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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포션 이름 (파라샤) | 모세오경 (토라) | 예언서 (하프타라) | 신약 (브리트하다샤) |
아하레이 모트 (죽은 후에) | 레 16:1-18:30 | 말 3:4-24 | 요 7:1-52 |
<단락 1> 1. 레 16:1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제사법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불씨를 통하여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자신들의 편리함을 따라 일반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죽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와 비슷합니다.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는 우상숭배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표현해 줄 형상을 만들고자 했고, 많은 규범이 필요 없는 편의주의적 종교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여호와를 자기 방식으로 섬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 입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시편 25편 14절에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가운데 있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을 가지고 예배자가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1) 요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는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관계 가운데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가 진리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3절에 ‘...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말씀합니다. 이 시대 많은 이들은 자신의 몸을 ‘음란’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의 몸은 단순히 썩어져 없어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기로 결정한 장소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 안에 들어오기로 결정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거룩함을 배웠습니다. 거룩한 시간 (샤밧)을 지키며, 거룩한 장소 (성막)에서 예배하며, 거룩한 음식 (만나)을 먹으며, 거룩한 백성으로 지켜야 할 법 (토라)를 배우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갔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과 입으로 먹는 것과 손으로 만지는 것과 귀로 듣는 것들이 우리의 정욕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경외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육체를 두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육체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1) 히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세상은 돈과 권력과 명예가 있어야 우리가 안식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 가운데 들어가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슈아는 마태복음 11장 28절에 ‘28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슈아의 보혈을 의지하여 주님께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쉼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슈아의 멍에를 메려고 하지 않으며, 여전히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뜻과 우리의 가치와 우리의 계획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슈아의 멍에를 매고 배우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살면, 자유도 없는 노예처럼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권과 권리를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내어드리는 순간부터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며,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과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핵심은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에 죽이며, 하나님께 드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자가 아닌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과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2) 마 25:40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배는 하나님을 소리 내어 찬양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영혼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자의 삶에서 주요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엡 1:12).예배의 히브리어는 ‘아보다’이며, ‘예배, 섬김, 일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예배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단순히 노래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법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보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말씀합니다. 예배의 헬라어는 ‘프로스퀴네오’이며 ‘입 맞춤하기 위해 나아가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증가되어지길 소망한다면, 생각과 감정에 따라서 찬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주님을 찬양하게 되어졌을 때, 그 때 예배의 영이신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증가되어지는 것을 반드시 경험하게 됩니다.
(3) 시 149:6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시 149:6 Let the high praises (높은 차원의 찬양) of God be in their mouth
높은 찬양의 수준에 들어가게 되어졌을 때에 우리의 지식, 감정, 의지적인 혼의 부분과 육체인 부분들이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며, 이 때부터 경배의 시간안으로 (입맞춤)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양날의 칼이 들려 있습니다. 양날의 칼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말씀하며, 에베소서 6장 17절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말씀합니다. 우리가 높은 차원의 찬양은 원수가 두려워하며 떨고 있습니다. 성령의 검의 특징이 있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들어가면 너무나도 가볍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검을 내려놓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검을 내려놓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성령의 검은 무거져서, 내려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지 매일 마다 선택해야 합니다. 성령의 검을 더 단단히 움켜잡는 그 순간,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세포와 조직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 (내가 익숙하게 드려왔던 것)과 체면 (굳이 저렇게 드려야 하나)에 묶여 있는 이들은 찬양의 능력과 성령의 검의 효능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배자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을 때문에 살아가야 할까요!
출애굽기 32장 34절에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 (히 : 욤 파크디)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 (히 : 파카드)하리라’ 말씀합니다. 히브리어 ‘파카드’의 뜻은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정해진 때가 오면 방문하여 최종 결산 하다’ 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믿음으로 심은 예배, 기도, 헌신, 댓가지불, 그리고 예배 때마다 심은 목록들이 예슈아의 재림을 통하여 최종 결산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얼마나 많은 성령의 열매를 삶 가운데 맺었는지, 교회를 위하여 헌신한 모든 것들을 살펴서 상급을 주기 위한 상급 심판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고전 3:8-15, 고후 5:10).
<단락 2>하나님은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을 통해 지성소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고 정한 날에만 들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날이 대속죄일 (히 : 카파르 : 덮다, 속죄)이며, 이 날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는 날을 의미합니다. 대속죄일의 시작은 출애굽기 32장에 나온 금송아지 숭배에서부터 시작되어졌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다시 한번 시내산에 올라가 40일간 금식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죄를 위해 중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대속죄일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속죄를 확정하십니다. 이는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가적인 차원의 속죄와 구속의 사건을 보여주는 예언의 메시지입니다.
2.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셔서 그들이 찌른 예슈아를 바라보게 할 것이며, 예슈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애통과 회개의 영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이 날이 대속죄일 (히 : 욤 키푸르)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가복음 13장 35절의 말씀을 토대로 찬양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 35절에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이를 히브리어로 번역하자면, ‘바룩 하바 베쉠 아도나이’ 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일어나는 일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대속죄일은 신부의 삶을 정결케 하는 날이며, 예슈아와 혼인잔치를 하기 위한 마지막 드레스 리허설 시간입니다. 둘째, 대속죄일은 재판장 되신 예슈아께서 지상 재림하셔서 이 땅을 심판하기 위해 오시는 날입니다. 셋째, 대속죄일은 예슈아의 지상 재림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국가적 속죄와 회개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대속죄일은 가장 거룩한 날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는데, 왜 또 속죄를 받아야 할까요?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개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어린 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구원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또한 각자가 어린 양의 보혈로 사단의 속박에서 구원받고 자유케 되어졌습니다. 그러나 대속죄일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고, 우상 숭배한 죄를 용서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는 회개를 통하여 구원이 완성되어질 때까지 공동체와 함께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으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제사장의 기업은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시 27:4). 그래서 우리는 레위기 (히 : 봐이크라)를 통하여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배워가야 하며, 무엇이 거룩한 것이며, 거룩하지 않은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