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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님 순교 영성
여진천(본시아노) 신부/배론 성지
Ⅰ.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1. 생애와 활동
1821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솔뫼)에서 김제준(이냐시오, 1790-1839)과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영향으로 신앙생활 속에서 성장하였다. 종조부(從祖父) 김종현이 신앙을 받아들인 뒤 가족들에게 전교하였고, 증조부 김운조(즉 진후,1738-1814, 해미 옥사)을 비롯하여 조부인 김택현, 김한현(종한, 1815년 대구 순교), 김희현이 입교하였다. 이존창의 딸 멜라니아는 김택현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가족은 서울 청파동으로 이주하였다가 용인의 한덕동(이동면 묵리)을 거쳐 골배마실로 이주해 살았다. 한덕동과 골배마실에서 산 것을 보면 그의 집안 생활은 상당히 어려웠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발육상태가 좋지 않았다. 키는 컸지만, 영양 부족에서 오는 여러 가지 요인때문에 가슴앓이, 위병, 요통, 두통 등으로 청년이 되어서까지 고생하게 되었다. 리브와 신부가 1839년 8월에 쓴 서한에서 “불쌍한 안드레아는 어떻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늘 위병과 두통과 요통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머리털만 보더라도 큰 두통을 짐작하게 합니다. 지금(18세) 그의 머리털은 회색이며 흰색이고, (얼굴빛은) 노랗고 거의 모든 색깔입니다. 저는 일찍이 이렇게 추한 머리털을 보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였다. 훗날 그는 이러한 신체적 결함을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에 대한 정열과 신앙에 터전한 조국애로 극복해 나갔다.
1836년 7월 모방 신부가 교우촌 순방차 나섰다가 김제준의 집을 방문하고 열심과 조숙한 지능을 보이고(서 야고보의 증언) 지혜가 비범하고(이 베드로의 증언) 신심과 정신이 어려서부터 뛰어난(최 베드로의 증언) 아들 대건을 본 뒤 제자로 삼고자 하여 데리고 갔다(최양업은 2월 6일, 최방제는 3월 14일 모방 신부댁에 도착).
모방신부는 신학생들을 12월 3일 서약을 받고 여항덕 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가는 정하상, 조신철(가를로), 이광열(요한) 등에게 신학생들을 인도해 주도록 부탁하였다.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가 정해준 2명의 중국 밀사들과 함께 마카오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갔는데, 1837년 6월 7일(양)에 도착하였다(최방제는 1837년 11월 27일 선종). 1839년 4월 아편문제로 광동과 마카오에서 소요가 일어난 탓에 필리핀 마닐라로 갔고, 롤롬보이 수도원에 가서 약 6개월 반을 생활한 뒤 마카오로 귀환하였다.
처음 책임자가 되어 라틴어와 성가를 가르친 칼레리 신부는 1837년 10월에 쓴 서한에서 “르그레즈와 신부가 그 교육을 나에게 전적으로 맡긴 3명의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것, 신심,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합니다. 그들은 그들을 가르치는 데 위로를 주고, 그 수고를 보상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고 하였다.
데플레슈 신부는 라틴어를, 리브와 신부는 교리를 가르쳤다. 마카오로 귀환한 뒤 르그레즈와, 리브와 신부가 라틴어와 프랑스어, 교리 등을, 베르뇌 신부가 철학을, 매스트르 신부는 신학을, 1844년 소팔가자에서 페레올 주교가 신학을 가르쳤다.
1842년 아편전쟁이 끝날 무렵, 프리깃함 에리곤호의 함장인 세실이 조선 해안을 방문할 의사를 표명하였으므로 리브와 신부는 중국과의 교섭에서 통역으로 이바지하도록 안드레아를 파견하였다. 그해 2월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세실 함장이 이끄는 에리곤호를 타고 입국로 탐색 여행을 나서게 되었다. 팅해, 상해, 그 밖의 항구에서 그는 중국인들에게 프랑스인의 관대함에 대한 높은 사상을 심어주는데 전념하였고, 또한 이 백성을 존경하도록 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드레아의 성격은 자신을 가지게 되었고 점차 그의 마음에 대담성이 발전하여 그의 앞날에 하느님의 섭리가 계획한 것을 완수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그의 사상은 자라고 모험적인 원정들은 그를 두렵게 하기는커녕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병오일기⌟ 중 김대건 신부 약전).
첫째, 요동에 도착한 뒤 그해 12월 27일 책문에서 밀사 김프란치스코를 만난 뒤 단독으로 29일 입국을시도했다가 실패하였다. 이때 입국시키기로 한 프란치스코는 박해의 위험으로 조선에 안전하게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신품을 받지 못했으므로 교우들에게 무슨 봉사를 할 수 있느냐고 만류하였다. (젊은 혈기에 슬기로운 경험도 없으면서) 입국한 이후 하루 동안 전진하였다. 첫째 주막에서 언어와 이상한 옷차림과 그의 모발이 그의 정체를 드러나게 하였다. 그는 되돌아와야만 했다. 낮에는 눈으로 덮인 산속에 숨었고 밤에는 여행을 계속하였다. 3일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데다 피곤과 잠을 이겨낼 수가 없어서 눈 위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려 하였다. 추위는 혹독하였고, 밤은 칠흑 같았다. 그는 잠이 들자마자 ‘일어나 가라’는 소리에 깨어났다. 돌아오면서 그는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의 모습은 중국인도 조선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은 얼어서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고 그의 입술은 추위로 얼어서 말을 발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력이 그를 구해 주었다. 1843년 4월 페레올 주교와 최양업이 있던 소팔자가로 되돌아갔다.
둘째, 신학공부를 하던 중 1844년 2월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훈춘을 거쳐 3월 경원에서 밀사들을 만난 뒤 소팔자가로 되돌아왔다. 그해 12월 10일 경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그의 산 신앙과 성모님께 대한 깊은 의뢰심으로 이 모든 여행의 피로를 큰 인내로 이겨냈다.
셋째, 1845년 1월 밀사를 만나 의주를 통해 입국하여 활동을 하다가 상해에서 8월 17일 사제품을 받을 때까지이다. 입국한 뒤 그는 1) 선교사들이 장차 거처할 집을 석정동에 마련하고 페레올 주교를 모시러 가시 위해 배 두 척을 구입하였다. 2) 14세 된 두 명을 선발하여 가르쳤고, ⌜朝鮮全圖⌟를 작성하여 마카오로 보냈다. 3) 현석문 등이 수집해 온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4) 사제품을 받고 8월 31일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10월 12일 강경 부근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그는 조선 선교지의 유익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위험을 용감히 무릅쓰고 새로운 사명을 수행하다가 포졸한테 체포되었다.
1846년 5월 서해 해로를 통한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주교의 명에 따라 〈임치백(43), 임성룡(23), 김중수(78), 엄수(44), 김성서, 이의창(베난시오), 박성철(베드로), 노언익, 안순명) 등과 같이〉마포를 출발하여 해주 연평도로 가서 중국 배에 서한과 지도를 전달하고 오다가 (5월 1일 연평도에서 선주인 임성룡은 조기 39마리를 사서 실었고, 3일 등산에 이르러 소금을 사서 굴비를 만들었으며, 건어를 만들 땔나무를 사려고 장연 터진목으로 돌아가던 길에, 중국 배의 보조선을 타고 물을 길러 가는 길에 蘇江의 경치를 보려고 하륙하여 언덕을 올라 3일을 지냈고, 배를 돌려 마합포에 이르니 김대건이 따라와서 등산진으로 들어가 묵었는데) 6월 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되었고, 편지들은 압수되었으며, 서울로 압송되어 9월 16일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순교 후 박 바오로, 서 야고보, 한경선, 나창문, 신치관, 이 사도요한, 이 빈첸시오 등이 시신을 홑이불로 싸 갖고 3리 떨어진 와서(문패푸리: 현 용산우체국 뒷편 군종교구청)에 임시 매장, 안성 미리내로 이장하였다. 그 후 1886년 시복판사인 프와넬 신부가 미리내에 있던 봉분 중앙을 헤치고 홍대를 확인하였으며, 1901년 5월 21일 무덤을 발굴하여 그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고,10월 17일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9월 28일 밀양 성당으로, 1951년 혜화동 소신학교로, 1960년 7월 5일 혜화동 가톨릭 대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때 하악골만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 1971년 3월 12일 김대건 신부의 두개골에 대한 계측이 가톨릭 의대 정일천, 권흥식 박사의 주도로 있었다.
2. 저술과 업적, 사목활동
그가 남긴 서한은 모두 31통인데, 수취인에게 도달한 것은 22통 뿐이다. 그 중 리브와 신부와 고틀랑 신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은 유실되었고, 9통은 압수되었다. 현재 19통이 남아 있다(라틴어 16통, 프랑스어 역본 2통, 한글 필사본 1통).
저술은 ⌜라틴어 작문⌟2건, 7개월간 작성한 ⌜훈춘 여행기⌟, ⌜조선전도⌟(1845),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들 수 있다.
1845년 11월에 서울에 도착한 이후 이듬해 5월까지 6개월만 사목활동을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석정동(小公洞)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고, 외교인들은 그를 소공동 집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때 복사 이의창(베난시오)이 그를 도왔다. 이어 고향 골배마실에서 모친과 상봉하였다. 서울에서는 미나리골 김회장의 집, 무쇠막(서강의 수철막) 심사민의 집, 쪽우물골(남대문로 藍井洞) 등지를 방문하고 성사를 주었다. 그리고 다음해 까지 서울을 오가면서 용인의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터골(용인군 내사면 大垈里의 한터골), 이천의 동산밑, 단천 등지를 찾아가 미사를 드리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성사 집전에는 엄격하였고, 교리를 설명하고 교우들을 가르치는 데 기쁨과 열성을 다하였으며, 큰 열성으로 성사를 집전하였다(박 글라라, 이 베드로의 증언). 이에 모든 교우들은 김 신부를 사랑하고 그들은 오로지 신부를 칭찬할 뿐이었다(김 프란치스코의 증언). 1846년 은이 마을 위쪽의 어머니 집에 와 있었다. 곧 떠나야 한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적어도 부활첨례까지 기다려 달라고 청하였다. 부활이 지나자, 월요일에 떠나 서울로 갔다(임 루시아 증언). 옥에 갇혀서는 남경문(세바스티아노)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고, 임치백(요셉)과 다른 한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3. 순교모습
새남터 형장으로 가실 때 보라색 저고리를 입고 들것을 타고 머리를 풀고 결박을 당해 가셨습니다(변 아나타시아 증언). 들것을 타고 두 다리는 들것에 묶여 결박되었으며, 상투는 풀어 앞으로 묶여졌고, 보라색 겹저고리와 굵은 삼베로 짠 여름 홑바지를 입으셨으며, 안색이 태연하게 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박 글라라 증언)
죄인이 서소문 밖에서부터 새남터까지 따라갔으며, 당고개에 이르러 한참 지체할 때 신부께서 들것에 앉아 있는데, 땀이 흐르고 상투가 풀어지자 운반하던 사람이 다시 상투를 틀어주던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신부님은 보라색 겹저고리를 입으셨고, 머리를 들어 좌우를 살펴보셨습니다. 형장에 이르러 군문 효수형의 법식대로 하다가 팔방을 돌릴 때 매우 기뻐하는 모양으로 바삐 돌아다니셨고, 칼을 받으실 대 두 번 만에 머리 베어지던 생각이 납니다(박순집 베드로 증언). 형장에 이르러 군사들이 결박한 팔에 주장을 꿰어 들고 팔방을 돌릴 때는 즐거운 빛을 나타냈습니다. (옷을 반쯤 벗기었다. 관례에 따라 그의 양쪽 귀를 화살로 뚫고 화살을 그대로 매달아 두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다 회를 한줌 뿌렸다. 그런다음 두 사람이 그의 겨드랑이에 몽둥이들을 꿰고 그를 어깨에 맨 채 그 원 둘레로 빨리 세 번을 돌았다. 그런 다음 그의 무릎을 꿇리고 머리채를 새끼로 매어 말뚝 대신 꽂아 놓은 창 자루에 뚫린 구멍에 꿰어 반대쪽에서 그 끝을 잡아당겨 머리를 쳐들게 하였다. 이런 준비를 하는 동안 그는 조금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머리가 여덟 번 째 칼을 맞고야 떨어졌다)(페레올 주교). 뿐만 아니라 군사에게 하는 “내가 천당에 올라가서 이렇게 볼 것이니, 너희도 천주교를 봉행하여 내 뒤를 따라오라”고 하신 뒤 참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최의정 증언).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요.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페레올 주교).
하루는 비가 붓듯이 오며 뇌성이 요란하자 동리의 교우들이 이상히 여기고 신부께서 순교하셨는가 하고 짐작하였는데, 교우가 전하기를 ‘김 신부께서 뇌성 치던 날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셨다’는 소문이 퍼졌다 했습니다(임 루치아⋅오 바실리오 증언)
외교인 말이 새남터에서 죽일 때에 상서로운 기운이 기묘하게 공중에 나타났다고 했습니다(김 가타리나 증언).
신부님의 시체를 박 바오로와 다른 교우들이 찾으려 할 때 말을 들은즉 ‘신부님의 손에 강아지에게 물린 흔적이 있다’ 하므로 그 상처를 보고 의심없이 찾아 장사지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김 마리아 증언). 그때 어느 교우가 신부님의 머리털을 조금 가져온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박 글라라 증언)
그의 죽음 이후 교회 장상들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그의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진실한 신심, 놀랄만큼 유창한 말씨는 대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성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는 우리가 바라던 것보다 더 나았고, 몇 해 동안만 실천을 하였더라면 지극히 유능한 신부가 되었을 것입니다...그에게는 어떤 일이라도 맡길 수가 있었으니 그의 성격과 태도와 지식은 그 성공을 확실히 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포교지가 지금 처해 있는 처지로 보아서 그를 잃는 것은 엄청나고 거의 회복할 수 없는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1857년 9월 23일 가경자로 선포된 후 김대건 신부의 순교에 관한 신앙 보호관의 진술에서 “그는 조국 전체의 그리스도교의 영광을, 조선 전체의 영적 해방을, 조선 전체의 초자연적 부활을 원했습니다. 조선 전체를 그리스도와 교회에 봉헌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전심 전력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나라를 조선 전채에 확장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자원하여 기쁘게 참아 받았고, 그 밖에도 많은 것을 행하고 감수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재인식하고 선포하여야 합니다. 김 안드레아의 영광은 특히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원의와 서원으로써 뿐만 아니라 실제와 사실로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참되고 착한 제자로서 하느님과 교회의 왕국을 조선 전체에 확장하기 위하여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짊어졌습니다. 우선 이것을 말해야 합니다. 모든 이가 신자들 중에서 빛나는 복자 안드레아의 진정한 최상의 영광의 칭호를 인식해야 합니다.”고 하였다.
Ⅱ. 김대건 신부의 영성
1. 하느님과의 친교
1) 하느님 아버지께 신뢰
모든 일을 하느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처리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에 바탕을 둔 것으로, 그의 모든 행동의 원리였다.
옥중서한을 보면 그가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천주 無始之時로부터 천지 만물을 配設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세상에 두신 爲者(창조주)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곧 하느님께서 내신 대로 그 분의 계획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다.
그는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하다가 중국에서 입국 가능성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긴 여행을 했었다. 그는 여행할 때마다 여러 난관들을 겪게 되는데, 이를 극복하게 될 때마다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안배하심으로 믿고 감사하였다.
1844년 2월 중국 소팔가자에서 경원을 향해 출발한 적이 있었는데, 도중에 정확한 길을 알지 못하여 곤란한 입장에 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을 만나 친절한 도움을 받았다.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1844년 12월 15일 서한에서 당시의 일을 우연한 일로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안배로써’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안배에 대한 깊은 믿음은 옥중서한에서 “세상 온갖 일이 莫非主命이요, 莫非主賞主罰이라. 고로 이런 군란도 역시 하느님의 허락하신 바이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심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삶으로 이어졌다. 1842년 말 백가점에서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고국의 박해 소식을 들어서 입국이 어려운 상황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무사히 들어갈 수 있다고 입국을 추진하였다(1843년 2월 16일 서한). 인간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하느님을 자신이 부족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너그럽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으로 인식했다. 1842년 말 발각될 위험으로 무릅쓰고 국경을 통과할 때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매달렸다(1843년 1월 15일 서한). 스승에게 보낸 옥중서한에서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는 내용의 시편 ‘너 만일 죄악을 살피시면, 주여 뉘 능히 네게 당하리이까’를 인용하면서 끝까지 순교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간구하였다. 어렵고도 긴박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고 힘과 용기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느님을 매우 가깝고도 친밀한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물론 그에게서 하느님을 엄격하고도 존엄하신 분으로 파악하는 전통적인 하느님께 대한 인식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체포된 후 관헌에게 ‘내가 공경하는 하느님은 천지와 사람과 만물을 조성하신 이요, 착한 이를 상 주시고 악한 자는 벌하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은 부분적으로 드러날 뿐, 전체적인 그의 삶을 통해서 볼 때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과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지하고 도움을 청함으로써 인격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2)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
3편의 옥중서한을 보면, 그가 체포되어 감옥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의 고통을 묵상하고 그분과 일치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그에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는 무엇보다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임자’라고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다. 옥중서한에서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같이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라고 하였다. 그가 임자란 말을 통해서 당시 사회 안에서 종이 주인에게 가져야 할 충실성을 바탕으로, 인간이 하느님께 가져야 할 태도와 본분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의 절대적인 주인으로서 인식하고 그렇게 모시고 살 길 원했던 것이다.
성자께서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가졌다. 주님께서 마치 농부가 밭의 곡식을 가꾸듯이 인간을 당신의 은총으로 가꾸신다고 했다. 주님의 은총은 인간을 영적으로 성숙하게 만들고 마침내 구원에로 인도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고 본 것이다. 그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거나 영세 입교하는 일도 주님의 은총으로 믿었다. 이렇게 은총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로서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지 못하였을 대 그는 무엇보다도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것이다(1846년 8월말).
성자를 따르는 데 있어서 충실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충실히 따르지 않거나 배반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으로 가르쳤다.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에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교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에 背主背恩하니, 주의 이름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 그에게 있어서는 박해까지도 주님과의 일치를 더욱 굳게 하는 기회가 될 뿐이다. ‘너희 이런 難時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님의 도우심을 빌어, 三仇를 대적하고 군란을 참아 받아 위주 광영하고 汝等의 영혼 대사를 경영하라’. 이 말은 재난의 때가 시작되면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지만,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이 말씀(루가 21, 7-19)을 생각나게 한다.
성자께 대한 이러한 태도는 그로 하여금 성자와의 일치의 삶을 실제적으로 긴밀히 살도록 이끌었다. 그는 주님 안에서 용기와 힘을 얻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할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 그리스도와 사랑 안에서 긴밀히 일치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결국 생명을 바쳐 순교하게 된 것이다.
3) 성령 안에서의 삶
성령에 관한 기록은 서한안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성령의 활동에 관해 관심을 적게 가졌던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의 반영일 것이다.
그는 박해의 난관 속에서도 그것을 용기있게 극복하고 사도적 활동에 임했다. 이 사실은 성령 안에서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생활하지 않았다면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박해의 환경 속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자신의 사도적 활동에 어떠한 결실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스승 신부님들에게 자신과 조선 교회를 위해 부탁하는 기도로 끝을 맺었다. 또한 그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중국에서 조선 교회와의 연락을 위해 조선 북쪽 국경 부근을 무사히 다녀와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1845년 초 입국하던 중 의주 부근에서 신자들을 만났을 때, ‘기쁨에 넘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하였다(1845년 3월 27일 서한). 이러한 면모는 그의 마음 안에 성령께서 내려 주신 은총의 선물(1 고린 12, 4-11)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2. 교회안에서의 일치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이루어 주는 표지요 도구가 된다는 가르침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는 바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적인 모습이며 그 특성이다. 장상들과, 신자들과 최양업 신부 등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의 교회 안에서의 일치 영성을 보자.
1) 장상들과 함께
그는 1843년부터 페레올 주교(1838-1853)의 도움과 지시를 받으며 입국활동을 벌였다. 1845년 8월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와 함께 귀국하여 사목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르그레즈와 신부와 리브와 신부에게 모두 16통의 서한을 보내며, 마카오를 떠난 이후에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장상들에게 무엇보다도 존경과 사랑으로써 대했다. 페레올 주교에게 쓴 옥중 서한에서 ‘정신적으로 주교님의 발 아래 엎드려 지극히 사랑하올 저의 아버지이시며 지극히 공경하올 저의 주교님께 마지막으로 저의 인사를 드립니다.’고 하였다. 1843년 10월 요동 백가점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만일 직접 대면하여 입으로 말씀드릴 수 있다면 아직도 스승님께 드릴 말씀이 많으나, 편지에 손으로 이 모든 사정을 일일이 적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멈추고 공경하고 경애하올 스승님께 이 작은 아들을 기도 중에 항상 기억해 주시를 청합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성되이 그들에게 서신을 보냈고, 장상들도 그에게 애정어린 답신을 보냄으로써 단순히 의례적인 관계를 넘어 서로의 긴밀한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장상들에 대해 언제나 진정한 순명의 정신을 가졌는데, 입국로를 개척한 일을 비롯한 그의 모든 교회 활동들은 모두 장상들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장상의 뜻이 자신의 인간적인 의지와 달라 고통이 따르게 된다고 해도 철저히 순종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의 순명은 책임감에서 우러나온 순명이었다. 옥중에서 조선에 선교사를 계속적으로 영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방법을 조심스럽게 장상에게 피력하였다. 즉 그는 자신의 의견이 꼭 필요한 것이라고 판단될 때에는 장상에게 겸손된 마음으로 제언을 드렸던 것이다.
그는 교회의 공적인 업무를 자신의 사적인 일보다 더욱 중시했다. 그것은 그가 부제의 신분으로 잠시 귀국하였을 때 자신의 입국 소식을 어머니께도 알리지 아니한 채 귀국 목적인 선교사 영입 준비를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교회와 장상에 대한 이러한 철저한 순명은 바로 그의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심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2) 신자들과 함께
사목활동은 매우 짧았는데, 서한에서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신자들에 대한 커다란 사랑을 엿볼 수 있다.
1844년 5월 17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조선에 있는 신자들은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으나 목자들이 계시지 않아 암흑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밀사에게 들은 그 내용은 신자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1845년 6월 4일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오늘날 교우들이 실제로 또는 확실한 박해를 받고 있지는 않을 지라도 매일같이 죽을 위험에 처하여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가난하고 불쌍합니다.’
1845년 4월 6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선교사 신부님들은 모두 신자들을 위해 계셨고, 신자들은 거의 모두가 신부님들을 위해서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신자들의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열성적으로 돌보셨습니다. 또 신자들은 신부님을 보호하려고 힘껏 애썼습니다. 신자들은 가능한 한 신부님들을 숨겨두려 하였고, 신부님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각오까지 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활동과 긴밀한 애정을 본받으려는 마음을 가지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옥중서한에서 ‘우리 벗아’라고 하였다. 자신의 신자들을 진실로 동등한 벗의 유대관계 안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을 ‘우리 사랑하올 제형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런 칭호들은 그가 계층간에 차별이 있는 당시 조선의 전통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모든 믿는 이들은 한 형제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고 따르려고 했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교우들에게 형제애로써 서로 사랑하도록 가르쳤다. 신자들이 박해의 어려움을 함께 이겨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앗기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다. 서한 말미에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제형들’이라 부르며,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고 간곡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고별인사를 하였다.
그가 조선에 도착하신 뒤에 서울에서도 전교하시고 용인과 그 인근 지방에서도 성사를 주실 때, 교우들이 극진이 그를 사랑하였고, 오로지 신부를 칭찬할 뿐이었다(김 프란치스코 증언). 성사 때면 교회 규식대로 엄하게 하셨습니다(박 글라라 증언). 1년동안 경향으로 다니며 전교하실 때 죄인이 성사 받으면서 한 번 뵈었는데, 도리를 강론하여 모든 교우들을 가르쳐 깨우치심이 지극히 은근하셨으며, 성사도 부지런히 다니며 주셨습니다(이 베드로 증언). 여기서 그는 박해 중에 고통을 겪고 있는 신자들과 깊은 애정 안에서 서로 긴밀한 일치를 이루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3) 동료와 함께
최양업과는 고국을 떠나 멀리 있는 동안 동료로서 서로 도우며 깊은 우정을 키웠을 것이다. 둘은 1842년 고국을 가기 위해 마카오를 출발하면서, 각각 다른 귀국로를 택함으로써 헤어지게 되었다. 옥중서한에서 자신의 체포소식을 알지 못한 채 멀리 중국에서 입국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최양업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모친을 돌보아 주길 부탁하였다.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친구여, 이후 천당에서 서로 만나기로 하세. 그리고 나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보호하여 주기를 그대에게 청하는 바이오.’라고 하였다. 최양업은 김 신부의 순교소식을 그의 순교 후 3개월이 지난 다음 변문 부근에서 교회 밀사들을 통해서 들었다.
3. 성모 신심
교회 초기부터 신자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받아들여진 신심인데, 마리아께 항상 의탁하고 기도하였음을 볼 수 있다.
1) 열렬한 마리아 신심
1843년 초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서한에서 ‘기도 중에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전에 정성껏 저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1844년에 쓴 서한에서 그는 자신의 영성생활에 필요한 물건들로 성서, 매일 묵상책, 성모 무염시태 상본과 묵주 등을 청하였다. 여기서 상본은 1841년부터 조선교회의 주보로 모셨던 무염시태의 성모를 특별히 공경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45년 3월 27일자 서한에서 보면 그는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모님의 보호에 자신을 맡겼다. 의주부근에서 만나기로 한 교우 안내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장소에 그들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다시 만나기로 정한 시간까지 다른 이들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어느 추운 산속에 몸을 숨기고 묵주 기도를 바쳤다. ‘거기에 이르러 저는 ...아주 은밀한 산골짜기를 찾아들어 울창한 숲 속의 어두침침한 나뭇가지 밑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눈이 사방에 깊이 쌓여 산촌이 모두 하얗고 싸늘한데 밤이 되기를 기다리자니 너무나 지루하여 묵주 기도를 수없이 거듭하였습니다.’
2) 마리아의 보호와 도움을 청함
오늘날처럼 마리아께 자신을 봉헌하며 그분을 사랑하고 공경한다든지, 혹은 마리아를 성덕의 모범으로서 본받고자 하는 일 등은 드러나지 않는다.
당시의 박해 상황에서 그는 마리아께 의탁하면서 그의 전구를 비는 기도를 많이 드렸다. 1842년 변문을 거쳐 가난한 나무꾼 행색으로 조선 국경을 통과한 적이 있다. 이때 ‘그 후 130리 되는 길을 걸어가니, 해가 넘어갈 무렵에 의주 읍내가 멀리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예로부터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보호하심에 의지하는 자는 아무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고 확신하면서 성문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1845년 7월에 쓴 서한에서 11명의 선원들과 함께 목선으로 조선의 해안을 떠나 상해로 항해하던 중 겪었던 일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급히 서둘러 충분한 준비가 이루어지지 못한데다가 경험이 많은 사공을 구하지 못한 원인도 있다. 그의 배는 큰 폭풍을 만나 돛대와 키가 파손되고 선원들도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여 탈진한 가운데 거의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사공들에게 하느님 다음으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성모님의 기적의 상본을 보이면서 겁내지 마십시오. 우리를 도우시는 성모님이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그는 항해 중의 극한적 상황에서 오로지 하느님과 마리아의 도움을 간구하였다. 이제 우리는 모든 인간적인 도움을 잃고 오직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기대를 걸고 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고 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바람이 멎고 지나가던 배의 도움을 얻어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출항에 앞서 항해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예견하면서 ‘당신께 대한 경의와 인자하심을 기억하는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가 무사히 강남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게 해 주실 줄 희망하고 있었습니다.’고 하였다.
그는 항해 중에 설상가상으로 해적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자신의 배를 약탈하지 못한 것은 ‘동정 성모 마리아의 보호’ 때문이었다고 확신했다. 이렇게 그의 마리아 신심은 그의 영성생활을 보다 풍부히 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일치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4. 선교영성
교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그리스도 자신의 사명을 이어 받아 전개하고 있고, 교회는 그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누구든지 성령의 은총과 능력으로 활성화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사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없다’고 말하며 선교 활동에 있어서 특별한 영성이 요구됨을 가르친다.
1) 선교에 대한 열성
복음선포에 대한 열성은 복음 선포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마음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복음 선교를 위한 자신의 사명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입국 전에 쓴 서한을 보면, 조선의 포교에 대한 그의 관심이 잘 드러나는데, 조선을 가리킬 때 ‘우리의 포교지’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1844년 5월에 쓴 서한에서 ‘날마다 입국할 날을 고대하고 있다. 조선에 있는 신자들은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으나 목자들이 계시지 않아 암흑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고 하였다. 조선교회에 대한 상황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국을 간절히 바란 것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만이 아니라, 조선교회를 위해 헌신하기 위한 열망 때문이었다.
선교적 열망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조국의 모습에 한 없는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1844년 12월 서한에서 ‘저는 혼자서 슬프다! 이 백성들은 아직 외국인을 귀찮게 여기고 무서워하며 나라에서 내쫓아야 할 원수로밖에 여기지 않는 아주 비참한 야만 상태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그의 조국을 사랑하는 정신이 조국의 복음화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속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전교 가능성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보다 적극적인 선교 활동의 필요성을 피력하였다. ‘외교인들은 우리 종교의 진리를 깨닫고 하느님께 귀화하는 사람이 매우 많으며, 그 중에는 몇 마디 권고를 듣고서 즉시 입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누가 용감히 나서서 그들에게 전교만 하면 종교를 수용할 사람이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선교 활동기간은 체포로 인해 약 6개월 밖에 되지 못했다. 짧은 사목활동에 대해 페레올 주교는 ‘그는 대번에 신자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사제로서의 복음 전파에 대한 헌신을 옥중 서한에서 보면, ‘함께 갇혀 있는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로 힘을 북돋우고 있고, 또 두 예비 교우에게 영세를 주었다.’고 썼다. 감옥안의 극히 힘든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용기있게 전교했다. ‘저의 손, 발, 목, 허리를 어떻게나 몹시 결박하였던지 걸을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고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저는 밤이 이슥토록 저들에게 성교의 도리를 설명하였더니 그들은 흥미있게 듣고나서, 나라에서 금하지만 않으면 자기들도 봉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성을 가지고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통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였다.
2) 선교를 위한 기도
교회는 선교 활동에 있어서 기도가 많은 영혼을 회개시키며 더욱 풍부한 결실을 내는 중요한 요소임을 가르친다.
그의 서한에서 그가 조선의 선교를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도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된 것은 당시 박해로 인한 조선 교회의 어려운 상황때문이었다.
[조선 교회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에서 조선의 선교를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빌며 ‘저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조속히 조선에 목자들을 보내시어 흩어진 양들을 모으시고, 한 목자 아래 한 양 우리를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조선교회를 위해 자신의 활동에 어려움이 있을 때 더욱 하느님께 의지하며 스승 신부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스승에게 보낸 서한에서 당시 조선교회의 상황을 전하며 언젠가는 조선이 천주교에 대한 방향을 바꾸어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열렬히 소망했다. 이는 자신이 조선의 선교를 위해 직접 기도하였을 뿐 아니라 서한을 통해 전 교회에 알림으로써 자신과 신자들 뿐 아니라 전 교회의 기도와 영적인 도움을 청했음을 알 수 있다.
3) 전도자로서의 삶의 모습
복음 전파자에게 있어서 생활의 증거는 복음 선교의 참된 효과를 거두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건이 된다. 교회는 구체적으로 단순 소박한 생활과 기도, 모든 이에게 대한 사랑, 순명, 겸손, 극기 등의 실천을 통하여 성덕의 길로 나아가도록 가르치고 있다. 복음에 대한 이러한 실천적인 응답은 곧 선교 영성의 근본 요소가 된다.
박해 중에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보다는 교우들을 헌신적으로 보호하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문초를 받는 중에 신자들의 거처를 대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관헌들이 큰 소리로 혹형을 가할 것이라고 위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또한 신자들에게 박해를 단련의 시기로 받아들이며 서로의 일치 안에서 신앙생활을 더욱 열렬히 다져 나아갈 것을 가르쳤다. 이 모습은 1 데살 2, 8에 나타나는 사도 바오로의 모습과 통한다.
당시 성직자들은 누구보다도 박해의 표적이 되어 많은 제약과 난관을 겪어야 했고, 그는 몸까지 쇠약해진 상황을 겪어야 했다. ‘제가 할 일은 태산같이 많으나 몸은 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 마음은 간절하지만 한 일은 미미합니다. 현재를 위해서나 장래를 위해서나 이곳 형편을 위해서, 북방의 길을 열어 놓는 일이나 강남으로 출발할 일을 생각하면 제가 준비해야 할 것은 산더미처럼 많지만 병으로 허약해진 몸이 일을 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적극적인 태도를 갖고 임해 나갔다.
그의 사도적 활동에는 물질적인 결핍에서 오는 어려움도 상당히 많이 따랐을 것이지만, 그의 서한에서는 이 어려움을 표현한 대목이 한 군데도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어려움들을 인내로써 극복하며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교회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을 다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가 벌인 적극적인 사도적 활동은 그의 하느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심 때문이었다. 그가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이렇게 수행한 사도적 활동들이 그를 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분명히 복음에 대한 훌륭한 증거가 되었을 것이다.
5. 순교영성
1) 순교의 준비
그는 순교가 하느님 앞에 참으로 영광스럽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순교에 대한 인식은 1843년 1월 요동에서 보낸 서한에 나와 있다. 교회의 밀사로부터 기해박해에 순교한 선교사들의 순교사실을 기록하면서 ‘오! 이분들은 참으로 찬란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얻은 후 황제의 붉은 옷을 몸에 두르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천상 성소로 개선 용사로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는 기해박해 당시 마카오로 간 사실이 드러나서 정부는 그를 체포하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또 사목활동에 임하면서 자신이 언제 체포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매일의 삶을 순교로서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체포된 후 3개월 만에 순교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순교를 앞두고 자신에게 순교의 용기를 주시기를 하느님께 간구하였다. ‘우리가 사형장으로 언제 끌려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자비에 온전히 맡기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고백할 힘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고 하였다.
2) 순교를 통한 증거
그의 순교에서 있어서 우리는 당시 박해 중의 교회 안에 던져 준 증거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1)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사랑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 앞에서 자신이 받드는 천주교를 절대로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논리 정연하게 밝혔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구절은 박해의 고초를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겪었음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
그에게 있어 하느님은 절대적인 존재로써 그의 삶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신자들에게 ‘주의 성의를 따라오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사랑을 자신의 순교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증거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순교를 하느님과 항구한 사랑의 일치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계기로 보았다. 자신이 원하던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의 삶을 순교를 통해서 이루고자 한 것이다. 법정에서 ‘한 번 나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이 면치 못하는 것인데, 이제 하느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나의 소원이니....속히 죽여 달라.’ 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마태 22, 37)의 말씀대로 그 분을 더욱 완전하게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친 것이다.
(2) 그리스도를 본받음
순교는 일찍부터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있어서 가장 훌륭한 방법이며 그분께 대한 가장 큰 사랑의 증거로 인식되어 왔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본받아야 할 이유를 신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데로조차 성교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순교자들이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통하여 형제들의 구원과 교회의 유익에 기여할 수 있다고 가르친 교부들의 가르침과도 연결된다.
그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일치를 위한 노력은 그가 체포되면서 더욱 깊어진다. 옥중 서한에서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묶인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 안드레아’라고 하였고,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옥에 갇힌 안드레아 김’이라고 서명했다. 즉 그리스도 때문에 고초를 받고 있음을 당당하게 밝힌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한 사도들을 생각하게 한다(사도 5, 41).
(3) 복음의 진리에 대한 증거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그곳 관가에서 받은 심문 중에 관장에게 ‘나는 그 천주교가 참되기 대문에 믿는 것이오. 그 교는 천주를 공경하도록 나를 가르치고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 주오. 배교하기를 거부하오.’ 관장이 ‘배교하지 않으면 곤장으로 쳐 죽이겠소.’라고 하자, ‘좋을 대로 하시오. 나는 절대로 내 천주를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감사에게도 ‘그는 천주교에 관하여 저에게 많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즉시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에게 영혼의 불멸함과 지옥과 천당, 천주의 존재와 사후의 행복을 위해 그 분을 공경할 필요성을 이야기하였습니다.’고 하였고, 서울 포도청에서 ‘저는 임금 위에 하느님이 계신데 그 분이 자신을 공경하도록 명하시므로 그 분을 배반하는 것은 임금의 명령이 정당화시킬 수 없는 범죄요.’라고 대답하였다.
순교에서 드러나는 복음에 대한 증거적 의미는 무엇보다도 사형장 새남터에서 한 최후 발언을 통해 확인된다. 처형 직전에 마지막으로 둘러서 있는 이들에게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매 말을 똑똑히 들으시오....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천주교를 믿으시오.’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순교를 통해 복음 앞에 문을 굳게 닫고 있던 조선에서 진리의 증거로 인식되길 원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박해하의 신자들에게 충분히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주었을 것이다.
순교자 공경에는 감사와 전구와 본받음 등의 3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감사는 순교로 순교자들을 현양한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는 것이다. 보호는 보호를 청하는 전구, 그리고 순교자들을 신앙의 증인으로 여겨 그 모범을 본받는 것이다. 이러한 본받음, 즉 모방은 순교신심의 행동인 동시에 그것이 도달해야 할 절정이다.
6. 김대건 신부의 스물 한 번째 서한 (마지막 회유문, 1846년 8월 말)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께서 무시지시(無始之時)로부터 천지만물을 배설(配設)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시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爲者, 즉 창조주)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背主背恩)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과 어찌 같으리오. 밭을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辛苦)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에 이르러 곡식이 잘되고 염글면, 마음의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欽服)할 것이요, 곡식이 염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에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며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께서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염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염근 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義子)로 천국을 누릴 것이요, 만일 염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온 제형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께서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가운데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나게 하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 지니, 예수 승천 후 종도 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성교 두루 무수 간난 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조선이 성교 들어온 지 50-60년에 여러 번 군난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하여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 중을 당하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지심이 없으며, 육정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교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께서 돌아보신다’하고 ‘모르심이 없어 돌보신다’하였으니, 어찌 이렇듯한 군난이 주명(主命)이 아니면 주상주벌(主賞主罰) 아니랴. 주의 성의(聖意)를 따라오매,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받은 세속⋅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 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앗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광영(爲主光榮)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은 자 이십 인은 아직 주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 사람의 가족들을 부디 잊지들 말라.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紙筆)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난시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우(主佑)를 빌어, 삼구(三仇: 세속, 육신, 마귀)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 광영하고 여등(汝等)의 영혼대사를 경영하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구령사(事主救靈事)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修治)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가 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하노라.
부감(조선대목구의 副監牧) 김 안드레아.
세상 온갖 일이 막비주명(莫非主命)이오. 막비주상주벌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또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 같이 섬기다가 사후에 한 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 잘 있거라.
김신부 사정 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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