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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순교성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6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져 있는 남한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편리한 교통과 수려한 경관으로 주말 등산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산성 내 중턱에 있는 로터리까지 널찍한 도로가 열리고 자가용은 물론 좌석 직행버스가 통행하면서부터는 평일 아침에도 가벼운 차림으로 남한산을 찾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더욱이 도로 양편으로는 깨끗하게 지어 놓은 기념관이나 전시장들이 들어서 있고 산채, 자라탕, 메기탕 등 특산물을 파는 식당이나 숙소들도 충분해 찾는 이들은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울긋불긋한 옷차림을 하고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 중에, 오직 천주를 섬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신앙 선조들이 바로 여기서 처참하게 처형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서늘한 산공기를 마시며 오르는 즐거운 산행길 곳곳에는 순교자들의 굳센 믿음과 꿋꿋한 결의가 서려 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1839년) 이후 처형터가 있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당시 광주(廣州) 일원, 양주(楊洲), 용인(龍仁), 이천(利川)에서 잡혀 온 교우들이 치명 순교한 곳이다.
원래 남한산성이 위치한 자리는 신라 문무왕(661-681년)이 쌓은 주장성(일명 일장산성)의 옛터로 그 후 몇 차례 축조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 2년(1624년) 때 크게 고쳐 지은 것으로 후금국의 위협과 이괄의 난을 계기로 2년간에 걸쳐 축성되었다고 한다.
한옥 형태의 2층 건물로 건립된 새 성당.
성의 둘레는 약 8km에 달하고 높이는 7.3m가량이다. 동서남북 4군데에 문루가 있고 역시 4방위에 각각 장대(將臺 : 옛날에 장수가 올라서서 명령, 지휘하던 대)가 있었는데 현재는 수어장대(守禦將臺)만이 남아 있다. 또 원래 9개의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장경사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으로 들어서는 길은 두 군데로, 서쪽으로는 성남 방면, 동쪽으로는 경기도 광주 방면으로 연결된다. 치명터가 동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순례객들은 동문으로 들어서야 한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서문으로 와서 로터리를 거쳐 동문으로 빠져 나오는 길도 가능하다. 사실 대중교통 편은 성남 방면이 더 노선이 많다.
새로 복원되어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을 자랑하는 남한산성 입구 정문을 지나면 동문이 나온다. 동문 오른쪽으로는 산비탈을 거슬러 올라가며 육중한 성벽이 위용을 자랑한다. 동문을 지나 몇 걸음을 옮기면 오른쪽으로 도랑 건너편에 '천주교 순교 성지'라는 철제 푯말이 서 있다. 여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수가 올라서서 명령하던 수어장대.
"이곳은 서기 1791년 신해(辛亥), 1801년 신유(辛酉), 1839년 기해(己亥), 1866년 병인(丙寅) 네 차례에 걸쳐 한덕운, 김덕심, 정은 등을 위시하여 70명 이상(실제 순교자 2-3백 명으로 추산) 순교한 곳임."
순교성지의 이정표를 본 순례객들은 바로 이곳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막 지나온 동문을 통해 신앙 선조들은 오랏줄에 묶여서 살아서 들어왔지만 혹독한 고문 끝에 결국은 시체가 되어 성 밖으로 던져졌다.
더욱이 살아서 동문을 들어온 이들은 죽어서는 물이 빠지는 구멍으로 성 밑에 파놓은 수구문을 통해 내팽개쳐졌다. 그래서 수구문(水口門)은 시구문(屍口門)이 되었고, 이곳으로 흘러내리던 물도 핏물이 되었으며 동문 밖 계곡에는 시신이 쌓였다.
시구문은 동문을 바라보며 왼쪽 길 바로 밑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얼핏 보면 잘 알 수 없고 얼기설기 철조망으로 가려 놓은 밑으로 잘 들여다보면 어른 두어 명이 허리를 굽히고 다닐 만한 크기의 사각진 구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옆길로 돌아 비탈길을 내려서 시구문 바깥쪽으로 내려서면 마치 당시의 처참한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고 그 험한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내고야 말았던 선조들의 굳은 신앙이 메아리치는 듯하다.
야외미사터 입구에 남한산성에서 백지사형으로 순교한 순교자상이 세워졌다.
동문의 애달픈 이야기를 뒤로 하고 비탈을 따라 1km 정도 걸어 올라가면 남한산성 로터리가 나온다. 로터리는 북문과 서문, 남문으로 가는 길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적절한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좌석 직행 버스가 성남이나 광주 쪽에서 로터리까지 올라오기 때문에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쉽게 성을 둘러볼 수 있다.
이 로터리에 천주교도들을 수감했던 옥터와 처형터가 있다. 동문 쪽에서 올라오면서 로터리에 도착하면 오른쪽에 있는 주차장이 옥터로 추정된다. 정면에는 섭정 10년간 2만여 명의 천주교인을 학살한 것으로 전해지는 대원군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일러 주는 듯하다. 어느 사찰 승려들이 세워 준 것으로 전해지는 불망비와 마주한 곳이 바로 처형지였다고 교회사가들은 전한다. 여기서 처형된 교우들이 시체가 되어 산비탈로 질질 끌려 내려가 동문 밖 개울로 던져졌다.
당시의 슬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터리에는 산행 나온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가득하고 처형터에 연이어 늘어서 있는 식당에서는 오랜만에 특미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남한산성의 피에타상으로 교우들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러주었던 순교복자 한덕운 토마스의 모습을 표현했다.
경기 도립공원인 남한산성은 수림과 유적 기념관 등이 잘 정리되어 있다. 수어장대, 숭열전, 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등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부터 제6호까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본성 축성 당시 창건한 성내 9개 절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경사와 병자호란 기록화 전시장 등도 한번 둘러볼 만하다. 2014년 6월 22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이 신청한 남한산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수원교구는 남한산성 순교성지의 교회사적 의미를 살리고자 1998년 9월 30일 남한산성을 성지로 선포하고, 공영주차장 인근 작은 개천 옆으로 1978년에 마련한 부지 위에 순교자현양비(2004년 9월)와 한옥 양식의 성당을 건립하였다. 성당 뒤편 야산에는 야외미사터와 십자가의 길 14처를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였다. 2015년 4월 25일에는 기존의 협소한 성당을 대신할 새 성당을 맞은편에 건립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새 성당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목구조를 혼합한 한옥 형태의 2층 건물로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기존의 성당 건물은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복자 한덕운 토마스를 기념해 토마스홀로 명칭을 변경해 순례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8년 7월 19일)]
구산, 단내에서 남한산성으로 이어진 순교
남한산성은 병자호란(1839년) 이후 처형터가 있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당시 광주(廣州) 일원, 양주(楊洲), 용인(龍仁), 이천(利川)에서 잡혀 온 교우들이 치명 순교한 곳이다.
호국(護國)과 호교(護敎)를 위한 몸부림이 배어 있는 남한산성(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은 하남시 서부 성당에서 사적지 조성을 위해 힘을 쓰고 있는 곳이다.
이곳의 첫 번째 애환은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양이 위태롭게 되자 인조가 세자와 백관들을 대동하고 피난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인조는 이곳에서 40여 일을 수성하였지만, 모든 사정이 악화되자 결국 이듬해 1월 30일 백관과 군사들의 호곡 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성문을 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와 굴욕의 맹약을 맺은 삼전도에 세워진 청나라 태종의 송덕비를 가리켜 '치욕의 비' 또는 '한(汗)의 비'라 불렀으니, 이것은 곧 '호국의 몸부림'이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39년의 박해 때 남한산성에서는 두 번째 애환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호교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 몸부림은 천상의 승리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신앙인들의 노래는 훗날까지도 이어져 남한산성 한 모퉁이를 치명터로 만들었다. 당시 이곳이 치명터가 된 이유는, 1626년에 산성리가 형성되고 1795년부터 광주 유수가 성안에 거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 일대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모든 부귀와 육신의 고통을 버려야만 했다.
남한산성에서 맨 먼저 호교의 노래를 부른 이는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다가 1801년에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다. 그 뒤를 이어 광주의 거북뫼 곧 구산(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인 김만집(金萬集, 아우구스티노)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2년 초에 남한산성 옥중에서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순교하였다.
한편 김만집의 형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며, 셋째인 김문집(金文集, 베드로)은 김만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다. 이곳 남한산성에서 다시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였다.
바로 그 해 겨울 이천 단내(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거주하던 정은(鄭 , 바오로)도 6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재종손 정 베드로와 함께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의 광주 유수가 그들에게 내린 사형은 일명 도배형 또는 도모지(塗貌紙)라고 부르던 백지사(白紙死)였다. 이 형벌은 먼저 팔과 양다리를 뒤로 하여 나무에 결박하고, 여기에 풀어헤친 상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뿌리고 창호지를 한 장씩 겹쳐 나감으로써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순교한 정은의 시신은 동문 밖에 짐승의 먹이로 버려졌다가 가족들에 의해 어렵게 거두어져 단내에 안장되었다.
박해자의 손길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뻗혔다. 이내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 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당시 김문집의 나이는 66세의 고령이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김씨 집안의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인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경희의 5남이자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경희의 6촌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김교익만이 안면 있는 포교의 도움으로 생환하였을 뿐 모두 순교하였다. 결국 구산의 순교자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하여 모두 7명이 된 셈이다.
한편 가까스로 생환한 김교익은 사형이 집행된 뒤에 매일같이 형장으로 찾아가 김문집과 김성희·경희 등 3명의 시신을 찾아다 구산의 가족 묘역에 보존되어 오던 성 김성우와 김만집 형제의 무덤 옆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김차희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에 의해 거두어져 안양 수리산에 안장되었다가 실묘되었으며, 후손이 없던 김윤희의 시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구산과 단내에서 시작된 신앙을 천상의 영복으로 영글게 한 남한산성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순교자들의 애환과 몸부림이 어려 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순교 터 매입과 사적지 작업은 어렵기만 한 상황이다. '순교자들이 살아서 들어갔던 동문과 배교하지 않고 시체가 되어 나온 시구문' 모두가 우리에게 한 시대의,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다. 오늘도 성지에는 순교자들의 전구가 깃들어 있다.
[사목, 1999년 5월호, pp.107-109, 차기진]
영혼의안식처 남한산성 순교성지
남한산성은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이미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 때에는 최초로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 교수, 장살 등의 방법으로 순교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순교하신 분들 가운데 일부분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병인박해 때에는 백지사(白紙死)라는 특이한 형벌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에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형벌이다.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오자 피를 보는 일에 진저리를 낸 포졸이나 군사들이 쉽게 처형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형벌이 바로 백지사 형이다.
순교자 가운데 행적이 밝혀진 분은 최초의 순교자인 복자 한덕운 토마스를 비롯하여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일가인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김윤심 베드로, 김성희 암브로시오, 김차희, 김경희, 김윤희와 이천 단내 출신 정은 바오로, 정 베드로 등 36명에 이른다.
연령을위한 기도처
남한산성은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이미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 때에는 최초로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 교수, 장살 등의 방법으로 순교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순교하신 분들 가운데 일부분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병인박해 때에는 백지사(白紙死)라는 특이한 형벌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에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형벌이다.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오자 피를 보는 일에 진저리를 낸 포졸이나 군사들이 쉽게 처형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형벌이 바로 백지사 형이다. 순교자 가운데 행적이 밝혀진 분은 최초의 순교자인 복자 한덕운 토마스를 비롯하여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일가인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김윤심 베드로, 김성희 암브로시오, 김차희, 김경희, 김윤희와 이천 단내 출신 정은 바오로, 정베드로 등 36명에 이른다.
한 시대의 사상이나 영성을 단편적으로 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서 신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수원교구 내에서 남한산성 순교성지가 담고 있는 신앙의 유산이나 보배를 한마디로 평가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일이다. 그렇다고 남한산성 순교성지가 담고 있는 신앙의 유산이며 보배인 영성을 묵과한다면 우리 신앙 선조들에 대한 후손으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 것이기에 미력하나마 남한산성 성지에 내려오는 신앙의 유산에 대하여 사목적 입장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남한산성 순교성지가 다른 성지와 구별될 수 있는 특징이며, 현대인에게 주어야 할 유산이며 보배는 바로 남한산성 성지가 신앙의 증거터요, 연령을 위한 안식처라는 점이다. 우선 ‘신앙의 고백터’로서의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박해시대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끌려와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하는님을 증거했기 때문에 붙일 수 있는 명칭이다. 이곳에 잡혀 와서 고문을 당했던 교우들은 자신의 신앙을 일회적이며 부지불식간에 고백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많은 고문과 협박, 회유과정을 겪으면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오로지 ‘애주(愛主)의 용덕(勇德)으로서 신앙을 증거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앙선조들의 혼이 깃든 이곳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모든 고통을 감내한 순교자의 신앙 고백터요, 증거터가 된다. 따라서 이곳을 순례하는 순례자들이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신 신앙성조들의 순교정신을 마음에 새기고 되짚어 봄으로써 평소의 삶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참된 표양’으로서 또 하나의 순교자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신앙이 약한 이들에게는 튼튼한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도와줄 것이다.
튼튼한 신앙의 뿌리는 다시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열심한 신앙생활울 해나갈 수 있는 삶의 활력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이곳능 혹 신앙생활에 회의가 생기거나 믿음이 흔들이는 이들이 찾아화서 신앙을 굳세게 다져가는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남한산성 성지가 연령을 위한 안식처로서, 또한 연령을 위해 기도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고 함은 기록상 이곳에서 최초로 순교하신 한덕운 토마스 순교자의 영성을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한덕운 토마스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울의 저자거리에서 천주교 신앙 때문에 참수를 당하고 방기된 교우의 시신을 거두어 잘 안장해주었는데, 온갖 감시와 박해의 위협 속에서도 이러한 궂은 일을 묵묵히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의 영성이 빛난다, 그러므로 한덕운 토마스처럼 이 곳을 찾는 순례객들도, 각자의 삶의 환경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찾아가 기도하고 또 이미 돌아가신 영혼들이 영원한 안식의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하는 신앙심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덕운 토마스 순교자의 영성은 각 본당 연령회원들의 활동에 꼭 들어맞는 것이므로, 모든 연령회원들이 찾아와서 한 토마스 순교자가 보여준 연령을 위한 자발적 봉사활동의 숭고한 정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며, 또 배워야 할 것이다.
이상의 서술에서 필자는 남한산성 순교성지가 연령들의 안식처이자, 연령회 봉사활도의 모범을 본받는 신앙교육의 장이며, 주님께 한평생 삶의 마지막을 올곧게 봉헌하는 증거터이자 신앙 고백터이므로 신앙생활의 시련기에 처한 교우들에게 다시 굳건한 믿음을 가져다주는 신심 단련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이런 점에서 ‘연령회원들을 위한 신앙학교’ 또는 ‘신앙을 굳세게 해주는 신앙의 증거터요, 고백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복자 한덕운 (토마스) 연령회장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믿으며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여깁니다”.
1752년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한덕운은 1790년 윤지충으로부터 십계에 대해 배운 뒤 입교하여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고, 열심한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이었다.
1800년 10월 한덕운은 가족을 이끌고 광주땅 의일리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교회의 동정을 살펴 볼 목적으로 옹기장수로 변장하고 서울로 올라가 청파동·서소문 등지를 돌아보다가 순교자 홍낙민 루카와 최필제 베드로의 시신을 발견하고 이를 거두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되어 있던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를 만나자 부친을 따라 순교하지 못한 사실을 크게 질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덕운은 위험을 무릅쓰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주는 모범(즉 연령활동)을 보였고, 홍재영을 질책한 사실과 함께 그의 마음 안에 있는 순교의 원의를 드러내었다.
이와 같은 연령활동으로 인해 천주교 신자로 체포된 한덕운은 형조에서 “제가 한 활동은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여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니, 지금에 와서 형벌을 당한다고 어찌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최후 진술을 하였다.
한덕운 순교현향비
남한산성 동문 밖에서 1801년 12월 27일(양력 1802년 1월 30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자신이 턱을 괴어야 하는 나무토막을 직접 손으로 받쳤으며, “한 칼에 내 머리를 베어 주시오”라고 말하였다. 그의 의연한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망나니는 헛칼질을 하였고, 세 번째 칼질에서야 겨우 한덕운의 머리가 떨어졌다고 한다.
한덕운 토마스의 영성은 한국 천주교 연령회 활동의 기원이 되며, 또한 냉담자 권면활동의 본보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시복되었다. 남한산성 홈피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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