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제란 무엇인가?
초현실주의와 한국 현대시
―해방 이후
1.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진부함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지닌
언술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한 브르통의 말처럼, 초현실주의도 좁은 의미에서는 하나의 글쓰는 방식을 일컫는다고 본다면, 그것은
기존의 문화적 전통이라는 권력에 대한 하나의 반담론counter discourse 혹은 대항담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존재의 집’으로서의
언어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사유하는 거대한 기호체계로서 그 자체로 인간을 무한히 억압하는 한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언어의 차원이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 인간의 정신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적 규약이라는 약속에 구속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해방은 말의 해방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며 도구화되고 관습화된 말의 때를 벗기고 말을 해방하는 것은 곧 정신의 해방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이 점을 깊이 안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자동기술을 통해 합리주의의 울타리에 갇힌 말을 해방시키려 한다. 또한 그들은 시적
경이로움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을 구속하는 모든 현실적 논리와 그 권력에 대항하려 한다.
초현실주의자들의 혁명적 이데올로기와 상징적
파괴는 하나의 사회적 상징행위socially symbolic act 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상징적 행위로서의 예술은 직접적으로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기보다 하부텍스트 subtext 로서의 현실을 자신의 형식 속에 끌어들임으로서 ‘역사에 대한 이야기’1)를 우리에게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텔리겐차적 환상’2)에 불과하다든가, 루카치의 이른바 ‘사회주의적 전망 하의 구체적 가능성이 아닌 무한한 추상적
가능성의 문학’이라는 비판, 행동하지 않는 초현실주의의 정적주의를 지적하며, 뒤샹의 작품을 들어 ‘세계에 대한 관념적 파괴일 뿐’이라고 한
싸르트르의 비판들은 그것들이 일정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라는, 즉 상황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 해결방식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소치이며,
모더니즘 시인들이 지식으로서의 어떤 환상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모순적 상황에 대한 ‘절망적 반응’으로서 무의식적인 것이며, 사상의
일관된 체계로서의 세계관과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한 시대의 예술적 재료는 역사적 경험이 침전되어 있는 역사적 과정의 결과이므로 예술가의
사회와의 대결은 재료와의 대결로 일어날 수 있다.3)
시에서 재료는 곧 언어이며 그 언어의 파편들 속에 주체가 드러난다 할 때,
유럽의 초현실주의자들의 시 속에는 유럽인들의 세계고(世界苦)가 응고되어 있다면 한국의 초현실주의적 시인들의 작품 속에는 어떠한 고통과 현실들이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접합의 틈 속에서 그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가가 관심사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대시에 끼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우리는 모든 초현실주의적 행위가 ‘순수한 언어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내면적 격정이거나 철두철미 논리적 측면에서 전개된 절정에 이른
도덕적 반항의 형태’로 한정한 브르통의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2.
해방과 더불어 담론경찰력은 해제되었다고 하나 그
심각할 정도의 언어적 후유증과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의한 경찰력의 등장으로 시적 상상력은 심한 간섭을 받아 경직된 양상을 보였다. 분단이
고착화됨에 따라 한국사회의 지각변동은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양측은 모두 독제체제와 정권유지를 위한 위기조작과 안보논리로 정치·사회적 모순이
확대되었으며 이로 인한 분단논리는 내면화와 무의식화를 이루며 한국문화의 전반적인 풍토를 편협하게 만들었다.4)
박인환의 시는
상당수의 작품이 ‘전통적 발상태’5)에 머물고 있어 방법론상의 모더니티가 대체로 미약하긴 하지만 「식물」, 「抒情歌」, 「木馬와 淑女」 등 몇몇
시편들에서 초현실주의적 발상을 볼 수 있다.
태양은 모든 식물에게 인사한다
식물은 24시간 행복하였다.
식물 위에
女子가 앉았고
女子는 반역한 환영을 생각했다.
향기로운 식물의 바람이 도시에 분다.
모두들 窓을 열고 태양에게 인사한다.
식물은 24시간 잠들지 못했다.
―「식물」 전문
이 시에서 1연과 2연은 새로운 어법으로 신선감을 주면서도 별로
어렵지 않게 의미 전달이 이루어지나 3연부터는 다소 모호해진다. 명징한 논리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모호성의 시학이다. 반역한 환영을 생각하는
식물 위에 앉은 여자란 무엇인가. 이 시는 ‘삶과 죽음,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과거와 미래, 소통될 수 있는 것과 소통될 수 없는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이 모든 것이 모순되게 인식되지 않는 정신의 지점’을 추구한다는 「초현실주의 제2선언문」을 떠올리게 한다. 자유연상을 통해
태양, 식물, 女子의 세 오브제가 급격한 의미 단절을 이루며 천지의 조응과 화해, 그 열락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이 시는 시적 담론의 새로운
차원을 시험하고 있다. 轉位와 몽타쥬에 의한 무의식 세계의 그림을 보여주는 「서정가」라는 시 한편을 더 보자.
失神한 듯이
목욕하는 청년
꿈에 본 <조셉 베르네>의 바다
半연체동물의 울음이 들린다
사나토리움에 모여든 숙녀들
사랑하는 女子는 층계에서 내려온다
<니사미>의 詩集보다도 비장한 이야기
냅킨이 가벼운 인사를 하고
盛夏의
낙엽은 내 가슴을 덮는다.
―「서정가」 전문
도시의 몰락과 전후의 충격 속에 방전되어 있는 초현실주의적 이미지의 몽타쥬
속에서 우리는 소외된 주체의 상처와 고통을 만난다. 인구에 회자되는 「목마와 숙녀」에서도 이질적 사물들이 자유로운 연상에 의해 결합되며 삶의
지향성을 상실한 전후의 허무와 불안을 감미로운 분위기 속에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시에서 우리는 그 발상태가 고정된 형태와 관념을 중시하는
전통적 시작법과는 다른 보다 자유로운 상상력의 전개를 확인할 수 있다.
‘후반기’ 동인 가운데 그 발상법에서 가장 확실하게 서구적
의미의 모더니스트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조향이다. 다른 동인들은 그 시적 발상태가 전형적인 서정시에 더 가깝다6)고 할 수 있어 엄밀한 의미에서
모더니스트로 규정하기에는 다소 주저하게 하는 바가 있는데 비해, 그는 가장 지속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전위적 모더니스트의 태도를 보여준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적인 시법을 거부하며 끊임없는 형식 실험을 보여 주었으며 초현실주의의 소개와 실천으로 일관하여 한국의 초현실주의 수용사에
있어 획을 그을 만한 시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본격적인 초현실주의 수용의 대부라 할 만하다. 그러나 비판적 정신과 구속이 사라진 환상적 세계를
추구하는 초현실주의의 본령과는 달리 그는 현실반영에의 집착을 보여주는데, 이는 초현실주의가 한국적인 굴절을 보이는 부분이 된다. 이 점에서 그의
초현실주의는 30년대의 李箱이나 『삼사문학』 동인의 경우와도 구분된다 할 것이다.
리얼리즘의 건강한 투쟁정신과 차원 높은 예술가의
참여정신이 행복하게 결합될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방가르드 정신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때 이른 기대일 뿐으로, 실제로 나타난 그의
작품들은 진지하고 정직한 고통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유희적 측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자유연상에 의한 의식의 내면풍경의
표출이라든가 꼴라쥬를 활용한 심리분석 그리고 형태주의 기법의 시도 등으로 나타난다.7)
싸르트르가 부정적 관점에서 추상적
부르주아의 이상주의라고 비난한 바 있는 초현실주의의 맹점,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인식과 개혁의지는 매우 미미한 채로 기법의 실험에만 쏠려
있는 양상이다.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갈 정신의 새로움, 즉 초현실주의의 시선에는 무관심한 채로 그 미학의 도식적 전개를 보여준 데 그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그것은 한낱 ‘제도화된 충격’에 불과하다.
①낡은 <아코오뎡>은 對話를 관뒀읍니다.
―여보세요!
<뽄뽄따리아>
<마주르카>
<디이젤.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女人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바다의 層階」 전문
②詩集을안고.빠「지중해」의 辭表.거만한
高架線.과부 구락부. 메가폰. 걸어가는 憲兵 Mr.Lewis.Poker.檢問所의 <몽코코 크림>.聖敎堂에서 街娼婦人과
卒業證明書.i’d like some air.노오란 웃음의.소녀 소녀소녀소녀소녀.die blue blume.防風林 넘에.누워 있는 파아랗지
않은.바다.검은 별.darkness at noon.제2국민병제2국민병제2국민병제2국민병.무말랭이.글쎄요.소년
matroos.<아달린>과.기차를 타고온 民意 代表들의 밀짚 모자와.助淫文學家 무슈 「김」.買辦階級의
疾走.西北航空路에서.無面渡江東.곤봉 정치가의 연설에 관하여.검은 안경.화랑부대 ○○ 高地 탈환.vol de nuit.乙支文德의
미소.<모나리자>는 나이롱 양말을 벗고.<파이프 올간>.
―「어느 날의 MENU」 부분
③‘Cozy
corner’.커피.진한 內出血이다.야릇한 고요가 깔리더니 돌연 물건들이 일제히 웃어댄다.叛亂이다.나는 당황한다. 커피잔이 킥킥거리면서
엿가락처럼 나부죽이 녹아내린다.무람없이 탁자가 낄낄거리며 거드렁거린다.이 웃음가마리.난 꽤 무안하다.난 바깥으로 나가 선다.검은 喪章을 단
虛無.否定의 행렬이 술렁거리는 거리. stranger in town. 어둠의 자락이 펄럭인다.
―「검은 否定의 arabesque」 일부
①은 시인 자신의 해설에 의하면 사물의 존재의 현실적인, 합리적인 관계를 박탈해 버리고 일상적인 의미면의 연관성이 전연 없는
단어들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창조적인 관계를 맺어주는 <데뻬이즈망>(轉位)의 기법을 시험한 작품이다. 그는 이른바 로트레아몽의
‘미싱과 박쥐우산의 미학’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기법에 의해 전위된 각각의 사물을 ‘오브제 objet’라 하고 자신의 시들이
<뽀엠·오브제> poeme objet8)라 주장한다. 일상적인, 합리적인 관념에서 해방시켜버린 특수한 객체 즉 단어의 기묘한 결합,
합성에 의하여 어떤 특수한, 돌발적인 이미지를 내려고 할 때 그 단어 하나 하나가 오브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②의 경우도 미술의
꼴라쥬와 같이 서로 의미상의 연관성이 적은 단어나 문장의 단편들이 자유연상의 법칙에 의해 잡다하게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열거되고 있는
시니피앙들에는 현실의 흔적이 묻어나게 된다. 이를테면 미군 헌병의 이름이라든가 검문소, 제2국민병, 화랑부대 ○○고지 탈환 등은 전쟁과 관련된
시니피앙들인데 이것이 乙支文德, 毛澤東, AGAMEMNON 등으로 시간적 공간적 영역의 확장을 보이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계열화시켜 보면 이
시에는 시인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는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흔적들이 혼효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19세기적인 流動하는
시에 있어서의 시간성이 산산히 끊어져 버리고, 돌발적인 신기한 <이마쥬>들이 斷層을 이루고 있는’ 그리고 ‘의미의 세계를 포기한’
현대시에서 독자가 만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답변은 이렇다.
그것은 의미도 음악도 아니고,순수한 <이마쥬>를
읽으면 그만이다.사람에게 순수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곧 <카타르시스>다.’이마쥬는 정신의 순수 창조’(Reverdy)다.’이마쥬의
값어치는 얻어진 閃光의 아름다움에 의하여 결정된다.따라서 그것은 두 개의 電導體 사이의 電位差의 함수다’(Andre Breton).시인에 있어
이마쥬는 ‘絶對’와 ‘本質’에 통하는 唯一의 通路요,脫出口다.’絶對 現實’은 ‘超現實’이다.9)
즉 초현실적 이미지의 체험이다.
이어 그는 ‘나는 정신의 순수 창조인 이미지에 의해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純粹詩만 쓰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초현실주의적 방법으로 현대의 사회나
세계의 상황악을 그리겠다고 말하고 있어 한국적 초현실주의 수용상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그만큼 시인에게 있어 현실의 중압감이 작용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진보적 현실주의 시인들이 대거 월북한 당시의 문단 상황에서 서정주나 청록파류의 순수주의에 대한 반작용의 일환으로 나타난
현실의식의 일단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미미한 수준이고 초현실주의적 부정의 초보단계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조향의 경우는
오히려 放心 상태에서 자유연상에 의해 幻影처럼 의식면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무의식 속의 이미지의 파편들을 적당한 변용을 주어 몽타쥬한 것들로
호모 루덴스로서의 유희적 측면을 강하게 드러낸다.
③은 자동기술에 가깝다. 명동에 위치한 한 다방 ‘코지 코너’에서의 내적
독백이다. 경악과 물활성의 세계 뒤로 허무의 그림자가 깔린다. 그것은 시대 현실의 중압감으로 인한 운명의 어두움 또는 인간의 반쪽을 이루고 있는
무의식의 빛깔이라 할 검은색의 이미지로 빈출하는데, 그것은 죽음과 허무, 종말의식, 공포와 불안, 악마와 저주와 회의의 빛깔로 퇴색해가는 문명의
그림자들이며, 그의 다른 시들에서 빈출되는 그로테스크 이미지나 현대 사회의 공포와 혼란상을 표징하는 회색 혹은 붉은 색의 이미지, 문명에 오염된
소녀들로 그의 초기시에 자주 나오던 순결한 소녀와의 사랑이 좌절된 모습으로 표상되는 蕩女 이미지와 함께 그의 주요 이미지군을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군을 통한 문명비판적 요소는 미미한 수준이며 유희적 측면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의 세계관 자체가 지극히
폐쇄적이고 주관적이며, 당시의 현실과 현장을 떠난 유아론적 관념세계에 머물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뇌와 당대 인간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결여된 이와 같은 시가 감동을 줄 수 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들 상호간의 상이함은 순전히 겉모습일 뿐, 따지고 보면 이성과
습관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것은 기껏해야 피상적인 메카니즘을 작동시켰을 뿐이며 ‘의식적으로 유도된’사고의 어떤 흐름을 전파했을 뿐으로 시인
자신의 내면속에서 경험하는 구체적인 현실과 단어 사이의 괴리를 오브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초현실주의 자체의 함정에 빠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는 진정으로 욕망을 해방시키거나 새로운 차원으로 인간을 확대시키지도 못한 채 자신이 애써 꾸며낸 하나의 유행, 즉 초현실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구속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세계인식이 허위적인 방식으로 특정의 약호화된 현실해석의 방식에 물들어 그 세계관적 협애성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조향의 초현실주의 시는 전반적으로 근본적인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기법적인 차원의
수용에 그치고 있다. 오히려 그의 문학사적 공적은 도식적이나마 형식면에서의 다양한 실험과 상당히 해박하고 정통한 지식으로 「시어론」, 「시의
발생학」, 「CORTI氏 器官界外」, 「현대시론(抄)」, 「단절의 논리」, 「자동기술법론」, 「objet」론, 「해학론」,「物體詩爛漫」 등의
산문을 통해서 초현실주의의 이론 소개에 한 획을 그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특히 1973년에 그는 <초현실주의 연구회>(뒤에
‘초현실주의문학·예술연구회’로 확대 개명)를 결성하고 1984년 작고하기까지 영도함으로써 초현실주의의 광범위한 확산을 도모했다. 그러나 그의
초현실주의 운동은 문단의 일각에 소외된 채 그다지 큰 반향은 일으키지 못하고 말았는데, 이는 부정의 의식 자체를 지니지 못한 한국인의 보수
성향과도 관계가 있겠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한 시대의 에포크를 이룰 정도의 성취를 이룬 문학적 성과물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과 뛰어난 계승자를
얻지 못한 데에 원인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고군분투했다고 할 수 있는 그의 노력들은 미흡하나마 한국에 있어서의
초현실주의 파급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후 한국 현대시사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의 노고를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이 외에도 50년대 시인 중에 김춘수, 김수영, 전봉건, 김종삼, 김차영, 이봉래, 성찬경, 김구용, 고석규, 김영태 등의 시와
『現代의 溫度』, 『詩作』 등의 앤솔로지에도 초현실주의 작시법의 영향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이들 중 몇몇 시인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한다.
①우리의 廢墟에 우리의 흰 빨래는 ‘白紙의 可能’처럼 널리이고 네
사랑이 더 높은 보람 위에 건축될 것을 네가 約束하는 네
우유빛 약
손가락의 太陽이 깃드러 반짝이는 한없이 동구란 金빛
―「銀河를 주제로 한 봐리아시옹」 3 부분
②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들었다.
―「피아노」 전문
전봉건의 시에는 초현실주의의
기법이 대체로 무난히 용해되고 있는 것 같다. ①에서 보듯 탄탄한 현실인식의 기반 위에서 비교적 활달하게 초현실주의적 미학이 구사되고 있고,
②에서도 매우 감각적인 영상에 의한 동적인 전개를 보이며 자유로운 연상작용에 의해 이미지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오히려 몇몇
<후반기> 동인들의 시보다도 훨씬 더 기능적으로 초현실주의 미학이 실천되고 있다 하겠다.
김구용의 경우는 다분히
토착적인 풍모를 지닌 초현실주의로서 방대한 동양적 고전섭렵에 바탕을 둔 한국적 자의식의 자동기술10)과 추상명사의 도입을 통한 내부의 혼란의
표출을 보여주고 있어 이색적이다.
①玉은 바다를 기른다.
어둠은 가지가지 잎사귀를 뿜어
소리가 層진 女子를 연다.
말(馬) 壁을 하나하나 뚫어 달리며
괴로운 기쁨이 사과(檎)를 맺는다.
쇠와 織物은 붙들고 춤을 춘다.
담배연기는
어제와 맞잡고 춤을 춘다.
視線이 맞닿는 산과 강물에
婚禮는 행복을 위해 병들며
秋收를 위해 시든다.
―「八曲」
다섯째수,일부
②숲을 지나
順한 냄새를 내려가면
양편 沼는
盤石에 박흰 눈(眼),
새벽을 담은
가슴으로
階段이 휘어든다.
滅影에서
그녀의 손은 나온다.
‘잡아 주세요.
당신 마음에 가득차도록’
―「一曲」 마지막 수,일부
③비누 거품은 배가 고프다면서 꺼지고
밥상은 불평을 하다가 없어지고
壁은
신음하다가 사라지고
옷(衣)은 웃다가 없어졌다
내가 하품을 했더니
周圍는 한꺼번에 사라졌다.
醫師는 박물관으로
실려가는
나를 보고는 당황했다.
그날 밤에 물고기 비늘이 돋은 나는
鐵門을 열지 않고
굴뚝으로 빠져나왔다.
―「四曲」 네째수 일부
河賢埴은 김구용의 시에 드러나는 초현실의식을 ㉠비논리성을 특색으로 하여 경이적인 정신세계를
표출한다는 점, ㉡무의식적 영감을 바탕으로 환상적인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점, ㉢역설적인 언어구사에 의한 언어적 효용성의 창출, ㉣의식작용의
한계를 깨뜨려 상상력을 무한 확대시킴, ㉤언어의 폭력적 결합.충돌에 의한 새로운 의미의 창출11) 등으로 열거한 바 있는데 위의 시에서 그러한
요소들이 잘 드러나고 있다.
①에서 우리는 ‘쇠’와 ‘직물’,’담배연기’와 ‘어제’의 결합이나, 바다를 기르는 玉이라든가 잎사귀를 뿜는
어둠 등의 이미지를 통해 상상력의 확대와 환상적인 물활성의 세계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주로 이질적 사물들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②에서는 다분히 동양의 선적인 인식에 의한 眞空妙有의 세계상이 초현실적 이미지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시세계는 동족상잔의 처절한
현실과 그 모순상을 시적으로 반영한 결과라 할 것이다. 초현실주의의 ‘편집광적 비판분석법’에 가까운 방법으로 표출시킴으로써 ‘표현도의 독자성’을
획득한 시인으로 평가되는
③에서도 우리는 외부의 현실세계를 正視한 후 그것을 일차 해체하고 다시 그것을 편집광적인 연상과 해석에 의하여
재구성하는 내적 비판정신을 볼 수 있다.
①물
닿은 곳
神羔의
구름 밑
그늘이
앉고
杳然한
옛
G.마이나
―「G.마이나」 전문
②오라토리오 떠 오를 때면 遼遠한 동안 된다
牧草를 뜯는
몇 마리 羊과
天空의
最古의 城
바라보는 동안 된다.
―좧헨쎌라 그레텔」 전문
김종삼의 위의 시들에서 우리는 음악의 세계를 통해 현실의 고통을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나는 초현실적 환상을 체험하게 된다. 음악은
가장 영혼의 상태에 가까운 예술 장르로서 ‘환상에 의한 구원’이라는 김종삼 초기시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기도 하다.
①활자
사이를
코끼리가 한 마리 가고 있다.
잠시 길을 잃을 뻔 하다가
봄날의 먼 앵두밭을 지나
코끼리는 활자 사이를
여전히
가고 있다.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코끼리,
코끼리는 발바닥도 반짝이는
銀灰色이다.
―「은종이」 전문
2)물또래야 물또래야
하늘로 가라,
하늘에는
주라紀의 네 별똥 흐르고 있다
물또래야 물또래야
금송아지 등에 업혀
하늘로 가라.
―「물또래」 전문
김춘수의 후기시에서도
초현실주의의 미학은 쉽게 발견된다. ①의 경우 우리는 ‘서로 거리가 먼 두 현실을 접근시킬 때 발생하는 강렬한 이미지의 섬광’, 즉 데뻬이즈망의
미학을 만날 수 있다. ②는 ‘언어에서 의미를 배제하고 언어와 언어의 배합 또는 충돌에서 빚어지는 音色이나 意味의 그림자 그것들이 암시하는
제3의 自然 같은 것’12)이라 설명한 이른바 ‘무의미시’의 하나로서 의미를 배제한 뒤에 마지막으로 남는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초현실주의의 순수의식과 일맥 상통한다.
여보세요. 앨비의 아메리칸 드림예요. 절망예요.
八월달에 실려주세요. 절망에서
나왔어요.
모레면 다 돼요.二백매예요. 特種이죠.
머릿속에 特種이란 자가 보여요. 여편네하고
싸우고 나왔지요.순수하죠.
앨비 말예요.
살롱 드라마이지요. 半島호텔이나 朝鮮호텔에서
공연을 하게 돼요. 절망의 여운이에요.
미해결이지요. 좋아요.
만족입니다.
―김수영, 「電話이야기」 부분
위의 시는 마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 나오는 몰리의 독백처럼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자연스런 무의식의 용출을 보여준다. 김현승이 「슈르(초현실주의)의 수법을 터득」한 시인이라 평한 시인답게 그의 시에는 복잡한 현대인의
무의식의 단면, 즉 그 혼돈 속의 질서를 보여주는 이른바 ‘주관적 생의 흐름’ stream of subject life 을 기술한 것이 많다.
특히 김수영의 시에서는 유우머 감각과 함께 긴박한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
3.
60년대에 들어오면 초현실주의는 거의
육화되어 개별 시인들의 시 속에 힘과 속도감을 불어넣게 된다. ‘현실이 야기하는 모순’을 행동으로서가 아닌 ‘시로서’ 극복함으로써 모순된 현실에
도전하고자 했던 『현대시』 동인들의 시는 ‘내면의식의 탐구’라는 기본항을 공통성으로 지니므로, 이들의 시에선 심층 무의식과 언어의 탐구가
다양하게 전개된다. 이들 중에서도 식민지 시대에 인식적 측면에서 언어의 조건과 그 한계에 심도있게 다가갔던 李箱으로부터 김춘수의 ‘무의미시’를
거쳐 60년대로 이어진 우리 시사의 한 흐름을 이어받아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장 줄기차게 언어의 실험과 주체의 내면 탐구를 지속해오고 있는
시인으로 이승훈이 있다. 그는 ‘비대상’이란 독특한 시론을 개진한 바 있는데, 여기서 비대상이란 노래하는 대상이 없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즉
세계 상실의 시대에 그는 전통서정파 시인들처럼 한가롭게 자연세계나 일상세계를 노래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 즉 내면세계를 노래한다고 한
대담13)에서 밝힌 바 있다.
사나이의 팔이 달아나고 한 마리 흰 닭이 구 구 구 잃어버린 목을 쫓아 달린다. 오 나를 부르는
깊은 命令의 겨울 지하실에선 더욱 진지하기 위하여 등불을 켜놓고 우린 생각의 따스한 닭들을 키운다. 닭들을 키운다. 새벽마다 쓰라리게 精神의
땅을 판다. 완강한 時間의 사슬이 끊어진 새벽 문지방에서 소리들은 피를 흘린다. 그리고 그것은 하아얀 液體로 변하더니 이윽고 목이 없는 한마리
흰닭이 되어 저렇게 많은 아침 햇빛속을 뒤우뚱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事物A> 전문이다. 햇빛 속을 뛰어가는 목을
잃어버린 한 마리 흰닭이란 매우 초현실주의적 이미지인데, 이는 보이지 않는 어떤 닭으로 내면세계의 황량함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승훈의
초기 시집들은 거의 이런 이미지들로 점철되어 있다. 개인적 무의식에서 터져나오는 어둡고 환상적인 이미지들은 언어의 자발성과 규제성 사이의, 혹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고투의 산물이겠는데, 이는 개인적인 고통이 환상을 통해 초월되는 과정이라 여겨진다.
이승훈은 자동기술법을
나름대로 수용하고 이질적 사물의 폭력적 결합이라는 데뻬이즈망의 기법을 육화시켜 한국적 초현실주의시의 진경을 보여준 시인으로 기록될 만하다.그의
초기 시집의 어떤 시를 보더라도 이러한 특성은 쉽게 발견되는데, 가령 「권태」라는 시를 보더라도
나는 맨발로 계단을 오른다 붉은
닭들이 몰려온다 그렇게 고이는 시간의 연기 꿈의 힘 때문에 나는 다시 내려온다 내려오면 難破하는 귀 하나 맴돌고 맴돌다 죽는다 그래서 다시
계단을 오른다 계단 위의 안개, 하얀 植物의 등불 나는 무서워 곧장 또 뛰어 내려온다 내 정신의 폐가 바람 속에 맴돌고 맴돌다 죽으면 또 죽은
기억이 맨발로 계단을 오른다 아아 더럽다 오르지 못하고 곧장 올라간 것처럼 생각하면서 굴러 떨어지는 내 두개골은 아마 내일 아침엔 다시 맨발로
계단을 오르지 못할 것이다
자유로운 연상에 의해 걷잡을 수 없는 감정과 관념들의 소용돌이를 표출하고 있다. 그리고 조향에게서 빈출되었던
검은 색의 색채 이미지는 이승훈의 경우 흰빛, 소위 ‘실존적 현기’를 상징한다고 보이는 흰색 이미지가 빈출하는 것도 한 특색이다. 이승훈의
이러한 지극히 개인적인 무의식 세계의 표출은 간혹 그의 시가 자아도취적이며 유아론적이란 비난에 직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시인은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시인관이나, ‘시는 독백의 양식’이라고 여기는 시관이 초래하는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이건청의 초기시들에도 자유분방한 내면적 환상이 초현실적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어 초현실주의적 발상법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손금」이란 시를 보자.
정신의 어느 時刻을 연다. 불을 켜는 나의 헛간에 말들이 잠자고 있다. 선반에 놓인 내 손의 심연에서
기어나오는 불개미떼,문득 날개가 돋더니 일만 개의 방패를 든 어둠이 된다. 막강의 어둠 속에서 운명의 초록빛 별이 달리며 채찍을 친다. 헛간의
고리를 풀고 누군가 나를 놓아준다. 어둠을 털고 달린다. 다섯 손가락의 밤이 내리는 구부러진 小路를 달리고 있다.
주관적 의식의
심층에서 전개되는 이미지들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환상적이다.젊음의 고통이 배어있는 내면의식의 색채는 어둡고 칙칙하며 여러 오브제를 따라 펼쳐지므로
역동성을 지닌다.
새벽길로 달려간다.흔들리는 캄캄한 손들,뼈가 보인다.까마귀가 날아와,가지가 휘어졌다.기울어진 길로 말이 말을
싣고 뛰어간다.신경은 짧게 울고 문은 열린다.사면이 흰 방엔 독수리가 피를 흘린다.죽은 숲이 흔들린다.먼지를 쓴 채 놓여있는 귀,메스와 바늘이
보인다.눕혀진다.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진다.
―「구시가의 밤」 일부
이상과 꿈이 좌절된 자의 고뇌가 각인된
무의식의 세계가 속도감있게 펼쳐지고 있는 위의 시 역시 어둠과 상처의 흔적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전쟁의 상처와 관련14)이 있다. ‘어둠은
어둠을 노래함으로써 초월될 수 있다’ 는 그의 제2시집의 명제처럼 이 시는 현실의 모순을 시로서 극복하려는 한 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겠다.
이러한 이승훈과 이건청의 한계를 벗어난 곳에 이성복의 시가 놓인다.
앞에서 필자는 진정한 아방가르드 정신을 리얼리즘의 건강한
투쟁정신과 차원높은 예술가의 참여정신이 결합된 형태일 거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거기엔 진지하고 정직한 고통이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인식과 개혁의지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기본적인 출발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시인으로 이성복을 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의 조향을 비롯한 몇몇 초현실주의자들의 시가 취하고 있던 소승적이며 유희적인 입장을 벗어나, 대승적 입장에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갈 정신의 새로움을 보여주는 초현실주의 시인 이성복은 자아가 몸담고 있는 모순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허위를 드러내며, 그것으로부터 초래되는
삶의 상처들로 점철된 우리들의 무의식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는 일상인들의 그 불감증을 치유하는 길은 그들로
하여금 정신의 아픔을 자각시키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시인은 나태한 인식에 충격을 가하는 한 방법으로 초현실주의의 자유연상에 의한 경이로운
이미지의 전개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 허위와 모순과 아픔을 자각할 때 진정한 인간 해방의 길은 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잎이
나기 전에 꽃을 내뱉는 살구나무,
중얼거리며 좁은 뜰을 빠져나가고
노곤한 담벼락을 슬픔이 윽박지르면
꿈도, 방향도 없이
서까래가 넘어지고
보이지 않는 칼에 네 종아리가 잘려나가고
가까이 입을 다문 채 컹컹 짖는 中年 남자들!
네 발목, 손목에
가래가 고인다,벌써 어두워!
―「봄밤」 부분
‘잎이 나기도 전에 꽃을 내뱉는 살구나무’는 도착된 세계의 모습을 환기시킨다.
날은 벌써 어둡고 중년의 사내들은 술에 취해 ‘컹컹’거리는 추하고 타락된 삶의 모습이 그려진다. 자유연상에 의한 속도의 관성이나 이질적 사물의
폭력적 결합에 의한 당돌하면서도 충격적인 이미지 전개는 동일하다 하겠으나, 한형구의 지적처럼 ‘자의식의 유아론적 세계를 드러냄으로써 자기치유의
방법론으로 일컬어지는 모더니즘’(초현실주의도 과격 모더니즘의 한 갈래라 할 때)의 세계에서 ‘타인을 향한 세계를 모색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모더니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15)으로 유의미하다 하겠다.
눈이 온다 더욱 뚜렷해지는 마음의 수레 바퀴 자국
아이들은 찍힌 무우처럼 버려져 있고
전봇대는 크리스마스 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눈」 부분
산문적 호흡
속에 현란하게 구사되는 날카로운 일상적 파편의 몽타쥬 속에서 사물과 사물은 새로운 관계로 결합되며 우리의 안이한 인식에 충격을 가한다. 그의
시에서 기존의 권위나 도덕률이나 가치관은 여지없이 파괴된다. ‘상징적인 우상파괴’16)로서 아버지가 파괴되고 정상적인 사랑이나 가족·조국·생활
그 모든 것이 그의 시 속에서 희화되고 파괴된다. 억압된 잠재의식을 해방시킴으로서 인간 해방을 이루고자 했던 초기 초현실주의자들이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랭보적 명제와 아울러 ‘세계를 개혁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적 명제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듯이 이성복은 세계의 허위를 폭로하고 이
땅 이 자리에 있는 삶의 한 조건으로 그가 지녀야만 했던 아픔과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환기를 통한 치유의 길을 모색한 듯 싶다. 이성복보다 조금
더 과격한 방법으로 타성에 젖은 우리의 인식에 충격을 가해오는 시인으로 박남철이 있다.
박남철의 시는 1930년대 이래 감행되어
온 우리 시의 여러 형태 파괴적 실험의 축적 위에 놓여 있다. 그의 시정신의 바탕에 놓인 ‘부정의 정신’은 띄어쓰기의 무시, 활자의 전복,
자동기술, 꼴라쥬, 구어와 비속어 사용, 사진이나 그림, 수식 혹은 화학방정식의 도입 등 다양한 형식 실험으로 융합된다. 그것은 일상적 삶의
궁핍과 어두운 시대적 현실에서 기인되는 ‘닫혀있는 사랑’과 ‘우리들의 失明’을 통곡하는 비극적 세계인식의 소산이다.
어머니그리하여母校의시계탑에서새벽종이우울릴때비로소그리하여우우우내방도헐벗은깊은닻을내리고눈물의촛불도후꺼지고쌀씻는소리도들리는데요
스스슷 스슷슷 뱀 한 마리조차 스러지는데요
그런데 도대체 저 불안한 소리는
도마질하는 소리 도마질 소리는
내 영혼을 명멸하던 이유 없던 별 하나의
누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가 나는 뭉크의 비명처럼
악몽과 식은 땀이
흥건해요 살려주세요 어머니이이
―「언젠가 태양의 바다」 부분
내적 독백에 가까운 위의 시에서 우리는 ‘누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 것과 같은 위협과 악몽의 시대로부터 터져나오는 절규를 들을 수 있다. 자유로운 연상에 의한 상상력의 확대와 정신의 해방감, 억압된
삶에서의 자유를 추구하는 그의 시적 실험은 두 번째 시집인 『반시대적 고찰』에 오면 더욱 과격해진다. 화면을 의도적으로 백지화시키고 있는
텔레비전 시리즈는 자유로운 시간을 억압하고 사고를 통제하는 매스컴의 해독과 우리의 왜곡된 언론상황을 풍자한다. 이러한 박남철의 시는 현실의
부조리 앞에서의 절망을 벗어나기 위한 반항의 한 형태로 초현실주의의 주요 기법을 이루는 ‘검은 유머’의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암울했던 80년대의 억압된 현실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사회적 상징행위이기도 하다. 「주기도문,빌어먹을」이나 「독자놈들 길들이기」, 「광인일지」
등은 사회의 경직된 관습과 질서를 조롱하는 유쾌하고 대담한 반담론을 통해 초현실주의 운동의 목표이기도 한 ‘반항’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이 외에 73년 조향 주도 하에 결성된 <초현실주의 연구회>는 다양한 토론과 실험적인 습작을 지속하며 동인지
『雅屍體』·오브제』 등을 통해 그 성과물을 남기고 있다. 이들은 문단과 괴리된 채 문학강연회와 실험극 공연, 시 퍼포먼스 등을 지속하며
초현실주의 정신의 구현에 힘썼다. 초기 회원이었던 소한진·송상욱은 ‘소아병적 영웅주의와 속된 문단 출세에 급급한 나머지’ 초현실주의의 올바른
사상과 방법론을 오도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이 단체의 앙드레 브르통적 존재였던 조향에 의해 제명되자, 『시와 의식』 그룹을 결성, 앤솔로지에
이은 계간지 발간을 통해 나름대로의 초현실주의 확산에 기여하게 된다. 한편 1950년대 후반기 동인의 멤버였던 조향·김차영을 포함한 당시
모더니스트들(김종문,박태진 등) 이 다시 모여 이루어진 『전환』 그룹 역시 脫抒情을 기치로 내세우며 사화집을 발간하다가 1992년 겨울호부터
계간지로 전환하여 초현실주의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이들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별고를 요한다.)
4.
극단적인 양면성과 다면적인 양상에다 그 자체가 지닌 미완의 동적 측면 때문에 초현실주의의 개념을 명확히 한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좁은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글쓰는 방식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의 철학적 태도인 동시에 어떤 신비주의, 어떤 시학, 어떤 정치학을 뜻하기도
한다.17)
지나치게 타산적인 문명의 굴레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초현실주의자들은 메마른 지성을 거부하고 대신 약동하는
생명의 힘을 되찾고자 했다. 그러므로 초현실주의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건 한계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선택된 사람들의 생명적 약동의 형태인
동시에, 예술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정신의 모험으로 볼 수 있다. 문명에 의해 억눌린 욕망과 본능의 영역, 초현실의 영역으로 침잠하기 위해
그들은 심리적 자동 현상에로 몰입하기도 했으며, 리비도의 심연을 탐사하기 위해 신비와 꿈과 광기의 세계를 탐험하기도 했다. 이들은 블랙 유머와
아시체 놀이, 초현실적 오브제, 데뻬이즈망 등 여러 가지 창작기법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러한 초현실주의가 일본을 거쳐 한국에
수용되면서 우리의 현대시 발전에 여러 모로 기여하게 되는데, 그것은 산발적인 양상으로 개별 시인들의 시 속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고 할
수 있다. 기법적 차원에서 흉내내던 초기 단계로부터 보다 심층적인 실존적 고뇌와 시대적 아픔을 드러내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초현실주의는 그 이념과
기법이 두루 수용되고 응용됨으로써 한국의 현대시에 폭을 넓혀 왔다. 그러나 하나의 에꼴로서의 초현실주의는 30년대의 <삼사문학>
그룹이나 70년대의 <아시체> 그룹이 존재했다고 하나,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 채 문단과의 괴리 현상이 벌어졌는데, 그
원인으로는 초현실주의 자체 내의 한계성과 아울러 한국인의 기질적인 폐쇄적 사고 경향과 不過思考18)습성 및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상황의
특수성으로 인한 전위 기피콤플렉스에 기인하는 점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한 시대의 에포크를 이룰 정도의 성취를 이룬 문학적 성과물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과 뛰어난 계승자를 얻지 못한 데에 있다 할 것이다.
인간 해방을 향한 자유의 정신과 오브제를 통한 경이의 미학
창출이라는 초현실주의의 윤리와 미학은 경직되고 자동화되기 쉬운 말의 억압을 뚫고 편협한 상상력을 확대시켜 우리 시의 깊이와 넓이를 더하게
했으며, 우리 시가 더욱 유창한 리듬과 속도감을 갖게 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내용출처 : http://www.poemworld.co.kr/reboard/content_list.php3?id=2887&custom=%C7%D1%B1%B9%B8%ED%BD%C3+%BA%F1%C6%F2&list_num=&page=1&sort=name&sortmode=ASC
답변들
re: 시의 오브제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오브제를 사용한 시작품은 무엇이 있을까요? (투표결과 : 2/6)
chengmok (2004-06-16 15:47 작성) 이의제기
<넥타이를 매면서>
넥타이를 목에 걸고
거울을 본다 살기 위해서는 기꺼이 끌려가겠다는 의지로 내가 나를 묶는다 한 그릇 밥을 위해 기꺼이 목을 꺽겠다는, 또한 누군가를 꼬여 넘기겠다는
의지 그래서 무엇을 그럴싸히 변명하겠다는 듯 넥타이는 달변의 긴 혓바닥을 닮았다 그것이 현란할수록 끌려가면서도 품위는 위장하겠다는 위장술, 혹은
저 밀림 속으로 누군가의 멱을 끌고 갔었던 따라서 진즉 교수대에 올랐어야 할 자가 제 목을 감추는 보호색일지도 모른다 잘 보라 또한 넥타이는
올가미를 닮았다 그것이 양말이 아니라서 목에 두르는 것은 아니리라 마지막 넥타이를 조이며 묻는다 죽을 각오는 되어 있는가(문학사상 2003.
2월호)
*넥타이를 오브제로 하여 일상적인 출근의 모습에서 죽을 각오로 사는 삶의 의미로 확대된 시다. 한 그릇 밥을 위해 기꺼이
넥타이를 목에 메고 거울을 보는 현대인, 변명과 위장술로 벌써 교수대에 올랐어야 할 목숨, 그 목을 은폐할 보호색을 찾아 걸고 오늘도 넥타이로
목을 조이는 모습에서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과 함께 죽을 각오로 사는 현대인의 비장함을 느끼게 한다
{시 해설 : http://board7.hanmir.com}
오브제란 미술에서의 정의와 같다고
보시면 될것 같습니다.
어떤 객관저인 의미나 물체로써 머무는 것이 아니고 원래의 용도 및 고유의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연상하거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 시의 해설에서 보듯이 넥타이는 목에 매는 악세서리로써의 기능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비애와 같은 것을 연상하게 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