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발걸음
손 원
오페라 가수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가녀린 몸으로 사푼사푼 걷는 여가수의 자태는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새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이다. 가녀린 몸매에 신명이 더해져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마음이 가벼우면 발걸음도 가볍다. 경연대회에서 수상자를 호명하면 날듯이 빠른 걸음으로 단상에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상자가 날씬하든 뚱뚱하든 상관없이 기쁘면 발걸음도 가벼워져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보게 된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병영을 나서는 제대군인의 발걸음은 어떨까? 어깨에 날개를 단 듯 경쾌한 걸음이다. 나의 경우가 그랬다. 32개월 만기제대하고 병영을 나서던 그때의 홀가분함과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를 배웅하던 후배들이 나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가벼운 발걸음을 보았을 것이다. 나의 뒷모습을 보고 자신이 병영을 나설 때의 모습을 그려보고 힘을 얻었으리라.
아침 배란다에서 출근하는 직장인, 등교하는 학생들을 바라보곤 한다. 걸음걸이가 눈에 와 닿는다. 가볍고 경쾌한 걸음걸이가 있는가 하면, 어깨가 처진 무거운 걸음걸이도 보인다. 모두가 하루 일과를 잘 수행하고, 무난히 다녀오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섰을 것이다. 출근이 즐겁고 등교가 즐거우면 즐겁게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일이든 공부든 열심히 하는 것보다 즐기며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은퇴한 나는 출근할 일이 없다. 오래도록 직장을 다녔지만, 나의 걸음걸이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때 나의 마음은 날씨만큼이나 변덕스러웠다는 생각이 든다. 나날이 맑음, 흐림, 비 내림이 교차했지만 잘 극복한 나에게 스스로 박수를 보낸다.
지금은 아들 가족, 딸 가족이 아침이면 출근한다. 바라건대 즐겁게 집을 나서는 경쾌한 발걸음의 출퇴근이면 좋겠다. 손자 두 놈은 어린이집 가기 싫다며 늘 떼를 쓰고 했는데, 요즘은 다소 적응이 된 듯 때로는 낑낑거리고, 때로는 뜀박질을 하며 앞장서기도한다. 세상일은 적응하기에 달린 것 같다. 나의 오랜 직장생활도 날씨처럼 변덕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맑은 날이 많았기에 오랜 세월을 종사했다고 하겠다. 열심히 일하는 자는 즐기며 일하는 자를 당할 수 없다고 한다. 생각건대 나의 경우는 가벼운 발걸음의 출근은 아니었을지라도 평범한 발걸음의 출근으로 열심히 일했다는 생각이다.
가벼운 발걸음은 몸의 무게와 마음의 무게 모두가 가벼워야 가능하다. 몸무게 보다 마음의 무게 비중이 크다. 하는 일이 즐거우면 출근 발걸음은 가볍다. 어릴 때 소풍날이 기다려졌다. 60년대 보릿고개 시절, 모든 것이 부족했던 때다. 10원 동전 한 닢 쥐고 학교길을 나섰고,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눈깔사탕 한 개를 사서 입에 넣으면 더없이 좋았다. 푸른 숲, 맑은 강가에서 김밥을 먹고 하루를 보낸 그날이 지금도 설렌다. 소풍 가는 날은 먼 길을 걷고 종일 뛰어놀아도 지칠 줄 몰랐다.
나이가 드니 오갈 곳이 줄었다. 동호회 모임이 몇 개 있어 가끔 나간다. 취미, 친목 모임인 만큼 부담이 적고 가면 즐겁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곳을 간다. 아무리 부담 없는 자리라지만 자리가 길어지면 가끔 트러블이 생길 수도 있다. 그 순간을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다. 갈 때 가벼운 몸과 마음이 올 때는 더욱 가볍고 즐거움을 안고 올 수 있어야 한다. 원만한 대인관계는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 지금의 나를 인지하고 걸맞은 행동이 중요하다.
건강과 행복은 누구에게나 최고의 관심사다. 자신의 건강과 행복은 자신의 몫이고 잘 챙겨야 한다. 건강과 행복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 하지만 타인도 그 척도를 가늠해 볼 수가 있다. 걷는 모습이 날렵하고 당당해 보이면 건강하고 행복함이 틀림없다. 이런 사람은 누구에게나 호감이 간다. 건강과 행복의 바이러스가 타인에게 전파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잘 웃고 활동적이면 금상첨화다. 이 모두가 걸음걸이에 나타남은 물론이다.
자기 PR 시대, 무엇을 어떻게 어필할 것인가. 예로부터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했듯이 첫째가 풍채 즉 외모다. 외모와 건강한 모습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준다. 타고난 외모야 어쩔 수 없겠지만 건강과 활력은 가꿀 수 있다. 걸음걸이만 봐도 건강 상태와 활력을 가늠할 수 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걷기 운동은 효과적인 건강증진법이기도 하다. 열심히 걷다 보면 건강은 물론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다. 우리의 대표자 및 지도자를 뽑는 선거가 자주 있다. 우선은 풍채가 좋은 사람에게 마음이 간다. 다음으로 인물의 내면을 알아보는 순서다. 한 길 사람 속을 가늠하기란 불가능할 정도여서 다소 무거운 발걸음으로 투표장에 간다. 앞으로 AI가 내가 바라는 인물을 추천해 주면 좋겠다. 그러기 전에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정당이 있어 공정한 검증을 거친 인물을 내세워 주면 좋겠다. 투표장 가는 발걸음이 이번만큼은 가볍기를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해 아쉬웠다.
※ 2024. 4. 23. 영남경제신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