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학 총정리
□ 생활을 위한 학문으로
실학은 조선 후기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등장한 유학의 새로운 학풍이다.
조선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빚어진 국토 황폐화에 대처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진행했다. 농업생산력 증가와 상업발달이 가져온 결과물 가운데 일부다.
조선사회는 일부 개혁에도 현실생활과 동떨어진 주자학적 성리학이나 형식적 예학에서 잠자고 있었다.
이런 학풍에 대해 반성하고 국가의 총체적 개혁과 대외개방을 지향하려고 일어난 새로운 학풍이 바로 실학이다.
실학은 고대 유교 경전을 깊이 연구해서 국가의 총체적 개혁에 이바지 하는 것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실용을 중시하는 학풍은 조선 후기 실학에만 고요한 것이 아니고 시대 요청에 올바로 부응하려면 어느 시대에나 나타날 수 있는 학문이다.
18세기 전후 실학은 조선 후기 새로운 시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혁방향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탄생하고 14세기 서양의 문예부흥과 비교할 수 있다.
서양의 문예부흥은 자기 시대 문제해결의 길을 찾기 위해 그리스나 로마의 고전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실학도 자기 시대 문제 해결의 길을 찾기 위해 동아시아 고전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문명의식을 지향하는 운동으로 평가된다.
□ 실학의 형성
서양 문물이 16세기 중엽 이후 동양으로 진출하면서 한중일(韓中日 )삼국은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일본은 조총의 수입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통일하고 명나라는 새로운 도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위기를 맞는다. 그 결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은 양란으로 국토가 황폐화 하고 국가를 재건하지 않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조선 정부는 당시 시대과제에 대체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부세(賦稅)제도 개혁이었다,
조선의 부세는 전세, 공물 및 요역으로 이뤄졌다. 그 중에서도 백성에게 가장 큰 부담은 공물이었다. 공물을 전결(田結)의 부담으로 돌려 단일 품목인 쌀로 징수 한게 대동법(大同法)이다.
정부는 인신(人身)을 대상으로 부과하던 군역도 전결의 부담으로 돌렸다. 바로 균역법(均役法)이다.
대동법과 균역법은 복잡한 과세 대상과 과세 물종을 쌀로 통일함으로써 수취제도가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백성들의 생활은 상대적으로 넉넉해지면서 정기시인 장시(場市)를 중심으로 상품경제가 발전했다.
당시 학문세계는 아직도 현실세계롸 동떨어진 이기론(理氣論)이나 사장학(詞章學) 아니면 형식적인 예학(禮學)에 매몰됐었다.
이런 학풍에 대한 반성으로 17세기 중반부터 학문의 목적은 인간 생활 필요에 이바지하는데 있다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실학의 선구이다.
실학 형성의 역사적 배경은 조선 내부에서 추진된 각종 개혁의 전게와 서양으로부터 자연과학의 전래였다.
개혁의 전개는 토지제도 및 군신관계와 같은 제도개혁과 상공업 진흥 및 기술개발을 촉진했고 자연과학 전래는 천문학과 지리학의 발전을 자극해 실학이 성립된 것이다.
실학이라는 학풍의 대두로 점차 학문의 대상은 제도개혁론, 상업진흥론 및 기술개발론, 천문학, 지리학 등으로 서서히 옮아갔다.
□ 실학의 탄생
실학 형성의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 전쟁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개혁의 전개와 서양문물의 전개였다.
우선 개혁의 전개는 국가 운영 및 백성들의 생활 향상 등 현실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은 학문적인 측면에서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서양 문물의 전래는 세상이 더 이상 주자학적인 관념적 의리의 세계가 아니라 객관적인 천지만물의 세계라는 인식을 강화시켰다.
이제 학문 대상이 도덕으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현실문제로 옮겨갔다. 그 중심이 천문, 지리, 군신관계, 토지소유, 상업진흥, 기술개발에 대한 탐구로 나아갔다.
김석문(金錫文 1658~1735)의 천문학,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경세학, 유수원(柳壽垣 1694~1755)의 상업진흥론,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농학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실학이 탄생했다.
□ 실학의 전개
실학은 18세기로 접어들면서 학파로 발전했다.
18세기 전반기의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종장(宗匠)으로 하는 중농학파(經世致用派) , 18세기 후반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을 중심으로 하는 중상학파(利用厚生派,) 19세기 전반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주축으로 하는 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 고증학)로 구분한다.
중농학파(경세치용파)는 국가체제의 개혁을 위한 제도개혁, 중상학파(이용후생파)는 상업진흥 및 기술개발, 실사구시파(고증학)는 학문방법에서 옛날 기록이나 비석 등 유물을 증거로 내세우는 실증을 각각 중요시 했다.
실학의 주요 학파는 조선 사회의 개혁을 지향했기 때문에 목표는 현실생활과 밀접한 학문을 연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서 종래 중국 중심의 학풍을 버리고 조선에 대한 연구학품이 일어났다. 바로 조선의 언어, 역사, 지리, 산업 등을 연구하는 조선학(朝鮮學)이다.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고증학(考證學), 일본에서 고학(古學)이라는 학문이 발전했다. 조선의 실학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 학문으로 동아시아가 서양 새력에 개항한 이후 모두 서구 문화를 수용하는 주체가 됐다.
△ 경세치용파(중농학파)
경세치용파(중농학파)는 백성의 생활 안정을 위해 실용의 입장에서 나라 제도를 개혁하고자 하는 학문을 말한다.
성호 이익은 조선 후기 실학의 계보에서 으뜸인 동시에 경세치용파를 만든 실학자였다. 그는 서양 학문에서 자연과학적 우주에 대한 지식과 지리학에 대한 여러 정보를 수용하고 역사연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백성에 중심을 두고 세상의 여러 제도를 고쳐나가려는 경세학(經世學)에 관한 깊은 연구를 통해 임금과 신하의 관계, 토지제도에 대한 독설적 학설을 만들었다.
제자로는 지리학에서 정상기(鄭尙驥)와 이중환(李重煥,) 역사학에서 안정복(安鼎福), 농학에서 우하영(禹夏永), 경세학에서 정약용(丁若鏞)을 꼽는다.
△ 이용후생학파(중상학파)
이용후생학파(중상학파)는 백성들의 일상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생산수단과 문물제도 및 기구 등을 연구해 특징을 밝히고 현실에 맞에 적용해 나가자고 했다.
이용후생학파 가운데 청나라에 다녀온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서양 문물을 배우자”는 주장한 사람들은 ‘북학파’라고 한다.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서울 부근에서 성립했다, 당시 최대 과제인 무지와 빈곤을 타파하기 위해 상업을 진흥시키고 기술을 개발하며 개국통상을 단행해 조선의 풍속부터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학자로 천문학에서 홍대용(洪大容), 상업에서 박제가(朴齊家), 농학에서 서유구(徐有榘) 등이 있다.
△ 실사구시파(고증학)
실시구시는 ‘사실을 밝혀 진리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는 학문정신을 말한다. 실사구식학(고증학)은 학문연구에서 사료 등의 증거를 통한 고증을 중요시 했다.
19세기 전반 김정희(金正喜)가 중국 고증학자들과 교유하는 과정에서 성립됐으나 정신은 이미 실학의 성립과 더불어 나타났다.
이런 학문 태도는 김정희에게 그때까지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북한산 비봉의 비석이 신라 진흥황 순수비(巡狩碑)를 밝힐 수 있데 했다.
실사구시 약점은 청나라떼 고증학과 마찬가지로 학문적 방법론은 점점 치밀해 가는데 반해 시대적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점점 엷어져 갔다는 것이다.
□ 요약 정리
△ 경세치용(經世致用) : 지날 경(經), 인간 세(世), 이를 치(致), 쓸 용(用)
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실질적인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유학의 한 주장이다.
정치·경제·사회 등 국가사회의 현실적 문제를 다루는 제도와 방법에 관한 구체적 지식이나 실천적 구현을 포함하는 용어다. 본래 ‘경세(經世)’와 ‘치용(致用)’은 두 가지 개념이다.
△ 이용후생(利用厚生) : 이로울 이(利), 쓸 용(用), 두터울 후(厚), 날 생(生)
백성이 사용하는 기구 따위를 편리하게 하고 의식을 넉넉하게 하여 생활을 윤택하게 한다.
△ 실사구시(實事求是) : 열매 실(實), 일 사(事), 구할 구(求), 옳을 시(是)
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리를 탐구한다. 공리공론을 떠나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 객관적 학문 태도를 이르는 것으로 중국 청나라 고증학의 학문 태도에서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실학파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