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역 6시35분 열차를 타기 위하여
난 그 전날 용산에 도착하여, 걸어서 용산역에 갈 수 있는 곳에서 숙박을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어리한 산골 아낙이 어찌 혼자서 호텔이나 여관에서 잘 수가 있겠느냐는
친구들의 배려로 생각도 못한 곳 <용산 베들레헴집> 에서 일박을 하게 되었다.
행려자들에게 따뜻한 한끼 식사를 대접하는 마음 따뜻해지는 그 곳의 분위기에 젖어서
발걸음이 상큼한 새벽공기처럼 가볍다.
용산역은 처음 와 본 곳이라 나에겐 모든 것이 생소하고 새롭게 느껴지니
역사에서 만난 일행들이 모두 행복으로 다가온다.
난 이번 여행지 예산은 처음 가보는 곳이라 가슴 설레이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예산역에 내리니 일행 한 명이 승용차로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예산역 8시 28분 도착, 요금 12,000원
시티투어 탑승자에게는 열차요금이 20% 할인 된다는 것을
우리는 투어버스를 타고 안내지를 받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
아쉽다. 돌아갈 때는 열차를 타지 않을 건데....
버스터미널 금방에서 투어버스 찾기란 쉽지 않았다.
투어버스 출발지는 너무나 협소하여, 승용차로 몇 번을 돌고서야 찾을 수 있었다.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
버스는 깨끗하고 빈자리가 많아 넉넉한 좌석과 공간을 제공했다.
탑승자가 왜 이렇게 적느냐고 물었더니, 일행중 한 명이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홍보가 덜 되었을 거라고 설명해 주어 이해가 간다.
뭐 덕분에 편안하게 좌석에 가방 올리고 출발이다.
시티투어버스 매주 토요일 10시 출발
예산군청 홈페이지 http://www.yesan.go.kr/culture/sub04_0201.jsp
추사고택 10시30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용궁리라는 명칭으로도 왠지 큰 인물이 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난 천재 예술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조선시대의 유명한 서예가이며
실학자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런 내가 서까래 아래에 걸려있는 세한도를 만났을 때
우리 집 거실에 모조품이라도 한 점 걸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는 세한도는 추사 선생의 대표적인 글과 그림이란다.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내 마음속에서 맥박소리가 빨라지고 울렁거림이 온다.
먼
바다 건너 외딴 섬에 혈혈단신으로 유배 간 추사 선생의 죄 없는 영혼은
뼈가 시린 고독 속에 더욱 갈고 닦여 찬연한 예술 작품으로 꽃피었으리라. 귀양살이의 고통 속에서 지방 유생들을 가르치며 유배객의 처연한 심사를 시서화로 승화 시킨 대 예술가 추사 김정희 선생. "조용히 앉아 있는 곳 반쪽 남은 다향은 처음과 변함 없고 천지의 기운이 오묘하게 돌아 갈 때에 물 흐르고 꽃이 핀다." 세상의 오욕에 찌들지 않고 초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 그 깨달음의 경지를 어림 짐작으로나마 더듬어 보노라니 이번 예산 여행이 내게 과분한 축복임을 새삼 자각하게 된다.
양반 대갓집으로 쟁쟁한 가문의 권세가인 추사선생의 저택이
이곳에 지어졌다는 것은 이곳이 그 당시 살기에도 좋은 곳이고
풍수지리적으로 명성을 날렸을 것이리라.
추사 선생의 증조모이신 화순옹주는 남편이 죽자 곡기를 끊어버리고
자신도 남편의 뒤를 따라서 죽음을 선택하여
왕의 후손으로 유일하게 열녀문을 하사받았다고 하니 부부애가 남달랐을까?
얼마나 남편을 사랑하면 죽음으로 따라갈까?
아니면 가문을 위해서였을까?
이러한 의문들이 유창하신 해설 뒤에 이어진 나의 상념들이다.
백송
어머나, 소나무 표피가 백색이라니!
백송을 처음 본 나는 놀라웠다.
우리 집은 소나무가 삥 둘러 서있는 동네라 하여
마을 사람들이 송골이라 부른다.
소나무 숲속에 살고 있는 나는 희귀한 소나무만 보면 관심이 가고
유심히 바라보게 되는 습성이 있는데 백송은 처음 본다.
희한하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 백송의 원산지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200년 전에 추사 선생께서 청나라 연경에서 씨앗을 가져다 심었단다.
우리나라에 몇 그루 밖에 없다고 하니 왜 좀 더 퍼트리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 이 나무도 오랜 세월을 지켜온 흉터들로 가지도 잘리고
시멘트 기브스를 하고 있으니 앞으로 얼마나 견딜지 모를 일이다.
추사고택 입구에 아들 나무가 자라고 있지만 더 숫자를 늘리는게 좋지 않을까?
이곳 예산에서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추사의 글들을 되새기면서 구석구석 느끼고 싶은데
시간에 쫓겨서 서둘러 추사고택을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다.
11시20분 출발
농촌체험
삽다리 혜림농원 11시45분 도착
추사고택을 떠나, 버스는 삽다리 친환경 방울 토마토따기 체험장으로 향했다.
삽다리는 예전에 가수 조영남의 노래로 익히 들었던 지명이라 정겹게 느껴진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수경 재배로 생산된 방울토마토따기 체험은
수확할 수 있는 기쁨을 직접 접해 볼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고
농촌의 현실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내 손으로 직접 수확한 것을 먹기도 하고, 원하면 구입할 수가 있어서
모두들 방울토마토 한 상자씩 사들고 나섰다.
토마토를 씻지 않고 그냥 먹어도 된다고 안내자가 말했으나
씻어서 먹는 게 좋겠는데...
토마토를 따다보니 손도 많이 더러워졌는데 씻을 수 있는 물도 없다.
화장실도 없어서 애를 먹었다.
더우기 친환경 이라면 인증 간판을 자랑스럽게 걸고
관광객을 맞이하면 좋을 것 인데 그것도 없다.
필자가 농부이다 보니
여행하기 전부터 가장 관심을 가지고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 농촌 체험이었다.
그러다보니 세밀하게 눈에 들어 오는 것도 많다.
나 역시 농촌체험을 준비중이기에...
도시와 농촌이 함께 할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고
우리와 함께 한 여행자들 모두들 즐거워 하는 것을 보면서
농촌체험을 관광상품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좋을 것으로 여겨진다.
중식 12시50분
점심 때가 훌쩍 넘어 버리니 시장기가 돈다.
수덕사 입구에는 많은 식당과 기념품 판매상점들이 여행자를 불러들인다.
커다란 간판으로 잘 정비된 그때 그 집에서
더덕구이 산채정식에 동동주도 곁들여서 우리의 시장기를 해소하였다.
시장이 반찬이라고는 하나 좀 비싸다는 느낌은 우리 일행 모두 일치하였다.
더덕구이 정식 1인분 10,000원, 동동주 10,000원
수덕사 14시
덕숭산에 자리한 수덕사는 유일한 백제 사찰이란다.
나는 왜 수덕사를 비구니 승들의 사찰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내가 기억하는 유행가 가사 때문이리라.
많은이들이 나처럼 잘못 알고 있다고한다.
이곳은 대한 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이며
62개의 말사를 관장하는 대 사찰이다.
초파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여서
하늘을 수놓은 오색 연등이 인간의 소원들을 무겁게 지고 매달려있다.
역사깊은 고찰이다보니 관광객들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연등을 달기위해 어지럽게 설치된 연등걸이와 연등들탓인지는 몰라도
내게는 그곳이 아름답고 좋다는 분위기 보다는 빨리 떠나고 싶다는 느낌이 더 컷다.
해설사의 수덕사의 찬란한 역사 전달도 피곤하게 들리고 ...
다만 대웅전 건물이 다른 사찰과는 다르게 맞배 지붕 건축물인 것이 특이하였다.
맞배 지붕이면 측면 박공밑에 방풍벽이 있을 터인데 탁 트이게 오픈시킴으로써
목재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연결된 아름다움을 그대로 볼 수 있어서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과연 예전 사진을 보니 박공이 가려져있었다.
대웅전 현판은 원담선사께서 직접 쓰신 거라고 해설사 지망생이 설명을 해 주었다.
원담선사 ...난 오래된 인물로 착각했었다.
대부분 유명사찰의 현판들은 아주 오래전 유명하신 분이 쓰신 거라고 들어왔기에...
원담선사께서는 지금도 현존하여 계시고 대웅전 옆 요사채 끝방에 기거하고 계신다니
불교계에서는 굉장히 존경을 받는 분이심을 느꼈다.
난 그 끝방을 향해 눈길로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스님 성불하소서"
옛 멋이 사라진 천편일률적인 연등을 보면서 어지러운 세상을 보는 느낌이다.
처음 온 수덕사이면서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피로가 누적된 탓일까?
충의사 (윤봉길의사 기념관) 15시40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나는 우리나라 건축물 중에 1960-1970년대에 지어진
많은 기념관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콘크리트로 우리나라 전통 나무집을 흉내 냈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충의사도 그 시대 건물이다 보니 예외는 아니였다.
그 시대는 나무보다 콘크리트를 더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이라 그렇다고 일행이 말해준다.
충의사에는 윤봉길 의사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주변 어린이들과 일행이 함께 묵념을 올리면서
당신이 있었기에 나 이렇게 당당하게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다니고 있노라고 감사를 드렸다.
1930년 3월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이라는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망명길에 올랐을 때는
나라없이 살아야하는 설움을 지식인들이나 민초들이나 느꼈을 그 시대
과연 현실에 안주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나는
그 시대 그 아픔을 어찌 느낄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이 글 앞에서니 온몸에 전율을 느끼고 소름이 돋고
내심 나의 삶이 부끄럽다.
이 곳에서 기념관으로 보기에는 너무 현대적으로 만들어진 그저 그런 느낌들이고
다만 그 당시 신문이나 윤봉길 의사의 글을 대하면서
나의 애국심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보부상 유품 전시관
충의사 바로 곁에 전시장이 있으며
이곳에서 조선시대 예산지방의 시장 운영을 볼수가 있다.
봇짐장수(보상) 등짐장수(부상)을 합쳐서
보부상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이 곳에서 알았다.
이 곳을 보면서 예산지역이 단순한 장터가 아니라
중요한 상업이 발전된 곳임을 새삼 알게 되었다.
평야같은 넓은 곡창지대와 삽교천을 통하여
배들도 드나들었을테고.....
그 규모가 대단히 큰 것을 알 수 있었다.
충의사 기념품 상가에 전시되어있는
비록 모조품이었지만 추사 선생의 세한도를 판매하고 있기에
좋아라 하는 마음에 얼른사고 싶었다.
가격도 오천원이면 그리 비싸지도 않을 뿐더러
집에 돌아가 근사한 액자에 넣어 벽에 걸면 멋질 것도 같기에....
그런데 아쉽게도 세한도는 품절이란다 .
나만이 아니고 우리일행들도 사고 싶어하였는데....
꾸짖고 싶은 마음 삼키고 돌아서려니 뒷맛이 씁쓸하다.
내 언제 이곳에 와서 세한도를 살 수 있을런지...
16시 10분에 충의사를 떠나 20분을 달려 예산역에서 일부 여행자들을 내려주고
처음 버스 출발지로 돌아와 투어여행을 마치니 16시 40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승용차로 남연군 묘를 찾아 떠났다.
남연군 묘
이
시대의 최고의 명당이라고 하는 장소에 올라섰다.
뒤에는 산이요 앞은 트인 이곳의 경치는 한마디로 시원스럽다.
이곳의 편안함에 우리는 하루의 피로를 풀기라도 하듯이
모두 좋아들 쉼을 즐겼다.
자리라도 있으면 깔고 누워 한잠 청하고 싶기도 하였다.
아무도 없고 오직 우리만 있어서 일까?
하여튼 이곳이 주는 편안함과 시원스런 경치는
입구에서 보이는 꽃상여로도 흥미를 더해준다.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이구의 묘인 이곳은
많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이하응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라는 풍수지리설을 믿고
가야사 절을 불질러 없애고 남연군묘를 이장시켰다 고 한다.
대원군의 권력에 대한 집요함은 드라마에서나 보아온 나로선
이곳에서도 이종원님의 해설로 느낄 수가 있었다.
어쨌던 12살의 고종은 왕이 되었고
대원군은 어린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하였으니
그는 소원을 이룬 것이다.
더욱 슬픈 이야기는
독일상인“오페르트”가 남연군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함으로 인하여
대원군은 쇄국정치와 천주교를 탄압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 묘터는 과연 명당일까?
그 많은 민초들의 죽음이, 천주교인들의 죽음이
이 묘지로 인하여 생겨난 일이라고 하니....
고봉으로 새로 단장된 봉분 속의 주인공은 어떤 심정일까?
남연군묘 방문은 저물어가는 하루와 어울려 지면서
아직도 명당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언제까지나 우리 민족의 관심사로 남아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푸르름으로 시원스런 산천의 묘터 앞에서 머물러 쉼을 즐기면서도
한켠의 마음 속에서는
비명에 죽어간 영혼들의 울부짖음이 느껴져서 슬프게 다가온다.
덕산온천
덕산 온천에서 일박하기 위하여 우리는 발길을 재촉하였다.
2인실 방에 우리 일행 3명이 들어갔다.
놀라운것은 방에서 욕실이 비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욕실에서는 절대로 방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
2인실이라서 그런가?
우리 일행은 그것을 알고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내 멋진 몸 다 보았지? 해가면서...
물은 나트륨이 많아서인지 매끄러움이 전혀 없었다.
물도 어찌나 찔찔거리며 나오고
배수는 왜그리도 안되던지...
피로 풀려고 욕조에 담가보려던 우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명색이 유명한
온천장에 왔으면서.....
오늘하루 참으로 많은 것을 내 안에 담으면서 다녔다.
충청남도 예산땅을 처음으로 만난 나로서는
커다란 추억거리로 각인되어 내 마음안에 담길 것이다.
멋진 곳 예산...
첫댓글 작은사랑님~애 많이 쓰셨어요~~..세세하고 정성이 가득 들어간 후기 잘 봤습니다~~..저도 수덕사가 비구니 스님 사찰인줄 알았어요~..ㅎㅎ..
수덕사는 비구스님들이 계시는 절이지만, 그 위에 암자에는 비구니스님들이 계시지요...수덕사는 예외로 비구스님과 비구니스님이 함께 기거하는 곳(오해의 소지가 있으려나? ^^)입니다.
수덕사는 山內에 비구니 스님들만의 선방인 견성암이 있습니다..똥땡여사!! 산내암자에 비구니스님 사는 곳은 많소... 법주사도 그렇고...해인사도 그렇고...
정성들여 쓰신 예산 견문록 잘 보았습니다...글을 잘 써 보지 안한 사람들은 글쓰기가 두려울때가 많답니다..저역시도 그렇구요...자기에게 주어진 임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질줄 아는 작은사랑님께 박수를 보냅니다...제가 보기엔 넘 잘 쓰신것 같아요..수고많으셨습니다.
숙제 다 하셨네요 멋지게 잘 쓰셨습니다... 바쁘신데 수고하셨어요
아유~~ 조근조근 잘 하셨네요. 다음 사람들한테 큰 도움이 되겠어요. 후기 땜에 시간 많이 뺏기셨죠? ㅎㅎㅎ
수덕사를 지나 덕숭산에 올랐던 기억을 상기시켜줍니다.. 오르는 길이 이끼낀 돌로 정상까지 이어졌던 천년고찰의 산길이었습니다..더덕주가 맛있었죠..ㅎㅎ먹는얘기만 했네요...작은사랑님 수고많으셨습니다.
작은 사랑님~!!!! 하신다면 하시는 분이시군요.... 대단하십니다...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도 참 어려운 일인데...얼마나 부담감을 느끼셨어요?..작년에 저도 없는 재주 짜내서 쓰느라고 고생 좀 했지요..작은사랑님 이런것도 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 하시면 많은 공부가 되실거예요...맘먹고 하면 못 할 일이 어디 있겠어요?..바쁘신데 너무 수고가 많았어요..이렇게 한 걸음씩 발전 하는거겠지요?...
모든 님들 고맙습니다. 좋은 경험 이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