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봉서원과 빙월당은 광산구 광산동 광곡마을(너부실)에 있으며, 월봉서원 뒤에는 하얀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백우산이라는 높지 않는 산이 있으며 산세는 주봉인 판사동산이 341m로 대체적으로 얕으막한 야산에 속하는 육산으로 주요 수종의 나무는 남쪽의 소나무보다는 훨씬 생육 상태가 좋아보이는 소나무가 대체적으로 고르고 잘 자라고 있으며, 군데군데 참나무 종류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세월을 조금만 비껴가면 지금보다는 훨씬 식생이 좋아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월봉서원을 가려면 호남고속도로 광산 I/C에서 비아를 거쳐 816번 지방도로를 따라가거나 하남공단 9번도로를 가다보면 816번도로와 9번도로가 만나는 지점에서 50m정도가면 폐교된 하남북초등학교가 보이는데 이곳에서 직진하면 임곡동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장성읍으로 가는 철로변 옆 길로 가다보면 광곡마을이 있고 안내는 잘 되어있고 비교적 찾는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다.
광곡마을 입구에 월봉서원이라는 표지석이 있고 소나무 군락속에 숨은 정자가 보이고 검은돌의 비석이 인가 근처로 보인다.
동네에 들어서면 답답하지 않는 풍경과 여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아름다움이 고샅을 흐르는 도랑가에 은행나무 대나무 향나무 왈버들 느티나무등이 시원하게 맞이 한다.
전체적으로 여유있고 한적하고 시원하고 안옥한 동네이지만 경로당이 아름다운 풍경을 해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으로 눈 앞에 보여 조금만 생각을 하고 집을 지었드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월봉서원 담장 밖에 있는 정자인 백우정)
월봉서원 담장 밖에 있는 백우정이라는 현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도 휴식과 강론의 장소로 한 때는 이용되었을 것을 짐작해 본다.
월봉서원에는 빙월당이 있는데, 고봉 기대승의 사당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의 한식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고 선생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로 1527년 중종22년에 신룡리에서 태어나 1572년 11월에 낙향도중 병세가 위독해져 전북 고부에서 46세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광곡마을에 위치한 월봉서원의 전경)
월봉서원은 고봉 기대승을 주벽으로 박상 박순 김장생 김집을 배향하는 서원이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훼철 된 이후 1978년부터 복원하여 사원과 빙월당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선생의 사후 7년 뒤에 구마봉 아래 낙암(새말)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지금의 산월동인 망월봉 밑의 동천에 다시 건축하였고 1669년에 사우 3칸을 증수하고 송시열 송준길의 주선으로 눌제 박상 사암 박순의 추배가 결정되었고 1673년 당시 서원 증수에 공이 컸던 김장생과 김집을 배향하게 되었다.
월봉서원에 관련된 문헌이나 기록은 상세하게 전해지는 것이 없고 1868년에 훼철된 후 遺址만 보존되다 1978년 후손들에 의해 지금의 광곡마을 즉 너부실에 자리를 잡게 되엇다.
백우산 아래 서향으로 자리 잡은 월봉서원은 다른 서원과 비교하면 주변경관이 매우 뛰어나고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고 사당 빙월당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이 있고 사당과는 담장을 둘러 내삼문을 구획으로 사당으로 통하게 하였다.
사당과 강당인 빙월당과는 2단으로 구획하고 두 영역을 계단을 통하여 오르게 하였고 좌우에 장판각을 두었고 사당과 강당 내삼문과 외삼문이 모두 일직선상에 있어 엄숙한 분위기는 물론 정갈한 느낌이 물씬나게 지었다.
건축양식으로 사당은 정면3칸 측면2칸 반이 팔작으로 전면을 退로 만들었고 초석은 잘 다듬은 원형초석에 원통형 두리기둥을 사용했고 공포는 2익공양식이고 내부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천정은 연등천정과 우물천청을 가설했으며 창호는 빗살문을 이용했다.
강당인 氷月堂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고 안 쪽으로 좌측 2칸은 온돌을 깔았고 3칸은 대청마루를 우물마루 형식을 빌어 깔았다.
기단은 막돌 허튼층쌓기 처석은 원형주초 기둥은 양측의 갓기둥에만 두리기둥을 세웠고 나머지는 방주를 썼다.
장판각 중 먼저 지어졌던 건물은 정면 측면 1칸의 작은 맞배집으로 지어졌고 새로지은 장판각은 맛배집으로 막돌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운 초익공형식이다.
내삼문과 외삼문은 솟을삼문으로 원형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주두나 창방이 없이 보와 도리로만 결속하여 지었다.
고봉집을 비롯하여 목판과 훼철 당시의 현판등이 장판각에 보존되고 있고 빙월당은 월봉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되고 용동마을에 있는 유허와 유허비가 있으며 1979년에 문화제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칠송정 전경)
칠송정은 고봉선생의 아들인 孝曾이 시묘살이를 하던 곳에 건립된 정자로 1987년에 현재의 상태로 복원했으며 퇴락하기 직전의 증수는 1905년에 있었다.
(광곡마을에 있는 고봉 기대승 선생의 문화원 외부 모습)
(광교마을 입구의 솔 숲과 정자의 모습)
고봉 기대승(1527~1572) 조선조 전기에 호남사람의 대표하는 학자 자는 명언 호는 고봉 광산구 신룡동에서 태어나 서경덕 김인후 이황 등의 학맥을 이어 받았으며 퇴계와 하서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을 했고 이퇴계와 주고 받은 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四七理氣論의 변론 후에 퇴계선생은 그의 학식을 존중하게 되었고 문하생이라기보다는 학자로써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
광주의 월봉서원과 나주의 경현서원에 배향되어 있고 고봉집 주자문록 논사록이 전해진다.
박상(1474~1530)연산군과 중종 때의 학자로 자는 창세 호는 눌재로 광주에서 태어났고 시와 문장에 능통하여 신광한 황정욱 등과 함께 서거정 이후의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졌고 석천 임억령 송순 정만종등을 사사했고 송강 정철 고봉 기대승 고경명 등이 문하를 이루며 호남문학과 사상의 중심에 서게 하였으며 눌재집이 전해지고 월봉서원에 배향되었다.
朴淳(1523~1589)자는 화숙 호는 사암으로 화담 서경덕의 문인으로 18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1553년에 문과 일등으로 급제하였고 문하에는 최경창 백광훈등이 있다.
정치적인 명암이 있어 나중에 산림에 은거하게 되었고 후에 문충의 시호를 받았으며 개성의 화곡서원 월정서원 월봉서원등에 배향되었다.
김장생(1548~1631)자는 희원 호는 사계이며 송익필의 문하에서 예학을 전수 받고 이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아들 김집에게 전수 한다.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가 선생의 문하생으로 예학파의 태두가 되었으며 시호는 문원이며 월봉서원 외에도 10여곳에 배향되었다.
김집(1574~1656) 조선조의 문신 학자로 자는 사강 본관은 광산이며 김장생의 아들로 18세에 진사에 오르고 광해군 때 문란한 정치에 염증을 느끼며 은퇴해 버렸고 1623년에 다시 등용되어 김자점이 청나라애 북벌계획을 밀고하자 은퇴하여 송시열과 송길준등과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하여 연구하여 예학의 기초를 세웠다.
시호는 문경으로 문묘와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월봉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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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 겨울에도 변함없이 부지런하신 선생님. 2월까지는 시간이 좀 여유롭습니다. 쉬시는 날 연락 주십시요. 선생님
송천 선생님!오랜만이어라우. 언제 시간내시어 안내 부탁드립니다.^^*...
아침이슬과 숲과사람님 임곡에서 매운탕 한 사발 쏴도 될라나 모르겠네요. 근처에 송순의 면양정가에 나오는 용진산이 있고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나무도 있고 황룡강을 굽어보는 정자와 산림처사가 되어 후학을 양성한 정사도 있고 근대 역사도 함께하는 곳인데 참 아침이슬님 월봉서원도 그 옆에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