알리오.> 하고 또 이르되 <이 몸이 나 아닌 줄을 안다면 번뇌가 어찌 다시금 침범하리오> 하였으니 참으로 옳음이다. (世人只緣認德我宇太眞 故 多種嗜好 種種煩惱 前人云 불得 知有我 何知物爲貴 又云 知身不是我 煩惱更何侵 眞破的之言也)’ 하였으니 ‘나’의 존재는 바로 인생의 지향점 인식을 향해서 진실탐구에 매진하는 것이다.
* 다음은 생명 존귀의 사유(思惟)가 필요하다. ‘만유(萬有)의 생명을 자비롭게 존중하는가. 사생관두(死生關頭)에서 그 고통을 참으면서 지탱해온 생명이 신비롭지 않은가. ‘삶이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고 죽음이란 고요한 못에 달이 가서 잠기는 것이다’라는 정완영 시인의 말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 펼쳐지는 생명의 환희,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서 계절에 투영되는 이미지가 변하듯이 생명의 열광은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사계의 정경에서 생멸(生滅)의 진실을 알 수 있었으니, (「나와 너의 장법 . 55」 중에서)’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의 환희’에서 ‘생멸’의 순리를 ‘사계의 정경’에서 이해하려는 심저(心底)에는 심도(深度)있는 시적 원류를 되뇌이게 하고 있다.
또 한편 작품 「나와 너의 장법 . 53」 중에서도 ‘지난날의 고난을 분노로 원망하거나 삶을 포기하려 한 일이 있느냐?’라거나 ‘지난날의 고통과 분노를 강물에 흘려보내려는 인내의 시간은 갈등이었다. 휑허니 한 몸 날려 풍덩 강심(江心)을 만나면 이런 모든 상처의 영육(靈肉)은 끝나겠지.’라는 어조는 실망과 체념과 기원들이 화해하는 명민(明敏)한 의식의 흐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작품 「나와 너의 장법 . 56」 중에서는 ‘이 겨울, 어느 공원묘원이거나 선영(先塋) 응달진 비탈 언땅 속에 매장되어 지금도 긴 꿈을 꾸는 영혼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인명재천(人命在天)인가. 늙고 병들어 남은 사람들을 고생만 시키다가 가는 사람,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는 사람, 모두가 ‘죽음은 위대하다.’고 외친 릴케의 말처럼 위대한 죽음을 맞기 위해 시혼(詩魂)을 불태우고 있는지.’ 참으로 가늠되지 않는 생명의 처절한 절규가 펄럭이고 있다.
* 이러한 생명과 절대적으로 상관하는 삶의 비애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말이 어눌해져서 서울에서 좀 큰 병원 응급실로 달려간 일이 있다. 신경과 담당의사 왈 조금만 늦었으면 더 큰일을 맞을 뻔했다면서 다행이라는 의견이었다. 서울역이나 시장에만 와글와글 사람천지인 줄 알았는데 병원에도 아픈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이제 환시(患詩) 몇 편을 써야겠다. 무지막지하게 쏟아 부었던 술과 담배가 만병(萬病)의 근원이라는 진실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을 때 자탄(咨歎)과 분노를 풀어 밤새도록 영육을 적셨던 어느 날 참이슬 2병, 담배 3갑과 그동안 겹친 피로가 폭발했는지 담배 피던 손이 흔들리고 말이 어눌해지자 급히 아들의 승용차를 타고 동서한방병원⟶강북삼성병원 응급실에 도착, X-Ray 촬영을 하고 입원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어디에도 고통을 느낄 수 없는데 말을 할 수가 없다. 시각과 청각은 아주 또렸했다. 병실에 누워 다른 환자들의 신음(呻吟)을 들으면 아아, 신체의 조그마한 한 부분이라도 소흘히 다루어서는 안되겠다고 이제사 눈치를 챘는가. 그러니까 술도 담배도 모두 끊어. 한번 주어진 생명인데 아주 소중하게 다스려서 천명(天命)을 다해야지 않겠나.
--「나와 너의 장법 . 48」 전문
선생님 치료가 날로 좋아져요. 약 잘 드시고 주사도 잘 맞으세요. 간호사가 쌩긋 웃으면서 지나간다. 그리고 가끔 걷기운동도 열심히 하세요. 그 간호사의 뒷모습은 천사다. --중략-- 혈관이 막히고 혈전이 응고(凝固)되어 혈압이 상승하고 고지혈의 염려가 모두 담배에서 비롯된다는 경이로운 사실과 함께 담배를 끊어야 살 수 있다는 구두 진단이다. 담배를 끊키로 했다.--중략-- 아아, 담배로 인해서 죽을 수는 없겠거니 40년간 피워 물었던 유일한 기호(嗜好)를 어느 날 아침에 버렸다.
--「나와 너의 장법 . 49」 중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해본 일이 있는가? 몇 년전부터 두 달에 한번 정기검진을 받기 위해 강북삼성병원 신경과를 찾는다. 혈압도 정상, 혈당도 정상- 그런데 왜 병원에 와서 상담을 하고 혈압약, 당뇨약 등 약처방을 받아서 매일 복용해야 하는지? 담당의사는 말한다. 예방을 해야 큰 병이 침노하지 않아요- 아아, 그렇구나. 넘어질 뻔 했던 육신이 그 기능을 다할 때까지 부족하거나 혹은 넘치는 혈류(血流)의 향방을 잔잔하게 간추리는 생명 존재의 잠언(箴言).
--「나와 너의 장법 . 50」 중에서
이렇게 ‘환시’를 정리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하루에 몇 번씩이라도 앰뷸런스 소리가 요란하게 지나간다. 또 가슴이 철렁한다. 누군가 중병(重病)에 걸렸거나 불의의 사고로 다쳤나보다. 육체가 망가져서 병원에서 치료로 고치는 것은 좋은데 오늘날 이기주의적 정신의 황폐는 치유할 처방이 없는 듯해서 쩍쩍 입맛만 다시고 있는 것이다.
* 매슈 아널드가 ‘시란 본질적인 면에서 인생의 비평이다’라고 했다. 인생의 비평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모든 생활 저변에서 발생하는 일들에서 비인간적인며 반사회적인, 그리고 불합리적인 현실들을 시로 비평할 필요가 발생한다.
세상이 시끄럽던 시절, 8,15. 6,25. 4,19. 5,16. 등 사회적 변혁에 따른 인간들의 사유는 더욱 폭넓게 진취적으로 향상하면서 또 다른 방안으로 삶의 방식도 전환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국가적으로는 하나의 역사적인 흐름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거기에서 생성하는 갈등은 너무나 많은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인 개혁이나 변동은 우리 문학에서도 저항적이거나 타도의 대상으로써 소재나 주제로 형상화하는 경우를 많이 읽을 수 있게 된다. 가령 일본 압제시대에서는 애국적인 소망이 넘치는 작품을, 동족상잔의 비극에서는 생명의 존엄과 동포애를, 그 후에 독재나 부정선거 등에 대한 민주주의 완성을 그리고 유신이나 도 다른 상황에서는 좌우간의 민족적인 분열과 적대시 등의 이데올로기적인 대결 등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구조로 변경시키는 국가의 비운도 있었다.
그러나 차츰 국가적으로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할수록 인성(人性)은 황폐화를 가속화하고 있어서 우리 시인들은 정서는 화해의 해법을 탐색하는 주제를 취택하는 경향의 작품들을 선호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문학적인 진실을 탐구하려는 지적인 노력이 발현되고 있었다.
이 ‘장법’에서도 불감증시대에서 북쪽에서는 핵무기를 개발하고 탄도미시일을 쏘아올리는 등의 불안을 조성해도 그런가보다 하고 안이한 습성에 젖어 있다. 그리고 ‘어디선가는 화산이 폭발해서 마을을 용암으로 쓸어버려 폐허가 되어 회생자가 얼마이고 이재민이 얼마라는 위기의 소식이’ 뉴스로 나오지만 남의 일이니까 나는 모른다는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나라 안이 시끌시끌 위기상황인데 AI(조류인플루엔자-Avian Influenza)까지 창궐(猖獗)해서 양계농가의 닭과 오리를 생매장(살처분)하는 울분까지 겹쳐지고 있다. 이 고병원성 조류독감은 냇가 갈대밭에서 숨져 있는 야생조류의 시체를 해부해서 검사해보면 이 병에 감염되어 죽었음을 밝혀내는 것. 인체에도 감염될 수 있다니 각별히 조심해야겠다. 이번엔 또 구제역(口蹄疫)대란까지 겹쳐져서 소나 돼지 수십만 마리를 살처분하는 비극이 또 발생했다.(「나와 너의 장법 . 57」 중에서)’라거나 ‘황사 마스크를 꼭 착용하고 출근하거나 외출하라는 기상캐스트의 쩌렁쩌렁한 울림이다. 창문을 열지 말고 노약자는 되도록이면 집 밖 출입을 자제하라는 당부이다. 이제 우리 지구에도 환란(患亂)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가.(「나와 너의 장법 . 58」 중에서)’라는 위기의식이 시의 사회성을 승화하고 있는 것이다.
시의 시사성 어찌보면 사회를 살고 있는 시인들의 진실 탐구에서 일종의 고뇌와 갈등이 교차하는 의식의 흐름인지도 모른다. 시읜 사회성은 우리 인간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 교류하고 집단을 이루면서 사회를 형성하게 되는데 시도 이처럼 그 사회 생활에서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의 현실에 직면하여 거기로부터 끊임없이 주제를 찾아내려는 시적인 욕구가 있다.
현대의 사회는 더욱더 그 기구가 복잡화하고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며 불합리한 것이 곳곳에 노출되어 있어서 시인은 비록 자기 내부에 침잠한 갈등을 그들의 사고와 표현으로 분사(噴射)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는 종전까지는 순수하게 생활이나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거기에 몰입해서 인간들의 덕목(德目)인 진선미(眞善美)의 발현으로 시의 형태를 탐미적으로 형상화했으나 현대시의 지평이나 지향점은 이렇게 사회성도 중시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살펴보는 것은 ‘대통령이 탄핵소추가 되어 헌법재판소에서 심리가’ 인용이 되는 국민의 수치가 나타나도 무관신이며 국정농단이니 촛불시위니 국기를 문라시킨 대통령도 있고 이를 계기로 국민성이 양분하는 위험천만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내버스에 백발 노신사가 승차한다. 앉을 좌석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그냥 서서 가기로 한다. 차창 아래에는 ‘노약자석’이니 ‘임산부석’이라는 표지 딱지가 붙어 있으나 마나하다. 그 자리를 차고 앉은 젊은이는 스마트폰으로 연신 무언가를 두들기고 있고 또 다른 이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거나 아예 못본 척 졸고 있다. 그렇다. 요즘도 문맹(文盲)이 많은가 보다. 한편 버스에서는 ‘노약자석과 임산부석은 그들을 위하여 비워두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다. 아마도 이들은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聽覺)에도 문제가 있는 듯하다. 분명히 노자(老者)도 아니요 약자(弱子)도 아니며 병자(病者)도 아닌, 또한 임산부도 아닌 요즘 젊은 애들의 삐뚤어진 정신머리가 서글프기만 하다. 이봐, 물질문명이 최고로 발달하고 입시위주의 교육에 매달리니까 윤리 도덕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렇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나. 백발 노신사는 끝까지 서서 가다가 혀끝을 차면서 하차한다.
--「나와 너의 장법 . 63」 전문
시의 사회성에는 작품의 주제가 사회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에 상응하는 능동성을 다루고 있다. 거기에는 소박한 생활의 단면을 엿보게 하는 것부터 정치적인 이슈나 사회 체제의 변혁을 갈망하고 또 인류 평화의 해법을 모색하는 등의 작품경향을 자주 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위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사회적인 부도덕과 비윤리적인 정서를 요즘 일부 청년들에게서 목도(目睹)되는 흔한 일상을 개탄하는 하나의 시의 사회적인 사소한 문제들을 시인의 시각에서 스스로 체념하는 형상을 읽을 수 있게 한다.
* 시는 왜 쓰는가? 일찍이 영국의 엘리엇(T. S. Eliot)은 그의 글 「시의 효용과 비평의 효용」에서 ‘시의 의미의 주된 효용은 독자의 습성을 만족시키고 시가 그의 마음에 작용하는 동안 정신에 대해서 위안과 안정감을 주는데 있다’고 했다. 또한 시는 ‘무엇이 사실이다’라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좀더 리얼하게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시의 위의(威儀)나 본령(本領)은 우리의 고전에서나 볼 수 있는 음풍농월(吟風弄月)이나 전근대적인 주제인 인간의 진선미 탐구를 벗어나 지적인 자양이 가미된 인생론이나 가치관 추구를 시적 진실로 현현되어야 한다.
시는 무슨 쓸모가 있는가? 시를 쓰면서도 많은 회의를 느낀다. 젊은 시절에는 ‘나도 시인이 되어야지’라는 감상적인 꿈으로 낭만적인 소망에 젖어본 일이 마침내 시인의 길로 들어섰으나 속된 말로 시 한 편이 연탄 한 장, 쌀 한 됫박도 되지 못하는 현실적인 고뇌가 따랐다.
그러나 왜 골치 아프게 시 한 편을 창작하기 위해서 그렇게 골돌하게 머리를 싸매고 있을까. 대체로 시의 효용을 살펴보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생각, 느낌을 표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표출되지 않은 답답한 감정에 얽매인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쾌감을 맛보게 된다.
시는 또한 그 간결한 말과 가락을 통해서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통하고 어울리어 하나가 되게 한다. 나는 다른 작품을 읽을 때 그 시인과 동일한 위치에서 무언의 대화를 교감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C.P.Boudelaire)는 우리의 기쁨이든 슬픔이든 시는 항상 그 자체 속에서 이상을 좇는 신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써 시의 지향점을 적시해 주고 있다.
시는 언어 예술이다. 그렇다면 수필 소설 등 다른 장르는 언어가 필요 없느냐. 아니지. 물론 필요하지. 그러나 언어가 함축하는 오묘한 절대적인 그 무엇을 눈치 채기까지는 언어가 숨겨둔 눈짓 손짓들을 나타내려면 다른 분야보다는 몇 갑절의 언어와 대화를 해야되겠지.
나는 밤을 새웠다. 한 언어의 몸짓을 알기 위해 눈에 핏발이 서도록 국어사전을 뒤졌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 정체 아아, 벌써 휘움한 새벽빛이 창문에 어른거린다. 이 봐. 그러기에 평소에 언어훈련을 충실히 하라는 선각자들의 말씀을 새겼어야지. 너는 나의 부족한 부분, 어쩌면 결핍된 언어의 창고에 까지 들어와 시는 왜 언어가 풍족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구나.
너는 누구냐. 나의 내면에서 이글거리는 시의 원류를 따라 네가 적시(摘示)하는 메시지가 오늘은 더욱 선명한 무지개의 영롱한 빛으로 유혹하는 너는.
-「나와 너의 장법 . 6」 전문
현대시 작법에는 외적(사물)인 요소와 내적(관념)인 감성이 융합되는 절묘한 이미지가 형상화할 때 사람들은 좋은 시라고 했다. 이론으로는 잘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절창(絶唱) 한 수 건지지 못하는 옹색한 변명. 그 옆에서 너는 또 말을 거든다. 어이. 작품을 위한 고뇌가 없으니까 사유(思惟)의 깊이가 얕아서 사물을 응시하는 태도에서부터 골깊게 각인된 칠정(七情)의 한 부분에서 축적된 체험의 이미지가 재생되지 못하는 거야. 가령 꽃이나 달이 ‘그리움’으로 작품에 투영되었다면 그것을 사은유(死隱喩)라고 해서 이미 낙화로 땅에 딩굴면서 뭇사람들의 발끝에 밟히고 있거나 이미 지고 없는 허공의 달 그림자이겠지. 아아, 너는 나의 뇌리에서 언제나 동행하는 반려자이리.
-「나와 너의 장법 . 4」 전문
* 나를 발견했는가? 이번 시집의 제재가 ‘나’에 대한 집중적인 울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진정한 ‘나’를 탐색하려 했으나 아직도 미흡하다. 이는 절실성을 표출하려는 표현력과 언어의 불충분한 나만의 무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너를 알라고 외친 소크라테스의 진실을 되뇌이면서 자아에 대한 연구와 자성이 더욱 필요하다는 자애의 정신이 충만해야 하리라는 점을 굳게 믿는다.
아아, ‘나의 미숙한시법은 언제쯤 샛별로 반짝일 수 있으랴(「나와 너의 장법 . 5」 중에서)’ 또는 ‘먼저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자애의 신념을 확고하게 정립하길 바라네(「나와 너의 장법 . 54」 중에서)’ 그리고 결론으로 ‘내가 나에게 좀더 현명하게 지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생각이나 느낌이 올바르지 못했었거나 선악의 분별이 흐려질 때 혹은 성찰이 미흡할 때 그리하여 개선의 여지가 없고 옹고집과 오기로 나 자신을 스스로 오도(誤導)하고 있지는 않는가.(「나와 너의 장법 . 결」 중에서)’와 같이 아직도 많은 정신적 수련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 나는 화가다. 정물화가다. 그것도 아주 정밀하게 스케치하는 화가다. 지금까지 창작해온 자야의식에서 시야를 더욱 확대해서 그리고 투명하게 응시하거나 그 착목(着目)된 사물을 현미경으로 살피듯이 속살까지 투영할 것이다.
그리하여 장법 이후에는 다양한 이미지를 동화해 본다. 그러나 시법만 약간 다를뿐, 거기에 안착한 주제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 )에 관한 연구는 속된 잡스런 일상에서 탈출하려는 심적 변화를 그리면서 거기에서도 인생문제, 사회성문제 등이 내포되어 있어서 본래의 심성인 수용과 긍정 그리고 포괄의 내면적인 시심은 다시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정밀한 정물화가다. 나무껍질을 벗기면서 속살까지 그려낸다. 속살에서 풍기는 향기로운 그 정신도 휘휘한 화법으로 표현한다.
어느 날 버스 앞좌석에 앉은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다. 헤어스타일과 어깨 곡선이 질펀하게 어느 계곡을 흘러간다. 그 여인의 인생행로에 덧칠한다. 내면에 깊숙이 간직한 눈물의 체험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어쩌면 내가 살아온 불행한 삶의 전형(典型)이다.
어떤 한 사물이나 한 사람에 대해서 매번 그림을 그리지만 감춰진 내적 진실은 표현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는 얼치기 화가다. 사는 일이 모두 그러하다. 형태나 명암이 분별되지 않는 단색의 데생만 그리는 아직 미흡(未洽)한 화가다.
--「나는 화가다.」 전문
그렇다. 나는 어찌 되었거나 아직 미흡한 ‘화가’지만 지속적으로 서툰 크레파스를 하얀 캔버스에 낙서처럼 갈겨나갈 것이다. 그것이 정립된 화고한 시적 진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만의 지적 수준에 합당하도록 그림을 그릴 것이다.* 나와 너의 장법
* 소크라테스는 일상적인 자기와 다른 ‘진실한 자기’에 눈을 뜬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이스 델포이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라는 글이 적혀 있는데 이는 ‘네 분수를 알라’ 혹은 ‘자신이 죽을 곳을 알아라’는 뜻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거리나 체육장에서 아름다운 청소년들을 상대로, 또는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정의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들로 그 주제는 대부분 실천에 관한 해법을 찾는 것이지만 그는 항상 ‘나는 오직 내가 무지하다는 한 가지 일을 알고 있다’ 는 고백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통해서 오히려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무지를 자각하고 자신을 근원부터 질문당하는 곳에 놓아 두고 애지(愛知)의 심오한 철학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데스의 외침이 문득 뇌리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비로소 챙겨보는 자아의 인식- 존재는 무엇인가. 존재에서 성찰하고 각성(覺醒)하는 ‘나’는 지금쯤 어느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가. 나는 알지 못했다. 모질게도 인간 칠정(七情)의 고초(苦楚)를 모두 체험하면서도 아직도 나를 잘 알지 못한다. 잘못된 판단이나 그 모순을 깨우치고 옳은 길로 유도하는 인간 본연의 진실을 몰랐다.(「나와 너의 장법 . 서시」중에서)’는 자성(自省)이 절실하게 되었다.
* 너 자신을 알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관찰하라. 네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면 너 자신의 마음을 보라고 독일의 시인 실러(Schiller)가 말했다. 이는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타인을 세심하게 관찰해 보라는 말이다. 나와의 상관성에서 타인(너)에 대한 정확한 동향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평법한 말이지만, 그렇게 가볍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가 아니다. 반성하고 사고(思考)하고 노력하는 것이 참된 자기 자신인 것이다라고 영국의 시인 필(peele)도 한 말씀 거들고 있다.
그래서 ‘나’라는 실재(實在)의 나와 ‘너’라는 이상 속의 나를 시적 시츄에이션으로 설정하고 대화를 통해서 자아를 인식하거나 질책하는 시적전개를 시도하고 있다. 아마도 ‘너’는 ‘나’의 분신이거나 또는 그림자의 소임으로 동행하거나 밀착해서 사사건건 문제제기와 해법을 적시하기도 한다. ‘너는 나를 오늘도 미행하면서도 정도(正道)를 안내하려는 영원한 반려자인가. 생사고락을 함께 할 동반자인가. 이제는 우리 서로 밝혀두고 동행하면 어떠한가.(나와 너의 장법 . 1」중에서)’라고 그의 실체(實體) 구명(究明)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사상가 몽떼뉴(montaigne)는 그의 『수상록』에서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어떻게 하면 자기가 완전히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되느냐를 아는 것이다라는 말로 자아를 책(策)하고 있다. 나는 외친다. 문제는 내가 나를 사랑(자애(自愛)해야 한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가. 운명으로 점지된 빈곤과 무지의 동행은 자비나 박애는커녕 자신조차 사랑할 엄두가 없었네. 나의 불운을 극복해낼 뾰족한 방도가 없어서 그때부터 방황이 시작되었지. 그러나 ‘내 온 몸은 바로 기쁨이다. 노래다. 검(劍)이다. 불꽃이다’라고 노래한 하이네의 열창(熱唱)을 들으면 내가 나를 너무 무시하고 나를 등한시한 영육(靈肉)이 구겨진 채 팽개치지는 않았나 의구심이 들기도 했었다. 황폐해지는 현실을 탓하면서 자신을 학대하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우둔이 한 생애를 동행하게 되었지. 이 봐, 그대는 사유의 깊은 샘을 그냥 허공으로 증발하는 게으름이 잘못된 아집(我執)으로 변해서 이해나 타협을 이루지 못하는 졸장부가 되지 않았나 다시 한번 되짚어보게나. 먼저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자애(自愛)의 신념을 확고하게 정립하길 바라네.(「나와 너의 장법 . 54」 전문)‘
* 다음은 존재의 인식이다.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jaspers)는 인간은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은 자기를 의식하고서 자기의 세계를 탐구하고 계획을 세원서 그것을 바꾼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동일물(同一物)의 무의식적인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 자연의 성사(成事)로부터 얻어맞는다. 그러나 인간은 현존재라는 것만으로 완전히 인식이 끝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자기가 그 어떤 무엇인가를 더욱 자유롭게 결단한다. 인간은 정신이며 본래의 인간의 상황은 그 정신적 상황이라 하겠다는 논지로 존재를 첨삭(添削)하고 있다.
채근담에서도 ‘세상 사람들은 다만 <나>를 너무 참된 것으로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 기호와 번뇌가 있다. 옛 사람은 이르기를 <내가 있는 것도 알지 못하면서 어찌 물건 귀함을 알리오.> 하고 또 이르되 <이 몸이 나 아닌 줄을 안다면 번뇌가 어찌 다시금 침범하리오> 하였으니 참으로 옳음이다. (世人只緣認德我宇太眞 故 多種嗜好 種種煩惱 前人云 불得 知有我 何知物爲貴 又云 知身不是我 煩惱更何侵 眞破的之言也)’ 하였으니 ‘나’의 존재는 바로 인생의 지향점 인식을 향해서 진실탐구에 매진하는 것이다.
* 다음은 생명 존귀의 사유(思惟)가 필요하다. ‘만유(萬有)의 생명을 자비롭게 존중하는가. 사생관두(死生關頭)에서 그 고통을 참으면서 지탱해온 생명이 신비롭지 않은가. ‘삶이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고 죽음이란 고요한 못에 달이 가서 잠기는 것이다’라는 정완영 시인의 말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 펼쳐지는 생명의 환희,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서 계절에 투영되는 이미지가 변하듯이 생명의 열광은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사계의 정경에서 생멸(生滅)의 진실을 알 수 있었으니, (「나와 너의 장법 . 55」 중에서)’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의 환희’에서 ‘생멸’의 순리를 ‘사계의 정경’에서 이해하려는 심저(心底)에는 심도(深度)있는 시적 원류를 되뇌이게 하고 있다.
또 한편 작품 「나와 너의 장법 . 53」 중에서도 ‘지난날의 고난을 분노로 원망하거나 삶을 포기하려 한 일이 있느냐?’라거나 ‘지난날의 고통과 분노를 강물에 흘려보내려는 인내의 시간은 갈등이었다. 휑허니 한 몸 날려 풍덩 강심(江心)을 만나면 이런 모든 상처의 영육(靈肉)은 끝나겠지.’라는 어조는 실망과 체념과 기원들이 화해하는 명민(明敏)한 의식의 흐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작품 「나와 너의 장법 . 56」 중에서는 ‘이 겨울, 어느 공원묘원이거나 선영(先塋) 응달진 비탈 언땅 속에 매장되어 지금도 긴 꿈을 꾸는 영혼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인명재천(人命在天)인가. 늙고 병들어 남은 사람들을 고생만 시키다가 가는 사람,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는 사람, 모두가 ‘죽음은 위대하다.’고 외친 릴케의 말처럼 위대한 죽음을 맞기 위해 시혼(詩魂)을 불태우고 있는지.’ 참으로 가늠되지 않는 생명의 처절한 절규가 펄럭이고 있다.
* 이러한 생명과 절대적으로 상관하는 삶의 비애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말이 어눌해져서 서울에서 좀 큰 병원 응급실로 달려간 일이 있다. 신경과 담당의사 왈 조금만 늦었으면 더 큰일을 맞을 뻔했다면서 다행이라는 의견이었다. 서울역이나 시장에만 와글와글 사람천지인 줄 알았는데 병원에도 아픈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이제 환시(患詩) 몇 편을 써야겠다. 무지막지하게 쏟아 부었던 술과 담배가 만병(萬病)의 근원이라는 진실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을 때 자탄(咨歎)과 분노를 풀어 밤새도록 영육을 적셨던 어느 날 참이슬 2병, 담배 3갑과 그동안 겹친 피로가 폭발했는지 담배 피던 손이 흔들리고 말이 어눌해지자 급히 아들의 승용차를 타고 동서한방병원⟶강북삼성병원 응급실에 도착, X-Ray 촬영을 하고 입원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어디에도 고통을 느낄 수 없는데 말을 할 수가 없다. 시각과 청각은 아주 또렸했다. 병실에 누워 다른 환자들의 신음(呻吟)을 들으면 아아, 신체의 조그마한 한 부분이라도 소흘히 다루어서는 안되겠다고 이제사 눈치를 챘는가. 그러니까 술도 담배도 모두 끊어. 한번 주어진 생명인데 아주 소중하게 다스려서 천명(天命)을 다해야지 않겠나.
--「나와 너의 장법 . 48」 전문
선생님 치료가 날로 좋아져요. 약 잘 드시고 주사도 잘 맞으세요. 간호사가 쌩긋 웃으면서 지나간다. 그리고 가끔 걷기운동도 열심히 하세요. 그 간호사의 뒷모습은 천사다. --중략-- 혈관이 막히고 혈전이 응고(凝固)되어 혈압이 상승하고 고지혈의 염려가 모두 담배에서 비롯된다는 경이로운 사실과 함께 담배를 끊어야 살 수 있다는 구두 진단이다. 담배를 끊키로 했다.--중략-- 아아, 담배로 인해서 죽을 수는 없겠거니 40년간 피워 물었던 유일한 기호(嗜好)를 어느 날 아침에 버렸다.
--「나와 너의 장법 . 49」 중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해본 일이 있는가? 몇 년전부터 두 달에 한번 정기검진을 받기 위해 강북삼성병원 신경과를 찾는다. 혈압도 정상, 혈당도 정상- 그런데 왜 병원에 와서 상담을 하고 혈압약, 당뇨약 등 약처방을 받아서 매일 복용해야 하는지? 담당의사는 말한다. 예방을 해야 큰 병이 침노하지 않아요- 아아, 그렇구나. 넘어질 뻔 했던 육신이 그 기능을 다할 때까지 부족하거나 혹은 넘치는 혈류(血流)의 향방을 잔잔하게 간추리는 생명 존재의 잠언(箴言).
--「나와 너의 장법 . 50」 중에서
이렇게 ‘환시’를 정리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하루에 몇 번씩이라도 앰뷸런스 소리가 요란하게 지나간다. 또 가슴이 철렁한다. 누군가 중병(重病)에 걸렸거나 불의의 사고로 다쳤나보다. 육체가 망가져서 병원에서 치료로 고치는 것은 좋은데 오늘날 이기주의적 정신의 황폐는 치유할 처방이 없는 듯해서 쩍쩍 입맛만 다시고 있는 것이다.
* 매슈 아널드가 ‘시란 본질적인 면에서 인생의 비평이다’라고 했다. 인생의 비평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모든 생활 저변에서 발생하는 일들에서 비인간적인며 반사회적인, 그리고 불합리적인 현실들을 시로 비평할 필요가 발생한다.
세상이 시끄럽던 시절, 8,15. 6,25. 4,19. 5,16. 등 사회적 변혁에 따른 인간들의 사유는 더욱 폭넓게 진취적으로 향상하면서 또 다른 방안으로 삶의 방식도 전환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국가적으로는 하나의 역사적인 흐름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거기에서 생성하는 갈등은 너무나 많은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인 개혁이나 변동은 우리 문학에서도 저항적이거나 타도의 대상으로써 소재나 주제로 형상화하는 경우를 많이 읽을 수 있게 된다. 가령 일본 압제시대에서는 애국적인 소망이 넘치는 작품을, 동족상잔의 비극에서는 생명의 존엄과 동포애를, 그 후에 독재나 부정선거 등에 대한 민주주의 완성을 그리고 유신이나 도 다른 상황에서는 좌우간의 민족적인 분열과 적대시 등의 이데올로기적인 대결 등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구조로 변경시키는 국가의 비운도 있었다.
그러나 차츰 국가적으로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할수록 인성(人性)은 황폐화를 가속화하고 있어서 우리 시인들은 정서는 화해의 해법을 탐색하는 주제를 취택하는 경향의 작품들을 선호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문학적인 진실을 탐구하려는 지적인 노력이 발현되고 있었다.
이 ‘장법’에서도 불감증시대에서 북쪽에서는 핵무기를 개발하고 탄도미시일을 쏘아올리는 등의 불안을 조성해도 그런가보다 하고 안이한 습성에 젖어 있다. 그리고 ‘어디선가는 화산이 폭발해서 마을을 용암으로 쓸어버려 폐허가 되어 회생자가 얼마이고 이재민이 얼마라는 위기의 소식이’ 뉴스로 나오지만 남의 일이니까 나는 모른다는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나라 안이 시끌시끌 위기상황인데 AI(조류인플루엔자-Avian Influenza)까지 창궐(猖獗)해서 양계농가의 닭과 오리를 생매장(살처분)하는 울분까지 겹쳐지고 있다. 이 고병원성 조류독감은 냇가 갈대밭에서 숨져 있는 야생조류의 시체를 해부해서 검사해보면 이 병에 감염되어 죽었음을 밝혀내는 것. 인체에도 감염될 수 있다니 각별히 조심해야겠다. 이번엔 또 구제역(口蹄疫)대란까지 겹쳐져서 소나 돼지 수십만 마리를 살처분하는 비극이 또 발생했다.(「나와 너의 장법 . 57」 중에서)’라거나 ‘황사 마스크를 꼭 착용하고 출근하거나 외출하라는 기상캐스트의 쩌렁쩌렁한 울림이다. 창문을 열지 말고 노약자는 되도록이면 집 밖 출입을 자제하라는 당부이다. 이제 우리 지구에도 환란(患亂)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가.(「나와 너의 장법 . 58」 중에서)’라는 위기의식이 시의 사회성을 승화하고 있는 것이다.
시의 시사성 어찌보면 사회를 살고 있는 시인들의 진실 탐구에서 일종의 고뇌와 갈등이 교차하는 의식의 흐름인지도 모른다. 시읜 사회성은 우리 인간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 교류하고 집단을 이루면서 사회를 형성하게 되는데 시도 이처럼 그 사회 생활에서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의 현실에 직면하여 거기로부터 끊임없이 주제를 찾아내려는 시적인 욕구가 있다.
현대의 사회는 더욱더 그 기구가 복잡화하고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며 불합리한 것이 곳곳에 노출되어 있어서 시인은 비록 자기 내부에 침잠한 갈등을 그들의 사고와 표현으로 분사(噴射)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는 종전까지는 순수하게 생활이나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거기에 몰입해서 인간들의 덕목(德目)인 진선미(眞善美)의 발현으로 시의 형태를 탐미적으로 형상화했으나 현대시의 지평이나 지향점은 이렇게 사회성도 중시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살펴보는 것은 ‘대통령이 탄핵소추가 되어 헌법재판소에서 심리가’ 인용이 되는 국민의 수치가 나타나도 무관신이며 국정농단이니 촛불시위니 국기를 문라시킨 대통령도 있고 이를 계기로 국민성이 양분하는 위험천만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내버스에 백발 노신사가 승차한다. 앉을 좌석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그냥 서서 가기로 한다. 차창 아래에는 ‘노약자석’이니 ‘임산부석’이라는 표지 딱지가 붙어 있으나 마나하다. 그 자리를 차고 앉은 젊은이는 스마트폰으로 연신 무언가를 두들기고 있고 또 다른 이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거나 아예 못본 척 졸고 있다. 그렇다. 요즘도 문맹(文盲)이 많은가 보다. 한편 버스에서는 ‘노약자석과 임산부석은 그들을 위하여 비워두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다. 아마도 이들은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聽覺)에도 문제가 있는 듯하다. 분명히 노자(老者)도 아니요 약자(弱子)도 아니며 병자(病者)도 아닌, 또한 임산부도 아닌 요즘 젊은 애들의 삐뚤어진 정신머리가 서글프기만 하다. 이봐, 물질문명이 최고로 발달하고 입시위주의 교육에 매달리니까 윤리 도덕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렇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나. 백발 노신사는 끝까지 서서 가다가 혀끝을 차면서 하차한다.
--「나와 너의 장법 . 63」 전문
시의 사회성에는 작품의 주제가 사회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에 상응하는 능동성을 다루고 있다. 거기에는 소박한 생활의 단면을 엿보게 하는 것부터 정치적인 이슈나 사회 체제의 변혁을 갈망하고 또 인류 평화의 해법을 모색하는 등의 작품경향을 자주 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위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사회적인 부도덕과 비윤리적인 정서를 요즘 일부 청년들에게서 목도(目睹)되는 흔한 일상을 개탄하는 하나의 시의 사회적인 사소한 문제들을 시인의 시각에서 스스로 체념하는 형상을 읽을 수 있게 한다.
* 시는 왜 쓰는가? 일찍이 영국의 엘리엇(T. S. Eliot)은 그의 글 「시의 효용과 비평의 효용」에서 ‘시의 의미의 주된 효용은 독자의 습성을 만족시키고 시가 그의 마음에 작용하는 동안 정신에 대해서 위안과 안정감을 주는데 있다’고 했다. 또한 시는 ‘무엇이 사실이다’라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좀더 리얼하게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시의 위의(威儀)나 본령(本領)은 우리의 고전에서나 볼 수 있는 음풍농월(吟風弄月)이나 전근대적인 주제인 인간의 진선미 탐구를 벗어나 지적인 자양이 가미된 인생론이나 가치관 추구를 시적 진실로 현현되어야 한다.
시는 무슨 쓸모가 있는가? 시를 쓰면서도 많은 회의를 느낀다. 젊은 시절에는 ‘나도 시인이 되어야지’라는 감상적인 꿈으로 낭만적인 소망에 젖어본 일이 마침내 시인의 길로 들어섰으나 속된 말로 시 한 편이 연탄 한 장, 쌀 한 됫박도 되지 못하는 현실적인 고뇌가 따랐다.
그러나 왜 골치 아프게 시 한 편을 창작하기 위해서 그렇게 골돌하게 머리를 싸매고 있을까. 대체로 시의 효용을 살펴보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생각, 느낌을 표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표출되지 않은 답답한 감정에 얽매인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쾌감을 맛보게 된다.
시는 또한 그 간결한 말과 가락을 통해서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통하고 어울리어 하나가 되게 한다. 나는 다른 작품을 읽을 때 그 시인과 동일한 위치에서 무언의 대화를 교감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C.P.Boudelaire)는 우리의 기쁨이든 슬픔이든 시는 항상 그 자체 속에서 이상을 좇는 신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써 시의 지향점을 적시해 주고 있다.
시는 언어 예술이다. 그렇다면 수필 소설 등 다른 장르는 언어가 필요 없느냐. 아니지. 물론 필요하지. 그러나 언어가 함축하는 오묘한 절대적인 그 무엇을 눈치 채기까지는 언어가 숨겨둔 눈짓 손짓들을 나타내려면 다른 분야보다는 몇 갑절의 언어와 대화를 해야되겠지.
나는 밤을 새웠다. 한 언어의 몸짓을 알기 위해 눈에 핏발이 서도록 국어사전을 뒤졌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 정체 아아, 벌써 휘움한 새벽빛이 창문에 어른거린다. 이 봐. 그러기에 평소에 언어훈련을 충실히 하라는 선각자들의 말씀을 새겼어야지. 너는 나의 부족한 부분, 어쩌면 결핍된 언어의 창고에 까지 들어와 시는 왜 언어가 풍족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구나.
너는 누구냐. 나의 내면에서 이글거리는 시의 원류를 따라 네가 적시(摘示)하는 메시지가 오늘은 더욱 선명한 무지개의 영롱한 빛으로 유혹하는 너는.
-「나와 너의 장법 . 6」 전문
현대시 작법에는 외적(사물)인 요소와 내적(관념)인 감성이 융합되는 절묘한 이미지가 형상화할 때 사람들은 좋은 시라고 했다. 이론으로는 잘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절창(絶唱) 한 수 건지지 못하는 옹색한 변명. 그 옆에서 너는 또 말을 거든다. 어이. 작품을 위한 고뇌가 없으니까 사유(思惟)의 깊이가 얕아서 사물을 응시하는 태도에서부터 골깊게 각인된 칠정(七情)의 한 부분에서 축적된 체험의 이미지가 재생되지 못하는 거야. 가령 꽃이나 달이 ‘그리움’으로 작품에 투영되었다면 그것을 사은유(死隱喩)라고 해서 이미 낙화로 땅에 딩굴면서 뭇사람들의 발끝에 밟히고 있거나 이미 지고 없는 허공의 달 그림자이겠지. 아아, 너는 나의 뇌리에서 언제나 동행하는 반려자이리.
-「나와 너의 장법 . 4」 전문
* 나를 발견했는가? 이번 시집의 제재가 ‘나’에 대한 집중적인 울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진정한 ‘나’를 탐색하려 했으나 아직도 미흡하다. 이는 절실성을 표출하려는 표현력과 언어의 불충분한 나만의 무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너를 알라고 외친 소크라테스의 진실을 되뇌이면서 자아에 대한 연구와 자성이 더욱 필요하다는 자애의 정신이 충만해야 하리라는 점을 굳게 믿는다.
아아, ‘나의 미숙한시법은 언제쯤 샛별로 반짝일 수 있으랴(「나와 너의 장법 . 5」 중에서)’ 또는 ‘먼저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자애의 신념을 확고하게 정립하길 바라네(「나와 너의 장법 . 54」 중에서)’ 그리고 결론으로 ‘내가 나에게 좀더 현명하게 지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생각이나 느낌이 올바르지 못했었거나 선악의 분별이 흐려질 때 혹은 성찰이 미흡할 때 그리하여 개선의 여지가 없고 옹고집과 오기로 나 자신을 스스로 오도(誤導)하고 있지는 않는가.(「나와 너의 장법 . 결」 중에서)’와 같이 아직도 많은 정신적 수련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 나는 화가다. 정물화가다. 그것도 아주 정밀하게 스케치하는 화가다. 지금까지 창작해온 자야의식에서 시야를 더욱 확대해서 그리고 투명하게 응시하거나 그 착목(着目)된 사물을 현미경으로 살피듯이 속살까지 투영할 것이다.
그리하여 장법 이후에는 다양한 이미지를 동화해 본다. 그러나 시법만 약간 다를뿐, 거기에 안착한 주제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 )에 관한 연구는 속된 잡스런 일상에서 탈출하려는 심적 변화를 그리면서 거기에서도 인생문제, 사회성문제 등이 내포되어 있어서 본래의 심성인 수용과 긍정 그리고 포괄의 내면적인 시심은 다시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정밀한 정물화가다. 나무껍질을 벗기면서 속살까지 그려낸다. 속살에서 풍기는 향기로운 그 정신도 휘휘한 화법으로 표현한다.
어느 날 버스 앞좌석에 앉은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다. 헤어스타일과 어깨 곡선이 질펀하게 어느 계곡을 흘러간다. 그 여인의 인생행로에 덧칠한다. 내면에 깊숙이 간직한 눈물의 체험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어쩌면 내가 살아온 불행한 삶의 전형(典型)이다.
어떤 한 사물이나 한 사람에 대해서 매번 그림을 그리지만 감춰진 내적 진실은 표현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는 얼치기 화가다. 사는 일이 모두 그러하다. 형태나 명암이 분별되지 않는 단색의 데생만 그리는 아직 미흡(未洽)한 화가다.
--「나는 화가다.」 전문
그렇다. 나는 어찌 되었거나 아직 미흡한 ‘화가’지만 지속적으로 서툰 크레파스를 하얀 캔버스에 낙서처럼 갈겨나갈 것이다. 그것이 정립된 화고한 시적 진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만의 지적 수준에 합당하도록 그림을 그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