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교직의 첫 출발지 - 화방사 아랫동네
<남해 도마 국민학교 : 72.05.01-77.09.30>
◎ 설레는 시작의 길
○ 초임지(初任地) 도착
1972년 5월 13일 토요일, 남해군교육청에 들러 사령장을 받고 11시경에 첫 발령지인 남해 도마 국민학교 정문에 들어섰다. 13학급의,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시골 학교,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한 내 교직생활의 첫 발을 디딜 곳이 바로 거기였던, 참으로 역사적인 시작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쉬는 시간이었는지 제법 많은 수의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공차기, 고무줄놀이 등을 하다가 낯선 사람의 출현에 의아한 눈빛을 보내고들 있었다.
교무실에 들어서니 몇 분 선생님들이 앉아 계셨는데, 아이들과는 달리 나의 출현을 예견하고 있는 듯 선뜻 새로 오시는 선생님이냐고 물으시며 교감선생님 앞으로 안내를 해 주셨다.
윤채두 교감선생님이었다. 인자한 미소를 한껏 띤 얼굴로 반갑다는 인사와 함께 고향, 교직관 등 몇 가지를 질문하시고는,
“김 선생님은 4학년2반을 맡으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담임할 학년을 가르쳐 주셨다. ‘선생님’이란 호칭도 그렇고, 부모님 연세와 비슷한 교감선생님의 황공스러운 공대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가운데 이게 사회생활의 첫발을 딛는 것이고, 나는 아직 적응이 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적응을 해야 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감선생님은 나를 교장실로 안내 하셨다.
적당히 뚱뚱하신 교장선생님은 이용수 교장선생님이셨다. 한 눈에 교직의 연륜을 짐작케 하는 근엄함이 단번에 나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의 신상에 관한 교감선생님의 설명을 들으시고는 자리를 권하시고 진심으로 환영하신다는 말씀을 하신 후,
“김 선생! 교직이란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적은 직업일세.”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교직의 수행에 대한 몇 가지 조언을 주셨는데, 기억에 지금도 생생하고, 나름대로 지켜 가고 있는 말씀은 ‘윗사람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교사가 되라는’ 말씀이었다.
이어서 나의 환영을 겸한 점심 식사 자리에서는 10명이 넘는 교직 선배들이 고맙고 황송하게도 모두들 관심을 보이며 말들을 걸어 왔다.
식사가 끝나고 토요일 오후의 봄날, 모두들 나름대로의 일과를 위해 헤어진 후 교감선생님과 함께 학구내의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하숙집을 구하게 되었다. 어렵지 않게 구한 하숙집에서 쉬면서 들뜨기만 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시간을 보내다가 좀 떨어져 있는 바닷가에 가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녁때가 되어서 딴엔 기상천외한 생각으로 챙겨간 출석부를 외웠다. 월요일 아침에는 4학년 2반 교실이 온통 난리가 날 것이다. 선생님이 아닌 귀신이 부임했다고……
다음날은 5월 14일 일요일, 할 일 없이 학교에 나갔다가 일직 근무하시는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고 그러는 사이 하루해가 저물게 되었다.
당시는 초등교원 양성소 출신 교사들이 참 많았었다. 도마초등학교에도 교장선생님이 광주 사범 출신이었고, 나와 함께 부임한 내 동기 이복자선생만 교대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양성소를 수료한 선생님들뿐이었다.
이제 막 발령 받은 햇병아리 주제에 조금씩의 경력이 있는 선생님들보다 호봉이 높아 혼자 미안해했던 기억이 난다. 열 세 학급 규모의 학교에서 교장, 교감선생님 그리고 세 분의 고참 선생님 바로 다음이 내 호봉 상 서열이었다.
○ 첫 출근의 감회 - 모르는 자가 용감한 법
5월 15일, 학교에 출근하니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들 부산하게 바쁜데 나만 할 일이 없어서 앉아 있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아직 내게는 사무 분장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함께 발령을 받고 오늘 아침에야 부임한 교대 동기 이복자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정식으로 담임을 배정 받은 나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출석을 불러 애들을 놀라게 해 주려고 했던 나의 계획이 깨끗하게 뒤틀려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3일에 교감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대로 4학년 2반이 아니고 5학년 1반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왜 바뀌었는지는 후에 안 일이지만 밝히기가 곤란하여 생략하기로 한다.
드디어 전교 조회 시간이 되었다. 6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의 앞에서 부임인사를 해야 했다. 뭘 몰라서 미리 준비하지 않은 인사, 참으로 난감한 가운데 인사를 하고는 담임으로 배정된 5학년 1반 교실로 들어갔다. 65명, 본교에서는 가장 많은 학급 인원이었다.
공부시간에는 교육실습 활동을 통해서 익히기는 했어도 아직은 체계가 서지 않은 교수-학습활동을, 처음 하는 사람의 주무기라 할 수 있는 열성만으로 엮어 나갔다. 아이들의 반응은 참으로 좋았다. 아마 처음 보는 젊디젊은 사람의 설명과 이야기들이 그들에게는 신선함과 희망으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뭐 저리 어설픈 소리들을 하고 있는지 하는 조소로 지켜보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훗날 아동들의 심리를 경험으로 터득한 후에 당시의 어린이들의 마음을 ‘기대’ 쪽으로 결론지었다.
지금은 읍 면지역 급당 아동수가 34명이다. 65명이면 두 학급이 되는 셈인데 사실 당시보다 5,6년 전 쯤에는 70명이 넘는 아동들을 한 학급에 수용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 출근 첫날이 스승의 날
솔직히 시간의 흐름이 정신없는 가운데 오전이 지나갔다. 이제 점심시간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교무실로부터의 안내 방송이 들려 왔다. 아동들을 모두 하교시키고 교무실 옆 6학년 1반 교실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모든 것이 역사적일 수밖에 없는 내게 지나치는 일들은 나를 긴장하게 만들고 의아하게 만들기만 하였다. 동 학년 선생님께 의논했으면 그토록 궁금한 마음을 갖지 않아도 될 일을 어리석게도 혼자 궁금해 하면서 지정된 교실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벌써 다른 선생님들은 반이 넘게 와 계셨고, 한 눈에 학부모로 보이는 젊은(그래도 나보다는 다 연상이겠지만) 아주머니들이 음식들을 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그제야 동 학년 김영빈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오늘이 바로 스승의 날입니다.”
라고 하셨다. 고작 4시간의 어설픈 수업을 하고 스승의 날을 맞이한 나는 몹시 황송한 가운데 어쩌면 행운아일 수도 있었다. 학부모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나니, 내 반에 있는 어린이들의 어머니는 애 이름을 들먹이며 잘 지도해 달라는 부탁들을 했다.
사실 나는 그 때 이름만으로 그 아이를 떠올린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그러면서도 천연스럽게 대꾸를 했던 자신이 지금 와 생각하면 느끼한 가운데에서도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요즈음의 스승의 날은 어쩐지 없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에 그 때가 그리워진다. 정성 들인 비빔밥에 역시 정성으로 마련한 반찬들로 막걸리를 반주 삼던 그 때의 회식이 그립기만 한 것이다.
요즈음 나는 우리 직원들에게 스승의 날이 되면 ‘스승의 날’과 실제로는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선생님의 날’은 엄연히 다르다는 얘기를 하곤 한다. 하루 빨리 학부모들이 ‘스승’과 ‘선생님’을 구분할 줄 알게 되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되련만.
○ 출근 첫 날에 받은 첫 봉급(俸給)
다시 회식 장소에 갔더니, 당시 경리를 맡은 장기찬 선생님께서 교무실에 오라고 하셨다. 영문도 모르고 교무실에 가니 봉급을 받아가라고 하셨다. 정말로 내게는 역사적인 일들의 연속이었다.
고작 4시간의 학습 지도 댓가로 스승의 대접을 받았는데, 이제는 봉급을 받으라니 참으로 준비되지 않은 내 머리로는 설명조차 어려운 것이 그 당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2만 9천원에 약간의 끝전이 붙는 액수, 그게 내 첫 월급 액수였다. 그 당시 내 한 달 하숙비가 4천 원이었고, 즐겨 피우는 은하수 담배가 5십 원 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우스운 얘기였지만 내 첫 월급 액수는 교장선생님의 봉급 액수보다도 많았다. 3월부터 교내에서 선생님들이 10만 원 짜리 계를 조직하여 그 곗돈을 제하고 나니 교장선생님의 월급 액수도 나보다 적었던 것이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하숙집에 와서 자리에 누워서 하루 동안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역사적인 일들이 내게 다가 왔었다는 생각만 날 뿐 완전히 붕 뜬 기분으로 잠을 청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오늘날 교직원의 봉급날이 매월 17일인데 당시는 왜 15일이었는가 하면, 1971년 12월부터 매월 15일을 민방공 훈련의 날로 지정하고 꼭 정부 주도로 전국적인 민방공 훈련을 실시하는 바람에 사실상 봉급일과 겹쳐짐으로써 업무의 처리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몇 달 뒤부터는 봉급날이 민방공 훈련에 밀려난 셈이었다. 그래서 17일이 봉급날이 되게 되었고, 그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봉투 밖에 적힌 명세표를 보고 안에 든 돈을 꺼내어 세어보던 그 짜릿함은 이제 영원한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명세표만 주고 돈은 통장으로 바로 입금하더니 이제는 명세표도 나이스로 자기가 확인하고 뽑고, 돈은 통장으로 입금되게 되어버린 것이다.
◎ 코피를 쏟아 보고
혼자 객지에 나와서 완전 미지(未知)일 수밖에 없는 교직생활을 어떻게 영위해야 할까 하는 불안감과 스스로 이제는 완전한 성인이 되었다는 생각에 참으로 묘한 감정이 이는 가운데 날은 밝았고, 다음날의 일과는 어김없이 시작이 되었다.
농촌에서 태어났고, 농사일을 거들면서 자랐고 학업을 위해 진주에서 하숙생활을 한 것을 빼고는 언제나 생활의 무대가 농촌이었기에 당시의 환경이 낯설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 반 아이들과는 쉽사리 친숙할 수 있었고 그만큼 나도 정열을 쏟을 수 있었다.
다섯 시간의 학습지도를 정말로 전력투구했다. 익숙하거나 요령을 전혀 모르는 가운데 오직 열성 하나만으로 하루해를 완전히 보낸 것이다. 그것은 노련한 교사가 볼 때 흡사 불도저가 험한 산을 깎듯이 어쩌면 무모하기만 한 그런 일종의 돌진이었다고 평가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업시간은 그렇게 보냈고, 사무분장이란 걸 받았다. 내게 맡겨진 사무는 도서, 생활, 환경, 문예였다. 지금 생각하면 초임교사에게 너무 많은 일거리를 대책 없이 맡긴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때는 천지 분간조차 못하는 내게 당연한 일거리들로만 다가왔었다. 도대체 다른 선생님들은 어떤 업무 분장으로 어느 만큼의 어떤 종류의 일들을 하시는지 알 턱이 없었기에 더욱 내게는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내게 맡겨진 그 일들은, 그 일들을 맡고 있던 중견 선생님이 전근을 가시고 고스란히 내게 맡겨졌기 때문에 내게는 벅찼다는 얘긴데, 다행히 전임 선생님이 업무를 정말로 알뜰히 기획하고 추진을 해 오셨던 터라 그리 어렵지 않게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
오후에 업무들을 챙겨 보면서 시간이 언제 흘렀는지도 모르게 퇴근 시간이 되었다. 하숙집에 가서는 아직 사라지지 않는 만감(萬感)과 싸우며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고, 닭 우는소리에 잠을 깨어 현실로 돌아와서는 교재 연구를 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려면 사전에 교재를 한 번 챙겨 보아야겠다는 자각에 의한 움직임이었는데 이게 바로 교재연구라는 일이었던 것이다.
식사 할 식당은 따로 구해 두었던 나는 시간에 맞추어서 세수를 하는데 머리가 띵한 느낌과 함께 콧등 부분이 이상하여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보니 불그레한 액체가 손에 묻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코피였다. 물과 섞여 희석이 됨으로써 분홍빛이었지 실은 진홍의, 아이들이 보았다면 당연히 울음을 터뜨릴 그런 피였다.
어린 시절 드문 일이었지만 친구들과 싸움을 하여 코피를 쏟아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좀 자라서부터는 코피라는 것은 모르고 살아 왔었는데 다시 콧구멍 입구를 만져본 손에는 선명한 붉은 색깔의 피가 묻어났다. 솔직히 별로 두렵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참으로 이상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천직으로 삼은 교직의 수행이 그렇게 만만하게 볼일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 주는 참으로 내겐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드는 그런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 날 이후 지금에 이르도록 다시는 겪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 선배 선생님들과 나눈 이야기 도중에 그날의 코피 이야기를 했더니,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 가운데 더러 있었다. 교직 생활을 처음 시작하여 코피를 쏟은 사람, 즉, 나와 같은 사람은 처음부터 열성을 쏟은 사람이고, 나머지는 처음에 상당히 요령을 알고 시작을 했거나, 건성으로 일을 시작한 사람이었다는 참으로 내게만 유리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2008학년도에 남해 남명초등학교에 초임으로 발령 받아온 김아롱 선생님이 2학년 담임을 맡아서 3월 초에 목이 완전히 쉬어버렸다. 그걸 보니 안쓰러운 가운데 코피 쏟고 놀랐던 내 초임시절 생각이 절로 나서 전복죽을 사주면서 얼른 나으라고 격려도 했었다.
다음날 어제와는 다르게 똑똑히 들리는 소리로 그 김아롱 선생님이 예쁘게도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여 흐뭇한 마음이게 했다.
“교장선생님께서 전복죽을 사 주셔서 많이 나았습니다.”
◎ 엄마가 친구가?
6월 초순 어느 날 동도마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아 갔었는데 참으로 황당한 일을 당했었다. 그 집의 6학년짜리 아들이 귀가를 했는지 집에 들어오더니 자기 어머니께 한다는 말이,
“엄마 마, 배 고푸네 마, 밥 주게 마.”
비록 내 반은 아니지만 참으로 버르장머리라고는 전혀 없는 녀석을 보고 지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듯 다른 모든 선생님들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교감선생님께서는 아주 상냥하신 말씀으로,
“배가 많이 고팠구나. 그 놈 참 미남이다 야.”
나는 그만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아이한테 어떤 교육적 나무람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에야 교감선생님께 그 말씀을 드렸더니,
“그건 김 선생님이 남해를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고 일상적으로 그렇게 쓰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적어도 내 반 아이들만이라도 부모님께 존댓말을 쓰도록 지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실제로 강조 지도를 시작하였다. 부모공경은 나라사랑과 함께 거론되는 우리 인성교육의 주요 덕목이기에 더욱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우선 부모님께 존댓말을 쓰는 아동 수를 조사해 보니 아버지께는 대부분의 아동들이 존댓말을 쓰지만 어머니께는 거의 대부분의 아동들이 낮춤말을 쓰고 있었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걸 고쳐야 한다는 생각은 대부분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어머니께 존댓말을 쓰게 되면 어머니께서는 틀림없이 여러분들을 전보다 더 대견해 하시고 사랑해 주시게 된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내가 모두 책임지겠다.”
아이들과는 약속 형식으로 지도를 하고 사나흘 정도는 계속하여 확인 조사를 한다. 그러다 보면 그 결과는 그야말로 괄목할 성과로 다가오게 된다. 학부모들로부터 좋은 선생님, 훌륭한 선생님을 담임으로 맞게 되었다고 작은 난리가 나는 것은 경험상 틀림없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어떤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는 내가 맡은 아이들을 단 한 사람이라도 올바른 길로 인도했다는 성취감 내지 가슴 뿌듯함은 덤으로 남는 것이다.
1979년 창원 이창초등학교에서는 그 일로 담임 잘 만났다고 특별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고, 1983년 사천 서포초등학교에서는 언제나 배타적이기만 하던 어느 학부형이 교실까지 찾아와 앞으로는 학교 일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가기도 했다.
그 밖에도 그 비슷한 얘기는 매년 신학년도 초에 연례행사처럼 듣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실정을 알아보니 부모님께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는 아이들의 수가 옛날 보다 훨씬 많다는데 놀랐다. 그렇다면 선생님들의 특단의 지도가 더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 톰박제(祭) 유감
교직에 첫 발을 내디디고 상당한 시일이 흘렀는데도 아직은 병아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 일들은 자꾸자꾸 일어났다. 그 중의 한 사건이 바로 ‘톰박제’라는 것이었다. 톰박이라는 단어조차 내게는 생소한 것이었는데 국어사전에도 안나오는 그 말의 뿌리부터 찾아보면, ‘톰박’이라는 것은 흔히 ‘목침’이라고 하여 시골 사랑방에서 베고 자는 나무토막 베개를 이르는 말인데 그것이 남해 토박이말로 ‘톰박’이라는 것이고, ‘제’라는 말은 제사를 지낸다는 이야기로 목침을 신성시하여 모셔 놓고 제를 올린다는 어찌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사안이지만 그건 어렵게 이야기했을 때의 일이고, 쉽게 얘기하면 전입해 온 교사가 일종의 전입신고(轉入申告)로 전입 턱을 낸다는 통과의례(通過儀禮)를 말하는 것이었다.
학교 숙직실에 베개로 쓰고 있는(물론 정식 베개도 있고) ‘톰박’을 모셔 놓고, 엄숙한 제관의 지시대로 제를 올리고, 전입교사의 신상이나 소지한 특기, 교직관, 인생관 등등을 차례대로 털어놓게 함으로써 쉽사리 어울려 하나가 되게 한다는 참으로 좋은 도마만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정작 부임한 초임교사가 우둔한 탓으로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시기적으로도 학년이나 학기 초가 아닌 어정쩡한 5월 중순이었고, 교직경력이 전혀 없는 신임교사 둘의 힘으로 어렵지 않겠느냐는 선배 선생님들의 배려 때문에 하루 이틀이 지나는 동안에 실시를 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두 파의 갈등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막상 시일이 지나고 보니, 그런 사실을 누가 이야기를 해 줄 것인가 하는 것조차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나를 비롯하여 나와 함께 발령을 받은 여 선생님이 고깝게 받아들이면 어쩌겠느냐는 생각에 그걸 일종의 총대라고 여겼는지 서로들 안 메려고 발뺌들을 하는 가운데 상당한 시일이 지났던 것이다.
결국 그 총대는 동 학년 선생님이 메게 되었고, 우리(신임교사 둘)는 의논을 한 결과 읍내의 사천집이란 음식점에서 걸게 한 턱을 내기에 이르렀다. 시일이 지나버렸다는 이유와 약간은 번거로운 절차라는 발전적인 인식에 의하여 ‘톰박제’ 본래의 모든 절차들을 생략하고, 교장선생님의 때늦은 환영사와 나의 신고사에 이어 회식을 하고 ‘톰박제’를 끝내게 되었다.
마치고 나서는 이구동성으로 절차의 생략이 잘 되었다는 의견들을 말했고, 다음해부터는 처음부터 모든 번거로운 절차들을 생략한 ‘톰박제’를 지내게 되었다. 말하자면 신고식 문화의 일대 변혁을 일으킨 장본인이 된 셈이다.
이 일은 오늘날도 소위 문턱걸이란 이름으로 학교마다 이어져 오고 있는데 참으로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쇄신하고 빨리 친해지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 거란 생각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없던 노래방까지의 프로그램은 세월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레 달라진 풍습인데 이것은 옛을 더욱 그리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 월말고사 이야기
1970년대 초반에 교직에 들어와서 매월 치는 월말고사 때문에 아동들이 참으로 혹사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햇병아리 주제에 그저 그러는 것인 줄 알 뿐이지 감히 개선의 방안을 연구해 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당시 월말고사를 치고 나면 담당자는 그 결과를 막대그래프로 크게 그려서 교장실 벽에다 게시해 놓아야 하고 교장실을 드나드는 모든 손님들이나 학부모들이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막대가 짧은 학반의 담임교사는 가끔 교장실에 불려 가서는 자존심 크게 상하는 훈계도 들어야 했다.
사실 교과 내용 구성상 문제의 난이도가 동학년도 아닌 다른 학년 집단끼리의 비교는 무모한 일인데도 당시 그런 설명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교장선생님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월말고사 자체가 아동들뿐만 아니라 담임교사들에게까지도 약간은 공포로운 존재로 치부되게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교육과정 운영도 평가 결과를 염두에 둔 일종의 편법(점수 올리기 식)이 동원될 수밖에 없도록 부추겨졌고, 그건 결국 교육과정의 정상 운영에 차질을 자초하는 넌센스를 불러오기도 했던 일이다.
담임의 입장에서 장기결석 아동이 있으면 그 아동은 물론이고 죄를 받아도 크게 받을 소리지만 영 공부와 담 쌓은 아동은 평가 당일에는 제발 결석이라도 하길 은근히 바라게 된다. 그런데 그건 철없는 어른들의 생각이고 철이 꽉 든 아이들은 오히려 그 반대다.
장기결석을 하고 있던 아이들도 어떻게 전해 들었는지 시험 보는 날은 꼭 나타나서 전 교과 평균 20점미만의 성적으로 집계표를 장식하고 자기반 막대를 조금이나마 짧게 만드는데 일익을 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있었다.
1973년 새로 부임한 선배 교사 중에 능력 있고 재미도 있는 분이 있었다.
연구업무를 맡아서는 지난해에 보아온 월말고사의 계획에다 전혀 새로운 내용을 별도 부록으로 보탬으로써 참으로 재미있는 운영이 되게 했고 그로 인해 우리 모두가 재미있어 했던 일이라 소개하고자 한다.
월말고사를 치는 날 아동 평가가 끝이 나면 아동들을 귀가시킨 다음 조그마한 잔치가 교무실에서 벌어진다. 서로들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연신 웃음이 떠나지 않고 마련된 박주 소찬은 그 웃음으로 인해 아주 푸짐한 잔치가 되게 된다.
대개 마련되는 음식은 술과 음료수, 그리고 약간씩의 다과가 전부인데 그 재원은 바로 우리 스스로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마련하는 것인데도 먹고 즐기는 동안은 누가 얼마를 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는 것이다.
나중에 채점과 집계가 끝나고 나면 12개 학급 중 평균치가 제일 높은 반이 1,500원, 2등반이 1,000원의 경비를 장원주라는 이름으로 협찬하게 된다. 그리고, 꼴찌를 차지한 반과 그 차 상위 반은 벌금의 명목으로 각각 1,500원과 1,000원을 협찬하게 된다. 거기에다 교과 평균 80점 이상 아동에게 수여하는 학력장 수상자 1인당 50원씩의 협찬금을 담임이 자기 돈으로 내게 되어 있다.
그런 연유로 채점과 집계가 끝나기 전에는 어느 반이 얼마의 협찬금을 내게 될지 전혀 모르는 일이고 어쩌면 한 푼의 협찬도 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회식 순간에는 서로 잘 먹겠다느니, 잘 먹었다느니 하는 인사를 서로 웃으면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시 고급에 속하는 은하수 담배 한 갑에 50원 하던 시절이니 모이는 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2008학년도 성취도평가결과 공개의 회오리 속에 허위보고의 조장 등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는가 하더니 드디어 2009학년도에는 학력평가는 참 의미보다는 평가결과를 높이기 위한 방향으로 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만에 하나 학습지도가 성적 올리기에 급급하여 진정 소중한 인성교육 등의 측면을 놓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데.....
열린 교육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이제는 그 용어마저 사라졌고, 연전에 경남교육의 대표 브랜드였던 여러 줄 세우기가 사라지는 일도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성취도평가인건 분명한데 언론을 통해 공개한 것은 대단히 높게 나온 성취도는 간 곳이 없고 미 도달 율 2%정도로 시도별로 줄을 세우는 참으로 아니다 싶은 일들만 벌여 오도(誤導)하고 있으니 걱정스럽기만 하다.
◎ 독수리 작전 일화(逸話)
교직 4년차에 접어들어 내가 생각해도 학교생활이 틀이 조금은 잡혀 가고 있는 그런 시기에 일어났던 일이다. 당시 독수리 작전이라고 하는 일이 있었는데 쉽게 풀어 이야기 하면 기관별로 실시하는 일종의 대공 경계 훈련인 셈이었다.
주로 저녁 시간에 진행이 되는 것이 상례였는데 정해진 시간 내에는 당직근무자 수를 늘려서라도 경계를 철저히 해야 했다. 대항군으로 투입되는 방위병 요원들이 은밀하게 잠입해서는 주로 현관의 출입문 등에다가 섬뜩하게도 시뻘건 글씨로 ‘폭파’ 아니면 ‘가스 살포’ 따위의 딱지를 붙여 놓고 가버린다.
그 날의 당직 근무자가 정해진 시간 내에 발견을 해서 신고를 하면 독수리 작전 수행에 적극 협조한 사람이 되지만 혹 시간 안에 발견을 못하거나 신고가 늦으면 근무 태만은 물론 작전 수행에 불성실하게 임했다는 지적과 함께 문제 삼고 하는 그런 훈련이었다.
겨울철로 기억되는 어느 날 하필이면 내가 당직을 할 차례에 독수리 작전이 진행되게 되었다. 작전 시간은 저녁 7시부터 9시로 되어 있어 저녁을 먹고 순찰을 돌았지만 아무런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숙직실에서 좀 쉬고 있는데 평소 잘 아는 동네 청년(방위병)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교장실에 뭘 붙여 놨으니 빨리 떼어서 신고 하십시오.”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 당직 순찰용 손전등을 들고 교장실로 갔다. 찬찬히 살펴보아도 예의 그 딱지는 보이지 않아서 그냥 나오려는데 거울 쪽이 이상하여 손전등을 비춰 보니 거울 중앙부에다 풀을 잔뜩 칠하고 단단히도 붙여 놓았던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수습하면서 얼른 떼려고 시도를 했지만 풀이 워낙 많아서인지 종이가 떨어질 것 같지를 않았다. 내용을 보니, ‘폭파’라는 빨간 글자가 선명하게 나를 위협하고 있었고, 시한이 겨우 5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재빨리 지서에 신고를 하니 담당 순경은 빨리 제거한 것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근처에 있는 교장선생님 용 뿔자를 이용하여 밀어서 가루가 난 종이의 파편들만 손에 쥐고 지서로 향했다. 마침 이웃에 있던 선배랑 동행을 하게 되어 마음은 안정이 되었다.
학교에서 300미터 정도 거리에 있는 지서에 도착을 하니 역시 당직인 듯한 순경과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방위병 한 사람 등 두 명이 지키고 있다가 우리를 맞았다. 내가 주먹을 펴서 보여 주는 폭파 용지의 파편들을 보는 순간 순경은 그만 큰 낭패를 당한 사람마냥 곤란해 하며,
“선생님! 이걸 이렇게 떼어 오시면 어쩝니까? 원 상태대로 갖고 오셔야지요.”
나 또한 어처구니없는 일이어서 대꾸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시한은 얼마 안 남았지요, 떼려니 풀칠이 너무 많이 되어 안 떨어지지요, 그래서 이렇게 밖에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애초 딱지를 붙인 장본인 방위병만 풀칠을 너무 많이 했다고 꾸지람을 듣고 우리는 돌아왔다. 그리고는 밤늦은 시각이지만 교장선생님과 교감 선생님께 전화로 보고를 하고 당직 근무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 아침부터 시작이 되었다. 출근 하신 교장선생님께서 부르셔서 교장실에 갔더니 어젯밤의 일을 소상하게 이야기 하라고 하셨다. 잘 마무리 되었다는 생각에 별 걱정이나 특별한 생각 없이 보고를 드렸다.
그렇지만 끝내 방위병이 먼저 전화를 해 주더라는 이야기는 빼고 말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직하지 못한 내 태도였다. 교장선생님의 칭찬을 들을 때 까지는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다만 조금은 송구한 마음을 끝내 표출하지 못하고 교장실을 나오고 말았다.
둘째 시간은 체육시간이었다.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준비체조를 하고 있는데 당시의 지서장님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들어오고 있었다. 손에는 교장선생님의 명패를 들고------. 그 순간부터 지서장님이 교장실에 가셔서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한 시간 내내 그 생각에 수업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한참 후 지서장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교장선생님께 불려 갔다. 교무실을 거쳐 교장실로 가려는 내게 교감선생님께서 눈을 흘기시며,
“김선생, 니는 인자 죽은 줄 알아라.”
그리고는 야릇한 웃음을 보내셨다. 교장실에 들어가니 교장선생님께서는 자리를 권하시더니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아까 보고할 때 사전에 누가 전화를 해 주더란 말만 안 빼먹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죄송합니다. 교장선생님.”
“그래도 지서장님은 김선생을 칭찬 하데. 젊은 선생님이 시간 안에 처리한다고 용지를 가루로 내어서라도 제거한 정신이 마음에 든다더군.”
이후 나는 내 정직성을 더욱 다듬고자 애썼고, 작전이 있을 때마다 성심을 다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지금은 당직 자체도 달라져서 그런 훈련들이 방향 전환을 했으니 아련한 추억으로나 남을 일이다.
비슷한 시기 해양초등학교에서는 당시의 연세 많으신 최 모 교무 선생님이 장난삼아 가짜 폭파 용지를 만들어 붙였다가 발견한 선생님들이 신고를 해 버리는 바람에 군부대에서 역추적이 이루어지고 하여 소란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 딱하기만 했던 탁구지도
발령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장 선생님은 내게 탁구 지도를 명령하셨다. 그런데 나는 흔히 말하는 ‘탁구의 탁은 고사하고 ㅌ자’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 때 까지는 탁구를 쳐 보는 것은 고사하고 배트조차 잡아 보지 못한 참으로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교장 선생님께 어렵다는 말씀은 드렸다. 그러나, 그런다고 그만 두라고 했다면 아마 그 분은 남해 삼 수의 대열에 끼지 못하셨을 것이다. 당시는 막내둥이 젊은 교사로서 운동 지도를 못하겠다는 말은 어쩌면 학교장에게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아주 오만 불손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던 일이었다.
결국은 선수 다섯 명을 선발하여 연습을 시작했다. 학교에 탁구대는 하나밖에 없었고 탁구 배트를 만져 보는 것은 아이들도 그렇고, 나도 그랬지만 처음이었다. 지도자나 선수 모두 백지 상태로 출발을 했다. 나는 몹시 건방지게도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 억지로 맡은 것이라는 생각에 서적을 통한 지도 방법을 연구를 한다든가, 유명한 지도자를 만나서 지도 방법을 배우겠다는 생각은 갖지 못했다.
지도 현장에는 사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다. 가끔씩 동료 선생님들이 들르기는 했지만 그저 한 게임 즐기려는 목적으로 왔다가는 퇴근 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가버리는 야속한 분들만 있었다.
지도 훈련의 방법을 모르고 나름대로 열심히는 했다. 아이 하나와 나는 마주 서서 그저 공을 주고받는 것이 지도의 전부였다. 그러면서도 전혀 지도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누군가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실력들이 늘기는 했다. 제일 많이, 제일 빠르게 느는 것은 당연히 지도자인 나였다. 아이들 넷을 상대하다 보니 탁구에 소비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탓이었다.
이렇게 석 달 정도의 연습을 하고 여름 방학 때 대회에 참가하였다. 탁구는 당시 시설 등을 이유로 많은 학교가 참가하지 않았었다. 모두 8개 팀이 참가를 했다. 이론상 세 번만 이기면 우승인 셈이다.
첫 경기는 지족 국민학교와의 시합이었는데 지도자는 교대 동기인 문극성 선생이었고, 우리와 백중세였다. 지도 과정 이야기를 들으니 나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지도자의 역량이 비슷하고 지도 과정이 비슷해서인지 실력 또한 비슷했다. 화려하거나 뛰어난 묘기는 양 팀 모두 찾아볼 수 없었고 그저 쫓고 쫓기는 스릴만 계속되는 가운데 경기는 이어졌고 결국은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우리 팀이 이겼다. 실력적으로 너무 남부끄러운 경기였는지라 승리의 환희도 맛보지 못한 채 다음 경기를 살펴야 했다.
다음 경기는 준결승, 상덕 국민학교와의 일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우리 선수들은 정말로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한 세트도 이겨 보지 못하고 완패를 당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상덕은 여수지방까지 전지훈련을 다녀왔을 만큼 투자도 많았고, 훗날 군 대표팀으로 소년체전 도 대표를 꿈꾸는 그런 팀이었다.
젊은 패기와 의욕이 모두 쏟아 부어졌어도 소양 부족으로 졌을 경기였다는 결론 때문인지 분함도, 억울함도 내겐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심정이었다. 다만 아이들한테는 미안했다. 패하고 풀이 죽은 그들에겐 지금 이 순간 무슨 얘기로도 위로가 되지 못함을 알기에 점심을 먹으면서 먼 훗날 나의 마음을 알 거라는 얘기를 들려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먼 훗날 그들이 알기는 무엇을 알 거란 말인가? 운동 지도에는 애당초 뜻이 없는 선생이었다는 사실이나 알아주면 그저 다행스러울 뿐이겠지……….
체육대회가 끝이 난 후 한참이 지난 어느 날 학교장 회의에 다녀오신 교장선생님께서 회의 전달을 하다 말고 특별히 나를 부르셨다. 하시는 말씀인즉,
“김 선생님 고맙습니다. 김 선생님 덕분에 과장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어요.”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는 학무과장 쯤 되면 회의석상에서 공개적으로 일선학교의 교장들을 불러 세우고 나무라고 그랬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우리 교장선생님은 단체전(탁구)4강에 진입한 학교라서 오히려 칭찬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생각하면 웃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인 데다가 칭찬이 기쁜 것이 아니라 모욕(?)을 당하지 않으신 점이 더 흡족하셨던 우리 교장선생님의 넉넉한 배포를 적어도 나만은 읽을 수 있었던 일이었다. 명색이 남해 삼 수중의 한 사람인데…….
2009년인 지금, 당시의 탁구선수들 중 김성룡이는 남해고등학교 국어교사요, 김창렬이는 경남개발의 중견 간부사원이다. 이원석이는 고향 지키며 건실하게 살아가는 모범 청년이어서 자랑스럽다.
다만 두 사람 김진갑이와 김창표만 유명을 달리하여 안타까운 마음이다.
◎ 봐라 임마. 누가 형님인고?
도마 초등에 첫 발령을 받고 부임하여 1년 뒤에 친구 김봉옥(교대 동기) 선생이 면내 갈화 국민학교에서 근무하다가 도마로 전입해 왔다. 도마는 그 친구한테는 모교였고 그네 집은 학구 내 이어리 마을에 있었다.
그 친구가 전입해 옴으로 해서 객지 생활 중인 내게는 참으로 큰 활력소가 되었고 학교생활은 더 한층 즐거워졌다. 우선 마음이 맞으니 젊은 교사로서 교내 외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힘을 써서 해야 하는) 은 두 막내가 곧 잘 해결했다. 즐겨 하는 일이니 힘 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연 둘이서 자주 어울리게 되었고, 만사 다 양보와 이해를 바탕으로 잘 진행이 되는 편인데 서로 형임을 내세우는 과정에서는 쉽사리 양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1949년(己丑年) 생 소띠인데 출생신고가 2년이나 늦어 1951년 생으로 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봉옥이 그 친구는 1950년(庚寅年) 생 범띠였던 것이다. 내 주장은 먼저 났으니 내가 형이란 얘기고, 친구는 우리나라가 법치국가이니 법(주민등록증)대로 하자는 주장이니 늘 팽팽히 맞서 결말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 × ×
학교 일과가 끝이 나면 둘은 곧잘 마을로 어울려 다녔다. 바닷가로, 포도밭으로, 인근의 절로-----. 그러다 보면 자주 동네 어른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럴 때마다 동네 어른들은 인사를 두 번 하셔야 했다. 우리가 먼저 인사를 하고 나면 꼭 남해 특유의 사투리로 다음과 같이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오데 가십니꺼이더?”
이것은 자기 자녀가 다니는 학교 선생님인 내게 하는 인사고,
“오데 가는고?”
이것은 학교 선생님이기는 해도 마을 아무개 아들인 친구 김봉옥 선생께 하는 인사다. 그리고, 마을 어른이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고 나면 나는 꼭 친구에게 염장 지를 소리 한마디를 해 주곤 했다.
“봐라 임마, 누가 형님인고.”
그 친구는 내가 결혼 할 때 우인으로 참석을 했고, 그가 결혼을 할 때 나는 우인대표로 결혼식 사회를 맡았었다. 지금도 그 친구 부인과 내 집사람과 함께 자주는 아니지만 식사도 하곤 하는 그런 사이로 변함없는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가장 최근에 꺼내 본 내 결혼사진에 12명의 우인들 중 바로 내 옆에 서 있는 이가 바로 김봉옥 그 친구다.
사실 봉옥이 그 친구와의 일은 늘 웃고 말면 그만인 일이었으나 교대 한 해 선배들 중 50년생들이 나를 동생인 줄 알 때는 많이 난감한 일이었다.
◎ 격세지감(隔世之感)의 일들
○ 도시락 점검
세월은 물처럼 흐른다고들 했던가. 세월의 흐름은 변화를 의식하게 하는 것인데 그것이 외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더욱 절실하게 피부에 와 닿는 것이다. 삼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쓸 데 없는 짓을 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점심시간마다 어린이들의 도시락을 점검하는 웃지 못 할 일이 있었다.
도시락 점검이란 아동들이 어느 정도의 혼식 도시락을 마련했는가 하는 점검인데 당시 65명의 학급 인구를 감안하면 50% 미만의 혼식자(混食者)를 다 가려내려면 교사는 점심을 먹을 시간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내가 있던 도마 국민학교는 아동들 전원이 90% 이상의 보리밥을 싸 오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에 지금사 이야기지만 도시락 점검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고, 검열에 대비하는 장부의 정리에만 급급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 이상의 문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안 보고 장부만으로 점검을 한다 해도 틀릴 일은 없지만 자연 일의 처리가 안일해지고 형편에 따라서는 일주일 분, 한 달 분 이상이 미뤄졌다가 나중에야 한꺼번에 기록을 한다고 법석을 떨었던 기억도 새롭다. 교육청 장학사님들이 장학지도를 나오면 그 도시락 점검부의 동그라미 수를 일일이 세며 통계수치의 맞고 틀림을 맞추어보니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그 통계만은 맞춰 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는 하지 않고 배길 용빼는 재주가 없었음을 아울러 밝혀 둔다.
그런 일을 왜 해야 했던가는 다소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70년대 초반 당시의 우리나라 식량 사정은 잡곡 등을 포함한 전체적으로는 모자라지 않는데 쌀은 부족하여 해마다 외미(外米)를 도입해야 했다. 정부에서 내세우는 혼․분식(混粉食) 장려 정책에 온 국민이 따라만 준다면 외미 도입은 그 양을 훨씬 줄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전혀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희망적인 사안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사고로는 이해가 안 갈 일이기는 하지만 일선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제자들의 도시락을 검사 명목으로 살펴야 하는 일이 필수적이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70년대가 다 가기 전에 어느 여 장관에 의하여 실시하지 않도록 조치가 취해졌고, 지금은 먼 옛날의 전설 같은 얘기가 되고 말았다. 그 여 장관의 취임 인터뷰에서
“앞으로 도시락 점검과 같은 행정은 절대로 펴지 않겠다.”
라는 말은 정녕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다.
초등학교가 학교급식을 전면 실시한지 오래된 오늘날은 추억의 한 장으로 접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겠지만 가끔은 점심시간이면 시골 어린이들 도시락 특유의 군침 도는 냄새가 그리워질 때도 있다.
○ 시험점수가 학력의 전부
정확하지는 않지만 80년대까지 학교마다 학력 우수 기(優秀 旗)란 것이 있었다. 매월 말에 실시하던 소위 월말고사 결과 평균점수가 가장 높은 학급에 주어지는 작고 앙증맞은 깃발이었는데 이것을 획득하기 위한 교사들의 노력은 실로 처절했다. 체력이 달려서 포기했다는 어느 노(老)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기억이 있으니 학력을 높이기 위한 교사들의 노력이 얼마만한 것이었는가 하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당시의 시험 문제는 오직 주관식 조금에 대부분 4지선다의 객관식 문제만 있었다. 기능평가란 것도 한참 후에 생겨난 것이고......
참으로 스스로의 치부(恥部)를 드러내는 일만 같아서 얘기하기가 쑥스러운 거지만 아동들에게 컨닝 하는 방법까지 은연중에 가르친 선생님이 있었으니 과열경쟁의 부작용은 오늘날 생각해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까지 한 것이다.
1975,6년에는 정말로 부끄러운 경남 초등교육계의 사건이 있었는데, 교육 위정자들의 무지와 지나치게 짧은 소견이 빚은,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실로 충격적인 사건인 것이다.
학교끼리의 경쟁을 유발하기 위하여 일제히 치르는 시험 감독을 학교를 바꾸어서 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학교와 학교를 서로 맞바꾼 감독은 위에서 믿을 수 없는 바였던지 지그재그 식으로 남의 학교에 가서 시험 감독을 하게 되었고 학교를 지키는 교장 선생님들은 감독 선생님들의 비위를 맞추는 등 수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노력이 동원되었었다.
시험 전 날 자기반의 평균점수를 높이기 위해 우수아동과 못하는 아동을 짝이 되게 하여 합계점수가 낮은 조는 혼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등 참으로 부작용이 많았던, 그리고, 진정 부끄러운 일이었다.
학력의 개념이 오늘날처럼 진화(進化)되기 전의 일이었기에 그때는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을 한다면 너무 너그러운 배려가 아닐까? 학력이 높아서 좋지 않을 것은 없지만 그로 인해 인성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정녕 안 될 일이다.
아무튼 90년대 후반의 열린 학습 시대와 견주어도, 오늘날의 여러 줄 세우기 교육과 비교를 해 봐도 영 다른 방향이어서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뭔가 찜찜함을 느끼게 하는 추억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 수영대회에서 있었던 일
○ 수신제(水神祭)에 얽힌 이야기
70년대 중반 남해 읍 주변의 오동배기란 곳에 있는 저수지에서는 곧잘 수영대회가 열렸었다. 그 밖에도 선소라는 바닷가나 이어리 소재 저수지등에서 자주 수영대회가 열리곤 했는데 어느 해 오동배기 저수지에서의 수영대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회 중에 혹시나 익사사고라도 나면 그야말로 큰일이기 때문에 교육청에서는 익사사고를 막아 달라고 참가자 일동에게 신신당부를 하였음은 물론 일종의 수신제(水神祭)까지 지내기에 이르렀다. 이는 대회를 주관하는 교육청 당국의 노심초사하는 마음 씀을 읽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교육장님의 절하는 순서에 이르렀을 때 어느 선생님이 그만 멍석을 힘껏 끌어 당겨 버리는 바람에 수박, 돼지 머리 등 제물로 차렸던 음식들이 고르지 못한 바닥에 굴러가게 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그야말로 수신제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는데 장본인인 선생님의 말씀인즉,
“소위 교육을 한다쿠넌 집단이 아아덜 보는 앞에서 미신을 교육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무리 선생님의 정신에 문제가 있었다 해도 이 일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가 모호한 것이었다.
지금의 회고로도 당시의 수신 제(水神祭) 지내는 일은 나쁘게만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정성 쏟는 일일진대 오히려 그 일을 미신으로 치부해 버리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 물이 짭아서(짜서)예
남해군 고현 초등학교에 재일 교포 어린이가 전학을 왔다. 그 아이는 고향을 찾아 돌아오는 부모님을 따라 왔고,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일본으로 갔던 아이였었다.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치면 군 대표쯤 되는 수영선수였다고 한다.
당시의 지도교사는 필자의 교대 동기 정현태 선생이었는데 학교 옆 저수지에서 열심히 연습을 시켰다. 지도교사가 수영에 달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어린이는 실제로 다른 아이들의 수영 코치 역할까지 하며 연습을 알차게 이끌었다고 정현태 교사는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고,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 자랑이란 사실 객관성을 갖춘 자랑이기도 했다. 자유형, 배영, 접영 등 여러 영법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아동인데다가 특히 자유형과 접영은 지난해의 도 기록을 능가하는 그야말로 유망주였었다. 그쯤 되었으니 오직 실적 위주였던 당시의 체육 행정을 생각해 보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진정 행운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자유형 출발에 앞서 몸에 물을 적시는 등 준비를 하면서는 오만상을 다 찡그리더니 출발신호와 함께 맨 앞에 헤엄을 치던 그 어린이가 갑자기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정 선생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황급히 그 아동을 불러 주고받는 대화는 정녕 수준 높은 개그였다.
“잘 하더마넌 와 임마 되돌아 나오노?”
“물이 짭아서(짜서) 도저히 몬 하겄심니더.”
그리하여 예약해 놓았던 자유형 금메달을 놓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필이면 수영대회 장소가 남해읍 선소 바닷가였던 것이다.
하동 사람 정현태 선생은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파안대소와 함께 꼭 끝에 가서는 실소를 금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정현태 선생이 지금은 양산 오봉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다.
남해 서면에 있는 스포츠파크 수영장에 현장학습을 가고, 지역마다 학생 수영장이 갖추어져 있는 오늘날에 생각하면 역시 웃고 말 일이다.
◎ 참으로 훌륭한 교육장님의 이야기
○ 그 하나, 왜 훌륭하다고 하는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사회적 신분이 높아질수록 점잖아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신분에 차이가 좀 많이 나는 사람하고는 언제나 은근히 거리를 두고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70년대 중반쯤의 일이다.
당시 남해 교육청 고정훈 교육장님은 적어도 남해 교육을 책임지신 이른바 남해교육의 총수였으니 높다면 정말로 엄청 높은 분이었다. 그런 분이 매주 토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남해 읍(교육청이 있는 곳)에서 고현면 도산부락(선대부터 살던 자택이 있는 곳)까지 10㎞ 가까운 길을 걸어서 퇴근하셨다.
출․퇴근에 이용할 수 있는 관용차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꼭 그러시는 데는 스스로의 건강을 챙기시는 것을 비롯하여 자연을 벗 삼는 향토 사랑의 실천 등 그 이유가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토요일 오후 퇴근시간 이후에도 기사에게 자유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참으로 존경스런 생각이요 이야기였다.
천도교 남해 교구의 책임을 맡기도 했던 K교육장님이 사시던 마을 입구에 효자비 하나가 서 있다. 그 주인공이 바로 K교육장님의 선고(先考)라고 했다. 그 사실만해도 님의 고매하신 인품은 조상 대대로 뿌리 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효자비 앞을 지나서 비스듬한 경사의 산길을 2㎞ 정도 더 가야 자택이 있었다. 그런데, 출․퇴근 시 이용하는 관용차가 절대로 효자비 앞을 지나지 못하게 하셨다. 불편한 길을 걷는 한이 있어도 선친을 모신 효자비 앞에 먼지를 내고 지나서는 안 된다는 참으로 우리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주신 일이기도 했다.
고 교육장님은 남해 출신으로 중등교육에 종사하시면서 고매하신 인격과 열성으로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길렀는데 그 제자들의 열망으로 남해교육의 총수가 되셨다는 이야기가 당시 남해 교육계에는 자랑스런 화제로 거론되었었다.
그리고, 공직을 마친 후에는 고매하신 인품과 덕망으로 우리나라 천도교의 최고 지도자인 교령을 역임하셨다.
출세를 위해 권모술수들이 난무하는 세태에 비추어 얼마나 인간적인 이야기이며 존경스런 인물이셨던가?
○ 그 두울, 그 교육장님의 봉변
그런 교육장님이 정녕 웃고 말아야 할 봉변을 당하셨다.
70년대 중반의 어느 여름 방학 중에 당시 벽지학교인 남면 가천국민학교를 장소로 하여 관내 교감 연수회가 1박 2일간 열렸었다. 남해 섬의 끝자락 가천은 참으로 절경인 곳이다. 충분히 연수회 장소로 적합한 곳이었고, 밤에는 저절로 곳곳에서 자연스런 토론들이 이루어졌고, 그 것은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이어졌다. 자정쯤에 교감선생님들은 대부분 취침에 들어갔고, 이야기가 남은 분들만 이야기들을 계속하고 있었다.
교육장님은 자정을 약간 넘긴 시각에 연수 장소에 도착을 하셨다. 낮 동안 외지로 출장을 가셨다가 늦게야 도착하신 셈인데 여느 교육장님들이었다면 틀림없이 다음날에나 들르시지 밤중에 오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교감들을 연수하게 해 놓고 관심을 크게 가지셨던 K교육장님은 그 시각에 연수 장소에 꼭 나타나셔야 직성이 풀리셨던 것이다.
봉변은 새벽녘에 일어났다. 어제 저녁에 도착하셨을 때에는 교감들이 모두 취침을 하는 바람에 못 만나셔서 불편한 가운데 잠을 청하셨다가 일찍 잠을 깨신 교육장님은 교감들의 불편을 덜어준다는 생각으로 남 먼저 세수를 하셨다. 말이 연수장이지 당시의 시대상이나 벽지학교 여건으로 세면장이 변변할 리 없었다. 아동용 급수장에서 세면대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수도꼭지에 의존하여 어렵게 세수를 하고 계시던 교육장님에게 갑자기 뒷통수를 갈기는 교감이 있었다.
“자석, 늙은 기 잠도 없고나.”
갑자기 당한 일격에 아픈 것은 고사하고라도 얼마나 놀라셨을까? 그런데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하시는 말씀 또한 존경스럽기 짝이 없는 말씀이셨다.
“예, 좀 일찍 일어났습니다.”
당연히 크게 놀란 것은 교육장님의 뒷통수를 친 교감이었다. 동료 교감으로 오인한 데서 온 명백한 실수였지만 참으로 얼마나 황당했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둘만 있는 세면장에서, 그것도 꼭두새벽에 있었던 일이라 어쩌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말 이야기였는데 그걸 자랑삼아 얘기했는지 연수회가 끝나기도 전에 연수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연수회가 끝나고 나서는 거짓말 좀 보태면 남해 교육가족은 모두 알게 되었었다.
◎ 시월유신 홍보활동
어떤 종류의 사건이든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면 하나의 역사로 자리 잡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이 살다 보면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울며 겨자 먹기」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허다한 법이다.
이제 당시에는 충분한 상황적 당위성으로 포장한 채 출발했던 시월유신도 되새겨 보면 고소를 금하지 못하는 일에 속하고 만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참으로 온 국민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고, 교사들까지 홍보활동에 내몰려도 아무런 항변이 있을 수 없었던 당시의 일들이 추억으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한 과정이었다고 하면 조금은 이해가 가는 설명이 되겠지만 그래 가지고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이 얼마만큼 이해를 할 수 있을까도 생각해 보게 한다.
오직 장기집권을 노리는 대통령과 K당의 치밀한 각본에 녹을 먹고사는 공무원은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무원들에게 지워진 멍에는 바로 홍보활동을 펴는 일이었다. 자료를 들고 주로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담당부락에 출장 아닌 출장을 나가 주민들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홍본지 설득인지 분간하기 애매한 일을 하고 다녀야 했다.
행정직 공무원은 이 일을 주도적으로 해야 했고, 교사들까지도 담당부락이 배정되었고 배정된 부락에 손전등(필자도 그 때 상당히 고급스러운 손전등 하나를 스스로의 돈으로 장만해야 했다.)을 들고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밤 자갈길을 걸어서 가야 했고, 마치고 나면 밤 10시가 넘어서야 터벅터벅 걸어서 와야 했다. 그러면서도 우린 한마디 불평도 할 수 없었다. 뭘 몰라서 그랬다면 좀 덜 억울하기나 했을 텐데…….
나도 예외일 수 없었다. 내가 맡은 부락은 고현면 도산 부락이었다. 저녁을 먹고 마을회관에 도착하면 마을 이장님이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마침 이장님이 학부모였는데 참으로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셨다. 매일 밤 몇 집을 다니면서 설득공작(?)을 확실하게 펼쳤는지 마을 이장의 확인 도장을 받아야 했는데 당시의 도산 이장님은,
“선생님, 종오(종이)부터 이리 주소. 도장 찍어 디리낑깨내 내용은 선생님이 알아서 하이소.”
그리고는 날인부터 하고, 저녁시간을 한가하게 보내려고 마을회관에 나온 사람들에게 나를 대신하여 유인물을 읽어주고 이야기도 하곤 했다. 그리고 나와 일대일로 얘기를 하던 중에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이런 일로 우째서 선생님들이 해야 할낍니꺼? 이거넌 먼가 많이 잘못된 깁니더.”
매일 아침이면 어젯밤의 성과를 서무 담당 교사가 집계 내어 교육청으로 보고를 해야 했다. 당시 서무를 맡으셨던 조정의 선생님은 아침에 잉크를 가득 넣어 왔는데 보고서를 꾸미고 나면 잉크가 모자란다고 하셨던 기억이 새롭다.
◎ 「식목일」인지「식모길」인지
1970년대도 후반에 접어들었을 무렵, 당시에는 학교마다 비중 큰 연중행사의 하나로 학예발표회를 꼽았었다. 대개 글짓기, 음악, 미술 등의 분야로 나누되 글짓기만 해도 저학년, 고학년으로 다시 나누고, 거기서 다시 운문부와 산문부로 나누었다.
학년초의 바쁜 일들이 끝나고 나면 학예발표회에 관한 공문이 오게 되는데 학교마다 난리가 나는 건 그 때 부터이다. 분야별로 담당 지도교사가 배정이 되고 방과 후에는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지도에 열을 올렸다. 내가 있던 도마초등학교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교사 초년병인 나도 글짓기 지도를 하느라고 애를 썼었으니까……. 그뿐 아니라 규모가 작은 학교에서는 한 교사가 두 세 개씩의 분야를 맡아 지도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미술 디자인 분야의 지도를 맡은 박 선생님의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전근 와서 실태도 정확히 모르는 가운데 아이들의 추천을 받아서 고학년 디자인 출전 아동을 선정하여 지도를 하게 되었다. 시골 아이 답지 않게 싹싹하고 지도 내용을 잘 소화한다고 인정을 하고 어느 정도는 입상을 점치면서 지도에 열을 올렸다.
대회 당일이었다. 남해 국민학교를 장소로 하여 열리는 종합 학예발표회 남해군 예선대회에 우리 학교도 대군을 이끌고 출전을 했다. 당시 우리학교는 군내 1,2위는 아니라도 4,5위를 다투는 학예발표회 성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학교를 지킬 인원만 남고 전 교사가 아동 인솔 겸 견학 목적으로 대회 장소까지 무급 출장을 했다.
개회식에 이어 아동들을 해당 장소에 입실시키고 나면 교사들은 별로 할 일이 없게 마련이었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학교 구내에서 환담을 즐기기도 하고, 고 새를 못 참아서 시가지에 나가 간단히 한 잔 꺾고 들어오는 축들도 있었다.
아동들을 들여보낸 지 한 시간쯤 지났던가? 박 선생님과 나는 경연 장소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차례로 돌아보니 아동들은 나름대로 솜씨들을 뽐내며 열심히 작품을 만들거나 경연에 열을 올리고들 있었다.
디자인부 교실 옆을 지나면서 칠판을 보니 ‘푸른 산 가꾸기’ 라는 주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나름대로 꾸미기를 하느라고 여념이 없는 듯 했다.
박 선생님과 나는 마침 창에서 좀 떨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작품을 만들고 있는 우리학교 선수를 살펴볼 수 있었다.
정녕 눈앞이 캄캄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오늘의 주인공 도마 국민학교 디자인 선수 정 군의 작품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는데, 「식목일」이라고 써야 할 부분에「식모길」이라는 글을 써놓고 있었던 것이다. 식모가 지켜야 할 도리라도 되면 모를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그 박 선생님이 남해 고현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근무를 하시다가 2008년 2월 29일자로 정년퇴임을 하셨다. 제자들을 바른 길로만 인도하시려고 애쓰시던 모습과 넉넉한 미소로 동료와 후배들을 대하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 옛날의 정리를 생각하며 정년 축하 시화 한 점을 만들어 증정을 해 드렸다.
◎ 고무줄 퇴근 시간
다섯 시 퇴근 시간을 정확히 지키다 못해 탄력적 근무제가 도입되고, 한 술 더 떠서 자율 출퇴근제가 도입된 요즈음의 분위기와 당시의 분위기는 서로가 서로의 상황 이해가 어려운 것이니 설명을 하자면 당시는 학교장이나 교감이 퇴근을 하지 않으면 교사는 아예 퇴근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퇴근을 한 교사가 있으면, 교장선생님은 웃는 얼굴로 허락을 해 놓고도 그 교사가 현관을 나서기가 무섭게 거리낌 없이
“교장이 퇴근을 안 했는데 건방지게…….”
라고 다른 직원들이 다 듣도록 얘기를 함으로써 간작은 교사들이 감히 퇴근을 생각도 못하게 만들었다. (물론, 모든 교장선생님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런 세태는 분위기 상 숱한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었고, 겨울철에는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한 지경이었다.
나무를 때는 난로는 벌겋게 닳도록 연료를 넣어 교무실 안은 더위를 느낄 정도로 열기를 내뿜고, 주로 교장 선생님의 교직 무용담(?)을 들으면서 시간을 죽여야 했다. 그 무용담들도 처음 들을 때에는 재미가 있었다. ‘好歌도 唱唱 不樂’이라는 말처럼 귀에 못이라도 박힐 지경으로 자주 듣다 보면 지겹기만 한 시간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며칠이 지나면 재방송되는 무용담은 상당 부분 수정이 가해져 있었다. ‘過去之事는 如明鏡’이라 했던 명심보감의 글귀를 생각하면 미래의 계획도 아닌 그야말로 과거지사가 수시 변동될 수 있는 참으로 희한한 세상을 체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요지경과도 같았다.
어쩌다 교장선생님이 바쁘셔서 먼저 퇴근을 했던지, 아니면 출장이라도 가신 날은 교사들이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되는 날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그건 정녕 천만의 말씀이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이야기다. 당연히 다음은 교감선생님의 차례.
“우리 교장선생님은 다 좋은데 퇴근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이 흠이야. 지 때문에 …….”
교장선생님의 퇴근 시간이 늦은 것을 화제로 삼아 비난을 하면서 스스로 교사들의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의 개선은 참으로 암담한 가운데 시간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러면 당시의 퇴근시간은 언제였는가? 말 할 것도 없이 교장, 교감 선생님이 퇴근하는 그 시각이 교사들의 퇴근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바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는 야근을 제외하면 다섯 시 정시 퇴근이 보편화된 현실은 당시 생각하면 꼭 꿈속의 나라요, 이상향이라고 해도 지나친 얘기가 아닐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다섯 시 이후의 근무에 대해서는 초과근무 수당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 아닌가?
◎ 고추 먹고 맴맴
1972년의 어느 체육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질서운동을 하는데 뒤로 도는 동작이 쉽게 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되풀이 연습을 시키는데도 제대로 되지 않아 고심을 하고 있는데 교무실에서 방송을 하였다.
“5학년 김형진 선생님, 교육청에서 전화 왔습니다.”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수업시간 중에 방송까지 하는가 하는 투덜거림은 안으로만 삭이고 교무실로 전화를 받으러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우기 전에 반장을 불러서는,
“내가 올 때까지 뒤로 돌아 연습을 계속하고 있어!”
그리고는 교무실로 갔다. 교육청 장학사의 전화를 받고 몇 가지 응답을 하느라고 시간이 좀 걸렸다. 겨우 일을 마치고 운동장으로 돌아와 보니 거의 전부가 비틀거리고들 있었다.
웬일인가 했더니 ‘계속해서 뒤로 돌기’를 하는 것은 ‘고추 먹고 맴 맴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시킨 선생도 잘못이었지만 선생님이 시킨다고 고집스럽게 계속하여 아이들을 어지럽게 만든 반장도 참 고지식한 일면이 있는 녀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일종의 교육 실패담에 속한다. 그렇지만 내게는 좋은 가르침이 되기도 했던 일이었다. 이후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는 심정으로 어쩌면 뻔한 사안들도 챙겨보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교육은 언제나 교학(敎學)이 공존(共存)하는 성(聖)스러운 길인 것이다.
훗날(2001년도) 그때의 그 반장 김창렬 군이 카페 ‘그리운 그 때 그 시절’자료실에서 이 글을 읽고 남긴 글을 소개해 본다.
<<카페 자료실에서 선생님의 과거 행적(?)을 낱낱이 알게 되었고,
그 때 그 시절 탁구 선수중의 한명이 저였으며, 고지식하게 "뒤로돌아"를
쉬지 않고 무리하게 감행한 장본인도 제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김창렬>
◎ 수학여행 이야기
1973년 늦은 가을, 생애 첫 수학여행 인솔을 하게 되었다. 6학년이 두 반이어서 동학년이던 정대행 선생님과 함께 하여 모든 어려운 것은 선배한테 맡기거나 자문을 구하고 어쩌면 수월하게 여행을 추진할 수 있었다.
목적지는 구례 화엄사로 하고 학교에서 서상까지는 버스 대절, 서상에서 여수까지는 정기여객선으로, 여수에서 순천, 순천에서 구례까지는 열차를 이용하고 구례에서는 다시 시간버스를 이용하여 화엄사까지 가는 코스로 잡았다. 화엄사에서 1박을 하고, 여행을 계속하여 돌아오는 것은 거꾸로 순천에서 1박을 하는 계획이었다.
첫날 저녁, 화엄사 입구에 있는 화엄장이라는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그 때부터 지도교사는 정말로 난감한 일들이 자꾸자꾸 일어나는 바람에 화도 나고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때마침 다른 지역에서 수학여행 온 아이들과의 싸움도 있었고, 떠들고 몰려다니는 탓으로 함께 투숙한 어른들이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은 그 때 그 때 처리가 되고 해결이 가능한데 문제는 잠을 자려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중에는 자기들끼리 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대중가요는 유행가라는 이름으로 절대 부를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있던 시대라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노래는 총 동원이 되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한 번 더 부르고 여하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아마도 밤을 꼬박 새운 축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음날 화엄사 구경은 잘들 했다. 가파른 길도 잘 따라 다녔고, 나름대로 열심히 메모도 잘들 했다. 여가 활동 시간에는 피구를 했는데 그 활동 역시도 잠이 모자라 곤란해 하는 기색들은 별로 볼 수 없었다.
두 번째 숙박은 순천에서 했다. 낮에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난 아이들은 저녁을 먹고 또 어젯밤처럼 노래를 부를 줄 알았는데 하품들을 하고 방별로 이야기들을 나누더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찍들 잠자리에 들었다.
밤 11시쯤 되어서 손전등을 들고 각 방 순찰을 했다. 방마다 한마디로 볼만했다. 잠꼬대는 기본이고, 남의 다리 사이에 끼어 호흡이 곤란한 가운데도 잘도 자는 녀석.........
그런데, 어느 방에 손전등을 비춘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남학생만 자고 있어야할 방에 여학생 한 명이 함께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얼른 안아다가 여학생 방에 옮겨 주었다. 그리고는 평생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아마 자다가 화장실에 다녀와서 구조가 똑 같은 여관방 문 때문에 엉뚱한 방에 들어가서 잠이 든 것이리라.
이 이야기는 70년대 말 새교실 잡지의 ‘교단 아라비안나이트’에 투고하여 게재되었었고, 세월이 흘러 2004년 가을에 그들이 동창회를 가진 창녕 부곡에서 이야기 했더니 그게 누구냐고 자꾸 묻는 바람에 입장이 곤란했던 적도 있었다. 분명히 본인도 모르고 넘어간 일이다.
◎ 무서움 증(症) 허상(虛像)
사람들은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걷거나, 인적 드문 깊은 숲 속 길을 혼자 걸을 때면 무서움을 느끼게 된다. 사실 나도 무서움이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소개하는 한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는 무서움이란 스스로의 생각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무서움의 강도가 훨씬 줄어들었다.
어느 해 가을날, 함께 근무하는 친구 김봉옥 선생 집에 놀러 갔다. 친구네가 있는 이어리라는 마을은 학교와 2km 정도 떨어진 거리였는데 도로 양쪽에는 코스모스가 한창 만개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길이었다. 친구네와 학교의 거의 가운데쯤의 지점에 다다랐을 무렵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파출소(당시의 지서) 차석(次席)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승용차와 정면충돌하여 현장에서 즉사했던 교통사고의 현장이었다. 거적으로 덮어둔 시신과 도로 가운데까지 흥건하게 흘러내린 핏자국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죽은 그 차석은 한 자리에서 술도 나누었던 좀은 가까운 사이였었다.
현장 검증을 하는 그 자리를 벗어나서 친구네에 닿았고, 낮에는 가을걷이도 거들고 저녁밥을 먹고도 한참을 놀다가 집에 가려고 일어섰다. 벌써 어른들은 모두 주무실 시간, 친구는 그만 거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가라고 권했다. 뿌리치고 일어섰다. 친구는 야속한 생각까지 들었던 모양이었다. 기어이 일어서는 내게 마지막으로 내어 뱉은 말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꼭 가고 싶으면 가라. 가다가 차석이랑 술이나 한 잔 하고 가라.”
잊고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가뜩이나 무서움 많은 나로서는 벌써부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말에 거기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사나이로서의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쓸 데 없는 객기를 불러일으킨 셈이었다.
“오냐. 차석이 혹 너를 찾으면 데리러 올께.”
라는 말을 남기고 친구의 배웅을 마다하고 길을 나섰다.
달은 환히 밝아서 길이 어둡지는 않았다. 무서움을 이기려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노랫소리는 자꾸만 작아져 갔다. 천부적인 무서움 증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낮에 본 사건 현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거적에 덮어둔 인체 형상의 볼륨과, 흥건히 흘렀던 피의 자국이 자꾸만 살아났고, 조금 전 친구가 했던 술이나 한 잔 하고 가라던 얘기들이 더욱 무서움을 부채질했다. 현장을 외면하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현장과는 최대한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거의 본능적으로 일어났고, 도로의 가장자리를 걸을 수밖에 없었는데 낮에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졌던 코스모스는 그 순간 아무런 아름다움으로 내게 다가서지 못했다.
오히려 흰 색, 분홍 색, 빨간 색의 어우러진 그 아름다운 모습이 어릴 적 이웃 동네 상여 집에 보관하고 있는 상여의 꽃처럼 무서움의 강도만 더하게 해 주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정경과 같이 달은 환한데 무서움증이 극에 달했다고 느낄 즈음 누군가가 나의 발목을 꽉 잡는 것이 아닌가!
“아악------!”
그만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발을 움직여 보려고 하니 더 세게 움켜잡는 느낌일 뿐 나는 그만 한 걸음도 걸을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비명 소리는 꽤 컸던 모양으로 양쪽 동네(이어리와 동도마)의 견공(犬公)들이 짖기 시작했다. 개 짖는 소리는 견공들의 의리가 깊은 탓인지 삽시간에 이웃 대곡, 중 서도마까지 온 동네의 견공 합창으로 이어졌고 우습게도 내게는 견공들의 합창이 정신을 수습하는데 도움이 되었었다.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겨우 기절을 면한 상황에서 정신을 수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격언을 떠올리면서 정신을 차리고 도대체 누가 내 발목을 잡는가를 살펴보았다.
참으로 허무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을 발견하고 말았다. 나의 발목을 꽉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코스모스 대였다. 아주 실한 코스모스 대 하나가 쓰러져 있었고, 무서움에 가장자리를 찾아 걷던 나는 오른발로 그 끝을 밟고 왼발은 조급 굽어 공간이 생겼던 그 밑에 걸렸던 것이다.
비로소 완전히 정신을 수습한 나는 무서움 증에서 벗어나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무서움이란 오직 스스로의 생각이 부르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 하나 정말 아이러니칼한 것은 그 코스모스들이 꽃 길 조성한다고 바로 내가 내 반 어린이들과 함께 정성 들여 심었던 현장이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가끔 승용차를 운전하고 그 길을 오가면서 그 때의 일을 떠올리면 혼자 웃을 수밖에 없다.
그 때 그 코스모스의 씨앗이 매년 전해졌음인가? 그 길엔 가을이면 아름다운 코스모스가 아직도 피고 있다.
◎ 축구 잘했던 도마 29, 30, 31회
1974학년도에 맡았던 도마의 6학년(30회)은 참으로 착하고 재주 많은 아이들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내가 1반 담임이었고 교대 선배인 김수동 선생님이 2반 담임이었다.
두 반 합쳐서 100명 내외였던 그 6학년은 두 반이 적당히 경쟁을 하는 가운데 화합도 잘 되는 참으로 이상적인 아이들이기도 했었다. 많은 자랑거리나 얘깃거리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그들이 잘 했던 축구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당시 도마 국민학교는 교기가 축구였다. 운동부 육성에 남다른 열의를 갖고 계셨던 당시의 박윤수 교장선생님은 그래서 운동장에 명물로 자리 잡고 있었던 아름드리나무들을 사정없이 베어내고 축구장을 만들었다. 축구장이래야 정식규격에 맞게 줄긋고 전에부터 있었던 골문 정비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내가 맡았던 애들보다는 한 해 아래인 5학년(31회)을 주축으로 축구팀이 조직되고 제법 그럴싸한 축구 코치를 영입하고 또 체육주임을 맡을 선생님(박성영 선생님)까지 모셔 오는 등 여건 조성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는 것을 초임교사인 나도 리얼하게 느낄 수 있었다.
4월부터 시작한 축구부 훈련은 가끔 초임교사인 내게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훈련 과정이 어떻게 짜여지고 어떤 방식으로 훈련을 실시하는 것이며 어떤 보조보강 운동과 주 운동을 하면 되는 것인지를 진정 관심 깊게 보았다면 아마 축구 지도로 내 교직생활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는 조금도 절실한 심정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2년 전에 탁구 지도를 하면서도 그저 그런 식으로 넘겼던 나는 축구 역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그저 그런 시각으로 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나와 김 선배가 맡았던 당시의 6학년들은 자기들끼리 즐기는 축구 실력이 대단했었다. 포지션까지 이미 누가 적임자라는 것이 결정되어 있었고 두 반은 자주 그들끼리의 시합을 갖곤 했다.
세월이 상당히 흐른 시점에서 당시의 경기 결과는 거의 백중지세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마도 그래서 더욱 열을 내어 시합을 했었던가보다. 나는 내 반이 졌을 경우 조금 서운한 마음은 들었었다. 대 놓고 표는 내지 않았지만 지고 풀 죽어 잔디밭에 고개 숙이고 앉은 우리 반 아이들을 보면 겉으로 격려는 했지만 속으로는 영 아닌 기분이었었다. 기금 생각하면 그 것은 오로지 젊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젊다는 것은 철이 덜 들었다는 얘기와도 통하는 것이니까.
2학기 접어들면서 당시의 코치가 6학년과 축구부의 시합을 좀 하게 해 달라는 제안을 해 왔다. 축구부 아이들은 사실 연습경기를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김 선배와 나는 의논 끝에 허락을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안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왜냐하면 한 살이 적은 후배들이기는 해도 그들은 체계적으로 훈련받고 있는 축구부였다. 이기면 좋겠지만 졌을 때의 문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져도 괜찮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미시적인 관점에서 그렇고,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먼 훗날 그들이 어른이 되어 동창회나 그 밖의 모임 자리에서 함께 술잔이라도 기울일 때 후배 녀석들이 철딱서니 없게 그 일을 들먹이면 열 받게 될 내 제자들을 생각하면 무책임하게, 단순한 생각으로 처리할 일이 아닌 것도 같았다.
그렇게 허락된 축구시합의 열기는 참으로 대단했다. 늘상 두 반의 시합을 해 왔던 6학년들이 이제 소위 올스타팀을 구성해서 경기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선수 구성과 경기는 모두 아이들에게 맡겨 두었었다. 사실 김 선배는 나보다 나았지만 나는 아이들의 생각보다 나을게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시합은 정말로 귀추가 주목이 되는 시합이었고 운동장은 여학생 응원단(요새로 치면 오빠부대)의 열띤 응원과 코치의 약간은 신경질적이고 볼 멘 소리가 운동장을 둘러쌌고, 체계적인 훈련도 받지 않은 우리 애들이 묘기백출 하여 박수를 받는 등 국가대표가 외국팀을 초청하여 갖는 경기는 저만치 물러 나라였다.
나중에는 교장(박윤수), 교감(윤채두) 선생님의 관심까지 불러 일으켜 교무실 앞 현관에 의자를 내어놓으시고 만면에 미소를 띤 얼굴로 관람하시기도 했으니까.
첫 경기 결과는 우리 아이들의 대승이었다. 이기고 즐거워할 줄만 아는 것이 아니라 후배들에게 전술과 기능을 한 수 지도하는 우리 아이들이 대견스럽기 짝이 없었다. 지고 풀 죽은 축구부에겐 좋은 채찍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참으로 잘 한 경기였고 필요한 일이었다는 생각도 했었다.
김 선배와 내가 간단히 마련한 상은 과자 몇 봉지. 수음지에서 즐거워하며 다음 시합을 의논하는 그들이 나는 그렇게 믿음직할 수가 없었다.
그 일은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고 2학기 초반까지 몇 차례의 도전을 받았지만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고, 그 때마다 조금은 경망스럽던 그 깡마른 코치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재미있기도 했었다.
남해는 축구의 고장이란 말이 맞다. 29회 아이들도 축구라면 결코 다른 이들에게 지지 않을 실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다만 그 때는 축구부가 조직되지 않아서 실력을 뽐낼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축구부가 조직된 학년이 바로 31회였었다.
◎ 역사(歷史)의 뒤안길 - 전화기(電話機)와 전화요금
1970년대 초반에는 도마 마을에도 전화가 있는 집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 학구 내 전체를 두고 헤아려도 다섯 손가락 안으로 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학교에는 전화가 두 대(두 번호) 있었다.
전화번호 한 개로 교무실과 숙직실, 나머지 한 번호로 교장실과 교장 사택에 소위 연결스위치를 써서 사용하던 참으로 옛이야기일 따름이다. 당시 전화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이 아닌 손잡이를 여러 번 돌려서 교환수를 불러 전화할 상대방의 지역과 전화번호를 말하고 수화기를 놓은 다음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면 순서에 따라서 연결이 되면 벨이 울리게 되고 받으면 교환수의 연결 되었다는 멘트에 이어 통화가 가능한 것이었다.
이후 그냥 수화기만 들면 교환수와의 대화가 가능한 전화기로 바뀌고, 다시 다이얼 전화기로 바뀌었는데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지금은 다이얼 전화기는 찾아보기 어렵고 전자식 버튼 전화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당시의 전화요금이 그리 비싼 것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전화요금은 꼭 챙겨서 받았었다. 교무실 전화기 옆에는 시외전화 사용부라는 장부가 있었는데, 시외통화를 하고는 꼭 그 장부에 반드시 기록을 하라고 주로 교감선생님이 신신 당부를 하는데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간혹 빠지는 경우가 있다.
전화요금 고지서가 오면 장부와 대조하여 시외통화료가 맞으면 다행인데 그게 들어맞는 경우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할 수 없이 다음 등청일에 전달부를 우체국에 보내어 사용 내역서를 뽑아오게 하고, 기록이 되지 않은 통화내역은 회람을 돌려서 누구의 것인지 밝히도록 하여 끝까지 가는 추적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거기서도 끝이 나지 않고 끝까지 주인이 없는 통화 내역은 마지막으로 교감선생님께서 손수 해당 번호로 전화를 걸어 도마학교에 아는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하여 범인(?)을 찾아내는 것이다.
우스운 얘기지만 그 과정에서 필사적인 노력으로 찾고 보니 범인이 교장, 교감선생님인 경우도 있고, 전화번호가 인근 도시의 다방으로 밝혀지면 완전범죄로 끝이 나고 마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어쨌거나 잘난 전화요금 가지고 어쩌면 심하다고 느껴질 만큼 철저하던 시대와는 지금 많은 달라짐이 있었다. 지금은 사적인 통화라도 업무의 연속으로 본다는 시각일까? 아니면 참으로 잘살게 된 우리나라의 국력 덕일까?
전화요금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 이제 한 술 더 떠서 개인이 모두 휴대폰을 갖고 있으니 다시 그 옛의 일들이 웃음 주는 추억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내 통화도 분명히 요금이 있는데 시내 전화는 100통화를 해도 무료고, 시외통화는 단 한통화만 해도 요금을 받도록 하였으니, 조금은 불합리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객지 생활의 설움은 이런 데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일이었던 셈이다.
◎ 교단 문인의 길로
-고등학교 3학년 때 국어시간에 시조가 우리 민족 순수 문학이라는 사실을 알고 매료되기 시작하였었다. 작고하신 원로 시조시인 아천 최재호 선생님이 학교장으로 부임하신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고3의 그 중요한 시기에도 밤을 새워 써 보기를 여러 번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래서 그 해 개천예술제에 참가하여 차상에 입상했었고, 교대 1,2학년 모두 개천예술제 대학 일반부에 참가하여 차하에 입상했던, 나름대로는 시조 공부를 비록 자습이기는 했지만 열심히 했었다.-
교직에 들어서서는 상당기간 손을 놓은 상태에서 어느 날 함께 근무하던 여선생님이 신문사나 잡지사에 작품을 한 번 보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를 했다. 사실 나의 문학에의 길 진입은 그 때부터 이며 마음속으로 늘 권유해서 계기를 만들어 준 김순례 선생님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1975년 5월에 작품「산촌 노래」로 『새교실』지의 문을 두드렸다. 결과는 1회 추천이 되어 7월호 『새교실』에 발표가 되었다. 곧 이어 「심산 사찰」이라는 작품으로 응모하여 2회 째의 추천을 받았고(9월호에 게재), 「길」이라는 작품으로 추천을 완료하고 11월호에 작품과 함께 천료 소감을 실었다.
문덕수 시인과 김사림 시인의 추천사를 보면 ‘초등학교 선생님들 중에는 시조를 하는 사람이 귀한데 초등학교 교사로 시조를 하다 보면 어린이들에게 많은 시조의 보급이 기대 된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었다.
당시 초등교사로서 시조 장르로 새 교실 지의 문을 두드린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강원도의 최도규, 경북의 조주환, 그리고 경남의 내가 전부였었다.
7월호가 나오고부터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성원을 담은 편지와 축하전보 등이 왔다. 사실은 그런 것들이 힘이 되어 더욱 정진하는 데 크나큰 보탬이 되었음을 솔직히 밝혀 둔다.
이 일로 교직생활을 수행하는 동안 내내 문예 지도를 주로 하는 교사가 되었고, 글 쓰는 일에 정진하는 하나의 계기가 마련된 셈이었으며, 이후 각종 사례를 제출하거나 안내장을 만드는 일은 다소 손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중앙문단의 추천을 받기 위한 노력으로 결실을 본 것도 사실은 이 일이 계기가 된 셈이다.
글을 쓰는 일을 접은 것은 아니나 2007년도부터 문학 관련 회합은 가급적 피하기로 했다. 이유는 건강문제다. 경남 지역 문단의 주 활동 무대가 마산, 창원 지역이다 보니 저녁시간에 참가한다는 것이 건강과 관련하여 내게는 힘이 드는 일이어서다.
<함께 했던 직원들>
1972.05.01/이용수(교장선생님), 윤채두(교감선생님), 이태석, 장기찬, 조정의, 조경진, 김영빈, 이정주, 강창리, 정정옥, 강상례, 김연애, 이복자, 하영자(산대강사), 김상기(기능), 정철포(급사) 1973.03.01/박태윤, 정대행, 최유선, 김채봉(기능) 1974.03.01/박윤수(교장선생님), 박성영, 김수동, 이주엽, 김봉옥, 김대기(기능) 1975.03.01/이정식, 이은옥, 김순례, 박삼수 1976.03.01/김준우(교감선생님), 김창석, 정현철, 한차점 1977.03.01/박우환, 김익용
|
첫댓글 선배님의 교직생활의 첫 출발지인 남해 도마초등학교의 5년의 교직생활을 보고 정말 감탄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어찌도 그렇게 생생하게 글로서 옮길수 있었는지도 그렇습니다,,, 철저한 메모습관과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일기장을 써내려가신 것이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수 있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