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입문 다음 시간 자료입니다.
제10강
(1958. 6. 26.)
사회 전체에 대한 지는 개별 경험에 앞선다·166 | 전체에 대한 선 경험은 인간의 특권이 아니다·168 | 헤겔의 부활된 직접적 직관에 대한 포기·169 | 한 과정의 결과인 부분들과 전체의 일치·170 | 직관·171 | 이론은 기성품이 아니다·174 | 변증법이 독단적으로 경직될 위험(루카치)·175 | 인식을 근원들로 되돌려놓는 것은 비변증법적이다·177 | 개별 과학들 속의 낡은 철학적 관념들의 잔존에 대해·179
나는 전체라^는 것이 실제로 뒤늦게 존재하는 것인가, 사실상 우리의 경험이 부분들에서 시작하고 그 다음 서서히 전체로 올라가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136) 우리가 부분들을 지각하고 그 다음 이 부분들을 유사성과 상이성들에 따라 배열하고 다음에 분류하고 또 이런 식으로 보편적인 개념과 마침내 보편적인 이론으로 상승한다는 통상적 과학논리학의 주장이 사실은 우리 인식의 실상과, 그러니까 아주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실제로 인식하는 바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일종의 구성인 듯해 보입니다.(입문166-167)
물론 과학은 우리의 살아 있는 경험이 타당한 한 다름 아닌 과학적 명제들로 변형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변형이야말로 지극히 문제적이며 결코 진지하게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137) ^한편으로 −내 생각에 이 점을 게슈탈트이론에 맞서 비판적으로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전체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개별 계기들에 비해 하나의 추상산물인 것과 전적으로 똑같이 개별자도 그 나름으로 우리 경험의 총체에 비할 때 하나의 추상 산물입니다. 양자 사이의 직접적인 통일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름 아니라 한 과정의 관계가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과학의 질서는 그것이 분류법적으로 산출해낸 위계, 즉 개별관찰들에서 보편적 개념에 도달하는 위계가 실제로 현실 자체의 특성과 동일하다고 우리에게 설득하려는 한에서 사태를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그것은 본래 스피노자(Spinoza)의 명제에서 최초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관념의 질서는 사물의 질서와 같은 것입니다(ordo idearum idem est ordo rerum). 이 명제는 나에게 독단적으로 관념론적인 듯해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마 데카르트 및 과학적 방법의 근원적 유형인 데카르트의 방법에 대해 변증법의 관점에서 가하게 될 비판과 연관하여 다시 다루게 될 것입니다.(입문167-168)
나는 이른바 개별 자료들에 대해 알기보다 오히려 내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압니다.(…)^(138) 아주 어린 유아도 결코 아버지의 구체적 위협이라는 경험에서 이제 좀 더 보편적인 위협들로 상승하는 어린 학자처럼 반응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우선 아이는 일단 위협 일반과 같은 어떤 것, 즉 불안을 경험하고 그 다음에 이른바 특수한 상황의 [특정한] 구체화, 즉 그것이 화난 아버지 때문이라는 것이 점차 비로소 그런 상태에 연관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단 이 발생적 계기들을 논외로 하고 완전히 발전한 사회 내부의 상황과 관계할 경우, 실제로 직접적인 것, 즉 우리가 처음 지각하는 것은 우리가 빠져드는 특수한 상황이라기보다 오히려 일반적인 상황입니다.(입문168-169)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면, 그러니까 아주 섬세하게 이해해야 할 어떤 의미에서 과학의 조직과 반대로 우리가 실제로 특수한 것보다 앞서 오히려 전체를 의식한다면, 또 우리가 특수한 경험이라고 칭하는 것이 나름으로 이미 반성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변증법적 처리방식을 위한 하나의 정식화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139) ^(…) 변증법적 사유의 과제는 순진성을, 즉 우리가 아직 조직화된 사유를 통해 어리석어지지 않은 한에서 아직 가지고 있던 일종의 세계에 대한 견해를 부활시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변증법의 과제는 반성을 통해 정립된 구분과 대상화의 계기들을 반성을 관통하며 다시 지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입문169-170)
사유가 자체를 반성함으로써, 도막내고 잘라내고 단순히 지배적으로 정리하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의식함으로써, 본래 사유 스스로가 초래한 책임을 제거하거나 제거의 준비를 도우려 시도하는 듯하다는 것은 확실히 변증법의 모티프들 가운데 상당히 본질적인 것입니다.(140)(입문170)
변증법적 사유에 대해 이론이 지니는 특유한 의미는 바로 다음과 같은 데에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즉 이론은 실제로 어떤 선행적인 것으로서 언제나 이미 현존하는 전체에 대한 의식과, 또 나름으로 다시 전체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그 다음의 특수한 개별 소여상태들 속에 침투하여 그것들이 서로 일종의 일치상태에 도달하도록 하려는 시도입니다. (…) 변증법은 언제나 그것이 관여하는 자료들을 이론에 비추어 평가해야 하며, 따라서 단순하게 그것이 스스로 나타나는 그대로 순진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이론을 통해 매개된 전체에 비추어 투명해지도록 만들려고 시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변증법은 그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실제로 접근해 가는 특수한 경험들을 상대로 이론을 열린 상태로 유지해야 하고, 이제 이 경험들에 맞서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확고한 것, 어떤 종결적인 것을 형성해서는 안 됩니다.(입문171) (141)
나는 여러분에게 특히 리햐르트 크로너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변증법의 본질이라고 간주한 바를 추종하는 것, 그러니까 나에게 어떤 보증된 것, 주어진 것으로서 결코 현존하지 않는 어떤 포괄적 전체라는 이 계기의 수용을 이제 직관이라는 불행한 개념과 동일시하는 것을 경계하고 싶습니다. 이 직관 개념은, 아무튼 그것이 어떤 정당성을 얻는 한에서, 어떤 배타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인식과정 속의 한 계기로서만 정당성을 얻을 뿐입니다.(입문172) (142)
베르그송이 직관을 일종의 특수한 고유의(sui gegeris) 인식원천으로, 어떤 특수 분야로서 다른 인식방식들과 대립시킨 것은 전적으로 그릇된 것입니다. 또한 나는 사실상 이 점이야말로 그가 셸링 및 헤겔과 공유하는 단순한 반성적 사유에 대한 비판에서 그가 범한 주요 오류라고 하겠습니다. 범주들이나 질서개념들로의 구분, 작은 상자 속의 사유, 단순히 분류법적이고 완결되고 기계적인 개념들을 통한 사유 등을 지칠 줄 모르고 비판한 바로 그 베르그송이 자신이 올바르다고 간주한 인식의 종류를 그 나름으로 작은 상자 속에 집어넣고 마치 그것이 인식과정의 총체와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어떤 것인 듯이 다루었다는 것은 기이한 역설입니다. 내 생각에 직관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근본적으로 그릇된 것입니다. 우리가 정당하게 직관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은, 그 개념이 예컨대 그것을 각별히 애용하는 오페레타 작곡가들의 은어에서 의미하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하려면, 조직화되지 않은 −일단 잠시 심리학적으로 표현해도 좋다면− 전의식적 경험에 근거하는 일종의 인식입니다.(143)말하자면 이러한 경험에 반성의 시선이 닿게 되면 어떤 특정한 순간에 의식의 표면으로 나오며, 또 이처럼 등장하는 순간 갑작스럽고 뜻밖이며 산만한 성격을 띠는 것이라 하겠습니다.(입문173)
하지만 이 경우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아마 직관이라 지칭되는 혹은 비^난받는 개념들에 그 산만하고 구속력 없는 성격이 어울린다고 말할 텐데, 그러한 성격은 이 통찰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언제나 −이 점을 베르그송도 비록 그렇게 명확히 표현한 적은 없지만 의문의 여지없이 본래 의도한 바입니다− 본래 생생한 경험 혹은 생생한 인식이 우리에게 미리 주어진 인습적이고 사물화된 개념들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순간들, 그러니까 우리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순간들, 우리의 사유가 그때그때 이미 존재한 대상에 대한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된 통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다루는 사태에 도달하는 순간들을 나타냅니다. 이 경우 우리의 사유는 일종의 충돌 내지 일종의 폭발에 도달하며, 사람들이 우리에게 늘 말해주는 이른바 직관적인 것의 갑작스럽고 번쩍하는 성격은 실제로 이러한 갈등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식 과정 자체 혹은 직관의 기원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결코 그처럼 갑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뒤에는 우리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그리고 우리가 통제되지 않은 채 사유하고 우리 의식의 자유와 같은 것을 아무튼 유지하고 우리의 사유를 종속시키게 될 규범들에 의해 우리의 사유가 아직 정돈되지는 않은 방식으로만 생생하게 이루어지는 경험들의 완전한 짜임(Geflecht)이 있는 것입니다.(144)(입문173-174)
직관을 갑작스러운 것으로 나타내주는 것은 실제로 다름 아니라 경직되고 대상화된 개념들이 살아 있는 지식으로 전도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전도는 아직 미리 소화되지 않고 아직 조직되지 않은 우리 경험의 개념들이 반성될 경우에 때때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직관 자체는 다름 아니라 언제나 미리 생각한 개념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심리적 차원에 비춰볼 때 또한 일반적으로 명석 판명한 지각과 동일시되지만 결코 이와 단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닌, 배후에 위치한 개념의 운동 덕분에 객체가 운동-에-^들어서는 것의 일종입니다.(입문174-175)
하지만 나는 이론 역시 직관과 마찬가지로 내가 여러분에게 이 자리에서 방금 묘사하고자 시도한 이 변증법적 성격 덕분에 그 나름으로 또한 중단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이론 자체 속에서는 당연히 그때그때 인식 대상의 자체 모순적인 본질이 작동하며, 그래서 모든 이론은 열려 있다는 점, 그러니까 −우리의 출발 주제로 돌아가자면− 이론도 완결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개별자를 일반적으로 언제나 전체에 대한 지식도 갖고 그것을 이 전체에 대한 지식에 비춰 평가하는 한에서만 인식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전체 또한 어떤 완성된 것, 어떤 완전한 것으로서 나에게 주어지는 일은 결코 없으며, 내가 그것을 그처럼 완결된 것, 완전한 것으로 활용하는 순간, 즉 사람들이 말하듯이 그로부터 단순한 결론들을 이끌어내는 순간 그것은 실제로 언제나 이미 허위가 됩니다. 사실 원과 그 부분들에 대한 관념과 반대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것처럼 전체는 그 나름으로 변증법 이론의 의미에서 어떤 추상적 상위 개념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부분들의 운동으로부터 추론됩니다.(145)(입문175)
변증법을 일반원리 속에 받아들였다고들 주장하는 곳, 즉 동구권에서, 바로 이 계기가 실제로 완전히 묵살된다는 점, 즉 여기서는 실제로 변증법이 많든 적든 간에 확고한 −대개는 더 확고한− 일종의 체계로 혹은 테제들의 나열로 경직되며, 이로부터 간단히 개별자가 추론되고 무엇보다 그로부터 개별자가 그때그때 판정받는다는 점이야말로, 내게는 사실상 변증법 이론이 무너지고 있는 결정적 징후라고 여겨집니다.(입문175)
그래서 예컨대 본래 젊은 시절에는 논란의 여지없이 유물론 형태의 변증법에서 변증법 개념 일반을 다시 일깨운 공로가 있는 게오르크 루카치의 후기 저술 전체 곳곳에서는, 순전히 독단적인 변증법으로 인해 사실상 전혀 변^증법에 도달할 수 없으며, 변증법에서 차용한 고정된 개념들로 온갖 가능한 가치판단들이 날조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여러분에게 한 가지 구조만 말하자면, 루카치는 상승하는 시민계급과 몰락하는 시민계급의 이론을 만들었는데, 그의 경우 예술에 대한 관계가 문제인 한 이른바 상승하는 시민계급의 작품들은 훌륭하고 높은 질을 지닌다고 합니다. 몰락하는 시민계급의 작품들이 문제인 한에서 −그리고 이는 루카치의 사유에서 이미 아주 일찍부터, 그러니까 플로베르와 인상주의에서 시작됩니다− 모두가 꼭 어느 통일사회당 당비서가 상상하듯이 형편없고 비난받을 만한 것입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언젠가 그토록 힘주어 강조했던 범주, 즉 사회의 총체성 범주를 완전히 잊어버립니다. 이 경우 그는 사회가 자체 내에서 계속해서 움직인다는 점을 망각합니다. 또 특히 그가 언젠가 두드러지게 강조한 사실, 즉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시민계급과 반대로 문화적 특권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점 때문에, 또 일련의 다른 문제들 때문에 이제 결코 정신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계급은 아니며, 그래서 정신적으로 아무튼 실체적인 것은 시민적 발전의 영역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을 잊고 있습니다.(입문175-176)
변증법적 방식은 자연과학들에서 고전적인 모델로서 우리가 대면하게 되고 실제로 다루어지는 전통 과학에서 되풀이하여 접하게 되는 단계적 사유(Schritt-für-Schritt- Denken)가 아닙니다. 이 점은 여러분 가운데 일반적인 과학이론 및 논리학의 교육을 받아 온 사람들에게 확실히 어려움들을 제기하게 될, 변증법적 사유에 대한 또 하나의 요구라고 믿습니다.(147)그러니까 아주 괴기해 보이기는 합니다만 변증법적 사유 속에서는 계기들이 전통적 사유 방식에서보다 훨씬 더 긴밀하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데도, 변증법적 사유에는 본래적인 체계화가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비과학적이라는 비난이 되풀이하여 제기되는 것입니다. 그 밑바탕에는 변증법 이론에 절대적 제일원리가 없다는 사실이 깔려 있습니다. 오히려 헤겔의 이론은 어떤 절대적 최종요인(ein absolut Letztes)을 인정하며, 이로부터 모든 것이, 즉 실현된 총체성, 실현된 체계가 나온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이는 물론 한 가지 비판적 모티프입니다. 하지만 아무튼 변증법에는 모든 것이 거기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하는 어떤 제일원리가 없습니다. 이로써 변증법에는 어떤 환원의 파토스도 결여되어 있습니다.(입문177)
헤겔은 근원이 진리가 아니라는 점, 오히려 근원은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거짓으로 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거짓인 이유는 그것이 결코 근원이 아니며, 오히려 절대적 제일원리임을 주장하는 모든 것은 이미 자체 내에서 매개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다름 아니라 우리가 철학적인 형태로 알게 되었건 그렇지 않았건 상관없이, 여러분 모두와 나 또한 원래부터 엄마젖과 함께 받아들인 견해, 즉 명석 판명한 지각에 대한 데카르트의 학설, 즉 절대적으로 명석하고 자체로서 판명하고 다른 것들과 구분되는 개별 인식들이 우리 인식의 기반이며, 또 그러한 계기들에 환원될 수 있는 것만이 본래 인식이라는 견해가 도전을 받은 것입니다.(148)(입문178)
이 명석 판명한 지각에 맞서서는 일단 그처럼 궁극적인 것,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 모든 매개로부터 정제된 것은 그것이 순수한 의식이건 순수한 감성적 자료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정신현상학의 실제 내용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자리에서 정신현상학의 이 기본사상을 변증법에^ 대한 이 전체적 서술에 끌어들이겠습니다. 그러니까 사유가 지금 여기에 절대적 고정점이 있다고 믿는 곳에서 다시 이 절대적 고정점이 용해되며, 이때 마침내 그처럼 절대적으로 확고한 것, 자체 내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 자체가 실은 인식의 망상임이 입증된다는 점에서 그러한 본래의 기본모티프들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 정신현상학의 전체 사고과정을 약술해줄 시간이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변증법에서 배우는 바에 따르면 진리는 결코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헤겔이 말하듯이 기성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는 그 자체로 과정 속에 존재하며, 우리가 대면하는 대상은 그 자체가 자체 내에서 운동하게 된 것입니다.(149)(입문178-179)
하지만 자체 내에서 운동하게 된 것으로서 대상은 분명한 것이 아닙니다.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상은 분명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에게는 −그리고 이 자리에서 데카르트적 계기는 존중할만합니다− 대상의 분명함, 대상의 확정상태가 필요하며, 특수한 것, 정확히 윤곽을 드러내며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통찰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는 이 확고하고 확정적인 대상을 그 확정상태로 완전히 가까이서 주시함으로써 그 대상이 그처럼 확고하고 확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부딪칩니다]. 그것은 개별자에 침잠하는 미시론적 시선과 같은 것인데, 그러한 시선 아래서 경직된 것, 외관상 분명한 것, 외관상 확정적인 것이 운동하기 시작하며, 이로써 물론 동시에 데카르트의 그러한 명제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입문179)
여러분은 그 명제가 사실상 독단적 합리주의의 명제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사유하면서 실질적인 과학들의 영역에서 작업할 경우, 역사적인 철학에서 언젠가 그 위상을 지녔던 수많은 관념들이 철학을 통해 이미 오랜 전에 처리되었거나 아니면 아무튼 제 자리로 돌려보내지게 되었는데, 명목상 우리 철학자들보다 훨씬 진지하고 엄격하게 사태를 받아들인다는 개별 과학 활동에서는 이처럼 철학을 통해 해^결된 개념들이 아직도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겪는 아주 기이한 경험입니다. 이에는 예컨대 명석 판명한 지각이라는 관념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실제로 이 관념을 합리적 과학만 아니라 실증주의적 과학들의 요구들 가운데에서 아주 느슨하게 은폐된 상태로 되풀이하여 만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우선 내가 타당한 인식을 얻으려면 어떤 대상이 절대적으로 명확하고 확고하며 다른 것들과 구분되어 존재해야 한다는 요구 속에는,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러한 견해의 독단적 계기입니다− 실제로 세계가 이처럼 확고하고 확정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150) 즉 인식의 대상들 자체가 일단 자체 내적으로 정태적이고 자체 내적으로 견고하게 윤곽을 지니며 자체 내적으로 명확할 경우에만, 그것들이 그 자체의 진리를 해치지 않으면서 전체로부터 분리되고 개별 대상들로서 다루어질 수 있을 만큼 다른 대상들과 고립되어 있을 경우에만, 그러한 명석 판명한 지각에 아무튼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내가 체계적으로 철저히 조직된 어떤 과학을 구성할 수 있도록, 과학을 위해, 근본적으로는 수학적 이상을 위해, 내 인식의 대상들이 이미 그러한 범주들 아래 나에게 적합하게 주어진다고 실제로 전제됩니다.(입문179-180)
그런데 이는 독단적 주장이며, 이와 관련해 우리는 세계가 실제로 그렇게 조직되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식비판, 다름 아닌 헤겔의 인식 비판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대상들을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기 위한 전제조건임에 틀림없는 대상들의 바로 그러한 특성이 결코 이런 식으로 존재하지는 않고, 대상들은 일단 자체 내적으로 역동적이며 모순에 차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바로 이 모순적 본질 덕분에 자체 내적으로 다른 모든 대상들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을 증명했습니다.(151)(입문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