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무어인) - 포르투갈 파두
그리스어 mauros에서 나와 라틴어 maurus를 거처 영어화된 말로 ‘피부색이 어두운 자'를 뜻한다. 유럽에서 북아프리카 사람들을 가리키는 고전적 명칭으로 아랍족의 침입이 있은 후부터 이들 북아프리카 민족 구성은 아랍인(대략 40%)과 베르베르인(대략 60%)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모로코와 알제리를 비롯하여, 다소 정도가 낮긴 하지만 튀니지와 모리타니까지가 무어인의 땅에 해당한다. 스페인에서는 아직도 아랍인들을 모로(Moros)라고 부르고 있다. 재정복 이후에도 스페인에 남아 외견상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던 아랍인을 모리스코스(Moriscos, 스페인어로 무어인)라고 하였다. 유럽인들의 식민지가 점점 팽창되면서 무어인이라는 용
어는 무슬림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에 사는 무슬림을 흔히들 ‘무어인’이라 부르고, 필리핀에 사는 무슬림 소수 민족도 모로스 또는 모리스코스라고 한다. 7세기 이후 북아프리카의 아랍 이슬람화가 진행하고, 8세기에 아랍ㆍ베르베르 혼성의 이슬람군이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하자, 원주민인 스페인 사람은 이를 모로(moro, 무어인)라고 하였다. 모로는 스페인에서는 아랍, 베르베르를 구별하지 않고 이슬람교도 일반을 가리키는 호칭이 되었고, 또한 이슬람 교도의 이베리아반도 지배기에는 건축, 공예, 시문학 등의 여러 분야에서 아랍ㆍ이슬람 문화와 그리스도교ㆍ라틴문화의 교류융합이 생기고, 이를 <
무어 문화>, <무어 양식>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레콩키스타(국토회복전쟁) 후, 모로(무어)는 다시 북서아프리카의 이교도 주민을 가리키게 되는데, 신대륙을 경유해서 필리핀에 이른 스페인 사람은 다시 여기에서 이슬람교도의 원주민과 조우하게 되어, 이를 모로족이라고 불렀다. 기독교를 신봉한 중세 유럽인들은 이슬람을 믿는 아랍인을 지칭할 때 이교도 혹은 不信者와같은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간혹 특정한 명칭으로 불러야 할 때는 사막의 아들이란 의미의 “사라센Saracen”과 " 모리타니아Mauretania"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무어인 Moor"이라고 했다. 무어인은 아라비아인,베르베르인,아프리카 흑인의 혼혈로 구성되어있
다. 이들은 인종,언어적으로 니그로적 요소보다 아랍적 요소가 더 강하다.이들은 원래 사하라사막에 기반을 두고 유목생활을 하던 전사들이었는데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정복활동의 전위부대가 되었다. 즉 무어인은 인종학적 구분이 아니라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했던 아랍계 이슬람교도의 총칭인 것으로 중세유럽인들의 상대에 대한 두려움과 한편 의식적으로 무시하려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럽의 아랍에 대한 공포는 이들이 이베리아반도에 상륙한 이후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 깊숙이 진출하여 시실리를 비롯한 지중해지역과 프랑스 남부,이탈리아를 휩쓸고 다닐 때 절정에 달했다. 이들에 대한 유럽인들
의 공포가 끝난 것은 레판토해전 승리 이후였다. 이 승리가 있기 이전까지 늘 아랍이란 존재를 의식해야할 정도의 군사적,문화적,경제적 열세는 중세유럽이 아랍인의 존재를 왜곡하는 데 일조하였다. 예를들면 아더왕의 이야기에는 원탁의 13번째 자리에 앉으려다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라센기사의 얘기가 나온다. "롤랑의 노래”에서도 무어인을 묘사할 때 “잉크보다 더 검다”고 표현했다. 윌리엄 쉐익스피어는 아프리카와 동의어로 무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크리스토퍼
말로리는 아프리카인과 무어인을 혼용하고 있다. 아랍 연대기에서조차 무어인의 왕 유스프 벤 타크핀을 곱슬머리를 가진 갈색피부의 왕으로 묘사하는 지경이다. 그러나 이들이 그라나다에서 쫓겨날 때까지 중세유럽의 변방임에도 유럽문화의 자양분으로 존재하였다. 아랍의 전통에 따라 타종교에 대해 상당한 관용을 베풀어 그리스도교나 유대인들이 인두세를 내기만 하면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반면 나중의 스페인왕국이 무어인을 축출하고 종교재판소를 만들며 유대인들도 쫓아내 결국은 스스로의 재정 기반을 없애고 몰락한 것과는 대조되는 일이다.
Gonçalo Salgueiro - Gaiv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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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만약 갈매기 한 마리가 온다면
나에게 리스본의 하늘을 가져다 준다
꿈속에서 항해 하면서 볼 수 있는 드넓은 하늘에는
날지 못하는 한 마리의 갈매기가
낙담하고 바다에 떨어진다.
완벽한 심장이 내 가슴 속에 뛸텐데
당신의 손에 있는 나의 사랑
적합했던 손에서 나의 마음은 완벽하다.
7개 바다의 포루투칼 바다 사람들이
발명한 것을 나에게 말해
첫 번째로 아는 사람이라면
얽매여 있는 나의 시선에서
새로운 광채를 볼 수가 있다.
완벽한 심장이 내 가슴에 뛸 때
당신의 손 안에 있는 나의 사랑
그대의 손 안에서 비로소 나의 사랑은 완벽해진다.
만약 고단한 이 삶에 작별을 고한다면
하늘의 모든 새들도 좌절감으로 추락한다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보면서
그 시선은 바로 처음이었던 너의 사랑을 보는 것이다.
완벽한 심장이 내 가슴에서 죽을 텐데
당신의 손에 있는 나의 사랑
완벽했던 당신의 손 안에서
나의 심장은 비로소 뛸 수 있다.
당신의 손 안에 있는 나의 사랑
완벽했던 그 손 안에서
나의 심장은 뛴다.
에스파냐(España)라는 이름의 기원인 ‘Spãn’은 본래 페니키아 인이 처음 부른 듯한데 ‘토끼의 나라’ 혹은 ‘먼 나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중에 로마인들이 쳐들어와서 이 이름을 ‘히스파니아(Hispania)’라고 부르고 이것이 이어 ‘에스파냐’가 되었다. 이베리아(Iberia)라는 반도 이름은 에스파냐 동부를 흐르는 에브로 강에서 온 것이다. 사실 피레네 산맥(현재의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 지역) 남쪽은 유럽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이베리아 반도는 풍토만 보면 유럽보다는 차라리 아프리카와 비슷하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은 바 있고 이어 게르만 족이 침입한 이래 에스파냐는 서유럽과 공통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카톨릭, 즉 종교 문화다. 에스파냐 땅은 800년 가까이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지만 통일국가 형성은 이슬람에 대항해 이루어졌으며, 에스파냐 민중은 유럽인과의 동질성을 의식하고 있다. 기원 8세기 초에 북아프리카와 아랍의 이슬람교인들이 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해당하는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했다. 아랍 세계에서는 무슬림 지배하의 이베리아 반도를 알안달루스로 불렀다. 이렇게 이베리아 반도는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이슬람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다. 이때 이슬람은 북부를 제외한, 반도 전체의 2/3를 차지했다. 이슬람은 10세기에 전성기를 맞는데 수학, 과학, 건축, 장식 예술 등의 기술이 고도로 발달해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전한다. 이들 무어인들이 남긴 유명한 건축물로는 알함브라 궁전이 있다.
Javier Solis - Granada (Agustín L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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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어빙벌린' 이라고도 불리고 있는 대작곡가 어구스틴 라라의 작품이며 1932년에 만들어졌다. 이 곡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옛 도시 그라나다의 풍물과 춤추는 아가씨의 모습 등을 그리고 있다. "아름다운 하늘이 부르는 그라나다. 그녀의 멋진 추억이 담긴 그라나다. 빛나는 햇빛과 꽃, 그리고 노래가 넘치는 나라. 밤이 되면 별은 반짝이고, 많은 기타가 부드럽게 하바네라를 연주하네. 그라나다, 다시 한번 살고 싶어라. 오래된 영광과 로맨틱한 기쁨의 나라..." - 어거스틴 라라 作 '그라나다'
가사
그라나다! 꿈에 그리뎐 땅이여.
그대를 위해 불려질 때
나의 노래는 집시의 노래가 된다네.
나의 노래는 넘쳐나는 환상.
나의 노래는 그대에게 바칠 우수의 꽃.
그라나다! 해질녘이면 투우의 피로
붉게 물드는 땅이여.
반항적인 꿈이 어린 무어인의 매력적인 눈을 간직한 여인이여.
온통 꽃으로 뒤덥힌 집시 소녀여.
그라나다! 주옥같은 가락으로 노래하는 손길이여.
한 다발의 장미꽃밖엔 그대에게 줄 것이 없네.
가무잡잡한 성모마리아께 어울릴
그런 은은한 향기의 장미꽃밖엔 줄 것이 없다네.
내게 사랑을 속삭이는
사과처럼 달콤한 그대의 연지색 입술에 입맞추네
그라나다!
그대의 대지는 피와 태양과 어여쁜 여인들로 가득하다네
그라나다 주옥같은 가락으로 노래하는 손길이여
한 다발의 장미꽃밖엔 그대에게 줄 것이 없네
가무잡잡한 성모마리아께 어울릴
그런 은은한 향기의 장미꽃밖엔 줄 것이 없다네
그라나다 그대의 대지는 피와 태양의
어여쁜 여인들로 가득하네
가톨릭 군대는 오랜 기간에 걸친 영토 탈환을 시작하여 마침내 1492년에 그라나다 왕국에 있는 마지막 무어인 영토를 점령했다. 1492년 마지막 이슬람 타이파 국가였던 그라나다 왕국이 함락되기까지 약 750년간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진행된 기독교 국가의 영토 확장을 레콩키스타라고 한다. 146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하면서 여러 개의 기독교 왕국들을 통합하고 마지막 이슬람 왕국을 몰아내 국토 회복 운동을 완성한다. 그리고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해 대항해 시대를 연다. 스페인의 역사에서 1492년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라나다 왕국이 함락되어 레콘키스타가 끝난 해
이면서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연합하여 스페인 왕국이 세워진 해이기도 하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로 첫 항해를 한 해이기도 하다. 슬픔은 떨리는 숲처럼 우수수 몰려와선 개별적 잎으로 흩어진다. 모든 것들이 완벽과 균형을 향해 나아간다. 인간의 세상에서는 구현될 수 없는 영원한 신념과 믿음을 집요하고 치열하게 한 땀 한 땀 새겨 지상에 구현할 수 없는 천상의 궁전을 만든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순결한 눈이 녹아 궁전의 심장을 채운다. 그 차갑고 투명한 피로 풀이 돋고 나무가 자라며 꽃이 핀다. 절정의 순간 태양은 숨 막힐 듯 고요하며 뜨거웠다. 스페인에서 무어인의 마지막왕 무함마드 12세의 알함브라의 항복에 얽힌 이
야기에 의하면, 항복의 조건으로 알함브라 궁전을 떠나기 위해 무함마드 12세는 말안장에 올랐다. 왕의 뒤를 따르는 나스리아 왕국의 신하들과 왕비 후궁들의 눈에서는 비통에 가득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이 순간 왕보다 슬픈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픔을 차마 겉으로 내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패배자에게 베풀어 줄 자비 따위는 세상에 없다는 것을 왕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성문을 나서는 마지막 말발굽이 떨
어지기 전 결국 왕의 눈에서도 핏물처럼 진한 눈물이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왕과 백성들은 붉은 석양이 비치는 저 남쪽 언덕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 끝 알헤시라스로 향했다. 무함마드 12세의 일행이 언덕에 서자 태양은 알람브라 서쪽으로 기울고 성은 그 어느 때 보다 붉게 물들었다. 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왕국을 잃은 것보다 슬픈 것은 이 아름다운 궁전을 다시 못 보는 것이다.” 왕이 내뱉은 마지막 이 탄식이 바로 그 유명한 ‘무어인의 마지막 한숨 el ultimo suspiro del Moro’이다.
Ana Vidovic plays Recuerdos de la Alhambra by Francisco Tárrega on a Jim Redgate classical gui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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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 Vidovic - Recuerdos de la Alhambra (Francisco Tarrega)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스페인의 기타연주자 및 작곡가인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클래식 기타 연주곡으로 1896년 타레가는 그의 제자이자, 유부녀인 콘차 부인을 짝사랑하여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으나, 그녀는 타레가의 사랑을 거부하였다. 실의에 빠진 타레가는 스페인을 여행하다가 그라나다에 위치한 알함브라 궁전을 접하게 되고, 이 궁전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이 곡을 쓰게 되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스페인 낭만주의 음악의 꽃이라고 평가받으며, 타레가가 발전시킨 독특한 트레몰로 주법이 자아내는 신비로움과 서정적인 선율의 애절함이 일품이라고 볼 수 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에스파냐는 남아메리
카 대부분과 북아메리카의 1/3, 필리핀 등을 지배하며 엄청난 양의 황금과 은, 보석을 들여온다. 이때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충돌하고 독일과 프랑스의 신교에 맞서 가톨릭을 수호하는 종교 전쟁을 치르며 해군 부대가 무적함대로 불리게 된다. 1492년에 페르디난도 왕과 이사벨라 여왕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가톨릭교로 개종하지 않은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는 종교 재판을 시작하였다. 1500년대에는 개종한 이슬람교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박해를 받고 강제 이주를 당했다. 1609년에서 1614년 사이에 모리스코들 즉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된 이슬람교인들의 후손들은 추방되었다. 추산에 따르면, 약 30만 명의 모리스코들이 심
한 고난을 당하며 강제로 스페인을 떠나야 했다. 강제 이주에 저항한 사람들 가운데 최소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스페인의 통치자들은 “모리스코들이 선한 그리스도인도 충성스러운 국민도 아닌 자들”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리스코들은 바르바리 해적이나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교인이나 튀르크인과 같은 스페인의 적들과 내통하여 그들이 침략하도록 돕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모리스코들이 결국 배신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편견에 영향을 받아, 1609년에 펠리페 3세는 그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후로 여러 해 동안 모리스코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 비열한 방법으로 스페인은 온전한 가톨릭 국가가 되었습니다.
Amigo Aprendiz - Rodrigo Costa Felix.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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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drigo Costa Félix - Amigo Aprendiz
발렌시아의 대주교인 후안 데 리베라는 모리스코들의 추방을 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모리스코들이 노동력을 잃게 되면서 스페인은 필시 경제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떠나자 스페인은 희열을 느꼈습니다. 역사 서적에 따르면, 상당수의 스페인 사람들은 종교가 의심스러운 모리스코들의 존재 자체를 “오랫동안 눈엣가시이자 국가적인 수치”로 여겼다고 합니다. 드디어 그 눈엣가시가 제거된 것입니다. 지도자들과 일반 대중과 교회는 스페인 전역에서 마침내 “순수한” 가톨릭교가 회복된 것에 기뻐했습니다. 17세기 중반부터 스페인의 경제 사정은 잦은 전쟁으로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으로 스페인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여전히 유럽 국가 가운데 러시아를 제외하고 가장 넓은 영토를 갖고 있는 강력한 국가였다. 18세기에 들어 부르봉 왕가가 새로운 왕조를 열었고, 지방 행정 구역을 정비하는 등 개혁을 실행하였다. 18세기 후반, 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신생 미국의 편에 서서 영국을 견제하였으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 뒤이어 일어난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 군대에 대패하고 만다. 19세기 스페인은 멕시코 독립 전쟁을 기점으로 식민지들이 하나
둘 독립하기 시작하였고, 스페인-미국 전쟁에서도 패하여 쿠바와 필리핀을 미국에 할양하여야 하였다. 국내에서도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19세기 말 스페인 제1공화국이 세워져 왕정이 폐지되었으나 곧바로 군부쿠데타와 왕정복고가 연달아 일어나 심각한 내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 인민 전선의 승리로 수립된 스페인 제2공화국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서 패하였고, 1939년 프랑코 정권이 수립되어 이후 프랑코가 사망한 1975년까지 36년간 군부 독재가 지속되었다.
António Zambujo - Pica do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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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ónio Zambujo - Pica do 7
António Zambujo (born September 1975, Beringel, Beja, Portugal) is a Portuguese singer and songwriter. One of the characteristic qualities of his music is the presence of Cante Alentejano, a regional genre that influenced him while growing up in Beja. Since 2004, António Zambujo has been performing worldwide. He has won the Amália Rodrigues Foundation prize as best male fado singer.(안토니우 삼부주(, 1975년 9월 ~ )는 포르투갈의 가수이다. 그의 음악의 특징 중 하나는 베자에서 자라면서 그에게 영향을 준 지역 장르인 칸테 알렌테자노의 존재이다. 2004년부터 안토니우 잠부호는 전 세계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그는 최고의 남성 파도 가수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재단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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