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25. 또 하나님은,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시며, 그들이 사는 시대와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7.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몇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29.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들어 낸 것들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30. 하나님께서는 그 무지의 시대에는 그대로 지나치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31.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행17:24-31)
24 “The God who made the world and everything in it is the Lord of heaven and earth and does not live in temples built by human hands. 25 And he is not served by human hands, as if he needed anything. Rather, he himself gives everyone life and breath and everything else. 26 From one man he made all the nations, that they should inhabit the whole earth; and he marked out their appointed times in history and the boundaries of their lands. 27 God did this so that they would seek him and perhaps reach out for him and find him, though he is not far from any one of us. 28 ‘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b] As some of your own poets have said, ‘We are his offspring.’
29 “Therefore since we are God’s offspring, we should not think that the divine being is like gold or silver or stone—an image made by human design and skill. 30 In the past God overlooked such ignorance, but now he commands all people everywhere to repent. 31 For he has set a day when he will judge the world with justice by the man he has appointed. He has given proof of this to everyone by raising him from the dead.”
바울이 아덴에 와서 3만에 이르는 우상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단을 세워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할 나위 없이 그것은 그 도시 사람들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신앙인의 눈에 이런 모습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바울의 눈에는 가장 우매한 짓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쓸데없는 일 즉 우상을 섬기는 일로 화를 자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공을 들여서 우상을 세우고는 구원을 줄 수도 없는 우상의 종이 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덴 사람에게는 최선이 바울에게는 최악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180도 다른 평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제주의 하도에서 목회를 할 때 집사님 한 분은 집에 똥돼지를 기르셨습니다.
달리 똥돼지가 아닙니다.
그것이 사람 똥을 제 밥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똥을 두고 말하자면 사람에게는 똥이고 돼지에게는 좋은 밥이었던 것입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똥을 두고 한 존재는 더럽다고 하고 다른 존재는 침을 흘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똥을 두고 전혀 다른 정의를 하는 것은 그 존재의 문제였습니다.
사람과 돼지!
니고데모가 늦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그의 확신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은 하늘로써 온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
그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으며 그 존재로는 나를 알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런 줄을 몰랐는데 그는 하나님의 일에 관한 한 똥을 밥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인해서 세상과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밥으로 보는 것을 우리는 똥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변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아덴의 스토익들은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며 자연에 로고스와 일치되는 어떤 질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최고의 질서를 가지는 자연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범신론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이성이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 세상은 모조리 타락했다고 합니다.
성경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열역학도 그 말을 합니다.
그 철학자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세상의 방향성은 정확히 혼란(엔트로피)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중요한 전제를 하는데 물질과 공간 외에 존재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한한 사람도 죽음으로써 그 물질과 공간으로 전환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물론적인 생각에 젖은 사람들은 결국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현세에 쾌락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제 사고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쾌락이라는 것이 정신적이며 지적이라고 말은 합니다.
이것은 당시 아덴에 공존했던 철학입니다.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는 찬란했던 옛 영광이 사그라든 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옛 명성만은 계속 지속되고 있던 터라 그 도시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에피쿠로스와 스토익 철학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문제는 바울 역시 학식 많은 학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적인 능력을 동원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것이 효과적인 복음 전도의 방식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낭패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고백한 것입니다.
1. 형제자매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3. 내가 여러분에게로 갔을 때에, 나는 약하였고, 두려워하였고, 무척 떨었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보여 준 증거로 한 것입니다.
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2:1-5)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것이 효과적이라면 아무 방식이라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실은 복음 전도의 방식이 그 결과를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 전도를 한다면서 악기를 동원해서 연주하며 눈을 감고 두 손을 들고 닭살 돋는 나래이션을 하는 감정적인 방식입니다.
드럼을 쳐대며 소리를 질러댈 수도 있습니다.
또 바울이 아덴에서 하듯이 아주 지적인 방식을 동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엉뚱한 결과물을 낼 수 있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보여 준 증거로 한 것입니다.
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2:4,5)
가르침의 중요한 도구는 종교 지도자의 지적 자질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발견한 것입니다.
그의 지적 자질이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 공간을 제한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문화의 도시 아덴에서 바울은 자신의 지적인 능력을 의존하다가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24.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24 “The God who made the world and everything in it is the Lord of heaven and earth and does not live in temples built by human hands.
바울은 그 도시에서 30,000이 넘는 신들을 보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나무로 흙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그에 복종하고 있는데 그 나무와 흙을 만드신 분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야말로 진정한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분만이 섬김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우매했고 하나님의 손이 아닌 사람 손으로 섬길 대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것을 섬기는 일 자체가 우매한 일입니다.
이 문제를 두고 선지자들이 수없이 지적해 왔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우상의 재료를 살펴봅시다.
12. 철공은 철로 연장을 만들고 숯불로 일하며 망치를 가지고 그것을 만들며 그의 힘센 팔로 그 일을 하나 배가 고프면 기운이 없고 물을 마시지 아니하면 피로하니라
13. 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곡선자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집에 두게 하며
14. 그는 자기를 위하여 백향목을 베며 디르사 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정하며 나무를 심고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
15.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16.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17.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사44:12-17)
철을 두들겨 불판 만들고 나무는 도끼로 쪼개서 불쏘시개 만들어서 돼지 삼겹살을 구워 먹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철과 나뭇가지로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거기에 금칠을 한 다음에 자신을 구해달라고 그것으로 우상을 만들고 그것의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딴 나라에서는 LA 갈비 해먹는 소를 앞에 두고 절을 하는 것입니다.
동물에게는 종교심이 없습니다.
죽음과 그 구원에 대한 갈급함을 사람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조상을 위해서 제상을 차리는 소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죽음 이후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아니면 사람이 금칠한 나뭇조각이 무슨 사람을 구하겠습니까?
죽음에 대해 구원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는 소나 나뭇가지가 사람을 죽음에서 구원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런 신에게 봉사했다며 거짓 위안을 얻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이 지적을 하고 순교하신 것입니다.
48. 그런데 가장 높으신 분께서는 예언자가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속에 살지 않으십니다.
49. '나 주가 말한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 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행7:48-50)
이제 48절의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이란 스데반이 이방 신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의 거룩한 성전조차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없다는 스데반의 그 증언을 듣자 사람들이 그를 성전을 모독하는 자로 여겨 돌멩이로 그를 죽인 것입니다.
실상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랑의 교회보다 화려한 예루살렘의 성전을 몇 번 무너뜨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성전조차 사람에게 우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한 성전을 돌 하나 위에 돌 하나가 남지 않도록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봉사 행위들도 돌 하나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져야하는 것입니다.
즉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을 전혀 다르게 정의하시는 것입니다.
12. 누가 이 터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13.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밝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 날은 불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14. 어떤 사람이 지은 작품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삯을 받을 것이요,
15. 어떤 사람의 작품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마치 불 속을 거쳐서 살아나오듯 할 것입니다.
16.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고전3:12-16)
그것은 불에 타지 않을 영적인 재질을 가진 것입니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사람의 존재 안에 하실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계시는 여러분이 바로 성전입니다.
사람들은 사람 손으로 만든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상이란 이상스럽게 만든 각종 조각만을 이른 것이 아닙니다.
돼지 대가리만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엎드려서 절하는 것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의 제 일 계명은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절대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우리가 이 비참한 경험을 얼마나 반복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6.25로 인해서 젊은 아내의 복중에 아이를 남긴 채로 전쟁터에 끌려갔다가 남북으로 헤어져 이제야 늙어 있는 자녀의 절을 받고, 이제 남의 사람이지만 늙어버린 옛 아내를 업어주고, 얼굴을 비비고 울고, 차마 떠날 수 없어 버스 유리 창 위로 손을 서로 겹쳐 대고.......
그런 만남 후에 버스를 타고 휴전선 하나만 넘으면 서로가 제 일의 주적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 가운데 금 하나를 그어놓고 왜 이런 이상한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도 어린 때는 북의 동포들 머리에 틀림없이 뿔이 난 줄 알았습니다.
독재자들의 통치술에 꼬박 속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주 주의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책을 써내고 강의하고 다니는 세상에서 잘난 사람들입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에도 스토익과 에피쿠로스가 나옵니다.
그들은 아주 잘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일은
21. 모든 아테네 사람과 거기에 살고 있는 외국 사람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행17:21)
잘난 사람들이 만들어둔 우상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장 우리의 현실인데 자본주의도 인간의 자유를 중시하는 철학입니다.
공산주의도 인간의 평등을 중시하는 철학입니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산업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나타난 현실입니다.
생산 도구를 가지고 있던 자본가들의 노동 착취로 어린이에게조차 죽어갔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부를 가지게 된 자본가를 축복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공산주의가 잉태 된 것입니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그들이 내세우는 자유나 평등의 가치는 훌륭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화 되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했을 때 엄청난 폭력성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겉에 금칠을 해두어도 그것이 절대화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싸안고 울고불고 하다가 버스 타고 휴전선만 넘으면 주적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런 멍청한 짓을 할런 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는 것만이 절대적입니다.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손으로 만든 것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탈 이데올로기입니다.
사람 생명을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죽여도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300만 명의 우리 동포가 죽어갈 때에 쌀로 막걸리 만들지 않았습니까?
뉴스를 보니 북에 또 다시 그 일이 일어나는 모양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입니다.
주님도 형제 될 수 없는 자들로 형제 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25. 또 하나님은,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5 And he is not served by human hands, as if he needed anything. Rather, he himself gives everyone life and breath and everything else.
사람들은 봉사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봉사가 대단한 줄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 손으로 하나님을 봉사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하셔서 인간의 봉사가 요구되시는 분이시라면 그 분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인정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우스꽝스러운 가정이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 "이 족쇄를 벗어 던지자. 동여맨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하는가?
4.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웃으신다. 내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시2:3,4)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도둑이나 강도를 두고 비웃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죽음의 족쇄를 풀고 구원을 찾아보자는 자들을 비웃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오른 하루 몇 번을 숨을 들이키고 숨을 내 쉬었습니까?
맥박은 몇 번이나 뛴 것입니까?
그것을 내가 정하고 내가 실행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맥박 뛰는 수를 정하시고 정해진 호흡을 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의 생명과 호흡을 주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나라는 존재를 보장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주제에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대단한 일을 했다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를 아주 알기 쉽게 설명합니다.
인간은 본래 흙이었습니다.
그것이 창조자의 손에 잡히더니 피조된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구원은 일방적입니다.
그 방향성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선물이며 은혜라는 것입니다.
26.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시며, 그들이 사는 시대와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6 From one man he made all the nations, that they should inhabit the whole earth; and he marked out their appointed times in history and the boundaries of their lands.
죄인의 죄성이 드러나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저 잘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시대에 아테네사람들은 그들이 아티카(Attic) 본토의 흙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그것을 자랑삼았습니다.
자랑삼았다는 것은 단순히 잘난 척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어디든지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는 동화를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뉴스를 보니 카나다의 원주민 기독교 기숙학교에서 어린아이들 천여 명을 학살해서 묻은 모양입니다.
그 기독교인들은 제 마음에 드는 제 편의 신학을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흙은 다른 사람의 것과 다르다는 신학이 그것입니다.
자신들만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남은 죽여도 된다는 신학을 쓴 것입니다.
그것에 기초해서 사람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역사가 그것입니다.
흑인을 죽여도 된다는 신학을 그들이 만들고 그대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 혈통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 경계를 정해주신 것입니다.
남의 경계를 넘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배 타고 제 경계를 넘어서 아메리카로 가더니 원주민들을 다 죽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배 타고 제 경계를 넘어 아프리카로 가더니 그들을 잡아다가 그들의 노예로 삼으라고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본문을 외우고 수 없이 읽고 설교하면서도 막상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도 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일억 명의 흑인을 사고팔고 죽이고 나서 수천 년이 지나서 미국에 흑인 대통령 한 사람이 나온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설교하고 아멘 할렐루야 기도회 철야를 다 한 결과로 이제 그 일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릅니까?
27.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7 God did this so that they would seek him and perhaps reach out for him and find him, though he is not far from any one of us.
바울은 이 모든 역사의 동기를 하나님의 계시에서 찾고 있습니다.
출애급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앙을 보내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13.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바로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하여라.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의 백성을 보내어라. 그들이 나에게 예배드리게 하여라.
14. 이번에는, 내가 나의 온갖 재앙을 너와 너의 신하들과 백성에게 내려서, 온 세상에 나와 같은 신이 없다는 것을, 너에게 알리겠다.(출9:13,14)
하나님께서 열 번의 기적을 베푸신 이유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온 세상에 나와 같은 신이 없다는 것을, 너에게 알리겠다.
하나님의 내리신 기적 앞에 재빨리 엎드려졌더라면 그런 곤혹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탈북자들이 두만강을 넘으면서 중국의 변방대에게 쫓기면서 그들이 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동안 불러본 적이 없던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진지하다 보면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되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눈의 시력이 회복되고 보면 하나님께서 너무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전 절에도 말씀하신 것처럼 실은 하루에 수만 번을 하는 낱낱이 그 호흡마다 하나님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몇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28 ‘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 As some of your own poets have said, ‘We are his offspring.’
일반적 시인조차도 같은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힘입어...기동하며는 크레타(Creta)의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 B.C.6세기)의 4행시 '크레티카'(Cretica)에도 나온다고 합니다.
그의 소생이라는 말 역시 다른 시인의 인용인 것 같습니다.
바울이 이곳 외에도 희랍의 시를 정확하게 몇 차례 인용한 것으로 미루어 그는 희랍의 학문이나 문학에도 능숙했으리라 짐작됩니다.
바울은 아테네사람들에게 시낭송까지 하며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 생각을 바울이 이 시를 인용하지 않은 것이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설교 시간이 문학의 밤 기분이들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말과 같이 설교가 망치라면 시를 통해 솜방망이를 만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우리는 소통을 위해서 예화를 드는데 그것이 동화 이야기 시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란 예수님이 그 자리에 오시는 사건입니다.
사람을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시간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의 설교를 마무리하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바울은 부정적인 아덴의 현실을 지적합니다.
29.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들어 낸 것들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29 “Therefore since we are God’s offspring, we should not think that the divine being is like gold or silver or stone—an image made by human design and skill.
바울이 본 아덴의 현실에서 바울이 발견한 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들을 수 없이 고안해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 우상들의 종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일을 하신 것입니다.
다른 시대를 여신 것입니다.
30. 하나님께서는 그 무지의 시대에는 그대로 지나치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30 In the past God overlooked such ignorance, but now he commands all people everywhere to repent.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주님은 어두워진 역사의 현실에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죄의 세력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새 시대를 여신 것입니다.
이런 현실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절박한 권유가 마치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주 옳은 소리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힘없는 신학강의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오고 만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부활의 말씀을 듣고 스토아 학파들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는 일이 자연의 일반 법칙에 위배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들은 종말의 나라를 인정할 리가 없습니다.
당시 청중들은 바울의 기독교 철학을 비웃었던 것입니다.
32. 그들이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전해 들었을 때에, 더러는 비웃었으나, 더러는 "이 일을 두고, 선생의 말을 다시 듣고 싶소" 하고 말하였다.(행17:32)
32 When they heard about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some of them sneered, but others said, “We want to hear you again on this subject.”
하지만 바울이 아닌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를 하고 내린 그의 결론을 비교해 봅시다.
34-35.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그는 말하기를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키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였습니다.
36.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 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행2:34-36)
그의 설교의 결론을 봅시다.
30. 하나님께서는 그 무지의 시대에는 그대로 지나치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30 In the past God overlooked such ignorance, but now he commands all people everywhere to repent.
베드로는 새 시대가 열렸다라는 추상적인 말을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역사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울처럼 회개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네 손에 예수님을 못박은 망치와 못을 들려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실은 그의 회개의 시급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최후의 심판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31.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31 For he has set a day when he will judge the world with justice by the man he has appointed. He has given proof of this to everyone by raising him from the dead.”
하지만 베드로는 그 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가슴을 치면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37.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행2:37)
설교란 설득이 아니라 성령 앞에서 사람을 굴복시키는 일입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현재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신학자들은 교회가 이렇게 무력화 된 이유를 그 선교의 방식에서 찾습니다.
그들이 너무 문화적인 방식을 수용한 것입니다.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선교의 방식이 실은 선교의 결과물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적인 복음 소통의 도구를 중시하다가 복음을 전도하지 못한 것입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보여 준 증거로 한 것입니다.
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2:1-5)
복음은 복음을 통해 전해져야하는 것입니다.
당장에 현재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이 선교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