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아름다운 꽃 씨앗이 하나 있다 (장미도 좋고 해바라기도 좋다). 이것을 심어서
무럭무럭 자라나 이씨앗은 사라지고 뿌리가 내리며 싹이 나고 잎이 생겨나며 줄기가 솟아올랐다. 더 나아가 이제
성숙하게 자라 덩치가 커졌고 마침내는 꽃이 피었다. 그아름다운 모습과 향기가 온세상을 감동시킨다. 시간이 지나 꽃은 시들고 이젠 열매인 씨앗만이 수정되어 남게 되었다. 자, 이제 내가 당신에게 묻겠다.
무엇이 장미 또는 해바라기인가?
이 비유에서
씨앗인가, 싹인가, 줄기인가, 뿌리인가, 아니면 꽃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열매인가.
우리는 생각속에서 늘 착각을 하고 살고 있다. 장미꽃이 장미이며 해바라기 꽃이 곧 해바라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진짜 장미나 해바라기는 이모든것 <전체>일 뿐이다. 장미나 해바라기는
그래서 홀로 따로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식물의 모든 형상(씨,뿌리,잎,싹,줄기,꽃,열매등)과 더불어 항상 같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존재하는 것을
초월적 존재방식이라고 하며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전체>라고 한다. |
가만히 보니까 수행자분들이
<개체의 자기를 버리고 전체가 되는 것>을 진리라고 여기는 것은 좋은데
전체를 공간적으로 아주 큰 것(물질우주공간)으로 여기는 분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진짜 전체는 크기가 큰 그런게 아니다.
그런 것은
단지 마음이 일시적으로 체험하는 전체의 한<부분>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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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장미꽃이나 해바라기 꽃처럼
중요한 부분(체험)만이 전체(깨달음)라고 여기는 분도 있다.
하지만 꽃은 씨앗이 없다면 존재할수도 없다.
장미나 해바라기는
씨나 뿌리,잎,줄기등 모든것안에 이미 잠재적이며 초월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중 어떤 것도 장미가 아닐수 없다.
다만 분별만 멈춘다면 모든것은 이미 있는그대로 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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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지금 부족하며 전체가 아닌 개체라는 분별만 시작하지 않으면
(설사 씨앗상태에 있다하더라도)
당신은 이미 당신이란 존재자체로서
당신을 이루고있는 모든 존재방식,
즉 어렸을때나 젊은 시절이나 장년이나 가릴것 없이
그모든 당신의 매순간 형상과 존재방식속에 깃들어있던 초월적 전체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모든것 속에 동시적으로 깃들어 계신
하느님과 부처님의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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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씨앗안에
이미 전체적 초월적 존재인 장미가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 삶속에서 진짜로 할일이란
남들이 말하는 그런 깨달음을 알고
체험으로 얻어 특별한 존재방식으로 변하는게 아니라
그런 체험들이 있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전체적 존재자체로서의 무한가능성으로
나타날수 있는 자기의 성품을 자각하는 것이며
그러한 당신의 삶을 다채롭게 실제로 살며 꽃피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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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제 진리가 <전체인 우주가 되는 것>이라는 논리를 가진 당신에게 내가 묻는다.
혹은 오매일여나 몽중일여를 붙잡고 있는 당신에게 내가 묻는다.
당신은 계속해서 우주상태를 붙잡으려고,
또는 오매일여에 머무르려고 그얼마나 노력해왔는가?
하지만 이제 당신을 구속한 그런 명제나 개념들로부터 자유로와 지라.
당신은 한때 이루어져 잠시나마 당신을 들뜨게 하고 황홀하게 한
여러기지 체험과 경지를 다시 항상되게 유지하게 위해서 지금도 그얼마나 애쓰고 있는가.
하지만 이제 그러한 마음속의 분별에서 시작된
전체가 아닌 어느한가지방식의 존재상태를 구하는 부자유에서 벗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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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당신의 착각과 오해가 밪어낸 자가당착이다.
장미씨도 이미 장미이듯이
당신은 육체나 특정한 일시적 마음이 가진 상태를 기준으로 분별만 하지 않는다면
이미 전체적인 우주이고 진리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제 스스로 <전체성>의 자기를 깨닫고
내적 편안함을 찾아 더이상 달리 구하지 말라.
다만 자기의 못나고 부족한 일부분을
자기라고 여기며 분별하지만 말라.
당신은
꽃(우주가 된 체험 또는 어떤 특별한 상태)만이 장미(깨달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당신은 그생각에 매여
계속해서 끌려다니고 생각과 체험의 노예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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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그런 큰 우주란
당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상념이다.
진짜 우주란
모든것을 다 만드는 무한가능성의 성품을 말하며 이성품이란 크고작은게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보는 관점의 크기와 기준에 따라 상대적으로 크고 작게 보일뿐이다.
당신은 이미 있는이대로 우주적 존재자체이며
존재란 그자체로서 뭐든지 자기가 마음먹고 노력만 하면
다될수있는 무한가능성의 <전체자리>다.
이 가능성그자체인 자리는 아주 끊어져서 흔적도 없고 없다는 것도 없지만
바로 무엇으로도 다 나타날수가 있는<나>자신으로서
이순간도 존재(Being)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표현하며 살아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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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O가 보이지 않지만
다양한 눈,비,얼음,서리,안개등속에 엄연히 스스로 가능성으로 실재하듯이
우리의 본성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바로 이런 물질적 존재나 비존재를 넘어선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초월적인 <존재그자체>인 것이다.
이렇게 고정됨 없이 흘러가면서 무한한 가능성그자체로서 변화하고 있는 동시에
분명히 실재하며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이것!
우리가 바로 이것이고 이것이 살아있는 성품이며 본성자리이며 진짜우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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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장미씨앗이 꽃과 열매를 피우고 맺으면
가장 완전한 장미로서의 일생을 살았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당신이 내면속에서 이런저런 대단한 체험들을 하기를 바라며
범아일여라든가 생사일여라든가 오매일여라든가를 다 체험하기를 바란다.
그것은 좋은 체험이다.
하지만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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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나 열매만이 장미<전체>인것은 아니다.
진정한 <전체>가 과연 무엇인가를 심사숙고하라.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 다 하나가 되어 체험해보는 그대가
이미 있는그대로 그것이지 않은가?
사람들은 아직도 자기의 식스존(생각과 공간)에 빠져있기에
자기식대로의 진리를 만들고 그틀안에서만 수행이라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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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나 수행단체들이 그렇게
자기들이 주장하는 논리속에서
<이것만이 진리>라고 사람들을 세뇌한다.
하지만 크게 본다면
우리가 학고있는 모든 수행들과 기도의 본질은
자기가 만들거나 받아들인 생각의 틀안에서
그논리에 따라 자기가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자기가 문제를 만들어내고
자기가 다시 또 그문제를 풀기에 바쁜 셈이다.
그렇게 살아온 당신의 모습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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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그만 깨어나라.
당신은 이미 완전하건만
누가 분별속에 한생각을 일으켜 불완전하다고 여기는지
이제 그어리석음에 대해 자각하고 눈을 뜨라.
그리고 그 한생각이 만든 어리석음이
과연 지금 어떻게 당신을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깨어나라.
지금 당장 당신이 만든 생각과 체험의 감옥에서 벗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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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처럼 매순간
이미 무한한 가능성그자체로서 존재할 뿐이다.
당신은 지금도
스스로 이런저런 자기를 만들고 있지 아니한가.
그래서 당신은
바로 지금 여기{NOW]에서 대자유다.
이미 있는그대로의
내가 자유롭고 완전하다는 이사실에 대해 깨어나는 것(개념으로 이해하고
그속에 빠져있는 상태가 아닌 모든것을 실제로 그렇게 보는 상태)이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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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알던 <깨달음이란 이런것이다>에서조차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가진 가짐이며
슬그머니 빠져든 첫번째 함정이다.
이렇게 깨어나 달라지는 것이 진정한 본성을 보는것이며
참다운 살아있는 <전체로서의 나>를 보는 것이다.
이제는 의식이 만드는 그내용물에 빠져따라가지말고
여태까지 내의식이 무엇을 창조해왔는지 스스로를 자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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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존재자체이지
존재가 만들어 내는 넘치거나 부족한 컨텐츠라는 체험이 아니다.
존재가 자기를 잃고 자기가 만들어낸 체험을 쫒을때
그는 부족함이란 분별속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본래 이우주엔 부족함이나 넘침이란 분별이 없다.
다 우리 마음이 만들어내는 일시적 환상일 뿐이다.
이진실에 눈뜰때
그대는 물질의 한계를 넘어서 의식체 그대로 살아있는 우주가 된다.
그대가 과거에서
지금까지 무엇을 만들어왔던 그것은 바로 그대의 자유이고 선택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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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들이 가르쳐주고 그대가 받아들여
스스로 갇힌 개념과 상념의 망상에서 깨어나자.
당신은 평생을 이러면서 살아왔다.
바로 지금 확 이 꿈에서 깨어나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가 만들어 <나라고 여기고 인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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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당신이 본성을
그어떤 특별한 체험이나 경지속의 만들어진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지말고
나로부터 나타날수 있는 모든것을 다 만들어내는 그이전의 존재라고 여기라.
그이전의 존재라 함은
만들어진 모든것이 다 아니란 뜻이니
참다운 본성이란 <(만들어진)그어떤 것도 아닌 것>이다.
이제부터는 이것을 참다운 나라고 여기라.
왜냐하면 나는 내가 나라고 여기는 바로 그것이 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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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것이 내가 암재계로부터 꺼내어
당신에게 전해주고자하는 깨달음이다.
즉 당신이 자기본성을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진정 여길때
당신은 비로소 이3차원적 존재방식 이전에 존재하면서
모든것을 다 만드는 초월적이면서도
동시에 살아있는 나의 참 본성자리를 깨닫고 그것과 합일하게 된다.
그것은 선험적(先驗的)인 존재이므로
경험속에서 당신이 알고있는 생각이나 느낌,체험등으로 찾지 말라.
단지 아닌 것을 아니라고만 여기고 가슴깊이 느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것이 스스로 나타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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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위일체(三位一體)의 <나>
(우리의 본성,마음,몸이란 세가지 존재방식에 대해
새롭게 통찰하고 깨어나야 한다.
그럴때 우리에게 진정한 깨달음이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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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속에서 어떤 신화나 경전속의 이야기를 믿는게 아니라
<있는그대로>의 우리라는
우주적 존재자체에 대해 깨어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것은 다 실재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나 삼라만상들도 다 실재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치 H2O가 이슬로 나타나듯이
실재가 잠시 변해 나타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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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슬속에서
이슬이란 유한성의 모습만을 보고 그것을 허무하다거나 환상이라고 불것인지
아니면 그속에서 영원한 존재인 H2O를 발견하고
그것을 실재의 <나>라고 여길것인지는 결국 보는 사람의 관점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한시적인 존재방식속에서
영원한 실재를 볼때 우리는 모든 존재를 입체적이자 전체적으로 통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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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존재는
경전에서 말하는 진리와 같이 삼위일체적인 존재방식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성부,성령,성자이고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법신,보신,화신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깨달음이란
바로 내속에 들어있는 이세가지 존재방식에 대해 직관하며
그 상관관계속에서 하나이자 셋이며
셋이자 동시에 하나인 우주적 섭리에 대하여 통각하며
각 존재방식에 대해 두루 깨어나야하는 것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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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법신,보신,화신불(성부,성령,성자)이란
대체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일까에 대해 한번 간단히 알아보기로 하자.
나는 진리란
더도 덜도 아니며 조작되지 않은 <있는그대로의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이것이다 저것이다 자기의 체험을 앞세워 주장해왔다.
하지만 그런것들이 스스로 자기가 나서서 진리라고 주장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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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진리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존재는 바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당신이다.
내가 있기에
진리도 인정되고 하느님,부처님도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참된 진리란
바로 <나>자체이다.
하지만
당신은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앞에서 다시 곤혹스러워 한다.
왜냐하면 이<나>란 것이
대체 정해진 구체적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정된 나란 것이 없다하여
본래 없음 즉 무아(無我)라고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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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대다수 많은 명상책이나 수행지도자들이
생각과 생각사이로 들어가라든지
모든것이 나오고 돌아가는 자리는 무엇이냐는 식으로
우리를 텅빈 공의 자리로 안내하고 우
리들은 그러한 무한허공을 상상속에서 나의 본래모습이며 진리라고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이렇게 제생각속에서 진리를 생각하고 상상하여
<이것이다>라고 정한후 그것을 진리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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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물질적인 삶,눈에 보이는 것만을 다루는 삶속에 빠져살아왔기에
이러한 현상도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깨달음을 얻기위해서는
이러한 과정도 거쳐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공(空)이란
분명히 말해서 우리내면 즉 본성의 모습(相)이지 그본질(體)가 아니다.
그리고 모습이란 결국 우리가 인식한 정신적인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는 결국
공의 상(相)에 다시 빠지고 그것을 붙잡고 거기에 머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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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진리를
이런 모습(相)이라 주장을 하는 분들이 아주 많다.
이런분들에게 " 그러면 이우주는 왜생겼으며
삼라만상과 사람은 왜 우주에 나타났습니까?"라고 물어보면 말문이 막힌다.
그들은 기존불교책에서 읽고들은 대로
그냥 알수없는 섭리로 홀연히 생겼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 알수없다 "는 것이
곧 그들의 깨달음이 극히 주관적이며 사고적(思考的)란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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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진짜 공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모양이 텅빈 큰 공간(space)이 아니라
그성질이 완전한 비어있음(empty)을 말하는 것이며
그래서 스스로는 도무지 무어라고 정의할수 없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일반적인 공이란 텅빈 허공이니
그것은 일종의 형상이며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라 하나의 상이자 모습이므로
그것은 진정한 공이 아닌 하나의 <텅빈 공간>을 상징하는 정신적 피조물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제식스존속에서 진리를 상으로 찾고 붙잡고 그것을 고집한다.
하지만 진짜 공이란
그런것(相)조차 아니어야 진짜 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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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있는그대로의 현상이 참 진리라고 볼때
우리의 인식대상으로 나타난
이 우주나 공이나 사람의 본질(體)란 대체 무엇일까?
이는 즉 공(空)의 형상(相)만 보고 진리라고 착각속에 붙들지 말고
그 본질(體)을 다시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즉 다시말해
이모든것을 있게하는 모든것의 원인적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다 초월해 있는
3차원적 현상체 이전의 그대자신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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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를
법,보,화신불이라느니
성부,성자,성령이라느니
정기신(精氣身)이라느니
영,마음,몸이라는등으로 세가지로 곧잘 구분한다.
하지만 공이란 것은
우리의 마음이 일으키는 인식활동속에 나타난 모습(相)이지
그것이 스스로 모든것을 인식하는 주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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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각하는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그이전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은 모든것의 원인이되고 뿌리가 되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로서 실재이다.
당신 스스로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수 있지 않은가?
이처럼 <나>는 모든것의 원인체이며
모든것을 있게하는 가장 근본이기에
그것이후에 여러가지 말이나 상상이나 생각이나 느낌으로
그것을 역으로 붙잡고 설명하려드는 것은
마치 태양을 그림자로 묘사하려는 어리석은 시도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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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도 마찬가지다.
이는 마치 선험적(apriori; 모든 경험을 있게하는
경험이전의 주체)인 것을 경험적인 것으로 묘사하려드는 잘못과도 같다.
하지만 세상사람들은 끝도없이 이것을 시도하고 있다.
나는 이제 그러한 잘못을 지적하고 깨우려 한다.
진리는 그본질이 공이 아니라 3차원상에서 볼때 공한 모습(相)을 지녔을 뿐이다.
그증거로
우리를 포함한 있는그대로의 이우주삼라만상은
무한히 창조와 파괴를 되풀이 하고 있을뿐
절대적으로 공한 자리에만 머무르고 있는것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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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깨닫기 바란다.
온전한 진리란
이모든것을 다 인식함으로서 있게하고 만들어내며
이거다 저거다 다투는 바로 그대의 의식자체란 것을.
그래서 그대가
곧 신(神)이며 부처이며 우주의 위대한 섭리가 이루어낸 그의 화현이다.
근원우주는 물질우주인 이세상에 수많은 동식물들을 창조했지만
그것들 역시 그의 그렇게 다양하게 존재하고 싶어하는
<근원우주의 뜻>이 나타난 모습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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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나타난 것은 곧 <우주의 뜻>그자체이다.
그렇기에 세상에 큰일을 하는 자들은
그의 신념대로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켜나가는 것이다.
그의 뜻이 곧 신의 뜻이기에.
진리탐구에 믿음이 필요한 순간이 바로 딱 이순간이다.
우리는 너무나 물질적인 제약속에 갇혀서
자기를 형편없이 비하하고 그렇게 보잘것없다고 믿고 최면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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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것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
본래 텅빈 공(空)인가?
아니다.
나는 <내가 나라고 인정하는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이것이 어느하나에 머무르지 않는
무한 변화성의 참다운 공이며 진리의 특성이다.
그리고 자기가 인정하는 대로 다되는 그러한 존재는
그속성상 전지전능하니 신(부처)일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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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깨어나 보면
신(부처)아닌게 없다.
모든것이 다 신(부처,하느님)의
다양한 나타나심이며 움직이심일 뿐이다.
그안에서 우리가 진리란 이거다 저거다하며 분별하고만 있다.
이제 기왕의 종교들은
우리를 그동안 너무나 구속하고 제한하여 왔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참으로
자신을 알아보고 진정으로 태초의 자기그대로 깨어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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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우리가 신임을 알고 분석탐구하는데에만 힘써왔다.
하지만 자기가 누군지 제대로 아는 것만큼 아니
그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대로 사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있는그대로가 신의 표현이며 존재방식이다.
그러므로 본질인 체(體)가 신이라면
신답게 장엄하고 아름답고 사랑과 자비와 평화와 지복이 넘치는 성숙한 존재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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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이 신이라면
마음도 신의 마음같이 거듭나서 살아야 한다.
본질이 신이라면
그 몸도 신같이 거듭나서 살아야한다.
이것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매순간 알고 실행하는 것.
매순간순간 최고최선의 존재방식으로 <나>를
몸과 마음과 영적으로 동시에 자각하고 표현하는것.
마음이 만든 그어떤 기막힌 한가지 체험을 붙들고 유지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
자기가 인정한 그대로
바로 지금 나를 그렇게 창조하고 나타내며 자기를 뜻한대로 실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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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완전한 삼위일체적 깨달음이며 대자유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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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깨달음뒤의 깨달음
(나는 기존의 깨달음에 대한 설명들에 대해 그것들의 대다수는 본성자체가 아닌
본성이 만든 체험들을 객체들을 붙잡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더깊고도 큰 체험을 만날때 그앞에서 스스로 무너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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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수행단체들이나 전통 불교는
우리의 본성(법신불)을 깨닫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미 서로가 인정하는 체험들을 하면
깨달았다고 인정을 하기도 한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더이상 무엇을 더 구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완전히 여여하게 쉬게되면
그것이 본성을 깨달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확실히 그런 체험들을 하게되면 그사람의 존재방식이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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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모든것을 바라다보는 그의 관점이 변한다.
즉 과거의 개체적인 그가 그안에서 사라지고
우주적 자아 혹은 나라고 할것이 따로 없는 전체성의 장엄한 우주대생명력이
그에게 임재하는 놀라운 현상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러한 속에서 이현실이라는
우리의 일상적 삶을 바라다본다면 마치 꿈과도 같고 환상과도 같이 아스라이 느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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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이러한 기존의 체험이나 이론에 의문을 던진다.
과연 이것만이 깨달음의 전부일까?
기존의 화두참선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되면 더이상 찾거나 구할것이 없어
할일을 마친 사람 즉 무사인(無事人;일없는 사람)이라하며 그저 평화로이 쉬고 또쉰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번뇌와 깨달음, 차안과 피안,
속세와 초월이라는 이분법적인 대립구조자체가
여전히 통합적이지 못하며 무언가 한편에 치우쳐 있어 진정한 중도(中道)가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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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석가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도
여전히 정진하는 모습을 보이셨을까?
왜 예수는 자기가 하느님인데
쓸데없이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셨을까?
아니 그렇게 관념적으로 가지 않더라도
내이웃이나 가족이 지금 육체적인 굶주림이나 전쟁 혹
은 정신적인 마음의 갈등속에서 헤메고 있는데 할일이 없다고만 말할수가 있을까.
물론 깨달은 이는
제아무리 어지러운 아수라판속에서도 평화로운 내면을 가질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할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는 분명히 별개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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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여기 컴퓨터가 하나있다고 가정해보자.
누군가가 처음보는 물건이라 이컴퓨터에 열심히 매료되어 사용하다가 보니
처음엔 컴퓨터속에 있는 수많은 화면들이 다 자기인줄 알았다가
마침내 깨어나 그것은 단지 일시적으로 나타난 소프트웨어일뿐
컴퓨터란 항존하는 존재자체는 아님을 자각했다고 하자.
그래서 이젠 화면이 어떤게 나타나더라도 자기는 그것이 아니므로
그화면이 그어떤것이든 간에 항상 평화로이 그런 화면들을 대할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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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화면들속에 빠져 몰두하거나 자기동일시하는 능력까지를 다버린다면
그때 그컴퓨터는 더이상 그에게는 도무지 흥미로운 물건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이상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게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더이상 인간에게 이로운 문명의 이기나 도구를 다 버리고 떠난채
원시상태의 동물이나 식물처럼 혹은 저능아들처럼 그저 가만히 존재하기만 하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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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것은 결국은
이쪽이 싫어서 저쪽으로 치우치는 이분법적인 도피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것은 <이런것이 깨달음>이란 자기체험이나 생각속의 안주일 뿐이라고 판단한다.
나는 이렇게 <깨달음이란 이런것>이란
기존의 모든 체험,경지들에게 회의를 품는다.
그것들은 다 좋고 훌륭하지만
주인공이 아닌 피조물인 그것들이 나를 지배할수는 없단 것이다.
그것은 그어떤 하나의 경지나 체험을 붙잡는 것이며 머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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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진정한 <나>의 주인이 될때
나는 미지의 <나>,무한한 가능성의 <나>로서 거듭난다.
여기서 말하는 <나>란
우리의 3차원적 생각이나 감각으로는 구체화할수 없어 아무것도 아니며
따라서 정체성이 없이 무한히 모든것에 대해 열려있는 나이다.
물론 나라는 생각이나 감정,감각은 엄밀히 말해 내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 암재계로부터 나온 미지의 <나>를 구체화하고 느끼며
명재계로 정보화하고 구체화하는데 유용한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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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아주 놀라운 반전(反轉)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모든 생각이나 감정,감각들은
다 내가 아니지만
동시에 반대관점으로 본다면
모두가 다 일시적으로나마 (내가 자기동일시를 하기만 하면) 나를 이루거나
표현하는 일부가 될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시끄러운 소리속에서
오히려 더 큰 침묵을 발견할수 있는 이치와도 같다.
요는 우리의 의식이
침묵과 소음중 어딜 향해서 있느냐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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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아는 명재계와 모르는 암재계를
모두 내안에 가진 가진 경이로운 미지의 존재이다.
내가 아는 과거의 나와 내가 앞으로 겪을 미지의 <나>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렇게 거시적이며 전체적인 존재이다.
전체란 공간적이거나 시간적인 것만이 아닌
이렇게 모든 시간,공간,생각,감각,감정,관계등에 대해
포괄적이고도 총체적인 것임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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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우리안에서 느낄때
나는 우리가 진정 깨달을수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며
그어디에도 머무르는 경지가 아니다.
이렇게 해야만 <나>는
실로 전체성 그자체로서 살아나는 것이다.
아니 온우주의 모든 가능성과 실재성이
그대를 통해 나타나고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갖거나
이쪽을 버리고 저쪽으로 가는 그런 마음의 상태가 아닌
양변 모두를 모두 다 있는그대로 포용하고 갖는
그러한 새로운 존재방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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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나는 모든 존재는 삼위일체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깨달음도 법신(본성),보신(마음),화신(몸)의 세가지관점에서
다 이루어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카르마를 우리를 구속하고 잡아가두는 업습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깨어난 존재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스스로한 선택이며 그러므로 그역시 자발적인 창조이다.
나는 과거의 존재방식에서 깨어나 변할수도 있지만
또 변하지 않을수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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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변할수 있고 깨어날수도 있다.
결코 누가 우릴 구속하거나 잡아두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가 자기를 그 무엇(중생,무명업식,못나고 부족한 자)이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정당시함으로서 한사코 스스로 깨어나길 거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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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이고 창조행위가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깨달음이 찾아오고
내면의 평화나 지복이 우러나오길 마냥 기다리면서 오랜세월 명상이나 수행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주인은 잠자는채
손님이 주인을 깨워주길 바라는 격이니 주객이 전도된것이다.
무명업장이나 카르마란 것들은 본래가 환영이다.
그누구도
내가 바로 지금 깨어나는 것을 막거나 구속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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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수행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매순간 내의지에 의한 존재방식의 선택이
나의 깨달음을 꽃피워내고 열어가는 존재방식의 전환이자
새로운 존재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대문같은 것이다.
내가 진정 빠르게 깨어나는 비밀은 여기에 있다.
바로 지금 내가
나의 매순간 매상황속의 존재방식을
스스로 결정,선택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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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지혜, 평화,지복등 영혼의 모든 지고한 특징들은
결코 그어떤 외부적인 배경이나 대상이나 도움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순수한 사랑은
사랑할 대상이 없이도 스스로 사랑그자체로 존재하듯이
그러한 것들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과거가 어떠하든 상황이 어떠하든
내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집중함으로서
지금 내안에 이미 깃들어있는 그것과 합일하여 바로 그것이 되어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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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아온 일생중 그어떤 특이한 순간 삶의 정상이나 변곡점에서
당신은 잠시 경이로운 신비한 힘이나
영적으로 충만한 존재감 같은 것을 막연하게나마 느껴보았을 것이다.
때로는 아주 열렬하게 수행한 나머지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주 지극한 교감속에서
그대는 아마도 잠시나마 그러한 신비스러운 존재감의 고차원적 상승을 맛보았을 것이다.
예컨대 당신은 지금
이우주조차 만든 위대한 우주정신의 아버지이자
이모든 것을 지극한 사랑으로 출생시킨 위대한 지구어머니의 성령을 가슴으로 느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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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눈을 감고 그것을 다시 불러내어 보라.
그것은 어디에 가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부름을 너무나도 오래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상황이 어덯다는 것은 핑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만이라도 굳게 마음먹고 집중하여보자.
그래서 그것을 이제 불러내어 싹틔우고 나를 통해 성장하게 해보라.
그리고 그것의 정수와 그대가 본래부터 하나임을 깊이 체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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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태까지 잘못된 수행을 해왔다.
즉 우리는 수행속에서 잠시나마 그런 것을 느끼고나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과거와 똑같은 개체마음을 쓰는 삶을 살면서,
그것에 익숙한 자기를 스스로 선택해 그안에 안주하면서
스스로 모순되게도 그런 존재방식속엔 있을수 없는 멋진 체험들을 다시 그리워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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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 그러한
시지프스신화속 프로메테우스의 끝없는 돌멩이 굴려올리기는 그만두자.
그리고 이제 이모든 것을 누가 선택하고 창조하는지를 직시하자.
이미 우리는 위대한 것인 동시에
저속하고 나약한 것이기도 함을 인정하자.
그러나 위대한 것은 왜소한 것 없이는 결코 따로 존재할수 없다.
깨어나보면 바로 이모든 것이 우리의 놀라운 창조능력의 전체적인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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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본래부터 이두가지는 다 우리속의 양면일 뿐이다.
우리란 존재의 영역속에서 단지 우리마음이 가진 촛점을 개체마음에 두면
우리는 왜소해지고 전체마음이나 신성한 힘에 두면 우리는 위대해진다.
단지 그것일 뿐이다.
그대는 언제까지 이비밀을 모른채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줄타기만 할 작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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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러한 양면적 존재방식에 깨어난 그대에게 권유한다.
이제는 모든것을 다 창조할수 있는 <나>의 신비성과 위대성을 깨닫고
그러한 나로서 자유롭게 존재하기 시작하라.
이제는 어떤 수행이나 기도주문이나 누구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그대로 깊이 느끼고 결정하며 존재하기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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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자는
마치 다채널의 TV화면을 다 켤수있는 멀티차원의 마음들을 다 가진자와도 같다.
그는 동시에 위대한
우주의 신성한 아버지 어머니일수 있으며 또한 동시에 개체인간일수도 있다.
그는 자기가 가진 다양한 채널을 상대가 원하는대로 응하며
그파장에 맞추어 다 보여줄수 있다.
하지만 그는 왜소한 겉모습과는 달리 본래의 깊은 자기속에 위대한 나로서의 창조가능한
모든 다채로운 채널을 동시에 느끼며 즐겁게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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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제는 존재의 양끝에 이것과 저것을 놓고 분별속에서 왔다갔다 하지말고
우리가 이미 동시에 이것과 저것을 다 소유하고있음에 깨어나라.
이미 우리는 그러한 존재이다.
이것을 우리가 인정하기만 하면
우리는 바로 <전체의식>응로 깨어나게 된다.
이것이 위대한 <나>로서 깨어나 과거의 나를 완전하게 비운채
매순간 모든것에 대해 열고 모든것을 다 맞아들이는 깨어난 자의 존재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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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3차원적 논리에 입각한 이것아니면
저것이라는 닫힌 존재방식만을 말할때 나는
그것을 초월하여 동시적으로
이것과 저것을 다 품을수 있는 열린 4차원적 존재방식을 말하고자 한다.
이것이 진정한 초월의 길이자 중도의 길이다.
우리는 이것과 저것 둘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수있는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
이모든 다양한 것들을 다 자기속에서 선택하여 꺼내어 창조하며
체험속에 맛볼수있는 다양한 채널(존재방식)의 최종 선택권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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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3의 명상법
(공부잘하는 학생은
남들이 하는 방식대로 무조건 생각없이 열심히 따라하기보다는
자기의 특별한 공부방식과 관점을 개발한다.
나는 진리수행을 위한 영적 탐구역시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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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전통적인 명상은
마음의 상념을 가라앉혀 평화를 구하는 것이었다.
몸과 마음을
더 고요하게...더욱더 고요하게....
그래서 영혼을 더 정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다가 명상의 천재라고 할수 있는 오쇼 라즈니쉬가 나타나
과거와는 전혀 다른 다이내믹(dynamic)명상을 말하고 가르쳤다.
다이내믹 명상이란
스트레스의 발산과 격렬한 동작을 통해
오히려 내적 정화가 더 빨리 될수 있다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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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있는다는 것은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다시 또 가라앉았던 불순물을 떠오르니까.
계속 가만히 앉아서만 살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오쇼는
춤을 추게하고 욕하게 하고 발산하며 자유스럽게 살라고 했다.
이는 마치 세탁기의 세탁방법과도 같다.
한통속에 넣어서 마구 돌리면
때는 때대로 옷은 옷대로 분리된다는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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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시대는 또 수십년 변했고
이제는 제3의 명상법이 나올때가 되었다.
이것의 핵심은
우리에겐 본래 정화해야할 때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본질은 환상이며
오히려 우리가 <있다>고 생각할때 우리속에 실재화하여 있게 된다.
즉 때라든가 에고라든가 하는 것은
우리가 구체화하고 확인해 줌으로서
오히려 언어속에서 더 그존재하는 근거와 힘을 얻게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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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3의 명상법이란
그런 것에 대해 있다,없다란 주관적인 생각을 갖고 씨름하기보다는
다른관점으로 접근해보자는 것이다.
이새로운 관점이란
우리가 때를 빼고 에고를 우리로부터 지우고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우리가 알던 우리란 존재방식자체가 과거에 매인 낡은 관점의 하나요,
본질적으로 변화할수 있는 허구라는 것을 알아차리자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문제란
그래서 원죄나 무명업장이 아니라 단지 더 나은 존재방식의 부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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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것은 실상이 아니다.
나는 현상적으로 에고나 때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정화해야할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니다(이점을 잘 구별해주기 바란다).
그것은 현상적으로 우리의 과거 의식활동의 산물로서 나타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 허상을 확대재생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생각이다.
이것이 우리가 에고나 정화작업으로부터 가장 빨리 자유로와 질수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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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핵심은 <내가 어떻게 할거냐?>가 아니라
바로지금< 내가 무엇이 될것이냐?>가 문제가 된다.
내가 끝까지 살아남아서 정화하고 에고를 죽이고 버리고 하는게 아니라
그런 나의 관점과 존재방식을 확 바꾸면
과거에 내가 나라고 여기던 그나라는것 자체가 본래 환영이라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자리엔 전혀 새로운 내가 나타난다.
나를 어쩌는게 아니라 나를 지금 완전히 바꿔치기 하는것--- 이것이 제3의 명상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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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이 왜 권태스럽고 뻔하며
어린시절의 그존재방식처럼매순간 기쁘고 평화스럽지 않은가?
당신은 그이유를 아는가?
그첫째 이유는 당신이 당산의 삶이란 이야기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영화나 동화책을 읽으며 주먹을 불끈쥐고 흥분하며
<이래선 안되는데....>하고 힘을 주는 아이들이나 사람들을 본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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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유치하며 웃기는가?
그것은 단지 이야기일뿐인데.
하지만 잘 깨어서 보라!
지금 우리가 그짓을 하고 있다.
자기의 해석으로 이루어진 삶이란
내이야기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사소한 것에 곧잘 흥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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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당신에게 삶을
그러니까 막살아도 좋다는 얘길하는게 아니다.
나는 단지 삶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fact)과
그에대한 당신의 해석(interpretation)을 분리하란 것이다.
당신은 삶을 근본적으로 두려움에 입각해서 맞이하고 있다.
당신은 새로운 일이나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상황들을 긴장과 두려움속에서 맞이한다.
그것이 크면 클수록 당신의 두려움도 따라서 더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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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으로서 당신은 여전히 상황이 당신을 지배하게 만들고 있다.
상황은 당신이 바라다보는대로 나타나는 것이건만
당신은 여전히 상황이 모든것을 만들고 움직인다는 착각속에 있다.
그래서 당신은 상황과 마주하여 싸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은 자기의 관점이나 해석과 싸우는 것이다.
나에 대한 나의 싸움걸기.....
그러니 그얼마나 힘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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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모든 관점을 바꿀때
나란 존재방식도 획기적으로 바뀐다.
그리고 나는
내가 빠져있었던 모든 이야기속에서 빠져 나온다.
그리고 나는 본래부터
내삶속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던 거대한 우주의 생명력과 합일한다.
그이후..... 나는 알지만
앎에 빠지지 않으며 분별하지만 그결과에 끌려가지 않는다.
나의 존재의 중심이 이동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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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내관점만 바꾸면
일체의 정화나 수행이 필요없다. 이미 완전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언제 어디서나 나는 내가 나라고 인정하는 바로 그것이 된다.
그러므로 과거 종래의 그대자신의 삶의 패턴에 그대로 빠져있을 필요가 없다.
그대는 매순간 재창조될 수 있다. 내의지에 의해 최고최선의 존재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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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존재방식(마음을 쓰고 굴리는 방식)에 사로잡혀
현재에도 여전히 나를 지배하는 인과(因果)와 씨름하고 싶은가?
그럼 그렇게 살라.
하지만 우리의 삶이란 정밀하게 미분(微分)하여 본다면
매순간 점철되는 관점속에서 생성되는 생각과 감정의 결과일 뿐이다.
즉 정해진 <나>란 시실은 따로 없고
단지 마음과 그마음을 사용하는 각개인 특유의 방식만이 연속될 뿐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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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직시한다면
나는 결국 내가 만들어가는 존재란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진리를 깨닫는 자가 따로 과거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게 아니라
나란 것을 실질적으로 이루고 사는 삶속 매순간순간의 존재방식이
매순간 새로와지고 깨어나서 항상 새롭고 경이로운 미지의 <나>를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제3의 명상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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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유>란 무엇인가.
(성경도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란 대체 무엇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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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선
자유와 도덕윤리의 충돌을 묻는다.
즉 자유롭게 행동하자니 도덕 윤리에 걸리고
도덕윤리를 따르자니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고 심각하게 묻는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자체가
바로 <자유>를 오해하는데서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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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自由)란 무엇인가? 그것을 한자글 그대로 풀이해보면
<스스로(自) 유래함(由)>이다. 즉 자유란 본래의 참뜻이
<제 뜻대로 한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유래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유래한다함은 그어떤 도그마나 법이나 가르침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한다는 말이다. ---------------
스스로 결정함.
아시다시피 모든 결정에는
깊던 얕던간에 사유(思喩)함이 전제되며 다시 모든 사유에는 그일이나 대상을 바라다보는 관점이 전제된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행동이란
곧 모든것을 바라다보는 <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
어떤 관점인가?
곧 내가 나를 무엇이라고 여기며
동시에 너와 상대를 무엇이라고 보느냐의 관점이다. 이관점에 따라
모든것이 다 달리보인다. 이러한 관점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에 따르는 모든 인과나 결과를 스스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곧 자유(스스로 유래)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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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날 많은 수행단체들을 체험하면서
자칭 깨달았다거나 열렸다는 사람들이
자유를 방종으로 알거나
혹은 자기를 구속한 모든 제도나 존재들에 대한
한풀이로 삼는 것을 종종 목격해왔다.
그래서 사회질서나 약속
혹은 가정이 파괴되며 이혼을 쉽게 생각하거나
혹은 자기단체를 떠났다고 있지도 않은 말을 만들어 비방하거나 협박하는등의
몰상식한 일들이 진리나 자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을 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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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정한 자유란 <스스로 유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여래(如來)의 특성이 되는 것이며
깨닫고 구원받은 자의 자질이 되는 것이다.
예수도 <진리가 너희를
(천당으로 보내준다는게 아니라) 자유케 하리라>하였다.
스스로 유래한다함은
자기가 가진 관점이 무엇을 창조하고 선택하는가에 대하여 깊이 깨어있는 능력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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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고서는
자기 생각이나 감정이나 느낌이나 관계등에 휘둘려 끌려다니고 흔들리지
결코 일체의 그런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유래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무엇을 유래하는가?
자기와 자기주변의 환경을 어떻게 창조하고 선택하느냐
바로 그것의 주도적 결정권자요, 창조자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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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스스로 유래한다.
하느님도
스스로 유래한다.
부처도
스스로 유래한다.
오직 사람만이
스스로 유래하지 못하며
오늘도 자기가 배우거나 받아들인 것이나 집착하는것에
자기의 주인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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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순간 ,
그대는 모든것으로부터 자유스럽게 자기를 창조하고 있는가?
그대가 가진것이나 느낀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대스스로가 내리는 결정과 선택권에 의해서.
우리는 이삶속에서
수많은 염려와 두려움과 미혹속에서 스스로 자유스럽지 못하다.
하지만 옳바른 진리탐구와 수행이란 삶의 매순간속에서
바로 이러한 <나>의 존재방식을 직시하고
단호하게 삶에의해 <만들어지는 나>로부터 스스로 <만드는 나>로서 거듭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