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바로크> 시대
1. 16세기 중후반 르네상스 예술의 답습과 새로운 창조를 추구했던 매너리즘적 경향은 17세기 들어서 새로운 사조로 변화한다. 후대의 예술가들은 변화를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다. 거칠고 야만적이며 무절제한 성격을 지녔다고 혹평하기까지 하였다. 17세기의 예술은 16세기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차이가 있는 주정주의적 성격을 보였다. ‘바로크’라고 명명된 이 시대의 예술적 성격을 규정하고 제대로 된 평가를 제시한 것은 뵐블린이었다. 그는 바로크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조각적이고 선적이며 견고한 형식을 움직이는 것·부동하는 것·파악하기 힘든 것으로 해체시킨다든가, 제한이 없고 측정할 수 없으며 무한한 것의 인상을 불러 일으키기 위하여 한계나 윤곽을 지워버린다든가, 지속적·정체적·객관적 존재를 생성이나 기능으로, 주관과 객체의 상호작용으로 변화시킨다든가 하는 것”이 바로 바로크의 특징적 개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2. 17세기 바로크 예술에는 과학적 발견과 발전을 통해 획득한 새로운 이념이 담겨져 있다. 코페르니쿠스가 발견한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인간과 다른 존재들과의 상호작용에 더 큰 관심을 갖게 하였고, 각각의 개별적인 것들의 유기적인 총합으로서의 우주관이 예술에 적용되었다. 그렇기에 바로크 예술에서 ‘통일성’은 매우 중요한 원리였다. 통일성은 추후에 달성된 결과가 아니라 예술가가 처음부터 목표를 가지고 추진하는 선행조건이었고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들은 통일성의 원리 속에서 통합되었던 것이다. 마치 천체와 같이 무한한 전체와 개별적인 행성들의 연관성이 예술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 ‘바로크’라는 하나의 예술양식이 시대를 지배하였지만 각각의 나라에서 전개되는 방식은 동일성보다는 더 큰 다양성을 보여주었으며 이 시대는 바로크와 함께 ‘고전주의’적 양식이 같이 유행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17세기 기독교가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리되었고 정치사회적 변화가 진행된 결과는 예술의 성격을 변모시켰다. 바로크 예술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두 개의 다른 종교적 배경 속에서의 변화를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는 로마와 파리를 중심으로 진행된 궁정적·가톨릭적 바로크와 다른 하나는 플랑드로와 홀란드(네덜란드)을 중심으로 한 시민적·개신교적 바로크이다.
4. 17세기 초반 로마의 교황청은 일시적으로 개신교와의 경쟁을 통해 좀 더 자유로운 정책을 추구하였고 적과의 싸움보다는 내부를 포섭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더 화려하고 장엄한 예술품의 생산을 지원하였고 예술을 종교적 포교의 수단으로 활용하는데 더 적극적이 되었다. 하지만 가톨릭 바로크의 중심은 곧바로 프랑스로 전환된다. 로마의 경제력은 쇠퇴하였고 신흥 부르주아지들의 성장은 강력한 왕권을 필요로 하는 절대주의의 도래를 요구하였다. 프랑스의 파리와 베르사유 궁전은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바로크는 ‘고전주의’의 성격을 띠었다. 특히 루이 14세 시대의 예술은 절대주의라는 정치적 이념이 예술을 지배하고 통제하던 시기였다.
5. 절대주의라는 정치적 원리는 고전주의라는 예술적 이념의 기초가 되었다. 고전주의가 추구했던 규율과 제한 그리고 집중과 통합의 원리는 바로 정치적 이념에 근거를 두고 있는 원리였다. 고전주의는 국가의 정치적 목적에 어울리는 예술만이 선택되었다. 예술의 통일을 위하여 국가는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예술가들을 정치적 목적에 복종시켰다. 이러한 공인적 예술에 대한 반감은 서서히 등장하였고 결국은 공인예술과 비공인예술의 대립을 가져왔다. 하지만 17세기는 공인예술이 지배하던 시기였고 고전주의 예술관이 승리하던 시기였다. 예술의 독자성과 정치와의 분리를 주장한 다음과 같은 의견은 18세기에서나 등장하게 된다. “예술은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감동시키고자 하는 것이며, 예술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이성의 태도가 아니라 감정의 태도이다.”
6. 바로크 예술의 또 다른 중심지는 신교의 플랑드로와 홀란드(네덜란드) 지역이었다. 특히 홀란드는 예술의 독자적인 생산과 예술가들의 자유가 확립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반드시 예술가들에게는 긍정적인 환경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창작의 자유와 예술가의 진정한 의미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중대한 변화이자 도전이었다. 프랑드로 지역은 개신교의 영향이 커졌다하더라도 가톨릭적 성격이 공존하였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화가가 루벤스였다. 루벤스는 엄청난 예술수요층을 가진 인기있는 작가였다. 그는 수요에 맞춰 공급을 진행시키기 위해 매뉴팩처 형태의 분업체제를 수립하였고 다양하면서도 많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루벤스의 세속적인 성공은 홀란드 지역에서는 찾기 어려운 사례였다.
7. 비록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가까운 지역이지만 홀란드의 예술적 분위기는 달랐다. 홀란드에서는 루벤스와 같은 분업작업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하우저는 홀란드 예술가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홀란드의 자연주의에서는 예술가의 손에 의한 처리, 회화적인 필적과 화필의 터치, 그리고 화가가 캔버스의 직접 손 댄 흔적 하나하나가 극도로 중요한 의의를 가졌고,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순수하게 지키려는 소망은 분업적 작업방법에 처음부터 한계선을 그었던 것이다.” 홀란드의 지배적인 흐름은 ‘서민적 자연주의’였다. 화가들은 개인적 체험을 각자의 개성에 따라 표현했고, 상업적으로 크게 성장한 홀란드 지역에서는 신흥 부르주아지들이 이러한 작품들을 구매하였다. 홀란드는 상업적인 성장을 통해 예술품의 투자에도 관심을 갖게 되면서 예술품의 수요가 늘어나게 된 것이다.
8. 홀란드 지역에서의 독특한 예술품 거래와 수요의 증가는 예술가들의 창작의 자유를 제공하였고 감상자들의 수요에 따른 작품을 제작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예술가들에게 호의적으로만 작동하지는 않았다. 과거 예술가들은 후원자들의 도움이나 궁정이나 교회와 같은 공적인 주문을 통해 작품을 생산하였다면, 이제는 개별적인 감상자들의 요구에 맞춰야하는 상황에서 주문이 있기 전에 선차적으로 작품으로 제작함으로써 과도한 공급의 과잉을 가져오거나 사람들이 선호하는 특정한 작품만을 만들어내는, 자유롭지만 결코 자유롭지 않은 모순적 상황을 가져왔다.
9. 홀란드의 예술가들의 사회적 위상과 그들의 실존적 생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램브란트라 할 수 있다. 렘브란트는 초반 많은 감상자들에게 인기있는 작가로서 상당한 수입을 얻었고 사회적 지위도 보장받게 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예술적 자의식이 강한 작품을 생산하면서부터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급기야는 생존의 위협까지 받게 된다. 주문자의 요구에 매어있었던 중세적 흐름에서 벗어나 예술가들이 각자의 창조적 활동을 추구하려는 시도는 예술의 근본적인 본질임에 분명하지만 그러한 모험에 동반되는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위험을 안게 되는 것이다. 렘브란트는 바로 근대적 예술가의 예술적 자유와 경제적 불안을 상징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10. 하우저는 홀란드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자본주의적 질서가 작동하는 사회에서 예술가들의 위치를 냉정하게 분석한다. “홀란드 사회는 그(렘브란트)로 하여금 자유롭게 성장하는 것만 허용했고, 그가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는 순간 가차없이 그를 버렸던 것이다. 예술가들의 정신적 실존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험에 처해있기 마련이다. 권위주의적 사회질서도 자유주의적 사회질서도 예술가에게는 안전히 편안한 것이 못된다. 전자가 자유를 속박한다면 후자는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대적 불안과 맞서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위대한 존재들이 예술의 변화와 발전을 이끌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예술을 ‘시대와의 불화’라고 표현했던 예술가들처럼, 예술가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예술적 활동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첫댓글 - 예술과 자유. 예술의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