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 봄밤(재난지원금)
정혁현
상철은 주민센터에서 서울시 재난지원금을 지역사랑상품권으로 수령하는 길로 시내로 나왔다. 재난지원금 지급이 시작된 지 이미 10여일이 지났다. 그에게 재난지원금은 가뭄에 단비였지만, 그럴수록 서두르지 않고 남들보다 좀 나중에 받는다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시간을 끌었다. 그래도 가용기간인 8월 30일까지는 새털 같은 시간이 있었다. 늦봄의 가로수 잎들은 무성했으며 윤기가 흘렀다. 가로수 잎에 반사된 무수한 빛의 조각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걸음은 여유로웠다. 어제 정부재난지원금을 신용카드로 수령하고, 오늘 또 서울시 상품권을 받았으니 갑자기 70만원이 넘는 돈이 주머니에 두둑이 채워진 셈이었다. 그는 평소라면 흘깃 들여다볼 뿐 결코 혼자서는 들어가지 않았을 커피체인점 문을 호기롭게 열고 들어섰다. 매장에 흐르는 커피향기가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의 격조를 한 차원 올려주는 느낌이었다.
그는 창가 자리에 앉아 방금 테이블에 놓은 커피를 그윽이 바라보았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커피를 앞에 두고 깊은 사색에 빠진 인간의 실루엣을 만들어 주었다. 상철이 연출하는 실루엣이 이윽고 손을 뻗어 커피 잔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우선.... 그간 강요된 금욕에 위축된 영혼을 좀 풀어줄 필요가 있어.’
상철은 뜨거운 커피를 천천히 한 모금 마시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앞으로 석 달 동안 매월 20만원 남짓 허락된 여유를 어떻게 누릴 것인지 계획이란 걸 세우고 있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여유를 누릴 계획을 세우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상철은 대충 계획을 세우고도 좀 여유를 부렸다. 배낭에서 읽던 책을 꺼내 잘 이해되지 않던 부분을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다시 읽어 보니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난번엔 급하게 강의 자료를 작성하느라 중요한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을 소홀히 했던 것이다.
‘그래, 조급해 하지 말고 좀 느긋한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부분이었어.’
책을 덮고 나서도 그는 핸드폰으로 SNS도 훑어보고 이어폰을 연결해 음악도 좀 듣는 둥 여유를 부리다가 카페를 나왔다.
걸음은 가벼웠다. 그는 70만원의 금전이 자신의 내면에서 일으키는 정서의 효과에 한편으론 우습고 또 한편으론 놀라웠다. 하긴 이런 여유가 참으로 오랜만이긴 했다. 3년 전 아내와 헤어지고 나서부터 경제적인 여유는 없었다. 이혼은 그에게 무엇보다 경제적인 몰락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이혼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안다는 것과 겪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생활비는 항상 빠듯하거나 좀 모자랐다. 다른 때보다 일거리를 더 얻었다 해서 형편이 개선되는 건 아니었다. 아랫돌에 여유가 생겼다면 그전에 빼먹었던 윗돌을 채워야 하는 식이었다. 그는 어려움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자신에게 이 어려움은 당한 게 아니라 감수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인 몰락에서 그 전과는 다른 즐거움을 느끼고자 하였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빠듯한 삶은 불확실한 삶이기에 예기치 않은 궁지에 몰리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던 중 재난지원금이 뜻밖의 은총처럼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빠듯한 생활을 영위할만한 일상으로 여길 구력이 붙을 즈음이었다.
상철은 근처의 꽤 큰 재래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코로나19 상황에도 시장은 북적거렸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썼지만 한층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만은 감춰지지 않았다. 시장에는 다른 데보다 사람들이 좀 더 붐비는 가게가 몇 군데 있다. 시장 초입에서 꽈배기나 크로켓 등을 튀겨내는 도넛가게나 저녁 밥상을 간단히 잔칫상으로 만들어 주는 삼겹살을 파는 정육점이 그런 곳이다. 상철도 시장을 천천히 돌며 정육점들을 살피다가 손님들이 제일 많이 몰린 곳을 찾아냈다. 붉은 조명등 아래 가지각색의 부위가 일정한 분량으로 포장된 고기진열장은 구강충동의 강도만큼이나 뜨거운 정념의 색조를 띠고 있었다. 상철은 늠름하게 한우 등심을 두 근이나 끊었다. 그리고 고기구이에 필요한 재료들을 꼼꼼히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중에 와인 한 병과 일회용 숯불구이 판이 빠질 수 없었다. 배낭은 묵직했지만 그만큼 가슴은 뿌듯했다.
약속 장소에 준기는 낯선 여자 한 명과 함께 나타났다. 여자는 상철을 보며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수수한 옷차림에 배낭을 메고 있어 아직 학생처럼 보였다. 상철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며 그녀의 웃음을 받았다. 준기에게 물었다.
“집에서 오는 길 아니야? 좀 전에 온라인 강의해야 할 시간이었잖아.”
준기는 대답은 않고 여자를 소개했다.
“어, 인사드려라. 세 학기 째 같이 강의하는 선생님인데, 재난지원금 받은 친구가 한턱 쏜다고 하니까 선생님도 맥주 한 잔 하고 싶다고 해서 같이 왔어. 괜찮지?”
상철은 왠지 얼굴이 화끈 거렸다. 갑자기 말이 꼬였다.
“가 강의는... 어? 내 주제에 한 턱은 무슨.... 아무튼 잘 오셨어요.”
여자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송선생님이 선생님 말씀을 자주 하셔서 뵌 분 같아요. 이진숙이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마상철입니다. 반갑습니다.”
상철은 진숙과 인사한 후 준기에게 눈을 흘겼다.
“송박, 자식, 귀띔이라도 해주지.”
“왜 그래 마빡답지 않게. 불편해 할 거 없어. 우리끼리야 만날 한 얘기 또 하는 거지. 나보다도 이선생님이 너와 하실 말씀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준기가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내가 불편하다는 게 아니라.... 사실은 집에 가서 고기를 구워먹으려고 벌써 시장을 봤거든.... 초면에 이선생님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이선생이 준기를 돌아보며 웃었다. 벌써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저도 고기 한 점 얻어먹을 수 있겠죠? 사실은 송선생님 말씀 듣고 벌써부터 선생님을 소개해 달라고 제가 부탁했어요.”
“자 그럼 파티를 위해서 먼저 맥주 한 잔 가볍게 마시고 네 집으로 가볼까? 재난지원금으로 술값은 못 낼 테니 맥주 한 잔은 내가 살게.”
상철은 맥주집에서 이선생이 자리를 비운 사이 주머니에서 상품권을 꺼내 22만원 어치를 준기에게 건넸다. 준기가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상철을 쳐다보았다.
“저번에 네가 빌려준 돈 20만원 상품권 깡해서 갚는 거다. 괜찮겠지?”
준기가 횡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받을 생각을 한 건 아닌데.... 깡은 무슨.... 준다면 받을게. 내 재난지원금은 몽땅 미진이 손에 들어갔잖아.... 나도 코로나 덕 볼 기회가 생겼네”
준기가 만 원짜리 상품권 두 장을 다시 내밀었다.
“참, 제수씨는 잘 지네지? 딸네미도 잘 크고?”
딸아이 얘기에 준기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준기는 독일 유학 중에 딸아이가 생겼다. 그 바람에 연구과정을 마치는데 2년을 미루어야 했다. 상철은 고등학교 동창인 준기를 졸업 후 처음으로 독일에서 다시 만났다. 이역만리 이국 대학의 강의실 복도에서 그를 정면으로 마주쳤던 것이다. 이 생각지도 않은 만남은 갑자기 시공간이 10 여 년 전 한국의 고등학교로 순간이동을 한 것 같은 기이한 체험이었다. 우연히도 준기가 독일 유학에서 신청한 첫 수업이 상철도 신청한 70년 대 이후의 문화사에 관한 강의였다. 경제사를 전공하는 상철은 영화사를 전공하는 준기와 공유하는 관심이 적지 않았다. 준기보다 1년 먼저 독일로 온 상철은 그에게 이것저것 유학생활의 노하우를 전수해주었다. 고등학교 때는 그저 아는 사이에 불과했던 관계가 둘도 없는 우정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외롭고 힘든 유학생활을 서로 격려하는 것은 물론, 공부를 마친 후 한국에서 함께 실천할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상철도 유학 중에는 기혼이었다. 당연히 가족들 사이에서도 친분이 생겼다. 하지만 상철의 아내는 내색하지는 않아도 달가운 눈치는 아니었다. 그들의 관계가 상철의 학위과정에 지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상철은 결혼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비교적 남들보다 빠르게 학위를 취득해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상철보다 독일어가 능통한 아내가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의 학업을 도왔다. 아내는 상철이 한국에서 자리를 잡은 뒤에 아이를 가져도 늦지 않다며 철저하게 피임 했다. 그녀는 상철이 하루라도 빨리 과정을 마치고 한국에서 자리를 잡기를 원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학에 자리를 얻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그가 대학에 시간강사를 하며 자리를 알아볼 때는 한국을 떠날 때 시작된 대학개혁이 거의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경제학과에서 경제사 관련 강의는 대폭으로 축소되었다. 대학의 실적을 졸업생의 취직으로 평가하는 잣대에 경제사는 끄트머리에 매달리기도 간당간당했다. 인문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이 좁게는 학생들의 취직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넓게는 자본의 회전에 얼마나 가속을 붙일 수 있는지를 증명해야 했다. 그는 준기가 그보다 3년 늦게 귀국할 때까지도 전망 없는 강사 자리를 전전하고 있었다. 아내는 한국에 지사를 둔 독일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철의 상황에 초조해 했다.
상철은 아내에게서 그가 대학에 자리를 구하는 걸 절박하게 여기 않는 원인이 경제적인 여유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느끼곤 했다. 그 무렵 상철은 아내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대학이 더 이상 유학을 떠날 때 생각했던 그런 곳이 아니라고, 물론 자기는 꿈 때문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대학에서 일하고 싶지만, 앞으로도 대학에 자리를 잡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혹시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그게 십년이 될지 이십년이 될지 자신도 알 수 없다고. 그렇다면 대학에 목맬 것 없이 대학 밖에서 연구를 실천할 여러 가능한 길을 모색해보고 싶다고.
상철은 대학은 이미 죽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의 남편에게 그럴듯한 명함을 만들어줄 대학은 이미 대학이 아니라고. 나는 그런 대학에 자리를 얻기 위해서 공부를 한 게 아니라고. 상철은 그게 극단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대체로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소수지만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대학 밖에서 좀 더 자유롭고 실천적인 연구의 길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이미 그런 흐름에 참여하고 있었고 좀 더 삶의 무게를 싣고 싶었다.
아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상철은 아내를 안으며 말했다. 대학을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게 아냐. 단지 지금 취직에 목매지 않겠다는 것뿐이야. 연구 활동을 계속한다면 대학의 초빙을 받을 수도 있어. 당신 고생하는데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아내의 몸은 굳어 있었고 냉기까지 감돌았다. 그녀는 그를 살짝 밀어낸 후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그저 확신에 가까웠던 짐작이 바뀔 수 없는 현실임을 확인했을 뿐이라는 결론을 볼 수 있었다. 그 확신의 눈빛은 둘을 이어주던 가느다란 끈을 간단히 끊어버릴 수 있을 만큼 날카로웠다.
그로부터 삼 개월 후 아내는 상철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독일 현지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는데 가게 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상철은 아내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그의 아내가 상철의 물질적인 삶을 부양해왔다. 상철이 유학을 일찍 떠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유학생활 내내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그녀는 쉬지 않고 일했다. 독일문화원에서 만나 사귀기 시작할 때, 그녀는 독일에서 공부할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상철은 아내의 그런 막연한 희망을 불확실한 삶에 내기를 거는 모험정신처럼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아내에게 강한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 막연한 희망에 비해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반면 상철은 구체적인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현실적인 편이었다. 상철은 자신에게 헌신한 아내에게 그녀가 바라는 것을 가져다주고 싶었지만, 그게 부채를 상환하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상철은 자기가 아내의 꿈을 이뤄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으로 그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고 그 책임을 졌다고 생각했다.
상철의 집은 일회용 숯불을 피울 만한 마당이 있는 옥탑이었다. 몇 가지 간편식을 곁들인 식사 겸 술자리는 제법 호젓했다. 옥탑 생활이 그런대로 괜찮은 계절이었다. 금새 얼굴이 붉어진 준기가 물었다.
“이선생님은 저하고 하는 공동강의 말고 몇 개나 한다고 하셨죠?”
이진숙은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 한숨부터 쉬었다.
“요즘 영화미학을 누가 들으려고 하나요? 요즘 애들은 어렵고 돈 안 되는 건 질색인가 봐요. 이번 학기로 강의가 끊기나 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두 개 맡았어요. 부모님께 더 이상 손 벌리지 않겠다고 독립했는데.... 사회단체 강의가 아니면 생활이 어려운 지경이에요.”
그녀는 불판 위의 고기를 뒤집었다. 상철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요즘 대학에 들어온 애들은 취업과정 이수하는 거 같아요. 전공필수가 아니면 부담 없이 학점 따는 강의만 찾아다니잖아요. 하긴 애들 탓할 건 아니죠. 세상이 그걸 요구하고 또 그걸 따라도 졸업 이후의 미래가 보장되는 건 아니니까요. 애들은 초조한 일상을 살고 있고 그만큼 여유가 없는 거겠죠. 정말 이래도 우리에게 내일이 있는 걸까요?”
“그래요. 우리도 도낀 개낀이죠 뭐. 저부터도 강의 자리하면 생활비부터 계산하는 형편인 걸요. 정말 이건 아니겠죠?”
이진숙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사회단체 강의에선 취업에 상관없는 강의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게 신기해요. 상아탑은 취업의 관문이 되었는데, 정작 세상에선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통찰을 구하는 건가요?” 다시 상철이 말했다. 준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 전반에 이건 아니라는 거, 이런 식으로는 오래갈 수 없다는 무언의 합의는 이미 이루어진 게 아닐까? 단지 대중들은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준비된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지.”
“대중이 가지지 못한 걸 지식인들은 가지고 있나?”
상철이 반문했다. 이진숙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있죠. 너무 많죠. 대안들의 다품종 소량생산이랄까.... 바야흐로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잖아요. 다품종 소량생산이 비용의 리스크를 감소시켜 주듯이 대안이론의 백가쟁명이 대안을 주장하는 지식인의 리스크를 감소시켜준 달까? 말만 무성한 다원주의 지식 시장은 지식인의 삶을 요구하지 않잖아요? 생활을 안정시켜주는 지식체제에 안주하면서 하는 말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려도 그게 무슨 대안을 여는 힘이 있겠어요?”
준기가 상철을 쳐다보면서 빙긋이 웃었다. 상철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진숙에게 동의를 표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상철이 화제를 바꿨다.
“오늘 코로나 비상사태로 재난지원금을 받으니 갑자기 세상이 여유로워 보이더군요. 그런데 그 여유가 좀 묘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왜 벤야민이 역사철학테제에서 그렇게 말하잖아요. 억눌린 자들에게 비상사태는 예외가 아니라 상례라고요. 그리고 역사적 유물론자의 과제는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하게 하는 것이라고요. 여기서 도래하게 해야 할 게 진정한 비상사태라면, 억눌린 자에게 상례인 비상사태는 사이비 비상사태라는 거잖아요? 이 말이 우리 시대처럼 적절했던 때가 있었을까요? 학생들은 취업 비상사태 속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우리 같은 강사들 역시 대학의 자리를 얻기 위한 무한 경쟁이라는 비상사태 속에서 우리가 왜 공부했는지를 잊어버리고 있고.... 아, 하긴 대개는 교수 되려고 공부하기는 하죠. 그렇다면 역시 학생보다 가르치는 인간들의 문제가 먼저였군요.”
이진숙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무튼....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부는 극소수에게 쌓이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임금 고실업으로 난리통인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고.... 이게 죄다 사이비 비상사태라는 거겠죠?”
“그렇죠, 우리를 불안 초조하게 만들고 그럴수록 취직이나 돈벌이 같이 주어진 현실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몰기 쉬운 짐승 떼로 만드는 사이비 비상사태죠.”
이진숙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진정한 역사적 유물론자는 코로나19겠군요. 이게 당장은 이 흐름을 막아버렸잖아요?”
준기가 거들었다. 상철이 조금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코로나19는 그 자체로 비상사태가 아니라 하나의 계기가 아닐까? 억눌린 자의 상례인 비상사태는 주권자가 만드는 거고, 진정한 비상사태는 역사적 유물론자가 도래하게 하는 거라는 의미에서 말이야.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이를 어떤 비상사태로 만들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주권자와 민중 사이의 투쟁국면이 아닐까? 우리 시대로 말하면 극소수 글로벌 자본과 대다수 민중들 사이의....”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든 걸까요? 재난지원금을 받고 나니 어떤 초월적 존재에게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 초월적 존재가 국가라는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확 깬다고 할까? 국가가 자식에게 용돈을 주는 가부장 같은 존재가 되어 시민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거잖아요? 그런데 아버지는 IMF 때 돌아가시지 않았나요? 게다가 책임지는 아버지라니.... 이 아버지 우리 아버지 맞나요? 이 돈 정말 맘 놓고 써도 되는 돈일까요?”
“주니 받긴 하지만 받아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드신다?”
준기가 태평스런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진숙이 되받았다.
“받아도 될까가 아니라 이게 뭘까 하는 거죠. 이게 대체 무슨 신홀까?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애들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주인공이 알 수 없는 존재로부터 선물을 받았는데 그게 그의 운명을 상상도 못했던 곳으로 끌고 가는 그런 얘기 말이에요.”
“재난지원금이 우리를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곳으로 끌고 간다면 코로나 위기는 진정한 비상사태일 수 있겠죠. 마치 저 위에서 내려준 은총처럼 말이죠. 그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세계는 현실의 연장일 뿐이니까요. 문제는 우리가 그걸 은총으로 체험할 준비가 되었느냐는 거겠죠.”
“은총으로 체험할 준비라...”
준기가 혼잣말처럼 말했고 진숙도 관심을 표했다.“
“왜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의 주요 화두가 안전이잖아요? 그리고 안전이라는 말은 예측가능성이라는 말과 호환되고 있고요. 여기에 심각한 모순이 있지 않나요? 이 질서 자체가 희생자를 대량으로 쏟아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진정한 안전이란 이 질서 안에서의 예측가능성이 아니라 오히려 예측불가능성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안전을 위해 안정을 깨뜨리고 이 질서 너머의 불확실한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역설이 가능한 거구요. 코로나19가 은총으로 체험되기 위해서는 이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준기가 술잔을 들었다.
“자, 그렇다면 모험으로 가득한 여행을 위해서 이 대목에서 건배!”
“오늘의 한우는 고된 여행을 준비하는 영양식이었나요?”
진숙의 말에 모두 함께 웃었다. 상철이 다시 말했다.
“오늘 재난지원금으로 시장을 보면서 그런 느낌이었어요. ‘오늘만 날이다’랄까? 재난지원금이 풀리면서 한우 판매가 제일 많이 늘었다더군요. 그 다음이 삼겹살.... 삼겹살 가격은 폭등을 했더라구요. 이게 뭔가, 먹고 죽자,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더라는 건가. 지금이 배곯아 죽는 시대는 아닌데.... 하긴 저도 지원금으로 제일 먼저 산 게 한우라니까요. 이게 지금 우리가 재난지원금을 의사가 시한부 환자에게 하는 소리로 듣고 있는 게 아닌 건지.... ‘이제 드시고 싶은 거 마음껏 드세요. 내일은 없어요.’ 뭐 이런 게 아닐까요?” 제발 그건 아니기를...“
준기와 진숙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웃음 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준기가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사실 식욕은 가장 생물학적인 것이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것이니까. 식탁에서 배제된 인간이 느끼는 건 생존의 공포가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인 존재가 삭제되는 소외와 불안이 아닐까? 요즘 TV를 틀면 먹방으로 도배되고 있는데, 바로 이 불안을 보상하려는 집착이 아닐까? 먹방은 인간적인 삶을 상실한 대중들을 셀럽들의 식탁으로 불러주는 환상을 팔아먹고 있는 거겠지. 사람들이 재난지원금을 우선 그간 빡빡한 삶에서 마음 편히 먹을 수 없던 음식을 소비하는 데 사용하는 건 당연해. 하지만 소비 추이를 좀 볼 필요가 있어. 하긴 그러기엔 지원금 액수가 너무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먹고 난 다음에 어디로 갈지 궁금해. 자신들이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소비추이를 보일지도 모르잖아. 기대도 좀 있고. 그래도 어떤 변화를 보이기엔 돈이 너무 적을까?”
“오늘 우리는 어디로 갈지를 찾은 건가요? 불확실한 모험을 향해서!”
진숙이 웃음 띤 얼굴로 다시 잔을 들었다.
상철은 방금 준기의 말이 그이 인격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준기는 비판적 사고에도 낙관을 잃는 법이 없다. 대학에 자리를 잡을 가능성에 관해서도 준기가 상철보다 더 희망적인 조건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에게도 그 가능성은 희박했다. 상철이 그 희박한 가능성을 무로 환원했다면, 준기는 그걸 유로 환원한 것이다. 하긴 1프로의 가능성이라도 있긴 있는 거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 안에 현실이 되기는 어렵다. 상철에겐 그 실낱같은 가능성은 우리의 삶을 희망 없는 현실에 묶어두는 미끼였다. 그러나 준기에겐 오히려 현실 너머를 조망하기 위해 딛고 올라설 수 있는 현실의 디딤돌이었다. 한 때 상철은 준기의 긍정적 성격이 여유 있는 그의 부모님의 지원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역시 아내의 지원을 받았었다. 조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준기의 이런 작은 차이가 어떤 계기에 의해 메울 수 없는 분열로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럼에도 그가 가장 깊은 속내를 터놓는 친구는 준기뿐이었다. 준기는 상철의 생각에 항상 맞장구를 쳐주지는 않지만 늘 진지하게 받아주었고, 때로는 외길에 선 상철이 보지 못하는 것을 일깨워주기도 하였다.
진숙도 상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녀가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대체 우리가 언제까지 대학산업의 예비군 노릇을 해야 하는 걸까요?”
“글쎄요. 대학이라는 현실에 자리를 잡기엔 너무 가능성이 없고, 그렇다고 대학 밖의 현실은 우리 같은 먹물들에겐 너무 비현실적이고.... 현실이라는 게.... 어디 있기는 있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가 꿈속을 헤매고 있는 걸까요?”
준기가 상철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좀 서늘하네. 밤엔 아직 한기가 있어. 우리 안으로 들어갈까?”
실내로 들어오면서 상철이 두 사람을 돌아보며 짐짓 무심한 척 말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떤 아는 사이야?”
진숙이 가볍게 웃었고 준기가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어떤 관곈지 이실직고 하라는 말씀이지? 좋은 관계지. 내가 귀국한 게 벌써 5년이 넘어가니, 이선생님 우리 5년 가까이 만났네요. 그땐 부르는 학회는 다 쫓아다녔는데, 이 바닥이 좁은 건지 거의 가는 곳마다 이선생이 있더라고. 후후.”
진숙이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A대 이 교수가 하는 정부지원 프로젝트도 같이 했었어요. 프로젝트 후에는 연구팀이 정기 세미나를 꾸렸고요. 그러니까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만나는 막역한 사이죠. 송선생님 발상이 가끔 독특해서 흥미로웠는데, 어느 날 애프터 자리에서 고백을 하시더라구요. 자기 발상의 수원지는 마선생님이라고.... 그때부터 제가 마선생님 소개시켜 달라고 졸랐어요.”
상철이 준기를 흘겨보았다.
“송선생님,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시고 내 핑계를 대오신 겁니까?”
준기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마선생님, 제 진심 아시잖습니까? 오늘처럼 늘 거두고 먹여주시는 은혜를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흐흐흐.”
“제가 송선생님 하고 또 우리 세미나팀 한 분과 같이 진행하는 공동강의도 A대 이교수님이 주선하신 거예요. 그분 말씀은 그래요, ‘너희들에게 대학에 자리를 얻는 것에 관해서는 어떤 약속도 할 수 없다. 이 팀을 바탕으로 무슨 궁리라도 해봐라. 힘닿는 대로 도와는 주겠다.’ 저는 교수님이 선택하는 위치가 꽤 마음에 들어요. 기득권을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그 안에 갇히지는 않겠다는 거죠. 자신의 기득권 안에서 우릴 돕는데 그게 또 교수님에게는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그래선지 다른 교수님들과 달리 우리에게 정중하셔요. 그게 또 우리에겐 다른 대안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응원이기도 하고요. 사실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을 여는 일이라 막연하긴 해요. 마선생님은 일찌감치 대학에 대한 기대를 접으셨다니 어떤 모색을 하시는지 궁금해요. 도움도 받고 싶고요. 우리가 오늘 보따리 장사라고 푸념을 늘어놨지만 학위를 가진 무기 소지자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일정한 네트워크를 구성한다면 신나는 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어요. 또 그래야 하구요”
이진숙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이쯤 되면 재난지원금 소비추이에 대한 내 기대가 그저 뜬구름 잡는 건 아니지? 소득수준으로 보면 우리도 차상위 수준에서 왔다 갔다 하는 서민이잖아. 두고 봐, 사람들 한우 먹고 난 다음에 뭘 할지, 일단 사람은 잘 먹어둘 필요가 있다니까. 에헴.”
준기가 그 답지 않은 너스레를 덜었다.
세계의 공장들을 모조리 닫아버린 코로나19로 어느 해보다 깨끗한 봄밤이었다. 마음이 통한 세 사람은 밤 깊도록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진숙은 언젠가부터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싶더니 어느새 모로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그녀가 잠든 지 30분도 안 돼 준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상철은 일순 당황했다.
“어! 이선생 잠들었는데 일어나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준기가 씩 웃었다.
“자식 놀라기는... 오늘 미진이에게 너 만날 거라고 얘기하고 나왔어, 너 우리 마누라에게 미운털 박히지 않게 하려면 외박은 삼가야 겠지? 이선생은 술자리에서 저렇게 한번은 깜빡 하더라구. 보통 금방 일어나는데 오늘은 좀 피곤했나? 좀 기다렸는데도 안 일어나네.”
“깨울까?”
“아니 깨우면 잘 못 일어나. 하지만 곧 알아서 일어나실 거야.”
“그럼 좀 더 있어. 미진 씨한테 박힌 미운털이야 천천히 뽑지 뭐.”
“아냐 벌써 일어나야 했어. 이선생 잘 모셔. 애리 애리 해 보여도 로자야 로자, 로자 룩셈부르크! 오늘 이선생 만난 거 재난지원금보다 더 큰 은총이었다는 걸 언젠가 깨닫게 될 거야.”
상철은 엉거주춤 집을 나서는 준기를 따라 나가 배웅을 했다. 준기는 다시 한 번 잘 모시라며 10만 원 짜리 지역상품권을 상철의 주머니에 찔러주었다. 상철은 멀찍이 준기가 골목길을 빠져나갈 때까지 멍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 집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옥탑으로 올라갔다. 그새 이진숙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상철은 그 모습이 좀 우스웠다. 상철의 얼굴을 본 이진숙도 제 모습을 짐작했는지 계면쩍은 웃음을 지었다.
“송선생님은 가신 거예요? 배신자!”
“그 배신자 놈 때문에 저도 당황했습니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하긴 많이 드실 술도 없긴 했죠.”
“하하, 제가 이래요. 오늘 간만에 한우를 먹었더니 몸이 좀 황송했나 봐요. 오늘 즐겁고 감사했어요.”
이진숙도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철은 그녀를 따라 큰길까지 천천히 걸었다.
“댁이 어디세요?”
“가까워요. 택시 타면 10분 좀 넘게 걸릴 거예요.”
“오늘 처음 뵀는데 참 편하고 즐거웠습니다. 혹시 아쉬우시면 근처 맥주집에서 한 잔 더 하시겠어요?”
이진숙이 웃었다.
“하하, 그 말씀 안 하셨으면 정말 아쉬웠을 거예요. 하지만 오늘만 날은 아닐 거 같은데요? 앞으로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기 위해 자주 뵐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진숙의 미소가 상철의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주었다.
상철은 진숙이 택시에 오르는 것을 보고 집으로 향했다. 근처 산에서 내려오는 아카시 꽃 향이 물씬 풍겨왔다. 그는 봄밤의 정취에 충분히 취하기 위해 걸음을 아끼듯 천천히 걸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