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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6일차 코스
아시시
( Assisi )
성 프란치스코
( Franciscus )
1. 개요
성 프란치스코가 성당의 정문 앞에서 바치던 기도 |
그리스도님, 저는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당신의 모든 성당에서 당신을 경배하며, 흠숭하나이다. |
마하트마 간디 |
백년마다 한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 |
성 프란치스코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 |
내 형제 죽음이여, 어서 오라.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13세기 이탈리아의 기독교 수도자로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창설한 인물이다. 정확히는 수도원장쯤 되겠지만 스스로 그러한 명칭을 바라지 않았으며, 사제가 아닌 부제 신분이었다.
기독교에서 일반적으로 그의 신앙과 영성에 대한 존경심은 교파의 구분을 떠나 있다. 그는 가톨릭, 성공회, 루터회, 독일 개신교의 성인이며 동시에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공동 수호성인이다.
축일은 10월 4일이며 독일 개신교회의 경우 그가 선종한 10월 3일로 지키고 있다. 별칭은 하느님의 음유시인, 가난한 이들의 친구. 상징물 은비둘기, 오상(五傷), 프란치스코회 수도복, 십자가, 해골. 위 그림처럼 동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동물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한데, 다른 업적들로도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 부분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자연 친화주의적 사상은 기독교와 생태주의의 연관성, 공존 가능성을 입증하는 사례로 손꼽힌다. 동물들, 특히 새 떼나 사슴 등과 함께 있는 성인이라면 100% 성 프란치스코. 권위주의적이고 권력 지향적이었던 중세기 교황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성 프란치스코와 비교 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점에서 현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름이 나왔을 때 더욱 화제가 되었다.
라틴어 'Franciscus' 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프랑크족 사람, 또는 프랑스인이라는 의미이다. '프란치스코'는 라틴어에서 온 한국 가톨릭의 표기이다.
대한민국에서 표기법이 중구난방이었을 시기에는 프란치스꼬, 혹은 방제각(方濟各)의 중국식 발음인 방지거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나이 드신 분들의 세례명으로도 접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시인 정지용이 있다.
2. 생애
성 프란치스코의 탈혼, 호세 데 리베라, 1639년, 캔버스에 유채 |
성 프란치스코, 카를로 모날디, 1727년, 대리석, 성 베드로 대성당 |
(1) 회심하기까지
속명은 '조반니 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Giovanni di Pietro di Bernardone)'. 부유한 포목상인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의 아들로, 이탈리아 중부 스폴레토 공국(Ducato di Spoleto) 움브리아주의 도시인 아시시(Assisi)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프랑스로 출장을 갔을 때 어머니 비카는 조반니란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게 했는데, 아버지가 프랑스에 매료되어 돌아온 뒤, 프랑스인이라는 의미의 '프란치스코(Franciscus, 이탈리아어로 Francesco.)'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워낙 집이 부유하여 향락을 추구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흥청망청 노는 것을 좋아했던 10대 때의 프란치스코는, 기사를 꿈꾸며 전쟁에 참가했다 포로로 잡힌다. 그렇게 1년간 감옥에 갇혔고 풀려나온 뒤로는 큰 병을 앓는다. 오랫동안 침대 신세를 지다 회복한 프란치스코는 이때부터 점점 친구들과 노는 것을 멀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이상한 환상을 보기 시작하였고, 이런 목소리를 듣게 된다. "아버지의 가게 안에 수많은 전쟁 장비들이 있고, 한 여인이 그곳에서 약혼자를 기다리고 있다. 장비들은 너의 병사들을 위한 것이고, 약혼녀는 너에게 예정되어 있다."
다시금 기사가 되길 원하던 그는 1205년, 계속되는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풀리아로 가던 중 스폴레토라는 곳에서 또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주인과 종 가운데 누구를 택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주인입니다"라고 대답했고, 다시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거기에서 네가 할 일을 가르쳐 주겠다"는 소리를 듣고 아시시로 돌아간다. 그때는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이 그의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져 있었으며, 그때부터 아시시의 동굴을 찾아가 묵상에 전념하곤 했다. 그러던 중 근방의 나환자촌에서 비참한 모습의 나환자를 본 프란치스코는, 피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즉각 그 나환자를 안아주고 도와주기도 했다.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성당을 발견하여 그 안에 들어갔다. 거기서 기도하던 도중 "프란치스코야, 무너져가는 나의 교회를 고쳐라." 는 음성을 들은 그는, 무너져가는 교회가 이 무너져가는 다미아노 성당인 줄 착각하고 그 길로 자기가 가진 돈과 아버지의 가게 물건을 일부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 하였다. 다미아노 성당을 지키고 있던 늙은 신부는 그 돈을 거절했으나, 프란치스코가 끈질기게 요청하자 결국 성당수리를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위해 아버지의 가게까지 탈탈 털어 비용을 충당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틈만 나면 성당을 지을 벽돌을 구걸하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에 아버지는 격분했다. 아버지는 협박도 하고 얼러도 보고 아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했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결국 아들의 상속권까지 빼앗으려 시의 승정원에 재판을 의뢰하는데,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돈주머니와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군중 앞에 당당하게 고백한다.
모든 사람은 내 말을 들으십시오. 지금까지 나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나의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그에게서 받은 돈과 의복들을 돌려줍니다. 이제 나는 하늘에 계신 유일한 아버지 한 분만을 섬길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광경을 지켜본 모두가 프란치스코를 미친 자로 보았지만, 하나둘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청년들이 프란치스코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아시시의 주교는 알몸이 된 프란치스코에게 농부의 망토를 걸쳐주고 십자가를 걸어주었다. 그는 다시 나환자들을 돕다 다미아노 성당으로 돌아온다.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축일, 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던 프란치스코는 마태오 복음서10장의 말씀을 듣다 "거룩한 복음의 양식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성소(聖召)를 발견하고 그 복음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소유하지 않고, 여행길엔 몸에 걸친 옷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며, 하느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해야 한다는 신조였다.
(2) 수도자로 사는 생활
이렇게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야산을 전전하던 프란치스코는 동료 11명과 함께 '작은 형제들'(프란치스칸 1회)을 조직한다. 작은 수도회칙까지 정한 이 조직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인가를 요청했고 마찰 끝에 인준을 받았다. 이때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란치스코가 다미아노 성당을 재건할 때 꾸었던 꿈과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즉 한 수도자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대성당 건물을 그의 어깨로 떠받치면서 무너지는 것을 겨우 막고 있었다. 이 조직으로 시작된 프란치스코회는 아시시의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내에 있는 허름한 포르치운쿨라('작은 몫'이라는 뜻) 성당에 본부를 두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 손길이 이슬람 세력에까지 미칠 무렵, 18세에 혼인을 앞둔 백작의 딸 글라라가 몰래 찾아와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할 뜻을 밝히고 수도복을 입는다. 하지만 프란치스코회는 남자수도회였기 때문에 일단 근방의 베네딕토 수녀원에 피신시킨 후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러자 부모가 글라라를 데려가려 찾아오기도 하고, 15세가 된 여동생 아네스까지 언니에게 와 수도복을 입었다. 프란치스코는 그녀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따로 꾸리기로 하는데, 그것이 바로 '가난한 부인회'이며 지금의 글라라회(프란치스칸 2회)이다. 그 뒤에도 프란치스코는 선교활동을 하러 모로코 등지로 가려 했지만, 스페인을 떠나지도 못하고 병이 들어 되돌아왔다. 그 뒤 무일푼으로 밀항을 하는 등 3번인가 재시도한 끝에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까지 도달했는데, 마침 기독교인과 무슬림간의 격한 충돌이 있었던 시기였다.
순교를 하느님을 향한 제일의 덕이라 여기던 프란치스코는 일루미나토 수사와 더불어 당당히 붙잡혀, 각종 폭력과 모욕을 당하며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술탄 알 카밀 앞에서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밝혔고, 술탄은 그 용기가 가상해 일단 그의 말을 경청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기꺼이 순교하여 기독교가 이슬람보다 거룩한 신앙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말했고, 술탄은 정말 그것이 실현된다면 제사장들이나 백성들 사이에서 올 혼란이 염려되어 거절했다. 대신 프란치스코의 태도에 대한 존경심이 든 술탄은 그저 조용히 물러나 달라는 뜻에서 값나가는 선물들을 보냈는데, 프란치스코는 그 선물에서 신앙의 정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물리고 나왔다.
자신이 선교활동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거두어들였던 형제들을 튀니지, 그리스, 프랑스, 모로코 등으로 파견하기 시작했다. 특히 모로코에 파견된 5명의 작은형제회 수사들은 프란치스코회의 첫번째 순교자(franciscan protomartyrs)로 유명하다. 원래는 비탈레 수사가 이끄는 6명이 파견되었는데, 비탈레 수사가 아라곤에서 병이 나서 가지 못하게 되자 성 베라르도 신부가 나머지 4명, 즉 성 피에트로, 성 아주토, 성 아쿠르시오, 성 오토네를 이끌고 세비야로 가 모스크 근처에서 설교하다 잡혀 모로코로 끌려갔다. 아부 야곱이란 이름을 지닌 모로코의 왕 '미라몰린'은 기독교에 유화적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석방시켜 그 지역의 기독교인인 '돔 페드로'의 집에서 살게 했다. 리더인 베라르도 신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아랍어를 배워 근처에서 설교했다.
지나가다 이를 본 미라몰린은 돔 페드로를 시켜 5명을 아시시로 다시 돌려보내려 했는데, 귀향하던 5명은 다시 모로코의 마라케시로 돌아가 설교하다 또 붙잡힌다. 미라몰린은 이번엔 체우타로 쫓아보냈지만 다시 마라케시로 돌아왔다. 돔 페드로는 베라르도 신부 일행에게 마라케시에 사는 기독교인들한테 폐를 끼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고지식한 수사들은 그런 거 모른다. 결국 이슬람의 안식일에까지 거리로 나와 설교하던 베라르도 신부 일행은 그날따라 운도 나쁘게 미라몰린의 매의 눈에 포착됐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미라몰린은 그들을 체포해 고문하고 심문한 뒤, 수사들의 맹랑한 대꾸에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시미터를 뽑아 들어 그들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때가 1220년 1월 16일이고, 이날이 성 베라르도를 비롯한 수사 5명의 축일이다. 이들의 시신을 돔 페드로가 포르투갈의 코임브라로 운구했다. 그들의 장례미사에 참례한 성 십자가 수도회의 수사 페르난도는 이때 자신도 작은형제회에 입회하여 순교자가 되기로 했다고 한다. 이 페르난도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다.
또한 이들의 순교 7년 후인 1227년에는 성 다니엘이 이끄는 7명의 수사, 즉 성 사무엘레, 성 안젤로, 성 레오, 성 돔노, 성 니콜로, 성 우골리노가 모로코의 체우타로 갔다가 온갖 굴욕을 당하고 순교한다. 이들의 축일은 10월 10일. 어쨌든 결국이슬람지역 선교활동은 2번이나 실패한 모로코 선교활동을 비롯하여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가 40세가 될 무렵, 작은형제회는 3천 명이 넘는 거대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그에 따라 일부에서 수도회의 규칙을 완화하려 하자 여러 학자의 도움을 받아 기존 회칙을 재정비했다. 약간 완화된 회칙이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으나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인가를 받아 쐐기를 박았다. 그는 수도회 장상직을 사임한 후, 다시 소수 동료들만 데리고 라베르나산으로 떠나 수도생활을 계속하였다.
(3) 말년
성 십자가 현양 주일이던 1224년 9월 14일 새벽, 프란치스코는 라베르나산에서 기도하던 중 십자가에 못 박힌 케루빔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다섯 상처를 자신의 손과 발, 옆구리에 똑같이 입었다.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성흔이며, 다른 성흔 체험자로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카푸친회 소속이었던 오상의 성 비오 신부 등이 있다. 하지만 성흔 현상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져 눈이 멀었고 심한 병까지 얻었다. 그는 이때 이탈리아어로 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포르치운쿨라에 온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 3일 토요일 해 질 무렵,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온 것을 알자 동료 수도자들에게 자신이 걸친 옷을 모두 벗겨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하였다. 그런 뒤 그들에게 요한 복음서의 수난기를 읽어달라고 청하고 나서 시편141편을 읊은 뒤 선종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죽음도 '자매'였다.
시편 141편
주님, 당신께 부르짖으니 어서 저에게 오소서. 제가 당신께 부르짖을 때 제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저의 기도 당신 면전의 분향으로 여기시고 저의 손 들어 올리니 저녁 제물로 여겨 주소서. 주님, 제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제 입술의 문을 지켜 주소서. 제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나쁜 짓 하는 사내들과 함께 불의한 행동을 하지 않게 하소서. 저들의 진미를 즐기지 않으오리다. 의인이 자애로 저를 때려도 저를 벌해도 좋습니다. 그것은 머릿기름, 제 머리가 마다하지 않으오리다. 저들의 악행을 거슬러 저는 늘 기도드립니다. 저들이 심판자들의 손에 떨어지면 제 말이 얼마나 좋은지 들어 알리이다. 누가 밭을 갈아 땅을 파헤쳤을 때처럼 저들의 뼈가 저승 어귀에 흩어지리이다. 정녕 주 하느님, 제 눈이 당신을 향합니다. 제가 당신께 피신합니다. 제 영혼을 쏟아 버리지 마소서.저들이 쳐 놓은 덫에서, 나쁜 짓 하는 자들의 올가미에서 저를 지키소서. 제가 탈 없이 지나가는 동안 악인들은 자기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게 하소서. |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다음 날 성 조르조 성당에 잠시 묻혔다가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된 후, 1230년 5월 25일 그를 기념하여 지은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또한 1939년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80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10월 3일 저녁 오후 해진 뒤에 성 프란치스코가 숨을 거두었는데, 당시의 전례적 기준에 따르면 일몰 뒤라 다음 날로 간주하였으므로 10월 4일을 프란치스코 축일로 정하였다. 지금도 프란치스코회에서는 10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 전이예식(transitus)라고 하여 성 프란치스코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행사를 한다. 전이예식이라는 이름은 성 프란치스코가 그날 지상에서 천국으로 전이(옮겨감)했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프란치스코회에서는 9월 17일을 성 프란치스코 수난상처 축일, 혹은 오상 축일이라고 부르며, 성 프란치스코가 라베르나산에서 성흔을 받았음을 기념한다.
3. 기도
가톨릭교회의 미사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축일에 바치는 본기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 가난하고 겸손한 성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도 그를 본받아 성자를 따르게 하시고,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주님과 하나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또한, 성 프란치스코는 살아생전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 표지를 보고든 이렇게 기도하라고 그의 형제들에게 권고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속하셨기에, 저희는 여기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흠숭하나이다. |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지향과 같다고 여겨지는 <평화의 기도> 역시 가톨릭교회에서 널리 쓰이며 그 내용과 문장의 아름다움으로 종교를 떠나 자주 사용된다.
주여, 나를 당신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얻게 하소서. 주여, 위로를 구하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을 구하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 자기를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잊음으로서 참으며,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죽음으로써 영생으로 부활하리니. |
성인은 이 세상 모든 피조물, 인간이든, 동물이든 심지어는 물이나 불까지도 형제요, 자매라고 불렀다. 하느님의 창조 아래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을 사랑했다는 뜻. 병의 치료를 위해 불에 달군 인두를 몸에 지져야 할 때가 있었는데, 성인이 인두를 달구는 불을 향해(…) "내 사랑하는 불 자매여, 내가 언제 그대를 함부로 대한 적이 있었습니까? 나의 사랑을 기억해서라도 나의 몸에 닿을 때 조금만 뜨겁지 않게 해주오"라고 말했더니 성인의 몸에 닿았을 때 살이 타고 연기가 나도 전혀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4. 유명한 일화
(1) 아시시 평원에서의 설교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치스코(조토 디 본도네作,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
프란시스코가 아시시 평원에서 새들에게 전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평원을 걸어가다가 새들이 떼지어 있는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서 설교하였다.
"나의 새 자매들이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만드신 분을 많이 찬미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옷을 입히시려고 깃을 주셨고, 날아다니도록 날개를 주셨으며, 여러분이 필요한 것은 모두 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창조물 중에서도 여러분을 특별히 귀하게 만드셨고, 맑은 대기 속에다 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여러분을 보살피십니다."
그러자 새들은 프란치스코의 말을 경청하며, 그들의 본성대로 목을 늘이거나 날개를 빼고 입을 벌려 기이한 몸짓으로 흥겨워하며 그를 응시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복 자락으로 새들을 스치며 새들의 한가운데를 오갔다. 그리고는 십자성호를 그어 새들을 축복하자, 새들은 기쁜 듯이 몸짓을 하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2) 아시시의 장미 가시덤불
아시시의 가시 없는 장미 |
이렇듯 믿음과 수도생활에 투철한 성인이었으나, 남자로서 느끼는 고유한 성욕을 떨치는 일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느끼는 음탕한 욕망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면서, 틈만 나면 장미가시 덤불 위에서 맨몸으로 데굴데굴 굴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 피어난 아시시의 장미들에서는 가시가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아시시의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마당에 피는 장미꽃들은 가시가 없다! 아시시를 벗어나 다른 곳에 심으면 장미가시가 생겨나고 다시 아시시로 옮겨와서 심으면 다시 가시가 없어진다고.
■ 성녀 글라라
이탈리아 아시시의 귀족 파바로네(Favarone)와 오르똘 라나(Ortolana)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빛’이라는 의미를 지닌 글라라의 이름은 어머니가 기도중에 온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 과연 그녀는 열심한 기도와 착한 행실로 주위를 밝게 비추며, 늘 하느님의 은밀한 부르심에 귀 기울였다.
□ 수도자의 길로
이러한 글라라가 자신의 소명을 확신하는데 성 프란치스코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마침내 1212년 3월 18일 성지주일에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보속의 수도복’으로 착복되고 순명을 서약하였다. 아직 형제회에 여자 수도원이 없어서 근방의 베네딕도 수녀원에 머물던 중,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글라라를 집으로 데려가려 하자, 그녀는 축성의 표시인 삭발한 머리를 보여주며 자신의 뜻을 단호히 밝혀 부모의 애원을 뿌리쳤다.
□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
얼마 후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 뒤를 따르자 친지들은 아녜스를 강제로라도 집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글라라의 간절한 기도로 12명의 무장한 장정들에게서 동생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첫 자매를 얻은 글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도움을 받아, 성녀 글라라는 친동생 아녜스를 비롯한 몇몇 자매들과 함께 성 글라라 수도회의 모태가 된 성 다미아노 수도원의 봉쇄 안에서 복음적 가난과 사랑의 공동체 생활로‘하느님의 구원 성업을 거드는 짝이며 성교회의 심장으로서 그 연약한 지체를 떠받치는 받침대’가 되는 프란치스칸적 관상의 삶을 시작하였다.
□ ‘산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기도 생활
글라라는 다정한 자매요 어진 어머니로서 자매들의 모든 기쁨과 아픔에 함께하였고 수도원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자매들의 비천한 여종이 되어 겸손하게 수하자매들을 섬겼다. 또한 그녀는 분별력 있고 지혜로운 수도원장으로서 자매들의 의견에 늘 귀 기울이며 그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으려 애썼다.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가난을 육화한‘가난한 동정녀’로 살았던 글라라에게 성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작은형제들은 물론이요 교황과 추기경 및 왕과 귀족들까지 기도를 부탁하며 자문하러 왔다. 프란치스칸 관상생활의 첫 터전이었던 아시시 근교의 성 다미아노 수도원은 글라라가 수도 가족 뿐 아니라 세상 모든이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어 그들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눈 삶의 현장이었다.
42년간의 수도생활 중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면서도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신비는 삶 자체로 드러나는 그녀의 기도에 있었다. 글라라에게 있어 기도는 자신의 존재 전부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사랑함이었고, 수도원의 봉쇄는 주님과 단둘이 누리는 자유의 공간이었으며, 가난은 그리스도를 관상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었다.
□ 성녀 글라라
모든 사람과 사물안에서 창조주 하느님을 만나고 찬미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글라라는 1253년 8월 11일, 세상에서의 마지막 찬가를 부르면서 찬란한 빛이신 하느님께 옮겨갔다: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셨으니 주님, 찬미 받으옵소서."
글라라는 1255년 시성되었으며, 성녀의 삶이 배어있는 성 다미아노 수도원-성당과 유해가 모셔진 아씨시 성 글라라 대성당(S.Chiara)은 오늘날까지도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성녀의 삶은 자신을‘창조하시어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으며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와도 같이 사랑해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오롯한 응답이었다. 특히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기쁨’ 가운데‘하느님과 이웃을 온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해 사랑한’ 성녀의 삶은 그녀의 이름처럼 오늘날 감각적 사랑과 물질만능주의에 빠져가는 이 세상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 성인의 말씀
가난한 동정녀로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관상하시오. 생활을 통해서 주님께 찬미와 흠숭을 드리시오. 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에 불을 붙입니다. 님에 대한 관상은 우리의 휴식이고 님의 어지심은 우리의 만족입니다. 관상을 통하여 전존재를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변화시키시오. 저를 창조하신 주님, 찬미 받으소서. |
글라라는 모든 성인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극히 엄격하면서도 아래 수녀들에 대해서는 자비로운 어머니와 같이 인자했다. 그래서 그녀의 덕을 사모하여 그 지도를 바라며 각지에서 그녀의 산하에 모여드는 소녀들이 날로 증가했으며 그 대부분은 귀족 출신이었다. 글라라의 어머니 오르톨라나디도 남편의 사망 후 그 수도원에 와서 딸 밑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고 한다.
회칙에 의하여 그 회는 수입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많은 수녀를 데리고 수도원을 이끌어나가야 하는 클라라는 하느님의 안배하심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굳은 신뢰심으로 극히 궁핍할 때는 가끔 기적도 일어났다. 예컨대, 빵 한 개로서 많은 수녀가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많아진 기적이며, 혹은 십자가를 그음으로써 비어있던 기름단지에 기름이 가득 채워진 기적이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 당선된 당시의 추기경 후고리노가 그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식사 때에 클라라는 추기경의 강복을 청했으나 오히려 추기경이 클라라에게 강복하기를 명하므로 겸손한 그녀는 곧 그 명대로 한 십자가를 그으며 식탁을 강복하자 갑자기 그 위에 놓여있는 빵마다 조그마한 십자가 표시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녀의 강복으로 중환자가 기적적으로 완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240년 독일의 황제 프리데리코 2세와 동행한 사라센 대군잉 움브리아 지방의 스포레트와 각 도시, 마을을 점령하고 아시시에까지 침입했을 때, 클라라 수녀원도 위험한 처지에 놓였다. 그때 그녀는 성당에 들어가 제대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동정녀들을 보호할 힘이 없습니다. 하오니 당신이 직접 그 전능하신 힘으로 그들을 보호하시어 적의 손에 넘기지 말게 해 주십시오" 하며 뜨거운 기도를 바치고 일어나서 성광을 모시고 천천히 적군들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 손에 쥐어진 성광에서 기이한 빛이 발사되어 이교도인 적들은 눈이 부셔서 겁을 집어먹고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글라라는 성 프란치스코를 영적 아버지로, 또 자기는 그의 작은 싹으로 생각하고 항상 그를 존경했으며 그의 높은 덕을 볼 때마다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또 프란치스코도 클라라의 뛰어난 종교적 소질을 보고 이를 열심히 지도했으며, 기회 있는 대로 좋은 훈계를 베풀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이 만나는 예는 극히 드물었다.
□ 자매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하는 클라라, 성녀의 유해
성 프란치스코는 임종 때에 글라라와 그 수녀들에게 사후에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 약속은 곧 이루어졌다. 글라라와 그 수녀들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수녀원으로 모시고 온 성인의 유해를 앞에 놓고 뜨거운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세상에서 충실히 프란치스코의 덕행을 따른 글라라의 서거도 그와 비슷했다. 즉, 성인이 제자들에게 한 것과 같이 글라라회 수녀들에게 일일이 사랑의 축복을 해 주며 1253년 8월 11일 아침에 잠들 듯이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살아있는 성녀라고 불리던 글라라는 사후 2년 만에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 의해 정식으로 성인품에 올라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천주교 광주대교구
남동 5.18 기념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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