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아침 우리 동네엔 장대비가 쏟아졌다. 애초에는 신촌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파주 쯤에 내려 여기저기 돌아다녀 볼 생각이었다. 나야 시골출신으로 내리는 비와 부는 바람을 즐기기까지 하지만, 백작부인은 도시태생으로 風雨를 대하는 감상이 나와 다르고 습한 기운을 못견뎌 하는 체질이다. 더구나 이 날은 우리 민족의 광복절이기도 했지만 백작부인의 세례기념일이기도 했다. 이날은 그래서 동반자 백작부인을 버스태우고 기차타서 낯선 길에 내려 세찬 빗길을 걷게 할 수가 없었다. 아늑한 승용차로 떠나기로 했다. 지금은 남북이 막혀 쇄락한 국도 1호선길, 옛날은 의주대로였던 그 길을 빗속에 달렸다. 파주 광탄면 창만리에 있는 '벽초지수목원'을 가보기로 했다.
휴전선에서 잘려버린 의주대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서울~송도(개성)~평양~의주~단동~심양~북경을 가는 중요도로였다. 그 시절에도 국도 1호였을 의주대로(關北大路)는 서울에서 고양을 지나 파주를 거쳐 임진강을 건넌 후 개성으로 통했다. 이 길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이 왔고, 조선은 숭례문을 출발하여 청나라 북경으로 사은사(謝恩使)를 보냈다. 이 길을 조선시대에는 그나마 남았던 자존심에서인지 그 옛적 연(燕)나라 땅이었던 연경(燕京)으로 간다고 해서 조선사신들의 연행로(燕行路)라고 불렀다. 또한 이 길은 빗속에 목숨을 구걸했던 선조(宣祖)의 몽진(蒙塵 왕의 피난)길이기도 했다. 지금은 북으로 막힌 수난의 길...
차를 몰고 길을 나서자마자 억수같이 퍼붓는 비...
얼마를 달려서 의주대로변의 윤관장군묘를 만났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윤관장군의 묘는 피폐해 그 비석도 찾기 어려웠다 하는데, 파평윤씨 후손들이 이제는 왕릉에 버금가게 권역을 정비했다. 사적 323호이다. 윤관 장군은 함경도에 자주 출몰하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9성을 쌓아 국방을 견고히 했다. 벼슬은 문하시중에 이르렀는데 파평 윤씨가 자랑하는 장군이다. 우리가 윤관장군이라 부르지만 실은 그는 무관이 아니고 문관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윗 동네에서 원수니, 사령관이니 대장이니 하는 사람들 중에도 제대로 된 군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다. 비교할 필요도 없는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다른 묘역에선 볼 수 없는 비석이 봉분위에 서 있다. 오른쪽은 윤관장군과 함께 여진족토벌에서 싸웠던 愛馬갸 묻힌 곳이고 왼쪽은 왕이 하사했다는 가마를 묻었다고 해서 비를 세웠다고 한다.
아래 사진 숲 건너편에는 청송 심씨의 묘들이 있다. 윤관장군이 묻힌 이곳은 산송(山訟 묘자리 다툼)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명당자리라는 이 묘역에 영의정을 지낸 청송 심씨 심지원(沈之源)의 묘를 쓴 것이다. 이것이 알려지면서 조선시대에 대단했던 두 가문이 400년 산송이 시작됐다. 왕비를 4명 배출한 윤씨와 3명 배출한 심씨의 자존심 대결이니 두 가문은 임금 영조의 명도 듣지 않았다.
영조실록 40년(1763년) 6월조를 보면 양가 화해를 위해 나라에서 공동제사도 지내준다(命賜祭于高麗侍中尹瓘、故相臣沈之源之墓). 2008년에 이 대단한 400년 다툼을 끝낸 이는 양가문 대종회장이다. 두 가문이 화합하기가 이리도 어려운데 남북의 화해는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우리 민족의 감성은 뛰어나다 못해 질기고 모질다는 생각이다.
남북이 갈리지 않았으면 의주대로변의 풍경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으리라!
여전히 퍼붓는 빗속에 '벽초지수목원'에 도착했다. 碧草池...
비가 너무 내려서 수목원길은 온통 물길이었다. 질척거리는 길을 따라 담은 수목원 풍경들...
나의 감성은 왜 해바라기와 자작나무를 유독 좋아하고... 붉은 칸나꽃에 필이 박히는지 모르겠다!
백작부인 애호하는 장미...
드라마 '꽃보다 男子'의 촬영지라고...
연꽃연못이 있는 '파련정'으로 가는 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날이 개었다. 푸른 벼들이 싱그러운 의주대로...
윤관(尹瓘) 장군
윤관(尹瓘, 1040년 6월 1일 ~ 1111년 음력 5월 8일)은 고려 중기의 문신·군인이다. 숙종, 예종 때 여진족 토벌에 출정하였다. 본관은 파평,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처음 시호는 문경(文敬)이었으나 뒤에 문숙으로 개시되었다.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尹莘達)의 4대손으로 아버지 윤집형(尹執衡)은 검교소부소감을 지냈으며 외가는 신라의 왕족이었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북진 정책을 완수한 공으로 영평(파평)백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숙종 때 2차 여진족 토벌 당시는 원수로 출정하였으나 실패, 강화회담을 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특수 부대 별무반을 창설하여 오연총과 함께 병력을 훈련, 1107년(예종 2년) 3차 토벌 때 대원수에 임명되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군의 원수(元帥)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척준경, 왕자지, 오연총 등과 함께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여진족을 토벌한 뒤, 북방에 9성을 쌓고, 여진족이 재침략하자 이를 진압하고 1108년(예종 3년) 개선하였다. 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내고 동북 9성을 공략하였으며 북방을 방비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의 동북9성 반환 요청이 있자 그는 반대하였으나 고려 조정은 화의론을 주장하여 9성을 되돌려주었고, 1109년 길주성에서의 패전을 이유로 한때 공신호를 박탈당하고 해임 당하였으나 예종의 특별 배려로 복직하였다. 파평 윤씨의 중시조이다. 아들은 윤언이이고, 충혜왕의 장인 윤계종은 윤관의 7대손이었다. 남원 윤씨와 함안 윤씨 역시 그의 후손이었다.[2]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수태보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군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었다. 경기도 파주 출신이다.
여진족 정벌
2차 여진족 정벌 전쟁 실패
윤관 장군 영정 (조선시대에 제작)
1104년(숙종 9) 고려는 임간(林幹)을 보내 여진족과 싸우게 했으나 패했다. 숙종 9년(1104년) 여진족이 나타나 정주를 공격하자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 임간(任幹)에게 방어의 명령을 내려 출정시켰으나 패했다. 사령관인 시랑 임간이 적진에서 전사하고 병사 전사자가 태반이 발생하자 숙종은 임간 대신 윤관을 동북면 행영도통에 임명해 부월을 직접 하사하여 보냈다. 1104년 2월 추밀원사로 재직 중이던 윤관은 2월 21일 추밀원사로 동북면 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에 임명되고 토벌군을 편성하여 완옌부 여진 토벌에 출정하였다.
3월에 여진과 교전하였다. 윤관이 이끌고 간 병력은 적과 교전하여 30명의 적을 죽였으나 윤관 측 군사도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고려군 과반수가 죽고 패하자 일단 저자세로 협상을 요청하였다. 여진족 정벌은 실패했으나 윤관은 겸손한 언사로 회담을 하여 여진족과 강화를 맺고 돌아왔다. 그는 숙종에게 우리는 보병 중심인 데 반해 적은 기병이므로 당할 수 없다고 패전의 원인을 설명하고 병력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1104년 12월부터 윤관은 오연총과 함께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하여 훈련시켰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神騎軍)과 보병인 신보군(神步軍) 외에, 승병 조직인 항마군(降魔軍)·도탕(跳)·경궁(梗弓)·정노(精弩)·발화(發火) 등의 특수군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 겸 태자빈객에 임명됐는데 이때 윤관은 조정에 의논하여 여러 진과 부에 명하여 사철 계속하여 훈련하게 하여 다시 공격할 것을 준비하였다. 여진족 내에서도 고려에 조공을 바치는 온건파와 고려에 저항하자는 강경파가 존재했는데 사자를 보냈으나 여진족이 화의에 응하지 않자 총공격령을 내린다. 이후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승진했고, 1105년 6월 태자소보판병부사(太子少保判兵部事)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고 오연총, 척준경, 왕자지 등을 발탁하였으며 훈련을 강화하였다. 1105년 11월에 숙종이 서거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다시 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다.
예종 즉위 직후에는 국상으로 인하여 출병할 겨를이 없었다. 1106년(예종 1) 9월에는 연이은 여진족 토벌의 실패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수행되는 불교사찰 천수사(天壽寺)의 건립과 낙성을 감독했다.
별무반 조직과 3차 여진족 토벌전쟁
1107년(예종 2년)에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하지 않다는 한 변장(邊將)의 긴급보고를 접하자 여진족 토벌을 주청하였다. 이에 왕명으로 여진 정벌군의 원수(元帥)가 되어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이끌고 부원수에 임명된 지추밀원사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여진족 정벌에 출정하였다. 당시 여진족은 우리나라 동북부에서 만주에 걸쳐 살면서 북부 국경지대인 함흥 지방을 위협하자 고려의 북진 정책에 역행이 되었던 여진족을 소탕하려고 출정하였으나 누차 실패하고 심려 끝에 그 원인이 여진족의 기병임을 깨닫고 왕명을 받아 오연총은 윤관과 특수부대 17만을 거느리고 여진촌락 129개를 쳐서 포로 1030명, 사살 4940명 등 큰 공을 세웠다.
1107년 12월 원수가 되어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명의 군사를 중·좌·우의 3군으로 편성했으며 수군(水軍)까지 동원해 여진정벌에 나섰다. 고려군은 일거에 쳐들어가 여진족을 쫓아내고 9성을 쌓았다. 처음 여진족을 공격하는 척 하다가 후퇴한 뒤, 여진추장에게 사자를 보내 고려가 앞서 잡아둔 여진족 허정(許貞)· 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내겠다고 거짓통보를 하자, 여진족 추장은 400여명의 호송 병력을 보내왔는데, 이때 윤관과 오연총은 이들을 유인하여 거의 섬멸시키고 사로잡았다. 이들을 미끼로 여진족을 유인하게 하고, 이후 윤관은 따로 5만3,000명을 편성하여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중군(中軍)은 김한충(金漢忠), 좌군(左軍)은 문관(文冠), 우군(右軍)은 김덕진(金德珍)으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으며, 수군(水軍)은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 등이 2,600명으로 도린포(都鱗浦)의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윤관군의 기습공격에 눌린 여진이 퇴각하여 동음성(冬音城)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편성하여 추격, 여진족이 재기할 틈을 주지 않고 바로 격파하였으며, 다른 여진군이 숨은 석성(石城)은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공격, 패주하게 하여 섬멸하였다.
여진족의 전략적인 거점을 무찌른 곳은 135개처, 적의 전사자 4,940명, 포로 130명을 생포하였다. 이후 조정에 전승의 보고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획정하고 오연총과 함께 9성의 축조를 감독하였다. 현재 9성의 확실한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흔히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공험진(公鎭)·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으로 추정되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진양진·숭녕진 대신 의주(宜州)·평융진(平戎鎭)을 꼽기도 한다. 윤관은 남쪽지방의 민호(民戶)를 이곳으로 옮겨 살게 했다. 〈고려사〉 윤관전에 기록되어 있는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 의하면 당시 이주한 가구의 수는 함주·영주·웅주·길주·복주·공험진에 병민(兵民) 6,466정호(丁戶)였다.
척경입비도 - 윤관 등이 여진족정벌 직후 국경비를 세우는 장면 (17세기 민화)
9성을 쌓은 뒤 예종에게 건의하여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남도지방의 이주민들이 이곳을 개척하여 살게 되었다. 남도의 이주민으로 6성을 쌓은 뒤 별도의 군대를 편성하여 지키게 하였고, 이 6성 외에 1108년 초 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3성의 수축을 명하여 감독, 9성을 설치하였다.
특히 함흥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어 이곳이 가장 요충이 되었다. 9성을 완공한 뒤 재침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1108년(예종 3년) 출발, 회군하였다. 오연총과 함께 9개의 성벽을 쌓아 국경을 튼튼하게 하고 개선하자 예종은 그와 오연총에게 공신호를 내렸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북진 정책을 완수한 공으로 영평(파평)백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이 함경도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는 반발하여 1108년초에 군사를 이끌고 함경북도 지역을 재침략하여 정면대결을 하게 된다.
4차 여진족 토벌 전쟁
그러나 여진족은 다시 변경을 쳐들어왔고, 1108년 (고려 예종 3년) 1월 오연총, 척준경, 왕자지 등과 함께 별무반을 이끌고 다시 출정하였다. 그러나 가한촌(加漢村) 전투 중 험곡에서 윤관은 오연총과 함께 여진족에게 포위당하고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척준경(拓後京)이 후발대를 이끌고 급습하여 겨우 구출되었다.
영주성 공략에서는 왕자지가 이끄는 군대가 패퇴하였으나 역시 척준경의 용맹과 기지로써 왕자지를 구출하고 여진군을 겨우 물리치게 되었다. 그는 숙종대 왕권강화시책의 한 주역이었고, 예종 즉위 초기의 정책 수행과 여진정벌 추진에서도 중심세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우야소는 다시 여진군 수만명을 이끌고 쳐들어와 웅주성을 포위하였다. 역시 척준경의 지략과 용기로써 적을 패주시켰다. 1108년 3월 30일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00두를 노획하여 포로와 전리품을 가지고 개경으로 개선하여 추충좌리평융 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 拓地鎭國功臣)에 책록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 겸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判尙書吏部事 知軍國重事)에 임명되었다. 이어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 식읍(食邑) 2,000호, 식실봉(食實封) 300호에 봉해졌다.
생애 후반[편집] 여진족과의 화전과 동북9성 반환
한편, 윤관이 예종에게 신임을 받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던 관리들이 윤관을 비방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고려의 정벌과 9성 설치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여진족은 완옌부를 중심으로 모여 무력항쟁을 계속하였고, 사자를 보내 9성을 돌려주고 생업을 편안히 해주면 자손 대대로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면서 9성을 되돌려달라고 애걸하였다. 이에 일부 주화파들은 9성을 되돌려주자고 주장하였고, 윤관과 오연총은 9성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당시 고려는 여진족의 공세 앞에 9성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또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지키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무리한 군사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서 조정에서도 화평론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서쪽에 강력한 요나라와 접경하고 있던 여진은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게 되었으나, 윤관의 9성 축조와 농업이주민으로 말미암아 농경지를 빼앗긴 토착 여진족으로서는 강력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여진은 적극적인 강화교섭을 개시하였으며 7월 3일 예종은 육부를 소집, 회의를 열고 9성을 동여진 우야소에 되돌려주는 것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평장사 최홍사(崔弘嗣) 등 28명은 찬성하고, 윤관과 오연총, 예부낭중(禮部郎中) 한상(韓相)은 반대하였으나 당시 조정은 화평으로 기울어 있었고, 결국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7월 18일부터 9성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뒤에 금나라 태조 아골타(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워 강대한 국가가 된 기반에는 그들이 9성을 다시 되찾은 데 그 원인이 있었다[9][10]고 보는 시각도 있다.
공신호 삭탈과 생애 말년
1109년 10월 여진족이 갑자기 쳐들어와 길주성을 함락시키자 동계병마부원수(東界兵馬副元帥) 오연총과 함께 출정하였다. 그러나 길주성을 포위한 여진족을 다시 치려다가 공험진에서 기습공격을 당하고 공략에 실패,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11월 여진족의 계속된 침범을 막지 못한 책임으로 재상 최홍사(崔弘嗣) 등의 탄핵을 받아 한때 관직과 공신의 자격이 박탈되고 파면되었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했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회군해서는 왕을 만나지도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숙종대를 이어 예종대에도 왕권강화를 위한 정책을 충실히 수행한 정치세력이었으므로, 흔히 패군한 장수가 영구히 관직을 삭탈당하는 것과는 달리 예종의 특별 배려로 다시 복직하였다.
예종 5년(1110년) 복관되었고, 오히려 예종은 윤관에게 문하시랑평장사를 주고 가까이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윤관은 나이가 많고,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곧 사직했고, 그 뒤 독서에 몰입하던 중 그 해 수태보 문하시중(守太保門下侍中) 겸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임명되자 윤관은 표문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예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윤관이 다시 사퇴하려 하였으나 예종은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1111년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후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시호는 당초에 문경(文敬)이었으나 인종 때 예종비의 휘호를 피하기 위해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1130년(인종 8년)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사후 무속에서 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묘는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윤관의 묘는 사적 제323호로 지정되었다.
윤관 장군 묘를 둘러싼 山訟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에 위치한 윤관 장군 묘역(사적 제323호)은 조선시대부터 400여 년 동안 계속된 산송으로도 유명하다.
1614년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이 윤관 장군 묘를 파헤치고 부친 등 일가의 묘를 잇따라 조성하자, 이에 반발한 파평 윤씨가 1763년에 심지원의 묘 일부를 파헤치고 청송 심씨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다툼이 발생한 고양 지역의 군수는 명문가의 다툼에 개입하기를 꺼려 이 문제를 조정에 넘겼다. 결국 당시 임금이었던 영조는 윤관의 묘와 심지원의 묘를 그대로 두고 양 가문이 합의하도록 종용했다.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가 조선시대에 왕비를 각각 4명, 3명씩 배출한 외척 가문이었기 때문에 영조도 섣불리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평 윤씨 가문에서 이에 불복하여 심지원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오히려 곤장을 맞고 귀양가다 병사(病死)하는 등, 두 가문의 불화는 더욱 깊어졌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노력이 있어 왔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2006년 음력 4월 10일, 파평 윤씨 대종회와 청송 심씨 대종회는 파평 윤씨 측이 이장에 필요한 부지를 제공하고 청송 심씨 측이 윤관 장군 묘역에 조성된 청송 심씨 조상 묘 19기를 이장하기로 합의하면서 조선시대부터 392년 동안 이어진 묘지 다툼을 끝내기로 하였다. -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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