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문화연구회 11월 답사》
언제:22년 11월 10일
장소 : 대구 도동서원 일원과 한훤당 고택
회비:실비(자체결산ㅡ8만원)
참석자:이세희 외 2명(전체3명)
회비잔액:215540원+75000원(4사분기 문지회 지원금)>>290540원
《도동서원》
ㅡ도가 동쪽으로 왔다?ㅡ
<도동서원ㅡ외증조할아버지를 기리는 한강 정구의 특별한 방식>
도동서원의 주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로 1입니다.
예전의 지번중심 주소에서는 도동리 35번지 였는데
도로명 주소로 바뀌면서 도동서원로 1이 되었습니다.
이는 도동서원이 교육과 향사라는 서원 본연의 역할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오늘날에도 중요한 곳이라는 뜻이겠지요?
아니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서원이 이 지역의 기준점이 되었으니까요
<쌍계서원>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을 기리는 서원이 지금도 여러 곳 있지만
그 중심은 도동서원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도동서원으로 건립되고 사액을 받은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지방선비들의 주도로 건립되면서
현풍읍 쌍계리 풍영대 아래 초곡천가에 세워졌습니다.
지명이 쌍계리인 것은
이 곳에서 초곡천과 구천(현풍천)이 합류하기 때문입니다.
1573년인 선조 6년에 세워져 쌍계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는데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습니다.
서원건립 29년만입니다.
경현록에 의하면
읍내(현풍읍)에서 동쪽으로 2리쯤(10리가 4km이므로 800m 정도)되는 곳에 사당을 세우고
정당은 중정이라 하였으며 동재와 서재는 거인재와 거의재로 하였습니다.
구용료, 구사료, 사물료, 삼성료가 있었고
어린 학생들을 위한 양정재가 있었다는 걸로 보아
그 규모는 오히려 도동서원보다 더 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에도 문이 환주문이었다고 합니다.
종손의 말씀에 의하면
현재는 민가가 들어서 있고 표지석만 있다는데
가보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에도 인가가 가까이 있고 시장이 있어 시끄럽고
공부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고 기록합니다.
무엇보다 한훤당과 직접적인 연고가 없었습니다.
<도동서원>
전쟁이 끝나고 한원당을 기리는 서원을 지으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중심에 한훤당의 외증손자인 한강 정구가 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도동서원의 건립에는
한강 정구의 주도적인 역할이 절대적이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도동서원의 기본적인 구조는 쌍계서원과 동일합니다.
같이 비교하면서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외삼문격인 수월루 아래의 문을 지나면 환주문이 보입니다.
쌍계서원의 문도 환주문이었습니다.
수월루를 생략하고 이 환주문부터 설명하는 이유는
한강 정구의 주도로 서원을 건립할 때 수월루는 없었고
이 환주문이 정문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강 정구의 마음과 의도를 헤아리며 도동서원을 한바퀴 돌아보려합니다.
1.환주문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아주 좁은 계단과 문입니다.
대니산의 가파른 경사를 이용하여 서원을 건립하였기에 계단이 좁고 가파릅니다.
그래서 문을 바라볼 때는 저절로 고개를 들어 우러러 보아야합니다.
계단 시작 부분에 소박한 돌꽃이 새겨져있습니다.
왼쪽의 돌꽃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깨지기도 쉽지않고 깨진 모양도 깔끔하여
누가 일부러 잘라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잠시해봅니다.
그런데 잘려나간 돌꽃이 없어 아쉬웠는지 돌이 스스로 꽃을 피웠습니다.
하필이면 이끼가 한가운데 자리잡아 꽃이 핀 것처럼 보입니다.
돌도 감정이 있나봅니다.
돌꽃 아래 둥근 부분에도 뭔가 문양이 있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 번 답사 때의 사진을 참고하려고 사진을 대충 찍었는데
사진이 통째로 집을 나갔나봅니다.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서면
또다시 작은 돌멩이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앞을 보지않고 급하게 뛰어가다가는 걸려 넘어지기 쉽겠다
생각했다가 잠시 웃음이 나옵니다.
"여기를 어떻게 뛰어가? "
도포자락이 걸리지 않게,
갖신이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 문을 통과할 때는
갓을 붓잡고 고개를 숙여야 할텐데요.
그 때 고개를 숙이면 바로 이 아이와 눈맞춤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잠시 고개를 들어보면 나무꽃 네송이가 보입니다.
무척이나 소박하고 검소한 이 작은 문에
그에 맞는 소박한 장식들을 보물찾기하듯 숨겨놓아
여유있게 둘러보면 작은 미소를 짓게됩니다.
환주문
주인을 부르는 문입니다. 이 문을 들어서면 어떤 주인을 만나게 될까요?
누가 주인일까요?
한훤당일까요?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일까요?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훤당도 한강도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문을 들어서는 사람 모두가
자신을 찾아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되라는 뜻은 아니었을까요?
그 주인을 찾을 때까지 부르고 또 불러
반드시 성공해야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주는 것은 아닐까요?
웃다가 갑자기 시작부터 부담 백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을 찾고 바로 선 사람은 누가 있을까?
아쉽게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과문한 탓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서서 목놓아 자신을 부르고
또 불러야될 사람은 다른이가 아닌 제 자신입니다.
2 .마당
환주문을 겨우 지나서 조금 걷다보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노려보는 녀석을 만납니다.
바로 이 돌거북입니다.
이녀석이 이렇게 쳐다보니 갑자기 옷깃을 여미게됩니다.
발걸음 하나라도 흐트러지면 안될 것 같은 긴장감이 듭니다.
아마도 옛 선비들은 이 순간에
신독愼獨 (혼자 있을 때에도 삼가고 조심한다는 뜻) 두 글자를
떠 올릴 것 같습니다.
경사가 심한 이 곳에서 제일 넓은 서원 마당입니다.
비록 좁은마당이지만
경사가 져서 심한 토사유출이 없도록 단을 쌓아
마당의 면적을 나누고 마당의 높낮이를 조절해 놓았습니다.
이렇게자연스럽게 실용적인 목적으로 나누어진 마당이
다른 용도로도 쓰였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향사나 모임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위계를 정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3. 용두龍頭
서원 강당건물의 기단에는 용머리 4개가 있습니다.
지금은 동재를 공사중이어서 용머리가 다치지 않도록 감싸 놓았습니다.
원래 4개였던 용머리중 3개가 사라져 1개만 원래의 용머리라고 하니
어떤게 진짜인지 찾아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운데 두마리의 용은 물고기를 물고있고
바깥쪽 두마리의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니
확인해볼 일입니다.
어딘가에 사진이 있을텐데요....
그래도 답이 이미 나왔을까요?
이 건물의 기단에 용이 있는 것은
낙동강의 홍수를 막기위함이었다고 하는데 어림없어 보입니다.
아무리 큰물이 나도 낙동강 물이 여기까지 미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화재 예방의 의미겠지요.
절집에 가면 그 수많은 용들도 종교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오히려 화재 예방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목조 건물에 화재가 얼마나 위협적인지는
가까운 과거에 낙산사의 산불에서 충분히 경험했으니
굳이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4.기단
건물아래의 기단입니다.
얼른 눈에 띄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일단 눈길을 한 번 주면 머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는 기단입니다.
몬드리안이 몰래 이 곳에 다녀간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 옛 여인들의 조각보를 건물 기단에서 볼 수 있을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 조상들은 돌을 다듬어
이렇게 조각조각 작은 천조각을 잇듯이 만들어 놓았을까요?
어떤 천재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이 돌들
전국 각지에서 왔다는데....
그래서 색도 모양도 재질도 다 제각각인 돌들을 모아
이런 구조물을 만들었습니다.
서원 건립 비용이 부족하여
한강 정구가 전국의 선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전국에서 보내온 돌이라는데
그게 사실이라도 기꺼이 보내오지 않았을까요?
당시의 선비들에게는 오히려 자신이 보낸 돌이 쓰이는 것이 자랑스러웠을 테니까요.
갑자기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축학적인 아름다움도 추구하면서
건축을 통해 서원의 본질을 제대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
부모도 형제도 지역도 문화도 다 다른
아롱이다롱이 같은 사람들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곳.
그렇게 구현해 낼 수만 있다면
이 장소도, 이 곳에 있는 사람들도 다 아름다울 거라는,
그래서 우리 교육이 추구해야할 궁극적인 목표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에 잠시 젖어 보았습니다.
계단 옆에는 꽃과 동물이 같이 새겨져 있습니다.
동물 모양이 왕릉의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를 닮았습니다.
그림으로 단순하게 동입서출을 보여주는 것도 신선합니다.
오늘날 화장실의 성별 표시처럼
단순하고 쉽고 눈에 뛰며 작은 변화로 아름다움까지 추구하는
그 감각이 황홀합니다.
누가 조선의 선비를 폄하할 수 있을까요?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그냥 뛰어난 예술가입니다.
5.정료대
흔히 다른 건물에서는 마당에 있어야할 정료대가
기단 위 건물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의외였습니다.
목조건물인데?
바로 지붕 이래?
이유가 있겠지요?
여기에 불을 밝히려면 아마도 사방이 막힌 등을 사용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화재를 조심해야 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혹시 잘못 복원된 것은 아닐까 살펴보았습니다.
정료대 자체는 현대의 것으로 보이나
자리는 원래 그 자리가 맞아보입니다.
혹시 기단이 높아 원생들이나 교수가
마당으로 굴러 떨어짐을 방지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요?
6. 현판
도동서원에는 현판이 두개가 있습니다.
먼저 밖에 있는 현판은 퇴계 이황의 글씨를 집자集字
(어떤 사람의 글씨를 그가 이전에 쓴 문헌에서 찾아 모음)한 것입니다.
퇴계에게서도 배웠고 남명에게서도 배웠던 한강 정구는
퇴계가 살아 있다면 기꺼이 현판을 써 주었을 것이라며
퇴계의 글씨를 집자하였다고 합니다.
건물의 안쪽 중정당 위의 글씨는
당시 경상 도사로 있던 배대유의 글씨입니다.
원래는 중앙에서 왕의 명애 의하여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써야하지만
중앙정부는 전쟁뒤의 어수선함과 광해군 시절의 정권의 불안정 등으로
사액은 이미 결정되었으나 현판 제작 등은 지연되었고
따라서 중앙의 재가를 얻어 지방에서 직접 글씨를 쓰고 현판도 제작했다고 합니다.
7.중정당
이 건물의 당호堂號(집, 건물의 이름)인 중정당은
근곡 이관징의 글씨입니다.
근곡 이관징은 해서(한문 정자체)를 잘 썼다고 합니다.
"중정"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중용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지요?
그런데 중용 보다는 조금 딱딱한 음감처럼
그 의미 자체도 조금은 더 엄격하게 적용되어야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시간에서 정오나 자정의 의미처럼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그래서 치우치지않음을 강조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한훤당 선생이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늘 강조한 것이기도 합니다.
중정당의 마루입니다.
뭔가 다른 곳과 차이가 느껴지나요?
가운데의 대청마루와 좌우 온돌방 앞의 툇마루가
같은 높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 싶지만 알고보면 흔치 않은 구조입니다.
분명 여기에도 설계자의 깊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상지上紙
중정당 건물에는 다른 건물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다른 서원에 있는 것이 없기도 합니다.
건물 기둥의 윗부분을 흰 종이로 감쌌는데요 이를 상지라고 합니다.
전국의 모든 서원중 유일하게 이 곳 도동서원에만 있다고합니다.
동방오현 중에서도 수현首賢(으뜸) 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길을 가다가도 멀리서 이 상지가 보이면
말이나 탈것에서 내려 예를 표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서원 아래 낙동강을 지나는 배들도
이 곳에 경의를 표하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마비는 없어도 되겠지요?
도동서원에는 하마비가 없습니다.
8. 중정당 그리고
중정당 앞에 서면 갑자기 가슴이 답답합니다.
한강 정구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나타날 것만 같습니다.
중정당 앞에 서니 이제야 환주문의 기능이 보입니다.
오를 때는 삼가고 조심해서 올라야하지만
일단 안에 들어서면 차경借景(한자 뜻 그대로는 경치를 빌려온다는 뜻임)을 통해
공간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시야를 방해받지 않도록 가능한 작은 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중정당에서 아래의 은행나무가 자라는 것도 보고
강물도 보고 들녘에 보이는 계절의 변화도 느끼고
강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하기도 하고
그 마음이 다시 강을 건너 고령을 지나 북으로 북으로 달릴 수 있게 만들어둔 장치입니다.
그래서 따로 멀리 가지 않고
이 곳에 앉아서도 저절로 호연지기가 길러질 수 있게....
지금이라도 저 수월루는 손을 봐야하지 않을까요?
수월루만 없다면 환주문은 그저 그 풍경 속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생단牲壇
중정당의 향우측(바라보는 방향에서 우측)에는 생단이 있습니다.
이 작은 돌로 된 탁자위에 제례에 쓰일 제물을 올려놓고
적합한지를 검사하는 장소입니다.
검사에서 통과해야 제수로 쓰일 수 있습니다.
이런 시설이 종묘에도 있고 다른 서원에도 있습니다.
9. 사당
서원은 어떻게 보면 교육보다는 제사가 주 목적이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제사가 중심이었고
그럼에도 한 인물을 기리는 서원이 전국에 여러 곳이 있었습니다
그 폐해도 엄청났습니다.
따라서 대원군 시절의 서원철폐령은
사실상 그의 커다란 업적으로 칭찬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도동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살아 남은 서원입니다.
그러니 그만큼 의미있고 중요한 서원이라는 말이겠지요?
중정당 마루에서 보이는 사당으로 가는 계단과 내삼문의 모습입니다.
서당 앞에 섰습니다.
여전히 우러러 보아야합니다.
궁궐의 화계처럼 계단을 만들어 화단을 꾸며 놓았습니다.
자연을 최소한으로 훼손하고
그 이용을 극대화한 현명한 방식이라 생각됩니다.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최소화하지만
높은 경사로 인한 토사유출의 위험등을 계단식 화단을 만들고
꽃과 나무 등 식물을 심어 최소화 했으니까요.
강당영역과 사당영역을 물길을 만들어 구분해 놓았습니다.
왕릉과 궁궐의 금천이 생각납니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도 이 개념을 이용합니다.
도랑을 파서 장마 등 비가 올 때의 물길을 마련하여
물이 제멋대로 흐르지 않게 하여 그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의미상으로는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을
자연스럽게 구분해 놓았습니다.
저 작은 다리를 건너 사당으로 갑니다.
사당은 따로 이름이 없어 문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중간에 새로운 계단이 하나 나타납니다.
오른쪽 계단으로 출입하여야합니다.
동입서출이 아니라 이 곳에서는 사람은 동입동출입니다.
곧고 길게 이어진 계단은 아마도 신이다니는 길인 신로神路일 것입니다.
이 길은 살아있는 사람은 갈 수 없습니다.
향과 축문을 가진 사람만 출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예가 그렇습니다.)
이 신로는 특별합니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또다시 이 정체 모를 녀석이
눈을 부릅뜨고 쳐다봅니다.
멈추어야합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가라는 뜻일까요?
더 올라가면 계단석에 초등학생이 그린것같은 소박한 꽃 한송이를 다시 만납니다.
내삼문 앞에 서서 내려다 보면 이런 모습입니다.
계단의 옆면은 이런 모습입니다.
사당으로 가는 계단의 시작 지점에는 태극 무늬가 있습니다.
그런데 계단이 나누어지는 지점의 계단 소맷돌에는
연꽃봉우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형태상 의미상으로 영역을 구분하고
고졸하고 소박하지만 군데군데 소홀함이 없이 장엄을 하여
사당안에 모신 분을 기리는데 소홀함이나 빈틈이 조금도 없습니다.
사당은 문이 닫혀있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담장 너머로 넘겨다 보았습니다.
특이한 점은 사당 앞에 정료대가 아닌 석등이 있습니다.
선생의 묘소로 가는 길
사당의 벽면이 조금 튀어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보면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굴뚝입니다.
담장 난 쪽의 모습입니다.
조그만 감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축문을 태웁니다.
※사당 벽화
사당 벽면에는 벽화가 있습니다.
누가 그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저는 실물을 보지 못했고 지인의 사진입니다.(재옥아 고마워~~~)
설로장송雪路長松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습니다.
다람재에서 보았던 한훤당의 시는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고 했는데
이 그림 속의 소나무는 눈쌓인 소나무인가 봅니다.
달이 가지에 걸려있고 나무에 눈이 쌓인, 그래도 여전히 푸른 늙은 소나무 한그루
한훤당이 좋아할 것같습니다.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달 밝은 밤에 작은 배 한 척이 강에 떠 있습니다.
船上선상
배 위에서
船如天上坐 선여천상좌
배는 하늘 위에 앉은 듯하고
魚似鏡中遊 어사경중유
물고기는 거울 속에 노는 듯하다
飮罷携琴去 음파휴금거
술 마신 후 거문고 들고 가는데
江心月一舟 강심월일주
강 복판 달빛이 배에 가득하네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소나무 그림은 150×130
배가 그려진 그림은 130×94로 크기가 조금 다릅니다.
10.장판각
지금까지의 건물들은 일직선상에 있습니다.
사당 아래 중정당 동쪽으로 장판각이 있습니다.
습기를 차단하는 것이 최고의 숙제입니다.
그래서 장판각의 사방으로 배수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11.서재와 동재
도동서원의 동재는 거인재居仁齋이고 서재는 거의재居義齋입니다.
보통 서재와 동재가 비슷하거나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동서원의 서재와 동재는 구조가 비슷하여 차이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재는 건물의 기둥이 둥글고 서재는 사각 기둥을 썼다고 합니다.
중정당을 포함한 서원전체가 북향이라 동재는 실제로는 서쪽에 위치합니다.
동서를 나누는 기준이
왕의 경우 군자남면君者南面이라고 하여 바라보는 방향이 남쪽입니다.
실제의 방향과 무관합니다.
그러니 건물에 앉아서 왼쪽이 동쪽이 되는 것입니다.
도동서원에도 이런 원칙이 적용되었습니다.
서재쪽 담장 밖으로는 양몽재養蒙齋가 있었다고 합니다.
양몽재는 20세 이하의 어린 학생들이나
나이가 들어도 학문이 낮은 이들이 원하면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학생들은 자신들이 머무르는 공간에 의해 저절로 서열이 만들어집니다.
동재, 서재, 양몽재의 순입니다.
고직사등 업무공간을 제외하면
한강 정구가 그리고 만든 공간은 여기까지입니다.
얼마나 세심하게 설계하고 연구하고 노력하였는지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과 자신의 지식과 학문의 전부를 쏟아
이 건물들 자체로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자 외증조할아버지인
한훤당 김굉필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이 서원 자체가 한강 정구가 한훤당 김굉필에게 바치는 헌사獻辭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숙종 4년인 1678년에 이 곳에 배향됩니다.
12.수월루
현재 서원의 정문입니다.
명칭은 사당 벽화 선상船上을 읽으면 저절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1846년 헌종 15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철종 14년인 1864년에 중수하였습니다.
고종25년인 1888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1973년에 중건되었습니다.
한강 정구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이 곳의 선비들이
서원의 제도를 갖추려면 누각이 있어야한다면서 건립하였다고합니다.
이 누각이 없던 시절에는
강변에 조한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다른 서원의 누각이 하는 역할을 대신하였다고 합니다.
조한정이 어느 위치에 언제 지어졌고 어떻게 언제 사라졌는지는 모릅니다.
도동서원은 원래 보로동 서원이었습니다.
왜냐면 이 동네의 이름이 보로동甫老洞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동서원으로 인해 동네 이름이 보로동에서 도동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뀐 이름은 동네 이름 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도동서원 뒷산의 이름이 대니산戴尼山입니다.
공자의 이름 중니仲尼에서 온 말이니 서원이 생긴 이후에 산 이름도 바뀌었을 것란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쌍계서원이 불 타 없어진 것이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 선생에게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아름다운 헌사獻辭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니까요.
13. 사족巳足
중정당 뒤에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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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규 님이 당신의 글에 표정을 남겼습니다.
최고예요
심상진 님이 당신의 글에 표정을 남겼습니다.
최고예요
김지선 님이 당신의 글에 표정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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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종석 님이 당신의 글에 표정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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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호 님이 당신의 글에 표정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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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짓기
멤버반경호
반경호
넵 ~ 감사합니다 😄 🙏
회비 잔액 : 290,540 원
이가경 서울64
@반경호
ㅎㅎ
그런거 특히 잘 보셔야합니다
감사합니다 ^^
운곡 김노운
낙동강과 어우러진 도동서원!
소박한 서원의 모습이지만,
은행나무의 당당함이 공부를하는 선비들의 기상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학문을 잘닦아은 붓을 낙동강물에 풀어 봅니다.
가경선생님!
상세하게 기술하여주신데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이가경 서울64
@운곡 김노운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종석
중정당 바짝 붙어 있다면 정료대가 아니므로,
관수대(손 씻는 용기를 올려 놓던 곳)가 아닐까요?
이세희(천안)
강당 앞에 있으니 정료대가 맞는 것 같고요.
원래는 뜰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거북의 목덜미에 불을 올려놓은 형상이 되니
기단 위로 올린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가경 서울64
@이세희(천안)
결국 거북이 때문인거네요?^^
이세희(천안)
그 옛날에도 동물사랑이 각별했던 듯합니다.
이가경 서울64
@이세희(천안)
그렇네요
실제 동물도 아닌데도요
錦輪 최윤희
@지종석
성균관 대성전에서 매월15일에 지내는 제를 본 일이 있는데요.
이동식 관수대를 쓰고 있더군요.
錦輪 최윤희
도동서원은 곳곳에 석조물 조각이 특징이군요.
2019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 서원 9 곳 중 한 곳이라 관심 있었습니다.
이가경 서울64
도동서원
멋있습니다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라고 보시면 될것같습니다
그리고 세부를 보셔야 더 재미있습니다
錦輪 최윤희
@이가경 서울64
대구 자주 가는데
혼자 가 봐야겠군요.
고목 같은 건물들이 마음을 끄네요.
이가경 서울64
@최윤희
혼자 가서 여유있게 둘러보시면 더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