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영조 시기의 사실 답④
문제에 제시된 왕은 파악해볼까요?
'경종이 죽고 다음 왕으로 즉위한 연잉군', '즉위 후 이인좌의 난(1728) 발생'이라는 사실을 통해
자료의 밑줄 친 '왕'이 영조(1724~1776)임을 알 수 있어요.
국사 시간에 조선 왕들을 외웠던 거 기억하시죠?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이거만 기억하셔도 알 수 있겠네요...^^
영조는 많은 치적을 남긴 왕입니다.
정치쪽에서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육성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노론과 소론 사이의 균형을 조정하여 정쟁을 억제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였습니다. 특히,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사권을 지녔던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습니다(정조 때 완전 폐지됨).
경제, 사회쪽에서는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줄였으며, 형벌 제도를 개선하여 가혹한 악형을 개선하고, 신문고 부활, 상언, 격쟁 등을 통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하였습니다.
청계천을 준설하여 홍수를 방지하였어요.
또한, <속대전>, <속오례의>, <여지도서>,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도 제작에도 힘써 동국여지도, 해동지도 등의 지도를 제작하였어요.
이 밖에도 많으니 굉장하죠.....^^
① 신유박해(1801)는 순조 때 일어난 천주교 탄압 사건입니다.
② 대동법은 광해군 때인 1608년에 경기도에 시범적으로 처음 시행되었습니다.
이후 1708년 들어 잉류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 걸쳐 시행되었죠.
③ 규장각을 설립하여(1776) 왕권 강화 기구로 육성한 것은 정조입니다.
④ 영조는 속대전을 편찬하여 법전 체계도 정비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원록을 편찬하여 형벌 제도를 완화하였으며,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토록 하였습니다.
⑤ 5군영 중 제일 마지막으로 설치된 금위영은 숙종 때인 1682년에 설치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 영조, 정조의 개혁 정책
개혁 정책 | |
영조 |
○ 탕평책(완론 탕평) ◦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 세우려 함 → 탕평파 중심의 정국 운영◦ 산림 존재 부정, 서원 대폭 정리,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폐지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정조 때 완전히 폐지)◦ 결과 : 국왕의 영향력 확대, 붕당의 정치적 의미 퇴색 ○ 사회 개혁 추진 ◦ 목적 :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 ◦ 균역법 시행(1750) : 백성의 군역 부담 완화(1년에 군포 1필만 납부) ◦ 가혹한 형벌 폐지,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 시행 ◦ 한계 : 강력한 왕권에 의한 일시적 탕평에 그침 ○ 문물 정비 ◦ 법전 체계 정리 : 속대전 편찬 ◦ 속오례의, 속병장도설(무예, 병법 정리), 여지도서(지리 지식), 해동지도, 동국여지도(지도집), 동국문헌비고 (백과사전), 무원록(법의학 서적) ○ 기타 ◦ 이인좌의 난(1728), 나주 괘서 사건(1755), 청계천 준설(1760), 사도세자 죽음(1762) |
정조 |
○ 적극적 탕평(준론 탕평) : 영조 때의 척신·환관 제거, 소론과 남인 계열 중용 ○ 왕권 강화책 ◦ 초계문신제 시행 :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 유능한 인사 재교육 규장각 육성 ◦ 장용영 설치 : 친위 부대,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 ◦ 화성 축조 :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으로 이장. 정치․군사적 기능 부여, 상공인 유치 ◦ 지방 통치 체제의 개편 : 수령의 향약 주관 →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 약화,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 강화 ○ 문물 정비 ◦ 법전 : 대전통편 편찬 ◦ 추관지(형조 판례집), 탁지지(호조의 기능 정리), 동문휘고(조선의 외교 문서 정리), 홍문관지, 규장각지, 태학지, 내각일력, 규장전운(음운서), 무예도보통지(병법서) ○ 경제 개혁 ◦ 목적 : 재정 수입 확대, 상공업 진흥 ◦ 신해통공(1791) :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 폐지 ◦ 광산 개발 장려 ○ 기타 ◦ 영남만인소 사건(1792), 문체 반정 운동(1792) |
■ 유사 기출문제 더 풀기
13회 고급 19번 문제
19.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치 답④
제시된 자료는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책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문제는 밑줄 친 각각의 정책과 그 결과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해설하겠습니다.
① 탕평 정치는 숙종 때 처음 실시되었으나, 영조 때 자리잡았습니다.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육성하고 이들을 중
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습니다. 영조가 탕평 정치를 실시하면서 왕은 정국의 운영을 비롯한 모든 부문에서 가장 큰 영
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붕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엷어졌습니다.
② 균역법은 농민들의 군역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하여 시행되었습니다(1750).
균역법의 시행 이전에는 농민은 군포로 1년에 2필씩을 납부해야 했습니다만, 이 법의 시행으로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
하면 되었습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말을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어장세, 염세, 선박세 등 잡세 수입으로 보충
하였습니다.
③ 정조는 병권 장악을 위해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④ 정조는 지방 사림 세력이 주관하던 군현 단위의 향약을 수령이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재지 사족)의 영향력을
줄이고 수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시켰습니다.
⑤ 격쟁(擊錚)은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징·꽹과리·북 등을 쳐서 자신의 사연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위,
상언(上言)은 관원으로부터 천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임금에게 올릴 수 있는 문서를 의미합니다.
정조 때에는 상언(上言)·격쟁(擊錚)의 제도에 붙어 있던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
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능행 중에 그것들을 접수하도록 하였습니다. <일성록>과 <조선왕조실록>
에 실린 상언·격쟁의 건수만도 5,000건을 넘는다네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8회 고급 25번 문제
25.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치 답①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 붕당의 폐해에 대해 언급하며, '당습에 관계된 자를 나에게 천거하면 내치고 귀양 보내어'라는 내용이 나오죠?
이를 통해 붕당의 폐해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어요.
이는 영조의 탕평책과 관련된 사료입니다.
영조는 즉위 직후 탕평의 교서를 발표하여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스스로가 소론을 몰아내고 노론을 중용하다가, 곧이어 노론을 내몰고 소론을 기용하는 등 정국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붕당의 세력이 커진 상황 속에서 약해진 왕권을 가지고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에는 역시 한계가 있었지요.
이때 소론과 남인의 일부 강경파는 영조의 정통을 부정하고 노론 정권에 반대하여 이인좌의 난(1728)을 일으킵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 확립, 붕당 간의 관계를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합니다.
이에 붕당을 타파하고 각 당파 안의 인재를 함께 쓰겠다는 선언(기유처분, 1729)을 합니다.
영조는 붕당 사이의 균형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노론과 소론을 조정하면서 군사 제도와 경제를 개혁하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를 지지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인 탕평파를 길러내 그들에게 정국을 주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죠.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습니다(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정국이 안정되자, 영조는 균역법을 비롯한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 군제 개혁, 문물 제도 정비 등을 추진하였습니다.
영조의 탕평 정치를 통해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이 어느 정도 조정되고, 왕이 정국의 운영을 비롯하여 모든 부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붕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엷어졌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지요. 이 후 탕평의 원리에 의해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였으나, 노론이 정국을 이끌었지요. 사도 제자의 죽음을 계기로 그 후에는 절대적으로 노론이 우세하였습니다.
① 시파를 등용하였던 것은 정조입니다.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을 추진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환
관 등을 제거하였습니다. 이에 영조 때의 탕평파 대신들을 비판하였던 노론과 소론의 일부와 그 동안 정치 집단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계열이 중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7회 고급 26번 문제
26. 영조의 청계천 준설 공사 답④
이 문제는 공부한 내용이 아니라 조금 생소하게 느껴질 겁니다.
가끔 이런 문제들이 출제되어 당황스럽게 하기도 하나 공부 차원에서 풀어보세요.
문제에 주어진 그림은 ‘어전준천제명첩’ 에 있는 청계천 준설 공사 모습입니다.
이는 1760년(영조 36년)에 실시된 청계천 준설을 성공적으로 완공한 것을 기념하여 그린 일종의 기록화첩입니다.
다리 위에 영조가 앉아서(임금 모습은 그리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 상징적인 어좌만 그려져 있음) 준천 공사를 지켜보고 있고 청계천에서는 많은 사람들과 소까지 동원하여 준설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네요.
영조는 오랫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탕평책, 균역법 시행, 법전 정비, 문예 부흥 등 정치와 사회, 문화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청계천 준설도 중요 치적 중의 하나입니다.
당시에 도성 가운데를 흐르는 청계천을 오랫동안 준설하지 않아 홍수로 인해 범람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본 영조는 백성들의 의견 등을 들은 후 청계천 준설 공사를 지시합니다.
1760년에 준천사(濬川司)를 세우고, 수만금을 출연하여 인부를 사서 공사를 시작합니다.
청계천 밑바닥에 쌓인 흙을 파내고 수로도 직선으로 변경하며 하천 양안에는 석축을 쌓고 버드나무를 심는 공사가 두 달간에 걸쳐 시행되었고, 연인원 20만명이 동원되고 3만 5천냥과 쌀 2,300백석이라는 그 당시엔 어마어마한 자금을 들인 대역사였습니다.
당시 청계천 준설 공사는 도시 빈민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준 고마운 공사였습니다.
청계천 준설 공사를 마친 뒤 영조는 준설 과정과 재원, 인력 충원 방법 등을 자세하게 적은 <준천사실(濬川事實)>과 <준천소좌목(濬川所座目)>도 편찬하도록 했답니다.
① 청계천 준설 공사를 시행하기 위해 1760년에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였습니다.
② 청계천에 토사가 유입되어 하천바닥이 지속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이 때문에 큰비가 오면 홍수가 자주 발생하자 이를 막기 위해 준설 공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③ 하천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었음을 자료의 그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죠?
④ 영조는 청계천 준설 공사를 시작하기 전 청계천에 나아가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며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이 공사가 백성을 위한 것이지만 백성들을 괴롭힐 수 없다 하여 수만금을 내어 노임을 주도록 하고 공사를 재
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⑤ 내사산(內四山)은 서울 도성을 둘러싼 북악산, 남산, 인왕산, 낙산을 말합니다.
이들 산의 수목이 도시민들에 의해 땔감용으로 벌목되고 경지로 개간됨으로써, 이들 산에서 청계천으로 유입되는 토
사량 계속 늘어 하천 바닥을 높여 홍수의 원인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당시에 내사산의 벌목을 금지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회 2급 17번 문제
17. 영조 시기의 사실 답②
이 문제는 1점짜리 문제지만 연표 형식으로 출제되어 숙종~정조 시기의 역사 흐름에 약한 분들에게는 2점짜리 이상의 난이도로 다가올 문제입니다.
기출문제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대비해 공부하기 위한 용도이니 문제풀이를 통해 정확히 알아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문제를 보고 있는 시험을 준비하는 분들은 다음에 이러한 유형, 이러한 주제가 나왔을 때 맞으면 됩니다.
그럼 문제에 주어진 사건의 연도를 하나씩 알아둡시다.
황해도 대동법 실시(숙종 34년, 1708), 이인좌의 난(영조 5년, 1728), 규장각 설치(정조 1년, 1776), 신해통공 실시(정조 15년, 1791)입니다.
따라서 (가)는 이인좌의 난(영조 5년, 1728)∼규장각 설치(정조 1년, 1776)에 해당하여야 하는 역사적 사실이어야합니다.
결국 영조 때의 사실이네요.
그럼 답지를 하나씩 살펴보죠.
① 수원 화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죠?
수원 화성은 2년 4개월 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796년에 완성되었습니다.
화성 건설이 끝난 후에는 <화성성역의궤>를 편찬하여 공사에 관련된 비용, 인력, 기계, 물자, 건축물들을 상세히 기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공사에는 정약용이 기안한 거중기를 사용하였다는 것도 알아두세요.
② 균역법 실시는 영조 때인 1750년에 실시되었죠.
③ 경상도에 대동법이 시행된 것은 1677년의 일입니다.
대동법은 광해군 때인 1608년에 경기도에 처음 실시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데 100여 년이 걸렸습니다.
실시 순서는 경기도(1608), 강원도(1623), 충청도(1651), 전라도(1658), 경상도(1677), 황해도(1708)입니다.
④ 황사영 백서 사건(1801)은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서양인 주교에게 신유박해(1801)의 전말을 보고하는 한편, 열강의
군사력를 동원해 조선에서 포교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려다 발각된 사건입니다.
박해 | 내용 |
신해박해 (정조 15년, 1791) | 신해박해(진산 사건, 모친의 신주 소각) → 윤지충·권상연 처형 |
신유박해 (순조 1년, 1801) | ◦ 벽파(僻派)가 득세하면서 남인 시파(時派) 제거 ◦ 중국인 신부 주문모와 초기 교회의 지도자인 이승훈·정약종 등 처형 ◦ 천주교 신자가 아닌 정약용·정약전 유배, ◦ 신유박해를 서양인 주교에게 보고하려던 황사영 백서 사건 발각 |
기해박해(헌종 5년, 1839) | 벽파의 풍양 조씨가 시파인 안동 김씨 공격, 프랑스 선교사 3명 처형 |
병오박해 (헌종 12년, 1846) |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순교 |
병인박해 (고종 3년, 1866) | ◦ 1866년~1871년까지 계속된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 배경 : 러시아를 막기 위해 천주교를 통해 프랑스와 접촉하려 하였으나 실패 ◦ 과정 : 신자 수천 명과 9명의 프랑스 신부 처형 → 신부 리델이 조선을 탈출, 톈진에서 프랑스 동양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구원 요청 → 로즈가 7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침입(병인양요) |
1886년 프랑스와 수호통상조약 체결, 천주교 선교의 자유가 인정 |
⑤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을 몰아낸 사건은 숙종 때(1696)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균역법(1750)과 관련
12회 고급 22번 문제
22. 군역제의 변천과 특징 답②
이 문제는 응시자들이 조금 어렵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주제는 아니지만, 그리고 교과서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군역과 관련하여 공부할 때 군적수포제, 균역법, 호포제 등은 일반적으로 꼼꼼히 공부하면서도 봉족제나 보법은 의외로 대강 넘어가는 분들이 많거든요.
이 기회에 잘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군역의 변천 과정은 문제에 나타난대로
봉족제(태종)→보법(세조)→군적수포제(중종)→균역법(영조)→호포법(고종)으로 변천해갑니다.
(가)봉족제
조선은 태종 이후 사병을 모두 폐지하고,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양인 남자는 군역을 지게 하는 양인개병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이로써 모든 양인은 현역 군인인 정군과 정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봉족)으로 편성되었습니다. 보인은 현역 군인인 정군이 군역을 지는 동안 필요한 식량, 의복 등의 경비를 대주는 보조인으로, 의복이나 식량을 직접 대주는 것이 아니라 그 비용으로 매달 무명 1필을 내는 부담을 졌어요.
이때는 자연호를 편제하여 3정(丁)이 1정군(正軍)이 되게 만들었어요. 예를 들어 아버지가 정군(당번병으로 군역을 짐)이 되면 아들들이나 사위들이 봉족이 되는 제도였어요. 따라서 정군이 봉복(보인)에게 무리한 부담을 요구하지 않는 구조였지요.
(나)보법(保法, 1464)
세조 때 들어 봉족제를 전면 개편하여 자연호 대신 인정(人丁)을 기준으로 하는 인위적인 편제인 보법을 실시합니다.
양인 장정을 철저히 조사한 뒤 정남 2정(丁)을 1보(保)로 삼고 그들로 하여 정군을 돕도록 하는 원칙을 세워 시행합니다.
갑사는 2보(4명), 정군은 1보(2명), 수군은 1보 1정(3명) 등 담당하는 군역에 따라 보인의 수를 다르게 하여 그 경비를 마련하게 하였어요.
보법의 실시로 군역은 확대되었지만 요역 담당자가 감소하였기 때문에 군역 부담자가 요역 부담까지도 겸하는 현상, 즉 군역의 요역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다)군적수포제(중종, 1541)
군역이 요역화되자 농민들은 힘든 군역을 기피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관청이나 군대에서 군역에 복무해야 할 사람에게 포를 받고 군역을 면제해 주는 방군수포, 또는 군역 담당자가 정군에 복무하는 댓가로 보인에게 받은 면포로 다른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하게 하는 대립제가 불법적으로 행해지게 됩니다. 군포 징수제가 점차 확산되자 1541년에는 이를 합법화하는 군적수포제가 실시됩니다. 이에 따라 양인 장정들은 1년에 군포 2필을 지방관에게 납부하면 병조에서 이를 받아 군인을 고용, 양성하게 되는 일종의 직업 군인제가 실시되게 됩니다.
(라)균역법(영조, 1750)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실시한 균역법으로 농민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었어요.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어장세, 선박세 등 잡세 수입으로 보충하게 하였습니다.
(마)호포법(고종, 1871)
흥선 대원군이 상민에게만 부과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부담시켰던 제도입니다.
이에 따라 신분 구별 없이 모든 호당 2냥씩을 군포로 납부하게 하였어요.
호포제는 양반들의 거센 반발을 샀는데, 이에 따라 대원군은 양반들은 양반의 이름이 아니라 하인(노비) 이름으로 호포세를 내도록 하여 그들의 체면을 유지시켜 주도록 했다네요...ㅋㅋ
설명이 조금 길었지요.
사실 전체 흐름을 알려면 더 자세한 설명들이 중간중간에 들어가야 하는데 너무 길어져서......이해해주세요.
② 보법의 실시로 정군의 숫자가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정군의 숫자는 대립제, 방군수포제를 합법화해준 군적수포제 실시로 확 감소하게 됩니다.
군적수포제 실시로 사실상 의무병제가 무너지게 되고, 또 군역 담당자들에게 군포를 받아 그 돈으로 필요한 군인을
고용해야 했는데, 그렇지도 못하면서 결국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 조선 후기 수취 체제의 개혁
9회 고급 37번 문제
37. 균역법 답④
이 문제는 <정조실록>에 실려 있네요.
자료를 보면 '이 법을 시행한 지 30년 만에 어염세 수입이 대폭 감소하였다. 선대 왕께서 이 법을 만드셨는데 법이 오래되자 폐단이 생겨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정조의 선대 왕은 영조니까 영조가 만드신 법, 어염세 수입 등을 연관시켜 보면 균역법임을 알아낼 수 있어요.
균역법은 영조가 실시(1750)한 것으로, 농민들의 군포 부담을 1년에 군포 필만 납부하면 되도록 줄여준 제도였습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말을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란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어장세·선박세 등 잡세 수입으로 보충하게 하였습니다.
① 대동법 실시 이전 공납 제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② 공납의 폐단을 개혁한 대동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③ 조선 초까지 시행되었던 전근대 국가에서 정하였던 일반적인 조세 수입 원칙입니다.
⑤ 세종 때 실시된 연분9등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과전법의 경우 수확량의 10분의 1을 내도록 하였는데, 1결의 최대 생산량을 300두로 정하고, 매년 풍흉을 조사하여 그
수확량에 따라 납부액을 조정하였습니다. 세종 때에는 조세 제도를 좀 더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6등법, 연분9등법으로 바꾸고(1444), 조세 액수를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도록 조
정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인조 때에는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시키는 영정법을 실시합니
다(1635).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6회 고급 31번 문제
31. 균역법 답③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 나타난 '양역(양민들이 지던 역)', '군적', '군포 납부', '이웃의 이웃이 견책을 당하고(인징(隣徵))', 친척의 친척이 징수를 당하며(족징(族徵))', '황구', '백골' 등의 용어나 내용를 통해 이 자료가 군역의 폐단을 지적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어요.
군역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제도는 균역법이죠.
이 문제를 통해 균역법의 실시 배경, 내용, 결과를 꼼꼼히 살펴보자구요.
균역법의 실시 배경
양 난 이후 5군영의 성립으로 모병제가 제도화되자, 군영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포를 내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수포군이 점차 증가합니다. 그러나 5군영은 물론, 지방의 감영이나 병영까지도 독자적으로 군포를 징수하면서 장정 한 명에게 이중 삼중으로 군포를 부담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부과되는 군포의 양도 소속에 따라 2필 또는 3필 등으로 달랐습니다. 그런데다가 임진왜란 이후 납속이나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어 면역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군역의 부담자는 점차 감소하는 추세였죠. 여기에 전국의 장정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재정 상태가 어려워지자 군포 담당자에게 군포의 부과량을 점차 늘려갑니다.
이렇게 군역의 부담이 과중해지자, 농민은 도망가거나 노비나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을 피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집니다. 이에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개혁 방안이 논의되고, 마침내 영조 때 균역법이 시행됩니다(1750).
균역법의 내용과 결과
균역법의 시행으로 농민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어 부담이 많이 줄어듭니다.
그런데 농민의 부담을 줄여주게 되면 정부의 군포 수입이 줄어들게 되어 재정 약화를 가져오게 되겠죠?
따라서 군포 수입 감소로 줄어든 재정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몇 가지 보충 세금을 부과하게 됩니다.
지주에게는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말을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실 등에서 거두어 사용하던 어장세, 염세, 선박세 등의 잡세 수입도 재정 수입으로 편입시켜 보충하게 되죠.
그러나 균역법이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의 부담이 소작 농민에게 전가되고, 군적 문란이 심해지면서 농민의 부담은 다시 가중됩니다. 세도 정치기에 삼정의 문란으로 나타나죠.
아래 제시한 9회 고급 37번 문제를 보면 균역법 실시 이후 다시 나타나는 폐단에 대한 자료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① 춘궁기나 흉년을 대비 마을에 세워진 창고는 사창(司倉)이나 상평창(常平倉), 의창(義倉) 등의 구휼 시설입니다.
② 영정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조선 후기 인조 때 정부는 연분9등법을 따르지 않고 풍년이건 흉년이건 관계 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말로 고정
시킨 영정법을 실시합니다(1635).
④ 대동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 호패법과 오가작통법을 강화하는 조치는 농민의 유망을 막고 통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이는 군역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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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른 기출문제까지 분석해주시고!!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기출문제보다 더 절실한게 문제풀이 해설... 이거였는데 정말 큰 도움 받고 갑니다~~
자료를 찾다가 추천으로 들어와봤는데 정말 많은 자료가 있어 도움을 받게 될 것 같습니다 좋은자료가 참 많네요
우와 해설 진짜 대단하네요 전 영조 속대전 하나 외우고 있어서 맞았는데 이정도로 풍부한 자료가 있다는게 참 도움이 많이 될것 같습니다 추천으로 들어왔는데 가입하길 너무 잘한거 같아요
공부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영조와 정조의 정책이 혼동될 때가 의외로 많은데 세심히 공부하여야 겠네요
국사 초짜라 그런지 하나도 모르겠어요~ㅠㅠ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당!!! 홧팅!!!
정조실록 관련 문제가 기출 곳곳에 나오는 것을 요즘 들어 많이 보게 되어요^^ 꼼꼼히 공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해설이 정말 잘 되어 있네요. 조선조 역대 왕들의 이름만 외워도 쉽게 문제에 제시된 왕이 누군지 파악할 수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집권 왕과 관련된 당시 상황, 업적 등을 함께 연결해서 꼼꼼히 공부해야만 맞출 수 있겠네요.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지식들이 기출 문제 하나로 제 자리에 맞춰지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기출문제가 중요한가 봐요. 열심히 봐야겠습니다.
아,,, 정말 감동 감동!!!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조.정조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전에는 국가적인 공사나 성를 축조할 때 임금을
주지 않아서 백성들이 너무 힘들었죠.
정말 꼼꼼한 해설 감솨합니돠~~
정조 때 영남만인소 사건(1792)은 지기님께서 잘못 표기하신 건가요??;;
잘정리하고갑니다.
어렵네요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아 .. 참 ... 뛰어난 왕이 많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갑니다
영조의 청계천 공사는 처음 들어보네여;; 감사합니다
영조.정조 중요 중요 ㅠㅠ
자료 감사합니다~~!!
영남만인소가 정조 때 (1792년) 사건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연남만인소는 19세기 말으로 알고 있습니다.
졸지에 벼락치기가 되엇지만 좋은 결과 잇엇으면 좋겟네요^^ 다들 실력발휘하세요 :)
영남만인소는 개화기 때 아닌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정보감사합니다
영조, 정조, 시기는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
정말 감사합니다 ㅠ
영조대왕 훌륭한왕이라고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정조때는 함께, 또 따로 반드시 정리해야하는 부분같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